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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다는 착각 / 마이클 샌델 / 와이즈베리

 

 물론 실제로 보면 그렇게 문제가 간단하지가 않다. 돈은 뒷문뿐만 아니라 정문 앞에도 떠돈다. 실력대로라고? 사실 실력은 경제적 우위와 구별해서 보기가 어렵다. SAT처럼 표준화된 시험은 그 자체로 능력주의를 의미하며, 따라서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배경을 가진 학생이라 할지라도 지적인 장래성을 보일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SAT 점수와 수험생 집안의 소득이 비례 관계를 나타낸다. 더 부유한 집 학생일수록 더 높은 점수를 얻을 가능성이 크다.
 부자 부모는 자녀를 SAT 모의 응시 과정에만 넣는 것이 아니라, 사설 입시 카운슬러를 고용해 입시 스펙을 다듬어준다. 또한 무용, 음악 레슨을 받게 해주고 펜싱, 스쿼시, 골프, 테니스, 조정, 라크로스, 요트 등의 엘리트 체육을 익히게 해준다. 대학 운동부에 뽑히기 쉬운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해외 봉사활동도 알선해준다.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배려심'을 어필하기 위해서다. 이런 것들은 다 부유한 부모가 자기 자녀에게 명문대 입학 자격을 따주기 위해 벌이는 '돈이 많이 드는 일들'이다.

 

 불평등한 사회에서 꼭대기에 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공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믿고 싶어 한다. 능력주의가 원칙이 되는 사회에서는 승리자가 '나는 나 스스로의 재능과 노력으로 여기에 섰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이것이 바로 입시 부정 학부모들이 자녀에게 선물하려던 것이었다. 그들이 단지 자녀에게 부를 물려줄 마음뿐이었다면 신탁기금 등을 포함한 재물을 주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뭔가 다른 것을 원했다. 명문대 간판이 줄 수 있는 '능력의 지표' 말이다.
 (…)
 능력주의적 대입이 갖는 특질은 뚜렷해 보인다. 정당한 스펙으로 입학한 사람은 자신의 성취에 자부심을 가질 것이며, 이것은 자기 스스로 해낸 결과라 여길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 역시 문제가 있다. 그러한 입학이 헌신과 노력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정말로 오직 '자기 스스로' 해낸 결과라고 볼 수 있을까? 그들이 스스로 해내도록 도와준 부모와 교사의 노력은 뭔가? 타고난 재능과 자질은 그들이 오직 노력으로만 성공하도록 했을까? 우연히 얻은 재능을 계발하고 보상해줄 수 있는 사회에 태어난 행운은?
 노력과 재능의 힘으로 능력 경쟁에서 앞서 가는 사람은 그 경쟁의 그림자에 가려 있는 요소들 덕을 보고 있다. 능력주의가 고조될수록 우리는 그런 요소들을 더더욱 못 보게 된다. 부정이나 뇌물, 부자들만의 특권 따위가 없는 공정한 능력주의 사회라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런 결과를 해냈다'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준다. 명문대 입학을 위해 요구되는 여러 해 동안의 노력 역시 그들이 '나의 성공은 내 스스로 해낸 것'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준다. 그리고 만약 입시에 실패하면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닌 자기 자신의 잘못'이라는 인식도 심어주게 된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상승 찬가'는 이제 속빈 강정이 되었다. 오늘날의 경제 상황상 사회적 상승은 결코 쉽지 않다.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미국인은 대개 가난한 성인이 된다. 소득 기준 하위 5분위 가정 출신자는 스무 명 가운데 한 명만 상위 5분위에 이르렀고, 대부분은 중산층에도 이르지 못했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일은 미국보다 캐나다, 독일, 덴마크, 그 밖의 유럽 국가에서 더 많다.
 이는 불평등에 대해 미국이 오랫동안 변명해온 '계층 이동 가능성'이라는 말과 들어맞지 않는다. 미국인들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미국은 계급이 뚜렷한 유럽 사회에 비해 불평등 걱정을 덜 해도 돼. 우리 사회에서는 계층 상승이 가능하기 때문이지." 미국인의 70퍼센트는 '가난한 사람이 자력으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으며, 유럽인은 35퍼센트만이 그렇게 여긴다. 이런 사회적 이동성 관련 믿음은 미국이 주요 유럽 국가들에 비해 왜 그처럼 복지제도에 소극적인지 설명해준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적 이동이 가장 잘 일어나는 국가들은 평등 수준 또한 가장 높은 국가들인 경우가 많다. 이를 보면 사회적 상승의 능력은 가난이 주는 압박에서 벗어나려는 개인의 의지보다는 교육, 보건을 비롯해 직업 세계에서 개인을 뒷받침해 주는 수단에 대한 접근성에 달려 있는 듯 보인다.

 

 도덕적으로 보자.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시장 중심 사회가 성공자에게 후하게 베풀기 마련인 어마어마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능력주의 윤리의 핵심은 '통제 불가능한 요인에 근거한 보상이나 박탈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정한 재능의 소유(또는 결여)를 순전히 각자의 몫으로 봐도 될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재능 덕분에 상류층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그와 똑같이 노력했지만 시장이 반기는 재능은 없는 탓에 뒤떨어져 버린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능력주의 이념에 찬성하며 그것을 자신들의 정치 신념으로 삼는 사람들은 이러한 도덕적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 그들은 또 더 큰 정치적 의미를 갖는 문제도 외면한다. 승자들 가운데, 그리고 패자들 가운데 능력주의 윤리가 부추기는 도덕적으로 좋지 못한 태도의 문제다. 능력주의 윤리는 승자를 오만으로, 패자들은 굴욕과 분노로 몰아간다. 이러한 도덕 감정은 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스트적 반항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이민자들이나 아웃소싱에 대한 반항 차원을 넘어, 포퓰리즘의 불만은 능력주의의 폭정을 향한다. 그리고 그 불만은 정당화된다.

 

 아래쪽에서 올려다볼 때, 엘리트의 오만은 짜증나지 않을 수 없다. 그 누구도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서고 싶지 않다. 그러나 능력주의 신앙은 그들이 입은 상처에 굴욕까지 보탠다. 자신의 곤경은 자신 탓이라는 말, "하면 된다"라는 말은 양날의 검이다. 한편으로는 자신감을 불어넣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욕감을 준다. 승자에게 갈채하며 동시에 패자에게 조롱한다. 패자 스스로마저도 말이다. 일자리가 없거나 적자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나의 실패는 자업자득이다. 재능이 없고 노력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헤어나기 힘든 좌절감을 준다. 이런 점에서 굴욕의 정치는 부정의의 정치와 다르다. 그것은 포퓰리즘의 반격에 기름을 붓는 분노와 울분을 언제든 일으킬 잠재력이 있다. 도널드 트럼프는 자신이 억만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분노를 잘 이해했으며 잘 써먹었다. 입만 열면 "기회" 운운하는 버락 오바마, 힐러리 클린턴과 달리 트럼프는 그 말을 거의 안 썼다. 대신 그는 승자와 패자에 대해 거친 표현을 퍼부었다(흥미롭게도 사회민주주의 포퓰리스트인 버니 샌더스 역시 '기회'나 '사회적 이동성'은 거의 말하지 않는다. 대신 부와 권력의 불평등만 이야기한다). 집권 엘리트들은 지금껏 '대학 학위야말로 성공의 길이자 사회적 명망의 기반'이라고 가치를 부여해 왔기 때문에, 능력주의가 오만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그 때문에 대학을 못 간 사람에게 고약한 낙인이 찍히게 됨을 나 몰라라 한다. 그러다 보니 포퓰리즘이 터져 나오고 트럼프가 승리할 수 있었다.

 

 마이클 영에게 능력주의는 추구해야 할 이상적 목표가 아니라 사회적 불화를 불러오는 제도였다. 수십 년 전, 그는 지금 우리의 정치를 오염시키고 포퓰리즘의 분노를 부채질하는 가혹한 능력주의 논리를 꿰뚫어 보았다. 능력주의의 폭정으로 상처를 입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문제는 '월급이 오르지 않는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 명망이 추락했다'는 것이다.

 

 "운 좋은 사람은 운이 좋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경우가 드물다." 막스 베버는 이렇게 보았다. "이를 넘어서, 그는 자신이 '그럴 만하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이들에 비해 '그럴 자격이 있다'고 확신하기를 바란다. 그는 또한 운이 나쁜 사람들도 자신의 당연한 업보일 뿐이라고 믿기를 바란다."

 

 내가 대학생들 사이에서 능력주의 정서를 느낀 것은 미국에서만이 아니다. 2012년 나는 중국의 남동쪽 해안 지역에 있는 샤먼대에서 강연을 했다. 강연 주제는 '시장경제에 대한 도덕적 제한'이었다. 최근의 신문에서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사느라 자기 신장을 판 중국 10대 학생 기사를 읽었던 나는 학생들에게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했다. 뒤이은 토론에서 많은 학생들은 자유지상주의적 견해를 나타냈다. 그 10대 학생이 강압이나 협박에 의하지 않고 자유의사에 따라 자기 신장을 팔기로 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 입장에 반대한 일부 학생들은 가난한 사람의 신장을 사서 부자가 생명을 연장하는 일은 불공평하다고 주장했다. 강연이 끝난 뒤 한 학생은 내게 비공식적으로 답을 주었다. 부를 이룩한 사람은 그만한 능력을 입증한 것이며, 따라서 생명을 연장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후안무치한 능력주의 사고의 응용에 깜짝 놀랐다. 돌이켜 보면 이런 주장이나 개인의 건강과 부가 신의 은총의 증표라고 하는 번영 복음 신앙이나 도덕적으로 동색임을 알 수 있다. 물론 내게 그런 답을 들려준 중국 학생은 아마도 청교도 사상이나 섭리론 전통과는 무관할 것이다. 그러나 그와 그의 학우들은 중국이 시장경제로 전환할 때 자라났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사회적 책임은 개인에게 주어져야 마땅하다는 담론은 복지국가 관련 논쟁에서 두드러졌다. 20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복지국가를 둘러싼 논쟁은 연대(solidarity)와 관련되었다. 다시 말해 우리 시민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빚지고 있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한 쪽에서는 더 강한 연대를 주장했고, 다른 쪽에서는 보다 제한적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복지국가 관련 논쟁의 중점은 연대보다는 '불우한 사람들이 자신의 불우함에 얼마나 책임을 져야 하느냐'로 옮아갔다. 한 쪽에서는 개인 책임을 더 강하게 주장했고, 다른 쪽에서는 그보다 덜 책임지는 게 마땅하다 여겼다.
 개인 책임을 확대해서 보는 관점은 능력주의 가정이 먹히고 있음을 나타낸다. 우리 삶에 대해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이 크면 클수록 우리 삶의 결과에 대해 찬양하거나 비하할 소지 또한 커진다.
 복지국가에 대한 레이건-대처식 비판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복지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따라서 공동체는 단지 자기 책임이라 할 수 없는 불운에 대해서만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자신의 실수가 아닌 일로 힘겨워하는 사람을 결코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반드시 우리의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레이건은 언젠가의 연두 교서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러나 복지의 굴레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구원한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도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그 자신의 실수가 아닌 일로"라는 문구는 그 배경 사상을 잘 보여준다. 마치 관대함에 대한 이야기 같지만 "그 자신의 실수가 아닌 일로" 힘겨워하는 사람에게만 공동체의 도움을 주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
 정부의 역할을 줄이려고 했던 로널드 레이건은 이 문구를 그의 어떤 선임 대통령들보다 많이 사용했다. 그러나 그 후임인 두 사람의 민주당 대통령인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는 레이건보다 두 배나 많이 사용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레이건처럼 은연중에 도움 받을 자격이 있는 가난한 사람과 그런 자격이 없는 가난한 사람을 구분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힘에 맞서 싸우는 사람은 정부 보조를 받을 만했다. 다만 불우해서 가난해진 사람은 자격이 없었다.

 

 오바마는 2000년대 초에 전문직업인들의 상식이 되어 버린 이런 능력주의적 사고의 기수나 다름없었다. 조너선 알터의 글에서처럼, "언젠가부터 오바마는 최고 지위의 전문직업인들은 공정한 '선별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빠져버렸다. 그 선별 과정은 그와 미셸이 아이비리그에 진학하도록 해준 과정이기도 하기에, 이는 곧 그런 과정을 거친 사람들의 높은 지위를 정당화해주는 것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의 임기 첫 해를 다룬 책에서 알터는 "오바마가 지명한 고위직들의 사분의 일이 어떤 식으로든 하버드와 연관이 있고(졸업자거나, 교수이거나), 90퍼센트 이상은 대학원 학위의 소유자"라고 지적했다. "낭중지추에 대한 오바마의 믿음은 확고하다. 그 자신이 위대한 미국의 전후 능력주의 산물이기 대문에 그는 스스로 딛고 오른 계층 이동 사다리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정부에 비대졸자가 거의 없는 상황은 능력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그러나 전례가 없던 일은 아니다. 대부분의 근로 인구가 투표권을 갖기 이전에도 그랬음을 되돌아보는 건 다소 씁쓸할 수 있다. 오늘날 유럽 의회의 높은 고학력자 비율은, 19세기 말 재산 기준으로 투표권을 제한했던 때와 비슷하다.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에서 19세기 중반과 후반의 국회의원들은 대부분 대졸자였다.
 그런 양상은 보통선거가 이루어지고 사회주의 및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의회 구성을 민주화한 20세기에 바뀌었다. 192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 비대졸자 국회의원들은 현저히 늘어 입법부의 삼분의 일에서 이분의 일까지 차지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대졸자 비율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 비대졸자 국회의원은 과거 귀족과 지주들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고학력 대졸자들이 정부를 이끌어간다면 환영할 일이지 문제될 게 무엇이냐고 할지 모른다. 물론 다리를 지을 때는 가장 유능한 엔지니어를, 맹장수술을 할 때는 가장 숙련된 의사를 원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최고의 대학을 나온 국회의원을 원하면 안 될 까닭이 뭔가? 빵빵한 학력을 갖춘 고학력 리더들이 더 좋은 정책을 개발하고 더 합리적인 정치 담론을 이루지 않겠는가?
 아니다. 꼭 그렇지는 않다. 미국 연방의회와 유럽 국회들에서 오가고 있는 정치 담론을 슬쩍만 들어 봐도 그런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좋은 통치는 실천적 지혜와 시민적 덕성을 필요로 한다. 공동선에 대해 숙고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것도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함양될 수 없다. 최고의 명문대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최근의 역사적 경험은 도덕적 인성과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정치 판단 능력과 표준화된 시험에서 점수를 잘 따고 명문대에 들어가는 능력 사이에 별 연관성이 없음을 보여준다. '최고의 인재들'이 저학력자 동료 시민들보다 통치를 잘한다는 생각은 능력주의적 오만에서 비롯된 신화일 뿐이다.

 

 롤스는 "차등의 원칙은 '자연적 재능의 분배 상태가 공동 자산이며, 그 분배에서 비롯되는 편익은 무엇이든 공동체적으로 향유되어야 한다'는 합의를 나타낸다. 태어날 때부터 남보다 유리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그가 누구든 가장 불우한 상황에 처한 이들의 조건을 개선하는 한에서 그 행운의 몫을 향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는 반드시 "우연한 배분이 가장 불운한 사람들에게 이롭도록"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능력주의자는 이렇게 답할지 모른다. "우리의 자연적 재능이 행운의 산물이라 해도, 우리의 노력은 순전히 우리에게 달린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노력과 수고를 통해 얻은 것을 온전히 가질 자격이 있다." 그러면 롤스는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노력을 하려는 의지 자체도, 그러한 시도도, 그리고 흔히 말하는 자격이라는 것도 행복한 가정과 사회적 환경에 근거한 것이다." 노력조차도 '시장의 보상이 도덕적 자격을 반영한다'는 생각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그들이 불행감에 시달리는 건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그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경제적 곤경만이 아니다. 능력주의 시대는 노동자들에게 더 악랄한 상처를 입히고 있다. 그들이 하는 일의 존엄성을 깎아내리고 있는 것이다. 시험 점수를 잘 따고 대입 시험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브레인'을 칭송하면서, 인재 선별기는 능력주의적 학력이 없는 사람들은 시궁창에 빠트렸다. 그것은 학력이 낮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하는 일은 돈 잘 버는 전문직업인들의 일에 비해 시장에서 별 가치가 없어요. 공동선에도 별 기여를 하지 않죠. 당연히 사회적 인정이나 명망도 별로 따라붙지 않아요." 그것은 시장이 승자에게 퍼붓는 과도한 보상을 정당화함과 동시에 비대졸자 노동자에게 던져 주는 쥐꼬리 만한 보상도 당연시했다.
 누가 뭘 가지는 게 정당한가에 대한 이런 식의 사고는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 앞서(5장) 따져본 이유에 따라 이런 저런 직업의 시장 가치가 그것이 공동선에 기여하는 정도와 비례한다고 보면 오류다(부유한 마약 딜러와 박봉의 고등학교 교사 이야기를 떠올려보라). 그러나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 사회에는 '우리가 버는 돈이 우리의 사회적 기여도를 반영한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내려버렸다. 그런 주장은 공적 문화 곳곳에서 메아리친다.

 

 1968년에 민주당 대선후보 지명을 바라던 로버트 케네디는 이 점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실직자들의 고통은 다만 소득이 없다는 데서 나오지 않으며, 그들이 공동선에 기여할 길이 막혔다는 데서도 비롯된다. "실직은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는 뜻이지요." 그는 설명했다. "일이 없는 사람은 동료 시민에게 불필요한 존재가 됩니다. 그것은 랠프 엘리슨이 쓴 ⟪투명인간(the Invisible Man)⟫이 현실화되는 것이죠."
 당시 사람들의 불만에 대해 케네디가 통찰한 내용은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노동계급과 중산층 유권자들에게 분배적 정의를 더 강화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경제성장의 과실에 대해 더 공정하고 더 적극적인 접근을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유권자들이 그보다 더 원하는 것은 그들이 정의에 더 기여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사회적 인정과 명망을 얻고, 다른 이들이 필요로 하고 가치를 두는 일을 할 기회를 달라는 것이다.

 

 장벽을 허무는 일은 좋다. 누구도 가난이나 편견 때문에 출세할 기회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좋은 사회는 '탈출할 수 있다'는 약속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회적 상승에만 집중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사회적 연대와 시민의식의 강화에 거의 기여하지 못한다. 심지어 우리보다 사회적 상승에 보다 성공적인 나라라도 상승에 실패한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만족할 수 있도록, 그리고 스스로를 공동체 구성원으로 여길 수 있도록 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능력주의적 학력이 없는 사람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소속이 어디인지 정체성을 의심하게 되었다.
 종종 기회의 평등의 유일 대안은 냉혹하고 억압적인 결과의 평등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또 다른 대안이 있다. 막대한 부를 쌓거나 빛나는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의 평등'이다. 그것은 사회적 존경을 받는 일에서 역량을 계발하고 발휘하며, 널리 보급된 학습 문화를 공유하고, 동료 시민들과 공적 문제에 대해 숙의하는 것 등으로 이루어진다.

 

 

뉴턴의 아틀리에 / 김상욱, 유지원 / 민음사

 

 주관의 영역에서 이제 글자 이야기는 글자를 보는 '나의 이야기'가 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다. 타당한 통찰이다. 그런데 일단 알게 된다는 것은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어서 알기 전과는 나의 의식이 비가역적으로 달라진다. 그러면 이야기도 달라진다. 그래서 '아는 만큼 안 보이'기도 한다. (p.30)

 

 과학의 눈으로 볼 때, 물질로 이루어진 우주에 인간이 말하는 의미나 가치는 없다. 중력에 의한 물체의 낙하 자체는 아름다운 일도 불행한 일도 아니다. 낙하하는 것이 낙엽일 때 아름답고, 유리잔일 때 불행하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의 낙엽은 불행하고, 이탈리아의 결혼 피로연에서 깨지는 유리잔은 행복하다. 가치는 인간이 임의로 부여하는 것이다. 누구보다 과학을 잘 알았던 뒤샹이 예술을 전복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p.190-191)

 

 '당대의 정신을 포도처럼 수확하고 숙성시킨 책들이 인쇄기로 빚은 포도주처럼 흘러넘쳤다.' 독일어를 몰랐다면 나는 '포도'와 '책'을 이렇게 한 문장에 넣기 어려웠을 것이다. 구텐베르크가 활동한 마인츠는 독일의 유명한 백포도주 산지여서, 그는 포도 압착기를 응용해서 인쇄기를 발명했다. '숙성'이라는 오묘한 과정을 거친다는 점에서도, 목마름에 갈망하는 육신과 영혼을 적셔 준다는 점에서도, 포도주와 책은 서로 닮았다. 독일어에서는 '책을 읽는 일'과 '포도를 수확하는 일'에 '레젠(lesen)'이라는 같은 단어를 쓴다. (p.212-213)

 

 한국어 바깥, 영어 바깥, 심지어 언어 바깥으로 나서는 모험은 값지다. 독일어에 한국어가 부딪히는 경계는 내게 싱그러운 바람이 부는 골짜기 같았다. 나는 목적지에 가지 않고 그곳에서 노는 것이 좋았다. 그곳은 극복해야 할 장애의 문턱이 아니라, 그 매혹적인 모호함을 음미하고 유희하는 지역, 우리 인식 너머의 진실에 화들짝 접촉하는 장소였다. 무엇도 섣불리 단정할 수 없다는 인식의 도약은 이때 일어난다. 익숙해서 낡고 닳은 인식의 편협한 감옥에 보얗게 쌓인 먼지 위로 한 줄기 바람이 불어들 때, 그러니까 정신이 결연하게 낯선 언어와 낯선 상황을 호흡할 때, 간혹 관념의 반짝이는 본연적 빛을 보는 행운이 찾아온다. 이렇게 정신에 통풍과 환기가 될 때, 우리의 마음은 보다 자유롭고 관대해진다. (p.215)

 

 르네 마그리트는 그림에 단어나 문장을 써넣은 것으로 유명하다."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은 파이프 그림 아래에 떡하니 쓰여 있다. 마그리트는 사물과 단어와의 관계가 자의적(恣意的)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파이프'라는 단어는 파이프와 조금도 닮지 않았다. 아니 'pipe'와도 닮지 않았다. 그림 속의 파이프로 담배를 피울 수도 없으니 이 파이프 역시 진짜 파이프는 아니다. 이래저래 마그리트의 문장은 옳다. 더구나 마그리트는 "사물이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했다. 설사 이것이 파이프라고 해도 파이프가 아닌 것을 배제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언어는 수학이 아니다. (p.221-222)

 

 언어로 모든 것을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왜 수학과 예술이 존재하는지 설명해 준다. 우주는 인간의 언어와 이해 방식이 아니라 수학과 물리학의 방식으로 기술된다. 인간은 수학과 언어로 기술할 수 없는 것을 예술로 표현한다. 그래서 예술은 언어로 분명하게 정의할 수 없고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분석할 수도 없다. 위그너가 지적했듯이 우주가 수학으로 잘 기술된다는 사실은 놀랍다. 하지만 인간이 언어로 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예술로 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진짜 놀랄 일은 우리가 언어를 가지고 이 정도로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p.222)

 

 우리는 도구를 기술적인 보조물 정도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도구는 세상의 틀을 다시 짜고, 세상과 관계를 맺는 우리 자신을 변형시키기도 한다. 인류가 가장 단순한 도구를 사용하면서부터, 인간의 사이보그화는 돌이킬 수 없이 진행되어 왔다. 우리는 반드시 몸으로 타고난 기관들만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도구는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태도와 성격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번은 모든 측면에서 적절하게 균형 잡힌 볼펜을 만난 적이 있다. 펜대의 두께는 안정감 있었고 펜 끝이 도도하게 모아지며 꼿꼿한 기울기를 유도함으로써, 내 손목에 특정한 텐션과 각도와 힘을 가해 그 모양과 움직임을 단아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 펜을 쓸 때 조금은 더 단정한 사람이 되어 있는 것 같았고, 그런 기분은 사유에도 영향을 주었다.
 도구의 발명은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차츰 해방시켜 왔다. 문명의 축적과 성취를 부정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것이 야기하는 불편들과 박탈해 가는 가치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민감한 감수성의 최전방에서 이런 불편들을 앞서 끊임없이 살피는 사람들이 있다. 도구에 맞추느라 불편해질 수 있는 인간의 행동과 감각을 세심하게 살피고 교정함으로써 도구를 다시 인간에 맞추어 조정하는 일, 도구와 더불어 가는 인간의 자존감이 훼손되지 않고 피로감이 줄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일, 이것이 디자이너들의 일이다. (p.372-373)

 

 우리는 지능에 비해 인간 몸의 능력과 가치를 자주 간과한다. 예술 훈련과 교육의 현장에서는 때로 '손이 뇌를 가르치게 하라.'는 말을 한다. 반복 훈련을 통해서, 뭐라 언어로 풀어서 형용하기는 어려운 복합적인 통찰을 얻으라는 것이다. 순차적인 언어로 기술되는 '서술적인 기억'과 '형식지'의 영역이 아닌, 자전거나 악기처럼 동작을 몸으로 익히는 '절차적인 기억'과 '암묵지'의 영역이 인간의 예술 행위에 깊이 관여한다. 과학에서도 몸과 마음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된다고 하여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라고 부른다. (p.385)

 

 

이러다 지구에 플라스틱만 남겠어 / 강신호 / 북센스

 

 하트라인의 실험에서는 합성섬유로 만들어진 재킷을 세탁기로 세탁할 때 매번 평균 1,174mg의 마이크로 섬유가 빠져나왔다. 세탁 후 하수처리장에 모인 오수에 마이크로 섬유는 최대 40% 정도가 걸러지지 않은 채 강을 통해 바다에 합류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가디언>이 인용한 다른 논문에서는 전 세계 해안의 바닷물에서 발견되는 인공 파편들의 85%가 합성제품에서 나온 마이크로 섬유 조각인 것으로 밝혀졌다. 게다가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의 바닷물일수록 더 많은 마이크로 섬유를 함유하고 있었다.
 내륙의 호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국에서는 5대호로 흘러드는 지류를 조사해보니, 걸러지는 플라스틱 중 71%가 마이크로 섬유 제품이었으며, 이는 플라스틱 조각이나 펠릿 함유량을 훨씬 초과한다는 보고도 있다. 이 실험 결과들은 한결같이 세탁할 때마다 합성섬유 옷감으로부터 마이크로 섬유 조각들이 떨어져나오며, 마지막엔 바다와 강물에 축적되고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p.24-25)

 

 플라스틱 문제는 재활용만이 해답이다. 그것도 지금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매달려야 한다. 기존의 방식으로는 지구 환경과 생태계의 피해가 가파르게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어쩌지 못하는 플라스틱이 바다를 채우고 있고 대기와 땅을 오염시키고 있는 현실이 말해주는 바는 명확하다. 플라스틱을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사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허투루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최대한 재활용하는 것만이 답이다. 버릴 때 버리더라도 누구든 재활용할 수 있게 버려야 한다. 그리고 누구라도 재활용 영역의 책임 있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p.56)

 

 그런데 500년이라는 기간은 어떻게 예측된 걸까? 비록 플라스틱 백은 생분해되지 않지만, 오랜 기간 햇빛에 노출되면 자외선에 의해 사슬처럼 얽힌 고분자 구조가 변형되고 갈라져서 결국은 잘게 부스러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러한 현상을 발견한 적이 없다. 플라스틱이 발명된 이후 아직 그만한 시간이 흐르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500년 또는 1000년을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경우 숫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단지 정말로 길고 긴 시간이 경과해야 플라스틱이 분해될 거란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p.72-73)

 

 지속 가능한 플라스틱 순환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닫힌고리 재활용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 전면적으로 전환하기에는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점진적인 방식으로라도 시도해야 한다. 예를 들면 사용률이 높으면서도 여러 번 재순환하더라도 품질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플라스틱, 이를테면 PE류나 PET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이런 재질은 적극적 재활용 개념을 적용해서 엄격하게 회수되도록 해야 한다. 분리배출 및 회수 체계를 구축하고 이를 위한 협의체를 자치구마다 설립한다. 이를 위해 생산자재활용책임 제도상에서 인센티브를 준다든지, 기금을 통해 기반을 만든다든지 하여 생산자들의 참여를 적극 유도한다. 또한 소비자는 특정 재질의 플라스틱에 대해서는 배출 기준을 따르도록 계몽하고, 지역마다 또는 마을마다 배출을 위한 거점을 정한다. 비닐류도 마찬가지이다. 닫힌고리형으로 전환할 수 있는 플라스틱류를 선정하고 이는 적극적 재활용을 할 수 있도록 관리하고 매진해야 한다. (p.161)

 

 소각은 당연히 피해야 할 최종 공정이다. 그런데 현재 쓰레기의 문제가 너무나 심각하다. 전국에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쓰레기 산만 해도 120만 3천t이나 된다고 한다. 그럼에도 매립 면적이 적다 보니 지자체마다 쓰레기 소각 시설을 늘리고자 안간힘을 쓴다. 눈앞에 방치된 쓰레기뿐만 아니라 앞으로 늘어날 추세를 상상하다 보면 더욱 긴박해진다. 하지만 소각장을 지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기에 앞서 쓰레기를 줄이는 방안부터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맞다. 쓰레기를 줄일 수 있다면, 소각장 시설은 지금보다 더 늘지 않아도 된다. 장기적으로는 소각과 매립 모두 없애야 함은 물론이다. 기존에 운전되고 있던 소각 시설은, 현재의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도록 한다.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서는, 쓰레기 제로를 위한 각 마을 단위, 공동 건물 단위, 또는 지자체 단위의 로드맵과 조직을 만들 필요가 있다. 적극적으로 재활용 과정에 참여하기 위한 프로세스와 참여를 위한 매뉴얼을 만들고, 이를 교육시키고 전파해야 한다. (p.195)

 

 다라비의 재활용 산업은 매우 긍정적이면서도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즐겁게만 볼 수 없는 것은 정작 현장에서 플라스틱을 재활용하는 작업자들의 작업 환경과 건강은 전혀 사회 시스템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라비 재활용의 가치나 메시지에 비해 그들이 처한 인도 내 사회적 계급은 최하위이다. 지구촌이 쓰고 버려진 플라스틱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는 가운데, 사회적 계급이나 빈부의 차이에 따라 누구는 버리기만 하고 누구는 그것들을 주워 와서 생계를 잇는다. 자본주의 물질 만능 시대가 키워온 우스꽝스러운 대목이다. 선진국이라도 자신들의 쓰레기를 스스로 책임지고 처리해야 한다면, 어느 나라에건 다라비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넝마주이가 있어야 하고 파쇄기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p.245)

 

 

아침의 피아노 / 김진영 / 한겨레출판

 

트럭에서 야채를 산다. 왜 이렇게 비싸요, 며칠 전엔 1000원밖에 안 했는데…… 여자가 꽈리고추 봉지를 들고 불평하니까 야채 장수는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예쁘게 생겼잖아요. 사람이나 물건이나 예쁘면 비싼 거예요. 아침마다 아파트 앞에 트럭을 세우는 이 남자는 방금 떼어 온 야채들처럼 늘 싱싱하다. 그의 목소리가 크지만 시끄럽지 않다. 오히려 듣는 사람의 배 속으로 들어가서 근심을 쫓아내고 마음을 비워준다. 그건 분명 그의 목청을 통해서 밖으로 나오는 생의 명랑성 때문이다. 정신이 깊고 고요한 것만은 아니다(그것이 나의 오랜 착각이었다). 정신은 우렁찬 것이기도 하다. 우렁찬 정신은 야채 장수처럼 목청으로 제 존재를 보여준다. 그 목청의 정신을 배울 때다. (p.35)

 

바울은 옥중 편지에 썼다.
"내 마음을 고백하자면 저는 죽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도 저는 그 소망을 뒤로 미룹니다. 그건 여러분들이 아직도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언젠가 강의에서 말했었다. 나를 위해 쓰려고 하면 나 자신은 너무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그러나 남을 위해 쓰려고 할 때 나의 존재는 그 무엇보다 귀한 것이 된다고. (p.40)

 

한바탕 쓸고 간 빗줄기에 흩어진 낙엽들. 휴대폰 안에 담는다. 사진은 마술이다. 찍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사건이 된다. (p.45)

 

베란다에서 세상의 풍경을 바라본다. 또 간절한 마음이 된다. 한 번만 더 기회가 주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p.46)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다. 여러 번 강의했고 여러 번 읽었던 텍스트. 그런데도 우연히 펼쳤을 때 문장들이 눈을 뜨면서 빛났다. 밤하늘의 초롱초롱한 별빛처럼. 그래도 첫 문장의 빛은 역시 해맑은 아침 햇빛이다.
"댈러웨이 부인은 꽃은 자기가 스스로 사겠다고 말했다." (p.47)

 

나는 이제껏 지나치게 감정주의자였다. 그래서 대부분 감정이 원하고 시키는 대로 행동해왔다. 그러나 행동은 감정의 시녀가 아니라 오히려 주인이기도 하다. 새로운 감정이 필요할 때 행동이 감정을 가르치고 인도해야 한다. 그래야 감정의 균형이 잡히고 길이 보인다. (p.98)

 

아침. 다시 다가온 하루. 또 힘든 일들도 많으리라. 그러나 다시 도래한 하루는 얼마나 숭고한가. 오늘 하루를 정중하게 환대하기. (p.2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