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화감각 / 미시나 데루오키 / 푸른숲
서서히 도구를 멀리하는 대중에게 어떻게 물건을 팔 것인가? 그때 자본가가 생각해낸 것이 바로 패션과 같은 이미지의 차이이며, 동시에 대중들에게 나타난 것이 잡화감각이다. 이미 가위든 망치든 페인트든 제품의 성능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 멋지거나 재미있거나 아름다워야 한다. 제품을 서로 비교할 때 나타나는 이미지 차이에 따라 소비자는 돈을 지불한다. 책이라면 내용이 아니라 표지나 띠지, 서체를 기준으로 소설을 고르는 감각이 소비자에게서 싹트기 시작한다. 이는 결코 멈추지 않는 잡화화(雜貨化)의 불길이 막 타오르기 시작한 순간이기도 하다.
그 후에는 남과는 다른 물건을 갖는 것이 곧 그 사람의 개성이라는 환상이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문구류도 용도만 놓고 보면, 소비자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에 필요한 물건 대부분은 갖추지만, 이미지의 힘에 의해 같은 기능을 가진 물건을 몇 번이고 반복해 구입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이유로 어린이들 사이에서도 옆자리에 앉은 친구보다 멋진 필통이나, 반에서 가장 귀여운 손수건을 갖는 것이 스포츠처럼 유행한다. 그런 신기루와 같은 환상은 어른이 되어서도 형태를 바꾸며 계속 나타난다. (p.17-18)
잡화왕국의 국경은 파죽지세로 확장되고 있다. 볼 때마다 점점 더 두꺼워지는 각종 잡화 브랜드의 카탈로그를 훑어보더라도 금세 알 수 있다. 잡화의 증가는 불과 몇 초 전에 있던 것과 조금이라도 다른 물건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소비해야 하는 자본의 규칙, 즉 만족할 줄 모르는 차별화가 주된 원인일 것이다.
카탈로그에는 많은 슬로건이 있다. “비싸고 좋은 물건을 사서 오래 쓰자”, “기본템은 영원하다”, “일상에 충실하자”, “환경을 지키자”, “전통적인 수공예를 지원하자”, “평범한 게 최고다” 등등. 하지만 바로 옆 페이지에는 메시지 내용과 전혀 무관하게, 슬로건을 외치기 전과 후에 생기는 미묘한 ‘차이’만을 빨아들이고는 컨베이어벨트처럼 그저 묵묵히 물건을 나르는 큰 강이 흐르고 있다. 이 사실을 깨달은 건 잡화점을 차리고 나서 수년이 지난 후였다.
물건과 물건 사이가, 1초 전과 1초 후가 조금만 달라도 가치가 생겨난다. 잡화는 멈출 줄 모르고 늘어만 간다. 사실은 진화도 퇴화도 아니건만 우리는 차이를 끊임없이 소비함으로써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는 듯한 꿈을 꾸고 있다. (p.27-28)
이미 바닷가에서 굴러다니는 돌을 주워 세련된 상자에 넣어 파는 사람들이 보인다. 몇 년 전에는 우리 가게에도 그렇게 주운 자갈이나 금속 파편을 피어싱으로 만드는 액세서리 브랜드의 제품들이 있었다. 콘셉트는 에콜로지(ecology)였다. 언젠가 요리연구가의 수만큼 자갈 줍기 작가가 등장하기 시작할 때엔 더 이상 손쓸 수 없을 것이다. 길가에 돌멩이란 돌멩이는 전부 사라지겠지.
돌 이야기를 하니 문득 떠올랐는데, 우리 가게에도 개업 당시 지인에게 받은 작은 돌이 있다. 아마도 강가에서 주워 와 사인펜으로 얼굴을 그려 넣은 넓적하고 둥근 돌인데 심지어 생일 선물이었다. “별로 필요 없어요”라고 확실히 거절했지만 소용없었다. 매일 보고 있자니 애착이 샘솟아 계산대 옆으로 옮겼더니, “이거 얼마예요?”, “판매하시면 좋겠어요”라고 한마디씩 하는 손님이 매달 한 명 정도 생겨났다. 수년간 에둘러 거절하다가 그마저도 귀찮아져 천 엔이라고 가격표를 붙였는데 그때부터 아무도 문의하지 않았다. 돈은 정직하다. 참고로 그 후에 대학 후배로부터 “주워 온 돌을 팔기 시작하면 인생 거의 끝난 거 아닙니까”라는 충고를 들었다. (p.36-37)
이것도 초등학교 때인 것 같은데, 주말에 가족들과 자주 ‘키안티’라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갔다. 이탈리안 레스토랑 중에는 무척 평범한 이름이었지만 지금 검색해 봐도 내가 알던 키안티는 찾을 수 없다. 어두컴컴한 가게 안에는 언제나 클래식 기타의 선율이 흐르고, 벽돌로 된 벽면에는 수많은 빈 와인 병과 샤갈의 판화, 커다란 마이센 블루어니언 접시가 장식되어 있었다. 나는 꼭 바질리코를 주문하고 다 먹은 후에는 접시에 남은 기름을 가지고 장난쳤다. 당시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는 열병에 들떠 있던 나는, 눈높이를 테이블 높이만큼 낮춰 투명한 황록색 호수에 바질 배가 떠다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른들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포크로 배를 가라앉히거나 접시 가장자리에 정박시키며 시간을 보냈다. (p.58-59)
나는 잡화 때문에 많은 것을 얻고 또 잃었다. 그중 가장 큰 상실은 그렇게도 사랑하던 음악을 잃은 것이다.
잡화점을 시작하기 전에는 잘 몰랐지만 가게에서 음악은 미묘하게 일그러진 다른 무언가로 귀에 들어온다. 음악이 그저 BGM이 되어버린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더욱 교묘한 형태로, 음악을 듣는 방식 자체를 왜소하게 만든다. 어쩌면 잡화점 입구에 무례한 문지기가 버티고 서서, 엄격한 드레스코드처럼 음악을 걸러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만일 운 좋게 문을 통과하더라도 그다음에는 더욱 교활한 조련사가 기다리고 있다가, 음악이 가진 분방함을 보기 좋게 거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지금은 학생 시절에 음악이라는 다양한 존재에게 용기를 얻고 눈앞에 보이는 세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소박하게 믿으며 살아온 자신에게 사죄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예전에는 “흔히 통일성을 추구하는 잡화점에서 틀어대는 음악의 빈곤함을 보라. 주인은 이미 길들여졌거나 음악을 모르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안타깝지만 시각과 청각 센스는 완전히 다른 원리로 구축되니까”라며 비웃던 내 귀도 어느새 길들여졌다. 점점 허용할 수 있는 역동성의 범위가 좁아지고 몇 년이 지나면 무난하고 온화한 음악에만 감정을 맡길 수 있는 몸이 되어버린다. (p.62-63)
내가 대학에 들어간 해에 윈도우 98이 나왔다. 이윽고 소니의 바이오라는 노트북을 알게 되었고, 즉시 현금을 거머쥐고 기치조지 라옥스에 노트북을 사러 갔다.
삐비비비비 삐- 시끄러운 발신음을 내며 미지의 회선이 연결되고 나면, 자기 전 1시간 정도 아무것도 없는 메일함을 확인하거나 밴드가 운영하던 사루사루 일기에 쓸데없는 글을 쓰거나 호보니치를 열심히 읽고는 했다. 딱히 재밌어서가 아니라 한밤중에 잠 못 들고 끙끙거리는 인간이 나 혼자만은 아니라는 동시성과 공동체성 같은 감각을 태어나서 처음 경험했기 때문이다. 당시 인터넷 서핑은 정보를 얻기 위한 활동이 아니라, 입학하고 얼마간 친구 하나 없이 도쿄에서 투명인간처럼 살았던 아무런 존재도 아닌 나를 위로해주는 행위였다. (p.73-74)
잡화란 잡화감각을 통해 사람이 인식하는 모든 물건이라는 토톨로지(tautology)인데, 지금의 잡화감각은 분명 인터넷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잡지와 잡화점의 밀월에서 작은 잡화감각이 태어나던 시대와는 규모도 속도도 다르다. 무엇보다 지식인의 목소리가 소비자에게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이미 미의식이 있는지 없는지, 오리지널인지 카피인지 하는 것들은 상관없이 어디서나 사람들이 물건을 접했을 때 생기는 ‘좋은데’, ‘귀여워’, ‘훌륭해’, ‘멋있어’, ‘예뻐’와 같은 마음의 소리가 점점 온라인 공간에 정보로 흡수되어 간다. 그것은 공유되어 잡화감각이라는 거대한 집단의식의 구름 덩어리를 만들어간다. 그 구름 속에서 공급 측 역시 끊임없이 물건을 만들어낸다.
일단 구름에 빨려 들어가면 어떤 사람이 어떤 잡화를 보고 ‘갖고 싶다’라고 생각한 순간의 욕망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그 원천을 찾아가기란 불가능하다. 즉 왜 좋다고 느꼈는지 대체 누가 좋다고 알려줬는지 단적으로 알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당사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자신의 감성과 의지로 물건을 골랐다고 믿는다. 만일 어떤 신호를 계기로 조금이라도 의심하기 시작하면 분명 그 사람은 소비자로서 무척 불안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p.78)
1980년대를 거치면서 잡화감각은 점점 도구를 감염시켰다. 가급적 원시적인 물건, 자질구레한 물건부터 노렸다.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 많은 제조사가 무설비 제조, 즉 ‘공장이 없는’ 기업 형태를 모색하기 시작한다. 설계와 디자인, 영업에만 특화된, 가장 중요한 제조는 타사에 맡기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애플을 비롯한 컴퓨터 산업에서 퍼져 나갔는데 금세 뒤따르듯 잡화와 식품 업계에서도 OEM 공급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런 무설비 제조화가 훗날 잡화의 폭발적인 증식을 뒷받침했다. 물론 그 전에 국제적인 분업체제, 즉 글로벌경제가 갖춰져야 하겠지만.
이렇게 하여 물건과 정보로 꾸역꾸역 채워진 사회가 도래한다. 인터넷을 통해 모든 게 넘칠 만큼 많아지면 수많은 선택지로부터 다양한 물건이 손에 들어온다. 전후와 비교하면 꿈같은 삶인 한편, 시장은 인간이 처리할 수 있는 물건과 정보량을 크게 초과하고 만다. 사람들은 많은 선택지 앞에서 당황하면서도 소비를 가속화한다. 그리고 한 물건에 흥미를 느끼는 길이도 점점 짧아진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한계 수용력을 초과한 소비자는 어떠한 대상에서 흥미를 잃는 것과 새로운 무언가를 손에 넣는 것을 구별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확대해가는지 축소해가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도구를 가르치는’ 설교 따위에 누가 귀를 기울이겠는가? (p.90-91)
잡화는 어디에서 왔을까? 돌아오는 길 내내 그런 개운치 않은 마음을 품은 채로 어느 투박한 가게에 들렀다. 그곳은 오래된 상점가를 걷다 보면 반드시 길가의 신처럼 자리 잡은 생활잡화점이나 철물점 같은 가게였다. ‘브리콜라주 아키야마’라는 간판 속 글자 ‘브리콜라주’는 빛바랜 겨자색으로, ‘아키야마’는 색이 지워져 볕에 탄 자국처럼 붕 떠 있었다. 밖에는 소비세가 3퍼센트인 시절 그대로인 알루미늄 주전자, 때 탄 노리타케 재고품과 터퍼웨어 그릇들, 몇 번이고 녹아 끈적이는 덩어리가 된 비닐테이프 등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었다. 왜 생활잡화점의 노인들은 가게를 그만두지 않을까? 이미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닌 것일까? 그들은 물건을 사고파는 행위 자체를 이미 초월한 것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멈추고 먼지가 쌓인 가게 안에서 나는 도구가 잡화로 변화하는 것을 망설이는 모습, 혹은 잡화가 아직 도구였던 시절의 잔재를 엿보았다. 그것들은 아마도 눈부신 가게 밖으로 나오는 찰나 탐욕스러운 잡화감각에 사로잡혀, 그저 레트로한 잡화로 소비될 것이다. 그만큼 덧없는 무언가가 깃들어 있다. 앞으로 수십 년이면 늙은 길가의 신들은 이 세계에서 사라질 것이다. 생활잡화점부터 잡화까지 꽤나 긴 진화의 여정을 곁에서 보아온 주인은, 가게 의자에 앉은 채 내가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묵묵히 소리가 나지 않는 TV의 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p.96-97)
지금 우리 생활에 키치는 존재할까? 앞에서 말했듯이 분카야잡화점에 산처럼 쌓인 잡화는 40년 후에는 껍데기뿐인 키치가 되어버렸다. 삶을 뒤덮는 시장 속에서 성스러움과 속됨의 낙차는 거의 사라지고, 성스러운 것도 속된 것도 어딘가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쿤데라의 정의에 따르면 시장이란 그야말로 야코브가 있던 고귀함과 저급함의 차이가 사라진 수용소와 닮았다.
이러한 자본의 큰 물결 속에서 사람들이 갖고 싶은 물건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유기농, 삶의 기본이 되는 아이템, 메이드 인 저팬, 롱 라이프 디자인, 친환경…… 최신 물건을 계속 사는 소비부터 소비를 덜 하기 위한 소비까지 최근 10년간 여러 잡화 트렌드가 계속 바뀌어가며 개발되었다. 좋아하게 된 잡화도 거기에 녹아 있는 이야기와 가치관도 끝까지 믿지 못하고 흘려보내다 보면, 금세 다른 물건에 눈길을 주거나 질려버리고 만다. 하지만 쿤데라식으로 말한다면, 존재가 무거움을 잃고 가벼워지기 전에 우리는 또 다른 무언가를 믿고 새로운 잡화를 좋아하게 되어 다시 시장으로 돌아온다. 믿었다가 질리고, 질리면 다시 믿는다. 이런 쳇바퀴 속에서 언제나 반쯤 질리고 반쯤 믿는 이도 저도 아닌 감각을 갖게 된다. 이것이 시장에서 우리의, 혹은 잡화라는 존재의 무거움이자 가벼움은 아닐까? (p.111-112)
잡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3대 작가라고 하면 생텍쥐페리, 미야자와 겐지, 토베 얀손 정도가 아닐까? 이들의 라이선스는 여러 곳으로 팔려 나가 다양한 잡화로 다시 태어났다. 심지어 모두가 팬이라고 자처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소설을 읽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다는 점까지 포함하여 무척이나 잡화적인 존재라 할 수 있겠다. (p.114)
오랫동안 가게를 하다 보면 가게를 사이에 두고 사이가 좋아지는 사람도 있고 소원해지는 사람도 있다. 어찌되었든 커뮤니티 비슷한 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잡화를 그저 사고파는 한 결코 모든 다양성에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지는 않는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가게에 전시할 물건을 고르는 행위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또 누군가를 배제해나가는 작업이기도 하다. 어떤 물건을 두려면 또 다른 물건은 치워야 한다. 한 문맥에 속하면 다른 문맥에서는 튕겨져 나온다. 어떤 사람은 오고 또 다른 누군가는 오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드레스코드 같은 규칙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왜 그렇게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 채 방황한다. 그렇다고 해서 중간에 걸쳐 있는 잡화점을 만들려고 한들 엄청난 재능이 있지 않고서는 계속해서 유지해나가기 어렵다. 내용 없는 소설처럼 혹은 생활필수품이 없는 편의점처럼 누구의 욕망도 자극하지 못하고 그저 사업을 접을 뿐이다. 그런 가게를 잔뜩 봐왔다.
그러나 이처럼 보잘것없는 장사의 막다른 골목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빅데이터에 접근 가능한 거대 쇼핑사이트는 모든 문맥을 유유히 넘어 잡화를 늘어놓는다. 일개 자영업자는 사람의 인식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 시스템이 그려내는 다양성을 그저 손가락이나 빨며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작은 가게가 살아남을 방법은 빛 좋은 개살구인 다양성을 얼른 버리고, 지금 당장이라도 문을 걸어 잠그는 것뿐이다……. (p.120-121)
참고로 자영업으로 몇 년간 돈을 못 벌면, 제대로 된 장사를 목표로 시작한 사람 대부분은 그만두지만, 그렇지 않은 기특한 동기를 가진 사람들은 돈이 되지 않는 가게를 계속하면서 점점 상인이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게 된다. 결국 표현계, 수행계, 사회운동계, 정신세계계, 커뮤니티계, 철학계 등 다양하고 유쾌한 자영업자의 길로 나아간다. 그런 일들이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돈을 벌지 못하면서도 도태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자본주의의 유령들이다. 그런 많은 가게의 주인들은 지면에서 1센티미터 정도 떠 있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다. 니시오기쿠보에도 무척 많은데 최근에는 나도 조금 떠 있다. 물론 유명한 그릇 가게나 식당도 몇 곳 있지만 전체적으로 그림자가 옅은 작은 동네다. (p.178)
여행은 되풀이된다. 세계에서 가장 긴 젖은 미끄럼틀, 엉덩이에 붙은 낙엽, 현지 사업가가 지은 현대 미술관, 죽은 등에, 한 줄도 읽지 못한 소설에서 발산된 허무함은 온갖 여행지에서 나를 기다린다. 고부치사와의 마른 들판에서, 히다타카야마의 라멘 가게에서, 파리의 이민자 동네에서, 무라노섬의 안뜰에서. 언제나 앞질러 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마다 허무함만이 어린 시절부터 변하지 않는 유일한 진실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언젠가부터는 그 정겨운 그림자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그것은 문득 찾아오고, 오랜 친구와 다시 만난 때와 같은 안도감 속에서 삶을 순수하게 긍정해주는 느낌이 들었다. (p.203)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안갯속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이유는 이런 장면들과 등장인물들을 보고 있으면, 무서우리만큼 빠른 속도와 탐욕, 강력한 힘을 가진 인터넷에 의한 정보의 일원화, 즉 세상이 잡화화 되어가는 와중에 조그맣고 느릿한 것들이 선명하게 숨 쉬며 휙 하고 잡화화의 그물망을 빠져나간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잡화감각으로 포착할 수 없는, 인덱스 테이프의 태그로부터 도망치고 미끄러져 떨어지는 것들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긴 미끄럼틀에서 엉덩이를 흠뻑 적셔가며 허무함의 한가운데를 활공하듯, 《잡화감각》은 잡화화 되어가는 세상으로부터 조그맣고 느긋하고 허무하게 절실히 도망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p.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