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번 레인 / 은소홀 / 문학동네
태양이는 그제야 엄마에게 설명하지 못했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대회에서 본 수영부 아이들은 달랐다. 분명히 그 순간 같은 장소에 함께 있었지만, 그들만의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었다. 감싸고 있는 공기가 달랐고, 스타트대 위에서의 긴장감이 달랐고, 터치패드를 찍고 나서의 간절함도 달랐다. 태양이는 그들이 있는 세상에 들어가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환하게 빛나는 아이가 지금 태양이 앞에 있었다. (p.91)
"그거 어플 켜면 다 나와. 뭣 하러 나가서 그 고생을 하냐?"
날마다 모여서 과학 숙제 한다는 얘기를 듣고 세찬이가 딱하다는 듯이 말했다. 동희도 옆에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세찬이와 동희야말로 뭘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나루와 태양이, 승남이, 세 사람은 과학 수행평가를 핑계 삼아 저녁 늦게까지 밖에서 노는 게 좋았다. 어떤 날은 나루가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 그럼 뒤에서 승남이랑 태양이랑 라이카가 잡으러 쫓아왔다. 이리저리 도망 다니면서 광장을 두세 바퀴 돌다가 일곱 시 정각이 되면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서 달을 그렸다. 나루가 챙겨 간 과일 맛 젤리를 오물거리면서.
저녁 바람이 두터워졌다. 달은 매일 조금씩 변했다. 어제와 똑같은 자리에 그대로인 것 같아도, 서쪽에서 동쪽으로 날마다 조금이나마 위치를 옮겨 갔다. 모양도 어느새 초승달에서 상현달, 그리고 보름달로 바뀌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수영하고 수업 듣고 또 수영하는 똑같은 하루하루에 지쳐 있던 나루에게 눈앞에서 무언가가 확실히 변하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은 조금 위로가 되었다. 어쩌면 나루가 눈치채지 못할 뿐, 많은 것들이 변하고 있을 것이다. (p.102-103)
태양이는 잠시 숨을 돌릴 때면 자신도 모르게 나루 쪽으로 눈이 갔다. 환하고 넓은 수영장에서 헤엄치는 나루를 보고 있으니 어젯밤 채팅 앱에서 본 나루의 프로필 사진이 떠올랐다. 사진 속 나루는 마치 인어공주처럼 뺨에 조개껍데기 모양의 판박이를 붙이고 있었다. 나루가 인어라면…….
아마 나루는 옥빛 남쪽 바다를 누비고 다닐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폭풍우에 휘말린 태양 왕자를 구해 주게 되겠지. 하지만 바보 같은 왕자는 은혜도 모르고 이웃 나라 공주와 결혼을 약속할 것이다. 슬픔에 빠진 나루 인어는 차마 왕자를 미워하지도 못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물거품이 되……기는커녕, 남쪽 바다에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켜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 것이다.
태양이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역시 나루에게 인어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양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인어공주보다 지금 저기 4번 레인에서 힘차게 물보라를 일으키는 나루가 좋았다. (p.119)
"있잖아, 나루야. 나는 진짜 옛날에는 내가 국가대표 할 줄 알았다. 근데 중학교 가니까 이게 아닌데 싶더라고. 너도 알지? 나 평영 못하는 거. 배울 때 엄청 고생했는데. 지금도 느려. 근데 그런 애들 있잖아. 똑같이 배웠는데 훨씬 빨리 몸에 붙는 애들. 체중에는 그런 애들만 모여 있어. 걔네들이 게으르기라도 하면 어떻게 좀 해 보겠는데 또 죽어라 연습한다? 그럼 난 당할 재간이 없더라고."
나루는 자신을 앞질러 가던 김초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라이벌이라는 건 항상 그렇게 준비할 새도 없이 나타난다. 김초희도 그랬다. 영원히 나루의 것일 것 같던 메달을 한 번, 두 번 빼앗아 가더니 언제부턴가 꽉 잡고 돌려주지 않았다. 그게 너무 화가 났다. 하지만, 아무리 화가 나도 이렇게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나루는 스스로 저지른 일이 떠올라 더 이상 화를 낼 수 없었다. 언니는 적어도 비겁하지는 않았다.
"나는 진짜 할 만큼 해 봐서 별로 아쉽지가 않아. 그리고 다이빙이 은근 재밌더라고."
사실 나루도 알고 있었다. 언니가 다이빙을 정말로 좋아한다는 것을 말이다. 다이빙대에 오를 때마다, 다이빙 이야기를 할 때마다, 버들이의 얼굴에서는 환하게 빛이 났다. (p.182-183)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나루는 아무리 과정이 훌륭한들 결과가 형편없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나루도 알았다. 결과가 좋든 나쁘든, 나루 손으로, 나루의 두 팔과 다리로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만 승리의 기쁨도, 패배의 분함도 떳떳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루가 레인 끝에 섰다. 앞으로 몇 번이고 왕복해야 할 길이 보였다. 어떤 날은 쏜살같이 지나가고 어떤 날은 영 지루할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지금 나루가 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 것들은 전부 물속에 있었다. (p.226-227)
안녕은 단정하게 / 매리언 위닉 / 구픽
그 친구가 평생 고향에서 살았기 때문일까, 레거시닷컴(Legacy.com, 미국의 온라인 추모 사이트)에 올라온 그녀의 방명록에는 아는 이름들이 줄줄 올라와 있었다. 옛 동창생들은 같이 차를 타고 학교로 갔던 일, 푸드타운에서 나란히 함께 일했던 일 같은 지나간 추억을 기록했다. 같은 유치원에 다녔던 한 남자애는 둘이 동네 대학교 강의실에서 다시 만나고는 서로를 바라보며 얼마나 웃어댔는지 이야기했다. 많은 친구들이 그녀의 웃음을 기록하고 있다. 마르고 가냘픈 여자애한테서 예상하기 힘들 법한, 목 쉰 듯이 킬킬거리는 웃음소리. (p.36)
겨울이면 그린 마운트는 고요한 잿빛으로 덮인 전경을 펼쳐 보인다. 선명한 빛깔로 그려진 벽화와 그래피티가 드문드문 장식되어 있다. 날이 따뜻한 시기에는 플라타너스, 아카시아, 오크, 단풍나무의 이파리가 무성해지고 홍관조와 까마귀가 날아와 둥지를 짓는다. 종종 새 관찰자들이 매나 올빼미를 목격했다고 하니 아마 나처럼 그들도 이 작은 유토피아 앞에 놀라움을 느꼈을 것이다. 철학자 같던 경비원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린 마운트에는 7만 7000명의 사람들이 묻혀 있으며 매년 열 명 정도만이 새로 이곳에 자리한다고 한다. 언젠가 내 친구도 그들 사이에 머물게 될 것이다. 선조들과 같은 고향 땅 아래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p.206-207)
수전 손택의 말 (경쾌한 에디션) / 조너선 콧, 수전 손택 / 마음산책
나디아는 뛰어난 화가였고—그건 어쨌든 손재주로는 희귀한 거죠—고야처럼 소묘를 할 수 있었어요. 정말 뜬금없이 나타난 천재였고 평범한 어린애였거든요. 하지만 자폐아였죠. 그 책은 그 아이를 치료하던 심리학자들 중 한 사람이, 그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 의논을 하던 중에 병을 치료하면 그 재능을 망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과정에 대해 쓴 거예요. 결국 의료진은 병을 고쳤지만 아이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됐지요. 나이젤 데니스는 이 얘기를 하면서—제가 아무리 잘 말해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멋진 글 솜씨로—아이를 미친 상태로 두고 계속 그림을 그리게 하는 쪽을 옹호합니다. 미치는 게 낫다고 하는 사람은 여기 아무도 없지만 그 광기는 자폐증의 기능이라는 게 명백하고, 또 어떤 면에서 고립되어 있어야만 화가로서의 천재를 유지할 수 있는데 그 고립 자체가 광기의 결과죠. 데니스는 묻습니다. 위대한 예술가가 있다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은가, 라고요. 그 아이는 이미 위대한 예술가였어요. (p.55)
전 세상이 주변적인 인간들에게 안전한 곳이 되어야 한다고 봐요. 좋은 사회의 최우선 요건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주변성을 허락하는 거예요. 자칭 공산주의라는 국가들이 그토록 끔찍한 건 그들의 관점이 학교 중퇴자나 주변적인 사람들을 포용할 여유가 없다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든, 길바닥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있을 가능성을 두어야만 해요. (p.57)
그래요. 독서는 제게 여흥이고 휴식이고 위로고 내 작은 자살이에요. 세상이 못 견디겠으면 책을 들고 쪼그려 눕죠. 그건 내가 모든 걸 잊고 떠날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우주선이에요. 그러나 제 독서는 전혀 체계적이지 못해요. 굉장히 빨리 읽는다는 점에서는 아주 운이 좋은 편이죠. 대다수 사람들에 비해 저는 속독가라고 생각되는데, 많이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대단히 유리하지만 어디 한 군데 진드근히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단점도 많아요. 저는 그냥 전부 흡수한 후에 어디선가 숙성되기를 기다리거든요.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식하답니다. (p.60)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면, 글은 아주 여러 가지 다른 것들에서 나온다는 거죠. 일단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들을 근거로 글을 씁니다. 그러나 그런 영향들은 고갈될 수 있고 실제로 다 소진해버리게 되어요. 열여섯 살 때는 작가들 중에서도 제라드 맨리 홉킨스와 듀나 반스를 열렬하게 좋아했죠. 지금은 둘 다 도저히 못 읽겠더라고요. 그렇지만 각자 그 나름대로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그냥 그 사람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모든 걸 배웠고, 그들의 글쓰기가 내 머릿속에 새겨져 있어서 줄줄 외울 정도라는 말이죠. 그 작가들을 철저히 흡수했는데 다시 읽는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외려 그 두 작가에게서 배운 게 뭐든 거기서 탈피하고 싶을 뿐이에요.
젊었을 때 어떤 대상과 몹시 강렬하게 동화되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게 너무나 자기 자신의 일부이기 때문이지요. 그 시기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또 열렬하게 어떤 모델을 갖고 싶다고 원하기 때문에 훨씬 더 민감하게 수용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해럴드 블룸이 묘사하는 것처럼 프로이트적인 건 전혀 아니라고 봐요. 스스로 받은 문학적 영향들을 파괴하고 싶은 살인 충동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냥 그 영향들을 소진해버리면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는 것뿐이죠. 자기가 받은 문학적 영향을 반박하고 다른 대안들을 시도해보고 싶은 자연스러운 충동이 있기도 하고요. 그러나 지금 저를 군침 돌게 만드는 산문이 엘리자베스 하드윅이나 윌리엄 개스 같은 종류라면, 그건 바로 20년 전이라면 제가 그런 식으로 반응했을 리가 없기 때문인 거죠. 20년 전에 저는 카프카에게 그런 반응을 보였지만, 지금은 카프카에게서 배울 건 다 배웠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에요. 과거의 제 취향으로 보면 생경한 것들에 동조하는 건 흥미진진해요. 초기의 작품을 매도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새로운 피의 수혈이 필요하고 새로운 자양분과 영감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제 정체성과 다른 것들을 제가 좋아하고, 또 저 자신이 아닌 것들, 제가 모르는 것들을 배우려 애쓰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요. (p.124-125)
그렇지만 내 단편의 화자들과 완전히 동일시하지는 않아요. 내가 거리를 두었던 적은 없다고 생각해요. 제 단편에서 일인칭 화법으로 말하는 캐릭터로 말하자면, 그건 제가 아니에요. 예술가들이 흔히 그렇듯 저 역시 제 삶의 이런저런 시기들에 숨어 있었어요. 내 작품과 독서로 숨고, 두서너 명의 친구들과 숨고, 세상을 두려워했죠. 사람들이 나한테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라고 할까 봐 두려웠고, 그런 신호들에는 아예 귀를 닫고 신경 쓰려 하지도 않았어요. 많은 사람들, 특히 여자들이 나한테 그런 질문을 했죠. "어떻게 기가 꺾이지 않으신 거예요? 그런 야망들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많이 들으셨을 텐데요." 아마 내 기가 꺾이지 않았던 건 그런 메시지에 아예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일 거예요. 그런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는, 확실히 어떤 면에서 청각 기능을 꺼버려야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거리를 두었다면, 본능적으로 내 기를 꺾을 만한 것들에 맞서 내 자신을 보호한다는 의미에서 그랬을 뿐이에요. "그러면 안 돼, 그러면 시집을 못 가"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라든가. (웃음) (p.178)
아까 작가의 사명은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는 거라고 말했지만, 저 자신에게 스스로 부과한바 작가의 소명은 온갖 종류의 허위에 맞서 공격적이고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에요……. 역시 마찬가지로, 이것이 끝없는 작업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하는 일이죠. 아무리 해도 허위나 허위의식이나 해석의 체계를 끝장낼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언제나 어떤 세대에든 그런 것들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있어야 하고, 그래서 전 사회비판이 오로지 정부에서만 나오는 세계 대부분의 장소들을 생각하면 심히 심란해져요. 아무리 돈키호테적이라 해도, 모가지 두세 개라도 더 자르려고 애쓰는 프리랜서들이 있어야 한다고 보거든요. 착시와 허위와 선동을 파괴하려고 애쓰는, 그래서 만사를 더 복잡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해요. 만사를 더 단순하게 만들려는 불가피한 기류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내게는, 그 무엇보다 끔찍한 일이라면 아마 내가 이미 다 쓰고 얘기한 내용에 동조하게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그게 아마 날 그 무엇보다 불편하게 만들 거예요. 왜냐하면 그건 내가 생각하기를 멈추었다는 뜻일 테니까요. (p.182-183)
정치적 부족주의 / 에이미 추아 / 부키
1954년, 베트남은 8년에 걸친 싸움 끝에 프랑스를 물리쳤다. 미국이 주도한 제네바협정에서 베트남은 둘로 분단됐다. 호찌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이 하노이를 수도로 삼아 베트남 북부를 통치하고 미국이 지원하는 베트남공화국이 사이공을 수도로 삼아 베트남 남부를 통치하게 됐다.
제네바협정은 300일의 시간을 주고 모든 베트남 사람이 원하는 곳에 가서 살 수 있게 했다. 이때 남에서 북으로 간 사람은 12만 명이었는데 북에서 남으로 온 사람은 80만 명이나 됐다. 냉전의 전사 미국인들은 이 차이를 베트남 사람들이 두 발로 자본주의에 표를 던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민족 집단 간의 동학을 염두에 두고 보면 이와는 다른 그림이 나온다. 남쪽으로 온 사람들의 상당수가 화교였다. (북부에 있던 화교의 압도적 다수가 남으로 내려왔다.) 베트남 사람 중에서 남으로 온 사람은 '프랑스화된' 베트남 지배층을 포함해 공산 정권에서 박해를 받을까 봐 내려온 가톨릭교도들이었다. 300일간의 이주 허용 기간이 끝날 무렵 화교의 압도적인 다수(120만 명 중 100만 명)가 남베트남에 살게 됐다.
호찌민은 '통일된 베트남 민족'이라는 개념을 열정적으로 믿는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는 같은 조상을 가지고 있으며 한 가족이고 형제자매"라며 "누구도 한 가족의 아이들을 갈라놓을 수 없듯이 누구도 베트남 민족을 갈라놓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1959년에 호찌민은 북베트남 군대를 이끌고 남베트남 동족을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에 나섰다. (p.68-69)
요컨대, 미국이 지원하는 남베트남의 정권은 남베트남 사람들더러 화교를 부유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 목숨을 걸고 북부의 형제들을 죽이라고 요구하는 셈이었다.
미국은 이런 민족 간의 동학을 전혀 보지 못했다. 베트남 현지에 있었던 미국 인력은 중국인과 베트남인을 구별할 수 없었다. 아마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모든 아시아인은 '딩크(Dinks), 국(Gooks), 슬랜트(Slants), 슬로프(Slope)'였다. 당시에 베트남에 있었던 한 미국인은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그들이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국'들은 피도 안 흘리고 고통도 못 느끼고 충성심이나 사랑 같은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p.71)
베트남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실패한 핵심 원인은 그곳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집단 정체성을 간과했다는 데 있다. 아프간에서는 집단 정체성이 국가 대 국가로서가 아니라 민족, 부족, 종족을 기반으로 형성되어 있다. 아프간 국가의 가사에 언급된 부족만 14개다. 그중 가장 규모가 큰 4개 부족은 파슈툰족, 타지크족, 우즈베크족, 하자라족인데 이들 사이에는 오랜 적대와 반복의 역사가 있다. 아프간은 200년 넘게 파슈툰족이 지배했지만 냉전 시기를 거치면서 파슈툰족의 지배력이 차차 줄어 1992년이면 타지크족과 우즈베크족의 연합 세력이 상당한 권력을 갖게 된다. 이런 배경에서,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아 탈레반이 등장한다.
탈레반의 활동은 이슬람 운동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민족 운동이기도 하다. 탈레반 일원의 대다수가 파슈툰족이다. 탈레반은 파슈툰족이 세웠고 파슈툰족이 이끌고 있으며 파슈툰족의 지배력이 위험에 처했다는 인식 속에서 생겨났고 그 인식이 지속적으로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의 원천 역할을 하고 있다. (p.80)
이라크와 유고슬라비아는 개발도상국에서 반복적으로 벌어져 온 패턴의 전형적인 사례다. 오랜 기간 인종적, 종교적 분열이 있었던 나라들, 그리고 특히 국가 정체성이 약한 나라들에서는 급격한 민주주의가 집단 간 증오를 격화시킨다. 득표를 하려는 선동가들은 합리적인 정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종적, 민족적 정체성에 호소하는 것이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한과 불만을 건드려서 집단의 공포와 분노를 활용하는 것이다. 1990년대에 미국이 전 지구적으로 민주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축하하고 있었을 때 인종적, 민족적인 슬로건이 곳곳에서 등장했다. '조지아는 조지아인에게' '에리트레아인은 에티오피아를 떠나라' '케냐를 케냐인에게' '백인은 볼리비아를 떠나라' '세르비아를 세르비아인에게' '크로아티아를 크로아티아인에게' '후투 파워' '러시아에서 유대인을 몰아내자' 등. 너무나 자주, 가난한 다수가 새로이 얻게 된 정치권력을 사용해서 그들이 증오해 마지않는 소수에게 보복을 하고, 소수는 또 소수대로 새로이 권력을 갖게 된 다수의 공격 대상이 될 것을 두려워해서 폭력에 의존한다. 이것은 로켓 과학이 아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부족 정치의 원칙일 뿐이다. (p.125-126)
빈곤 가설을 세운 연구들이 간과한 것은 부족 정치와 집단 정체성이 갖는 결정적인 중요성이다. 빈곤이 늘 폭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극단주의를 파악하는 데서 핵심은 빈곤 자체가 아니라 집단 간 불평등이다.
지난 몇십 년 사이의 주요 테러리즘 운동(스리랑카의 타밀타이거, 러시아의 체첸 분리독립 운동, 나이지리아의 보코하람, 중동의 호전적인 이슬람 운동 등)은 집단 간 불평등과 집단에 대한 권리 박탈, 집단에 대한 모욕과 집단적인 증오의 조건에서 생겨났다. 빈곤 자체만으로는 테러를 일으키지 않는다. 하지만 막대한 불평등이 기존의 인종, 민족, 종교, 분파적인 깊은 분열과 연결될 경우 강렬한 불의, 분노, 좌절의 감정이 널리 퍼지게 되고 앞에서 살펴본 집단 심리학적 현상들 전부가 자극을 받아 활성화된다.
집단 정체성과 부족 정치를 고려하면, 테러 지도자 중에 부유한 집안 출신에 교육 수준도 높은 사람이 꽤 많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좌절하고 모욕당하고 경제적, 정치적으로 주변화된 집단 안에서' 부유하고 교육받은 사람들이었다. 다른 모든 조직과 마찬가지로, 극단주의 조직도 남들보다 여건이 더 낫고 더 야망이 크고 더 카리스마 있고 더 유능한 사람이 지도한다. 이것은 그저 조직이 작동하는 일반적인 방식이다. (P.144-145)
그럼에도 칠레와 우루과이 같은 소수의 국가를 제외하면(칠레와 우루과이에서는 유럽인이 도착하자마자 토착민이 절멸했다) '순수 백인'인 스페인 지배층이 '유색 인종'인 대중을 멸시하는 것은 모든 현대 남미 국가의 매우 뿌리 깊은 특성이다. 멕시코에서는 혼혈인 메스티소가 땅을 소유하거나 성직자가 되는 것이 오래도록 금지됐다. 페루에서는 지식인들도 '인디언은 지금도 앞으로도 기계에 불과하다'고 믿었다. 칠레에서는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칠레의 '백인적 특성' 때문이라고 종종 설명된다. 백인적 특성 덕분에 볼리비아와 페루의 '인디언'들을 무찌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르헨티나에서는 1903년에 한 인기 작가가 메스티소와 물라토는 "순수하지 않고 격세유전으로 반기독교적"이라며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들은 아름답고 창백하고 순수한 스페인계 아메리카를 거대한 나선으로 옭아매고 제약하고 둘러싸는, 히드라의 두 개의 머리와 같다." (p.159-160)
이런 적대와 경멸은 상호적이다. 중서부의 트럼프 지지자들은 진보주의자들을 잘난 척하고, 엘리트주의적이며, 위선적이고 위압적이고, 오냐오냐해 줘서 버릇이 없다고 생각한다. 또 많은 이가 '진보주의자들은 미국을 혐오한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작가 앤 콜터는 진보주의자들을 일컬어 '반역자'라고 불렀다. 콜터에 따르면 "미국 리버럴들은 미국을 혐오한다. 그들은 '성조기 흔드는 사람들'을 혐오한다. 그들은 낙태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혐오한다. 그들은 (9・11 테러 이후) 이슬람을 제외한 모든 종교를 혐오한다. 이슬람 테러리스트도 미국 리버럴보다 미국을 더 혐오하지는 않을 것이다."
요컨대 '백인 미국인'은 하나의 집단이 아니라 둘로 분열되어 있다. '농촌/중서부/노동자 계급'인 백인과 '도시/연안 지역'의 백인 사이에는 상호작용도, 공통점도, 상호 간의 결혼도 너무 없어서, 이들 사이의 차이는 사회과학자들이 말하는 '민족적(ethnic)' 차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들은 자신이 상대와 반대되는 정치 부족에 속해 있다고 생각한다. 애팔래치아 출신 작가 J. D. 밴스는 ⟪힐빌리의 노래⟫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나는 백인이긴 하지만 나를 북동부의 와스프와 동일시하지 않는다. 나는 수백만의 노동자 계급 백인과 나를 동일시한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계이고, 대학을 나오지 못하고 … 조상들은 남부의 노예제 경제에서 일용직 노동자였고, 그다음에는 소작농, 그다음에는 광부였던, 그런 백인들 말이다.'
미국의 부족주의는 도널드 트럼프를 갑자기 백악관으로 밀어 올렸다. 이 부족주의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불평등이 미국 백인들 사이를 어떻게 분열시키고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중서부의 백인이 보기에 '연안 엘리트'는 시장 지배적 소수 집단이다. 그리고 많은 개도국에서 보았듯이 시장 지배적 소수 집단은 반드시 민주주의에 의한 반발을 불러온다. (p.207-208)
오늘날 정체성 정치가 가고 있는 방향에 모든 좌파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문화적 도용에만 온통 초점이 쏠리고 있는 상황에 힘 빠져 한다. 한 진보적인 멕시코계 미국인 법대 학생은 "만약 우리가 옷차림 문제 가지고도 스스로를 상처받게 둔다면 어떻게 주거퇴거 요구서에 대한 트라우마를 다룰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진보 진영은 '늑대다!'를 너무 많이 외쳤다. 모든 것이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이면 아무것도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이지 않게 된다. 그래서 진짜 늑대인 트럼프가 나타났을 때 아무도 그들의 외침을 듣지 않았다." (p.236)
좌파가 우파 부족주의를 끊임없이 지적하고 비난하고 창피를 줬던 것은 득보다 실이 컸는지도 모른다. 트럼프에게 투표했다는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나는 그냥 권위적인 좌파들이 나를 몰아붙이고 언제나 나더러 편견 덩어리라고 말하는 것에 화가 나고 진절머리가 나서 이 결함투성이 후보에게 투표했는지도 모른다." 빌 마허도 이렇게 설명했다. "민주당은 백인 노동자들이 '맨스플레인'을 하고 있고 특권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그들의 문제는 진짜가 아니라고 느끼게 만든다. 하지만 당신의 인생이 엉망이라면 그것은 '진짜 문제'가 맞다." 또 흑인들이 노예제에 대해 백인을 비난하면서 배상을 요구하면 많은 백인은 과거 세대의 잘못에 대해 자신이 부당하게 공격받는다고 느낀다. (p.238-239)
문제의 핵심은 간단하지만 근본적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흑인, 아시아계, 히스패닉, 유대인 등이 미국에서 자신의 인종적, 민족적 정체성에 기반해 자부심과 연대감을 느낄 수 있게 허용된, 아니 독려된 반면, 백인 미국인은 절대로 그러면 안 된다는 경고를 들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부족이 고유하고 자랑스러워할 만한 무언가를 가졌다고 믿고 싶어 한다. 이것이 부족적인 본능의 모든 것이다. 수십 년 동안 미국에서 비백인 인구는 이런 식으로 부족 본능에 빠져들도록 독려받았다. 하지만 백인 미국인은,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백인 정체성이란 누구도 자랑스러워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인기 있는 풍자 블로그 '백인이 좋아하는 것들(Stuff White People Like)'을 운영하는 크리스천 랜더는 이렇게 언급했다. "아 그래, 알았다 알았어. 백인 이성애자 남성인 나는 지구 최악의 존재다." (p.241-242)
래런은 미국을 도덕적이고 예외적인 헌법을 가진, 도덕적이고 예외적인 위대한 나라라고 찬양한다. 그리고 백인 미국이 저질렀던 나쁜 일들은 모두 무시한다. 심지어 노예를 해방시킨 것도 백인 덕이라고 한다. 애초에 그들을 노예로 만든 것이 백인이라는 것은 이야기하지 않고서 말이다.
소수 집단에게 고마워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다. 시혜자가 준 것에 감사하라는 의미고 당신이 빚을 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의 역사에 대한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 기회의 땅을 세웠고 너희를 초대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완벽하게 하지 못했다고 해서 이제 너희가 우리를 악마라고 비난하는 것이냐?
많은 미국인들이 인종주의적이던 과거를 매번 꺼내지는 않는 채로 미국의 역사와 위대함을 찬양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노예제에 대해, '눈물의 길'(인디언 강제 이주)에 대해, 인종 분리 정책에 대해 매번 사과하지 않는 채로 건국의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미국이 자유와 기회의 땅이라는 이야기를 사랑한다. 그런데 미국에서 소수자가 다수가 되면 이 이야기가 달라질지 모른다고 두려워한다. 역사책은 미국을 억압의 땅, 인종주의의 땅, 제국주의의 땅이라고 바꿔 묘사할지도 모른다. 사랑받는 고전 ⟪빨간 머리 앤⟫은 백인 우월주의를 퍼뜨리는 책이라고 금지될지도 모른다. 제퍼슨기념관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오스카 작품상은 <노예 12년> 같은 영화쯤 되어야 탈 수 있게 될지 모른다. 타네히시 코츠의 말을 빌리면, 미국은 '다수주의자 돼지들'의 나라로 추락하게 될지 모른다. (p.246-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