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학준의 주변 : 끊임없이 멀어지며 가라앉기 / 오학준 / 편않
방송사는 매일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외로운 곳이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서로의 기운이 잘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많다. 매해 정규직으로 방송사 교양국이라는 세계에 발을 들이는 사람은 넉넉히 세면 서른 명 정도로, 방송사 단위로 쪼개 보면 많아야 네댓 명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체셔 캣’처럼 미소만 남기고 각자의 일터로 사라진다. 특히 노동 시간이 길고 일이 험하기로 유명한 시사 고발 프로그램에 들어간 사람들은, 안개 속으로 사라진 사람처럼 한동안 잊힌다. 우리는 매일같이 출근하고, 매일같이 실종된다.
세상과 사람을 잇는 게 방송이라지만, 정작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이 세상과 얼마나 연결되어 있나 반문하는 매일이다. 워낙 적게 선발하니, 뽑힌 사람들은 발가락처럼 서로 닮았다. 이 세계 사람들의 평균이 바깥 세계의 그것과 얼마만큼 멀어져 있는지도 자각하기 어렵다. 자기 이름을 알리는 데 성공한 몇몇 이들은 선망과 원망을 자아내는 PD의 이미지를 만들어 판다. 그 환상이 아름다운 만큼, 실망도 크다. 혼자 일할 수 없는 곳에서 모두 다 자기가 해냈다고 말하는 모습을 들을 때 나는 그와 함께 일하는 이들의 고통은 없을지 떠올린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는 사람의 말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원하지만 소수의 사람들만 설 수 있는 좁은 중심에 대해선 누구나 말을 얹는다. 하지만 정작 누구도 원하지 않으나 대다수가 서 있어야 하는 주변에 대한 말은 드물다. 이곳에 대해 말하려면 자기가 중심에서 밀려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니까. 장삼이사가 되려고 사는 건 아닐 테지만, 결국 우린 대부분 장삼이사가 된다. 그런데, 장삼이사라고 입이 없겠습니까? (p.11-12)
교양 프로그램은 광고가 잘 붙지 않았다. 시청률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미나 자극적 요소가 예능과 드라마에 비해 턱없이 적을 수밖에 없으므로. 광고가 주 수입원인 방송사 입장에서, 돈을 잘 벌지 못하는 교양 프로그램에 예산을 원하는 만큼 배정해 주긴 어려웠을 것이다. PD들은 끝내 부족한 예산안을 받아 들고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다. 무언가를 조금 덜 쓰거나, 무언가를 조금 덜 찍었다. 어디든 빠듯한 건 다 마찬가지였겠지만……. 그 흔적들은 고스란히 방송에 남았다.
11년 전, 지금도 방송하고 있는 (하지만 이 책이 나올 때쯤이면 사라질) 프로그램에서 제작비 절감 차원에서 방청객을 쓰지 않기로 결정했었다. 녹화가 끝나고 나는 플로어 아래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들 앞에 섰다. 차마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며? 들었어. 우리 목소리 녹음한다며? 잘 됐네. 오래 남겠어.” 아주머니들은 한참을 웃었다. 나도 울다가 같이 웃었다. 마이크를 들고 소리를 땄다. 방정맞은 웃음소리, 용기를 주는 박수 소리, 땅이 꺼져라 내뱉는 한숨 소리. 수십 가지의 웃음과 울음을 테이프에 담았다. 그 소리들은 아주머니들의 바람처럼 여전히 프로그램과 함께하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 베어 낸 흔적들은 프로그램 제작기획서 위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제작비 절감을 위한 동원 방청객 삭제.” 그 문장들을 찾아 읽으며 누가 오늘은 또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를 잘라 냈나 상상했다. (p.26-27)
숫자가 눈에 익어 가면서, 새로운 세계가 보였다. 밖에서 보았을 땐 매끈했던 회사와 정산서가, 안에서 보니 잘게 쪼개져 있었다. 제작비 안엔 이해관계의 균열이 있었다. 방송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하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회사와 고용 관계에 있지 않다. 『미디어오늘』의 2022년 5월 4일 자 기사 「[방송비정규직 실태조사 ①] 지상파3사 시사·보도프로 프리랜서 인력 현황 최초 공개」에 따르면 지상파 3사의 시사교양국 및 보도국에서 일하는 인원 가운데 50~60%가 비정규직(프리랜서, 파견직 포함)이다. 직군에 따라 100% 프리랜서인 경우도 있다. 메인 프로듀서를 제외한 전원이 프리랜서나 파견사원인 팀도 있을 정도다.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비정규직이었다. 겉으로 보면 서로 구분하기 어려웠다. 똑같이 밤을 새워서 편집하고, 머리를 감지 못해 기름이 흐르고 있고, 어제 입은 후드티를 오늘도 입고 지하 식당에서 밥을 입에 욱여넣는다. 집에 며칠이나 들어가지 못해 편집실이 내 집인지 잠깐 헷갈렸다는 농담을 나누고, 같이 컷의 순서를 두고 침을 튀기며 싸운다. 하지만 누군가는 2월에 연말정산을 하고 누군가는 5월에 종합소득세 신고를 한다. 누구의 월급은 정산서에 반영할 필요가 없고, 누구의 월급은 주별로, 건별로 나뉘어 기록된다.
카메라 구도를 잡는 법, 고약한 선배들의 촬영에서 버티는 노하우를 알려 주던 어떤 선배는 관계가 꼬여 어느 날 자취를 감췄다. 좋은 실력으로 자극하던 비슷한 연차의 프리랜서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며 일을 그만두고 커피를 배웠다. 방송사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막내 작가는 폭언을 견디지 못해 슬리퍼 한 짝만 덩그러니 남기고 회사를 떠났다. 한편으로는 몇몇 사람들의 환심을 사서 격에 맞지 않는 자리를 꿰찬 사람도 있었고, 불러 주는 곳이 많아 몸값이 천정부지로 오른 사람도 있었다. 능력과 인맥을 활용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느슨한 계약관계는 무기였지만, 갓 일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했다.
막내들이 언제나 궁색했다. 노동조합은 정규직을 위한 다양한 보호 장치들은 마련해 두었지만, 함께 일하는 비정규직 동료들을 지키기 위한 장치를 마련하는 데엔 서툴렀다. 때때로 조합원이 아닌 사람들까지 위해야 하느냐는 볼멘소리도 들렸다. 그때마다 조합도 이익단체라는 말을 실감했다. 비정규직들이 속한 단체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거기서도 별로 힘이 없었다. 누릴 것들을 전부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큰 건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보호막에서 비켜난 사람들만 연기처럼 사라졌다. (p.29-31)
가장 길게 머물렀던 곳은 미국이었다. 두 달 가까운 시간 동안 미국의 동서 해안을 오갔다. 그곳에서 자본이 민주주의를 잠식해 들어가며 드리운 그림자를 확인했다. 오늘날 미국의 정치가 부유한 자들만을 위한다고 말하는 전직 로비스트를 만났고, 의료보험이 없어 치과 치료를 제대로 못해 어린 자식을 떠나보낸 부모를 만났다. 부유한 집안을 위한 학교를 짓느라 재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갑자기 공립학교를 빼앗긴 학생들을 만났고, 극우파의 주장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파렴치한 범죄자로 전락한 전직 공화당 의원을 만났다.
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학교를 빼앗긴 아이들은 교육청 앞을 맴돌며 시위를 이어 갔다. 교육은 모든 사람의 권리라며 아홉 살 난 아이는 목소리를 높였다. 전직 로비스트와 보험사 직원은 검은돈이 오가는 방법을 폭로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촉구했다. 갖은 비방에도 불구하고 늙은 공화당원은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았다. 우리는 고통 받는 사람들이 각자 고립되지 않기를 바랐다. 다큐멘터리가 그들이 어깨를 기댈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랐다. 미국의 일이었으나, 언젠가 우리의 일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얼굴들이 우리가 익숙한 얼굴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제는 모든 기억이 희미하지만, 표정이 오래 남은 얼굴들이 몇 있어 여기 따로 기억한다. 언젠가 우리의 얼굴이 될지도 모르므로. (p.46-47)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시카고 시장 선거가 치러졌다. 민주당에선 오바마의 측근인 램 이매뉴얼이 출마했다. 그는 시카고 출신이고, 일리노이 주 하원 의원을 오래 역임했다. 직전까지 오바마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냈다. 지역이 배출한 최고의 정치인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토박이가 민주당 후보가 되는 데 걸림돌이 될 게 있었을까? 그는 무난히 경선을 통과했고, 민주당 텃밭에서 손쉽게 승리했다.
문제는 그 후에 일어났다. 그랑 블러바드 지역에 있는 오버턴 초등학교를 포함해 수십 곳의 공립학교들이 갑자기 문을 닫았다. 하루아침에 수많은 학생들이 학교를 잃었다. 마을 공동체의 중심지가 사라졌고, 마을 사람들은 추억을 빼앗겼다. 그들에게서 학교를 앗아 간 사람이 램 이매뉴얼이었다. 그는 자신이 시장이 되는 데 표를 보태 준 사람들을 향해 ‘공교육 개혁’이라는 칼날을 휘둘렀다.
시작은 오바마 대통령의 교육 개혁이었다.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은 ‘정상을 향한 질주’라는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전국 규모의 학력 평가를 도입하고, 차터스쿨 설립 규제를 완화하고, 학업 성취도에 따라 교사의 급여에 차등을 두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했다. 공교육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학업 성취도를 끌어올리기 위해 40억 달러가 넘는 재정을 투자하기로 계획한 것이다.
2001년 시카고 교육감을 맡았던 안 덩컨이 교육부 장관으로서 이 ‘개혁’을 선두에서 이끌었다. 당시 학업 성취도가 낮은 학교들은 폐교하고, 교사들의 급여를 학력에 연동하는 실험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경험을 전국적으로 적용했다. ‘퇴학 공장’이 되어 버린 학교들을 폐교하고, 그 빈자리를 차터스쿨로 채우기 시작했다. 2005년부터 2011년까지 시카고의 차터스쿨은 무려 191%나 증가했다.
차터스쿨은 양날의 칼이었다. 학교를 운영하는 개인이나 단체의 능력이 좋다면 공립학교보다 뛰어난 학업 성취도를 기록할 수 있었다. 학업 성취도가 뛰어나면 교직원들도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저소득층과 소수계층에게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제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노조가 없어 교직원의 처우가 악화될 가능성이 있었다. 공립학교가 폐교된 자리에 새롭게 차터스쿨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지역의 교육 공백이 발생할 우려도 있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중요했다. 하지만 정책을 좌우하는 사람들 그 누구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2011년 시장에 당선된 램 이매뉴얼은 정부의 교육 프로젝트를 충실히 따랐다. 학교 폐교를 공공연하게 언급했다. 문제는 규모였다. 50곳의 공립학교가 폐교 대상이었다.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학교를 폐교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2013년, 6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시카고 교육위원회는 저조한 학업 성적과 시설 활용률 저조 등을 이유로 공립학교 50곳을 폐교하기로 결정했다. 그중 49곳이 초등학교였다. (p.54-56)
아이린 로빈슨: 아이들은 화가 나고, 배신감을 느끼고, 방치된 채 누구도 자신들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느끼죠. 그들(정치인들)은 묻지 않았어요. 그저 불도저처럼 여기 와서 ‘학교를 폐교하겠다’고 말했을 뿐, 우리한테 협조를 요청한 게 아니에요.
새로운 학교가 들어온다고 해도, 그간의 공백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이들은 친구들을 잃었고, 친구들과의 사회적인 교류를 잃었다. 동네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할 추억을 잃었다. 대체 불가능한 상실의 경험이 아이들의 삶을 어떻게 뒤흔들지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들에게 학교가 사라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 번쯤 물어보았다면 어땠을까? 우리는 통학 버스를 기다리며 아이들에게 물었다. 걱정되는 건 없니? “버스를 오래 타야 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다른 학교에 가면 적응을 잘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요.” “버스가 한 번뿐인 건 너무한 거 같아요. 한 번 늦으면 끝이잖아요. 학교에 못 가면 또 성적이 안 나올 거고요. 걱정이에요.” 아이들은 빠른 속도로 말을 내뱉었다. “아무도 우리에게 학교가 왜 문을 닫아야 하는지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았어요.” 아이들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미는 건 어른들이었다.
선배는 아이들이 노래를 불렀으면 했다.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던 아이들의 노랫소리에 어른들이 귀를 기울여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학교가 끝나고 버스에서 내린 아이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몰래 학교 뒤뜰에 모였다. 악을 써도 좋으니까, 너희들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게 노래를 불러 봤으면 해. 아이들은 즐겁게 노래를 불렀다. 몇몇은 음정조차 맞추지 못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정제되고 아름다운 목소리만이 자격이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 주세요. 우리의 외침을 들어 주세요. 우리가 변화를 가져올 거예요.” (p.58-60)
조연출이었기에, 할 수 있는 말에는 한계가 있었다. 매일 옆자리에서 프로그램이 달리 될 수 있었을 가능성을 꿈꿨다. 나라면 이렇게, 나라면 저렇게 해 보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다. 언젠가 내가 다큐멘터리를 다시 할 수 있게 된다면, 그때는 그 상상을 실현해 보고 싶다는 기대가 그 후의 몇 년을 버티게 했다. 헛된 기대였지만, 덕분에 넘을 수 있었던 고비들이 있었으니 원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큐멘터리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날 만큼 아름다운 순간들을 만났음에 감사했다. 뉴저지에서 리치먼드까지 이어진 수백 킬로미터의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석양이 지는 순간 시동을 멈추고 모두 차에 몸을 기대 해가 완전히 넘어갈 때까지 하늘을 바라보았던 순간이나, 가나와 부르키나파소의 국경 지대에서 말라리아로 쓰러져 수도까지 한참을 실려 오는 동안 광활한 대륙을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던 순간 같은. 사람을 만나 편견이 깨지고, 시야가 넓어지던 시간들…….
가까이에서 다큐멘터리의 시작과 끝을 바라본 경험은 값졌다.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어떻게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일 것인지 태도를 배웠다. 오래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들었던 소중한 말들에도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도, 우리가 진실을 온전히 대변할 수 있다는 허세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도 배웠다. 한마디로, 겸손할 것을 배웠다. 하고 싶은 말을 하려고 시작했으나, 그 말이 얼마나 좁고 편협한지를 깨닫는 시간이 부지기수였으므로.
다큐멘터리는 하고 싶은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지만, 그 질문의 구체적 형상은 우리가 들은 사람들의 얼굴과 말에 있었다. 잘 듣는 것에서부터 다큐멘터리는 시작한다. 우리의 질문이 당신의 반문과 만나 다큐멘터리를 이룬다. 더 잘 말하고, 더 잘 듣고 싶어졌다. (p.66-67)
‘리얼’ 자체가 문제여야 한다고 느꼈던 건, 짧지만 강렬했던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제작 경험 때문이었다. 시청자들이 ‘진짜같다’고 느낄 수 있게 만들기 위해 프로그램의 표면을 끊임없이 매끄럽게 다듬으며 생각했다. 사람들이 바라는 ‘리얼함’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제작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리얼함’이란 무엇인가. 서로의 욕망 속에서 우리의 세계는 어떻게 비치고 쪼그라드는가. 프로그램에 몸을 담았던 짧은 시간 동안, 나는 프로그램 안팎의 날것의 욕망에 베이고 찢겼다. (p.73)
시청자들에게 ‘진실’을 약속하는 일은 오래도록 다큐멘터리와 보도의 몫이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지만) 사회의 어두운 측면을 폭로하고,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는 과정을 함께 지켜보며 시청자들은 분노하고 기뻐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사람들에게 제공한 쾌감도 진실의 약속과 무관하지 않았다. 다만 해방적 기능보다는 게임 장르와의 화학적 결합이 더욱 결정적이었다.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이 보여 주는 인간 군상의 각본 없는 드라마는 ‘현실감’을 주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 제작자들은 이 현실감을 주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는 요소들을 통제했다. 프로그램이 방영되기 전까지 참가자들이 미디어와 접촉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프로그램의 ‘진실성’을 해칠 수 있는 사람들을 퇴출시켰다. 사람들의 행동을 미세하게 조정하는 인터뷰, 경쟁심을 불러일으키게 고안된 게임, 일부러 방치하는 소규모 회의, 자기 손으로 탈락자를 결정하도록 해서 감정적인 고뇌에 빠뜨리는 정기 투표 등 다양한 수단들이 활용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촘촘하게 연출한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가장 자연스럽다. 손을 많이 타야, 사람들이 어색해하지 않는다. 만반의 준비를 해도 일반인들이 첫날부터 적응하기란 쉽지 않다. 제작자는 시청자가 원하는 ‘리얼함’을 만들어 내기 위해 발 빠르게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야 한다. (p.74-75)
설치한 카메라가 많을수록 다양한 장면들을 확보할 수 있다. 장면이 다양할수록 편집은 한결 수월해진다. 이야기의 흐름과 방향을 어느 쪽으로 틀어 버려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찍는다. 출연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카메라에 담아내 자연스럽게 이어 붙여 편집의 ‘흔적’을 없앤다. 우리는 그 매끄러운 화면에 울고 웃는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발령받았던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도 매끄러운 이음매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수단들을 활용했다. 무차별적으로 늘어선 카메라 앞에서 사람들은 주춤한다. 하지만 화장실을 제외한 모든 공간에서 자신을 따라다니는 카메라에 하루면 익숙해진다. 무장 해제가 되면, 자연스러운 모습들이 하나둘 튀어나온다. 성격적 결함, 망설임, 실수 등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모든 것들이 카메라에 노출된다. 카메라는 말없이 그 장면을 담는다.
매일 밤 이어지는 인터뷰는 출연자들의 감정을 고조시킨다. 인터뷰는 일종의 훈육이다. 카메라 앞에서 질문과 대답을 반복하며 오늘 있었던 일들을 곱씹다 보면, 다른 참여자들의 존재가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오늘 예상외의 활약을 펼쳤다는 사실이 슬쩍 흘러 들어오면, 출연자의 근육 이곳저곳이 경직되기 시작한다. 내일도 이대로라면, 낙오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곳곳에 스민다. 낙오된다고 해서 그의 삶에 어떤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것임에도. (p.75-76)
‘보통’의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세계는 그리 넓지 않다. 자신들이 보고 싶어하는 세계가 얄팍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드는 불편한 프로그램들은 고전한다. 제작자는 뻔히 보이는 고생을 감수할 마음이 없다.
제작자라고 해서 ‘보통’의 사람과 별반 다를 게 있을까?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감수성과 비슷할수록(비슷하게 둔감할수록) 성공할 확률이 높다. 시청자의 욕망을 정확히 예측하고, 그 욕망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 거리낌이 거의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청자와 제작자가 서로 ‘리얼하다’고 합의하는 세계만이 반복적으로 재현되고 성공한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차용하는 “모사된 냉철함”은 종종 파국을 불러일으킨다. 시청자들은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현실을 구별하는 데 실패한다.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출연자들은 제한된 환경 안에서 캐릭터로서 존재하는데, 시청자들은 그 캐릭터를 실제 인물과 동일시한다. 리얼리티 프로그램 안에서 벌이는 출연자의 행동은 인신공격의 빌미가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제작진이 가장 바라던 바였고, 가장 피하고 싶었던 순간이다.
인간이 보여 줄 수 있는 적당히 추한 행위는 극적으로 과장된다. 실제 세상보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훨씬 역동적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순간처럼 무미건조하고, 느리게 시간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하여 누군가의 사소한 행위는 프로그램의 역동성을 위한 연료가 된다. 조롱하고, 비난하고, 훈계하기 위한 ‘행위’들은 끊임없이 일어나야 한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면접 단계에서 우대받는다.
제작자들은 카메라에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남기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그것만큼 끔찍한 일도 없다. 평생 카메라 앞에서 살기를 선택한 연예인들에게도 기록은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카메라가 꺼지면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동의’를 이유로 삶을 완전히 분해한다. 우리는 카메라 앞의 캐릭터로서의 출연자와, 보통의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서 출연자를 해체하는 방법을 아직 잘 모른다. 방법도 모른 채 우리는 매일 엮는다. 이 기묘한 자신감이 언제나 두려웠다.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이 있는 사람, 혹은 사랑할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박제해 둘 권한이, 우리에게 있는가? (p.78-80)
바깥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만, 안에서 보면 그 나름의 이유가 있는 관습들이 있다. 보도와 제작은 꽤 불투명한 영역이다. 이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과 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괴리감이 명확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관습이 모두 정당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관습의 부당함을 고민하려면, 왜 만들어지고 유지되는지 그 이유를 파고들어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이 다 뉴스가 되지는 않는다. 개가 사람을 무는 건 뉴스가 되지 않지만, 사람이 개를 무는 건 뉴스가 된다는 말도 있지 않나. 사건들 가운데 익숙하지 않은 것, 일상적이지 않은 것이 뉴스가 된다. “뉴스는 슬픔에 약간의 시의성이라도 보태져야 그 굼뜬 몸을 빠르게 움직인다.”
언론사는 도처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수집하기 위한 그물망을 설치한다. 그 그물코의 결절점이 ‘출입처’다. 무엇이 일상적이지 않은 사건인지, 그래서 뉴스 가치가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건 출입처와 그 주변으로 흩어져 사건을 수집하는 저널리스트들이다. 그들이 알아야 하고, 그들의 흥미를 끌어야 하고, 그들에게 익숙하지 않아야 한다.
출입처는 뉴스 가치가 있는 사건이 자주 일어나는 곳이라고 언론사가 판단한 장소다. 시청, 국회, 청와대, 국방부, 경찰청 등에 설치된 출입처에서 기자들이 수집한 사건들 중 일부가 뉴스가 된다. 임의적인 선택이 아니라, 명확한 가치 판단에 따라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출입처가 아닌 곳에서 벌어지는 사건들보다 이곳을 통한 뉴스가 더 많이 생산될 수밖에 없다. (p.87-88)
조직 안에서 보면 필요하고 당연한 논리와 절차들이, 조직 바깥에서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있다. 그래서 그 논리와 절차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조직은 ‘프로페셔널리즘’을 강조하게 된다. 이 절차와 논리가 조직의 전문성을 확보해 준다는 믿음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직 바깥에서 보는 사람들이 그 이데올로기에 꼭 감화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p.90)
‘출입처’가 기자와 기자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 그 이해가 완전히 갈라지는 지점이라면, PD에게는 그런 게 없을까? 아마 ‘인터뷰 자르기’가 그중 하나일 수도 있을 것이다. PD의 질문이 틀렸을 때 친절하게 정정해 줬다가, 그 뒤로 PD가 자꾸 자신의 말을 자르거나 특정 방향으로 대답을 유도한 적이 있다고 불쾌해하는 전문가가 많다. 방송에 인용할 만한 말을 하지 않았더니 다음부턴 연락이 오지 않는다며 허탈함을 토로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사안이 복잡하여 신중하게 말하겠다는 사람을 어떻게든 을러대어 단순한 이야기만 하도록 만드는 PD가 많다. 나 역시 종종 그런 인터뷰를 했다.
한편으로는 무례하고 자기중심적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시간 부족으로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방향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고, 방송은 나가야 한다. 아주 틀린 말이 아니라면 적당히 눈감고 대답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방송에 필요한 말을 잘 해 주는 사람들은 대접받는다. 학자의 자존심과 전문가의 고집을 칭송하는 한편, 그들의 목소리를 원하는 대로 재단하려는 고약한 습관은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반복된다.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슬롯머신을 돌린다. 인터뷰 내용 중 일부만이 선별되어 나간다는 사실은 서로가 안다. 강조하는 부분이 서로 다를 때 발언자는 자신의 발언에 대한 권한을 박탈당한다. 기자든 PD든 말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을이 되어 본 적이 드물다. 강력한 권한으로써 질문을 행사하는 덴 능숙하지만, 그 외엔 다 서툴다. 이것이 방송사 바깥의 사람들에게 ‘이해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납득시켜야 할까?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p.93-94)
한때는 골잡이들을 사랑했다. 승부를 결정짓는 한 방이 있는 사람들을 좋아했다. 골잡이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골잡이를 위해 공을 배급하고, 승리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공을 걷어내야 했다. 모두가 골을 넣겠다고 앞으로 나아가면 경기는 엉망진창이 된다.
방송은 축구와 닮았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마라도나, 크루이프 같은 선수라면 수많은 수비수들을 제치고 골을 기록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들도 누군가가 옆에서 마치 공을 받을 것처럼 뛰어 주었기에 조금 더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을 거다.
내게 공이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마치 정말로 공을 받을 것처럼 최선을 다해 수비수를 속이는 움직임을 더미 런 또는 디코이 런이라 부른다. 부지런히 공이 올 법한 곳으로 파고들면서, 수비수들이 따라 움직이도록 해 공간을 창출해 내는 선수들이 있어야 에이스도 그 파괴력을 배가시킬 수 있다. 골은 결국 마킹을 놓치는 순간에 만들어진다.
내가 공을 잡지 못했다고 해서, 움직임이 가치 없는 것도 아니다. 공간을 만들어 내기 위해 열심히 달렸다면, 우리 팀의 골잡이는 쉽게 찬스를 맞이할 수 있다. 오래 더미 런을 뛰어야 할 수도 있고, 영원히 더미 런을 뛰어야 할 수도 있다. 좌절의 시간이 길어질지도 모른다. 더 이상 내가 무언가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버텨야 할지도 모른다.
〈지단〉에서 지네딘 지단의 움직임 대부분은 공과 무관했다. 하이라이트로 편집했다면 대부분의 장면은 잘려 나갔을 것이다. 공을 잡지 않은 선수들의 움직임은 ‘공백’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단은 자신에게 온 단 한 번의 찬스를 잡아 호나우두에게 결정적인 패스를 한다. 그리고 다시 긴 시간 동안 공과 무관하게 필드 위를 뛰어다닌다. 영웅도, 모든 순간에 주인공인 것은 아니다. (p.105-106)
엄연히 존재하는 상처들을 억지로 잊으라는 자들이 있다. 그들에게 맞서 기억을 계속해서 상기시키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말하고 떠들고 다닐 자격에 대해 스스로 되물어야 한다. 나는 왜 고통을 공유하는가? 상처는 어떻게 되풀이되어야 하는가? 나는 어떤 권한으로 타인의 고통을 공유하는가?‘사건’의 기억을 나누어 갖는 것은 어떻게 하면 가능한가. ‘사건’의 기억을 타자와 나누어 갖기 위해 ‘사건’은 먼저 이야기되어야만 한다. 전달되어야만 한다. ‘사건’의 기억을 타자와 공유해야만 한다. 그러나 ‘사건’의 기억을 타자와 진정으로 나누어 갖는 형태로 ‘사건’의 기억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와 같은 서사는 과연 가능한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리얼리즘이 보여 주는 정교함의 문제인 것일까. 하지만 리얼하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수많은 물음이 생겨난다.
(p.116)
인간은 기억의 주체가 아니다. 기억은 인간의 의지와 다짐을 무시하고 불현듯 밀고 들어온다. 나 역시 잊고 싶은 기억들이 때때로 나를 완전히 짓눌러 버리는 경험을 할 때마다 매번 몸서리친다. 고통스러운 사건을 경험한 이들이 이를 공유하고 알리겠다고 다짐했더라도, 기억과의 전쟁에서 얻는 상처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기억을 ‘공유’하겠다고 나설 때 언론은 어디까지 책임을 지려 하는가?
기억을 공유한다는 것은 기억의 주기적인 침입을 영원히 반복하겠다는 의미다. 상처 위에 상처를 다시 내면, 흉터가 커지진 않아도 깊어진다. 끊임없이 자신의 살을 파먹는 시도를 하라고 카메라는 유혹한다. 여기 당신의 고통을 증언하시오, 그것이 대의와 공익을 위한 것이오. 나는 내 일이 종종 악마적이라고 느낀다. 나는 그 상처와 무관할 것이고, 영원히 정의로울 것이므로. (p.118)
고통의 서사를 공유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어쩌면 사건을 반복하여 곱씹으면서,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재확인하고 안도하려는 것은 아닌가. 우리에겐 평화가 허락된다는 믿음 아래에서, 타인의 고통을 기억한다는 정의로움을 광고하고 싶어서는 아닌가. 그래서 그들의 고통을 ‘리얼’하게 재현해 달라 요구하고, 눈물을 요구하고, 끔찍한 사건을 복기해 달라고 말하면서, 이를 즐기는 것은 아닌가.
이것이 영원히 나의 일이 아닐 것이므로, 그 끔찍한 폭력의 결과로부터 나는 자유로울 것이므로 더욱 잔인한 재현을 원하고, 그 재현 앞에 눈물을 흘리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분노를 표하고,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아닌가. 대속을 위해, 타인의 고통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p.119-120)
그의 진술 조서를 분석한 전문가들은 그의 자백에 묘한 지점이 있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사람의 진술은 때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범행의 핵심적 요소만큼은 일관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진술은 가장 중요한 부분이 매번 달라졌다. 예컨대 처음엔 C가 넘어져 기계에 머리가 부딪쳤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머리를 기계에 가져다 찧었다는 식이었다. 전문가는 기억을 혼동하기 어려운 중요한 행위에 대한 진술이 달라진다는 건, 허위 자백일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범행을 저지르는 순간에 대한 묘사, 시신을 유기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 등 가장 중요한 진술은 조사 단계에 따라 달라졌다. 왜 그랬을까. 그는 경찰의 설득에 말을 맞췄다고 했다. 범행의 증거가 모두 나왔으므로 자백해야 그나마 형량을 줄일 수 있다는 말을 견디기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고립된 상황에서 벗어나 법정에서 진실을 다투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불리한 결정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이 최선이라는 오판을 했다.
하지만 그의 자백으로 인해 그는 무죄를 입증하기 더욱 어려워졌다. 자백 그 자체가 하나의 증거로서, 다른 증거들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한번 자백이 만들어지면, 수사 과정에서 이 자백이 허위라는 사실이 밝혀질 가능성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고문을 당하지 않아도 허위 자백은 이루어질 수 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대학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인 리처드 A. 레오는 자백을 검사와 판사, 배심원이 보기에 그럴듯하고 설득력 있게 구체화한 이야기라고 본다. 자백을 받아 내는 과정에서 수사관은 물리적 수단 없이도 피의자를 심리적으로 압박해,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물을 받아 낼 수 있다. 고문이나 정신적 질환이 없다면 결백한 사람이 허위 자백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과 달리, 경찰들은 피의자를 고립시키고, 자신들의 말을 검증할 수단이 부재한 상황을 이용해 손쉽게 거짓 자백을 만들어 낼 수 있다. (p.170-171)
프로그램이 라오스 정부와 한국 건설사에 대한 비판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우리를 도와주던 한국인은 촬영 중간 갑자기 출장을 이유로 비엔티안으로 떠났다. 현지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잘못 엮였다간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상황이 이해는 되었지만 난감한 건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촬영해야 할 현장도 남아 있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은데, 우리는 라오스어를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상태였다. 국제 미아가 될지도 모른다며 고민하고 있을 때, 우리와 동행하던 현지 직원이 코디네이터 역할을 대신하겠다고 했다. 둘 다 어설픈 영어로 소통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게 어딘가.
한 줄기 빛이 비친 후엔 여지없이 어둠이었다. 취재는 좌절의 연속이었다. 댐으로 향하는 모든 길목은 군인들이 쳐 놓은 차단기로 막혀 있었다. 현지에 파견된 건설 관계자는 우리와 몇 번 만난 후엔 소리 없이 사라졌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라오스 기자는 자신들도 취재하기 어렵다며 내게 하소연했다. 그는 메콩강 개발 사업 이권에 정부 고위 인사들이 개입해 있기 때문에 이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가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실제로 라오스 정부의 공식 발표는 믿기 어려웠다. 우리가 만난 이재민들은 한 마을에서만 서른 명 넘는 사망자가 나왔다고 했지만, 공식 발표상 사망자는 스무 명 남짓이었다. 그 수치도 며칠간 줄었다 늘었다 고무줄처럼 변했다. 실종된 줄 알았다가 발견된 경우는 있겠지만,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닐 텐데도 말이다. (p.210-211)
방송사는 일이 곧 삶이 된 사람들을 위한 곳이었다. 일과 삶의 경계를 애써 나누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박했다. 몸이 회사와 떨어져 있어도 일을 고민하는 사람을 추켜세우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것이 이 조직을 앞으로 이끌어 온 힘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번번이 튕겨 나갔다. 일로부터 나를 구하려는 시도를 그만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젠가, 멈춰 설 줄 알았다.
멈춤의 순간은 갑작스럽게 왔다. 시사 프로그램에 배정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았던 때였다. 우울증이 엄습했다.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얻는 스트레스가 컸고, 체력이 바닥을 쳤다. 부조리의 일부가 되지 않으려다가 세상을 떠난 친구들이 늘었다. 일하며 만났던 사람들의 부고가 쌓였다. 마음을 추스르는 방법을 알려 주는 사람은 없었다.
매일 어떤 것도 집어넣지 않고, 그저 꺼내 쓰고 있다는 생각에 자괴감에 휩싸였다. 이러다 더 꺼낼 게 없으면 어쩌지? 알퐁스 도데의 단편 소설 「황금 뇌를 가진 사나이」의 주인공은 황금으로 변한 두뇌를 아낌없이 쓴다. 처음엔 아껴서 쓰려고 했지만, 결국 머릿속이 텅 빈 채로 죽는다. 그의 마지막을 묘사하는 문장들을 떠올렸다. 피투성이가 된 손톱 끝에 금 부스러기가 끼어 있는 모습. 소설이 무엇을 의도했든 나는 다른 의미로 섬뜩해졌다. 지금 내가 쥐어짜 낸 이 문장이 마지막 금 부스러기 같은 거면 어쩌지? 습관처럼 읽던 책이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펑펑 울었다. (p.218-219)
그래도 이곳에서 일하기로 결심했던 건, 여기 오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불평등에 분노하고, 기후 위기를 걱정하고,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고민하고, 차별을 끝내려고 시도하고, 노동의 가치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어디에나 하나쯤은 있었다. 수많은 책들로 그득한 서점의 한 구석에나 몰려 있을 법한 책들이 서가를 가득 메운 공간에 발을 디뎠을 때, 안도감을 느끼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의 표정이 좋았고, 그들이 이곳을 부유할 때 도움을 주는 일이 좋았다. 세상으로부터 밀려난 사람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주는 공간을 지켜 낼 수 있어서 좋았다. (여전히 진절머리가 났지만.)
시간이 나면, 작은 책방에 놓인 책들을 하나씩 꺼내어 읽었다. 그리고 어디에 어떤 책들이 있는지 그 위치를 외웠다. 가끔씩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부유하도록 내버려 두다가, 필요한 책들이 있다면 넌지시 건네줄 수 있도록. 멸종된 줄 알았던 당신과 같은 종족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줄 수 있도록. 책방이 보존하는 건, 책뿐만 아니라 우리와 같은 존재들임을. 아주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우울함을 조금 덜어낼 수 있었다. (p.223-224)
어린 시절 좋아했던 교양 프로그램들은 내가 몰랐던 세계가 여기 있다는 사실들을 알려 줬다. 그 프로그램들이 아니었다면 영영 몰랐을 세계들을. 쓰레기가 된 옷들이 어디로 흘러가 쌓여 있는지, 버스를 타지 못하는 장애인들이 어떻게 자신의 집에 고립되는지, 얼마나 많은 빙산이 녹아내리고 숲이 불타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 조건에 신음하는지. 편안한 소파 앞에 앉아 바라보는 세상은 얼마나 좁은지 알려 주는 이야기들이 좋았다. 그래서 이 일이 좋았다.
하지만 정작 일하면서는 이 장르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음을 느꼈다. 우리는 다소간 모호했다. 세상에 대한 해상도를 높이고, 세상을 달리 보이도록 하는 게 교양의 자리라는 생각이 나만의 착각이었던 건 아닌가 싶을 때가 늘었다. 이 자리를 지켜 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밀도 낮은 정보들을 생산하는 데 몰두하는 모습에 혼란스러웠다.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이유로, 계속 ‘당의정’을 입히는 데에만 집중하는 태도들이 어색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프로그램들이, 왜 ‘교양’이어야 하는지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우리 스스로 존재의 이유를 포기하면, 누가 이 조직에서 만든 프로그램을 필요로 할까? 우리가 만드는 것이 세상에 꼭 필요하다고 고집부리는 대신, 세상이 원하는 대로 너무 빠르게 적응해 버린 게 오히려 독이 되는 건 아닐까? 어떤 사람들은 ‘교양’ 대신 ‘제작’으로 부르자고 했다.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름이 바뀌고 나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p.227-228)
편성표는 생각보다 다양한 규제들 사이에 놓여 있었다. 밖에서 보면 왜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던 프로그램들도, 저마다 존재의 이유가 있었다. 전파는 국민의 것이고, 전파를 빌려 쓰는 방송사는 주기적으로 면허의 적합성을 증명해야 했다. 어린이 프로그램의 비율, 국내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의 비율, 외주 제작 프로그램의 비율 등 세세한 부분들까지 수치가 명확하게 정해져 있었다.
방송의 다양성을 확보하고 수용자의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해 일정하게 ‘이윤’을 포기하고 공익에 복무하라는 게 규제의 취지지만, 변해 버린 환경에 걸맞지 않은 규제들이 많았다. 가령 교양과 오락의 경계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오락’ 비율을 규제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또한 보통의 사람들에게 TV나 OTT나 그저 하나의 영상 플랫폼이 된 지 오래인데, 정작 규제는 TV 편성에만 적용되는 경우도 많았다.
오래된 프로그램들이 살아남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가령 재미가 없더라도 그만한 비용으로 다양한 편성 비율을 맞춰 주는 프로그램이 없었다. 협찬을 끌어와 수지에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들도 함부로 빼거나 줄일 수 없었다. 뉴스가 줄면 수어 방송 비율이 줄어 문제가 될 때도 있었다. 빼면 안 되는 프로그램들이 편성표의 ‘내력벽’처럼 존재했다. 막상 그 프로그램들을 제외하고 나면, 편성 부서의 재량이라는 게 그리 많지도 않았다. (p.241-242)
댓글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