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의 한국학 선생님 / 이은정 / 사계절
도시가 주는 첫인상이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지금도 할레를 좋아한다. 무엇보다 분단 시절 할레대학에서 정치학과 역사학 공부를 시작하고, 통일된 후 새로운 체제에서 학위를 마쳐야 했던 친구들과 함께 토론하는 것이 좋았다. 동독의 사회주의 체제에서 사회화된 그들은 서독의 친구들과 무언가 달랐다. 1989년 동독에서 개혁운동을 하던 때의 이야기를 해주는 그들에게서는 이상적인 사회가 가능하다는 꿈을 꾸었던 순수한 사람 냄새가 났다.
처음 보는 나를 반갑게 맞으면서 몽골에서 왔냐고 묻던 대학 도서관 사서의 인간적인 모습도 좋았다. 괴팅겐에 살면서 일본 또는 중국에서 왔냐는 질문은 많이 받았지만 몽골에서 왔냐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평생을 할레에서만 살았던 중년의 독일 여성 사서는 내가 몽골에서 왔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눈치였다. 내가 웃으면서 코레아에서 왔다고 하니 북한에서 왔냐고 다시 물었다. 몽골과 북한에서 온 유학생들을 잘 알고 있던 그는 남한에서 온 나를 신기하게 여겼다.
할레의 도서관들에 보관되어 있는 고서들의 묵은 책 냄새도 좋았다. 도서관 건물이 아직 보수되지 않았던 1990년대 중반에는 18세기 이전에 출판된 책들이 그냥 서가에 꽂혀 있었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홉스의 《리바이어던》 초판을 그냥 꺼내서 읽으면 되었다. 고문서를 보관하는 데 최적화된 특수문서실에서 사서의 감시하에 책을 읽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박사후 연구과제를 진행하면서 확인한 것은 서구의 사상가들이 이미 17세기부터 자신의 정치적 담론의 필요에 따라 유교를 긍정적으로 이상화하기도 하고, 유교를 철학사상이 아니라 도덕 관습일 뿐이라고 폄하해 왔다는 사실이다. 400여 년의 시간 동안 그들만의 담론을 통해 유교에 대한 이상화와 폄하의 패러다임이 몇 차례 교체된 것을 알 수 있었다. 교수자격논문을 통해 바로 이런 패러다임 변화의 역사적 배경, 원인을 분석할 계획이었다.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독일의 주요한 사상가 12명의 유교관을 분석하는 작업은 분명 커다란 도전이었다. 나는 그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유교를 알게 되었고, 어떻게 유교를 자신의 사상 체계에 수용했는지 분석했다. 12명의 사상가들과 관련한 자료를 찾기 위해 독일 전역에 흩어져 있는 아카이브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작은 수도원의 문서고에서 250년 전에 출판된 후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던 책을 발견하기도 했다. 어느 누구도 읽지 않아서 책장이 아직 분리되지 않은 책, 면도날같이 예리한 칼을 들고 연결된 책장들을 하나씩 분리해 가며 책을 읽는 기분. 분명 보물섬을 찾은 모험가가 느낄 법한 희열이었다.
보수적인 독일 학계는 젊은 외국인 여성에게 잔인하리만치 가혹했다. 교수자격논문이 통과될 때까지 나는 괴팅겐대학 사회과학부 수석 졸업, 정치재단 장학생, 훔볼트 펠로우, 그리고 주정부의 교수자격논문 장학금 등 젊은 학자가 쌓을 수 있는 최고의 성과를 차곡차곡 축적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나는 독일연구재단의 전문가위원회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들은 나와 같은 조건을 가진 학자는 독일에서 교수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이미 단정해버렸다. 그런 이유로 교수가 될 자격을 받은 학자들에게 주는 하이젠베르크 장학금을 나에게는 줄 수 없다고 알리는 공식적인 편지였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고, 마음의 준비도 하고 있었지만, 공식 문서를 통해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그동안 쌓아온 성과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그때까지 해온 모든 연구가 ‘외국인 여성’이라는 타고난 존재 요소보다 의미가 없다는 것인지, 나는 누구라도 붙잡고 묻고 싶었다.
내가 독일에서 교수가 될 수 없을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독일연구재단의 편지는 여전히 내 책상 서랍에 잘 모셔져 있다. 지금도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비합리적인 일을 겪을 때면 그 편지를 꺼내서 읽어본다. 그 어떤 비합리적인 일도 그 편지만큼 말이 되지 않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 하이젠베르크 장학금을 줄 수 없다는 독일연구재단의 설명에 분개한 동료들은 언젠가 그 편지를 공개할 때가 올 것이라고 했다.
2008년 여름 베를린으로 이사했다. 베를린은 독일 역사에서 분단 체제의 상징이자 분단의 극복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분단 시기 동안 치열한 대립과 갈등의 근원지였고, 동시에 갈등을 해소하고 합의를 만들어낸 곳이다. 1990년에 통일된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유럽의 중요한 관광지이자 새로운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분단 시절의 베를린과 1990년대 초반의 베를린을 기억하는 사람은 세계적인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발전한 오늘날의 베를린 거리를 걸으면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일 것이다. 장벽에 둘러싸였던 분단 도시의 암울한 분위기, 전쟁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검게 그을린 동베를린 구도심의 공허함은 이제 모두 사라졌다.
건물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곳에 담긴 역사가 잊혀진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통일 이후 베를린은 역사를 잊은 공간이 아니라 기억을 품은 도시가 되었다. 도시 중심의 브란덴부르크문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공간에 만들어진 홀로코스트 추모 공간과 분단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는 베를린 장벽의 검문소 체크포인트 찰리, 이스트사이트 갤러리, 나치 테러의 참상을 보여주는 ‘테러의 지형도’ 박물관, 티어가르텐 한가운데에 있는 나치에 희생된 동유럽의 유목민 ‘신티와 로마’를 위한 추모공원에 이르기까지 역사가 기억되는 방식을 볼 수 있는 장소들이 정말 많다. 이 공간들은 누구에게도 역사의 한 단면을 특정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기억의 공간으로서, 잊지 말고 성찰해야 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줄 뿐이다.
‘독일통일총서’에 실린 문서들은 모두 통일 이후 독일 연방정부가 체제 전환 과정에서 사회·정치·경제적 통합을 위해 펼친 정책과 관련된 것이다. 통일 문제에 관해 고민하는 연구자와 실무자들이 독일 통일에 관해 공부할 수 있는 기초 자료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독일 통일에 관해 공부하는 다양한 그룹의 연수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된 하나의 국가를 만든 독일의 경험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수없이 많다. 성공적인 정책뿐만 아니라 실패한 경험도 우리에게는 반면교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통일을 달성하는 것과 통일 이후 하나의 체제를 만드는 것은 본질적으로 상이한 문제라는 것이었다. 어떤 방식으로 통일이 이루어지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체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서로의 삶의 경험을 존중해야만 한다는 것을 독일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나는 ‘독일통일총서’에 그런 시사점을 모두 담기 위해 노력했다.
베이징을 거쳐 평양을 다녀오는 길은 알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이 혼재된 시간이었다. 비행기가 압록강을 건너 북한 영토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순안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 가지 감정들이 몰려왔다. 그것은 미지의 땅에 들어가는 호기심이 아니었다. 같이 간 독일 의원들과 시민단체의 대표들이 느끼는 것과 다를 수밖에 없는 한국인만이 느끼는 뜨거운 감정이었다.
김일성대학교에서는 한국 국적을 가진 여교수가 독일 베를린자유대학교의 대표로 평양에 온 것에 적잖이 당황하는 눈치였다. 나중에 다시 평양을 방문했을 때 들으니 그때는 북쪽 관계자들이 독일 대표단에 웬 한국 여성이 있냐며 나를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일간의 평양 방문은 꽉 찬 일정으로 정신없이 지나갔다.
한국에 관한 모든 것을 스폰지가 물 빨아들이듯이 흡입하는 학생들과 함께 한국에 대해 공부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한식의 세계화 정책 논문을 분석하는 강의 시간, 1학년 학생들이 한국 음식을 먹어보아야만 음식에 관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며 만두를 만들어 왔다. 그것도 50명이 넘는 학생들 모두가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집에서 한국 음식을 요리하냐고 묻는 것이 실례가 될 정도로 학생들은 한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일상 속에서 한국을 즐기는 친구들이다.
학생들이 선택하는 졸업 논문의 주제도 다양해졌다. 한국 정치와 남북 관계, 북핵 문제는 여전히 많은 학생들이 선택하는 논문 주제이지만 언론 보도를 통해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을 주제로 선택하는 학생들도 있다. 졸업 논문의 주제를 통해서 한국 사회문제의 경향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한국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하는 동안 접했던 문제를 논문의 주제로 다루는 학생도 적지 않다. 외국인 학생이 한국에서 겪은 인종차별 문제를 분석한 논문을 제출한 학생도 있다. 서울에서 한 학기 이상 공부한 경험이 있는 유럽 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 조사를 바탕으로 작성한 논문을 통해 나는 우리 학생들이 한국에서 부딪히는 인종차별의 실상을 보았다. 외국인 유학생으로 독일에서 살면서 내가 겪은 인종차별의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논문은 내가 독일 주류 지식인들의 유럽중심주의를 강하게 비판하고 일상적인 인종차별 문제를 지적하는 만큼, 한국에서 일어나는 인종차별 문제도 간과하지 말아 달라는 우리 학생들의 부탁처럼 느껴졌다.
광복 70주년이 되던 2015년 서머스쿨에 참가한 학생들은 8월 15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집회에 참석하고 난 후에 초등학교 여학생들이 짧은 치마를 입고 무대에 올라가 춤을 추도록 한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전쟁 중에 여성에 가해지는 폭력을 비판하는 자리에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고. 나도 별로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여서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공주 지역을 중심으로 백제 시기의 유적을 탐방했을 때는 한국사에서 백제 문화가 저평가된 것이 아닌지 의문을 표했다. 1학년 필수 과목인 한국 역사 입문과 한국 문화 입문 강의에서 다루는 삼국시대에 관한 내용이 신라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백제가 많이 다루어지지 않아서 그런 인상을 받은 것은 아닌지에 대해 한참 토론했다.
여수를 방문해서 여순사건이 시작된 부대의 연병장에서 출발해서 마래터널을 지나 만성리에 있는 위령비를 마주한 우리 학생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4.3을 주제로 제주도에서 진행한 서머스쿨 참가자 두 사람이 해방 이후 미군정 시기를 박사 논문의 주제로 선택한 것처럼 이 현장이 학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명량해전의 현장인 울돌목에 갔을 때는 마침 밀물과 썰물이 바뀌는 시간이었다.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만 같은 소용돌이 소리가 다리 위에 서 있는 우리에게도 아주 거칠게 들려왔다. 바다 위에 놓인 길을 걸으며 발아래로 휘몰아치는 소용돌이와 같은 한국사에 대해 토론하자고 하는 나를 학생들은 원망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임진왜란과 이순신에 관해서는 자기들도 충분히 많이 알고 있으니 그냥 혼자서 조용히 그 현장을 느낄 수 있게 해달라는 눈초리였다. 말하지 않아도 학생들이 역사 현장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는 것을 잊을 때가 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역사학자가 아니라 정치학자인 나는 역사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재주가 없다. 현장에서 너무 진지하게 권력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어버릴 뿐이다. 때로는 내가 먼저 울컥해서 설명을 하지 못하기도 한다.
학생들과 함께 대전에 갔을 때 산내 골령골과 대전형무소를 방문했다. 산내 골령골은 한국전쟁 초기 보도연맹으로 분류되어 경찰에 의해 집단학살된 수천 명의 민간인이 암매장된 지역이다. 원래 지형이 임금의 곤룡포와 닮았다고 ‘곤룡재’로 불렸는데 민간인 암매장 장소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골령골’로 부르는 곳이다. 그리고 대전형무소 우물은 1950년 9월 퇴각하는 북한 인민군이 민간인들을 적으로 몰아 집단학살한 곳이다. 대전형무소 터에 있는 우물에 얽힌 슬픈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어릴 때의 기억이 떠올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으로 알려진 산내 골령골은 내가 어렸을 때 학교에서 봄소풍 가던 곳이었다. 그때 우리는 산골에서 뛰어놀면서 그 아래 어떤 슬픈 이야기가 묻혀 있는지 전혀 몰랐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들려주었다. 여전히 유골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골령골 현장과 대전형무소 터, 두 개의 상반되는 기억의 장소를 보면서 진지하게 생각에 잠기던 학생들은 골령골에서 단체사진 찍는 것조차 망설일 정도였다. 희생자들에게 미안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