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내일이 없더라도 / 도갈드 하인 / 한문화 우리가 기후 변화에 관해 말할 때면, 주제는 늘 ‘과학이 제시한 틀’ 안에서 시작된다.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지 않은가? 기후 변화는 어디까지나 과학 용어이며, 자연과학이 기술하는 일련의 프로세스를 일컫는다. 하지만 기후 변화는 과학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도 제기한다. 어떤 질문은 과학 분야 안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책임은 과학자에서 엔지니어 및 경제학자에게로 넘어간다. 또한 심리학자, 마케팅 전문가들도 메시지를 전달하고 행동 변화를 유발하는 방법을 고안하기 위해 기꺼이 참여한다. 종교 지도자, 예술가, 원주민 원로들과 회의실에 모였을 때, 나는 우리가 이러한 하위 활동에 대해 답해야 한다고 느꼈..
객관성의 함정 / 무라카미 야스히코 / 문학수첩 객관적 데이터야말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금이야 당연한 감각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조금씩 조금씩 생겨난 발상이다. 당시 과학 연구 성과를 공공의 장에서 발표할 때 그것을 보증하는 일의 모델이 된 것은 재판에서 이뤄지는 판결이었다고 한다. 17세기 런던 왕립협회에서는 권위 있는 학자가 실험에 입회하여 실험의 신빙성을 증언함으로써 진리를 판단했다.[권위 있는] 고전의 기술(記述)에 반하는 개인의 체험은 단순한 일탈로 치부되어 ‘진정한 경험’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실험실에서의 개인적 경험을 공공의 지식으로 변환하는 일이 유럽 각국 아카데미의 공통 과제가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증언을 모방한] 재판의 레토릭’이야말로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전기화하라 / 사울 그리피스 / 생각의힘 100% 전기차 보급을 달성해야 한다는 요구는 거대한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는 요구와도 같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지구 온난화를 2도 이하로 막기에는 역부족이며, 그 힘만으로는 지구 온난화를 1.5도 이하로 억제할 가능성은 전무하다. 이 이야기가 정부가 경제에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사태를 과장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기술적으로 필수적인 요구가 바로 정부의 개입이다. 마치 변기가 고장 난 상황에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하자. 나는 당연히 “보이지 않는 손이 고쳐줄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배관공을 부르라고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후..
먼저 온 미래 / 장강명 / 동아시아 2023년 12월부터 2024년 1월까지, 나는 전현직 프로기사 30명과 바둑 전문가 6명을 만나 인터뷰했다. 그들이 어떤 충격을 받았고 어떤 혼란을 어떻게 감당했는지, 어떻게 적응했고 그 적응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 들었다. 그리고 소설 쓰는 인공지능이 보급되면 소설가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해 봤다. 나는 바둑계에 미래가 먼저 왔다고 생각한다. 2016년부터 몇 년간 바둑계에서 벌어진 일들이 앞으로 여러 업계에서 벌어질 것이다. 사람들이 거기에 어떤 가치가 있다고 믿으며 수십 년의 시간을 들여 헌신한 일을 더 잘해내는 인공지능이 어느 순간 갑자기 등장하는 것. 그 인공지능이 싼 가격에 보급되는 것. 그 인공지능과의 ‘공존’을 강요당하는 것. 인공지능이..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 / 윌리엄 해즐릿 / 아티초크 먼 것은 좋아 보인다. 우선 공간과 크기의 관념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에 너무 가까이 들이대지지 않은 먼 것에 어렴풋하고 비현실적인 상상의 색을 입힌다. 지평선의 아련한 능선을 바라보며 우리는 그곳으로 가는 길에는 어떤 흥미로운 것들이 있을까, 그리고 그 길에서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 얼마간 상상해 보기도 한다. 우리는 하늘과 맞닿는 그곳에 이르고 싶은 또는 “저 너머 멀리 펼쳐진 새로운 땅과 강, 산을 발견”하고 싶은 희망과 소원을 품는다. 그러다 보면 우리의 감정은 거추장스러운 껍데기를 벗는다. 그리고 감정의 밀도가 낮아지고 부피가 불어난다. 이윽고 감정은 부드러운 무언가로 아름답게 빛나며 하늘빛으로 물들고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