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 Read Code

 

시월의 저택 / 레이 브래드버리 / 폴라북스

 

 "태어난 후로 나는 한 번도 죽지 않았다네. 위태롭기는 해도 죽지는 않았지. 온 세상 문의 경첩에 기름칠을 하더라도, 언제나 기름칠되지 않은 문 하나, 경첩 하나만은 남아 있었으니까. 나는 그런 곳에서 하룻밤, 1년, 또는 한 사람의 일생 동안 잠들어 있곤 했지. 이런 식으로 나는 자신만의 언어를, 지식의 보고를 지닌 채 대륙을 건너 자네들과 함께 쉴 수 있게 된 거라네. 이 넓은 세상의 모든 열리고 닫히는 존재들의 대표로서 말이야. 내가 쉬는 장소에는 버터도, 윤활유도, 베이컨 껍데기 기름도 바르지 말게나." (p.170)

 

 때로 잠을 이루지 못할 때마다, 티모시는 여기저기 벽난롯가에 누워 연통을 바라보며 한밤중의 친구를 불러낸 다음, 온 세상을 돌아다니는 바람의 여행 이야기를 청하곤 했다. 벽돌로 덮인 연통을 따라 정령들의 이야기가 어둠 속의 눈송이처럼 내려와 귀를 간질이기 시작하면, 아라크는 흥분해서 뒤척거렸고, 생쥐의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왔고, 아누바는 고양이의 감각으로 기묘한 동족의 존재를 알아채서 자리에 일어나 앉곤 했다. (p.191)

 

 

데이터베이스 첫걸음 / 미크, 기무라 메이지 / 한빛미디어

 

 엔지니어 중에는 돈 이야기를 귀찮거나 재미없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하는 일이 고객이나 회사에서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생각할 수 없는 엔지니어가 만든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자기만족으로 끝나 버리게 됩니다. 필자는 이 책의 독자들이 이런 멋대로인 행동을 하는 엔지니어가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번 장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돈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p.61)

 

 

컨테이너에 들어간 식물학자 / 최성화 / 바이오스펙테이터

 

 식물학자들이 오랫동안 중요하게 관심을 두고 있는 문제는 식량이다. 모든 식량의 바탕에는 식물이 있다. '인구가 이렇게 늘어만 가고 있는데, 기후는 온난화되고 토양의 비옥도는 떨어져간다. 이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먹여 살릴 것인지…' 식물학자들의 고민이다.
 뛰어난 식물학자들은 식량문제를 농업혁명으로 풀어냈다. 노먼 어니스트 볼로그(Norman Ernest Borlaug)라는 식물학자는 키가 작은 품종의 밀(소노라 64호)을 개량해 수확량을 두 배로 늘렸다. 이렇게 개량된 품종의 밀은 기아 상태에 놓여 있는, 적어도 수억에서 많게는 수십억 명의 목숨을 구한 것으로 여겨졌다. 노먼 어니스트 볼로그는 공로를 인정받아 1970년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p.23-24)

 

 바이오 의약품 생산에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이유는 생산 과정의 특징 때문이다. 바이오 의약품의 생산 과정을 거칠게 살펴보자. 우선 커다란 통에 유전자가 조작된 동물세포를 채워야 한다. 이 동물세포는 의약품으로 쓸 물질, 예를 들어 항체를 만들게끔 유전자 등이 조작된 것이다. 이렇게 바이오 의약품 생산에 필요한 동물세포를 만들고 충분한 양으로 늘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통에 가득 찬 동물세포가 항체를 만들어내려면 영양분과 산소가 필요하다. 통에 영양분과 산소를 넣어서 동물세포를 기르면, 동물세포는 항체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물질을 만들어낸다. 그러면 이렇게 만들어진 여러 가지 물질 가운데, 약으로 쓸 항체만 순수하게 분리 정제해서 약병에 담아서 병원으로 옮긴다. 동물세포는 사람에게 감염되는 바이러스 등으로 오염될 수 있으므로, 생산설비는 매우 섬세하게 관리가 되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에는 연구실 수준의 첨단 장비와 숙련된 인재가 필요하다. 당연히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 (p.39-40)

 

 그런데 문제는 세계보건기구가 발표한 올해의 독감 바이러스가, 제약기업들이 백신을 만드는 사이에 변이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독감이 유행하면 백신은 쓸모없어진다. 제약기업 입장에서는 기껏 만들어놓은 백신이 쓸모없어져 손해를 보는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독감이나 독감보다 치명적인 유행병이 돌기 시작하면 환자들이 별 대책 없이 당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는 사스(SARS)나 메르스(MERS)처럼 빠르게 퍼지면서 치사율까지 높은 유행병에서 이미 겪은 일이다. 현재 동물세포 기반 바이오 의약품 시스템으로는 대응하기가 어렵다. (p.64-65)

 

 소나무는 자기들끼리 모여서 산다. 그리고 소나무들 사이에는 다시 서로 도움을 주거나 때로는 경쟁하는 다른 식물 종들이 모여 있다. 이는 전체로 하나의 커뮤니티(숲)를 이룬다. 커뮤니티는 눈에 보이는 땅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땅속에서도 서로 뿌리가 얽히며, 여러 미생물들이 함께 만드는 커뮤니티가 있다. 이런 복잡한 커뮤니티가 안에 있을 때 소나무는 피톤치드처럼 우리에게 이로운 천연물도 뿜어낸다.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이주시켜온 식물을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지만, '서울로 7017 프로젝트'는 식물을 생물로 보지 않는 시선이 끼어들어가 있다. 대도심 한복판 옛 고가도로 위에 전국에서 온 식물로 정원을 만들겠다는 계획은,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전 세계에 있는 동물들을 한 곳에 모아둔 동물원과 구조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원래 함께 살지 않는 식물들을 원래 살 수 없는 곳에다 옮겨 놓고, 사람 눈에 보기 좋으라고 군데군데 깔아 놓았으니 말이다. 연구와 보존 목적이 아닌 동물원에 대한 비판이 힘을 얻고 있다면, 이런 부분도 함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p.70-71)

 

 식물에서 항체 의약품을 만든다고 하면 제일 먼저 받는 질문이 면역 시스템의 차이다. 식물에는 항체를 만들고 이용하는 면역 시스템이 없다. 당연히 동물에서 항체가 움직이는 길인 혈관 같은 내분비계가 식물에는 없다. 간혹 식물에 있는 물관과 체관도 관이고 통로이니 내분비계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것 아니냐고 묻기도 한다. 물관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물리적인 구조물로 죽은 조직이다. 잎에서 수분이 증발하면 뿌리에서 흡수된 물을 끌어올리는데, 이 과정에서 식물이 쓰는 에너지는 없다. 가장 키가 큰 식물은 높이가 100여 미터 내외인데, 100여 미터 위로 물을 끌어올리면서 에너지를 하나도 쓰지 않는 효율적인 시스템이다. 하지만 내분비계와는 거리가 있다. (p.74)

 

 과학은 대체로 누가 알아줄 것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돈이 될 것 같아서 하는 것만도 아니다. 국제 식물 분자 농업 학회가 있다. 전 세계에서 효소, 항체, 백신을 연구하는 과학자 300~500명 정도가 모인다. 이 사람들은 모여서 아프리카에 사는 가난한 사람, 병에 걸렸고 병을 치료할 약이 있지만 돈이 없어 약을 못 먹어 죽을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 어떻게 병에 걸렸는지도 모르고 심지어 지금 병에 걸려 있는지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대책을 만들어줄 수 있을지 논의한다. (p.111-112)

 

 힘들지 않은 병은 없다. 몸이 힘든 것은 물론이고, 마음이 힘든 것도 무시할 수 없다. 고통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두려움, 건강하지 못해 세상으로부터 소외되는 느낌 모두 환자를 힘들게 한다. 그러나 가장 힘든 것은 약이 있는데 돈이 없어 치료할 수 없는 재정 독성(Financial Toxicity)이다. 기대수명은 늘어나 살아 있는 동안 점점 더 많은 질병을 만날 것이지만, 무한정 늘어나는 의료비를 사회가 모두 감당해주기도 힘들다. 과학은 힘들 때 기꺼이 손을 내밀어야 한다. (p.113)

 

 

아직 멀었다는 말 / 권여선 / 문학동네

 

 엄마, 우리 중에 누구라도 먼저 손 아프면 바꿔 잡자고 말하자. 민수가 말했다. 그러자, 아프면 바꿔 잡자……고 말해야 되는데, 욕하고 때리고 아프게 하면 싫다고 얘기해야 되는데, 장난하고 폭력은 다른 건데…… 종결, 종결이란 담임의 말이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 아, 이런 생각은 그만두자. 그분만이 모든 일을 종결하실 수 있다. 그녀는 한사코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미간을 찌푸렸다. 집에 갈 때까지 민수랑 몇 번이나 손을 바꿔 잡을까. 다섯 번 일곱 번 열 번? 내가 석 달 동안 몇 킬로나 살을 뺄 수 있을까. 십 킬로 이십 킬로 삼십 킬로? 이 모든 것도 그분만이 아시겠지, 나의 기쁨 되시는 그분만이…… 필사적으로 그런 생각에 매달리느라 해옥은 아들이 뭐라 뭐라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걔네들 전학 가면…… 불쌍해…… 불쌍해서 안 돼…… 전학이 얼마나 힘든데…… (p.165-166)

 

 그는 누가 들을까 두려운 듯 작게 속삭였다. 나도 덩달아 숨죽이고 기다렸다. 아이는 몇 걸음 걸어가다 말고 갑자기 기쁨에 차서 엄마를 올려다보더니 엄마 손을 자신의 조그만 두 손으로 감싸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엄마의 통통한 팔목에 몇 번이나 입을 맞추었다. 그런 귀엽고 돌연한 애정표현에 엄마는 그저 웃고 말았지만 나는 놀라운 선율의 음악을 들었을 때처럼 완전한 감동에 사로잡혔다. 그와 나는 마주보았다. (p.248)

 

 무슨 말이 하고 싶으냐 하면, 해옥과 민수가 불행하다고 하는 건 충분치 않다는, 이 이야기가 가련한 인물들을 애석하게 바라보게 하는 서글픈 것으로 읽혀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해옥의 생, 민수의 삶이 불행한 인간의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이들이 불행한 것이 아니다. 아니, 이들이 겪는 일이 불행이라 불릴 수밖에 없는 고난일지라도 그것을 이들 개인에게 속한 불행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들은 불행을 겪는 것이 아니라 부당함을 겪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들의 고통에서 당신이 슬픔을 느꼈다면, 그 고통의 당사자를 불행의 주인으로 알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속한 사회의 부정을 대신 겪어내는 누군가로 여겼기 때문이리라. 그 슬픔은 누군가의 단독적인 아픔을 알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인간들 사이의 근본적인 의존성을 생각하게 만든다. 이번 소설집에서 우리가 타인에 대해 느낀 슬픔은 공감보다는 책임감일 것이다. (p.263-264)

 

 

20 VS 80의 사회 / 리처드 리브스 / 민음사

 

 중상류층이 다른 이들을 다 제치고 저 멀리 앞서 나가고 있다고 많은 미국인이 느끼게 된 데는 몹시 타당한 이유가 하나 있다. 바로 사실이 그렇다는 점이다.
 가구 소득 기준으로 상위 20퍼센트(연간 소득 11만 2000달러 이상)는 나머지와 뚜렷하게 분리되고 있다. 이는 통장 잔고와 월급 액수 등에서 드러나는 경제적인 분리이지만 학력, 가족 구성, 건강과 수명, 심지어 시민 공동체 활동 등에서도 분명하게 차이가 나타난다. 경제 격차는 점점 더 깊어지는 계급 격차의 가장 가시적인 한 측면일 뿐이다.

 

 문제는, 얼마나 투박하게 표현되었든 간에 우리(중상류층)에 대한 사람들의 비판이 대체로 옳다는 데 있다. 우리는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모두 따져 보면 자유 무역, 기술 진보, 국제 이주 등이 미국에 '순'이득을 가져온다고 말한다. 우리 자신은 플러스를 누리는 쪽에 안전하게 위치하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 말이다. 우리는 고도의 인적 자본으로 무장하고 있어서 글로벌 경제에서 성공하기에 유리하다. 우리가 사는 도시의 토지 용도 규제는 우리 동네의 집값을 지켜 주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진입 장벽을 만들게끔 되어 있다. 비전문직 종사자들은 치열한 시장 경쟁에 노출되어 있지만 우리는 전문 자격증 제도와 저숙련 일자리 쪽으로 치우친 이민자 정책 덕분에 격렬한 시장 경쟁에서 보호받는다. 우리는 자유 시장의 장점을 떠벌리지만 자유 시장이 일으키는 위험에서는 대체로 안전하게 보호받는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분노를 느끼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너무나 많은 미국의 중상류층이 자신과 자녀의 성공을 전적으로 본인의 재능과 머리와 노력 덕분이라고 굳게 믿는다. 미식축구 코치 배리 스위처의 생생한 표현을 빌리면, 그들은 "삼루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자기가 삼루타를 친 줄 안다."

 

 아메리칸 드림이 죽었다고, 또는 죽어 가고 있다고 선언하는 것이 미국 정치인들 사이에서 유행인 듯하다. 그러나 아메리칸 드림은 죽지 않았다. 아메리칸 드림은 살아 있고 건재하지만, 중상류층인 우리가 그 꿈을 사재기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그 꿈을 공유할 의지가 있는가?

 

 세습되는 지위(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지위 어느 것이든)라는 개념은 미국의 자아 이미지와 상충한다. 미국 사람들은 미국 사회가 지배층 구성원이 건전하게 순환하는 열린 사회라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당신이 무언가를 잘하면 작위가 아니라 훈장을 받는다. 아무도 단지 부모가 누구라는 이유만으로 중요하고 높은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내가 보니 미국인들은 왕족, 공주, 왕자 이야기를 무척 좋아하던데, 현실에서 자신이 왕족에게 지배받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인에게 외국의 왕이나 여왕은 디즈니 만화의 등장인물이나 마찬가지다. 보기에 재미있고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

 

 철학자 존 롤스는 공정한 사회는 사람들이 계급 사다리에서 자신이 어느 칸에 있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의 표현으로는 "무지의 베일"을 쓴 상태에서, 그 사회의 사회 구조에 동의할 수 있는 사회라고 말한 바 있다. 무지의 베일을 쓴 상태는 "자신이 사회에서 어느 자리에 있게 될지, 자신의 계급적 지위나 사회적 지위가 무엇이 될지, 또 자신이 자연적으로 갖게 될 능력, 지능, 강점 등이 어느 정도일지 알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다음과 같은 악순환 고리가 작동하고 있다.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것은 중상류층에서 떨어질 경우 더 깊게 추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중상류층 부모는 자녀가 떨어지지 않도록 유리 바닥을 깔아 주고자 할 동기가 커지며,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원도 있다. 그래서 기회 사재기를 포함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해서 자녀의 하향 이동 위험을 줄여 주려고 한다. 그들의 노력이 성공적일 경우, 위쪽이 더 경직적인 계층 구조가 생겨나게 된다. 그러면 중상류층은 자녀가 계층을 계속 유지할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어 재분배 정책에 돈을 지불할 의향이 줄어든다. 그러면 불평등이 더 심화된다.

 

 계급이 인위적인 형태의 상속을 통해서가 아니라 시장에서 인정받는 능력을 통해 재생산될때, 승리자들은 그 결과로 발생하는 모든 불평등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확신하기 쉽다. 패배자들에게 자원을 재분배하는 것이 오히려 불공정하게 느껴진다. 자신이 공명정대하게 승리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소득층 사람들은 부자가 부자인 이유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소득이 높지 않은 사람들은 부자가 부자인 이유는 조건이 더 유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독특하게 미국적인 공식이 만들어진다. '평등 + 독립 = 상향 이동의 약속.' 이것은 '개인주의의 평등주의적 형태'다. 하지만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로서 스스로 성공하는 데 필요한 기회와 도구는 허공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 기회와 도구는 우리의 공동체에서, 관계에서, 제도에서 만들어지기도 하고 파괴되기도 한다. 개인적인 성공은 집단적인 투자에 달려 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인적 자본 형성기에서의 격차를 좁히는 것이다. 특히 생애 첫 20년 사이에 생기는 격차를 줄여야 한다. 이는 화목하고 안정적인 가정, 헌신적인 양육, 양질의 교육 환경 등 중상류층 아이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것의 상당 부분을 더 많은 아이들이 누리게 해야 한다는 의미다. 중상류층 부모는 이런 면에서 잘못하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모범이 될 만하다. 하지만 중상류층이 누리는 이득 중에는 반경쟁적이고 불공정한 방식으로 얻는 것들도 있으며 이런 것들은 사라져야 한다.

 

 하버드 학생들의 명예를 위해 말해 두자면, 하버드 대학의 학생 신문 《크림슨》은 오랫동안 동문 자녀 우대제를 맹렬히 반대해 왔다. 그들은 동문 자녀 우대가 "(부자들에게) 어떤 노력이나 헌신도, 심지어 선의도 요구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제공되는 지원"이라고 묘사했다. 불평등이라는 거대한 문제에 비하면 이것은 사소한 문제 아니냐는 흔한 반론에 대해 《크림슨》은 이렇게 응수했다.

 긴 말 필요 없이, 하버드의 동문 자녀 우대제는 옳지 않다. 덜 가진 학생에게서 기회를 빼앗아 더 가진 학생에게 주는 것이다. …… 이 제도를 없앤다고 모든 것이 완벽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완벽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해서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를 추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동문 자녀 우대제가 없는 하버드는 의심의 여지없이 지금보다 더 나은 하버드일 것이다.

 

 의원실, 로비 회사, 워싱턴 D.C.의 싱크탱크도 여름이면 인턴으로 넘쳐난다. 《이코노미스트》의 추산에 따르면 미국 의회에만도 6000명의 인턴이 있다. 많은 인턴이 무급이고 연줄이나 특혜를 통해 들어온다. 인턴을 채용하는 기관들은 으레 인턴들이 집에서 생활비를 받을 것으로 가정한다. 경제 정책 연구소(Economic Policy Institute) 부소장 로스 아이젠브레이가 언급했듯이, "부모가 한 달 벌어 한 달씩 어렵게 살고 있다면 어떻게 자녀가 인턴으로 일하겠는가?"

 

 기회 사재기는 하나의 커다란 기계가 작동해서 나오는 결과가 아니라 개인들의 작은 선택과 선호들이 일으킨 효과가 누적되어 생기는 결과다. 내 딸이 좋은 대학에 동문 자녀 자격으로 입학할 수 있게 조금 밀어 주는 것, 내 아들이 인턴 자리를 잡아 전문직 직업의 세계를 맛볼 수 있게 돕는 것, 주택 밀도를 낮게 유지하겠다고 말하는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 등을 하나씩 따로따로 보면 사소해 보인다. 하지만 많은 "미시적 선호들"(경제학자 토머스 셸링의 표현이다)이 그렇듯이 이런 것들이 종합되면 사회 전반의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의원들과 기자들은 4년제 대학에 집착한다. 그들이 다 대졸자들이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계층 이동성을 높이는 데서 유의미한 진전을 일구고자 한다면, 저평가된 2년제 학위 과정에도 4년제에 못지 않은 관심을 쏟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조세 개혁은 다이어트와 같아서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어렵다. 모든 이가 더 간소한 조세 제도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기존에 자신이 누렸던 세제 혜택은 유지하고 싶어 한다. 또 부유한 사람들에게 세금을 걷자는 의견에는 다들 찬성하지만, 아무도 자신이 부유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연간 10만 달러 이상을 버는 사람 중 절반은 연 소득이 50만 달러는 되어야 부유층이라고 생각한다.

 

 변화를 위한 정치적 연대를 이루려면 중상류층처럼 강력한 유권자 집단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더 작거나 더 먼 집단을 공격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들은, 문제는 가난한 사람이나 이민자라며 우리를 안심시킨다. 진보주의자들은, 슈퍼 리치가 미국을 좌지우지하는 게 문제라고 말한다. 이런 논의 구도에서는 우리의 정치 성향이 어느 쪽이든 우리(중상류층)는 스스로를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워 오브 머니 / 정창수 / 이매진

 

 채무 제로 선언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채무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빚 규모가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하거든요. 지자체의 채무 운영 상황을 시민들은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채무 제로가 선언되면 채무가 정말 없어졌다고 오해하죠. (p.193)

 

 예산을 쓸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목적'입니다. 왜 돈을 써야 하고, 왜 그 돈이 꼭 필요한지를 오목조목 따져야 합니다. 견제 없는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의원들이 잘못했다고 입으로 욕하고 손으로 키보드 쳐봐야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잠깐 문제를 덮을 뿐입니다. 예산 빌런은 시민들이 나서서 처리해야죠. (p.210)

 

 수요 예측은 누가 할까요? 이른바 '전문가'들입니다. 다들 전문가가 하는 말이라면 솔깃합니다. 어려운 용어를 써가며 현란한 논리를 펼치니 들어보면 그럴듯하죠. 그렇지만 그런 전문가들도 '갑'인 지자체가 주는 용역을 받고 일하는 '을'일뿐입니다. '갑'이 내는 의견을 결과에 반영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는 겁니다.
 예산 전쟁에서는 '통계가 권력'이라는 말이 흔히 쓰입니다. 숫자는 돈으로 환산되죠. 가장 큰 문제는 통계를 내는 자료를 수집하는 일부터 계산하는 일까지 무엇 하나 투명하지 않다는 겁니다. 투명하지 않으니까 이쪽 말이 맞는지 저쪽 말이 옳은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상호 검증이 불가능한 상태인 거죠. 의정부 경전철만 봐도 수요 예측에 쓴 자료나 계산법 등을 시의회에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p.214)

 

 한국은 해외에서 원조를 받다가 주는 나라로 바뀐 나라입니다. 세계에서 하나뿐인 사례죠. 오디에이(ODA)는 나라 안이 아니라 나라 밖에서 펼쳐지는 돈의 분배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 돈으로 남의 나라 도와줄 거면 차라리 우리 어려운 사람들을 돕지."
 막상 빈곤층을 위해 그 돈을 쓰겠다고 하면 나서서 반대할 사람들입니다. 복지와 분배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돈의 쓰임새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돈 쓰는 게 싫을 뿐이죠. (p.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