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 Read Code

 

잘못된 단어 / 르네 피스터 / 문예출판사

 

 ‘문화적 전유’는 옛날부터 이미 껄끄러운 주제였다. 이 개념을 끝까지 파헤쳐 들어가면 금세 복잡한 질문들에 직면한다. 중국인 피아니스트가 바흐를 연주해도 될까? 영국 요리사가 인도 카레 요리를 하면 문화적 오만이 아닐까? 매년 수천에 달하는 일본인, 이탈리아인, 북부 독일인이 뮌헨 전통 의상인 가죽 반바지에 하펄 구두를 신고 옥토버페스트에 오면, 뮌헨 사람은 자기 문화를 방어하지 않아도 될까? 레게 머리를 둘러싼 다툼도 깊이 들어갈수록 점점 더 복잡해진다. 아즈텍 승려들 사이에 이미 그런 헤어스타일이 유행했었고, 오늘날 일부 힌두교 승려들도 그런 머리를 한다. 그러므로 레게 머리가 오로지 아프리카계 미국인만의 문화라고 주장하기 어렵다.

 

 현재 거의 일주일에 한 번은, 감수성이 부족하거나 후진적이거나 소수자에게 상처를 준다고 여겨지는 의견을 냈다는 이유로 교수가 정직당하거나 초청 연사가 거부당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마르쿠제는 민주주의의 근간인 표현의 자유를 본질적으로 지배자의 손에 들린 곤봉이라고 보는 견해의 선구자였다.
 마르쿠제가 자신의 절대적 편파성을 감추지 않은 것만큼은 인정해줘야 한다. 그는 “후진적이고 억압적인 의견에 베푸는 관용을 체계적으로 철회해야 한다”고 썼다. 마르쿠제의 주장을 끝까지 따라가면,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린든 존슨뿐 아니라 그의 적수였던 배리 골드워터 역시 자격을 박탈했어야 마땅하다. 존슨은 베트남전쟁을 지속하여 군국주의자로 통했고, 골드워터는 미국 남부의 인종차별을 끝내기 위해 제정한 ‘1964년 민권법’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푸코의 책에서 핵심 개념은 ‘권력’이다. 푸코의 이론에서 권력은 개별 지배자가 가진 힘이 아니다. 권력은 독재자 또는 불운한 다미앵에게 아주 끔찍한 형벌을 내린 루이 15세의 손에 있지 않다. 권력은 사회에 내재해 있고 사회의 모세혈관을 타고 흐른다. 푸코에게 권력과 지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없다. “다른 권력, 다른 지식.”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자유롭게 살도록 격려하는 계몽주의는, 푸코가 보기에 새롭지만 보다 효과적인 지배 수단이다. 현대사회라는 파놉티콘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데 봉사하는 과학이 바로 계몽주의에서 나왔다. 의회 민주주의와 시민 법치국가의 등장 역시 푸코에게는 사회적 진보가 아니라 새로운 권력 형성이다. “실질적이고 신체 중심적인 규율이 형식적이고 법률적인 자유의 기초와 기반을 다졌다.”

 

 미국에 인종차별적 법원 판결이 있었음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가장 악명 높은 판결은 분명 대법원이 루이지애나 철도의 흑인과 백인 분리를 정당하다고 판결하여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향한 조직적 차별을 합법화한 1896년 플레시 대 퍼거슨 재판이었다. 그러나 비판적 인종 이론 대변자들은 여기서 미국 법이 과거의 실수를 버리고 앞으로는 모든 시민에게 평등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지 않고, 오히려 과거의 죄를 씻기 위해 새로운 편파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상처를 주는 말》에서 새로운 편파성이 무엇인지 설명된다. ‘피해자 관점’을 바탕으로 표현의 자유를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정의를 위해 법학 교수 마리 마츠다는 앞으로 처벌해야 할 ‘혐오 발언 표준 목록’을 작성했다. 그러나 마츠다의 주장에서 진짜 핵심은 모든 사람이 ‘혐오 발언’에서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역사적으로 억압된 집단(그러니까 미국의 경우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만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츠다는 자신이 이런 주장을 통해 법적 진흙탕으로 들어선다는 사실을 명확히 했다. 마츠다는 자신의 제안이 1950년대처럼 마녀사냥을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당시 수백 명의 예술가, 배우, 공무원이 공산주의 사상에 은밀히 동조했다는 이유로 직장을 잃었다. 마츠다가 묻는다. “어떻게 하면 새로운 매카시즘 시대를 소환하지 않고 인종차별적 혐오 발언 검열을 주장할 수 있을까?”

 

 이 목표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몇 년 전부터, 특히 미국 대학들에서 잘 드러난다. 마츠다는 이를 위해 《상처를 주는 말》에서 특히 엄격한 언어 규정을 요구했다. 마츠다의 글에는 나중에 미국 대학의 분위기를 급진적으로 변화시킬 모든 것이 반영되어 있다. 이를테면 소외계층이 특별한 보호를 받아야 한다, 정서적으로 혼란을 겪지 않도록 학생들을 보호하는 것이 대학의 임무다, 열린 논쟁과 활발한 의견 교환이 학생들의 삶에 유익하기는커녕 오히려 트라우마를 남긴다, 특별한 보호를 요구하는 것 역시 학생의 권리다 등등. 당시 이런 말이 아직 유행하지는 않았지만, 공개 토론을 위험으로 선언하고 예민한 영혼을 보호하기 위해 ‘트리거 워닝(trigger warnings)’이 적힌 고전 문학만 읽게 하는 등 미국 대학들이 점점 더 ‘안전한 공간’으로 바뀌는 추세에 확실히 마츠다의 글이 일조했다.
 최근에 ‘혐오 발언’ 또는 ‘상처를 주는 말’의 범위가 점점 더 넓어졌다. 그동안 수많은 미국인이 언어 규정을 실제로 위반했거나 위반했다는 의심을 받아 직장을 잃었다. 허용 한계선이 너무 빠르게 바뀌어서 선의를 가진 사람들조차 거의 따라잡을 수가 없다. 2020년 12월 시카고 일리노이대학 법학 교수인 제이슨 킬본이 그랬다. 킬본은 직장 내 차별을 다루는 과제를 학생들에게 주면서 한 여성이 직장 동료에게 언어적 모욕을 당한 사례를 제시했다. 이때 킬본은 모욕적 욕설을 그대로 쓰지 않고 “n……”과 “b……”로 축약했다. 그리고 각주를 달아 이것이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여성을 지칭하는 비속어”라고 적었다.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적 욕설을 인용할 때 이렇게 축약하는 것은 그때까지 대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일반적인 방식이었다. 그러나 법학과 흑인대학생회는 축약된 “n……”을 보기만 하는 것도 “정신적 테러”라고 항의하며 4쪽 분량의 편지를 트위터에 올렸고, 대학은 얼마 지나지 않아 킬본의 임시 정직을 결정했다.

 

 크렌쇼가 말하는 교차성은 다양한 차원의 차별이 있음을 의미한다. 직장에서 한 여성이 남성보다 연봉이 낮을 수 있다. 만약 이 여성이 흑인이라면 어떻게 될까? 레즈비언이라면? 또는 장애인이라면? 크렌쇼의 사상은 한마디로, 다양한 차원의 차별이 서로 교차하고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차성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차별 구조에 내재하는 계급을 보여주는 안경과도 같다. 예를 들어 백인 이성애자 남성은 백인 동성애자 남성보다 특권이 더 많다. 동성애자 백인 남성은 동성애자 흑인 남성보다 특권이 더 많다. 이런 식으로 목록은 끝없이 이어지고 세분화될 수 있다.
 크렌쇼는 “정체성 정치의 포기는 정치적 권력 도구를 섣불리 버리는 것이고, 정체성 정치는 사회적 권력 강화의 원천”이라고 썼다. 크렌쇼는 피부색으로 자신을 정의하는 사람(“나는 흑인이다”)과 그것을 도외시하는 사람(“나는 우연히 흑인이 된 사람이다”)을 구별하는데, 두 입장 모두 나름의 정당성이 있지만 정치적 변화는 전자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역사적으로 이 지점에서, 권리를 빼앗긴 집단에게 가장 중요한 정치적 저항 전략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버리고 파괴하는 대신 점유하고 방어하는 것이어야 한다.” 크렌쇼의 아이디어에서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부분은 이것이 완전히 새로운 형식의 정치적 행동주의의 기반을 놓는다는 점이다. 전통적 민권운동의 관심사가 평등(모든 사람이 똑같은 권리를 누리는 소망)이었던 반면, 교차성 이론은 차별의 역전을 역설한다. 이것은 피억압자가 그들의 억압자에 대항하여 취할 수 있는 특별 요구의 원천이 되었다.

 

 2020년 4월에 좌파 성향 일간지 〈타츠〉가 새로운 편집장 세 명을 소개했다. 모두 여성이었다. 그 직후에 작가 헨가메 야그후비파라가 〈타츠〉의 한 칼럼에서 경찰을 “쓰레기”라 부르며 매립지로 보내자고 썼고, 교차성 담론의 모든 허점을 보여주는 논쟁이 벌어졌다. 일부 편집자들이 이주민 출신 작가의 차별 경험을 거론하며 작가의 거친 표현을 변명하는 동시에, 〈타츠〉의 백인 작가들이 과연 이 칼럼을 비판적으로 논평할 권리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타츠〉 대표 알리네 륄만은 모든 ‘백인 특권층’이 이 칼럼에 침묵하기를 야그후비파라는 원할 것이라고 트위터에 밝히고, ‘백인 특권층’으로서 그 자신은 신중하게 칼럼과 거리를 두었다. 륄만은 여전히 진보의 선봉으로 통하던 편집장도 염두에 두고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렸다. 이제 백인 고학력 여성인 편집장은 갑자기 뒤로 물러나 있어야 했다. 피해자 서열에서 백인 고학력 여성은 백인 남성 노인 바로 위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왜 애벗이 갑자기 MIT와 “안 맞는 사람”이 되었을까? 어떤 단어가 무슨 의미였기에 그렇게 극단적인 결과를 낳았을까? 애벗의 과학 작업에 오류는 없었다. 그는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사람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2021년 3월에 애벗은 한 칼럼에서, 특히 보수주의자들이 기후 보호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기온이 1.5도 상승하면 농업과 물 공급에 엄청난 변화가 생기고 해안 지역이 물에 잠길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데는 좋은 보수주의적 근거들이 있다.”
 애벗에게 재앙을 안긴 것은 모든 학생을 똑같이 대해야 한다는 의견에 그가 찬성하는 영상이었다. 2020년 11월에 그는 유튜브에 영상을 올렸고, 시카고대학에서 특히 아시아 학생이 체계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원자들이 남성이라는 이유로 탈락한 선발 과정을 언급했다. 그리고 지원자를 오로지 “학자로서 얼마나 유망한가”만 따져 선발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 영상이 공개된 뒤 애벗의 학부에서 서명운동이 일었다. “애벗 교수의 영상은 학부에서 소수자에 속하는 모든 학생의 안전과 소속감을 위협한다…….” 성명서 뒤에는 11개 요구 항목이 첨부되어 있었다. 애벗에게서 학생들을 “보호해야” 하고, 학생들은 애벗의 수업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학교 당국은 애벗의 발언과 거리를 두고 “편협한 태도”를 처벌하는 제도를 마련하라! 두 쪽 분량의 성명서는 “2020년 12월 11일 금요일 17시까지 상세한 답을 하라”는 최후통첩으로 끝난다.

 

 미국 대학에서 소수자 특별 지원을 둘러싼 논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른바 ‘적극적 우대 조치(Affirmative Action)’ 지지자들은 노예제 잔재와 여전히 만연한 인종차별을 감안하여, 예를 들어 특히 인기가 높은 대학의 입학생 선발에서 소수자에게 유리한 출발점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다수 미국인은 이런 주장을 거부한다. 퓨연구소의 설문조사에서 73퍼센트가 인종은 대입 선발에서 아무 역할도 해서는 안 된다고 명확히 답했다. 2020년 11월의 미국 국민투표에서 가장 진보적인 캘리포니아는 교육 시스템에서 특정 인종 집단에 특혜를 주면 안 된다는 쪽에 과반수가 투표했다.
 그러니까 적극적 우대 조치에 대한 애벗의 입장은 결코 급진적 소수 의견이 아니다. 게다가 그의 정치색은 과학자라는 그의 직업과 전혀 무관하다. 그는 분명 칼슨 강연에서 어떤 먼 행성에 생명체가 있을지를 다뤘으리라.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사건을 매우 위험하게 본다. 애벗은 미국인 3분의 2 이상이 공유하는 입장을 취했다는 이유로 과학자로서 처벌을 받았다. 어째서 그렇게 많은 미국 시민이 더는 자신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느끼는지 궁금한가? 애벗 사건이 명확히 답해준다.

 

 애벗은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고 한다. “우리는 더 많은 아시아인이 아니라 더 많은 다양성이 필요합니다.” 그의 학부에 교수 자리 하나가 비었을 때, 임용 공고에는 피부색이나 성별을 따지지 않는다고 명시되었다. “그런데 학장이 우리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아세요? ‘자유롭게 선발하세요! 누구나 지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라면 오로지 여성이나 소수자만을 받을 겁니다.’ 이건 부당함 그 이상이에요. 자격만을 보지 않고 자동으로 정치화되는 모든 선발 과정 역시 문제입니다. 그러면 누가 최고의 자격을 갖췄느냐는 중시되지 않아요. 여성이 나을까, 아니면 차라리 라틴계가 나을까만 따지게 됩니다.”
 애벗도 말했듯이, 물론 다른 사람들은 이 일을 애벗과 다르게 볼 수 있다. 애벗은 진실 독점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다 과학자가 자신의 정치적 견해 때문에 견책을 당하는 지경까지 왔는지 그는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한다. “이곳 시카고대학에는 자기가 공산주의자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교수들이 있어요. 마르크스 사진을 자신의 웹사이트 배경 화면으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고요. (…)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이 비윤리적 정치 견해를 가진 것 같으니 그의 과학 작업을 취소해야 한다고 절대 말하지 않을 겁니다.”

 

 학생들의 시위로 연사가 연설을 취소하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 이전 해에도 전 세계은행 총재 로버트 졸릭이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스와스모어 칼리지의 연설 초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2014년경부터 개별 사례들이 대중의 동조까지 얻게 된 새로운 형식의 시위로, 정치 운동으로 바뀌었다. 미국 전역에서 대학생들이 자기들이 보기에 잘못되었거나 다르거나 그냥 맘에 들지 않는 정치적 견해를 가진 초청 연사들을 거부하거나 더 나아가 조직적 분노를 표출하여 연사가 단상에 서지 못하게 막기 시작했다. 흑인 여성 최초로 외무장관이 된 콘돌리자 라이스는 러트거스대학 연사로 초청받았지만, 학생들이 이라크 전쟁에서 그녀가 한 역할을 지적하며 분노했기 때문에 강단에 설 수 없었다. 같은 해 브랜다이스대학은 보수주의 여성 인권 운동가 아얀 히르시 알리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하려 했지만, 학생들이 인터넷에서 반대 여론을 만들어 결국 계획을 철회했다. 초청 연설 취소 사례가 너무나 많아서 ‘초청 취소 시즌’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놀라운 변화였다. 하필이면 생각과 의견의 자유로운 교환을 근본으로 여겼던 미국 대학들이 반대파의 입을 막으려는 정치적 행동주의의 시험장이 되었다. 학생들은 더 나은 주장을 펼치려 애쓰는 대신 자신의 세계관 강화에 몰두했고, 대안을 제시하려는 시도를 자신의 정서적 안정과 안전을 공격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정신적 방공호에 머무는 사고방식은 현재 독일에서도 점점 퍼지고 있다.
 미국 대학은 수십 년 넘게 표현의 자유 전통을 자랑으로 여겼다. 1960년대에 표현의 자유를 요구한 주인공이 바로 좌파 대학생들이었다.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은 자유로운 발언의 힘이 사회를 바꾼다고 믿었던 ‘자유언론운동(Free Speech Movement)’의 중심지였다.
 미국에서 표현의 자유는 언제나 진보를 위한 무기이기도 했다. 1920년에 여성참정권 도입의 토대를 마련한 것은 여성 선거권론자들의 저항이었다. 민권운동가들의 대규모 시위가 없었더라면, 미국에서 인종 분리를 금지한 1964년의 민권법은 존재할 수 없었을 터다. 1970년대에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한 것 역시 젊은 학자들이 거리로 나와 정글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전쟁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국가가 동성애자를 이등 시민으로 낙인찍어선 안 된다는 주장으로, 그들은 동성혼 권리를 쟁취했다. 따라서 좌파 대학생들이 검열과 위협을 정치적 무기로 삼고, 지금까지 주로 우파 정치가들이 사용한 방법을 쓰는 것은 새로운 변화다.

 

 그러나 미국 대학의 히스테리적 예민함을 오로지 새로운 세대의 심리적 성향 탓으로 돌리는 것은 순진한 태도다. 만약 감정이 주장을 대체하면 감정은 거대한 효과를 내는 정치적 무기가 된다. 주장은 반박할 수 있지만 감정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공개적으로 또는 소셜미디어에서 비난받는다면 그 사람은 감수성이 예민하지 못하거나 더 나아가 위장한 인종차별주의자로 의심받는다. 동시에 넘지 말아야 할 선의 높이가 최근에 특히 ‘미세공격(microaggression)’이라는 개념과 함께 체계적으로 하향되었다.

 

 이 논쟁은 현재 미국에서 감정적으로 격렬하게 토론되는 주제다. 인종주의와 차별이 문제가 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논쟁이다. 스탠퍼드대학 정치학 교수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2021년 봄 경찰의 흑인 폭행에 관한 토론 수업 장면을 내게 들려주었다. 후쿠야마는 경찰의 흑인 폭행 문제를 다양한 차원으로 나눠서 토론하고자 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미국 전역에서 자행되는가, 아니면 특정 도시에서만 발생하는가? 교육의 역할이 중요할까? 이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이 아주 놀라웠다. 먼저 몇몇 학생이 예고 없이 이런 골치 아픈 문제성 주제를 제시했다며 항의했다. 어떤 학생들은 토론 수업의 질문 자체를 근본적으로 반대했다. 한 학생이 설명했다. “교수님이 빈곤이나 교육 부족을 언급하시면, 흑인 차별을 인종주의 이외에 다른 근거로 해명할 수 있다고 착각할 위험이 있습니다.”
 후쿠야마는 1980년대에도 이미 인종주의를 주제로 토론 수업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객관적 토론이 가능했다. 반면 지금은 모든 문제의 근원이 기본적으로 인종차별에 있다고 보는 매우 단순한 관점이 지배한다고 한다. 학생들의 세계관에 문제 제기를 해본 적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이런 일은 그냥 가만히 두는 편이 더 낫다고 대답했다.

 

 〈뉴욕타임스〉가 하필이면 트럼프 임기 말에 정체성 위기에 빠진 것은 확실히 우연이 아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신문사의 적이자 행운이었다. 트럼프 임기 동안 이 신문은 400만 명 이상의 새로운 구독자를 얻었다. 동시에 백악관의 포퓰리스트 덕분에 편집자들이 뛰어난 저널리즘 성과를 냈다. 트럼프의 세금 기록을 집요하게 조사하여 밝힌 곳이 바로 〈뉴욕타임스〉였다. 이 신문은 2022년에만 퓰리처상 세 개 부문을 수상했다.
 그러나 트럼프는 전례 없이 서둘러 언론인의 자아상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뉴욕타임스〉는 10년 넘게 정치적 독립성을 철저히 지키려 애써왔다. 명성의 원천은 편집팀의 정치적 태도가 아니라 취재였다. 수석 특파원 피터 베이커 같은 기자는 지금도 정치적 독립성을 보이기 위해 절대 투표하러 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이상은 정치의식 부족으로 평가받는다. 그뿐 아니라 소셜미디어에서 기꺼이 흥분하는 특징을 가진 새로운 세대가 몇 년 전부터 뉴스룸으로 진격해오고 있다.
 존스홉킨스대학 정치학 교수 야샤 뭉크는 이와 관련하여, 〈뉴욕타임스〉를 이끄는 것은 편집장이나 발행인이 아니라 트위터라고 내게 말했다.

 

 독일에서도 저널리즘의 미래를 다투는 싸움은 부분적으로 세대 갈등이다. 한편에는 40세 이상의 편집자와 기자들, 의견 다양성이라는 사상과 신념을 갖고 성장한 사람들, 공개 토론에서 최고의 주장을 관철할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의견 대립이 발전을 가져온다는 옛 진보적 격언을 적어도 부분적으로 더는 믿지 않는 젊은 편집자 세대가 있다. ‘거짓균형’을 통해 소위 과학적 근거가 뒷받침하는 진보적 관점을 관철해야 하는 상황이다. 〈뉴욕타임스〉가 코튼과 베넷을 둘러싼 논란을 직접 보도하고 비판적 목소리에도 발언 기회를 준 것은 인정해줘야 한다. 베넷이 〈뉴욕타임스〉의 지면을 허락했던 보수 논객 브렛 스티븐스가 베넷의 해고가 얼마나 엄청난 신호를 보냈는지 썼다. “지적으로 조금만 대담해도, 새로운 정통성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직업적 파멸에 이르는 분위기라면, 진지한 저널리즘과 활발한 의견 교환은 번성할 수 없다.” 그의 동료 로스 두댓이 흥미로운 상황을 지적했다. 〈뉴욕타임스〉의 뉴스룸은 점점 더 다양해지지만 동시에 신문의 의견 스펙트럼은 점점 좁아진다는 것이다.

 

 토론이 점점 더 디지털 필터버블 안에서 벌어지는 것은 우리 시대의 큰 문제다. 독일이 ‘인종반전’ 직전에 있다거나 빌 게이츠가 코로나 백신을 빙자하여 사람들에게 칩을 심는다고 믿는 사람은 매일 페이스북과 트위터에서 자신의 확신을 재확인받을 수 있다. 인터넷 시대에 진지한 언론이 해야 할 공헌은 사실과 음모론을 분리할 뿐 아니라 열린 논쟁을 조직하여 사회분열을 막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의견도 견뎌야 한다. 그것이 필수다. 현재 미국에는 특히 보수적 목소리를 내는 기자들이 거대 언론사를 떠나 서브스택 같은 인터넷 포털에서 개인사업자로 활동하는 위험한 트렌드가 퍼져 있다. 보수 성향의 저널리스트이자 전 《애틀랜틱》 기고가였던 앤드류 설리번이 한 사례다. 그러나 2016년 11월 대통령 선거 결과에 충격을 받은 〈뉴욕타임스〉가 데려왔던 칼럼니스트 바리 와이스도 마찬가지였다. 와이스는 2020년 여름에 아주 당당하게 〈뉴욕타임스〉를 떠나면서 이렇게 지적했다. “이 신문은 선거에서 배웠어야 할 교훈(다른 미국인의 말에 귀 기울이고 무리의 생각에 저항하기)을 실천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전체 언론에서, 어쩌면 특히 이 신문에서 새로운 합의가 형성되었다. 진리는 전체 과정에서 발견되지 않고, 소수의 깨달은 사람이 의무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는 새로운 정통성에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루체른 카운티의 투표 결과는 민주당이 고학력 지식인 유권자의 정당으로 변신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작가 조지 패커가 이름 붙였듯이 민주당은 ‘스마트 아메리카’를 지향한다. 시카고, 휴스턴, 덴버 같은 도시의 근교 또는 해안에 거주하는 사람들. HBO에서 최신 블록버스터를 볼 수 있고 아마존 택배 기사가 주말 바비큐에 쓸 그릴 양념을 총알처럼 가져다주기를 바라는 사람들. 스탠퍼드대학에서 경제학 또는 존스홉킨스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내일 런던, 도쿄, 시드니 등지에서 일할 수도 있는 체비 체이스의 내 이웃들.
 그들은 세계화의 폭풍 속에서 안전했고 지식과 적응력을 돈으로 보상받는 새로운 경제의 승자다. 오바마만큼 완벽하게 ‘스마트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사람도 없는 것 같다. 그는 싱글 맘의 아들로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했고 2009년에 흑인 최초로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팰로앨토에 위치한 페이스북 본사에서 열린 타운홀 회의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버락 오바마고 마크 저커버그에게 양복과 넥타이를 착용하게 만든 사람입니다.” 페이스북 대표가 만면에 미소를 짓고 그 옆에 앉아 있었다.
 민주당의 새로운 방향은 애플, 페이스북, 구글 같은 미국 거대 기업의 이익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민주당은 새로운 독점자들을 경쟁에 관한 법률로 해체하려는 실질적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동시에 이 거대 기업들은 ‘깨어 있음’ 운동을 그들의 사업 기획에 힘들이지 않고 통합할 수 있었다. 외국에서 공정한 노동 조건을 마련하거나 권위적 체제에 저항하는 용기를 내는 것보다 광고에서 성인지 감수성이 높은 언어와 다양성 이미지를 쓰는 것이 확실히 비용이 덜 들었기 때문이다.

 

 미국 기업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인터넷의 분노 폭동이고, 애매할 때는 맹목적 분노 폭동에 합리적 주장으로 맞서기보다 그냥 직원 한 명을 해고하는 편이 언제나 더 간단하다. 셰이퍼의 분장을 사적인 실수로 보고 사과로 끝낼 기회를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기업은 모든 형태의 인종 및 성차별에 단호히 맞서지 않는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종종 직원을 변호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다.
 2020년 7월 초에 닐 골라이틀리는 항공기 제조사 보잉의 커뮤니케이션 책임자로 일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사직 의사를 표명했다. 골라이틀리가 해군 조종사 시절에 한 발언 하나가 인터넷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여성의 전투 투입에 반대한다고 밝힌 발언이었는데, 정말로 아주 형편없는 발언이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개인 휴식 공간을 마련하고, 군용 탐폰을 보급하고, 여성 위생용품을 선박에 싣는 부담이 가중된다면, 여성을 최전선에 투입하는 것은 아무런 이점이 없다.”
 그가 약 33년 전인 1987년에 한 잡지에서 한 발언이다. 골라이틀리의 상사들은 이 발언이 수십 년 전 일이고 지금은 스스로 반성하는 직원을 버릴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경영진에게 쏟아질 비판을 의미했다. 그래서 보잉 최고경영자 데이비드 칼훈은 “보잉이 모든 차원에서 다양성과 포용성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강조하고 싶고, 그래서 회사의 이익을 위해 사직하기로 한 골라이틀리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발표했다.

 

 디앤젤로가 인종차별 반대 교육에 앞장서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그러나 그녀의 교육과정에서는 인종차별 비난을 절대 반박해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디앤젤로가 제시하는 것은 학문적 지식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난 종교다. 이 ‘종교’에서는 모든 백인이 인종차별주의자다. 인종차별은 예외적 상황이 아니라 기본값이다. 서방 사회의 기반은 백인 지배체제다. 이런 ‘교리’나 인종차별 비난을 반박하는 것은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행위일 뿐이다.
 디앤젤로는 이른바 순환논법이라는 논리적 오류를 범했지만 그런 오류가 그녀의 성공을 저해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웹사이트가 자랑하듯이, 아마존이나 유니레버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그녀의 서비스를 이용했고, 민주당 하원의원들도 디앤젤로와 미팅을 잡았다. 〈뉴욕타임스〉가 보도하기를, 그녀는 몇 해 전에 벌써 강연료로 최대 1만 5천 달러를 받았다. 이 사회학자는 인종차별 없는 세상을 위해 노력한 대가로 부자가 되었다. 다만, 세상 역시 디앤젤로 덕분에 비슷한 이익을 얻었을까? 디앤젤로가 자신의 책에서 밝히기를, 그녀가 제공하는 인종차별 반대 교육을 거부하는 것은 인종차별의 뿌리가 깊다는 또 다른 증거란다. 그러나 여러 연구가 밝혔듯이 인종 및 성차별 반대 교육은 거의 아무런 효과가 없다.

 

 보넷은 자신의 책 《무엇이 작동하는가》에서 미국 기업이 성차별이나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강좌에 현재 연간 80억 유로를 쓰는 동시에 그것이 실생활에서 전혀 효과가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썼다. “단지 직원들에게 그들의 선입견을 깨닫게 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는다면 그런 훈련 프로그램이 행동 방식은 두말할 것도 없고 내적 가치관을 바꿀 확률도 매우 낮다.” 알렉산드라 칼레브, 프랭크 도빈, 에린 켈리 세 사회학자가 30년 동안의 다양성 훈련을 조사한 연구 역시 비슷하게 냉철한 결과를 보여준다. 다양성 훈련이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탄탄한 증거가 없다”. 이런 강좌는 종종 그저 인종차별 비난을 모면하기 위해 이루어진다. “고용주들이 겉으로 드러나게 차별 금지 조치에 애쓰는 이유가 정말로 임원의 다양성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법적 책임을 면하기 위해 또는 분위기 개선을 위해서라는 근거들이 충분하다.”
 다시 말해 그런 강좌는 시장가치를 올리면서 아무것도 의무로 삼지 않는, 일종의 플라세보 행동주의다. 이것은 탈세나 형편없는 직원 처우로 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아마존 같은 기업에 적합하다.

 

 그러나 결국 이것은 일반적인 공생관계의 과도한 주변 사례일 뿐이다. 젊은 활동가들과 함께 발전을 위해 싸울 기회를 어떤 기업이 놓치고 싶겠는가? 미국 중앙정보국 CIA도 기회로 인식할 정도로 이는 이미지 구축에 아주 유익하다. 2021년 3월에 CIA는 새로운 시대의 스타일로 가득한 광고 영상을 제작했다. 광고 영상에서 36세 라틴계 여성 공무원이 CIA 본부 복도를 성큼성큼 걸으며 자신의 경력을 이야기한다. “나는 불안장애 진단을 받은 시스젠더 밀레니얼 세대입니다.” 그러는 동안 배경에서 웅장한 음악이 울린다. “나는 교차적이지만 내 자아는 정상 기준을 충족하지 못합니다.” 이 광고는 21세기 초의 진보적 자아도 비밀 고문 수용소를 운영하고 비밀 암살단을 파견하는 국가기관에서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영상이 틀림없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올바른 믿음을 따를 준비가 되었느냐다.

 

 미국 역사학자 앤 애플바움은 《애틀랜틱》 기사에서, 인터넷 시대의 즉각적인 도덕 재판 공포를 1940년대 중부유럽의 소련화 시대의 공포 분위기와 비교했다. “신체와 생명에 직접적인 위험이 없더라도 사람들은 (…) 자신이 믿지 않는 슬로건을 퍼뜨리거나 개인적으로 경멸하는 정당 앞에 공개적으로 머리를 숙여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공산주의에 빗대는 것이 과도한 비교일까? 스탈린 시대의 자기비판이 현재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독일 또는 미국에서 아무도 국가적 강요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더라도 굴라크에 갇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터넷의 집단 린치와 인사부의 비겁함, 대학과 문화계의 획일적 사고는 위축과 불안을 조성하여 열린 논쟁을 질식시킨다.

 

 ‘경찰 예산 삭감하라!’ 구호 뒤에는 미국 경찰이 구조적 인종차별에 너무 깊이 물들어 개혁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견해가 들어 있다. 물론 구조적 인종차별이라는 용어가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다. 미국에는 체계적으로 흑인에게 불리한 법안이 오랫동안 있었다. 그리고 공화당이 미국 남부에서 흑인 유권자가 투표하지 못하게 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소수자를 체계적으로 억압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확실히 대다수 미국인은 경찰이 인종차별적 억압 수단의 조력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2021년 9월 여론조사를 보면 경찰 예산 삭감에 동의하는 미국인은 15퍼센트에 불과했다. 심지어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38퍼센트가 경찰력 강화에 동의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흑인이 백인보다 더 많이 우범지대에 살고 그래서 경찰의 도움에 의존하기 때문이리라. 2021년 11월에 기존 형식의 경찰을 없애려는 미니애폴리스시 당국의 계획이 시민들의 거부로 실패했다.

 

 비판적 인종 이론 같은 용어를 토론에 끌어들인 것은 좌파의 큰 실수였다고 루포가 말했다. 상대 진영이 이 일을 모호하게 만들고 숨길 가능성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부드럽고 완곡한 언어와 씨름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학부모와 학교에 ‘다양성과 포용성에 맞서 자신을 방어하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언어만 보더라도 벌써 패배한 싸움이죠. 하지만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비판적 인종 이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이론이 우리를 승리로 이끌 겁니다.”

 

 앙겔라 메르켈은 긴 임기 내내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내세우지 않았고, 그래서 여성운동 단체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메르켈은 또한 동독 출신 총리라는 사실도 강조하지도 않았는데 동독의 연방주들은 그것을 배신으로 보았다. 그러나 메르켈은 자신을 뭔가의 상징으로 설명하는 데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관심은 권력이었고 권력과 함께 아주 당연하게 최초의 여성 및 동독 출신 총리라는 상징성이 따라왔다. 버락 오바마는 대통령 선거운동에서 백인 미국인이 겁을 먹지 않게 하려고 심할 정도로 주의를 기울였다. 선거운동 기간에 오바마는 미국의 흑인 커뮤니티를 비판했고 그것 때문에 인종차별주의자에게 표를 구걸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2008년 11월 4일 오바마의 승리는 흑인 미국인의 역사적 승리였다. 이런 역사적 승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중서부 주들을 자기편으로 끌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주들은 8년 뒤에 차례로 다시 도널드 트럼프에게 넘어갔다. 아이오와,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미시간, 위스콘신 등등.
 트럼프의 대선 승리는 간단히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민주당이 1990년대 초부터 점점 더 노동자를 위한 정당의 성격을 잃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힐러리 클린턴이 트럼프 지지자들을 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인 “개탄스러운 자들(Deplorables)”이라고 부른 발언은 그녀의 옛 지지자 일부를 가장 명확히 소외시켰다. 2016년 9월 뉴욕에서 열린 ‘힐러리를 위한 LGBT 기부 행사’ 영상을 다시 보면 왜 민주당이 패배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힐러리 클린턴의 공개적 경멸 발언 때문만이 아니다. 힐러리가 “개탄스러운 집단”에 대해 말할 때 같이 웃은 청중들도 적어도 같은 무게로 책임이 있다. 같이 웃은 사람들은 ‘플라이오버스테이츠(flyover states)’, 즉 미 중서부에 사는 우매한 사람들과 무관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웃음으로 밝힌 셈이고, 그 후 중서부의 우매한 사람들은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할 자유를 얻었다.

 

 좌파 진영은 트럼프의 상승을 아주 단순한 분석으로 설명한다. 그들은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이 권력을 빼앗기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애쓰는 백인, 기독교인, 가부장적 미국인의 최후 반란 덕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일부 조건에서만 현실과 일치한다. 퓨연구소의 상세한 선거 분석을 보면, 트럼프는 2020년 선거에서 하필이면 그가 권력에서 멀리 떨어뜨려놓고자 한 라틴계, 흑인, 여성 유권자들에게서 입지를 다졌다. 2016년에는 라틴계 미국인 28퍼센트만이 트럼프를 지지한 반면, 4년 뒤 2020년에는 그 비율이 38퍼센트에 달했다. 공화당은 흑인 유권자들 사이에서도 약간의 이득을 봤다. 바이든에게 승리를 안겨준 것은 우선 백인 남성들의 변심이었다. 백인 남성의 민주당 지지율이 8퍼센트나 증가한 반면, 백인 여성에게서는 트럼프 지지가 증가했다. 2016년에 백인 여성의 47퍼센트가 트럼프를 지지한 반면 2020년에는 53퍼센트나 지지했다.
 나의 핵심 주장은 다음과 같다. 좌파의 정체성 정치는 특히 중도층과 고학력 계층에게 해롭다. 정체성 정치는 스스로를 위안하고, 자기 의견을 강화하고, 더 높은 도덕성을 장착하는 특정 정치집단에게 도움을 준다. 그러나 이런 작은 버블 속의 독단과 신념은 무엇보다 성별과 피부색에 무관하게 유권자 과반에 거부감을 줄 정도로 너무 견고하다.

 

 ‘라틴엑스’, ‘BIPoC’, 또는 ‘게플뤼흐테테(Geflüchtete)’ 같은 단어와 약어가 진보적 집단의 전문용어로 남으려면 포용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용어들을 구별 짓는 특징이 있다. 트위터에서 성평등에 맞게 세심하게 여성 대명사(she/her)를 사용하는 사람이 월마트 계산대에서 일할 가능성은 낮다. 자동차 공장의 새벽 교대조에서 성문파열음을 듣기는 어렵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른바 포용의 언어는 저학력 폭도보다 우월해지는 수단이자 먹고살기 바빠 진보적 담론의 최신 흐름을 미처 따라잡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수단이 되고 만다. 버락 오바마는 2019년에 벌써 대학생들 사이에 퍼져 있는 ‘깨어 있는’ 오만을 지적했다. 오바마가 토론에서 좌파 활동가에게 말했다. “그냥 돌멩이만 던져서는 멀리 가지 못합니다. 그건 너무 단순하니까요.”
 정당이 지지자를 멸시하기 시작한다면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자신의 성공에 스스로 희생자가 되는 특수한 현상을 정치 좌파들이 보여준다. 독일 사민당은 교육을 통한 사회적 신분 상승을 약속했다. 수백만 명에게 대학의 문을 열어주는 이 프로젝트로 1970년대 사민당은 신분 상승을 돕는 학문적 정당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독일뿐 아니라 사민당 자신도 바꿔놓았다. 전쟁 후 콘크리트 기술을 배웠고 헤센 주지사가 되어서도 여전히 전혀 학문적이지 않은 노동 현장의 거친 표현을 즐겨 썼던 홀거 뵈르너 같은 남자들이 당 지도부에서 사라졌다. 홀거 뵈르너는 프랑크푸르트 서쪽 활주로에 반대하는 시위대 앞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의 높은 직위 때문에 어린놈 뺨조차 때리지 못하는 것이 유감스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뵈르너는 무식한 프롤레타리아가 아니었다. 그는 녹생당과 연합한 최초의 사민당 주지사였다. 다만 그 자신의 출신이기도 한 프롤레타리아로서 사민당이 대변하는 노동자 환경에 대해 말했을 뿐이었다. 조립라인이나 대규모 구내식당에서 때때로 사용하는 거친 표현을 멸시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을 터다.

 

 내가 이 책에서 설명한 이론과 이념들은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성급함의 산물이기도 하다. 흑인 미국인이 그렇게 오랫동안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면, 특권을 누린 백인은 적어도 얼마 동안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정당하지 않을까? 무죄 추정의 원칙이 많은 남성을 학대 행위 처벌에서 보호했다면 정의 구현을 위해 “여성의 주장을 믿는” 원칙이 필요하지 않을까? 트렌스젠더가 수십 년 넘게 국가적 차별을 받았다면 혁신 반대를 “혐오 발언”으로 낙인찍는 것이 정당하지 않을까?
 다만 문제는 그런 접근방식이 새로운 좌절을 만들고 정치로부터 무시당했다고 느끼는 새로운 패배자를 탄생시킨다는 점이다. 옛 차별에 똑같이 응수하는 것은 새로울 수 없고, 법치국가는 법을 훼손해서는 개선되지 않으며, 논쟁은 가지치기로 더 공정해지지 않는다. 협박으로 강제된 개혁은 절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혐오와 독단은 자유로운 토론의 적이다. 또한 선의의 발언에 예민하게 반응하면 자유로운 토론이 죽을 수 있다. 내가 이 책을 쓴 이유는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에서 뭔가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그것을 분노의 연료로 사용하지 않는 쿨하고 여유로운 자유 개념이 사라지고 있다. 트럼프나 회케 같은 인물은 우리 사회에 불운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권력을 쥐여주고 싶지 않다면 그들의 지지자를 멸시하며 콧방귀를 뀌고 “개탄스러운 자들”이라고 욕해서는 안 된다. 더 적극적으로 그들과 대화해야 한다. 오직 자신의 정치적 시야만 존중하는 관용은 쓸모없고 황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