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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불평등 / 가이 스탠딩 / 창비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가 고무적인 저작 『인간의 조건』에서 상술한 것처럼 고대 그리스인들은 현대 경제학이 완전히 지워버린 결정적인 또다른 구별을 했다. 레크리에이션·놀이와 여가의 구별이다. 그리스인들은 모든 시민이 레크리에이션을 위한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 할 필요를 인정했는데, 여기에는 일할 능력을 복원하기 위한 활동들이 포함되었다. 회복하고, 즐기고, 먹고, 마시고, 장을 보고, 운동하고 등. 레크리에이션의 정점은 올림픽 경기로 체현되었다.
 그리스인들은 레크리에이션과 소비를 스콜레로서의 여가와 구별했는데, 스콜레는 교육과 공적 참여의 결합을 뜻한다(그리고 이로부터 ‘학교(school)’와 ‘학자(scholar)’라는 단어가 유래했다). 또한 공감(empathy)과 동정(compassion)의 가치를 배우고 강화하는 방법으로서 공공 연극공연 관람을 포함했다. 위대한 그리스 비극과 희극은 오락거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위대한 그리스 비극과 희극은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활동이었다. 스콜레라는 이상은 우월한 덕목―좋음과 진리에 대한 존중과 지식―으로 여겨지는 것을 보여주는 데 사용되는 시간이었다. 시민의 제1 목적은 스콜레를 위한 시간을 최대화하는 것이었다. (p.26-27)

 

 시민은 공적 참여에 많은 시간을 할당하도록 요구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면 보상을 받았다. 기원전 451년에 페리클레스는 배심원 활동에 최초로 보수를 지급했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난한 시민이 이런 일에 시간을 쓸 수 없을 것이며, 이는 숙의 민주주의에 위배되고 정의[사법]의 실현을 부유층의 손에 맡기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그는 폴리스의 숙의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서 정기적인 적정 규모의 보수 지급을 실시했다. (p.28)

 

 수렵채집 시기에는 최소한의 ‘일’만 있었지만 농업사회에서는 새롭게 희소성에 집착하느라 일이 늘어났다. 희소성에 대한 집착이란 사람들이 더 많은 식량을 경작하고 보관하지 않을 경우 먹을 게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작물과 가축이 날씨, 해충, 토양 악화에 취약했던 초기 농업 공동체에서는 희소성이 현실이었다지만 도시의 팽창 및 늘어나는 도시 인구를 먹여야 할 필요와 함께 이러한 집착이 커졌다. 계급의 역할도 인정해야 하는데, 다수가 자원에 접근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풍요 속에서도 희소성을 고안한 계급 기반 엘리트의 능력 말이다. 유럽 중세 초기에 엘리트가 이를 수행하는 주된 방식은 공유 토지를 인클로저를 해서 자신들의 사적 이득을 위해 그 자원을 착취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더 많은 민중이 판매를 위한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이전에는 공유지에서 무료로 얻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지주에게 지불하기 위해 노동이나 일을 더 많이 해야 했다. 수백년 동안 토지 및 그 자연자원의 소유자들은 큰 권력을 휘둘러 노동을 추출했다. 정치적 우파에 속하는 사람들은 늘어난 노동 참여가 새로운 소비재에 대한 욕구에 의해 추동되었다고 주장한다. 평민이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토지 및 그 자원에 접근을 거부당하고 있었다. 이때는 고안된 궁핍화의 시기였다.
 그것이 바로 17세기 영국 내전 시기에 토지 소유권을 둘러싼 투쟁이 그토록 잦았던 이유이다. 튜더 시대에 벌어진 광범위한 인클로저 이후에 주로 찰스 1세 치하에서 스튜어트 왕조는 토지 인클로저의 새로운 판을 벌였는데, 왕과 궁정의 호화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충족하기 위해 시민들이 더 많은 노동을 제공하도록 강제하는 것이자, 군주제가 제 부채를 갚도록 하는 것이었다. 수세기에 걸쳐 긴장이 고조된 결과 의회 반란이 터졌으며 올리버 크롬웰의 지도하에 반란이 승리하면서 짧은 기간 노동 추출 과정의 속도를 늦추었다.
 계급 기반 인클로저가 벌어지기 이전에 토지의 많은 부분은 공유지여서 지역 사람들(공유자)에게 접근과 사용의 권리가 있었으며, 일의 많은 부분을 공동으로 수행했다. 공예, 숙련 작업 그리고 대부분 하찮은 서비스는 작은 타운과 도시에서 벌어졌다. 공유지 전통은 15세기 말까지 도시 지역에서 계속 우세했으며, 이때 공유지에 대한 접근권 상실로 잉글랜드 전역에서 사회 불안이 폭발했다. (p.52-53)

 

 실제로는 그들의 책과 행동에 분명히 드러난 것처럼 러다이트는 주로 기계 자체가 아니라 생활과 일하는 방식의 혼란 및 파괴에 맞섰다. 이전에도 기계 파괴 폭동은 있었다. 예를 들어 1779년에 아크라이트의 면 공장이 잿더미가 되었다. 따라서 러다이트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리고 착취가 특히 심한 것으로 알려진 자본가들이 소유한 공장의 기계를 파괴하되 다른 자본가들의 기계는 건드리지 않았을 정도로 그들은 선택적이었다. 그들이 파괴한 기계의 대부분은 역직기와 기모기(옷감의 털을 세우는 기계)처럼 수세대 동안 존재해온 것이다.
 이전에 방직공들은 가정 내 혹은 가정 주변에서 공유화, 아마도 계절노동이나 임시노동과 함께 독립적인 일을 기반으로 통합된 삶을 누렸다. 그러한 시간 유형은 낯선 작업장에서 이루어지는 일자리 체제로의 전환에 의해 갑작스럽게 파괴되었다. 작업장 출퇴근은 사람들의 시간을 점점 더 많이 앗아갔다. 아크라이트의 공장에서처럼 종종 사용자는 강요되는 시간 체제에 익숙하지 않은 노동자들을 깨우기 위해 ‘호별 방문원’을 파견했다.
 러다이트는 노동자를 임금노동자로서 공장으로 몰아가는 것에 반대했다. 그들의 장인적 일과 생계는 공장에서 만들어진 더 값싼 직물에 의해 위협받았다. 그들은 또한 공동체 윤리의 규칙을 스며들게 하는 도제 생활 및 생애주기에 따른 호혜성 같은 길드적 전통의 상실에 맞섰다. 그들은 일이 노동에 의해 대체되는 것에 반대하고 있었다.
 낭만주의자이자 19세기의 통찰력 있는 관찰자 가운데 하나인 토머스 칼라일은 1829년에 쓴 에세이 「시대의 징후(Signs of the Times)」에서 방직공들은 “손뿐만 아니라 머리와 마음이 기계적으로” 되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이렇듯 해로운 변화를 분간했다. 러다이트는 그들 시대의 원초적 반란자였다. 즉 대안적 미래에 관한 분명한 전망을 가지기보다는 자신들이 무엇에 반대하는지를 더 많이 인식했다. 그들의 준거점은 상실했다고 여긴 과거였다. 그들은 심지어 마그나카르타로 시작해서 “셔우드 숲의 네드 러드 사무실에서 보냄”으로 끝나는 공개 편지를 회람하기도 했다. 셔우드 숲은 13세기 공유지 방어자이자 네드 러드와 마찬가지로 가공의 인물인 로빈 후드의 은신처이다. 러다이트의 행동이 보인 상징주의는 명백했고, 그랬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배계급이 이들을 일과 공유화의 에토스와 함께 진보의 방해물로 보이게 하는 데 용이했다. 의회는 서둘러 기계 파괴를 교수형에 처할 수도 있는 중범죄로 만드는 법률을 통과시켰고, 범죄자를 추적하기 위해 군대가 파견되었다. (p.84-85)

 

 공유화에 관해, 1804년에 아마추어 정치경제학자인 8대 로더데일 백작 제임스 메이틀랜드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의미한 뛰어나고 예리한 에세이를 썼다. 『공적 부의 본성과 기원 및 그 증대의 수단과 원인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이 에세이는 로더데일 역설이라고 알려진 것을 제시했는데, 그 핵심은 사적 부가 증대하면 공적 부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엘리트가 공유지를 더 많이 획득하면서 이들은 사적 자원이 된 것의 소유와 부당 이용에 집중했고, ‘고안된 희소성’을 만들어내고 공유자가 이용할 수 있는 것을 축소했다. 이것은 시간 사용의 유형에 영향을 주었다. 부유한 사람들이 더 많은 토지, 더 많은 생산수단, 사유재산에 대한 더 큰 통제권을 획득했고, 공유자들은 더 많이 노동하고 더 적게 획득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공유지는 축소되고, 생활방식이자 사회적 보호의 수단으로서 공유화에 대한 전망도 약화되었다. 이것이 영국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다른 곳에서도) 현실이 되었다.
 영국에서 공유화는 19세기까지 살아남았지만, 공유지로 남겨진 숲의 일부와 17세기에 등장한 시민농장에서의 잔여 활동으로서였다. 그것은 산업적 시간 체제에 의해 희생되었다. (p.93)

 

 앞서 인용한 「시대의 징후」에 드러난 칼라일의 직접적인 비통함 이후, 아마 산업적 시간 체제에 대한 가장 유명한 비판은 에세이스트이자 미술 평론가인 존 러스킨의 것일 테다. 1853년에 그는 말했다.

 사람들은 도구의 정확성을 가지고 일하라고, 모든 활동에서 정확하고 완벽하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그들에게서 그러한 정확성을 끌어내려 한다면, 그들의 손가락이 톱니바퀴처럼 측정하게 하려면, 그들의 팔이 제도용 컴퍼스처럼 곡선을 그리게 하려면 그들을 비인간화해야 한다. 그들의 정신이 가진 모든 에너지를 톱니바퀴와 컴퍼스 그 자체로 만드는 데 쓰도록 해야 한다. (…) 다른 한편 어떤 인간을 일하는 피조물로 만들려고 한다면 도구로 만들 수 없다. 상상하고, 사고하고,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것을 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 엔진이 작동시키는 정확성은 즉시 상실될 것이다. 그의 모든 조잡함, 그의 모든 멍청함, 그의 모든 무능력이 나타난다. 부끄러움이 거듭되고, 실패가 거듭되고, 지체가 거듭되지만, 그의 위풍당당함도 나타난다.

(p.95)

 

 평균 학교교육 연수가 늘어났으나 더 흥미로운 것은 정치적으로 교육을 ‘교육산업’이라고 묘사하는 것이다. 초등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 등 모든 층위에서 그 목적은 ‘인적 자본’의 증대이다. 즉 학생들의 소득 획득 능력을 증대하는 것이다. 일자리와 무관하다고 여겨지는 과목들에 들이는 학습 시간은 줄어들었다. 일자리로 직접 이어지는 것도 아닌데 뭐하러 역사, 철학, 문학, 음악에 시간을 들여야 하는가? 과거 2천년 동안 교육의 본질로 극찬받았던 가치들이 비난받고 있다. 상업화된 사회에서 그 자체를 위한 학습, 즉 고대 그리스인들이 파이데이아(paideia)라고 불렀던 지식, 문화, 도덕성에 대한 추구는 주변으로 밀려났다.
 오늘날 모든 층위의 학교교육은 경쟁, 자기 기업가 정신, 개인주의 등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장려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받은 자격증은 점차 이른바 ‘지위재’가 되어갔으며, 신분과 성공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혹은 더 좋은 자격을 가지는 것에 의존하면서 자격증 인플레가 나타났다. 경제학자 프레드 허슈는 “모두가 발끝으로 서 있으면 아무도 더 잘 볼 수 없다”라는 말로 이를 요약했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동료들과 경쟁하는 데 쓰도록 몇년이나 강요받는다. 좋은 일자리 기회가 제한적으로만 공급되므로 교육 체제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이 되었으며, 상업적 이해관계자들은 이 상황을 사적인 과외와 ‘사교육’을 제공하며 이용한다. 영국에서는 그러한 비공식 교육을 받는 11~16세의 비율이 빠르게 늘어났으며, 이를 감당할 수 있는 가정의 아동에게 학습능력에서 이점을 준다고 가정된다. 그러나 이는 사회적 활동 및 사회화 활동 등에 쓸 수 있는 시간의 많은 부분을 먹어치웠다. (p.147-148)

 

 정치적 담론을 계속 왜곡시키는 논점을 반복하는 것에서 시작해보자. 노동과 일 사이의 전환, 이전에는 노동이었던 일의 성장, 이전에는 레크리에이션이었던 노동, 이 모든 것은 경제성장의 GDP 척도를 더욱 신뢰할 수 없고 오도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우리가 계산원의 노동에 의존하지 않고 셀프서비스 계산대에서 소비재에 대한 돈을 지불하는 경우 GDP는 덜 성장한다. 우리가 간병인이나 가사 도우미에게 돈을 지불하는 대신 부불 돌봄을 늘릴 경우 GDP는 내려간다. 우리가 온라인 쇼핑을 하면서 테크 기업이 광고 수입을 창출하는 데 우리 시간을 공급하더라도 우리의 일은 일로서 계산되지 않는다. 버로마이도기(Borrow My Doggy) 같은 앱을 통해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고 개를 직접 산책시킬 경우 우리는 GDP를 낮춘다. 이것은 불합리하고 자의적인 체제이다.
 ‘일자리 보유자 사회’라는 한나 아렌트의 디스토피아적 전망은 경제학자와 정치가 들이 일자리 물신을 만들면서 제3의 시간 시대에 현실이 되었다. 일자리를 갖는 것이 심지어 자유와 같은 것이 되었는데, 이는 노벨상 수상자인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이 취한 입장이기도 하다. 일자리를 갖지 못한 것은 ‘존엄성’의 부정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이코노미스트』의 ‘바틀비’는 말한다. “궂은일이라는 생각은 일자리를 갖는 게 존엄성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흐린다.” 그러나 부유한 논평가들이 하는 주장, 즉 불쾌한 일일지라도 일자리가 존엄성을 부여한다는 주장은 역겹다. 그리고 국가기관들이 일자리 보유를 시민권과 ‘가치’의 표지로 만들 때 이는 필연적으로 터무니없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일자리가 없는 게 국가급여를 받을 자격에 요구되는 ‘사회적 책임성’이나 ‘호혜성’의 결여를 증명한다는 터무니없는 결론 말이다. (p.207-208)

 

 제3의 시간 시대의 가장 분명한 결점은 좋은 시간에 대한 접근의 불평등 및 서로 다른 집단에 지워지는 다양한 요구이다. 엘리트와 살라리아트는 자신의 시간을 상당히 통제하지만, 프레카리아트는 거의 그렇게 하지 못한다.
 모든 형태의 노동과 일에 퇴행적인 경향이 있다. 자기관리를 위한 일을 살펴보자. 부유한 사람들은 금융 문제와 관련된 일을 직접 하느라 시간을 쓰지 않고 전문가를 고용할 수 있다. 프레카리아트는 전문가를 고용할 형편이 안 된다. 그들의 희소한 금융 자원을 감안할 때 실수의 잠재적 비용은 그 복잡성을 이해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다른 형태의 일과 노동이 그렇게 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에너지를 밀어내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오늘날에는 저소득 노동자라 할지라도 과거보다 훨씬 더 복잡해진 금융 결정을 내려야 한다. 예를 들어 『파이낸셜 타임스』의 기사가 지적한 것처럼 “부유한 나라에 사는 현대의 평균적인 노동자는 현재 노년을 살아가는 데 충분한 자원을 오로지 스스로 확보해야 한다”. 최근에 저축 이자율이 매우 낮아서 금융 투자가 상대적으로 더 매력적이게 되었고, 이는 커지는 불평등의 원천이기도 한데, 합리적인 투자를 하기 위해 전문가의 조언과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분야에 전문인 학자들이 ‘금융 문해 교육’을 주장하는 것은 그럴듯한 일이나, 프레카리아트는 이를 위한 시간이 없거나 여기에 돈을 쓸 수 있는 여력이 없다.
 중개인의 시간을 살 수 있는 부유한 사람들과 달리 프레카리아트는 국가를 위한 일에도 많은 시간을 써야 하는데, 다양한 정부 공무원을 종종 청원자로서 대면 접촉하고, 규율적 종속의 형태로서 대기하거나 줄을 서야 한다. 국가가 프레카리아트에게 부과하는 일의 ‘거래 비용’은 일에 관한 분석에서 간과된다. 그들의 시간은 존중받지 못한다. 모든 공리주의적 정부는 소소한 것들을 개혁하고자 한다. 오늘날의 정부는 행위 조건을 사용하여 급여 청구인이 대부분 쓸모없고 시간을 소모하며 보수 없는 일을 하도록 강요한다. 이것은 잔인한 형태의 불평등이다. (p.210-211)

 

 미래에 대한 감각의 상실, 즉 사회가 진보하고 있으며 미래는 과거나 현재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믿음의 상실이야말로 프레카리아트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다. 프레카리아트는 구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주어졌던 사회적 전망과는 완전히 다른 사회적 전망에 직면해 있다. 구 프롤레타리아트는 대체로 규율 잡힌 노동에 대한 댓가로 사용자(자본)와 국가가 중기적인 시간 보장을 제공한다는 사회적 협상을 받아들였다. 일자리를 상실하거나 사고 혹은 질병이 발생하거나 아이가 생기거나 연금 수급권이 주어지는 연령에 도달할 경우 보호받게 될 것이다. 개인 분담금을 냈거나 사용자와 국가가 분담금을 내게 했을 경우, 보상금 형태로 지불되는 어느 정도의 보장된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며, 그 시간 동안 좀더 장기적인 대응을 계획할 것이다. 이것이 윌리엄 베버리지가 1942년에 전후 복지 개혁에 관해 영국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소득 능력의 일시적인 ‘중단’이라고 기억할 만하게 서술한 것이다.
 반면에 프레카리아트는 장기 미래는 말할 것도 없고 단기 미래에 관한 통제의 전망도 없이 지속적으로 현재를 살아야만 한다. 미래는 불길한 예감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불평등의 한 형태이다. 지금 나의 시간을 가지는 것은 가치 있는 자산이다. 미래 시간이 보장되었다는 감각을 가지는 것은 심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미래에 원하는 대로 자신의 시간을 채울 수 있으리라는 자유의 정신상태에 화폐가치를 매길 수는 없을지라도 그러한 감정은 우리 대부분에게 커다란 가치가 있는 게 확실하다.
 또한 살라리아트와 프레카리아트 사이에는 이전의 살라리아트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보다 더 날카로운 차이가 있다. 오늘날의 살라리아트는 주식, 주식 옵션, 직업 연금, 상병수당, 육아휴직 등 같은 상당한 지대 소득과 특전을 받는데, 이 모든 것은 불확실성에 덜 노출되어 있고 시간에 관한 통제권을 가질 수 있는 더 큰 물질적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레카리아트는 대개 이 가운데 어느 것도 허락되지 않으며, 그 대신 변덕스럽고 불확실한 소득에 적응해야만 한다.
 담보물이 풍부한 살라리아트와 엘리트는 저리로 신용 거래를 하거나 빚을 낼 수 있고, 이는 장기적인 보장과 시간 통제권을 강화한다. 반면에 프레카리아트는 현실에서 고리 단기 부채를 늘릴 수밖에 없고, 이는 장기적인 보장이나 시간 통제권을 가질 수 없게 한다. 이는 불평등을 악화한다. 게다가 국가는 종종 세금 경감이나 대출 지원제도를 통해 살라리아트의 채무에 보조금을 준다. 게다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정부와 중앙은행 들이 추구한 저리 정책은 부호계급, 엘리트, 살라리아트가 가진 주택과 기타 자산의 가격을 올렸고, 이는 부의 불평등을 증대했다. (p.215-217)

 

 프레카리아트는 불의의 사고라는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불확실성에도 더 많이 노출되어 있다. 프레카리아트는 강건함이 결여되어 있고,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부정적 사건에 취약하다. 나쁜 일이 다른 사람들보다 프레카리아트에게 더 많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들은 특히 개인적 관계 및 일 관련 관계에서 우연적 사건을 더 많이 경험하며, 이는 새로운 위험과 불확실성을 가져오고 취약함(fragility)의 감정을 강화한다.
 프레카리아트는 또한 충격이나 우연적 사건에 대처할 회복력이 결여되어 있다. 그렇게 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들며, 이런 노력에 드는 비용이 더 많고 해당 기간에 지원받을 수 있는 자원이 더 적다. 프레카리아트는 전형적으로 낮고 변덕스러우며 불확실한 임금을 받으며, 비임금 급여가 없고, 권리 기반 국가급여가 없으며, 믿을 만한 공동체나 가족의 급여가 없고, 단기 보장을 해줄 저축이 없다. 그 결과 그들은 트라우마를 견디고 적응과 회복의 비용을 관리할 재정적·심리적 자원을 불러낼 수 있는 적절한 시간이 없다. (p.222-223)

 

 시간 채우기(time filling) 또한 제3의 시간 체제의 한 가지 특징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뭔가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압력에 시달린다. 우리는 적극적이어야 하고 우리의 시간에 대한 여러 요구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압력에 시달리며 고갈될 때까지 과제들 사이를 옮겨다닌다. 시인 시어도어 로스케는 자신의 시 「병약(Infirmity)」에서 이 점을 잘 포착했다. “너무 적극적인 사람(mind)은 생각(mind)이 전혀 없다.” 거꾸로 제3의 시간과 프레카리아트화된 정신의 또다른 특징은 생각 없는 수동성인데, 끊임없이 알림을 체크하고, 항상 외모를 유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종종 그저 배제될까, 보잘것없는 일자리를 상실할까, 알지 못하는 어떤 활동에서 배제될까 두려워할 뿐이다.
 이것은 일부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창조성 명령이라 부르는 것에 의해 강화되는데, 새로운 것의 지시를 반영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창조성’에 근거하여, 최신의 사고를 결과물로 바꾸는 능력에 근거하여 평가된다. 정보기술은 분노와 지속적인 미충족이 널리 퍼져 있는 속도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허버트 사이먼은 이런 재담을 한 적이 있다. “정보가 소비하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정보는 그 수취자의 주의를 소비한다. 따라서 정보의 부는 주의의 빈곤을 창출한다.” (p.234)

 

 사회가 집단적 주의력결핍장애로 고통받고 있다고 말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제3의 시간은 지속가능한 집중에 필요한 공간을 조금씩 깎아먹고 있다. 우리는 돌봄이나 공부처럼 본래 지속적인 주의가 요구되는 어떤 일에 일정 시간을 쏟을 수도 있으나 다른 과제에 시간을 사용하라며 침입하는 요구 때문에 돌봄이나 공부의 질에 악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어떤 것을 깊이 파고들기보다는 큰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활동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데 익숙해졌고, 따라서 정신적으로 도전적인 과제나 활동에 직면했을 때 다른 편한 일로 바꾸는 게 정서적으로 더 쉬워졌다. 이게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사회정책을 지배하는 행동심리학자와 공리주의자 들은 행복이 삶의 전부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프레카리아트화된 정신은 축소된 정신이며, 부지불식간에 영향을 미치는 광고에 의해, 상품화된 정책에 의해, 마음에 아무런 부담도 주지 않기에 쉽게 소화할 수 있는 진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정치가들에 의해 손쉽게 이용당할 수 있다. 프레카리아트화된 정신은 약해지며 통제 불능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우울증에 빠진다. (p.235)

 

 교대 노동, 윤번 교대, 예측할 수 없는 일정은 제3의 시간의 주된 특징이며, 스트레스, 건강 문제, 가족 해체 등과 연관되어 있다. 이것들은 자기돌봄 시간, 가족의 일상사, 정기적인 친구관계의 유지 등을 방해한다. 여러 연구들에 따르면 교대 노동자의 20~30퍼센트가 불면증이나 기타 수면장애를 겪고 있으며, 이는 정신건강과 신체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예측할 수 없는 노동시간은 또한 예측할 수 없고 변덕스러운 소득 그리고 전반적인 소득 보장의 결여로 이어지며, 더 큰 분노, 수면 부족, 신체적 스트레스를 낳는다. 미국의 어느 연구에 따르면 가장 안정적이지 않은 노동 일정을 수행하는 노동자들이 가장 안정된 일정을 가진 노동자들에 비해 심리적 고통이 두 배 이상 크다. 그리고 불안정한 노동 일정을 가진 부모는 자기 아이들을 적절히 돌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부모의 스트레스가 주는 영향과 별도로 아이들의 발달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저소득층은 일정 불안정을 경험할 가능성이 더 크고,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커지는 건강상 차이라는 생애 불평등을 공고하게 만든다. (p.242)

 

 물질적 압력을 통해 노동, 노동을 위한 일, 재생산을 위한 일 등을 더 많이 하도록 유도되면서 우리는 재화, 서비스, 오락거리를 끊임없이 소비하며, 이것이 노동과 일의 목적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우리는 제한된 우리의 ‘자유시간’을 레크리에이션을 위해 쓴다. 원기를 회복하고 긴장을 풀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고, 상업적 이해관계가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동화가 뒤따른다.
 버트런드 러셀이 아이에게는 지루한 게[권태] 좋다고 말했을 때,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지루한 게 아이에게 좋다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재미있는 상태에 있는 것이 상상력을 둔하게 한다고 본 그가 확실히 옳았다. 지루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곧 생각이나 아이디어로 자기 정신을 채울 것을 찾게 마련이다. 계속해서 스크린이나 이어폰에 붙어 있는 것은 그러한 이미지나 사운드의 창조자에 의해 상상력이 깎여나가거나 왜곡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한 수동화가 진정한 여가를 잠식한다.
 강력한 이해관계가 그리스적 의미에서 스콜레인 여가에 우리가 시간을 쓰지 않기를 바란다. 성찰, 논쟁, 창조적이고 회생적인 게으름, 이 모든 것이 시간 낭비로 폄하되거나 간주된다. 그 결과는 선거 투표율의 감소, 정당 당원 수의 감소, 정당 내부 활동의 쇠퇴 등에서 드러나는 민주주의의 약화이다.
 그리스에서 시민이란 폴리스에 참여할 수 있는 지위와 역량이 있는 어떤 사람이었다. 실제로는 성차별적이고 불평등한 방식으로 이루어졌지만, 숙의 민주주의는 참여할 수 있는 시간과 유효하게 참여하기 위해 역량을 획득하고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모두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시간 사용에 필수적인 활동으로 공감을 강화하기 위한 시민 교육과 예술 체험을 요구했다. 오늘날 그것은 ‘인적 자본’을 추구하는 가운데 희생되었다. 시민적 지식은 높은 투표율과 지역 공동체에 적절한 개인들을 선출할 가능성을 제고하고, 진정성과 지식의 가치를 장려한다. 시민성의 상실은 사기꾼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으로 이어진다. (p.246-247)

 

 그러나 1936년 영화 「모던 타임스」에서 찰리 채플린이 잊힐 수 없게 그려낸 것처럼 우리가 조립 라인에 서서 반복적인 과제를 높은 속도로 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최소한 작업 시간이 끝나서 공장 문을 나서기 전까지 우리는 자유주의적 자유를 행사할 수 없다. 우리는 도덕적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우리는 정신과 신체를 빼앗기고 있다. 그것은 극단적인 테일러주의이다. 그렇게 강화된 노동에 종속되어 있는 사람은 허위의식에 유혹당할 수 있으며, 특정한 방식으로만 사고하고 다른 방식으로는 사고할 능력을 상실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조립 라인에서 채플린은 일시적으로 정신이상 상태가 되고, 흰 가운을 입은 남자들에게 끌려 나간다. 그의 시간에 대한 물리적 통제가 그의 정신에 대한 통제의 상실로 확장된다.
 21세기의 아마존의 창고가 이에 해당한다. 노동자들은 상품 선별과 포장을 할 때 부담이 큰 목표를 할당받으며, 휴대 스캔 장치를 통해 지속적으로 추적당하고 신자유주의적 인센티브―기준 이상의 성과에 대한 재정적 보상과 성과 미달이나 사소한 노동 규칙 위반에 대한 불이익―를 받는다. 파놉티콘 노동과정이 크게 발전했다. 21세기의 변형판과 채플린 사이의 한 가지 차이는 ‘넛지’를 포함한 사회적 통제의 정도이다. 사회적 통제가 작업장 외부 그리고 노동시간 외부의 공간과 시간에 침입하고 있다. (p.250)

 

 복지정책은 언제나 시간을 잡아먹고 급여를 얻는 사람, 얻으려고 하는 사람, 얻을 수 있으나 무지·두려움·부끄러움 때문에 신청하지 않는 사람, 일생 동안 급여 주변에 있는 사람 들의 건강에 영향을 미쳤다. 유니버설 크레디트를 도입한 2013년 영국 정부의 주된 개혁은 어마어마한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 제도가 표면적 목표인 고용을 증가시켰다는 증거는 없는 반면 수백만 명을 우울증과 궁핍에 빠뜨렸다. 지급된 액수가 먹고살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5주 동안 급여를 기다려야 했기에 많은 사람들이 부채와 극빈에 빠졌다. 청구인이 준수해야 하는 조건이 부담스럽다. 제재 체제가 가혹하고 적법 절차를 부정한다. 청구인이 수행하는 국가를 위한 일은 쓸모없는 일이다. (p.254)

 

 자선 일에 시간을 들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타주의적 동기로 그렇게 하며, 존경받을 만하다. 하지만 체제와 그 체제가 대변하는 것은 의문시되어야 한다. 자선국가는 가부장주의적이고, 도덕주의적이며, 모욕적이다. 사회적 연대와 공감을 동정으로 대체하며, 그 밑에 경멸이 깔려 있다. 소수자들을 청원자로 바꾸며, 다수를 거지와 다름없는 사람으로 만든다. (p.257)

 

 자선은 임시방편이며, 부유한 사람들에 의해 부유한 사람들을 위해 운영되는 권위주의적 정치로의 이동과 계급구조의 성장을 촉진하는 지대 추구 자본주의의 안전밸브이다. 박탈과 불안전에 몰려 자선단체를 찾는 사람들은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그에 맞게 행동하라는 훈계를 듣는다. 궁극적으로 이들의 박탈을 초래한 정책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청원자들을 공격할 수 있으며, 이들이 자격이 있다거나 정직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다. (p.258)

 

 새로운 자선국가는 시간 사용과 관련해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청원자들은 그럴 일이 없었다면 가고 싶지 않은 장소까지 가야 하고, 줄을 서는 데 막대한 시간을 써야 하고, 많은 경우 불편하고 난처한 서류 작성을 해야 한다. 그들은 청원자로서 불만을 제기하지 않으며, 어떤 경우든 최전선에서 자선을 제공하는 기관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이 운영하고 있는 체제에 책임이 없다. 실제로 많은 자원자들이 자신의 생활수준을 개선하는 데 썼을 시간을 여기에 사용하고 있다. 그리 유익한 장면은 아니다. (p.259-260)

 

 한편 정치적 우파인 사람들은 (좌파 일부와 함께) 임금이 하락하고 일자리가 파편화되는 시기에 노동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또 다른 길을 택했다. 그들은 점차 노동으로서의 일을 수행하거나 준비하는 것을 조건부로 국가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착수했다. 이것은 더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시간을 쓰게 만드는 것일 뿐이었고, 대개 시간을 의미 없게 사용하게 했다.
 영국에서 유니버설 크레디트를 받는다는 것은 가능한 한 일자리에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노동연금부는 분명하게 천명했다. “신중하게 고용계약을 반영한 것으로서 청구인 약정은 복지가 일 자체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일하는 사람이 사용자에게 의무가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청구인도 납세자에게 책임이 있다. 현재 일자리센터의 누군가가 말하는 것처럼 지원받는 댓가로 청구인은 ‘일을 찾기 위한 일’을 한다.”
 유니버설 크레디트의 수장인 닐 쿨링은 2021년 3월 의회 내 두 개의 위원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제도는 유니버설 크레디트를 받는 250만명에게 유니버설 크레디트를 받는 조건으로 구직활동을 요구합니다. (…) 일자리를 찾지 않으면 일자리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한 천명 뒤에는 도덕적 착란이 있다. 개인의 시간 사용과 웰빙 모두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그러한 태도에는 세상에 가질 수 있는 적절한 일자리가 있다는 것, 실업자 모두가 노동연금부가 지정한 방식으로 구직활동을 할 능력이 있다는 것, 노동연금부가 이를 가장 잘 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일단 노동연금부에 관대하게, 그 전제들 각각이 진실일 가능성이 60퍼센트 있다고 치자. 그럴 경우에도 청구인 다섯 명당 한 명 이내에게만 공정한 일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유니버설 크레디트는 국가급여를 신청할 때의 낙인을 이미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유순함을 심어주려는 사회적 규율의 한 형태이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일선 관료제가 부과하는 시간 통제 체제이며, 위법 행위 추정에 있어서 극히 불공평하고 삶을 위협하는 제재의 체제이다.
 이 전략의 핵심에는 노동시장의 하층에 있는 사람들, 즉 프레카리아트의 시간에 대한 통제가 있다. 그것은 한 번쯤 청구인이 된 수백만 명 그리고 청구인이 될 수도 있는 더 많은 사람들의 시간이 가지는 가치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 체제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노동주의자들은 노동시장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그러한 처우가 임금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 (p.329-331)

 

 노동이 아닌 수많은 형태의 일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질 가능성이 있는 일자리보다 심리적으로, 사회적으로 더 가치가 있다. 모두를 일자리, 즉 선택하지 않은 활동에 집어넣는 체제는 국가가 지휘하는 소외일 것이다. 진보주의자라면 우리가 쓸모없고 종속적인 일자리에 쓰는 시간을 최소화하고, 이를 통해 스스로 선택하고 개인과 공동체의 발전을 지향하는 형태의 일에 쓰는 시간과 에너지를 늘리기를 바라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일자리 보장은 유용하고 생산적인 활동에 쏟는 일과 시간의 양을 무심코 줄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무작위로 선별한 2천명의 실업자에게 구직활동을 요구하는 조건부 급여 대신 무조건적 현금 급여를 했던 2017~18년의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한 가지 결과는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가 아닌 형태의 일을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보장된 일자리를 가져야 했다면 그런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p.345-346)

 

 일자리 물신은 좌파의 복음이었다. 물론 더 많은 일자리의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더 많은 사람들을 소외되고 예속된 지위에 밀어 넣는 것을 선호한다는 주장을 무시할 것이다. 추정컨대 그들은 일자리를 가지는 게 소득을 얻고 사회의 생산적인 구성원이 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들은 수백만 명이 가질 것이라고 예상되는 일자리에서 자신이나 친구들이 일하기를 바라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사람들이 좋은 급료와 좋은 노동조건의 괜찮은 일자리를 갖길 바란다고 그들이 응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많은 일자리가 생래적으로 시시하고 따분하며 따분하게 만들고, 그런 일을 수행하도록 밀어 넣어지거나 유도된 사람들의 시간을 잡아먹고, 그런 다음 물질적 궁핍의 공포로 그 자리를 계속 유지하게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진보적 상상력은 어디에 있는가? 모두에게 일자리에 쓰는 시간이 가능한 한 많이 줄어드는 좋은 사회(Good Society)를 그들은 상상할 수 없는가? 그런 방향으로 시간의 정치를 전환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발판에서 일자리를 차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일자리가 인류학자이자 활동가인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묘사해서 유명해진 ‘엉터리’ 일자리(bullshit job)일 뿐만 아니라 사회에 아무 기여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노동에, 일자리에 밀어 넣는 것이 전혀 진보적인 전망이 아니라는 점이 인정받고 있다. (p.357-3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