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상하고 천박하게 / 김사월, 이훤 / 열린책들
낮고 웅얼거리는 목소리였지만 노래만 부르면 나의 목에서는 너무 〈여자〉같이 미약한 소리가 났다. 약간 수치스러운 기분과 동시에 묘한 쾌감을 느꼈다. 이불 속에서 진짜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어른들은 나한테 관심도 없으면서 표면적으로는 착한 〈여자아이〉이길 바라더니 내가 〈여자〉인 게 들통나면 어쩔 줄 몰라 하더군. 쪼잔한 나는 어린 시절 느낀 결핍에 대한 복수로 가족에게 영원히 내 진짜 모습을 보여 주지 않기로 다짐했다. 시디를 왜 사냐며 음악 좋아하는 건 대학교 가서 하라는 잔소리는 결국 시디 파는 여자애를 만들고 말았네. 이런 에너지로 만들어진 현재의 나는 너무 잘 살아. 따뜻하고 청결한 집에서 건강한 몸과 마음을 향해 일상을 다듬다 보면 감사한 기분이 들다가도 가끔은 이 모든 것이 가짜 같아. 슬픔을 팔아서 받은 것들로 행복해졌으니까. (p.21)
비슷한 종류의 마음이 요즘이라고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왕성한 동료들 볼 때 여전히 어떤 날은 불안의 종이 울려. 그때마다 찬찬히 그 앞으로 가서 충분히 듣고 종을 땅에 내려놓거나 안 보이게 덮어 둔다. 며칠 지나 돌아가면 없어졌기도 하더라. 그리고 그럴수록 좋은 일 생긴 동료들을 힘껏 축하해 준다. 그들이 잘되는 게 나에게도 이로운 일임을 기억하려고 애써. 친구들과 서로 영향받으며 함께 더 나은 작업자가 되는 게, 모두 정체된 우리보다 훨씬 낫다. 그리고 떠올려 내고 만다. 우리는 다르게 탁월하다. 나만 나처럼 만들 수 있다. 건강한 동료이자 친구이고 싶어서, 배 갑판에서 중심 잡는 것처럼 끊임없이 앞발과 뒷발로 자꾸 몸을 곧게 세워 본다. 십 년이 지났는데도 그런다. (p.27-28)
존경하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지. 생각해 봤는데 아직 잘 모르겠어. 일단 지금은 누굴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 존경스러운 것 같다. 나 좋자고 하는 존경이 아닌 진짜 깨끗한 존경을 배우기 위해 우리는 질투라는 놈과 진흙탕에서 씨름하는 거겠지. 나는 이제 막 경기를 중단하고 샤워실에 들어온 참이라 아직도 더럽다. 달콤한 진흙의 맛이 그리워져서 갑자기 싸움판으로 뛰쳐나갈지도 모를 일이지. 이렇게 피폐해지는 건 의자에 앉아야 할 사람은 많은데 자리는 단 하나밖에 없다는 착각 때문일 거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내 차례가 영원히 스루(through)될 거라는 불안.그런데 그런 자리에 앉게 된다면 나는 행복할지
(p.56)
거기 계속 앉겠다고 추해지는 것이 내가 바라는 일인지
의자에 앉고 싶은 사람이 돌아가며 앉을까
그동안 서로를 위한 의자를 만들까
아니면 그냥 풀밭에 같이 누울까
공연이 끝난 다음 날 아침엔 정말 세상이 장밋빛 같아. 인생의 모든 고통을 다시 겪는다 해도 다시 이 삶을 살고 싶다는 낭만에 빠진다. 일상으로 착륙하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 이틀 동안 스마트폰의 노예로 살았다. 자신이 어떤 도구를 사용하는가에 따라 그걸 쓰는 뇌의 부분이 커지면서 활성화된다면서? 뚱뚱해진 스마트폰 뇌를 다이어트시키며 조금은 내가 더 좋아하는 내 모습으로 돌아오는 통로에 너에게 편지 쓰기가 있었다. 다행이다. 글을 쓸 수 있고 그걸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다시금 느낀다. 내가 가야 할 곳은 〈좋아요〉가 아니고 〈좋아합니다〉의 세계다. (p.58)
애니메이션 「종말에 대처하는 캐럴의 자세」를 빈지워칭했다. 일곱 달 안에 세상이 종말한다는 전제로 이야기가 시작한다. 사람들이 직장을 그만두고 온몸에 문신을 하고 옷을 벗고 다닌다. 크루즈 타고 세계 일주도 떠난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캐럴은 회사에 다닌다. 종말을 앞두고 어떤 사람들은 계속 출근을 한다. 의미라는 게 뭘까. 무엇이 우릴 살게 할까. 이 많은 생명을 움직이고 눈 뜨고 다시 일하게 하는 그거. 그게 뭘까? 생각하다가 세계 일주를 떠난 히피 캐릭터와 캐럴 사이에 있는 나를 보고 흠칫 놀랐다. (p.72)
4집은 올해 3월 중순에 나올 것 같아. 지금까지 개인 SNS로 소식을 알리고 쇼케이스를 여는, 독립적인 음악가가 할 수 있는 정도의 홍보를 해왔다. 그래서 고민이 들 때가 있어. 예술 생계를 지속하려면 지금보다 더 큰물로 나가야 하는 건가? 근데 더 큰물이 대체 어딘데. 최근에 에이전시와 홍보를 위해 미팅했는데 솔직히 좀 두려웠다. 내가 잘 몰라서 그런지 요즘 음악 업계의 홍보 방식은 속임수 같아. 플레이리스트에 들어가야, 알고리즘을 타야 사람들이 음악을 듣기 때문에 접근하기 쉽도록 음악을 배치하고 퍼트린다. 그런 루트로 들어갈 수 없는 대부분의 내 친구 음악가들이 떠올랐다. 친구들은 어떡하지. 근데 일단 나부터 어떡하지. 회사 실장님은 말씀하셨다. 「요즘은 디깅을 해서 음악을 듣는 사람이 1퍼센트도 안 돼요.」 한 소절 한 소절에 눈물 흘리며 듣는 플레이도 재생 횟수 1, 카페에서 누구도 듣지 않지만 배경 음악으로 플레이되어도 재생 횟수 1. 우리가 음악가가 되고 싶었던 건 전자를 하기 위해서 아니었어? 술자리에서 이렇게 말하던 나는 진정성에 취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p.80-81)
뮤직비디오 감독님들을 보니 촬영 일이라는 건 정말 몸의 자원을 탈탈 털어 쓰는 일이더군. 최선을 다하는 것, 열정이라는 거, 정말 인간답고 애처로운 일인 것 같아. 100년도 못 살고 흙으로 돌아갈 우리가 영원에 도전하며 사진을 찍고 영상을 만들고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들어. 그 어리석음이 아름다워서 눈물이 고일 때가 있다. 20대의 재능 있는 예술가들과 비디오를 찍고 있자니 나르시시즘을 경계한다는 핑계로 수더분해진 나의 외모와 식은 열정, 바른 생활을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연약한 30대의 몸을 자각한다. 너와 루틴이 너무 똑같아서 놀랐는데 나도 아침마다 땅콩볼을 굴리며 몸을 풀고 첫 끼니로 사과를 씻어 먹어. 이제 제때 밥을 안 먹으면, 아침 요가를 안 하면, 12시에 잠들지 않으면 내 영혼이 가진 단점만 드러난다. 20대 예술가들은 콜라를 마시고, 새벽 4시까지 깨어 있고 밥을 안 챙겨도 무거운 짐을 번쩍 나르고 창의적인 생각을 뽑아내더라. 나이가 들며 생길 문제들을 각오하고는 있지만 정말 무서운 건 벌써 정체되는 나의 취향이다. 언제 마지막으로 예술적 감탄을 순수하게 했던가. 부러워하는 거 말고, 저 사람 또 잘하네, 질투하는 거 말고, 순수하게 느끼고 사랑하는 거 언제가 마지막이었더라. (p.87-88)
세상은 여름이지만 지금 내 마음은 추수를 끝내고 얼어붙은 땅이다. 이때 뭘 심어 봤자 좋을 거 없지. 다음 농사는 뭐 지을지 상상하고 알아보고 씨앗을 구경하는 것이 더 좋겠다. 발매를 하고 2개월 정도 지났다. 앨범을 내기 전에는 세상에 들려주지 않아도, 혼자 듣고만 있어도 그렇게 애틋하고 보람찰 수가 없었다. 지금은 내 앨범을 듣지도 않고 찾아보지도 않는다. 그렇게 귀하던 것이 어떻게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되는지. 세상이 앨범을 그렇게 대할 것 같아서 나 스스로 더 못되게 구는 것 같기도 하다. 2개월이면 아직 힘내서 앨범 홍보를 더 해도 되나? 그런데 지금까지 한 홍보가 그렇게 효과가 있었냐 싶었을 때 그것도 아니고, 그 외의 홍보를 할 수 있는 여력도 없다. 근데 솔직히 들을 사람은 다 들었다고 생각한다. 한 번 들어 보고 또 지나간다. 이런 게 이 시대의 정규 앨범 릴리스다. 그럼 이제 나는 앞으로 무슨 작업을 해야 하나? 여기서 어떻게 힘이 안 빠질 수 있을까. 2년 동안 작업한 게 2개월 만에 사라지는데. 다음 앨범은 진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내고 없으면 안 내도 된다고 생각하고 살 것이다. 할 말이 없을 때 어쭙잖은 말 대신 침묵할 수 있는 것도 용기이고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p.163-164)
〈그렇게 귀하던 것이 어떻게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되는지〉. 너의 그 문장이 내가 겪은 상태와도 비슷해서 고개를 막 끄덕이며 읽었다. 책 내고 한창 북 토크를 다닌 뒤 정신 차려 보면 더 이상 책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잖아. 세일즈 포인트도 떨어지고 읽을 사람은 다 읽은 것 같고. 겨우 두 달 지났을 뿐인데 말이야. 책 나오기 전후로 너무 많이 읽고 고치는 동안 저자 안에서 텍스트가 낡기 때문일 텐데……. 그럴 때 씩씩한 작가를 거의 보지 못했다. 출간 블루는 모두가 겪는 것 같다. 어떻게 안 그럴까. 몇 년을 갈아 만든 열매가 두 달 만에 소진되는데. (p.172)
말이란 걸 훼손하지 않고 어떻게 옮길까? 어떤 문장은 원어 그대로 직역하면 영어에서 이상한 문장이 된다. 언어는 말을 담는 그릇이지만 둘레와 배경, 홈이 파인 방식도 전부 달라서 잘 옮기려면 익숙한 표현을 새 지형에 맞춰 자르거나 통째로 바꿔야 한다. 의역이 늘 좋은 번역인 것도 아니어서, 번역가는 두 그릇 위에서 뒤뚱대다 자주 떨어진다. (p.20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