
인공지능은 나의 읽기-쓰기를 어떻게 바꿀까 / 김성우 / 유유
그럼에도 기술 변화를 따라잡는 개개인의 역량은 강조되고 인공지능이 몰고 올 사회적 파장에 대한 숙의는 미미합니다. 인공지능이 평등과 다양성 나아가 사회정의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 새로운 기계와의 공존이 예술과 정체성을 어떻게 바꾸어 나갈지에 대한 논의는 이제 겨우 첫걸음을 떼었습니다. 인공지능을 둘러싼 윤리적 쟁점과 비판적 인공지능 리터러시에 대한 논의는 두터운 인공지능 활용서 끝에 마지못해 첨부한 반쪽 부록 신세입니다. 지식의 품질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인공지능 기반 콘텐츠 제작 완전 자동화’의 운영 노하우가 공유되고, 선거 캠페인에서 딥페이크가 판을 칩니다. ‘인공지능을 활용하면 슈퍼 휴먼이 될 수 있다’는 소셜미디어 포스팅의 단골 문구입니다. 사실과 조금씩 엇나가는 인공지능 생성 텍스트가 얼마나 유통되는지는 추산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생산성은 과정을 지우고 효율성은 가치를 압도하며 텍스트 생성 ‘마법’에 대한 경탄은 읽고 쓰는 노동의 기쁨과 슬픔을 가립니다. 되씹고 숙고하는 이는 느리고 어리숙한 사람일 뿐입니다. (p.22-23)
‘인공지능의 시대’라고 합니다. 이 선언에 부응하듯 지난 한 해에만 수백 권의 인공지능 관련서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교육도 기업도 미디어도 이 거대한 변화에 올라타지 못하면 도태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이 자꾸만 욱신거립니다. 우리는 언제 ‘나무의 시대’ ‘이끼의 시대’ ‘돌고래의 시대’ ‘미생물의 시대’ ‘어린이의 시대’를 선언한 적이 있었던가요? 빙하를 살리려고 세계 유수의 기업이 경쟁하고, 강·하늘·대지와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다루는 책이 하루가 멀다고 출판되고, 매체가 권리 잃은 이들의 목소리를 매일 앞다투어 전한 적이 있었던가요? 다양성·공존·형평성과 사회정의를 위해, 그 누구도 차별받거나 배제되지 않는 학교를 위해 사회 전반이 목소리를 높인 적이 있었던가요? (p.35)
하지만 어떤 기술도 한 시대를 온전히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특정 맥락과 참여자에 대한 고려 없이 무조건적 선택을 요구하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기술은 제작자의 ‘선한 의도’를 따라 확산되고 활용되지 않습니다. ‘인쇄술의 시대’가 문해력의 불균등을 해소하지 못했고, ‘웹 기반 교육의 시대’가 평등하고 정의로운 교육을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인터넷의 시대’라고 하지만 전 세계 80억 인구 중 50억 남짓만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으며, 그나마 안정적이고 자유롭게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인구는 이보다 훨씬 적습니다. 인터넷은 소통의 광장이기도 하지만 차별과 혐오·조롱과 비난의 아수라장이기도 합니다. ‘영상의 시대’가 열렸다고들 하지만 하나의 영상을 두고도 분열하고 서로를 비난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p.39-40)
노트에 연필로 글씨 쓰기·오로지 교과서와 전과로 공부하기·기계식 타자기로 과제 작성하기·워드프로세서와 인터넷 검색 활용하기·클라우드 기반 문서 작성기를 거쳐 지금에 당도한 저에게 생성형 인공지능은 매일 접하는 현실이며 연구와 강의의 대상이지만, 여전히 글을 읽고 쓸 때 가장 중요한 기술적 수단은 책과 논문·연필과 메모장·포스트잇과 워드프로세서 그리고 학술 데이터베이스입니다. 무엇보다 다양한 사람과의 만남과 대화·궁리와 논쟁 속에서 생각의 단초를 찾고, 영감을 얻고, 공부의 방향을 정하고, 이야기의 모양을 빚어냅니다. 산책에서 만나는 길고양이와 동네 천변의 오리 덕에 작은 평안을 얻지 못한다면 결코 계속 쓸 수 없었을 것이고, 정성과 노동으로 책과 영상을 엮어 내는 저자와 감독 들이 없었다면 좁디좁은 마음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며, 매일 마주하는 저녁 하늘이 주는 위로가 없었다면 하루를 맺고 다른 시간으로 진입하는 의례의 힘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읽고 쓰는 일은 저의 삶과 그 안의 모든 관계에 깊이 뿌리박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이 촘촘한 관계에 새로운 존재로 편입되었을 뿐, 저의 리터러시를 온전히 정의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어떠한 기술도 홀로 작동하지 않으며, 기술 또한 사람과 자연·행성과 우주를 연결하는 거대한 그물망을 이루며 진화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공지능 또한 기존의 행위자들을 완전히 대체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으며,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 및 비인간 주체들의 존재 방식·상호작용의 성격과 패턴·인간의 감정과 미감·윤리적 태도·자본과 노동이 맺는 관계·과학기술을 비롯한 학문장의 작동 방식 등을 조금씩 변화시킵니다. 그런 변화 속에서 누군가는 승승장구하지만 누군가는 ‘뒤처지며’ 누군가는 비인간적인 노동으로 내몰립니다. 누군가는 위안을 얻겠지만 누군가는 더욱 깊은 고립감과 무기력함을 느낍니다. 모두를 위한 인공지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공지능이 만드는 삶의 지형은 결코 평평하지 않은 것입니다. (p.40-42)
하지만 ‘문’이 활자 매체를 의미한다는 점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유네스코의 정의가 나오기 수년 전인 1996년, 저명한 리터러시 학자들로 구성된 뉴런던그룹(New London Group)은 전통적인 텍스트 중심 문해력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지적하며 ‘다중문해력’(multiliteracies)의 개념을 제안했습니다. 이들은 변화하는 사회문화적·기술적 환경에서 텍스트와 같은 단일 양식 미디어를 기반으로 한 문해 교육은 명백한 한계를 지니며, 언어·시각·청각·제스처·공간 등의 의미 디자인 요소를 포함한 다중 양식 의미 생성을 교육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참고로 ‘multiliteracies’는 의미의 번역 없이 음차하여 ‘멀티리터러시’로 표기하기도 합니다.
이는 리터러시 교육학술단체인 국제리터러시협회(ILA)가 현재 사용하는 정의와 맞닿아 있습니다. ILA는 리터러시를 “다양한 분야와 맥락에서 시각·청각 및 디지털 자료를 사용하여 찾아내고·이해하고·해석하고·만들어 내고·계산하며·소통하는 역량”으로 정의합니다. 이 정의는 유네스코의 정의와 여러 역량을 공유하지만, 매체에서만큼은 현격한 차이를 보입니다. “시각·청각 및 디지털 자료”를 모두 포괄하기 때문입니다. 문해력의 정의에 글뿐 아니라 음성언어 및 디지털 자료를 명시함으로써, 문해의 대상은 사실상 거의 모든 매체로 확장됩니다. (p.46-47)
여기서 ‘해’를 둘러싼 논의의 두 축 모두에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해력을 표준화 시험 점수로 이해할 경우 삶의 다양다종한 관계와 상황을 포착하는 데 실패합니다. 반대로 문해력을 일상의 언어 사용에 대한 주관적 판단의 도구로 동원할 경우, ‘문해력’이라는 기표가 갖는 사회문화적·개념적 가치가 땅에 떨어집니다. ‘문해력’이라는 개념을 동원하여 반문해적인 행위를 수행하게 되는 셈입니다. 그렇기에 추상화되고 표준화된 문해력과 개인의 경험에 기반하여 판단되는 문해력 모두 명백한 한계를 지닙니다. 문해력을 시험 안에 가둘 수 없는,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발현되는 역량이라고 이해한다면, 몇 개의 숫자로 그 총체를 말할 수도, 한두 단어에 대한 지식으로 손쉽게 환원할 수도 없습니다. 결국 ‘해’는 글과 말의 내용을 파악하는 것을 넘어 시간의 흐름·대화 상대의 의도·상황의 다양한 측면·제도와 권력의 영향력 등을 다각도로 살피는 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p.49-50)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미래에 대한 준비’의 중요성은 끊임없이 과장되고 ‘과거에 대한 망각’은 은밀히 조장되는 사이에 ‘현재에 대한 방기’가 자라납니다. 그렇게 지금을 비판적 사유가 존재하지 않는 진공상태로, 오로지 미래를 준비하려고 동분서주해야 하는 분투와 경쟁의 장으로 만드는 힘이 현재를 지배합니다. 이 점을 직시한다면, 인공지능을 둘러싼 논의는 막연한 미래에 대한 낙관이나 절망이나 기술이 결정하는 사회에 대한 순응이 아니라, 기술적 변화 속에서 어떠한 삶의 양식을 발명할 것인가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질문은 ‘인공지능이 읽고 쓰는데 나는 무엇을 하나?’가 아니라 ‘읽고 쓰는 인공지능이 등장한 지금, 나 자신의 읽기와 쓰기를 어떻게 재발명할 것인가?’가 되어야 합니다. 리터러시는 거창한 명분이나 특정한 기술의 활용이 아닌 각자의 삶 속에서 그 의미와 가치를 갖는다는 것, 미래는 언제나 현재의 축적이라는 사실, 그리하여 인공지능과 함께하는 미래는 수많은 사람의 일상적 실천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p.60)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을 ‘인공지능’이라는 단수형 명사로 쓰는 일은 때론 위험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방대한 학문 분과의 이름으로도 쓰이고, 특정한 알고리즘 또는 특정한 애플리케이션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같은 인공지능 애플리케이션이라 하더라도 사용자 데이터를 축적함에 따라 같은 프롬프트에 따라서도 사뭇 다른 결과물을 내놓기도 하지요. 인공지능 개발에 투여되는 자본의 양 또한 천차만별입니다. 지금 상용화되어 서비스되고 있는 챗GPT나 클로드와 같은 인공지능은 엄청난 노동 및 기술자본의 투여 나아가 생태계 파괴와 전력 소비를 수반합니다. 이와 다르게 개인의 랩톱에서 무리 없이 구동될 수 있도록 디자인된 소규모 인공지능 모델도 있습니다. 많은 모델은 심각한 저작권 침해의 위험을 무릅쓰고 제작되지만, 어도비의 파이어플라이와 같은 모델은 자사가 소유한, 지식재산권 침해의 위험이 없는 데이터를 사용합니다. 이런 다양한 인공지능 서비스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거대한 네트워크를 이루며 협력하고 갈등하면서 진화합니다. 무엇보다 개개인이 인공지능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느냐에 따라 그 성격과 특성이 변합니다. 그렇기에 인공지능 간의 차이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인공지능은 추상어이고 개념어일 뿐, 실제 세계에서 작동하는 인공지능은 언제나 ‘artificial intelligences’ 즉 ‘인공지능들’이라는 복수로 존재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p.109-110)
참고 문헌을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타인의 저작을 폭넓게 검토한 후에야 쓰기를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을 고수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타인의 글을 하나하나 읽고 무엇을 배울지, 저자의 핵심 의도가 무엇인지, 자신의 글에 어떻게 녹일지를 궁리하는 동안 우리는 타인의 경험과 지식·생각과 마음을 탐험한다는 점입니다. 자기 생각의 볼륨을 줄이고, 순간순간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 괄호를 치면서, 다른 이들의 생각·철학과 과학·문학과 예술의 앙상블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새로운 읽기-쓰기의 습속이 이런 가치의 소거를 어떻게 보완하며 더 나은 가치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우리는 고민해야 합니다. (p.193-194)
평생 읽는 일이 부담으로 느껴지거나 읽고 나면 평가당하고 순위가 매겨지는 상황에 처한 많은 이들은 대화이고 독백이며 추억이고 상상이며 저항이자 휴식인 읽기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축적되면서 읽기는 반드시 가시적 성과로 이어져야 하는 일이 되어 버립니다. 휘몰아치는 속도를 잠재우고 반짝이는 눈으로 세계와 대면하고 자신을 돌보며 위로하는 읽기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집니다. 기쁨과 거리가 먼, 평화보다 고통에 가까운 읽기를 굳이 찾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물론 저도 논문을 쓰려고 인용한 모든 논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진 않습니다. 일부 논문은 초록과 키워드·몇몇 섹션만 읽고 본문에 녹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러 논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면서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기도 하고, 그 가운데 논리의 흐름을 세심하게 읽어 내기도 합니다. 이는 요약본을 읽고 대략의 정보를 파악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선사합니다. 소설을 읽어 내는 경험과 스터디 노트를 훑어보는 것·드라마 전체를 시청하는 것과 한 시간 요약본을 2배속으로 보는 것은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텍스트와 영상에 담긴 생각의 결·등장인물의 복잡다단한 감정을 찬찬히 따라가지 않을 때 잃어버리는 것들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p.198-199)
챗GPT와 관련한 문헌 및 소셜미디어의 반응을 살피며 자주 접한 키워드는 단연 ‘생산성’입니다. 거대언어모델은 업무 시간을 줄이고, 잘 활용하면 산출물의 품질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약점에 대한 이야기도 종종 들리지만, 이는 알고리즘의 개선으로 해결될 거라고 ‘믿어 버립니다.’ 실제 글쓰기 영역에서 수행된 한 연구에서 챗GPT는 중급 작문 과업에서의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키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결과만 놓고 보면 챗GPT는 생산성을 높이고 뛰어난 글쓰기 역량을 갖춘 이들과 상대적으로 부족한 이들 간의 불평등을 감소시킬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산성의 증대가 삶의 여유·노동환경의 개선으로 이어질까요? 개개인의 수월성에 방점을 찍지만 각자의 정체성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 교육 관행에 새로운 틈을 만들고, 과도한 경쟁을 완화시키며, 학습자의 삶이 교육과정에 적극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새로운 시공간을 창출할까요? 이런 논점을 치열하게 논의하지 않는다면 교육은 ‘기술-능력주의’의 덫에 빠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술을 잘 아는 사람은 능력 있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사회적으로 더 나은 대우를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며, 이런 상황을 비판하는 사람은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불만을 늘어놓는 사람이라 단언하게 되는 것이죠. 이는 나아가 ‘인공지능이 대세’라는 담론을 자연스럽게 확산하고, ‘시대에 걸맞은’ 역량이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논의와 정책 제언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미 이런 조짐은 여러 곳에서 감지됩니다. (p.203-204)
인공지능이 언어 생산을 비약적으로 가속화하지만 언어의 이해를 가속화하진 못한다는 점은 물적이고 기술적인 조건이 인간의 몸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숙고해야 할 결정적 이유입니다. 인공지능 기술의 생성 능력을 오로지 자본주의적 생산성으로 치환할 때, 우리는 각자의 몸이 세계를 인지하고 소화하고 숙성시키는 속도에 무감해집니다. 글을 읽는 동안 인간은 겉으로 보기에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지만, 신중한 독자는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저자가 제시한 여정을 따르면서도 이탈하고 행간을 자신의 경험과 의견·감정과 예측으로 채웁니다. 글 읽기가 촉발하는 과정은 물성을 가진 텍스트로 외화되지 않으나 몸 안에서 엄연히 또 시끄럽게 진행됩니다. 이런 이유에서 저는 리터러시 교육이 텍스트 생산의 속도에 텍스트 이해의 속도를 맞출 수 있다는 환상을 좇는 경향을 비판합니다. 기술의 가속을 리터러시 교육의 장에 그대로 이식하려 할 때 읽고 쓰는 몸이 만들어 내는 내면의 풍경은 더욱 삭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p.206-207)
이 같은 사고실험에서 얻을 수 있는 프롬프트 기반 글쓰기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줍니다.
첫째, 프롬프트는 기존의 경험과 지식이 농축되어 만들어진다. 단순한 프롬프트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둘째, 기존의 지식에는 특정한 영역에 대한 내용 지식뿐 아니라 글쓰기의 구조와 전개에 대한 수사적 지식 또한 포함된다. 즉 특정 영역에 특화된 지식과 글쓰기에 대한 일반 지식이 프롬프트 작성 원리와 유기적으로 결합될 때 좋은 프롬프트가 나온다.
셋째, 특정 프롬프트의 한계를 인지하는 경우,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프롬프트로 결과물을 도출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이 만든 프롬프트를 수정·보완할 수 있다.
넷째, 한 번의 프롬프팅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을 확률은 매우 낮다. 프롬프팅은 단계적으로 이루어질 때 더욱 나은 방향의 아웃풋을 얻을 확률이 높다.
다섯째, 프롬프트에 대한 응답으로 아웃풋이 주어졌을 경우, 그것이 최선인지 단숨에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아웃풋 평가는 기존의 지식과 경험·안목에 기반을 둘 수밖에 없다.
여섯째, 아웃풋을 다시 인공지능에게 제시하고 이를 보강해 달라고 요청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웃풋에 대한 최종 판단은 필자의 몫이다. 나온 텍스트를 꼼꼼히 읽어 가며 다양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일곱째, 필자는 프롬프트와 아웃풋만을 오가며 글을 쓰지 않는다. 필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글쓰기 과제에 대한 다각적인 이해에 기반해 생성형 인공지능과 협업한다. 여기에는 강사의 기대에 대한 이해·전체 글의 분량과 내용 요소 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특정 주제 영역을 깊이 다루는 것이 필요한지에 대한 판단·서론 본론 결론의 분량에 대한 추산·글의 시작과 마무리에 대한 그림·개인적 경험이나 목소리의 반영 여부에 대한 판단 등 다양한 요인이 개입된다.
여덟째, ‘원하는 결과’가 도출되었다고 해도, 자신이 원했던 결과가 최선인지 물을 수 있는 사람이 더 풍부한 프롬프트를 생성하고 더 침착하게 ‘대화’를 엮어 갈 수 있다. 몇 번의 프롬프트만에 도출된 결과물에 ‘그래 이거야!’를 외치는 사람이라면 인공지능 챗봇의 잠재력을 충분히 확인할 수 없다. 결국 프롬프팅을 통한 글쓰기에서도 지식과 경험·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p.243-245)
“AI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질문을 던지는 역량”이라는 말이 계속 마음에 걸립니다. 인공지능을 단지 도구로 보는 관점에 극히 비판적이지만, ‘도구로서의 인공지능’에 방점을 찍더라도 원하는 산출물을 얻는 데는 좋은 질문을 던지는 능력을 넘어 산출된 응답을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좋은 질문을 던지는 힘은 깊이 관찰하고 경청하고 읽는 노동의 축적에서 나옵니다. 이를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가 제시한 다음의 예를 통해 살펴봅시다.기자들은 “게이 결혼에 찬성하십니까?”라고 묻는 대신에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주 정부가 주민을 상대로 누구와 결혼해라, 하지 말아라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렇게도 물어보아라. “자기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할 자유가 법 앞의 평등한 권리의 문제라고 보십니까?” 또는 “결혼이 ‘평생의 서약을 통한 사랑의 실현’이라고 보십니까?” 또는 “사랑하는 두 사람이 공식적으로 평생을 서약하고 싶어 하는 것이 사회에 도움이 될까요?” 도덕에 기초한 프레임 구성은 우리 모두가 할 일이다. 특히 기자들의 임무는 더욱 막중하다.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데 필요한 역량을 나열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 조지 레이코프
- 윤리에 대한 명확한 관점
- 프레임·은유·개념 네트워크·수사적 함의 등에 대한 이해
- 순간순간 변하는 담론의 흐름에 대한 비판적이고 민감한 평가
- 질문하는 이와 답변하는 이가 처한 사회문화적·정치적 위치
- 질의와 응답을 보고 듣는 시민의 성향과 관점
조지 레이코프의 질문 전략이 그냥 나오지 않았음은 분명합니다.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정답을 뽑아내는 프롬프트를 넘어 가치와 임팩트를 담은 질문을 던지려면 풍부한 지식과 경험 나아가 한 가지 주제에 대한 집요한 관심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프롬프트 가이드라인 문서에 나온 몇몇 공식과 예시를 외운다고 될 일이 아니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일은 자신·상대·이슈·언어 그리고 청중을 동적으로 정렬하는 행위이며, 자신을 사회적·윤리적·과학적 지평에 위치시키는 일이기에 자신과 상대·언어와 정치 담론의 역동적 엮임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이를 평가하는 대중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p.260-262)
제가 언어교육과 기술의 관계에 대한 강의 첫 시간에 가장 강조하는 것은 기술을 문제에 대한 해법(solution)으로 보지 말고 삶과 관계를 바꾸는 중재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술을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보는가 아니면 사회현상의 특정 측면을 역동적으로 바꿀 중재 도구로 보는가는 특정한 기술을 이해하려는 여정에서 갈림길과도 같습니다. 특정한 문제는 기술적 선택에 의해 완전히 ‘용해’되어 사라지지 않습니다. 기술에 의해서 변화한 맥락은 그 내부에서 이전과는 다른 문화와 소통 방식·갈등과 가능성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기술 자체를 신뢰하는가 아니면 기술을 운용하는 사람들의 삶과 문화 속에 담겨 있는 기술의 모습을 그려보는가에 따라 기술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바뀔 수 있습니다. (p.302-303)
TED를 책임지고 있는 크리스 앤더슨에 따르면 강연에서 청중은 전형적으로 두 가지 인지적 아웃풋을 접합니다. 두 가지 채널을 통해 연사의 발표를 경험하게 되는데요. 하나는 시각 다른 하나는 청각입니다. 파워포인트와 같은 별도의 시각 자료가 없을 때 청중들의 주의는 하나의 대상, 즉 발표자에게 집중됩니다. 하지만 파워포인트가 등장하는 순간 그들의 시선은 파워포인트로 향하고 귀로는 강사의 설명을 듣게 됩니다. 인지 채널이 둘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훌륭한 프리젠테이션이라면 두 채널의 정보가 유기적으로 통합됩니다. 말과 슬라이드가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협력하며 서로의 강점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번 수업에서는 모든 학생들이 나의 프리젠테이션에 빨려 들어오는 듯했다’는 느낌과 일맥상통하는 상황이지요.
하지만 일부 학생은 교사의 말에 집중하기보다는 슬라이드의 내용을 하나하나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슬라이드는 정적이며 수동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학생들에게 읽기라는 반응을 촉발시키기 때문입니다. 기술은 그저 수동적인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상황과 인지를 주체적으로 바꿉니다. 의자가 옷가지를 끌어당기는 힘보다 훨씬 강한 영향을 미치지요. 파워포인트 중심 수업을 듣는 학생의 머릿속에서는 슬라이드의 정보와 강사의 말을 실시간으로 싱크하려는 시도가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이런 경향은 텍스트로 가득한 슬라이드에서 극대화되고, 학생들이 슬라이드를 바쁘게 훑어보는 동안 발표자의 말은 온전히 소화되지 못합니다. (p.309-311)
때로는 슬라이드에 과도하게 의존하면서 수업을 대충 흘려듣기도 합니다. ‘나중에 파워포인트 보고 공부하면 되지 뭐’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꼭 학생에게 국한된 현상은 아닌 듯합니다. 교사 연수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나면 “파워포인트를 받을 수 있느냐”고 질문하는 분이 종종 있거든요. 심지어 줌 강연이 끝나고 나서 자신이 캡처하지 못한 슬라이드를 천천히 차례대로 띄워 달라는 무례한 청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분들이 발표 자료를 다시 보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정보를 모으는 데 관심이 있을 뿐, 현장에서 발표의 의미를 곱씹어 소화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 거죠. 정보에 다시 접근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온전히 강의에 몰입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발표자는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하는 일을 멋진 슬라이드 만들기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의 특성에 맞추어 주어진 시간에 청중의 주의의 흐름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핵심 내용을 체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내용과 시각 자료를 준비하는 게 아니라 시간의 흐름 위에서 청중의 주의를 배치하는 일이 핵심입니다.
이를 디자인의 용어를 빌리자면 사용자 인터페이스(UI, User Interface)의 문제가 아니라 사용자 경험(UX, User eXperience)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건축이 단지 물리적 빌딩이 아닌 인간과 구조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이해되듯이, 프리젠테이션은 정보의 전달이 아닌 지각과 경험으로 이해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좋은 프리젠테이션을 하려면 슬라이드를 통해 주요한 정보를 차례로 커버하기보다는 내용이 유기적으로 녹아든 이야기를 준비해야 합니다. 자신을 정보의 전달자로 보기보다는 청중과 이야기를 나누는 스토리텔러로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의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발표의 내용을 슬라이드의 내용으로 축소해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슬라이드는 주요한 재료이긴 하지만 발표를 듣는 최종 목표가 아닙니다. 중요한 건 프리젠테이션을 통해 자신의 해석과 관점을 빚어내는 일이지요. (p.311-313)
노벨상을 수상한 경제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폴 크루그먼은 ‘(교육을 통해 얻은) 지식은 권력이 아니’라고 못 박습니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결코 교육 체제 내에서 전달되는 지식으로 해소될 수 없으며, 권력의 실질적 재분배로만 해결 가능하다는 주장입니다. 같은 논리로 기존의 불평등한 사회경제적 구조와 그로 인해 야기되는 교육의 불평등이라는 문제에 천착하지 않는 혁신이라면 수십·수백 개의 무크 플랫폼이 생긴다고 해도 교육이 근본적으로 개선될 리 없습니다. 인공지능은 과연 다를까요? (p.337-338)
인공지능의 어두운 측면은 그저 받아들여야 할 숙명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술은 언제나 개인·집단·사회 나아가 행성과 함께 엮이면서 진화합니다. 따라서 이 각각의 주체가 어떤 저항을 조직하고 실천하는가, 어떠한 비판을 수행하는가에 따라 기술의 발전 방향과 속도는 바뀔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널리 언급되는 사례는 아마도 19세기 초반 영국에서 일어난 러다이트 운동일 것입니다. 흔히 러다이트 운동에 ‘기계 파괴 운동’이라는 단순한 꼬리표를 붙이고 파괴적 실천만을 기억하지만, 실제 러다이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노동자들은 당시 자신이 처한 열악한 상황에 주목했습니다. 광범위한 실업과 경제 상황의 격변 속에서 빈곤 가구는 늘고 먹을 것은 늘 부족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플레이션 또한 극심했지요. 이 상황에서 노동자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려면 기계를 파괴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기계 파괴 자체가 목적이었다기보다는 사회경제적 형평성과 분배의 정의를 겨냥한 운동이었지요. 그렇기에 러다이트 운동을 일부 노동자의 과격한 파괴 행위로 폄하하는 것은 기술과 인간·노동의 관계를 너무나도 납작하게 이해하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회경제 구조 속에서 새로운 기술이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그런 관계 맺기를 긍정적으로만 묘사하면서 밀어붙이는 개인과 집단은 누구인가, 그로 인해 피해를 입고 배제되는 집단은 누구인가를 명확히 이해하고 이에 맞는 저항적 실천을 궁리하는 일입니다. (p.385-386)
결국 인공지능이 우리에게 유용한 ‘지능’으로 기능하는 데 필요한 방대한 데이터는 수많은 개인과 조직이 오랜 기간 만든 것입니다. 거대 언어 모델 개발사들은 이들 조직과 개인에게 데이터 사용에 관한 법적 허락을 구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행위가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웁니다. 결국 모두에게 좋은 일을 하고 있으니 불만을 감수하라는 것이지요. 나오미 클라인은 「환각은 인공지능이 아닌, 그들을 만들어 낸 이들이 범하고 있다」는 제목의 『가디언』 칼럼에서 인공지능이 기후 위기를 해결하고 현명한 거버넌스를 제공할 것이며, 거대 기술 기업은 믿을 만하다는 생각, 나아가 인공지능이 우리 모두를 고된 노동에서 해방할 것이라는 예측 모두가 철저한 환각이라고 주장합니다. 나아가 인공지능 개발을 이끄는 거대 IT기업의 전략을 “인류 역사상 가장 방대하고 치명적인 도둑질”이라 표현하면서, 역사상 가장 많은 부를 축적한 글로벌 대기업들이 “디지털 형태로 존재하는 인간 지식의 총합을 일방적으로 탈취하여 독점 제품 안에 가두어 두는 것”이라고 일침을 날립니다. (p.401)
기계에 의해 생성된 오탈자 없는 문장과 흠잡기 힘든 어휘와 문법·그럴듯한 스타일이 에토스를 정립하려는 노동과 정성을 압도하는 세계에서 더 나은 삶과 사회를 상상하는 능력은 조금씩 부식됩니다. 텍스트를 벼리는 일은 자신과 대면하는 것이고, 타인과의 관계를 상상하는 것이자, 글을 읽고 써내는 일의 사회문화적 가치를 고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 낸 텍스트에는 수많은 텍스트의 파편이 들어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생성된 텍스트에 자신을 던지지 않습니다. 인공지능에 의해 생성된 텍스트는 수많은 연원에서 유래하고 때로 유려함을 자랑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걸고 윤리적으로 헌신하는 필자는 없습니다. 청산유수의 텍스트는 분명 인간의 언어이지만 그 안에는 인간이 없습니다. (p.418)
잠 못 드는 밤이 아니더라도, 목적 없이 읽고 싶은 한두 페이지를 발견하기 위하여 수많은 책들을 꺼내어 쌓기만 하는 고독한 밤을 어떤 사람들은 알 것이다. 지식을 넓히거나 지혜를 얻거나 교훈을 찾는 따위의 목적들마저 잠재워지는 고요한 시간. 우리가 막연히 읽고 싶은 글, 천천히 되풀이하여 그리고 문득 몽상에 잠기기도 하면서, 다시 읽고 싶은 글 몇 페이지란 어떤 것일까?
(p.445)
― 장 그르니에
챗GPT와 다양한 인공지능 도구들이 ‘더 완전한’ 영어 텍스트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들은 어쩌면 애초부터 ‘완벽한 언어’라는 환상을 거의 모든 이들에게 주입한 이들의 또 다른 승리일 뿐일지도 모릅니다. 이 상황에서 느리고 서툴며 불완전한 이야기·서로의 눈빛과 손짓에 귀 기울이는 태도·문법성을 판단하지 않아도 심장을 쥐락펴락하는 말글 따위가 더 이상 발붙일 수 없는 교육으로 진입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종종 심란합니다. 개성은 묻히고 변이는 제거되고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올 수밖에 없는 부족함은 열등한 결핍으로 치부되는 상황에서 기술이 사실상 전지전능한 표준의 권력을 얻게 되는 셈이니까요.
제가 몸담고 있는 영어교육의 예를 들었지만 외국어교육뿐 아니라 국어교육에도 적용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언어는 소통의 도구이며, 그 도구의 조건은 문법성·일관성·논리성·다양한 어휘문법적 자질의 동원·그 모든 것들을 포괄하는 표준의 체화라는 주장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사회와 교육의 변방으로 내몰았는지 모릅니다. 문법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문장을 쓰거나 그럴듯한 어휘를 자유자재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낮은 문해력을 드러내는 부끄러운 일이라는 고정관념이 많은 학습자들을 침묵 속에 가두었습니다. 지역 방언·‘어눌한’ 말투·한국어 학습자의 ‘우스꽝스러운’ 억양을 ‘교양 있는 서울 사람들의 말’과 대비시키며 차별하고 배제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처럼 표준적인 리터러시를 권력 삼아 타자를 차별하고 배제하는 것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어색한 어휘와 문법을 가뿐히 넘을 수 있는 역량이 있습니다. 조금 ‘틀린’ 발음을 이해하고 마음을 다해 소통하려는 정성이 있습니다. 누구의 언어든 부족함을 안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부족은 부끄러워하거나 비난받을 것이 아니라 삶의 필수불가결한 구성 요소라는 것 또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금 느리더라도 기다려 줄 수 있고, 더디 가더라도 함께 걸을 수 있습니다. 답답해하며 상대방을 낮잡아 보려는 자신의 태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반성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표준화된 교육이, 리터러시를 철저히 경쟁의 도구로 만드는 제도가, 이들을 떠받치는 기술의 권력이 다른 이해와 실천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p.464-466)
이제 우리는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의심의 여지 없이 역사상 읽히지 않는 텍스트가 가장 많이 생산되는 시대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약간의 교육만 받으면 누구든 텍스트를 생산할 수 있다는 글쓰기 역량의 민주화에는 분명한 장점이 있지만, 그 이면에는 그 누구의 눈길에도 스치지 못하고 허공에 흩어지는 텍스트의 폭발적 증가가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생성형 인공지능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을 선별하고 일련의 원칙에 따라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 생성형 인공지능이 초래하는 행성의 파괴·자원의 추출·대량의 전력 소비·광범위한 차별과 감시 등이 멀게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다른 방향에서 이렇게 질문해 보면 어떨까요?
‘생성한 텍스트를 나조차 읽지 않는다면, 그것을 생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쓴 사람이 읽지 않는 텍스트를 누군가에 의해 쓰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생성은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는 뜻일텐데, 그 새로움이 그 누구의 마음에도 가 닿지 못한다면 즉 그 누구에게도 새로움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을 생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은 일일까?’ (p.471-472)
다소 긴 여정의 끝에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텍스트의 폭발적 증가에 압도되지 않고 형식적 현란함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더 좋은 텍스트를 더 깊고 찬찬히 읽어 내는 데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함께 공부하고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실 수 있는 배움의 벗을 찾아야 합니다. 비약적으로 증가한 텍스트에 휩쓸려가며 세줄 요약이라는 탈출구를 찾기보다는 특정 분야의 지식을 꿰뚫을 수 있는 양서를 읽는 일이 필요합니다. 읽을 논문이 많아지니 최대한 많은 논문을 초록과 요약본으로 읽어야겠다는 조바심에 굴복하기보다는 자신의 분야에서 모범이 될 만한 글을 집요하리만치 꼼꼼하고 분석적으로 또 굳건히 반복해서 읽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읽고 쓰는 일이 동전의 양면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한다면 글쓰기만 생성적인 것이 아니며 글 읽기 또한 생성적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생성(generation)을 표현(expression)의 영역에 국한하는 것만큼 반생성적인 사유도 없습니다. (p.474-475)
댓글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