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 / 김지원 / 유유
이때 책은 순식간에 생각의 밀도를 높여 주는 지팡이(혹은 디딤돌, 기폭제)가 되어 주었다. 어떤 주제에 대해 책 한 권 분량으로 고민한 흔적 그리고 그 흔적을 ‘굳이’ 종이로 엮어 낸 결과물이 바로 책이기 때문이다. 글이든 영상이든 쉽게 쓰고, 쉽게 소비되는 시대에 여전히 책 한 권 분량의 생각을 삭여내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주장을 겸손하게 검증하고 또 모은 결과물이 갖는 밀도는 결코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다. 책을 펼쳐 들었을 때 나는 평소 기사를 읽으면서 느꼈던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감정에서 벗어나 밀도 높고 흥미로운 시각을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모두가 지금 막 발생한 사건의 뉴스만을 숨 가쁘게 다룬다면 나 하나쯤은 아예 뉴스를 구실 삼아 조금 색다른 이야기를 책과 함께 늘어놓아도 괜찮지 않을까?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들은 재미있고 자신에게 유익하고 신실한 글을 읽기를 원한다. 좋은 글을 마주하면 눈을 꿈벅대고, 때론 갸우뚱하다가도 깨우침을 얻어 읽는 기쁨을 느낀다. 중요한 것은 이런 글은 흔하게 어디든 널려 있는 것도 아니고 돌멩이처럼 공짜로 바닥에서 주울 수 있는 종류의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좋은 글 한 편에는 저자를 비롯해 많은 이들의 헌신 어린 노력이 담겨 있다. 그런 헌신이 깃든 글은 오늘날 어디에 (많이) 모여 있는가?
이 물음에 나는 ‘책’이라고 답하고 싶다. 순식간에 무한에 가까운 정보를 뽑아낼 수 있다는 시대지만, 여전히 어떤 종류의 책은 더디게 출간된다. 책임감 있는 저자가 믿을 만한 정보를 엄선하고 자신이 일생 품어온 오랜 고민을 성실한 공부를 거쳐 글로 풀어내면, 편집자는 그것을 검증하고 읽기 좋게 교정한다. 그 외에도 수많은 노동이 켜켜이 더해진다.
책을 펼치고·직접 읽고·고민하고·끼고 뒹굴지 않으면 당도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고 믿는다. 바로 이 책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세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언제든 그 안에서 헤맬 수 있다는 감각과 작은 용기가 생겨나면 그때부터는 제멋대로 조금씩 그 안에서 자신의 영토를 넓혀 가면 될 일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책(정보)을 주체적으로 읽는 능력을 길러가다 보면, 평소 접하는 조각 정보 역시 훨씬 주체적으로 관찰·판단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가령 인터넷 기사·기사에 달린 악성댓글·유튜브 영상 등도 어떤 맥락 없이 각각 유리되어 있다면, 그 모든 것이 의미 모를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 있지만, 그것들의 사회적 맥락 그리고 나와의 관계를 알게 된다면 모든 정보와 사건을 훨씬 흥미로운 ‘증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맥락을 가장 잘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밀도 높은 텍스트는 바로 책이다.
그간 ‘기레기 담론’을 언론계 내부의 문제로 비판하고 성찰한 기사들이 많았다. 저널리즘을 되살리려면 저널리즘 ‘본연의 정신’인 객관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저널리즘 본연의 정신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이 객관성이라는 생각은 이미 다수의 언론학자에 의해 반박되어 왔다. 저널리즘의 역사에서 객관성의 이미지가 전면에 드러난 것은 20세기 초중반 무렵에 들어서다. 오히려 오랜 세월 동안 잡지·신문 등의 간행물은 ‘실용적인 읽을거리’(가치 있는 정보·새로운 소식·교양·오락 등) ‘커피하우스에서 수다 떠는 친구 같은 존재’로서 기능했다. 그럼에도 오늘날 텍스트 생산자들은 너무 오랫동안 읽고 싶은·가치가 있는·읽는 재미가 있고 실용적인 형태의 텍스트를 제공하는 일에 소홀했다.
사람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자신을 깨우고·깜짝 놀라게 하고·감탄하게 하고·배꼽을 잡게 하고·때론 울상 짓게 만드는 좋은 글을 읽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나는 바로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하는 좋은 글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이런 글에 대한 궁리는 필연적으로 책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이 번거로움이 만들어 내는 가치는 특히 참고 도서나 입문서·논픽션의 경우 빛을 발하는데, 정보 가공 및 생산자의 입장에 국한해 보더라도 책만큼 ‘대단한 가성비’를 지닌 매체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나는 부지런한 학자·기자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 심도 깊은 조사와 연구를 거쳐 쓴 책을 보면 누가 나 대신 취재를 해서 ‘엑기스’만 추출해 담아 놓은, 분에 넘치는 선물꾸러미를 받아 안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특히 그 책이 내가 오래도록 품었던 질문을 건드리고 있다면, 그 책의 가치는 감히 환산하기 어렵다.
우선 책의 접근성을 보자. 도서관에 가면 오랜 전통을 지닌 문헌 분류법의 도움을 받아 원하는 분야의 책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책의 서문·제목·차례는 그 안에 무슨 정보가 담겨 있는지를 깔끔하게 알려 주며, 중요한 대목엔 그 정보가 어디에서 비롯했는지 알려 주는 출처가 촘촘하게 달려 있다. 거기다가 그 책을 읽으며 해당 주제의 책을 더 찾아보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해 ‘참고 문헌’에서 수많은 책을 소개하기까지 한다! 해당 책(정보 묶음)에 대한 메타 평가(서평)도 손쉽게 참고할 수 있다. 독자와 저자라는 두 세계를 넘나들며 다리를 놓는 편집자 덕에 가독성마저 좋은 데다가, 혹 그런 책이 다른 언어로 쓰인 경우 출판사와 번역가는 훌훌 읽기 쉽게 한국어로 번역까지 해 낸다. (꼭 읽고 싶은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지 않아 눈물을 머금고 더듬더듬 원서를 읽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 것이다.) 또한 책에서는 지금, 여기에서 벗어나 수백 년 세월을 이기고 살아남은 고민의 정수를 손쉽게 접할 수 있다. 책의 훌륭함이 이 정도라면 대만 작가 탕누어가 “책만큼 저렴한 매체는 또 없다”라며 한탄한 것이 괜한 말로 들리지 않는다.
우치다 다쓰루는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에서 단순히 쉬운(=대중적인) 입문서를 쓰겠다면서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의 예시를 가지고 오는 것은 독자를 바보 취급하는 것이라며, 상대에게 직접 말 거는 글쓰기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독자에게 말을 걸겠다는 마음으로 쓰인 글은 비록 어렵더라도, 왠지 모르게 어떻게 해서든 더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한다. 이런 글이야말로 ‘읽을 수 있는’ 텍스트의 본질일 것이다. 즉 ‘중2도 이해할 수 있도록 써라’라는 것은 결국 ‘중2도 읽고 싶은 마음이 들게 써라’와 다름없다. 정말로 내가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 글은 검색을 하고 사전을 찾아서라도 읽게 된다. 단순히 평이한 단어를 쓰고 존댓말을 쓴다고 해서 읽고 싶은 글이 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상대방에게 직접 말을 거는 방식의 글쓰기여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글 가운데 이런 인간적이고 소박한 유머가 깃든 글이 얼마나 있는가? 대부분 맛도 멋도 없는 글 아닌가? 또한 ‘글’ 말고도 재미있는 것들이 잔뜩 있는 시대이니 오히려 더 독자를 꾸짖고 엄숙하게 가겠다며 있는 재미마저 쭉 짜내 난삽하기만 한 글로 독자의 얼을 빼놓으려 한다면 이는 불가능한 일을 강요하는 것이다. 이건 요즘 사람들이 ‘도파민 중독’이라 그런 게 아니라, 인간은 원래 세상에 재미라는 것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엄숙한 동물이 아니다. 오늘날의 독자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헷갈리고 어렵기만 한 글을 감내할 이유조차 없고(일단 교실을 빠져나오면), 아마도 거리를 걷는 시민의 상당수가 철학자였던 고대 그리스에서든, 가족 단위로 공원에 모여 피크닉을 즐기며 10시간짜리 대통령 후보 마라톤 연설을 듣던 18-19세기 미국에서든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니 글에서는 그 시대에 맞는 문체를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그 시대에 맞는 재미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글의 목적이 ‘읽히는’ 것이라면 말이다.
나는 예전부터 문해력이라는 단어에서 잘 주목받지 못하는 ‘즐거움을 위한 읽기’ 측면을 강조하고 싶었다. 앞서 말했듯, 이 시대 사람들은 쏟아지는 텍스트 사이에서 밀쳐지고 부유하듯 살아가고 있다. 어렸을 때도 성인이 되어서도 즐거운 읽기 경험을 해 본 적이 없다. 어렸을 때는 주로 책이 평가를 위한 학습의 수단이었기 때문에, 커서는 제대로 읽을 여유나 제대로 된 텍스트를 접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스마트폰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는 텍스트는 대체로 편집되지 않고 자극적인 데다 깊은 생각을 할 만한 좋은 글이 아니기 때문에 읽기 경험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다시 강조하고 싶다. 대부분의 사람은 텍스트 읽기 경험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진실하고 재미나고 자신에게 말을 거는 양질의 텍스트를 읽어 본 경험이 거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읽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쉽게 접할 수 있는 반경 안에서 좋은 텍스트를 찾기도 힘들뿐더러, 그것을 읽을 여유도 없고, 나아가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에 대해 좋은 텍스트를 찾아낼 안목과 지도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왜 읽는 게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일인지를 알려 주는 사람도 없었다. 정말로 더 많은 사람이 책을 읽도록 하려고 문해력을 주장하고 싶다면, 차라리 이쪽을 강조하는 편이 나을 텐데, 아쉽게도 오늘날 문해력에 대한 논의는 오히려 읽기에 대해 더 주눅 들게 만드는 방향으로 행진하는 중이다.
오늘날 책과 대부분의 인터넷 텍스트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근거가 되는 원천 정보 및 출처·저자·참고문헌을 밝혀 적는지 여부이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특징보다도 이 차이가 굉장히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밝히는 것은 두 가지 차원에서 중요한데, 첫째 독자에게 해당 정보가 원천 정보에서 먼지 가까운지에 대한 감각을 부여해 텍스트의 경중을 판단할 수 있게 해 주면서 동시에 독자가 원천 정보에 직접 접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고, 둘째 텍스트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번거로운’ 인간 노동을 인지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정보를 쉽게 검색해 볼 수 있는 것은 누군가가 먼지 쌓인 아카이브에서 연구 자료를 직접 읽고 확인하고·논문을 쓰고·검증을 받고·필수 문헌을 번역하고·믿을 만한 전문가를 찾아가 인터뷰를 한 뒤 인터넷에 검색 가능한 텍스트의 형태로 올렸기 때문이다. 이런 검증·확인 노동은 언론 학계 등 신뢰할 만한 공동체 안에서 상호 검증, 비평 등을 거쳐 최종적으로 믿을 만한 텍스트라는 권위를 얻게 된다.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이런 필수 노동은 제값을 인정받지 못했다. 특히 인터넷 생태계에서는 말이다.
강조하자면, 이는 정보 생산자에게만 나쁜 일이 아니다. 이처럼 원천 정보 생산자에게 제대로 된 대가가 돌아가지 않고 모두가 누군가의 지식 생산 노동을 착취하려고만 하는 생태계는 결국 ‘물고기가 사라져버린 마른 연못’ 같은 것이라서 장기적으로는 모두에게 나쁘다. 이를테면 원천 정보 생산자에게 별다른 대가가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가성비 높게 적당히 눈길만 끄는 자극적인 복붙 기사들이 ‘텍스트의 내재적 가치(신뢰도/영향력)’와 무관하게 단지 검색어에 의해 병렬적으로 튀어나오는 현재의 포털 생태계처럼 말이다. 과연 오늘날 이런 기사들 속에서 독자들은 공짜로 ‘정보의 홍수’를 누릴 수 있어 아주 행복한가?
역사적으로 인간이 만들어 내는 콘텐츠는 지속적으로 늘어 왔고, 전체 정보량도 방대해지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 콘텐츠 가운데 사람들이 필요할 때 언제든 접근해서 자신의 도구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될까? 애초에 오늘날 나락처럼 쏟아져 내리는 무수한 신규 정보 가운데 제대로 보존, 갈무리되어 후세에 전해질 수 있도록 각별히 관리되는 정보는 얼마나 될까? 한 연구에 따르면 인터넷 사이트의 평균 수명은 2년 7개월에 불과하다. 미국 의회도서관은 2006년 트위터에 쓰인 모든 메시지를 수집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그 방대한 양을 모두 보존하고 선별 보관할 수 없기에 2017년 이래 선별적으로 수집하고 있다.
만약 미래에 남길 만한, 남길 수 있는 정보가 많지 않다면 과연 오늘날을 ‘정보의 홍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쩌면 오히려 수백년 후의 세대는 2000년대를 ‘정보의 암흑기’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옥스퍼드대학교 보들리안도서관장인 리처드 오벤든은 분서·소실 등 책 파괴의 역사를 다룬 『책을 불태우다』의 결론부에서 오늘날 인터넷 세계에서 벌어지는 어마어마한 정보 소실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수많은 의도적·비의도적 사고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옛 책들로 가득한 도서관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모두 ‘미래’로 지식의 소산을 전달하려는 과거 사람들의 의지 덕분이었지만, 오늘날엔 오늘날 버전의 가치 있는 정보에 대한 사회적 합의 및 이를 보존하기 위한 의식적인 헌신이 없다는 것이다.
분명 어떤 온라인 기사·유튜브·틱톡·블로그 글은 책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가치 있는 통찰을 담고 있을 수 있다. 나는 그 가능성을 무시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하지만 책과 기타 콘텐츠의 결정적인 차이점 중 하나는 후자의 경우 책과는 달리 조직적인 보존 노력 및 적절한 분류를 통해 접근가능성을 높이는 시스템이 없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어디에 놓여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만약 내가 ‘탐조의 역사’에 대해 조리 있게 설명된 콘텐츠에 접근하려고 한다면 책의 경우 도서관의 자연과학>동물학>조류 코너에 가서 대략 훑어만 봐도 미처 기대하지 않았던 양질의 정보에 우연히 맞닥뜨릴 확률이 굉장히 높지만, 유튜브나 여타 콘텐츠는 개인의 큐레이션을 통한 것이 아니라면 훌륭한 콘텐츠에 우연히 접할 확률이 낮다.
우리는 통상 책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정보이고, 인터넷은 비교적 ‘쉬운’ 정보라고 생각하곤 하는데 사실은 정반대다. 인터넷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자료는 대체로 쪼개진 정보이고, 책은 어떤 정보를 특정한 수준의 지식을 가진 독자를 상정해 가공하고 특정 맥락에 따라 조직한 지식이다. 예를 들어 AI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온라인에서 단건 기사를 읽어도 맥락에 맞게 이를 수용하고 또 판단할 수 있지만, 문외한인 사람은 같은 정보를 마주하고도 그것이 어떤 가치가 있고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이처럼 인터넷에 산재한 정보 가운데 내가 원하는 내용과 수준의 정보를 찾아내고 ‘제대로’ 활용하려면 높은 차원의 교양이 필요하다. (책에 비해) 인터넷에는 정보가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훨씬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이는 모래사장 속 사금 같은 것이다. 이를 찾고 활용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가치가 있다.
수력공학·원자력·수학·농업 등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의 책, 외국어로 된 서적이 가득 꽂힌 서가를 배회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모르는 세계의 부피를 체감할 수 있게 된다. 인터넷상의 읽기에서는 좀처럼 하기 어려운 경험이다. 이 ‘서가 배회’를 통해 나는 어디에 가면 어디쯤에 어떤 정보가 얼마나 있는지를 어렴풋하게라도 알게 된다. 자연스럽게 나중에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그것에 관한 정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는 감각이 생기고, 필요한 책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틈날 때마다 굳이 도서관을 찾는 이유다. 아마도 나의 독서 중 20퍼센트는 이처럼 때때로 서가를 이리저리 배회하며 책등을 읽고 내키면 책을 꺼내어 표지를 읽는 ‘책등 독서’일 것이다.
모든 책을 다 읽을 필요는 당연히 없다. 이렇게 책등이나 서문을 제외하고 ‘읽지 않은 책’들의 계보를 확장하다 보면, 나중에 정말 필요할 때 원하는 정보에 쉽고 빠르게 접근할 수 있다.
샤를 단치는 이렇게 말한다.어떻게 경이로운 작품들을 찾아낼 수 있을까? 비결은 많이 읽고 많이 실패하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그 방법뿐이다. 더 많이 읽고 더 통렬한 실패를 경험하고, 또 다른 책을 읽는다. 책을 읽는 것은 새 신발을 고르는 일과 같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신어 봐야 가장 잘 어울리는 신발을 고를 수 있다. 이 책은 어려워서 내가 소화하기에 힘들거야! 이런 말은 적절하지 않다. 세상에는 독자의 수준을 따라오지 못하는 책들도 아주 많다.
어쩌면 낯선 책을 부담 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낯선 여행지에서 낯선 전통 음식을 먹어 보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낯선 식재료를 환대하는 마음과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어 하는 마음 그리고 부담 없이 한 번 시도해 보고자 하는 가벼운 마음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독서에서 그 시작은 일단 도서관의 서가를 맴돌며 이런저런 책들을 펼쳐 보는 것이다. 어떤 서가를 선택할지는 그날의 기분이나 개인적인 고민으로 결정해도 좋을 것이다.
내 마음속에 침대 밑 완두콩 같은 강렬한 질문이 있다면, 어디서든 그 답을 반드시 찾아내게 된다. 이 때문에 평소 책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읽을 책을 고르는 것만큼이나 사전에 내게 다가오는 질문들을 여러모로 벼려두는 것이다. 나의 마음속에 질문이 있을 때 어떤 책을 읽든 이야기가 와서 자석의 철처럼 달라붙는다. 편집자 사도시마 요헤이는 『관찰력 기르는 법』에서 이런 현상을 ‘의식적 확증편향’이라고 일컫기도 했다.
예를 들면 제인 제이콥스의 도시에 대한 책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을 읽으면서 평소 노키즈존에 대해 갖고 있었던 질문을 키워 보고, 티보르 스키토프스키의 책 『기쁨 없는 경제』를 읽으면서는 평소 우리가 지루함을 느낄 때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다. 대체로 이처럼 어떤 책에서 엉뚱한 부분에 눈이 꽂히는 것은 나만의 특징이 아니라, 이것이 원래 우리가 무언가를 더듬어 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지식의 단련법』에서 책방을 돌고 입문서부터 전문서까지 면밀하게 좋은 책 고르는 법에 대해 설명하면서도 당장 필요없는 책을 일정 정도는 반드시 병행해 읽으라고 조언한다. 당장 쓸모와 목적이 불명확한 책에서 영감이 나오는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숀케 아렌스는 “만약 우리가 배우려는 것만 배웠다면 아마 말하는 법도 배우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앞에서도 여러 차례 해찰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해찰은 단지 ‘자투리’나 ‘보너스’ 같은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세상을 배우는 핵심 과정이 해찰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질문을 정해진 카테고리나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만 굴리는 것이 아니라 다방면으로 촉수를 뻗어 가며 답을 얻어 보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거기서 오히려 내가 상상하던 것 이상의 낯선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왜 그럴까 곰곰 생각해 보면, 아마도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 두부를 자르듯 나뉜 분류에 따라 돌아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독립연구자이자 모리타 마사오의 『수학의 선물』을 옮긴 박동섭은 이 책 옮긴이의 말에서 이렇게 말한다.삶에 어디 분과가 있던가! 길을 걷다 넘어지는 것은 물리학적 경험인가?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고 흘리는 눈물은 생물학적 현상인가? 물에서 산소와 수소를 분리하는 것은 화학적인 경험이고, 카뮈를 읽는 것은 문학적 체험이며, 미적분 문제 풀기는 오로지 수학에만 바쳐지는 시간인가? (……) 삶의, 그 대신할 수 없는 풍요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규격화된 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인터뷰어는 적재적소에 섬세하게 개입한다. 화자에 맞추어 때론 동조적으로, 때론 전투적으로 임해야 할 때도 있다. 기만적인 화자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옮기는 대신 적극적으로 딴지를 걸고, 너무 미약해 잘 들리지 않는 이야기에 대해선 구체적인 답을 끌어내려고 세심하면서도 전향적으로 질문하는 식이다. 이처럼 의식적으로 대화의 흐름 및 균형을 생각하지 않으면 자칫 인터뷰는 단지 대상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풀어놓는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그런 이야기도 아주 의미가 없진 않겠지만, 그럴 거면 굳이 인터뷰라는 형식을 취할 이유가 없다.
독서도 비슷하다. 독서의 목적은 단지 남의 생각을 내 머릿속으로 그대로 옮겨 두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관점으로 텍스트를 읽어 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텍스트’와 ‘나’ 둘 중 어느 쪽도 간과돼선 안된다. 이에 어떤 책은 저자의 의도를 오해하지 않으려고 정신을 바짝 세운 채 읽어 내려가야 하고, 어떤 책은 싸우듯 읽게 되기도 한다.
꼭 내가 좋아하고 100퍼센트 공감하는 대목이 아니더라도, 책의 핵심 메시지 가운데 내게 가장 껄끄럽게 와닿는 부분·이상한 부분·내 생각과 달라서 화를 내면서 본 부분·아주 웃겨서 여러 번 읽고 싶은 부분·글맛이 뛰어난 부분·이 대목을 구실삼아 뭔가 좀 써 보고 싶은 부분·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지만 왠지 흥미로운 무언가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가지고 놀아 보고 싶은 부분 등이 모두 인상 깊은 부분에 포함된다. 그러면 나중에 다시 읽을 때는 그 부분이 다르게 읽히기도 하고, 몇 년 후에야 그 대목의 의미가 어렴풋이 떠오르기도 한다.
통상 맨바닥에서는 어떤 생각을 떠올리기가 어렵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떤 생각을 섬세하게 떠올리고 논리를 정립하려면 구체적인 계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사안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오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주 간단한 계기만 있으면 어떤 사안에 대해 아주 구체적인 의견을 갖기도 하고 꽤 심도 있는 통찰을 내놓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계기’다.
사이토 다카시는 ‘그물’이라는 비유를 사용해 타인과의 대화가 가져오는 강력한 환기의 효과를 설명했다. 나는 이 ‘그물’의 효과가 독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그물은 통상 무언가를 읽는 과정에서의 ‘인풋’과는 다른 차원이다. 인풋은 단순히 상대의 말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것인데 반해 독서를 통해서는 받아들인 후의 환기 과정까지 일어나기 때문이다.
메모지를 옆에 두고 책을 읽을 때, 보통은 책을 읽기 전과 후에 모두 메모를 한다. 예를 들어 책 한 권을 빌려오면 책을 본격적으로 펼쳐 보기 전에 어떤 계기로 이 책에 관심이 생겼는지·책이 세간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어떤 부분이 나의 호기심을 건드렸으며·읽기 전 어떤 내용을 기대하고 있는지·이 주제에 대해 책을 읽기 전에 나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등을 길게 쓴다. 이는 대체로 책 제목·저자 소개·차례·책 표지 정도만 참고해도 쓸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런 후에 책을 꼼꼼하게 읽고 예상과 빗나간 부분·예상 외로 좋았던 부분·내 생각이 바뀐 부분 등을 쓴다. 이런 메모를 나중에 다시 보면 의외로 책을 읽고 난 후보다 읽기 전의 노트가 더 촘촘한 경우가 많다. 그럼 이 글은 과연 책을 읽고 쓴 글일까? 알쏭달쏭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서가를 어슬렁거리며 그 책에 닿았고·이전부터 나는 책이 다루는 주제를 머릿속으로 굴려 왔고·이 책을 집어 들고 앉은 것이 계기가 되어 그 주제에 대해 작정하고 생각을 펼칠 기회를 가졌다는 것이다.
이는 설득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선 아주 중요한 지점인데,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을 털끝만큼도 바꿀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어떤 대의가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것과 거기에 동의하는 것이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나는 어설프게 쓰는 자로서 살아 온 지난 십여 년간 절실하게 깨달았다. 조금 하찮고 웃기는 방식으로라도 벽을 부수는 글은 오늘날 찾기 힘들다. 특히나 시사적이고 논쟁적인 주제에 대해서는 말이다. 그런 글을 읽고 싶었고, 없다면 내가 써 보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이제껏 나를 이끌어 온 가장 강한 원동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