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의 지리학 / 로리 파슨스 / 오월의봄
2017년, 캄보디아의 벽돌 가마를 처음으로 방문했다. 어느 노인이 천이 담긴 가방을 맹렬히 타오르는 용광로 안으로 쉴 새 없이 던져 넣고 있었다. 낮은 굴뚝에는 검고 두꺼운 연기가 맴돌고 있었고, 불꽃 아래로는 플라스틱이 녹은 물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꾸물꾸물 흘러가고 있었다. 노동자인 아버지를 따라 간간이 일하러 나오는 어린 소년 노동자가 기침을 하다가 라벨 더미들을 헤치면서 20피트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알루미늄으로 지은 집으로 향했다. 소년이 헤치고 지나간 라벨 더미들 중에는 몇 주 전 내가 런던의 의류 매장 선반에서 보았던 라벨들도 있었다.
인지 부조화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탄소 배출, 환경저하, 글로벌 생산, 그리고 빈곤이라는 문제가 결합된 이와 같은 장면들은 전 세계 곳곳에서 매일 수백만 번 되풀이되는 장면이다. 문제는 기업의 지속가능성이라는 시각에서는 이런 장면들이 결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 세계 사람들의 눈에는 글로벌 생산이 단순하고, 깨끗하며, 마치 탈탄소화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즉 글로벌 생산의 세계는 현지 환경을 파괴하면서 탄소집약적 생산을 하고 있지만 규제에서 벗어나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그 세계는 전 지구적인 탄소 배출에 맞서 싸우는 우리의 능력을 무력화할 뿐 아니라 더 작은 규모로 발생하는 영향을 글로벌 생산의 공급망이라는 복잡한 물류 속에 감춘다. 바로 이 감춰진 글로벌 생산의 세계가 기후붕괴에 맞서는 싸움의 새로운 전선이다. (p.22-23)
이런 관계는 오늘날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세계에서 지속가능성이 가장 낮은 다수의 노동은 지역사회에서 강제로 분리되었거나 작업장에 억류되었거나, 혹은 둘 모두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떠맡는다. 그 악명 높은 사례로 콩고의 코발트 광산을 꼽을 수 있다.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대개 남성이고, 아동도 꽤 있다. 그들은 위험하고, 유독하며, 종종 치명적인 작업을 수년간 수행하면서, 스마트폰과 전기자동차 같은 첨단 기술 혁신에 필요한 광물을 제공해왔다. 어마어마한 탄소와 인적 비용이 수반되는 노동이기에, 주로 매우 저렴하면서도 결정적으로 착취하기 매우 쉬운 노동력, 즉 사실상 일회용 노동력이 없으면 이와 같은 노동은 수행될 수 없다. 흡사한 사례가 전 세계에서 발견된다. 방글라데시의 벽돌 가마에서부터 억류된 태국 어부가 어족 자원을 고갈시키는 현장에 이르기까지, 민중과 환경에 대한 학대는 동시적으로 이뤄지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인간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의지가 가장 강한 사람들이 바로 자연을 더욱 기꺼이 착취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도덕적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다. 그것은 경제적 불가피성의 문제이다. 대부분의 경우 자연환경은 글로벌 원자재 수요에 보조를 맞출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재생되기 어렵다. 따라서 추출 산업은 끊임없이 새로운 지역으로 확장해야 한다. 즉 더 먼 곳까지 길을 내고, 더 깊이 땅을 파며, 더 광범위하고 무차별적으로 그물을 던져야 한다. 이 모든 활동의 근원에는 경제적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규모의 경제라는 발상, 즉 더 많이 만들수록 제품이 더 저렴해진다는 발상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추출에 관한 한 종종 정반대의 진실이 드러난다. 광물을 추출하기 위해 땅을 더 깊이 파든, 아마존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진입로를 더 멀리 내든, 희소성의 증가는 비용의 증가로 이어진다. 이윤을 흑자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착취된 노동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p.50-51)
개발도상국들이 ‘중진국 함정’에 빠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이 문제를 어떤 시각에서 보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어떤 논쟁에서도 구체적인 현장의 경험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서류에 기록된 산업화는 깨끗하고, 과학적이며, 심지어 필연적인 결과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뤄지는 글로벌 경제의 통합은 훨씬 더 추악한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체계에서 살아가는 민중은 급격하고 고통스러운 격변 속에서 삶과 생계를 유지해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일부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런 결정을 내리지만, 많은 이들은 선택지가 제한되어 있는 여건에서 고심 끝에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그 결정은 미래에 다른 사람들이 누릴 혜택을 내세워 현재의 개인에게 상당한 희생을 강요한다.
바로 이것이 기후변화뿐 아니라 더 거대한 규모의 자본주의에서 이뤄지는 경제개발에 대한 생생한 경험이다. 공장을 건설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초기에는 노동력이 자동으로 유입되지 않는다. 관련된 지역사회와 민중의 입장에서는 산업 노동으로의 전환이 사회적·문화적·정서적 개변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산업 노동자가 된다는 것은 최소한 아들들과 딸들이 그들의 친구, 가족, 부모, 자녀를 고향에 남겨둔 채 종종 기약 없이 떠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업 노동자가 된다는 것은 끊임없이 높은 압박감을 견디면서 매일, 매주 혹은 심지어 매년을 거의 숨 돌릴 틈 없이 노동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쥐꼬리만 한 임금을 받기 위해 불편하고 심지어 고단한 노동조건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련된 지역사회와 민중의 입장에서 산업 노동으로의 전환은 국민 계정에서 매년의 성장률을 분석할 때 지표로 사용하는 GDP 점수에 1점을 추가하는 것처럼 순조롭고 예측 가능하지 않다. 그들에게 그것은 파열이고, 희생이며, 불확실성이다. (p.53-54)
농민에서 산업 노동자로 변신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친족의 질병 같은 경제적 타격에서부터 홍수, 가뭄 또는 산사태 같은 재해에 이르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계기들 중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농촌에서 생계를 건사하는 것 역시 항상 불확실하고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자신의 토지를 버리고 떠나도록 농민의 등을 떠미는 속도와 강도, 압력은 계속해서 증가했다. 10년에 한 번 찾아오던 가뭄은 이제 매년 찾아오고,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강우는 이제 모든 계절에 발생한다. 부채는 꾸준히 늘어난다. 가족 전체가 혹은 그보다 더 흔하게는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이 최후의 선택으로 시골집을 떠나는 것은 더 이상 새로운 소득을 얻고 투자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이전에는 거뜬히 건사했던 생계를 겨우 지탱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 되었다. 농촌과 도시, 농업과 산업은 서로에게도 의존하지만, [결정적으로] 국제시장에 의존해 기능하는 혼종 체계가 되었다. (p.67)
면직물 산업이 제공하는 일자리는 양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 산업에 종사한다는 것은 전통적인 생활방식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전통적인 형태의 노동을 산업 노동보다 훨씬 더 선호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산업 노동에 참여하도록 유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전통적인 노동을 쓸모없는 노동,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노동, 불법적인 노동으로 바꿔버리는 것뿐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도주를 범죄로 다스리는 주법을 동원해 도주한 노동자 대다수를 노동법을 위반한 범죄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유명한 방법은 농촌 지역의 공유지를 폐쇄하는 인클로저와 생산성이 있는 토지에 대한 소유권 강화 및 확대를 통해 전통적인 농촌 생활방식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결국 새롭게 생겨난 어마어마한 규모의 토지와 그곳의 인구 대부분이 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산업 경제에 편입되었다.
이것은 역사이다. 이 모든 일은 최근 내가 떠나온 캄보디아 마을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오래전에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만일 캄보디아 마을 주민 한 명과 햇빛에 건조한 물고기 한 접시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잉글랜드의 인클로저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그 마을 주민은 이내 그것이 매우 익숙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심지어 그 마을 주민은 이것을 이웃 마을의 이야기로 추정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지난 수십 년 동안 이와 흡사한 과정이 이웃 마을에서 계속해서 진행되어왔기 때문이다. 2000년 이후 캄보디아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토지에 소유권이 설정되었다. 과거에 공유지였던 토지는 처음에는 국가에 할당되었다가 그 이후에 대부분 사적 소유자에게 할당되었다. 18세기 잉글랜드에서와 마찬가지로, 시장의 힘이 소규모 자영 농업을 중단시켰다. 고작 20여 년 만에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농업 가구의 비율이 0에 가까운 수치에서 29퍼센트까지 증가했다.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농민 대부분은 이제 의류 공장의 문 바깥에 줄을 서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들은 일할 의지가 없거나 일을 계속할 수 없게 된 노동자가 발생했을 때 그 빈자리를 제까닥 채우는 대체물이었다.
다시 말해, 산업 노동자는 저절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산업 노동력을 확보하고 유지하려면 최소한 초창기에는 전통적인 생계 수단을 압박해야 한다. 그래야만 산업 노동자로 편입되기를 꺼리는 자연스러운 반응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을 이해하고 나면 산업 발전과 농촌 발전 사이에 존재하는 중요한 상호연관성을 똑똑히 볼 수 있다. 관개에서 종자 은행 및 교육에 이르는 많은 전략이 농촌 사람들의 삶을 단기간에 개선할 목적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좀 더 넓은 차원에서 볼 때 이것은 결코 소규모 자영 농민이 농촌에서 지속가능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전략이 아니다. 반대로, 그 전략이 진정으로 이런 목표를 추구했다면 애초 산업의 필요에 어긋나는 방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농촌 지역에서 산업으로 흘러드는 노동자도 없었을 것이고, 재봉틀이 돌아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기후변화는 산업화 이야기가 끝나는 지점에서 출몰하는 동시에 글로벌 공장을 확장시키는 촉매 역할을 한다. 매년 농촌의 생계 수단에 가해지는 압력이 심화될 때마다 공장 문 바깥을 메우는 사람의 수는 조금씩 더 늘어난다. 홍수가 날 때마다, 가뭄이 들 때마다, 예측할 수 없는 강우가 찾아올 때마다 농촌 가구를 지원해야 하는 도시 노동자가 받는 압박은 훨씬 더 가중된다. 한때 개인과 가족의 필요를 거뜬하게 충족했던 일자리가 기후변화가 유발한 더욱 가혹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환경에서는 변변치 못한 일자리로 여겨지게 될지도 모른다. 생계 수단의 질은 떨어질 것이고, 노동시간은 더욱 길어질 것이며, 고용주의 착취에 대한 취약성은 증가할 것이다. 그러므로 전 세계 수백만 명의 민중에게 변화하는 기후란 그저 날씨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노동조건의 악화를 의미한다. (p.71-73)
파내거나, 베어내거나, 한 곳에서 또 다른 곳으로 이동시킬 재료가 없으면 성장의 수레바퀴는 완전히 멈출 것이다. 모든 글로벌 인프라와 모든 사회는 글로벌 동력기관에 공급할 연료를 찾아내라는 명령을 중심으로 구조화된다. 생활과 생계에 스며든 추출의 논리는 선택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일단 화학비료로 인해 똥이 쓸모없어지고 나면 화학비료는 좋지 않은 선택이 아니라 유일한 선택이 된다. 땅을 빼앗긴 농민들 또는 막대한 빚더미 위에 올라앉은 농민들은 야음을 틈타 보호림에서 나무를 벤다. 그 밖의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트롤 어선이 호수 바닥을 모조리 쓸고 지나가고 나면 전기봉을 이용한 고기잡이는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한마디로 말해 지속가능성은 부서지기 쉽다. 그리고 글로벌화된 세계의 추출 논리를 배척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지역을 기반으로 삼는다. 우리는 추출에 뿌리를 내리면서 구축된 글로벌 사회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리고 환경저하는 이런 체계의 부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원료를 분리하고 빨아들인 뒤 폐기물을 수출하고 반환하는 기계의 동력기관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한 곳의 환경적 취약성과 또 다른 곳의 안전 사이의 연관성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기후변화에 맞서 싸우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자원이다. 그러나 그 자원은 수 세기 동안 변함없이 부유한 국가들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그 속도는 매년 빨라져, 지난 40년 사이 3배가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1998년 9800만 달러이던 글로벌 폐기물 무역의 규모는 밀레니엄에 접어들 무렵부터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오늘날 20억 달러를 넘어섰다. 이 모든 흐름은 식민주의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추출 과정이자, 베네데타 코타의 표현대로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의 산물이다. 그 사고방식 안에서 남반구 국가들이 발전을 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더 가난한 국가들과 더 힘없는 당사자들의 환경적 취약성을 공격하는 경제적 협력관계 내부로 점점 더 깊게 통합되는 것뿐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개발 모델을 유지하며 기후변화의 영향을 완화하려는 노력으로 간주될 수 없다. 오히려 이것은 기후붕괴를 체계적으로 외주화함으로써 부유한 국가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도록 글로벌 위험을 재설계하는 행위이다. 요컨대 바로 이것이 탄소 식민주의이다. (p.76-77)
그 무렵은 내가 다양한 자격의 연구자로서 연구를 수행한지 10년쯤 되었을 때였다. 처음에는 석사 연구원으로 시작했고, 박사과정생과 자문위원을 거쳐 마지막에는 학자로서 연구를 수행했다. 그때까지 수십 개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나는 항상 특정 지역, 특정 분야, 특정 주제에 집중해왔다. 따라서 안내를 마무리할 무렵 친절한 노신사 부부가 나를 바라보면서 진심 어린 눈빛으로 질문했을 때,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러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답을 내놓았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청중들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고 노신사는 혼란에 빠졌으며 나와 함께 방문객 안내를 맡았던 동료는 당황하면서도 흥미로워하는 눈치였다. 나는 스스로에게 짜증이 난 나머지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더 나은 답을 내놓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바닥에 깔린 양탄자의 무늬를 아무리 뚫어져라 들여다봐도, 질문한 노신사가 기대하는 그럴싸한 해결책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p.80)
예를 들어 2021년 말 프놈펜에서 그랬던 것처럼, 홍수로 인해 공장 가동이 중단되면 가동이 재개될 때까지 노동자들의 급여가 삭감된다. 절반이 삭감될 때도 있고, 80퍼센트가 삭감될 때도 있으며, 심지어 전액이 삭감될 때도 있다. 공장 사장들은 제품을 납품해야 대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의류를 생산하지 못하면 임금도 지급할 수 없다고 노동자들에게 설명한다. 여기까지는 사실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공급망의 위 혹은 아래로 책임이 전달되는 방식이다. 브랜드는 개별 노동자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 어려운 시기에는 공장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도급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의 도래는 이런 현실을 잘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다. 갑작스런 수요 감소에 직면한 많은 브랜드들은 자사가 발주했고 공장에서 이미 생산이 끝나 선적을 준비하고 있는 재화의 인수를 거절했다. 그 결과, 팬데믹 기간 동안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그러나 브랜드들은 이것이 전혀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라고 여겼다. 공장은 브랜드의 소유가 아니기에 브랜드는 공장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p.108)
의류 산업의 비밀은 다른 많은 산업과 마찬가지로, 머나먼 국가들의 외딴 지역에 자리 잡은 높은 벽 너머에 감춰져 있다. 불투명한 상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아내려면 그 벽에 다가가 그 너머를 들여다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시간씩 자동차를 타고 이동해야 하고, 공장 주변을 기웃거리면서 담벼락의 틈새를 들여다보아야 하며, 현지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눠보아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미심쩍은 공장 상공에 드론을 띄워 넓은 시야를 확보해 완전히 새로운 정보를 얻어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중 윤리적인 소비를 실천하고자 하는 소비자가 손쉽게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도 없다. 따라서 글로벌 경제의 상당 부분이 제품을 구입하는 사람들로부터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극복할 수 없는 장벽이다. 이 장벽은 소비자들을 효과적으로 차단한다. 오늘날의 공급망은 풀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단단하게 매듭지어져 있다. 공급망을 사용하는 바로 그 기업조차 그것을 자사의 목적에 맞게 정비하는 것은 고사하고 해명조차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소비자는 그 어둠 속을 성공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의도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현실은 불투명하기만 하다. (p.113)
그렇다면 이런 불일치의 이면에 숨어 있는 것은 무엇인가? 주요 국가들의 탄소 배출량은 감소하거나 안정세에 접어드는 반면, 전 지구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탄소 배출량의 끊임없는 증가세는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주요 탄소 배출국들이 배출량 수치를 솔직하게 밝히지 않는 것일까? 직접적인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보다는 감축량 자체가 허상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세계는 점점 더 글로벌화되고 상호연결되어가는 데 반해, 감축량은 개별 국가 단위 및 국경 안으로 확고하게 국한되는 탄소 회계 체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더 부유한 국가들이 글로벌 산업에서 자국이 차지하는 비중을 축소하는 가운데, [경제적] 이익은 더 적고 환경에는 더 많은 피해를 입히는 공정을 글로벌 남반구로 ‘외주화’하면서 이런 공정에 관련된 배출량, 즉 최소한 언론의 표제를 장식하는 수치가 함께 이전되는 것이다. (p.127)
이런 외주화의 규모는 막대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환경 부문에서 진보했다는 각국의 주장을 완벽하게 무력화할 수 있을 정도이다. 영국을 예로 들어보자. 1990년 이후 탄소 배출량 44퍼센트 감축이라는 수치가 실증하는 것처럼 영국은 글로벌 녹색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더 큰 그림을 들여다보면, 영국이 달성한 감축의 대부분이 소거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영국의 수입 가치는 지난 20년간 2배 이상 증가해온 반면, 환경 규제를 시행하는 유럽연합 국가들로부터의 수입이 전체 수입 가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감소했다. 현재 영국의 경우 생산의 상당 부분이 자국 국경 밖에서 이뤄지고 있어, 영국인들이 매일 사용하는 재화를 만드는 데 발생하는 탄소가 영국의 탄소 예산이 아니라 다른 국가들의 탄소 예산에 추가되는 경우가 점점 더 늘고 있다.
수입으로 인한 탄소 소비량이 1997년 절대치 대비 28퍼센트 증가한 영국은 현재 G7 국가 중 배출량 수입 비중이 가장 큰 국가다. 수입된 배출량의 증가는 영국이 대대적으로 홍보한 국내 배출 감축량을 상당 부분 깎아내려, 영국 정부가 발표한 총 감축 44퍼센트를 순감축으로 환산하면 15퍼센트로 줄어든다. 그간의 주장과 달리 영국 정부는 지난 20년간 배출을 실질적으로 감축해온 것이 아니라 배출량을 해외로 이전하는 데 주력해온 것이다. (p.127-128)
본토로 돌아가기 위해 흔들리는 보트에 몸을 실었다. 카누를 타고 수상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이 스쳐 지나갔을 때, 이런 진실이 더없이 자명해 보였다. 우리가 공유하는 경험, 우리가 일하고 생활하는 환경, 삶에서 직면하는 특정한 압박감 그 모든 것이 우리가 주변 환경을 인식하는 방식을 형성한다. 보트를 타고 바다를 누비는 사람이나 수상 가옥의 그늘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과 거기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냉방이 잘되는 호텔 방에 누워 있는 훨씬 더 적은 수의 사람에게 더운 날이나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이 결코 같은 의미를 가질 수는 없다. 노인과 젊은이, 약자와 강자, 주변화된 사람과 지배하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하나의 기후는 모두가 함께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각자의 기후 속에서 혼자 살아간다. (p.170-171)
바로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기후변화가 갖는 의미이다. 기후변화는 재앙적인 홍수, 더스트볼(dust bowl)을 연상시키는 끝이 보이지 않는 가뭄 혹은 거리의 사람들이 쓰러져 사망할 정도의 폭염으로만 경험되는 것이 아니다. 기후변화는 점점 더 커지는 압력, 점점 더 강해지는 압박 요인, 협상력 감소, 노동조건 악화로 경험된다. 다라, 보파, 예이 맘의 사례에서는 농업이라는 렌즈를 통해 이런 압력을 느낄 수 있었다. 가뭄, 예측할 수 없는 강우, 홍수는 농업의 장기적인 전환에 기여했고, 고군분투하는 소규모 자영 농민들을 빈곤, 부채, 그리고 마침내 착취적인 노동으로 내모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페암방 마을의 경우 환경적 압력은 식량이 줄어들고 그 품질이 저하되는 것, 생계 수단이 줄어드는 것, 그리고 국가 공권력에 범죄자로 낙인찍히는 것을 통해 경험된다. 그러나 이것이 유일한 조합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경제와 환경이 거의 끝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p.175-176)
나르싱디의 벽돌 노동자 및 인근 농민들의 이야기를 듣고나서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대기를 더 온난하게 만드는 데, 그리고 더 온난화된 대기가 주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결정하는 데 인간이 지대한 역할을 한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특별하지는 않지만 반복해서 강조할 필요가 있는 깨달음이다. 인간의 경제는 기후 압력에 실시간으로 반응한다. 방글라데시에서 홍수와 가뭄은 토지의 최초 판매 가능성을 높이는 촉매가 되어 해당 지역에서 더 많은 토지 판매를 부추기는 침수, 토지 붕괴, 흉작의 악순환에 불을 붙이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토지를 포기하게 되면서 토지 판매가 전염병처럼 확산되고, 기후변화의 영향이 심화되는 지역이 점점 더 늘어난다. 농사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곧 다카와 다른 도시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도시화의 속도가 빨라지고 벽돌 수요가 증가한다는 의미이다. 농민이었던 사람들이 부풀리고 농장이었던 장소가 부추긴 벽돌 부문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악순환은 이어진다.
이와 같은 과정은 기후변화를 겪고 있는 세계를 뒤집어놓으면서 경관 자체를 바꾸고, 그에 상응하는 노동조건 역시 재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이전에 닥쳤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기후변화로 인해 더 큰 폭풍이 점점 더 많이 발생하고, 더 심한 홍수가 더 빈번해지며, 더 깊은 가뭄이 더 오래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도의 문제이지 종류의 문제가 아니다. 이와 같은 사건은 기존의 인간 체계를 짓밟는 것이 아니라 그 체계의 내부와 주변에서 작용한다. 따라서 느닷없이 극적으로 진행되든 서서히 더디게 진행되든, 재해의 인간적인 차원과 자연적인 차원을 완전히 분리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기후와 기후 압력은 글로벌 경제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p.180-181)
견목으로 만든 물건들은 아름다워 보인다. 그리고 점점 더 증가하는 왕국의 부를 누려온 사람들이 그것을 애지중지할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도시가 하늘로 치솟는 데 기여하는 벽돌처럼 일상적인 사치품은 환경 비용을 유발한다. 2008년 나를 태운 비행기가 포첸통 공항의 도착 터미널로 향할 때만 해도 캄보디아는 여전히 거대한 원시 열대우림을 뽐내고 있었다. 그러나 불과 10년이 지난 지금, 그중 4분의 1, 즉 200만 헥타르에 달하는 숲이 국토에서 사라졌다. 그 광란의 10년 동안 토지는 규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양여되었고, 굉음을 내는 중장비는 원시림을 휘젓고 다녔다. 오늘날 캄보디아의 북동부에 자리 잡은 고산지대인 라타나키리주를 방문하면 수천 년 동안 변함없었던 경관이 좀처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변모했음을 알게 된다. 끝없이 펼쳐질 것만 같았던 정글은 벌목이 끝난 광활한 농지로 바뀌었고, 적색의 라테라이트 토양은 수천 년 만에 처음으로 타오르는 태양에 노출되었다.
바로 이것이 개발의 숨겨진 비용이다. 도시의 부를 드러내는 참신한 새 얼굴을 만드는 데 필요한 원자재는 뜬금없이 등장하지 않는다. 파내고, 채굴하며, 잘라내고, 추출하며, 준설해내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누군가의 소유였던, 그리고 다른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곳이었던 어딘가에서 파내고, 채굴하며, 잘라내고, 추출하거나 준설해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의미의 문제는 오늘날의 환경주의가 품고 있는 문제의 정곡을 찌른다. 환경을 보호하는 것은 최대한 많은 자연을 돌보는 문제일 뿐 아니라 더욱 깊은 수준에서 무엇이, 어떤 방식으로, 누구에게 가치가 있는지를 규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의할 수 없는 것은 보호할 수 없다. 그러나 보호가 필요한 것을 정의할 수 있는 권력은 심히 불평등하다. 지난 30년 동안 다른 많은 가난한 국가들이 전폭적으로 승인했던 것처럼, 캄보디아 같은 국가가 신자유주의 개발 모델을 승인하게 되면 자연 자산을 세계시장에 내놓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 가치에 대한 통제권까지 넘겨주어야 한다. (p.188-189)
그럼에도 히말라야에 자리 잡은 부탄 왕국은 최근 몇 년 동안 빈곤을 줄이는 데 상당한 진전을 보여, 2007년 36퍼센트이던 빈곤율이 2017년 12퍼센트로 감소했다. 또한 놀라울 만큼 성공적으로 숲을 보호해 현재 국가 전체 면적의 약 71퍼센트가 울창한 숲으로 뒤덮여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는 축하할 만한 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지속가능성이라는 지형에 자리 잡은 일각에서는 이 수치를 실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부탄이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일갈한다. 그 사례로는 2020년 초 세계은행이 근대에 보기 드문 보존의 기적을 축하하기 위해 올린 다음과 같은 트윗을 꼽을 수 있다.부탄은 국토의 71퍼센트가 숲으로 덮여 있지만, 숲이 연간 GDP에 기여하는 비율은 2퍼센트에 불과할 정도로 숲 부문의 활용도가 낮다. 부탄이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숲에 투자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활용도가 낮다”니. ‘세계의 허파’이자 지구의 주요 탄소 흡수원인 전 세계의 숲이 매년 1000만 헥타르씩 사라지고 있는 시대에조차, 글로벌 경제 체계를 지배하는 논리는 여전히 이용되지 않은 채로 그저 존재하고 있는 숲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못한다. 부탄은 지구상에서 탄소발자국이 마이너스인 유일한 국가다. 325만 헥타르에 달하는 ‘활용도가 낮은’ 부탄의 숲은 매년 600만 톤의 탄소(부탄의 총배출량의 4배)를 흡수해 지구의 공기를 적극적으로 정화함으로써 부탄 국민뿐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기여한다. 이런 사실을 접하면 많은 사람들은 부탄의 숲이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부탄의 숲이 달성한 대단한 성취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은행의 시선은 글로벌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대들보를 상징한다. (p.190-191)
운이 좋아 학위 과정을 거치는 내내 학비를 지원받은 이들조차 학위를 취득하는 과정에서 빚을 지게 된다. 그리고 심지어 박사 과정이나 박사후 과정을 밟을 때 필요한 연구비를 확보한 이들조차 높은 급여를 받기는 어렵다. 전도유망한 과학자들이나 환경학자들이 더 높은 지위에 오르려면 거의 수십 년 동안 금전적 제약을 감당해야 한다. 따라서 경제적 여유가 없는 저소득층 출신은 지식 생산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된다. 영국에서 학계는 가장 불평등한 전문직 중 하나로, 학계 종사자의 50퍼센트 이상이 가장 많은 특권을 누리는 ‘전문직 및 관리직’ 출신인 반면 노동계급 출신은 고작 15퍼센트에 불과하다. 미국의 보고서에서도 유사한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부모의 교육 수준이 학계에서의 지위를 예측하는 가장 신뢰할 만한 요인 중 하나로 꼽히기 때문이다. 학계의 교수진은 부모가 박사학위를 소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최대 25배 더 높고, 가장 명망 높은 대학에서는 그 비율이 2배 더 높게 나타난다.
심지어 이것은 훨씬 더 큰 이야기의 일부에 불과하다. 전 세계는 대학과 학생, 학자로 가득하다. 중국 2500개 이상, 미국 3000개 이상, 믿기 어렵지만 인도 5000개 이상의 대학을 비롯해 가장 최근 집계된 대학 및 고등교육 기관만 해도 3만 1000개가 넘는다. 그러나 수천만 명의 상급 학자들을 아우르는 이 막대한 지식의 네트워크에서도, 전 세계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학자는 글로벌 북반구(서유럽, 북아메리카, 오스트랄라시아 지역)의 학문 강국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극소수뿐이다. 반대로, 나머지 대다수는 환경 연구를 주도하거나 가장 많은 독자를 거느린 지역에서 연구 성과를 출판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지원받지 못한 채 오직 국지적으로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형편이다.
학문적 불평등을 연구하는 사회학자 프랜 콜리어는 이로 인해 “글로벌 북반구의 인용 횟수와 글로벌 남반구의 인용 횟수 사이에 상당한 불평등”이 발생하고 있으며, “글로벌 남반구에서 생산된 지식을 글로벌 북반구의 학자들은 물론이고 글로벌 남반구 학자들조차 거의 인용하지 않는 형편”이라고 요약한다. 간단히 말해, 글로벌 북반구의 학자들이 환경에 대해, 심지어 자신들이 일하고 생활하는 곳에서 동떨어진 열대 환경에 대해 글을 쓸 때조차 주로 자신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 즉 글로벌 북반구뿐 아니라 서구권에서 연구하고 생활하는 사람들의 연구를 인용한다는 것이다. 글로벌 남반구의 학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환경에 대해 글을 쓸 때 서구권 학자들이 자신들의 국가, 토지, 경관에 대해 논하는 내용을 인용한다. 최근 전 세계 400만 명의 저자가 작성한 2600만 편의 논문을 대상으로 수행한 연구에 따르면, 2015년 상위 1퍼센트의 과학 분야 저자가 전체 인용의 21퍼센트를 차지했다. 대부분 서유럽과 북아메리카 출신인 소수의 학자들이 세계와 환경을 정의하는 데 이례적으로 강력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다른 형태의 지식과 마찬가지로, 기후 지식 역시 권력이다. (p.203-205)
메콩강의 목을 조르는 일이 처음에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아시아 대륙의 절반을 가로지르는 메콩강은 거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콩강에는 메콩강의 힘에 걸맞은 규모의 댐들이 건설되었다. 이 댐들의 육중한 몸체는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하다. 그중 가장 큰 댐은 윈난성의 다차오샨 댐이다. 산악지대의 짙은 녹지 위에 115미터 높이로 솟아오른 거대한 갈회색 콘크리트 오벨리스크인 다차오샨 댐은 엔지니어링의 거대한 위업이다. 다차오샨 댐은 메콩강 강물을 한번에 최대 10억 세제곱미터까지 저장할 수 있는데, 이는 200만 명이 1년 동안 마실 수 있는 식수와 맞먹는 양이다. 다차오샨 댐은 자연의 형태를 바꿀 수 있을 만큼 심대한 힘을 지닌 구조물이지만, 현재 중국이 메콩강 중국 유역에서 운영하고 있는 11개의 주요 댐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 11개의 댐은 위대한 메콩강이 동남아시아에 도달하기 전에 이미 유량의 3분의 1을 퍼올려 가둔다.
그러나 중국이 유일한 원흉인 것은 아니다. 메콩강 하류의 국가들은 메콩강 의존도가 높은데도 세기가 바뀔 무렵부터 거의 중국 못지않은 열정으로 댐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라오스는 ‘아시아의 배터리’가 되겠다는 계획의 일환으로 메콩강의 라오스 유역에만 (대부분 소형인) 63개의 댐을 건설했다. 심지어 메콩강의 수위가 감소하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것으로 알려진 캄보디아조차 2개의 대형 댐과 6개의 관개 저수지를 자체적으로 건설하면서 댐 건설 대열에 합류했다. 현재 메콩강에서 가동되고 있는 수력발전 댐을 모두 합치면 100개가 넘고, 추가로 100여 개가 건설되고 있거나 건설이 계획되어 있다. 이것은 메콩강의 생태뿐 아니라 그 흐름의 역학 자체를 바꿔온 인간의 개입에 대한 기록이다. 이 거대한 자연의 힘은 이제 오롯이 인간의 손아귀 안에 들어와 있다. (p.207-208)
인간의 활동이 미치는 영향력 덕분에, 이제 상류에 자리 잡은 거대한 댐들의 책임자들은 (힘을 합쳐) 메콩강의 흐름을 마치 수도꼭지처럼 위 혹은 아래로 조절할 수 있다. 이는 개발의 힘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력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인 동시에 이런 인적 요인을 얼마나 시급히 고려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즉 산업 활동과 환경 지표에 대한 지역 통계 자료를 국경을 넘어 공유해야 할 필요성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정반대의 사례, 즉 정치와 이해관계가 통계 자료 공개를 방해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메콩강위원회는 표면적으로는 메콩강 하류 유역의 통계 자료를 공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세계에서 가장 취약한 제도 중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그곳에서 들은 말에 따르면 이것은 사실이다. 보란 박사는 이렇게 덧붙였다.그래서 이제 메콩강위원회에 남은 회원국은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뿐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다소 의기소침해지게 됩니다. …… 이 국가들이 메콩강위원회의 회원국으로서 정보 교환을 활성화해야 하는데도 자국의 경제성장 요건에 따라 정보 사용을 두고 힘겨루기를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참 힘들어집니다.
그날 오후 메콩강위원회를 떠나기 위해 정원을 가로지르다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1990년대에 지은 황백색 건물은 붉은 기와, 황량한 로비, 먼지가 쌓인 복도, 색유리를 끼운 창문 등 당시 지은 여느 정부 건물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바로 이것이 요점이었다. 즉 환경에 대한 지식의 근간을 이루는 환경 통계 자료를 지배하는 규칙은 다른 모든 것에 적용되는 규칙과 동일하다. 통계 자료 공유를 위한 협약은 국가의 정치 구조 및 국제 정세뿐 아니라 자원 사용을 둘러싼 더 폭넓은 정치적 논의와도 뒤얽혀 있다. 따라서 환경 통계 자료 공유는 수력발전, 경제개발 전략 공유, 물 관리를 비롯해 메콩강 관리와 관련된 다른 문제와 동일하게 정치적 협상의 대상이 된다. (p.211-212)
몇 주 전, 유엔 개발계획(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me) 캄보디아 지부 사무실을 방문했다. 인상적인 회색 문이 달린 저택이었다. 그곳에서 이런 문제들을 연구하는 기술 전문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이것이 유발하는 문제에 대해 알게 되었다. 당시 기술 전문가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캄보디아 전체를 온전하게 포괄하려면 최소한 200개가 넘는 관측소가 필요한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제 생각에 지금까지 확보한 관측소는 다 합쳐서 100개 정도인 것 같고, …… [게다가] …… 모든 관측소가 제대로 기능하는 것도 아닙니다.” 더 나은 자료 수집을 가로막는 것은 과학 통계 자료를 수집하는 행정과 관련된 정치학이다. 바로 이것이 통계 자료 수집을 도맡은 사람들에게 좌절감을 안기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결국 기술 전문가는 음모를 꾸미기라도 하듯 의자 앞으로 몸을 수그리면서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정치, 그리고 정부 부처의 정책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중앙정부가 예산을 배정하는 한, 의사결정권 역시 정부가 배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문제로 인해 전문가들은 기술적·과학적 의사결정권을 빼앗기곤 한다. 기술 전문가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농업 기상 구역을 고려한 강수량 측정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실무 그룹이 구성되었습니다. 과거에 일어났던 재해를 감안하면 각 주마다 최소한 2개소에서 3개소 정도가 필요한데, 문제는 여기에 인구 밀도가 고려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서로 다른 자금 제공자가 네트워크의 서로 다른 부분에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따라서 주별로 조직이 구성되었지만 올바른 방식으로 구성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런 결정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거리와 수문학(hydrology)도 파악해야 하지만 수문의 형태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 역시 과학이다. 그러나 이 세계는 우주 시대에 걸맞은 정밀한 기상 위성의 세계와 크게 동떨어져 있다. 이 세계는 고장 난 기계, 플라스틱 그릇, 수기로 작성하는 일지, 자원봉사자, 누락된 통계 자료로 이뤄진 어지럽고, 정치적이며, 불완전한 세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세계는 전 세계 각지에서 중요한 통계 자료를 수집하는 데 기반이 되는 중요한 세계이다. 겉모습은 초라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 세계 역시 결국 어딘가에서 통계 자료를 가져와야 하는 기후학이라는 거대한 기계의 일부이다. (p.238-239)
금융·경제·계획의 언어는 구술된 경험을 용납하지 않는다. 관심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진실이라고 평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금융가, 경제학자, 계획가들은 일반적으로 이런 것들의 가치를 명백하게 배척하는 과학적 격언을 채택한다. 영국 과학계의 중심지인 런던에 위치한 왕립학회의 정문에 새겨져 있는 라틴어 격언을 통해 이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과학적 방법의 초석이 된 눌리우스 인 베르바(nullius in verba)는 거칠게 번역하면 ‘아무도 믿지 말라’는 뜻이다. 즉 합리적 사고의 기초는 모호한 설득의 기술이 아니라 객관적인 증거로 이뤄져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1660년 프랜시스 베이컨이 왕립학회를 설립한 이후로 이 격언은 상상할 수 없는 과학적 진보를 뒷받침하면서 세계를 개변해왔다.
그러나 순수한 이성의 영역에도 한계가 있다. 실험실의 증류된 명료함을 벗어나는 순간 가장 순수한 형태의 과학적 사고는 증발해버리기 때문이다. 미묘하게 다른 과학적 결론을 대중적이고 정책적인 언어로 세심하게 번역하기 위해서는 눌리우스 인 베르바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목표를 추구해야 한다. 즉 설득력 있고 권위 있는 논거를 제시함으로써 추가적인 증거에 의존하지 않고도 청중을 납득시켜야 한다. 논거의 기저에 깔려 있는 엄격함을 조금이나마 보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큰 주의를 기울여 이런 전환을 관리해야만 한다. 그러나 아무리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다 한들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접근법이 있을 리 만무하다. 연구 결과를 아무리 세심하게 설명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이 선택한 방식으로 해석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과학적 내용을 엄격히 전달하는 단체로 여겨지는 IPCC가 자신의 보고서가 대중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 이내 알아차린 현실일 것이다. (p.243-244)
기후변화 담론에서 가장 폭넓게 공유되는 신화 중 하나는 기후변화가 자연재해의 발생 가능성을 높이고, 그 부담이 더 가난한 국가에 ‘편중된다’는 발상이다. 이는 대통령에서 교수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거론하는 격언이다. 그러나 이 격언에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 기후변화는 더 많은 자연재해를 유발하는 요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재해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재해는 폭풍, 홍수 또는 가뭄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재해는 이런 위험 요소가 취약성 및 경제적 불평등을 만났을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 싱가포르의 주민들과 동티모르의 주민들에게 허리케인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것이다. 싱가포르의 경우에는 기록적인 폭우가 유리창을 두드리는 바람에 몇 시간가량 집 안에 발이 묶이는 것을 의미하겠지만, 동티모르의 경우에는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 물리적인 지리가 아니라 세계의 일부 지역을 다른 지역보다 기후변화에 더 취약하게 만드는 글로벌 경제에서 기인하는 차이다. 글로벌 공장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삶에 중대한 요인이 된 오늘날 ‘개척되지 않은’ 생계 수단과 환경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 대신 생계 수단과 환경은 글로벌화된 생산의 변덕에 따라 재구성되거나, 저하되거나, 보호된다. 그러므로 자연재해는 경제적 재해, 즉 수 세기에 걸쳐 이뤄진 불평등한 무역과 오늘날의 상업이 일상에 미치는 영향의 구체적인 결과이다. 분명한 사실은, 심지어 변화하는 기후라는 불확실성을 겪으면서도 재해의 발생을 용인하는 선택이 지금껏 우리 사회가 해왔고 앞으로도 계속할 선택이라는 것이다. (p.267-268)
이런 현상은 식민주의가 오늘날의 기후 취약성에 미친 영향을 매우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19세기 영국의 식민지 개척자들이 없었다면, 스리랑카의 고산지대에서 차를 재배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플랜테이션이 없었다면, 산사태는 훨씬 더 적게 일어났을 것이다. 찻잎을 딸 필요도 없었을 것이므로 산사태에 노출되는 사람들도 훨씬 더 적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일어나는 산사태는 모두 오랜 지배의 역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추가적인 차원이 작용한다. 스리랑카는 차의 시장가치를 결정할 입장에 있지 않다. 그리고 1장에서 간략하게 설명한 이유로 인해, 스리랑카 경제를 떠받치게 된 농산물과 광물 같은 1차 수출품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기도 어렵다. 한 국가의 힘만으로는 역사를 거치면서 고착화된 환경적 취약성의 경제를 뒤집을 수 없다. 식민주의가 환경에 남긴 유산을 평가할 때 무엇보다 바로 이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2세기에 걸쳐 배출된 탄소는 자연재해의 위험을 증가시켰을지 모르지만, 5세기에 걸쳐 이뤄진 지배는 자연재해와 맞닥뜨리게 되는 맥락을 형성한다. (p.270-271)
완곡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모든 행동이 전 세계의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얽히고설킨 그물망과 같아서 추적하기 매우 어렵다. 노력 자체가 헛되다는 말이 아니라 혼자 기울이는 노력이 헛되다는 말이다. 윤리적 표식을 붙일 수 있는 경우가 있고, 그것이 유용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윤리적 표식은 완벽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대부분의 소비자에게는 이런 표식들의 상대적 가치를 면밀하게 조사할 시간이나 능력이 없다는 것이 그 한 가지 이유이며, 이뿐만 아니라 추가 비용을 지불할 재정적 자원을 갖지 못한 소비자들 역시 많다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이유이다. 실제로, 제품을 조사하느라 슈퍼마켓에서 몇 시간을 머무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제품과 관련해 찾아낸 정보 때문에 빈손으로 슈퍼마켓을 떠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지속가능한 생산이라는 거대하고 복잡한 문제를 소비자가 혼자서 해결하기에는 일상의 긴급한 필요가 너무 크다. 기후붕괴의 부담을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것은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불공평하다. 평범한 사람들 대부분이 기후위기에서 이익을 취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막대한 손해를 보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전 세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소비를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제시하는 것은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농간을 부리는 것에 가깝다. (p.275-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