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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 / 지젤 사피로 / 이음

 

 이 책의 번역자이자 문화 연구자로서, 이러한 질문을 다룸에 있어 문화 매개자의 책임을 다시금 강조하고 싶다. 투자·배급사, 출판사, 미술관, 비평가(같이 나열하지만 앞선 매개자들과 다른 위치에 있고 ‘인정’ 기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지위가 다르다는 점을 밝힌다) 등, 작품 창작자와 관객, 독자, 청중 사이를 매개하며 창작물과 창작자의 경제적, 상징적 가치 생산에 참여하는 문화 매개자들이 논란을 앞에 두고 창작자나 소비자 뒤로 물러나서는 안 된다. 게다가 그러한 가치로부터 물리적, 상징적 이익을 얻는 입장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아울러 작가와 작품에 공공 지원을 하는 국가 기관들과 그들에게 상징 자본을 축적해 줄 수 있는 힘을 지닌 결정 기관들 또한 마찬가지다. 소비자의 보이콧을 일종의 방패 삼아 구체적인 해명과 입장 표명 없이 작품을 시장에 존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나, 소비자가 정당하게 행사하는 보이콧을 ‘검열’이라 치부하는 것이나, 작가에게도, 작품 감상자에게도, 피해자에게도, 문화 생산 장에도 이롭지 않아 보인다. (p.15-16)

 

 문학 재판에서, 고소당한 작품을 분석할 때 저자라는 사람을 함께 묘사하게 되는데, 이는 (다음 장에서 살펴볼) 동기를 탐색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저자의 도덕성, 진실성, 선의, 사심 없음, 창조적 기획의 진지함에 대한 증거를 보여 주며 저자와 작품을 구별하는 것은 소송에서 변호 전략이었다. 19세기에는 지배 계급 자체가 일종의 도덕성을 드러내는 지위였다. 거기에 속하지 않는 자들은 그들의 평판, 정직성, 결혼 상황, 가족에 대한 헌신을 돋보이게 해야 했다. 예를 들어 공쿠르 형제의 변호인은 형제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미심쩍어 보일 수 있어서 이들의 협력을 가족적 가치의 증거로 강조하고, 형제를 “선한 젊은이들”이라 소개하며 이들에게 “20년째 오래된 가정부”가 있다는 사실을 “존경할 만한 특징”으로 언급했다. (p.59-60)

 

 거리 두기 전략은 허구적 인물뿐 아니라 화자라는 형상에도 관련된다. 고전적 관습에 따르면 화자는 저자와 일체가 되어 그의 목소리를 내고 윤리적 입장을 표현한다. 발자크는 자신이 만든 인물들을 서슴없이 판단한다. 동일한 취지에서, 비난받아야 마땅한 소행은 벌을 받아야 하고, 하물며 화자의 존재감이 적은 연극에서도 그러하다. 검사 피나르는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객관적 화자를 일부러 선택한 플로베르가 여주인공의 행동을 나무라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그녀의 자살은 그녀 자신의 선택이었기에, 이 검사에게는 불충분했다.
 플로베르가 괴테에게서 영감을 받아 프랑스에 들여온 저자, 화자, 인물 구별은 근대 문학에서 관례가 되었다. 이것은 재현과 옹호의 구별을 가능하게 했고, 법정에서도 인정되었다. 예를 들어, 2005년에 인종 및 종교 혐오 선동, 공개적 인종 모욕, 인간 존엄성 침해, 미성년자가 볼 가능성이 있는 음란한 내용 전파를 사유로, 반유대주의자인 1인칭 화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 『포그롬(Pogrom)』의 저자인 에릭 베니에-뷔르켈과 출판사 플라마리옹을 상대로 기소가 이루어졌는데, 기소 사실에 대해 끝내 무죄 선고가 내려졌다. 법원은 옹호와 재현은 다르다는 점을 명확히 했고, “작가는 예술 창작에 있어 많은 자유가 필요하며, 합의를 이루는 주제만큼이나 충돌되는 주제, 충격을 주는 주제, 걱정을 끼치는 주제에 대해서도 표현할 수 있다”고 간주했다. (p.61-62)

 

 그래도 역시 제라드 주네트가 썼듯이, “서사가 있는 허구적 장르에서 특정한 발화는, 특히 일반적으로 자유 간접 화법이라 칭하는 것은 말하는 이가 등장인물인지 저자-화자인지 독자로서 알 수 없기 때문에 미확정 상태이며, 확정할 수도 없다.”
 저자와 화자의 거리 두기 방식으로는 사회 환경을 탐구하는 학자와 같은 객관주의적 태도 취하기부터―이러한 태도는 플로베르 이후 자연주의자들이 계승했다―아이러니, 그리고 증언이나 내적 독백 기법을 활용한 허구 세계 내적 관점 채택이 있다. 화자와 저자의 이러한 구별은 예술의 자유와 픽션의 권리를 주장하는 ‘심미주의적’ 관점의 기반이 된다. 하지만 심미주의적 관점은 일인칭 인물 또한 취할 수 있고, 자전적 이야기, 회고록, 일기 등에서도 연출될 수 있다.
 문학에서든 노래, 영화, 연극, 오페라에서든 저자, 서술적 시점, 인물의 관계는 복잡한 관계 공간을 형성한다. 이 공간에서 저자의 개성, 전기, 가치들의 관련성은 허구화 작업에 의해 우의적이거나 은유적인 형식으로 가려지기도 하고, 명료하게 내세워지기도 하는데 이는 특히나 자전적 작품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두 가지 글쓰기 전략 사이 다양한 가능성이 생겨난다. 일기에서 저자와 화자를 완전히 동일시하는 것, 자전적 작품에서 저자와 화자 관계를 문제 삼는 것, 오토픽션(autofiction)에서 허구적 요소를 도입하고 때로는 다소 높은 수준의 소설적, 시적 허구화까지 이르는 것(그것이 어느 정도 은밀하게 자전적 요소를 도입하는 것을 저해하진 않는다)이 그러한 가능성이다. (p.62-63)

 

 문화계 종사자들 측에서 내세우는 바는 피에르 주르드의 다음 발언처럼 예술의 자유, 그리고 이를 도덕과 분리하는 일이다.

마츠네프 사건에서처럼 어떤 나쁜 일을, 특히 강간만큼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예술가는, 법정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나는 재차 주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예술가로서 검열하고 그에게 상이나 보상을 주지 않는 것은, 창작의 자유에 반하는 모든 침해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것이다. 예술사는 위대한 예술가이기도 했던 비열한 작자들로 가득 차 있으며, 도덕이 창작에 끼어들 여지는 없다. 아델 에넬은 셀린을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고 말한 바 있다. 셀린은 유대인들을 죽일 것을 호소했는데, 이건 그녀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인간과 작품을 분리할 수 있고, 다른 때에는 분리할 수 없는 것인가?

 그러나 주르드는 아델 에넬의 입장을 올바르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녀는 폴란스키의 영화를 검열하자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세자르가 그에게 수여한 상에 반대하여 항의했다. 이러한 공인(公認)은 영화계에 존재하는 아동 성범죄, 강간, 남용에 대한 사건들을 무시하는 듯했으며, 아델 에넬도 청소년기에 영화 〈악마들〉 촬영 당시 감독 크리스토프 뤼지아로부터 그러한 일을 겪었던 당사자였다. 여기서 논점은 감독에게 수여되는 보상이, 매우 어린 여성을 피해자로 만드는 권력 남용을 눈감아 주는 시스템을 영속시키는 데 기여한다는 점이다. (p.99-100)

 

 작품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급진적인 입장과 중도적인 입장은 두 가지 생각에 있어 일치한다. 하나는 예술적인 인정이 공인의 한 형태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공인이라는 행위가 사회적인 인정으로 작용하면서 작가들의 권위에 의한 남용을 은폐하고 심지어 그 작가들을 ‘저주받은 예술가’의 반열에 올려놓으며 남용을 정당화할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어쨌든 이 토론이 예술의 자유와 도덕적 검열이 대립하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은 사실이다. 행위의 심각성에 대한 판단, 사법 영역과 사회 영역의 구별, 형 집행 이후 사회 복귀, 예술적 공인의 사회적 의미 등과 관련한 다른 논의들도 언급된다. 직업 윤리 규정에 대한 질문 또한 제기되는데, 의사, 변호사, 교사와 같은 다른 직업들과 달리 창작 직능의 직업 윤리는 성문화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폴란스키의 사례와 뤼지아의 사례에서 바로 이 질문이 제기된다. (다른 방식으로 심각한 베르트랑 캉타의 사례와 달리) 비난받아 마땅한 행위가 직업 활동 중에 그들이 가진 권위적 위치를 남용하여 행해졌다. 진료 중에 환자나 미성년자를 불필요하게 만진 의사는 의사회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고 그의 활동은 일시적으로나 영구히 중단될 수 있다(항상 이렇게 되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고소가 필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규범과 실천 사이에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업 윤리 규정은 명백하게 제한을 제시하고 권위의 상황에 내재한 위험을 인지시킨다는 장점이 있다). 창작자들에게는 이러한 직업 윤리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창작 직군을 규제해야 할 것인가? 이 질문은 적어도 토의할 만하다. 직업 윤리가 언제나 체계화된 규정의 형태를 띠지는 않지만, 그것은 직업에 대한 규범으로서 어느 정도 암묵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p.107-108)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작가와 작품은 분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앞서 보았듯 작가와 작품의 동일시는 절대로 완전하지 않으며 작품이 작가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먼저 작품은 제작 과정 자체에서 작가로부터 벗어난다. 제작 과정의 초반에는 창조적 기획이 가능성 및 생각할 수 있는 것의 공간에 의해 형성된다는 점에서, 후반에는 작품의 의미가 여러 매개자가 얽혀 있는 집단적 작업의 결과로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더구나 작품은 수용 과정에서도 작가에게서 벗어난다. 수용 과정은 수동적이지 않으며 서로 상반될 수 있는 전유 형식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는 작품의 의미가 다양한 주관적 해석에 녹아들어서는 안 된다고 해도,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없고, 각자가 상상한 바를 작품에 투사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독자들이나 카미유 로랑스의 『색인』의 주인공 클레르가 그렇게 했듯이 말이다. 『색인』의 말미에서 클레르는 작품 속 책 『색인』을 읽은 다른 독자를 만나 이야기하면서 문득 그가 그녀에 대해 하는 해석이 자신이 하는 해석보다 더 그럴듯함을 깨닫는다. 수긍할 만한 해석의 경계를 정하는 기능이 작품에 대한 토론과 논평에 있는 것이다. 미디어상에서 일어나는 불같은 논쟁이 관계 자료들에 대한 선행 검토 없이 판결을 선고해 버리는 것은 유감스럽지만―다행히도―학식을 바탕으로 한 논쟁은 작품을 읽는 것만으로는 그 의미를 파악하기에 충분치 않음을 증명해 준다.
 시공간을 넘나들며 작품이 유통되면 작품이 생산 맥락에서 분리되기에, 작품을 탈역사화하고 오해할 위험이 높아진다. 그러나 ‘기대 지평’이 변화하면서, 작품이 등장할 당시에는 묵인되고 심지어 높이 평가되기도 했던 인종주의, 반유대주의 또는 성차별적 세계관이 담긴 표현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바그너와 하이데거의 사례가 그 예시이며, 에드워드 사이드가 보여 주었듯이, 식민적 표상 생산과 전파에 참여한 많은 사상가와 창작자의 사례도 그 예시가 된다―오늘날 고갱을 둘러싼 토론도 그러하다. 마찬가지로 ‘기대 지평’의 변화로 인해 드 만이나 야우스 같은 이들의 해석적 실천에서 평판을 위태롭게 하는 과거가 어떻게 억눌리는지 판독할 수 있게 되며, 이로써 수용의 해석학은 자기 덫에 걸린다. (p.197-198)

 

 아니다. 우리는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작품에는 형식화 작업을 통해 어느 정도 승화되고 변모된 상태로 작가의 윤리정치적 성향과 세계관의 자취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작품의 사회적 기원과 효과 안에서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작업을 드러내는 일이 필요하다. 작가가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작품의 효과를 포함해 작품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지는 것, 이것이 게임의 법칙이다. 그 규칙을 이용하건 회피하건 말이다. 작품의 진화 과정을 고려하며 작품을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 작품이 포함되어 있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문화 생산 장의 변화와 작가의 전략과 창작의 전략을 연관 지어 살펴보아야 한다.
 정신의 소산을 검열해서는 안 되지만, 인종 혐오와 성차별을 선동하고 취약한 집단에 낙인을 찍으며 강간과 아동 성범죄를 옹호하는 작품들에 대해서는, 작품이 수행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옹호와 재현을 구별한다는 조건하에 유보적 입장을 표명한다. 그것들은 이미 법에 의해 처벌받지만, 한편으로 법은 한 시대의 규범들을 체계화한 것일 뿐이다. 『악의 꽃』은 시대의 규범이라는 명목으로 유죄 선고를 받았는데, 이 유죄 선고를 취소하게 만든 것은 표현의 자유를 위한 싸움이었다. 게다가, 마츠네프의 사례에서 보았듯 법이 언제나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결국 공론이 이론과 실제에서 법의 진화를 돕는 기능을 한다. 페미니즘 협회와 인종주의 및 인종화(racisation)에 반대하는 협회가 여전히 가려진 문제들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폴란스키처럼 작가가 권위를 남용할 때, 또는 인종 차별적이거나 성차별적인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 위해 자신의 명성을 이용할 때(다시 한번 분명히 하지만 한트케의 사례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를 용인하고 심지어 상까지 주어야 하는지는 아직 남아 있는 문제다. 심사 위원들이 최고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양심에 비추어 행동해야 한다. (공모를 내포하는) 모든 책임하에. (p.200-201)

 

 더욱이, 예술을 억누르고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예술을 도구화하려는 이데올로기적, 경제적 제약에 맞서 예술을 지켜야 하지만, 이러한 보호가 예술을 지나치게 신성화하여 우리가 해야 할 질문조차 못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술 실천의 사회적 조건, 작품 생산 방식, 그리고 인정에 접근할 기회가 예술 이외의 기준(특히 젠더, 인종화된 소수자 여부, 이주 궤적 등)에 따라 불균등한 상황―이로 인해 정전이 대부분 백인 서구 남성으로 형성되었다―에 대한 질문 말이다. 이러한 정전은 사회 집단 간 힘의 관계를 재생산한 인지적 편향에서 해방됨으로써 수정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정전 자체를 포기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후세에 물려줄 공통의 레퍼런스와 문화 유산을 아예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전을 내버리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낭만주의 이래로 작품의 상징적 가치 생산과 함께해 온 작가 신성화 원리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p.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