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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종언(終焉)? / 장경섭 / 집문당

 

 그런데 사회재생산 위기에 대한 한국의 지배적 문제의식은 산업·복지·재정적 차원의 문제 예방·대처라는 도구(주의)적 성격이 극명하다. 이는 정부 차원의 정책적 불가피성이 있지만, 그동안의 사회재생산에 대한 도구적 접근 자체가 오늘날 사회재생산 위기의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접근에서는 개인, 가족, 사회공동체 차원의 사회재생산 과정 자체가 인간의 행복과 공동체의 안녕을 구성하는 본원적 가치를 갖는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쉬우며, 특히 개발(지상)주의적 국정의 효과성이 급속히 축소된 오늘날 시민들의 사회재생산 동기와 노력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매우 어렵다.
 한국의 압축적 경제·사회 발전 과정에서 사회재생산에 대한 도구적 접근의 최대 모순은 사회재생산의 필수 자원 자체를 생산과정에 집중 전용하는 행태가 국가, 기업, 지역사회, 가족, 개인에 이르기까지 보편화되었다는 것이다. 심각한 수면부족과 건강훼손이 불가피한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과 학습시간, 주거시설·생활환경·생태공간에 대한 무차별적 개발·투기 행위, 산업현장과 사회기반시설의 위험 수용·방치적 운용, “복지지체국” 오명을 초래한 국가 재원의 경제활동 일변도 투입, 자녀 교육·사업을 위한 노후 생활자금의 소진 등 보편화된 현실은 세계가 괄목하는 한국의 경제발전이 상당 부분 사회재생산의 다면적 희생·왜곡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왔음을 뜻한다. (서문)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심각한 곤궁 속에서 한국인들의 강력한 가족(주의)적 연대는 도덕주의적 자살과 가족 살해의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추세는 의심할 바 없이 한국인들이 역사를 넘어 지탱해 온 헌신적 가족 부양과 지원의 규범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다양한 사회보장적 수요와 요구를 사적 가족의무로만 규정하는 데 혈안이 되어 온 국가의 ‘가족자유주의’(familial liberalism) 정책 노선을 또 다른 결정적 원인으로 보아야 한다. 줄기차게 경제개발에 집착해 온 개발주의적 집권정부들은 사회정책(social policy)을, 나아가 아예 사회권(social citizenship)을 가족성원들 사이의 상호 보호와 지원의 사적 의무로 재설정하기 위해 노력해왔다(Chang, 2012a). 심지어 국가가 공공연하게 나서 시민들의 가족 보호와 부양에 관한 이른바 “전통”적 의무를 게을리하지 않도록 독려하는 정치적 캠페인을 상당 기간 벌였다(Chang, 1997). 시민들은 사회복지에 관해 국가가 문화적으로 설정한 보수주의에 대해 뚜렷한 저항을 하지 않았는데, 이 점은 최근 극단적 빈궁에 대해 많은 한국인들이 도덕주의적 자살과 가족 살해로 대응한 데서 역설적으로 확인된다. (p.4-5)

 

 교육, 주거, 부양, 고용, 금융 등의 실현에 있어 국가-시장-개인 사이의 제도적 삼각관계가 갖는 기본적 중요성은 서구의 대다수 자유주의 및 사회민주주의 체제들이 공유한다.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체제의 핵심적 차이는 시장과 국가의 상대적 중요성에 있으며, 서구 민주주의 산업사회들은 이념·정치적 지형과 현실적 정책 노선상의 빈번한 내부 대립과 변화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제도적 중심성은 결코 근본적으로 타협된 적이 없다. 사회민주주의는 개인중심적 자유주의의 보완과 수정이지 대체가 아니다(Beck and Beck-Gernsheim, 2002). 서구 산업사회들에서 개인은 시장경제의 자유 주체로서나 복지국가의 사회·정치적 주권주체로서나 근대적 정치체제 및 사회질서의 가장 본원적인 존재 단위이다. 그리고 서구의 후기근대적 자본주의는 이러한 개인중심성을 더욱 강화해 왔다. 그러나 이는 서구 바깥에서는 그다지 보편적으로 관찰되는 체제적 혹은 문화적 현상이 아니다. 앞서 지적한 한국의 부양·보호, 교육, 주택, 금융, 고용, 심지어 생산·경영 활동에 걸친 가족의 제도적 중심성은 한국 사회가 개인자유주의(individual liberalism), 즉 개인중심적 자유주의라기보다는 가족자유주의(familial liberalism), 즉 가족중심적 자유주의에 기초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p.7)

 

 가족자유주의는 이처럼 포괄적이고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어떤 지속적인 문화전통이나 명시적이고 체계적인 이념에 의해 지탱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가족자유주의는 대체로 상황적으로 발생하거나 유도되어 왔다. 즉, 식민지배, 전쟁, 대중갈취적 독재 등 사회·정치적 파국, 동아시아 등지에서 공격적으로 실행된 자본(기업) 편중적 경제개발 전략, 최근 한국과 미국이 경험한 것과 같은 중대한 국가적 경제·금융 위기, 러시아 및 동유럽에서와 같은 총체적 경제·사회 체계 교란 등의 (만성적인!) 비상상황에서 일반 시민들의 절박한 생존노력, 나아가 치열한 성공전략으로서 전방위적인 가족 중심적 삶이 보편화되고 국가나 주류 정치·경제 세력은 이를 전제로 한 위기관리 및 자본축적에 나서는 가운데 가족자유주의가 일종의 ‘실행적 체제원리’(practical systemic principle)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상상황들이 시민 대중의 물질적 및 사회적 삶을 보호하기 위한 공적 규칙과 자원의 소실, 파괴, 부재, 차별을 야기함으로써, 일반 시민들은 목전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가족적 관계와 자원에 매달리는 것이며, 나아가 이러한 개별 행태를 전제로 한 사회질서와 정책체계가 뒤따르는 것이다. 효과적으로 구축된 시장경제나 사회적 책임성에 기초한 국가가 아직 (재)확립되지 못한 상황에서 시장경제적 주체로서 혹은 정치적 시민으로서의 개인의 지위는 극히 불완전하고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p.9-10)

 

 개발자유주의의 이러한 내용 모두 사회재생산 체계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치지만, 사회재생산 관련 속성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점들이 관찰된다(장경섭, 2011a): (1) 경제성장을 단기간에 극대화시키기 위해 국가와 민간 자원의 생산체제에의 투입을 최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제반 사회재생산재(social reproduction goods)의 생산적 ‘전용’을 유도·조장한다. 이는 물적 자원뿐 아니라 생활시간 등을 포함한 인간생활의 전반적 구성요소들을 포괄한다. (2) 농업(농촌), 노동집약적 제조업 부문의 침체 등과 관련하여 드러났듯이, 개발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부문들은 사회재생산 필요성의 인지 자체를 거부하고 특정 산업의 생산(성장) 극대화에 모든 공적·사적 자원의 투입을 유도한다(Chang, 2019). (3) 사회재생산의 책임과 비용을 최대한 노동자 자신 혹은 가족에게 전가하며, 대신 필요에 따라 (공적 수당이 아닌) 금융적 지원을 한다(Chang, 2016a). (4) 주택, 의료, 교육 부문 등에서 드러나듯이 ‘사회재생산재’(social reproduction goods)의 실질적 시장상품화를 방조하거나 용인한다(Chang, 2012a; Kim 2008). (5) 교육부문 등에서 드러나듯이 사회재생산의 내용이 경제개발 전략에 부합되도록 인위적으로 유도하거나 조작한다(Chang, 2012a). 이러한 세부 특징들을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개발자유주의는 생산-재생산 관계에 있어 생산 극대화를 위한 재생산의 종속, 희생, 왜곡, 변형을 구조화시켜 왔다고 볼 수 있다.
 개발자유주의 국가의 사회재생산에 대한 이러한 소극적 혹은 보수적 대처는 시민들의 일상생활과 가족관계에 심각한 경제·사회적 부담을 안길 수밖에 없으며, 적어도 잠재적으로 정치적 불안요인이 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가족들 사이의 사회·경제적 자원의 격차가 사회재생산 실현의 격차로 나타날 수밖에 없고 궁극적으로 사회·경제적 경쟁에서의 불평등성이 증폭되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가족자유주의자로서의 대다수 한국인은 급속한 경제성장에 수반된 전반적 소득 향상에 힘입어 각자의 가족 책임으로서의 사회재생산에 충실했으며, 나아가 국가의 개발(자유)주의에 저항하기보다는 스스로의 가족관계와 가정생활을 개발주의적으로 영위함으로써 보수적 정치경제 질서에 나름의 방식으로 능동적(?) 대처를 해 왔다. 가족자유주의 시민들이 개발자유주의 국가에 의한 경제 생산-사회재생산 관계의 불균형과 왜곡을 오히려 확대재생산시키는 역할을 해 온 것이다. (p.14-16)

 

 가족관계의 유효한 범위, 강도, 기간을 실용적으로 재조정하려는 한국인의 광범위하고 급진적인 노력에서 비롯된 인구붕괴 조짐은 일반 시민이 국가, 사회, 자본주의 경제와 공유하는 가족자유주의의 고질성을 역설적으로 반영한다. 이는 가족자유주의적 개인과 가족들의 사회재생산에 관한 일종의 자기부과적인 구조조정의 결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광범위한 결혼 연기나 기피, 만연한 이혼과 별거, 심지어 역병처럼 번지는 자살은 모두 초저출산과 같은 뿌리의 근본 원인을 갖고 있다. 국가와 사회가 절박하게 바라는 인구 회복은 가족자유주의 정치경제와 사회정책 체계의 총체적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관련하여, 상당한 출산율 회복에 성공해 한국의 정책관료 및 전문가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프랑스, 스웨덴 등의 상황은 한국의 구체적 현실과 매우 체계적으로 비교되어야만 유의미한 참고가 될 수 있다. 그동안 이러한 사회들의 상당한 “혼외출산율”(extra-marital fertility)에 대한 국내 전문가들의 꾸준한 관심이 있었지만, “혼외”의 현실적 의미가 복지국가(welfare state)라는 점이 간과됐다. 이 사회들에서는, 출산, 육아, 교육에 대한 복지국가의 종합적·보편적 책임성이 전제됐기에 형식적 혼인을 통한 배우자의 법적 부양 책임을 전제로 한 자녀 출산을 고집해야 할 이유가 근본적으로 사라진 것이다. 요컨대, 사회재생산 체계로서의 가족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사이의 거리 및 차이에 대한 본격적 분석이 절실하다. (아울러 정치경제적 차원에서 한국의 개발자유주의와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를 체계적으로 비교 분석·평가할 필요가 있다.) (p.20-21)

 

개발자유주의(developmental liberalism)의 주요 내용
[1] 사회정책의 탈정치화, 기술관료화, 개발주의적 착종: 사회정책 사안들을 정치적 지배나 경쟁에 있어 중심적 혹은 독립적 안건으로서 내세우지 않고 대신 관련 행정조직을 통해 선진국들의 제도와 경험을 참고하여 경제개발에 부담을 주지 않거나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처리하고 나아가 (교육, 노동 정책 등에서 드러나듯이) 사회정책의 인식과 설정 자체를 개발주의적 혹은 준경제정책적으로 한다.
[2] 사회정책 대상 주체들의 개발주의적 포섭: 성인 노동연령 인구뿐 아니라 가능한 모든 사회집단을 국가에 의한 사회보장적 보호 대상으로서 인정하는 걸 거부하고, 대신 경제개발 과정에 다양한 형태로 참여시켜 일종의 ‘개발시민’(developmental citizen)으로서 경제적 보상이나 혜택을 추구하도록 유도해 왔다. 이는 각종 선거 과정에서 (부동산 개발이익을 포함한) 경제개발 의제의 압도적 비중으로 이어졌다.
[3] 국가-자본의 기업(가)적 결합과 국가의 노자관계에 대한 직접적 개입: 자본주의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압축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해 국가는 필요에 따라 직접 생산기업을 설립·운영하기도 했지만 주로 기존 기업가들을 동원·지원하여 시기별로 특정 산업들을 전략적으로 육성했으며, 이 과정에서 사기업들을 국가의 핵심적 ‘개발도구’(developmental instrument)로서 인식하여 이들의 노자관계에 직접적으로 (반노동적인) 개입을 해 왔으며 명시적 노동 정책도 국가의 이러한 계급(자본)적 입장에 종속되어 왔다.
[4] 사회적 시민권의 가족주의적 재설정: 헌법적으로도 선언되어 있는 사회적 시민권이 실제 보편주의적 사회보장 원칙에 의해 구체화되지 못했으며, 특히 안정적 고용을 통한 소득확보와 사회보장이 불가능하거나 실패한 집단들(예컨대, 노인, 아동, 청소년, 미혼모, 장애인 등)에게 핵가족을 넘어 확대(직계)가족적 부양·보호의무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강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가의 정치적 책임과 재정적 부담을 면하는 전략이 지속되어 왔다. 이 과정에서 특히 서민 가정 중년 여성들이 임노동, 돌봄노동, 일상가사의 중첩적 수행으로 극한적 생활경험을 해 왔다(장혜경 외, 2006).
[5] 복지다원주의와 시민권 부정: 가족적 자기 부양·보호를 통해 관리할 수 없는 사회집단들에 관련된 보호(수용)제도나 사회서비스 공급을 위해서도 국가는 공공 책임의 최소화 원칙을 견지하고 가능한 모든 민간 행위자를 동원하려고 노력했으며, 이 과정에서 여러 민간 행위자의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영리적 동기나 행위를 공공연히 용인하거나 비호하는 일이 잦았다. 심지어 피수용자들의 노동착취, 인격·신체적 학대, 종교자유 침해 등도 인권이나 시민권 훼손 차원에서 대처하기보다는 사적 시혜관계의 일상적 부작용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가는 일이 잦았다. 특히 의료, 교육 등에 대해서는 준경제정책적 관리가 이루어져 왔으며, 이른바 “병원재벌”, “사학재벌”들이 탄생하기도 했다. (p.23-25)

 

 한국인들의 (나아가 한국 사회와 국가의) 가족주의는 이처럼 이념적, 제도적, 상황적으로 구성된 매우 복잡한 가치와 태도이기 때문에 그 근본적 변화는 결코 간단히 이루어질 수가 없다. 문제는 가족주의가 쉽게 해소·포기되지 않지만 막상 가족적 가치와 책임이 현실적으로 실천되기 어려울 때 나타나는 딜레마를 작금의 한국인들이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가족관계는 한국인들의 행복 실현을 위한 상호 자원 전달의 통로가 아니라 갖가지 사회·경제적 위험(risk)이 매개되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특별히 심각한 사회문제로서 한국인들의 가계부채 폭증은 그 발생 원인에서부터 변제·추심 과정의 고통에 이르기까지 전형적인 가족문제이며, 탈개발시대에 중첩된 경제·사회적 위기요인들이 가족관계를 통해 매개되어 한국인들의 고통을 증폭시키고 있다(Chang, 2016a). (p.32)

 

 한국적 개발자본주의 체제에서 여성에게 요구된 핵심적 역할이 국가에 의해 상징적으로 고양됐던 사례로서, 5월 가정의 달에 (대다수가 여성이었던) 모범 “효행자”, “장한 어머니” 등에 대한 복지 주무부처 장관의 표창과 심지어 국가훈장 수여가 주기적으로 시행됐던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봉건 조선시대에 충·효·열의 모범적 실천을 장려했던 정표 제도와 궤를 같이 했다.) 가족보호를 위한 인고의 세월을 국가가 표창과 서훈으로써 칭찬한 (대다수가 여성인) 도덕적 모범시민들은 사실 개발자유주의 체제의 사회적 모순을 일생을 통해 감내해야 했던 정치적 희생자들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일상적 살림살이 외에 배우자의 저소득을 보충하는 경제활동을 병행했음을 감안할 때, 표창받은 장기간의 특별한 가족보호 행위는 호크쉴드(Arlie Hochschild)의 비유를 확장해 ‘삼차근무’(the third shift)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민주주의가 정치제도적 차원을 넘어 국가정책과 사회질서 차원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이러한 국가행위가 사라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p.55-56)

 

 그런데 이러한 이차근대적 혹은 신자유주의적 위험사회화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벡이 전망한 것처럼 개인(주의)화의 길을 걷기보다는 오히려 가족중심주의적 대응을 강화해 왔다. 기업, 정부, 정당, 노동조합, 학교, 복지제도가 미증유의 경제·사회적 위기 상황에서 별다른 구조적 기능을 하지 못할 때, 한국인들은 주로 가족관계를 통해 급한 불을 끄고 나아가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해 왔다. “IMF 경제위기” 와중에 수많은 부인들이 실직가장을 대신해 가족 생계비와 자녀 (사)교육비 마련을 위해 (노래방 도우미 부업과 같은) 비상 취업전선에 나섰다. 나아가 사회 전반에 걸친 만성적 고용불안과 서민경제 위축은 결국 극심한 소득 양극화를 초래했지만 국가를 통한 재분배적 “사회임금”(social wage)은 거의 무의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많은 가족들은 은행, 신용카드 심지어 대부업체에까지 의존하며 당장의 생계비는 물론 주식, 부동산을 통한 대체소득 확보를 위한 투자자금 마련에 나섬으로써 환란 이후 가계부채가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폭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고학력화, 세계화, 고용위축에 따른 교육경쟁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수많은 가족들이 “기러기” 아빠와 유학 자녀 및 ‘보살피미’ 엄마 사이의 이산 상태에 있다. 수많은 노부모들은 대기업 위주의 양극화된 경제질서하에서 구조적인 경영 위기를 겪게 된 중소사업가 혹은 자영업자 자녀를 위해 농지, 주택, 저축, 연금을 포기해야 했다. 취업에 실패하거나 막연히 교육기간만 늘려가고 있는 수많은 (미혼·비혼) 성인자녀들을 지원하기 위해 중노년 부모들이 조부모 노릇 대신 부모 노릇을 연장하고 있다. 세계 최고 속도의 인구 고령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노인인구의 절대다수가 빈곤층에 속하고 “유병장수”가 보편화되는 현실에서 수많은 자녀와 그 배우자가 여전히 효의 주체로서 최후의 사회보장 제도로 기능한다. 최소한의 신체·환경적 안전도 보장해 주지 못하며 경제자유화에 돌격적으로 치닫는 위정자들에 대항하기 위해 유모차를 앞세운 젊은 엄마들이 “촛불시위”의 선봉에 서기도 했고 사법수사와 보안사찰의 대상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일련의 예들이 공통적으로 시사하는 바는 벡의 이차근대적 혹은 위험사회적 상황에서 한국인들은 개인주의화되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강력한 가족주의자로 거듭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족주의적 대응은 이미 가족의존적 개발체제하에서 누적된 가족의 기능적 과부하 및 이에 수반된 가족피로 문제를 더욱 극단화시켜 종국적으로 (탈가족주의화가 아닌) 탈가족화와 (개인주의화가 아닌) 개인화 현상을 사회 전반에 확산시키게 됐다. (p.81-82)

 

 21세기 한국에서 농촌과 도시를 막론하고, 후기자본주의적 위험시대의 사회재생산 위기는 국방과 마찬가지로 국가적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마련된 정책과 자원을 통해서만이 점진적이나마 대처할 수 있다. 전쟁의 위험에 국가적으로 대비하기 위해 의무징집된 병사에게 총, 군화, 모포 등을 각자 준비해 오라고 할 수 없듯이, 국가의 경제·사회적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한 사회재생산을 거의 국민적 의무처럼 재촉받는 생활인들에게 사회재생산의 기초적 자원과 수단들을 각자 알아서 마련하라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21세기 한국에서의 사회재생산은 터너 교수(Bryan S. Turner)가 지적한 “공헌적 권리”(contributory right)로서의 시민권(citizenship right)임이 어느 때보다도 확연하며, 이는 좌·우의 이념·정책적 차이를 넘어서는 것이다. 특히 사회재생산과 관련된 가족위기가 개발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중첩적 작용에 의해 그 어느 사회에서보다 심각하다는 현실을 직시하면, 종합적 사회서비스와 사회보장을 통해 사회재생산을 ‘사회화’(socialization)시키는 국가적 노력을 당장 ‘급진적’으로 전개해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파업 중인 사회재생산 주체로서의 한국인들에게 (개발권위주의 체제하에서 파업 중이었던 산업노동자들과는 달리) 국가가 어떠한 강제력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에, 웬만큼 급진적이지 않은 사회정책으로는 어떠한 정책목표도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다. (p.93-94)

 

 최근의 국가적 저출산 대책은 기본적으로 핵가족출산 규범을 보강하기 위한 재정적·사회제도적 지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국가가 모든 신혼 가정에 (경제위기 이후 급격히 붕괴되어 온) 정규직 남성가장의 “가족임금”(family wage) 혹은 “가족생계임금”(family subsistence wage)을 대체할 수 있는 수준의 파격적이고 장기적인 재정 지원을 할 수도 없으며 가정 내로 침투해 (극도로 저조한 남성의 육아·가사 참여로 드러나는) 부부관계의 가부장성을 근본적으로 혁파할 수도 없기 때문에, 이러한 대책이 뚜렷한 효과를 거둘 수 없는 형편이다. 이러한 정책적 한계로 결국 여성의 “일·가족 양립”에 대한 지원이 강조되어 왔는데, 이는 결국 생산·재생산 노동력으로서의 여성 동원의 극대화를 통해 경제체제와 가족 문화의 모순을 보완하려는 미봉책인 것이다. (p.97)

 

 전 세계에 걸친 급속하고 보편적인 인구 고령화로 인해 집단적으로 등장하는 고연령층 노인들은 사실 이전 역사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일종의 ‘신세대’(new generation)이며, 이는 인구 고령화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한국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이들 ‘신세대 노인’의 삶은 전통 사회·문화적 환경에서처럼 가족을 중심으로 영위되기 어렵고, 국가 및 경제체제 차원에서도 근본적이고 새로운 통합·활용·지원 대책이 필요하다. 결국 이들 신세대 고령자들은 기본적으로 개인적 혹은 개인화된 주체로서 역사와 사회에 등장하는 것이며, 기존의 사회규범, 국가정책 등의 (부주의한) 연장으로서 인위적으로 설정되는 가족 중심적 노년기는 현실적으로 근본적인 모순이나 혼란들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특히 국가의 사회·경제적 정책체계가 노년기의 인위적 가족 중심성을 전제로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고령화 시대에 요구되는 국가정책 혁신과 사회질서 재창출이 막연히 미뤄진 경우 이러한 모순과 혼란들이 극심해진다. 이러한 사회적 위험에 있어 한국이 바로 대표 사례라는 것은 노인의 빈곤율과 자살률이 단연 세계 최고 수준이며, 그 통계치의 이면에서 대다수 노인과 가족이 엄청난 물질·심리적 고통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p.121-122)

 

 이처럼 농가 아동에 대한 생활태도 및 학습 지도와 일상적 보살핌이 가족 내에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은 (학습 지도의 경우처럼) 가족들의 기능과 여유가 따르지 못했던 측면도 있겠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아동 사회화의 문화적 환경에 대해 가족들이 아무런 통제력을 행사할 수 없는 현실이 깔려 있었다(김흥주, 1992:122-124). 아동들이 학교에서 습득하거나 텔레비전과 같은 대중매체를 통해 주입받는 사회적 가치들은 철저하게 도시 지향적 혹은 도시 미화적이고 기존 농촌의 가족이나 지역공동체의 중요성을 암묵적으로 경시하는 성격이 강하다. 직업활동에 관한 것이든 여가에 관한 것이든 농가의 어른들은 아동들이 어떠한 기능과 가치관을 습득하고 있는지 또 습득해야 하는지 문외한이며 방관자로서 남아야 하는 딜레마가 있었다. 전통적 가족농의 지휘자로서 농가 부모의 권위가 유지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동이 농가 계승을 위한 가치와 기능을 습득하기를 기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조옥라, 1990:292). (p.141-142)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외국계 신부들을 “다문화신부”라고 부르고 국제결혼 가족을 “다문화가족”(이하 인용부호 생략)이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농촌 지역의 가족재생산 주기는 농가가 한편으로 전통적 가족단위 생산조직체로서 다른 한편으로 해방 후 (더이상 신분이나 계급 구별 없이) 보편화된 유교적 친족조직으로서의 성격에 결부된 것이기 때문에, 이의 복원을 위해 동원된 외국인 신부들은 사실상 어떤 한국 여성들보다 더 토착전통성이 강한 한국적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반면 젊은 한국 농촌 여성 대다수는 그러한 삶을 거부하고 각급 도시지역으로 떠나왔으며, 도시 여성들의 귀농·귀촌 혼인은 희소하다. 외국계 신부는 출신지의 사회·문화적 다양성과 상관없이 결혼한 한국 농가의 가족재생산 주기상의 필요를 한국적 방식으로 충족시키는 데 동원되는 존재이며, 이러한 현실에서 언어소통의 어려움이 가족관계의 일방성을 강화시키는 작용을 하기도 한다(Kim, 2011). (p.157)

 

 개략적으로 보아, 20세기 서구 자본주의에서는 ‘고용 준비기―중단 없는 고용기―최종적 은퇴기’로 이루어진 단선적 노동생애가 형성됐으며, 교육제도, 고용제도, 연금제도 등 주요 사회제도는 이러한 전형적 노동생애를 바탕으로 제도화됐다(Kohli, 1986). 한국 사회 역시 1960년대 중반 이후 비약적인 산업화와 사회제도적 근대화를 경험함에 따라, 그러한 ‘표준적 노동생애’의 확립과 확대를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서 간주하게 됐다. 그러나 그것은 명시적인 제도적 기초와 실증적 검토에 기초해 나온 주장이 아니라, 1997년 “IMF 경제위기” 이후 심화되고 있는 고용불안 경향과 대조를 이루는 “좋았던 과거”의 대중적 표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해고, 조기퇴직, 비정규직의 확대 경향을 “평생직장의 붕괴”로 표상하는 것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기를 장기적 고용에 기초한 ‘표준적 노동생애’의 확립과정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즉 한국 남성노동자들의 노동생애는 한편으로 가계의 생계부양자라는 규범적 가정과 다른 한편으로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기를 “평생직장 시대”로 이상화하는 담론을 통해 전형화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이러한 남성노동자들의 노동생애가 점차 ‘표준적 노동생애’로부터 이탈하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서구에서는 직업유동화와 그에 따른 고용불안의 심화에 따라, 과거의 전제를 상대화하고 현실의 남성 노동생애를 실증적으로 규명해야 할 필요성이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하나의 생애와 하나의 직장·직업·경력 사이의 일대일 대응은 더 이상 노동생애의 일반적 양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의 유동화 경향과 이에 따른 생계부양 역량의 침식은 20세기의 “가족임금체제”(family wage system)가 해체되는 경향으로서, 나아가 사회관계 전반의 불안정화, 개별화, 유동화 경향을 나타내는 지표로서 주목되고 있다. 한국 사회 역시 1997년 경제위기 이후 고용의 불안정성 심화에 관한 사회적 관심이 확대됐고 이러한 고용체제상의 변동을 다각도로 분석한 연구성과도 빠르게 축적되고 있다. 그러나 노동생애 연구가 전반적으로 미진했기 때문에, 심화되고 있는 고용의 불안정화 경향이 개인의 노동생애와 여타 사회관계에 어떤 영향을 초래하는지에 관한 연구는 쉽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p.172-173)

 

 한국의 개발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여성의 삶을 규정해 온 삼중적 가부장체계는 (1) 각 가정 내에서 상용고용된 남성가장과 전업주부인 혹은 불완전고용된 부인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의 정치경제적 및 문화적 위계성, (2) 고용된 남성노동자의 전인적이며 총체적인 노동 제공과 이에 따른 일상 가사 및 가족 보호·지원 활동의 전면적 포기, 그리고 이에 대처하기 위한 부인의 사회재생산 노동 전담을 당연시하는 공사의 고용조직들과 이 조직들의 며느리나 다름없는 처지의 여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의 구조적 속박성, (3) 개발자유주의하에서 한편으로 기업의 반노동·반가족(반여성)적 고용관행을 용인·조장하고 다른 한편으로 안정적 사회재생산을 위한 자체적 지원·관리 책무를 최소화하기 위해 여성들의 헌신을 기대·요구해 온 국가와 결과적으로 자신의 사회적 시민권(social citizenship) 포기는 물론, 배우자와 자녀, 노부모의 사회보장권 결여를 보충하기 위한 가족적 헌신을 받아들여 온 시민(혹은 국가 며느리?)으로서의 여성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의 정치(정책)적 억압성으로 요약된다. 한국 여성에게 혼인과 출산이란 이러한 다중적 개발가부장체계에 정치경제적으로 편입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심지어 혼인하지 않아도 혹은 혼인하기 이전에도 친부모나 형제자매와의 관계에서 비슷한 문제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러한 질서의 가부장성은 가족, 기업, 행정·정치에 만연한 그 문화적 표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계승된 문화적 전통이 아니라, 개발자본주의 체제가 여성의 노력과 희생을 억압적 방식으로 최대한 동원하려는 가운데 배태된 사회·정치적 구성물로서 남녀(부부), 기업―노동자, 국가―시민 사이 관계의 구조화된 권위주의를 반영한다. 개발가부장제에 배태된 이러한 다면·다층적 권위주의는 굳이 출산율 회복을 위한 정책적 필요성 때문이 아니더라도, 사회·정치적 민주화의 차원에서도 시급히 타파되어야 할 문제이다. (p.205-206)

 

 한국은 초기 산업화 조건으로서 자본, 기술, 부존자원의 부족을 풍부한 (“유휴”) 노동력으로 메우는 ‘노동집약적 산업화’에 착수하고 나아가 이를 수출주도형 경제로 견인하기 위해, 이른바 “개발국가”(developmental state)는 노동인구의 관리와 통제를 핵심적 국정과제로 삼았다. 생산노동의 현실적 실행과 관리가 기업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수출 증대 등 국가적 경제실적이 개별 기업들의 국제적 가격경쟁력 및 생산능력 증가에 의해 집합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국가의 노동정책은 기업의 노무관리 및 노사관계에 직접적으로 반영됐다. 이때 크루그만이 지적한 생산요소 (노동) 투입의 극대화는 국가의 직접적인 개입하에서 기업별 생산현장의 노동시간 및 노동강도의 극대화로 귀결됐다. (본서 제1장에서 설명한 개발자유주의의 구성요소로서 국가―자본의 기업가적 결합 및 노사관계의 정치적 통제는 이러한 기능적 차원에서도 이해가 가능하다.) 이때 증가된 노동시간 및 노동강도에 비례한 경제적 보상의 지체, 즉 기업들의 정당한 수준의 임금 인상 거부에 관련해서도 국가의 정책적 용인과 사법(폭력)적 후견이 있었으며, 이처럼 불리한 질서하에서 노동자들은 결국 스스로도 장시간 혹은 다중적 노동에 의거한 소득 확대를 통해 생존을 강구하는 역설이 전개됐다. 이러한 현실은 초기 (노동집약적) 산업화의 성공적 완성에 이은 중화학공업, 정보통신산업 등으로의 산업구조 고도화 과정에서도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노동력 투입의 극대화는 경제발전 단계적 효용과 무관하게 일종의 사회·정치적 관성으로서 최근까지 지속되어 왔는데, 다만 이것이 신규 고용 확대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기존 고용된 인력의 최대 가동 (착취)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p.209)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한국의 개발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노동자들은 생활인으로서의 정상성을 유지하기 힘든 정도의 장시간 근무를 강요받아 왔으며, 특히 가사 관리와 가족 지원에 대한 일상적 참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취업 배우자의 소득이 허용한다는 전제하에) 기혼여성의 전업주부 역할이 정당화 혹은 필수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가사 관리와 가족 돌봄을 위한 기혼여성의 총체적 책임 및 역할을 바탕으로 남성노동자에 대한 사업체들의 극단적인 노무관리가 지속되어 온 것이다. 상당 부분 탈법·편법적이기까지 한 이러한 노동체계가 온존되어 온 이면에는 생산요소로서의 노동 투입 극대화를 통한 경제성장을 추구한 개발(자유)주의 국가의 의도적 방임이 있었다. 그런데 국가는 같은 동기에서 (“선가정보호, 후사회복지” 노선하에) 취약 집단 보호 등을 위한 공적 사회보장 책임을 부정하고 가족에 의한 부양·보호만을 강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여성(주부)의 가족적 책임과 역할을 극대화하는 데 (대다수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직접적으로 기여해 왔다. 생계부양자로서의 남성 가장에 대한 여성(부인)의 가부장적 예속은 개발자유주의 체제하에서 여성이 기업 및 국가와 맺는 관계의 가부장성과 구조적으로 결착되어 있었다. 삼중적 구조를 가진 일종의 개발가부장제 질서가 남성노동자들의 장시간·고강도 노동체제에 대한 예속과 그들 부인의 가사관리와 가족돌봄에 대한 총체적 책임을 요구해 왔다. (p.228-229)

 

 한국 경제의 위기 대응용 구조조정은 안정된 장기 일자리들을 광범위하게 제거했으며 결과적으로 가족 생계를 책임지는 가(부)장으로서 남성의 현재 및 미래 지위를 근본적으로 와해시키게 됐다. 반면 교육, 주거, 금융, 고용, 보호·부양상의 가족적 혹은 가족화된 의무와 기능들은 그대로 남았다. 사실, 주요 산업 부문들에서의 정규직 고용의 급속한 감소는 이러한 의무와 기능들에 대한 요구를 더욱 강화시켜놓았는데, 이는 독일 등 중유럽을 모형으로 만들어진 이른바 “보수적” 복지체계의 핵심 요소였던 공공 및 기업 복지혜택들이 대부분 정규직 고용을 제도적 바탕으로 했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기혼여성의 보완적 혹은 대체적 소득 획득 책임의 급속한 일상화를 요구했다. 그렇다고 남편들의 가사일에 대한 만성적 비협조에는 어떤 유의미한 변화도 없었으며, 오히려 각종 사회조사들은 취업주부의 평균 가사분담률이 전업주부보다 오히려 높다는 역설적 현실을 보여주기도 했다. 미혼여성에게는 갈수록 결혼이 (1) 불안정 고용 상태에서 가사 참여도 저조한 남편, (2) 본인의 가족뿐 아니라 국가, 사회, 경제를 위해 자신의 복잡다양한 헌신을 요구하는 가족화된 의무와 기능들, (3) 그리고 본인의 고강도 직장생활 사이의 황당한 결합으로 다가올 수 있다. (p.240-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