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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차별주의자 / 라우라 비스뵈크 / 심플라이프

 

 우리가 자신에게만 집중하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 우리가 개인적인 행복에만 집중한다면 어떻게 될까? 철학자 한병철의 대답은 명확하다. 우리는 이미 자아실현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상업화하였고 정치적 유아 상태로 되돌아갔다. '성공한 삶'과 현실 정치의 결합은 느슨해져버렸다. 상황을 바꾸기보다 변한 상황에 순응하라는 목소리가 더 높다. 그러나 최고의 인성 계발에 맞춰진 초점은 공동체의 참여를 제물로 삼는다. 사회 문제는 스스로를 챙기고 멋진 인생을 살아야 하는 개인의 문제로 변질된다. 가령 문화 단체에서 무급 인턴으로 일하는 젊은 여성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인턴 자리 하나 얻으려고 그녀는 해외 연수를 다녀왔고 컴퓨터 자격증을 땄다. 그뿐 아니다. 앞으로 이 인턴 경력을 바탕으로 더 좋은 일자리를 구하려면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많은 자격증을 따야 한다. 그런 그녀에게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비슷한 처지의 인턴들과 모여 근로 조건을 논의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고민할 시간이 있을까? 10시간 중노동에 시달리고 퇴근하면 쓰러져 자기 바쁠 것이고, 기껏해야 요가나 몸에 좋다는 샐러드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랠 것이다. 그렇기에 한병철은 말한다. "번아웃과 혁명은 서로를 배제한다." (p.26-27)

 

 미국에서는 1982년에서 2018년 2월까지 무려 97건의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그중 94건을 남성이 저질렀고 2건은 여성이 혼자서, (2016년 12월 샌버너디노에서 발생한) 나머지 1건은 남녀가 함께 저질렀다. 만일 97건 중 94건을 여성이 저질렀다면 어땠을까 한번 상상해보라. 과연 세상이 이렇게 조용했을까? 혹시라도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의 관념이 폭력을 조장하지는 않았을까, 너도나도 소리 높여 비난을 쏟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남성이 폭력 사건의 범인인 경우 사람들은 성별과 그 뒤에 숨은 사회 규범의 중요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대신 초점이 범인의 정신 질환으로 향한다. 질문을 거꾸로 해보면 어떨까? 정말로 정신 질환이 총기 난사 사건의 원인이라면 왜 여학생들은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을까? 왜 하필 백인 남학생들만 범행을 저지를까? 미국에서는 정신 질환이 있어도 정신과 치료를 못 받는 사람들이 많다. 소수 인종, 가난하고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은 더더욱 치료를 꿈도 꾸지 못한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총기 사건은 백인들이 저지를 뿐 아니라 그중에서도 중산층 백인 남성이 대부분이다. 정말로 심리 치료를 제때 못 받아서 질환이 심각해진 것이라면 가난한 소수 인종이나 여성들이 총기를 휘둘러야 마땅하지 않을까? 하지만 통계상 중산층 백인 남성이 대다수다. 특권도, 권력도 가장 많이 누리는 사회 구성원들이 말이다. 따라서 질문이 바뀌어야 한다. '왜 그는 심리 치료를 받지 못했는가?'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백인 남성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p.69-70)

 

 많은 백인 남성들이 스스로를 다문화주의와 페미니즘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그것들로 인해 남성의 주도권과 권위가 위협받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은 요즘엔 남성이 진짜 차별을 받는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남성권리운동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다른 사회 집단이 자결권을 쟁취함으로써 남성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이들은 권력과 정체성과 특혜를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에서 성평등 운동을 폄하하고 페미니스트들을 비난하며 심지어 디지털 공간에서 이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그러나 다른 집단의 권리를 하찮게 여기거나 무시할 때에만 자신이 더 강해진다고 느끼는 것 자체가 거꾸로 약해진 정체성과 힘을 입증한다.
 사실 허약해진 남성성은 어디서나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가령 성과 관련된 사회 문제(가령 한 여성이 남성들에게 여러 차례 괴롭힘을 당했다)가 대두되었을 때 자신은 물론이고 모든 남성이 모욕감을 느낀다고 주장하고, '남자라고 다 그런 건 아니다' '남자들도 그런 일을 당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남성 적대적이거나 남성 차별이라는 식으로 문제의 심각성을 희석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남자 편만 든다면, 그것이 바로 남성성이 약해졌다는 증거이다. 또 구체적인 상황과 무관하게 무조건 여성스럽다는 말을 들을까 봐 겁을 내고(가령 여성적이라고 인식될 수 있는 활동을 피한다), LGBTQ로 분류될지 모른다는 불쾌감을 드러내며(가령 다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자기는 여자를 좋아한다고 외친다), 아무도 안 물어봤는데 자기는 동성애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다닌다.
 자신의 남성성이 튼튼하다면 당당하게 분홍색 외투를 입고 컵케이크를 구울 것이고 남들이 뭐라고 하건 말건 화장을 하고 다니기도 할 것이며, 친구가 슬픔에 빠지면 거침없이 꼭 안아 위로해 줄 것이다. 친구를 안아준다고 해서 동성애자라고 손가락질할 사람도 없거니와 그런다고 해서 당장 동성애자가 되는 것이 아님을 확신할 테니 말이다. 또 설사 남들이 동성애자라고 생각해도 남성성이 훼손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남성성은 겉모습이나 외부의 판단에 좌우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림 없이 튼튼할 테니 말이다. (p.73-74)

 

 체류 허가를 받으려면 영웅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물론 놀라운 용기를 보여준 가사마와 바틸리는 합당한 사례를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과 프랑스에 망명을 신청한 수천 난민들의 가혹한 일상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또 난민이 프랑스인을 구했을 때는 칭찬을 받지만 프랑스 시민이 어려움에 빠진 난민을 구할 때는 체포당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난민을 도운 프랑스 농부 세드리크 에루이다. 2016년 8월 그는 자신의 트럭에 에리트레아와 수단 사람들 여러 명을 싣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간 국경을 넘다가 붙잡혀 구류형을 받았다. 에루는 프랑스의 가치를 지켰을 뿐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난민을 돕다가는 비싼 대가를 치를 수도 있다. 인도주의 정신으로 난민을 도운 사람들이 여러 차례 기소되었다. 돈을 받고 불법으로 난민을 수송하는 범죄자들과 인도주의 정신으로 연대하는 사람들을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 기소 이유이다. (p.88-89)

 

 또 난민을 자연재해에 비유하는 언어 습관 역시 우리의 인식에 큰 영향을 미친다. 난민 물결, 난민 홍수, 난민 강물은 물론이고 난민 사태, 난민 습격 같은 표현도 자주 마주친다. 그런 비유는 무의식적으로 거대한 것, 위협적인 것, 우리 손을 벗어난 것을 암시한다. 따라서 공포와 통제 상실의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홍수는 위험이고, 해결책은 댐을 쌓아 인간 물결의 유입을 막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의식적으로 그런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메시지는 교묘하게 전달되어 우리의 정치적 견해와 행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p.98)

 

 사회학자 빌헬름 하이트마이어는 '집단과 관련된 인간 혐오'에 대해 장기간 연구를 진행해, 사회적 지위가 낮을수록 장기 실업자에 대한 분노가 꾸준히 높아진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얼른 보기엔 좀 놀라운 결과이다. 사회적 지위가 낮으면 교육받을 기회가 적어 전문 지식을 쌓기 힘들 것이고, 그럼 당연히 실업할 위험성도 높다. 따라서 이들이야말로 실업자의 곤란한 처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것이다. 실업이 개인의 책임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이들이 더 실업자의 부정적인 태도를 탓하며,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실제로 많은 실업자들이 자신은 다른 실업자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상황 탓에 일자리를 잃었지만 남들은 자기 잘못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며 자신과 남들을 구분한다. 동일시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집단을 꾸릴 여지가 없어질 것이므로 실업자 조직을 만들어 사회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도 자동적으로 사라지고 만다. (p.111)

 

 현대 사회의 특징은 권력과 지배 상황이 더 이상 물리적 폭력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상징적 폭력은 조용하고 잠재의식적이기에 당하는 사람이 폭력이라고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폭력이다. 멸시의 연출 방식을 통해 상징적 차원에서 빈곤이 고착되기 때문이다. 실업자라는 말을 들으면 모두가 바로 '게으르다'는 스테레오타입을 떠올리게 되고 이런 낙인은 일자리를 얻을 기회를 박탈한다. 따라서 상징적 폭력은 가치의 발전과 그것의 일상적 실현에 일조한다. 부르디외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역시 권력 상황에 좌우된다고 주장한다. 언어는 꾸짖거나 칭찬을 해서 특정 집단의 위계적 위치를 정하는 길을 닦는다. '사회 기생충'이라는 말이 존재한다는 사실부터가 이미 일자리를 잃어 실업 급여를 받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p.117)

 

 고용주에게 착취당하는 것이 싫어 회사를 박차고 나온 바로 그 사람들이 재미있게도 자기 직원들을 착취하는 데에는 망설임이 없다. 스타트업 세상이 직장인의 낙원인 양 사방에서 떠들어대지만 그런 이미지가 허울뿐이라는 사실은 무대 뒤를 살짝만 들여다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짬짬이 즐기는 테이블 축구와 매일 먹을 수 있는 신선한 과일이 좋기는 하겠지만 일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노동 착취를 가릴 수는 없다. 자기 노트북을 들고 세상에서 제일 정신없는 곳에 앉아서 초고속으로 쌓여가는 일거리를 지칠 때까지 처리하고 또 처리한다.
 스타트업 현장에선 불안한 일자리가 일상이고 승진의 기회는 적으며 경쟁은 치열하다. 직원을 관리하는 인사부도 없고 직원 협의회도, 디지털 노동자 노동조합도 없다. 게다가 하는 일도 기존 기업의 업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기존 업무보다 특별히 창의적이거나 혁신적이지 않다. 그러니 이미지로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소리인데, 특히 대학을 졸업하고 조금 더 학생처럼 느긋하게 살고 싶은 젊은이들이 그 이미지에 혹하기 쉽다. 평등한 관계에서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일하고, 일하는 틈틈이 공도 차고 저녁이면 맥주 한잔하러 간다! 매력적이지 않은가? (p.127)

 

 누가 봐도 범죄는 범인의 계층에 따라 다른 취급을 받는다. 범인이 누구냐에 따라 언론의 보도 방식이 달라지고, 그것은 다시 그 범죄를 인식하는 여론에 영향을 미친다. 거리 범죄는 잊을 만하면 뉴스에 등장한다. 그런 범죄가 황색 언론의 일용할 양식이요, 부수를 늘리기 위한 자극적인 양념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지갑을 훔친 사람은 범죄자이지만 상류층의 경제 사범은 '특수 상황'에서 벌어진 스캔들일 뿐이다. 비슷한 범죄를 저질러도 범인이 어느 사회 계층에 속하느냐에 따라서 도덕적 평가와 형량이 달라진다. (p.141)

 

 경제 범죄를 저지른 위대한 이름은 영웅과 신화가 되고, 그들의 삶은 할리우드의 손을 거쳐 영화로 재탄생하며, 그 인물은 누구나 알아야 할 교양 지식이 되고, 그들의 창의력은 감탄의 대상이 된다. 범인들은 영화[<캐치 미 이프 유 캔(Catch Me If You Can)>(2002),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The Wolf of Wall Street)>(2013)]와 TV 드라마에서 성공한 인물로 그려진다. 어디를 가나 젊고 매력적인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스마트하고 창조적이며 시스템을 꿰뚫어 그것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능력자, 출세한 사람, 성공인이다. 그들의 위험한 게임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 사람들은 사회적 손실이 아닌 그들 개인의 고통과 치욕에 더 안타까움을 표한다. 전 국민이 짊어져야 하는 비용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라이프 스타일을 포기해야만 하는 주인공을 비극적으로 여기는 것이다. (p.146-147)

 

 정치에 관심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것은 특권 행위다. 비정치적일 수 있는 것도 특권이기 때문이다. 비정치적이어도 괜찮으려면 — 자신의 성별, 재산, 인종, 성적 지향 덕분에 특권적 지위를 누릴 수 있어서 — 품위 있는 삶과 안전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럴 때는 차별이나 억압 같은 무거운 주제들이 계속해서 현안으로 대두되면 따분하고 피곤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그 우는 소리 좀 그만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그들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흥분할 일이 아니라 우파 포퓰리즘이나 다른 극단적 정당이 권력을 장악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일단 두고 보자고 말하는 것은 위험하지 않은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자랑하는 것과 같다. 그런 행동이 타인에게는 실존적 문제를 제기한다. 나는 결혼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을까? 나는 건강하게 살 수 있을까? 앞으로도 이 나라에 계속 체류할 수 있을까? 나의 신체를 주체적으로 대할 수 있을까? (p.235)

 

 진보 언론들은 교육 수준이 낮은 우파 포퓰리즘 유권자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정신 나간 인간들로 취급해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 진영이 인기를 회복하려면 우리가 그들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들어준다는 기분이 들게끔 해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정치학자들이나 좌파 진영에서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독선의 시작이다. 그 사람들에게 다시 그들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들어준다는 기분이 들게끔 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들어야 한다. 정치가 자신들을 너무 오랫동안 홀대했다는 그들의 기분은 기분을 넘어서는 현실이다. 정치적 결정과 소비 기회에서 아무런 힘도 없다는 그들의 느낌은 막연한 기분이 아니라 진짜 현실이다. (p.243)

 

 한 가지는 명확하다. 불안을 극복하는 최고의 방법은 그 불안과 대면하는 것이다. 불안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상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가령 우파 포퓰리즘이 자주 써먹는 외국인에 대한 불안의 경우 그 낯선 이방인들과 접촉하면 된다. 사회심리학 연구 결과를 보아도 이주민에 대한 입장이 긍정적으로 바뀌거나 이주민을 보다 현실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상대적으로 간단한 조처가 그들과의 접촉이다. 난민을 반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에서 그들을 만날 기회가 없다. 이방인을 향한 적대감이 가장 심한 곳은 그들을 신문에서밖에 만날 수 없는 지역이다. (…) 난민에 대한 입장은 상당 부분 그들을 개인적으로 알 수 있는 기회에 좌우된다. (p.245-246)

 

 

패자의 게임에서 승자가 되는 법 / 찰스 D. 엘리스 / 중앙북스

 

 라모 박사는 폭넓은 통계 분석을 마친 후, 이렇게 요약했다. "프로는 점수를 얻지만, 아마추어는 점수를 잃는다."
 프로 테니스에서는 승자의 행동이 최종 결과를 결정한다. 프로 테니스 선수들이 한참 동안 흥미진진하게 공을 주고받으면서 레이저처럼 정확하게 공을 세게 쳐내면, 어떤 선수는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공을 보내기도 하고 또 어떤 선수는 실수를 범한다. 이 훌륭한 프로 선수들은 거의 실수하지 않는다.
 라모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아마추어들의 테니스 게임은 거의 전적으로 프로들과 다르다. 아마추어는 좀처럼 상대를 이기지 않는다. 대신에 그들은 자기 자신을 이겼다. 사실상 승부는 패자가 결정한다. 방식은 이렇다. 두 선수 간에는 멋진 샷, 장시간 이어지는 흥미진진한 공 주고받기, 얼핏 봐도 기적적인 회생이라곤 거의 없다. 공은 네트에 너무 자주 맞거나 튕겨나가고, 서브를 넣을 때 더블 폴트를 범하는 실수도 드물지 않다. 경기에서 승리하려면 서브에 힘을 더하거나 라인에 더 가까이 붙이기보다 꾸준히 공을 되받아치는 데 주력하여 상대 선수의 실수를 유도해야 한다. 상대방이 훨씬 더 많은 점수를 잃은 덕분에 이 테니스 경기의 승자는 더 높은 점수를 얻는다.
 (…)
 두 경기는 근본적으로 정반대다. 프로 테니스는 승자의 게임이다. 승자의 행동이 승부를 결정한다. 그러나 아마추어 테니스는 패자의 게임이다. 패자의 행동이 승부를 결정짓는데, 패자는 자기 자신을 지도록 만든다.

 

 남들보다 적게 잃는 것이 '승리'의 비결인 패자의 게임에서, 이제 액티브 투자 매니저는 모든 비용과 수수료를 회수해가며 수많은 다른 부지런한 투자 전문가들과 경쟁을 벌인다. 핵심 문제는 명확하다. 집단으로서 전문 투자 매니저들은 너무나 뛰어나서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시장, 즉 그들이 결정한 것을 취합한 컨센서스보다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없도록 만든다.

 

 투자는 냉철한 책임이지 오락거리가 아니다. 투자를 '재미'나 '흥미'로 여겨서는 안 된다. 투자는 석유 정제나 과자, 화학제품, 집적회로 제조와 같은 지속적인 과정이다. 만약 그 과정에서 무언가가 '재미'있다면, 거의 틀림없이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점잖은 무시는 대다수 투자자에게 장기적인 성공의 비결이 된다.
 주식시장에서 가장 큰 도전은 미스터 마켓이나 미스터 밸류가 아니다. 가장 큰 도전은 보이지도 않고 측정할 수도 없다. 그것은 투자자인 우리 개개인의 감정적 무능함 안에 숨어 있다. 10대 아이들을 키우는 일처럼 투자는 차분히 인내심을 유지한 채 장기적 관점으로 목표를 지속해야 이익을 얻는다. 투자의 가장 큰 리스크는 거의 언제나 투자자의 단기적인 행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모든 투자자에게 가장 중요한 규칙이 된다. 투자할 때 가장 어려운 일은 지식의 문제가 아닌 감정의 문제다.

 

 기량이 뛰어난 경쟁자가 많을수록 그들 중 누군가가 일관성 있게 탁월한 실적을 낼 가능성은 낮아진다(중요한 것은 전 세계적으로 전문적인 투자에 뛰어드는, 교육을 잘 받은 의욕 넘치는 사람들의 수가 경이로울 정도로 많다는 것이다). 효율적인 시장에서 가격 변화는 '랜덤 워크(random walk)'라는 패턴을 따른다. 이것은 시장을 가까이에서 관찰하는 사람들마저 자기들이 이익을 낼 수 있는 미래 가격 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증권 가격 변화의 패턴을 찾아낼 수 없다는 뜻이다.

 

 투자할 때 강한 방어는 강하게 공격할 수 있는 최고의 밑바탕이 된다. 따라서 항상 편안함 영역과 역량 영역 안에서 머물러야 한다. 그곳이 당신의 재산이다. 따라서 마땅히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곳을 대하라. 당신에게 필요한 실력을 갖추고 또한 계속 이성적인 상태임을 경험으로 아는 경우에만 투자해야 한다.
 투자는 과정이다. 모든 지속적인 과정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투자는 매우 훌륭하고 지속적인 과정에서 비롯된다. 만약 관찰자의 주의를 끄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 과정에는 문제가 있다. 지속적으로 훌륭한 과정은 결코 '재미있는' 일이 되면 안 된다.

 

 

DRIVE 드라이브 / 다니엘 핑크 / 청림출판

 

 '만약-그러면'의 조건적 보상은 사람들의 자율성 일부를 박탈한다. 재미 대신 돈 때문에 마차를 모는 신사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더 이상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게 된다. 그때 '동기'라는 양동이의 밑바닥에 구멍이 뚫리고, 즐거움의 원천이 되던 행위는 그 구멍으로 빠져나갈 것이다.
 (…)
 주도적인 행동과학서에서 언급된 것처럼 "사람들은 보상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의 동기와 행동을 증진시키는 혜택을 얻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 그 행동에 대한 내재 동기가 잠식되는 의도치 않은 숨겨진 비용이 초래된다." (p.56-57)

 

 외재 동기를 근본적으로 악한 것으로 파악하는 이들도 있으나 경험상 올바른 주장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본래부터 흥미롭거나 창의적이며 고귀한 일에 보상을 뒤섞다가는, 다시 말해서 동기의 특정 과학을 이해하지 못한 채 마구잡이로 보상을 제시했다가는 위험천만한 게임을 초래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그러면'의 조건적 보상은 득보다 실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진정한 동기의 요인(자율성, 숙련, 목적)을 무시한다면 우리 각자가 성취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긋게 될 것이다. (p.70)

 

 외적 보상을 유일한 중요 목적으로 설정하게 되면 사람들은 방법이 아무리 추악하더라도 상관하지 않고 지름길을 선택하기도 한다는 문제가 불거진다. 현대사회의 특성으로 여겨질 정도인 추문과 부정행위도 대부분 이런 지름길과 관련되어 있다. 기업의 간부들은 직원들에게 성과급 보너스를 주지 않기 위해 회사의 4분기 수익을 조작한다. 고등학교의 진학담당관은 대학 입학률을 높이기 위해 학생들의 성적표를 허위로 작성한다. 운동선수들은 득점을 더 많이 올리고 높은 성과급을 타기 위해 자기 몸에 직접 스테로이드제를 투여한다.
 이런 방법과 내재 동기로 유발되는 행동을 비교해보자. 행동 자체가 보상이 되는 경우, 예컨대 배움을 심화한다거나 고객을 즐겁게 해주고 최선을 다하는 것과 같이 이런 일에는 지름길이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목적지로 가는 유일한 길은 절대로 저급하지 않다. 비윤리적으로 행동했다가 이득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경쟁자가 아니라 바로 본인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비윤리적인 행동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p.72-73)

 

 주동자는 대리인에게 보상을 제시함으로써 그 일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을 알린다(바람직한 일이라면 대리인에게 굳이 자극을 제시할 필요가 없다). 이 최초의 신호와 그에 수반되는 보상으로 인해 주동자는 빠져나가기 힘든 길에 억지로 투입된다. 보상이 지나치게 소소하면 대리인이 응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주동자가 대리인을 단번에 행동하게 만들 정도로 매혹적인 보상을 제공했을 경우 그는 "두 번째에도 다시 보상을 제시해야만 한다." 한 번 간 길을 되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p.77)

 

 그다지 흥미롭지 않고 창의적인 사고도 별로 필요하지 않는 기계적인 일에서 보상은 해로운 부작용 없이 동기유발제 역할을 한다. 이 점은 사실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라고 하겠다. 에드워드 디씨와 리처드 라이언, 리처드 코스트너가 설명했듯이 "따분한 일의 경우에는 보상이 사람들의 내재 동기를 잠식하지 않는다. 잠식당할 만한 내재 동기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거의 없기 때문이다." (p.88-89)

 

 필수조건 : 외부의 보상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어야 하며, 일이 완성된 후에 제시되어야 한다.
 어떤 일을 시작하면서 끝난 다음에 주겠다며 상을 제시하면 사람들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보상을 얻는 데 더 관심을 보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일을 완성한 후에 보상을 제시하면 위험도가 줄어든다. (p.95)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던 라이언은 당시 막 징병을 모면한 상태였다. 그는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을 느끼면서 외상 후 스트레스 질환으로 고통받는 베트남 참전 퇴역군인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임상의가 되려는 목적으로 로체스터대학교에 오게 되었다.
 그는 한 세미나에서 어떤 교수가 내재 동기의 주제에 대해 탁자를 치면서까지 격렬하게 부정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 정도로 반발이 심한 주제라면 틀림없이 흥미로운 주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후에 라이언 교수는 필자에게 말했다. (p.101)

 

 6개월 혹은 한 살 정도의 아기 중에서 호기심이 없고 자기주도적이지 않은 아기를 본 적이 있는가?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인간은 바로 이런 식으로 상자에서 나온다. 열네 살이나 마흔세 살된 인간이 수동적이며 타성에 젖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수동적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디폴트 세팅에서 무언가가 튕겨 나왔기 때문이다.
 경영이 바로 그 '무언가'일 수 있다. 직장에서 상사가 부하직원을 대우하는 방식이나 학교와 가정, 그 외 우리 삶의 방식에서 경영의 윤리가 문제를 야기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인간의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추측되는 수동적인 타성에 경영이 반응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혹은 경영이 인간의 디폴트 세팅을 바꾸고 이런 상태를 유발할지도 모른다. (p.124-125)

 

 사람들은 직장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자주 좌절한다. 해야 할 일이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면 불안이 엄습하고, 반면 자신의 능력에 미치지 못하면 지루함이 찾아온다.
 그러나 둘의 조합이 절묘하게 들어맞을 때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몰입의 본질이다. 골디락스 업무는 질서와 무질서 사이의 칼날에서 사는 것, 즉 화가 프리츠 숄더의 표현대로 '사고와 훈련 사이의 줄타기 하는 것'이라는 강력한 경험을 제시해준다. (p.167-168)

 

 숙련으로 가는 길이 몰입처럼 근사하긴 하지만,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를 더욱 잘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그 여정이 무지개가 떠있는 꽃길은 아니다. 그 여정이 꽃길이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것이다. 숙련은 고통스러우며 그다지 재미가 없을 때도 많다. 이것은 전문가들의 성취를 연구해서 숙련을 지원해주는 요인을 밝혀낸 심리학자 앤더스 에릭슨의 연구결과이기도 하다.
 에릭슨은 "예전에는 타고난 재능이라 믿어졌던 많은 특징들이 실제로는 최소한 10년의 격렬한 연습 결과"였다고 지적한다. 운동이나 음악, 경영에서 숙련에 이르려면 오랜 시간(일주일이나 한 달이 아니라 10년)의 노력(어렵고 고통스러우며 힘들며 모든 것을 소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회학자 다니엘 챔블리스도 에릭슨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이를 '탁월함의 일상성'이라고 칭한다. 챔블리스는 올림픽 수영선수들을 3년간 연구한 후에 최고의 업적을 이룬 선수들이 대회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일상적인 활동에 시간과 노력을 가장 많이 들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웨스트포인트의 연구자들이 아이큐나 표준화 시험결과보다 투지가 학점을 가장 정확하게 예측한다고 밝혀낸 것도 바로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들의 설명대로,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쉽게 이해되지만, 목표를 바꾸지 않고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은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 어떤 분야에서도 높은 성과를 이루려면 재능만큼이나 투지가 필요하다."
 (…)
 박사학위는 없지만 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의 '농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또 다른 박사 줄리어스 어빙도 이와 비슷한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프로가 된다는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 날에도 열심히 한다는 뜻이다." (p.175-177)

 

 세잔의 최고 걸작은 대부분 말년에 완성되었다. 예술가의 생애를 연구한 시카고대학교의 경제학자 데이비드 갤런슨에 의하면, 세잔이 최고의 작품을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한 평론가는 세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림의 궁극적인 총합이 한 순간에 드러나는 경우는 절대로 없었다. 오히려 그는 무한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그 총합을 향해 다가갔다. 그는 여러 시각으로 옮겨가면서 슬그머니 접근해갔다 … 그에게 총합이란 도달하지는 못하더라도 영원히 접근하며 나아가는 점근선을 의미했다."
 이것이 바로 숙련의 본성이다. 숙련은 점근선이다.
 우리도 숙련에 접근할 수 있다. 정신을 집중하고 숙련 가까이로, 정말로 가까운 데까지 다가갈 수 있다. 그러나 세잔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절대로 숙련 그 자체를 만나지는 못한다. 숙련을 완전하게 실현하기란 불가능하다.
 (…)
 숙련이라는 점근선은 좌절감을 심어준다. 우리는 완전히 얻지도 못할 것을 향해 왜 손을 뻗는 것일까? 하지만 이 점이야말로 점근선의 매력이다. 왜 손을 뻗지 않겠는가? 숙련을 달성한다기보다 숙련을 추구한다는 데 즐거움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의 손아귀에서 항상 벗어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숙련의 매력이다. (p.178-179)

 

 더욱이 칙센트미하이는 사람들이 여가를 즐기기보다 업무에 충실할 때 몰입상태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는 놀라운 결과를 얻었다. 업무 중에는 자기목적을 경험할 수 있는 구조(분명한 목표, 즉각적인 피드백, 자신의 능력과 조화를 이루는 도전)를 갖춘 것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더 즐길 뿐만 아니라 더 잘하게 된다.
 그런데도 많은 회사가 일부러 직원들에게서 이런 경험을 박탈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반면 골디락스 업무를 더 많이 제공하고 톰소여 효과의 긍정적인 면을 채택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조직은 자체의 명분을 살리고 구성원들의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다. (p.182)

 

 필자는 칙센트미하이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면서 어린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아이의 삶에는 자기목적의 경험이 넘쳐난다. 아이들은 여러 종류의 몰입 순간을 향해 질주한다.
 아이들은 즐거움에 사로잡혀 힘이 넘치고, 가능성을 추구하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으며, 웨스트포인트 생도처럼 자신의 일에 전념한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숙련을 추구하면서 두뇌와 몸을 이용해서 탐색하고 주변 환경에서 피드백을 얻는다. 하지만 삶의 어느 시점에 도달하면 아이들은 더 이상 그러지 않는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끄러워진 것이다"라고 칙센트미하이는 설명한다.
 그야말로 엄청난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당신과 나, 그리고 일을 책임지는 다른 모든 어른들이야말로 성숙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어른들이 왜 그 정도까지 일을 망쳤을까를 달리는 기차 안에서 고민하던 어린 칙센트미하이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의 환경이 그때보다 나아졌을지 몰라도 그 어린 소년의 통찰력은 여전히 정확하게 적용된다.
 칙센트미하이는 아이들을 자기 마음대로 하게 놔두면 피할 수 없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결국 몰입을 추구하게 된다고 말한다. 우리 모두 그렇게 해야 한다. (p.183-184)

 

  • 신중한 연습에는 성과를 증진시킨다는 한 가지 목적이 있다는 점을 잊지 말자. "몇 년 동안 매주 한 번씩 테니스를 치는 사람은 매번 똑같은 것을 해도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신중한 연습이란 자신의 성과에 변화를 가져오고,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면서 매번 조금 더 높은 곳에 도달하기 위해 힘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에릭슨은 말한다.
  •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반복이 중요하다. 뛰어난 농구선수들은 팀의 연습이 끝날 무렵에 자유투를 열 번이 아닌 500번을 연습한다.
  • 꾸준하고 비판적인 피드백을 구한다. 자신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모르면 어느 부분을 증진시켜야 할지도 모른다.
  • 더 노력해야 하는 부분에 집중 투자한다. 우리는 대다수가 이미 잘하는 것에 집중하지만 "더 잘하는 사람은 자신의 약점을 공략한다"고 에릭슨은 말한다.
  • 연습 과정이 정신과 육체를 소진시킬 수 있다는 데 미리 대비한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신중한 연습에 전념하는 사람이 드물긴 해도 효과를 보는 것이다. (p.218-219)

 

 

절대 성공하지 못할 거야 / 마크 랜돌프 / 덴스토리

 

 화이트보드 앞에서 사업 구상을 하는 게 주차장에서 하키 경기를 하거나 골프 연습장에서 장타를 날릴 때보다 훨씬 좋았다. 화이트보드 앞에서 생각해낸 구상이 모두 시원치 않아도, 크리스티나와 테가 조사해보니 내가 한밤중에 떠올린 생각이 터무니없다는 사실이 밝혀져도, 우리는 결국 좋은 사업 구상을 찾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지하실로 내려가 기차를 만들던 아버지처럼 그 과정 자체가 즐거웠다. 우리는 뭔가를 계획하고 있었고, 언젠가는 만들어낼 수 있었다.

 

 '우리가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낸 CD가 망가지지 않은 것은 운이 좋아서였다. 다른 우체국에서 보냈다면, 리드가 로스가토스나 새러토가에서 살았다면, CD가 망가질 수도 있었다. 세상에, 그가 사는 샌타크루즈가 아니라 내가 사는 스코츠밸리에서 CD를 보냈다면 사정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 책을 쓸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맞춤형 샴푸에 관한 책을 썼을 수도 있다.

 

 이해되는가?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정말 많았다.
 하지만 그 일을 하면서, 계획을 세우면서, 문제를 해결하면서, 퍼즐을 풀면서 진정한 기쁨을 느꼈다. 내 앞에 놓인 과제가 너무 많았다. 준비하고 만들어야 할 자잘한 일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미래를 생각하면서 불안해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사무실에 있을 때는 불안감이 모두 사라졌다. 간신히 사들인 새집에서 수리해야 할 침실들을 잊어버렸다. 아들의 사립학교 수업료 청구서도 잊었다. 얼굴을 찌푸리며 '개똥 같은 생각'이라고 말하던 알렉상드르 발칸스키도 잊었다.
 공들여 기차를 만들던 아버지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모든 과제를 한 줄로 늘어놓고, 모든 문제를 샅샅이 살핀 다음,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애쓰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나는 지하실에서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얼마 후에는 모두를 초청해 내가 만든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음이 울적해져 과거의 용감했던 순간을 떠올려야 할 때, 나는 먼 산봉우리까지 위험하게 올라갔던 때나 아슬아슬하게 강을 건넜던 때를 생각하지 않는다. 리드의 차 안에서 사업 구상을 주고받던 출근길이나 머뭇거리는 인재에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미래를 알 수 없는 스타트업에 와서 일하라고 설득하던 호비 레스토랑에서의 첫 회의를 생각하지도 않는다. 스타트업을 처음 시작해 수백 번 실패하면서 시험하던 때를 떠올리지도 않는다.
 대신 그날 밤 사무실에서 나오던 때를 떠올린다. 천천히 운전하면서 스코츠밸리의 텅 빈 거리를 거쳐 집으로 돌아가던 때를 생각한다. 더 이상 내가 세운 회사의 단독 CEO가 되지 않기로 했다고 아내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준비하면서 운전했다. 그때 나는 합당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랜돌프 집안의 성공 규칙
  1. 시키는 일보다 최소한 10% 이상은 더 해라.
  2. 절대로 누구에게든 모르는 일에 관해 사실처럼 이야기하지 마라. 항상 조심하면서 자신을 다스려라.
  3. 윗사람에게든 아랫사람에게든 항상 배려하면서 예의 바르게 행동하라.
  4. 트집을 잡거나 불평하지 마라. 언제나 진지하게 건설적으로 비판하는 자세를 유지하라.
  5. 결정을 내릴 만한 근거가 있다면 결정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마라.
  6. 가능하다면 무슨 일이든 숫자로 정리하라.
  7. 마음을 열어두되 끊임없이 의심하라.
  8. 시간을 꼭 지켜라.

 

 

인류세: 인간의 시대 / 최평순, EBS 다큐프라임 「인류세」 제작진 / 해나무

 

 "플라스틱이 수명이 다하면 할 수 있는 건 세 가지예요. 재활용을 해서 다른 유용한 제품을 만들 수 있고, 소각할 수도 있죠. 아니면 버리는 거죠. 운이 좋으면 위생적인 매립지에 버려질 거고 그렇지 않으면 잘 통제되지 않는 폐기물 더미나 바다 같은 곳으로 가게 되죠."
 이 세 가지의 비율은 재활용 9퍼센트, 소각 12퍼센트, 폐기 79퍼센트다. 한마디로 대부분은 버려진다.
 "플라스틱을 지구에서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은 소각입니다. 재활용하면 활용은 다시 할 수 있지만 여전히 거기 존재하거든요. 즉 소각하지 않는 한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플라스틱은 평생 우리와 같이 살게 될 거예요." (p.148-149)

 

 예를 들어 아이스커피를 테이크아웃할 때 쓰는 일회용 컵의 경우, 상품별 경도와 투명도 및 색이 다르고 업체명이나 로고가 인쇄된 경우도 많아 재활용이 전무하다고 보면 된다. 게다가 플라스틱 자체가 저렴하기 때문에 재활용한 제품은 더 쌀 수밖에 없다. 여간해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시민이 열심히 분리배출해도 수거—선별—파쇄—세척—압축—성형 등 일련의 재활용 과정 속에서 상당량이 탈락한다. 제품 생산 과정에서 재활용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라 시민과 재활용 업체가 노력해봐야 기대만큼 잘 안 된다. (p.156)

 

 현대 선진 자본주의 국가라면 자고로 쓰레기 정도는 잘 감춰야 할 암묵적인 의무가 있다. 국민들은 더러운 것을 보기 싫어한다. 내가 사용하고 버리는 것들의 끝을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 소비의 진실을 알리는 것은 자본주의 시스템에게 있어서도 득이 될 것이 없다. 우리는 더 많이 사고 더 많이 버려야 한다. 그래야 돈이 돌고, 경기가 좋아지고, 국가가 발전한다.
 우리가 자는 사이 쓰레기 수거 차량이 골목골목을 다니고, 아침이 되기 전에 모든 쓰레기 수거 및 청소가 끝난다. '샛별 배송'의 원조는 '샛별 수거'라 할 만하다. 수거한 쓰레기는 도심 외곽에 위치한 매립지에 모이는데, 밖에서 잘 보이지 않게 쓰레기를 쏟자마자 바로 흙으로 덮어서 가린다. 전 과정이 은밀하고 신속하다. (p.245-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