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산책자 / 강예린, 이치훈 / 반비
"아주 소소한 이야기야. 이웃에서 큼지막한 파초 한 그루를 사 와서 선지 같은 기름진 것들로 잘 키웠다, 파초에 비 떨어지는 소리가 너무 좋아서 이것을 잘 듣기 위해 창문에 챙을 안 달았다 하는 이야기지. 건축가라면 비가 들이치지 않게 챙을 매달았겠지만, 그러면 거기 떨어지는 빗물 소리 때문에 파초에서 튕겨오는 소리를 못 듣게 되잖아. 일상의 디테일인 것이지. 사용자들은 자신들이 사는 생활공간을 섬세하게 경험하고 만들어가니 건축이 하는 일도 응당 그래야 하지. 큰 공간 계획도 중요하지만, 시계를 어디에 걸어놓을지 하는 작은 계획도 역시 중요해. 그에 따라서 사람들이 시간을 알아채는 방식이 달라지니까. 꽃나무를 심을 때도 평상시 잎만 있을 때는 어떤 모양인지, 꽃은 무슨 색인지, 언제 피는지 생각하면서 심어야지." (p.36-37)
소설 『장미의 이름』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에 따르면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마을 노인이 죽었을 때, "도서관에 불이 났다."고 표현한다. 지혜의 깊이를 강조하기 위해서 노인을 도서관에 비유한 것이다. 함축적이고도 일리 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마을에서 벌어진 일들을 기억하니까, 노인의 삶은 마을 역사의 제법 긴 구간을 기록하고 있는, 살아 있는 아카이브다. (p.59)
그 뒤 복숭아나무 심기라는 노스탤지어의 코드는 문화라는 키워드로 확장되었고, 문화는 도시 전체가 먹고사는 산업으로 발전했다. 1988년에는 부천필하모닉이 창단되었고 1997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PiFAN), 1998년 부천국제학생애니메이션페스티벌(PISAF)에 이어 2008년 부천세계무형문화유산엑스포 등 다양한 문화 행사가 열렸다. 부천은 그렇게 자타가 인정하는 문화 도시가 되었다.
특히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로 유명한 부천필하모닉은 부천을 문화 도시로 자리매김한 일등공신이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이루어진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는 한국에서 처음 한 시도였을 뿐 아니라 말러의 관현악 세계를 완벽하게 재현해낸 탁월한 곡 해석으로 한국 음악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부천필하모닉은 서울시향, KBS관현악단과 더불어 현재 우리나라 3대 오케스트라로 불린다. (p.105)
53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대도시, 부천에 사는 89만 명의 사람들이 어디서든 도서 대출에 불편을 느끼지 않으려면 상호대차는 필수적이다. 2008년 현재 한국의 공공도서관 1개 관당 부담 인구수는 7만 6000명으로 영국의 6배, 독일의 8배가 넘는다. 거꾸로 셈하면 도서관 수가 영국의 1/6, 독일의 1/8이라는 뜻이다. 부천은 2000년에 시립도서관 사이의 상호대차 시범 사업을 시작한 이래 현재 9개 시립도서관과 14개 작은도서관까지 총 23개의 공공도서관을 차량이 매일 순회하면서 책을 배달하고 있다. 상호대차를 통한 대출이 어느 도시보다 쉽다. 2010년 한 해 동안 19만 명의 시민들이 33만 권의 도서를 이용했다.
부천의 시립도서관들은 각기 전문 분야의 장서들을 소장하고 있어 상호대차의 효율성이 높다. 도서관들이 도서를 중복 구입할 필요가 없으니 재정도 절약되고, 도시 전체가 소장한 책의 다양성도 높아진다. 중앙도서관은 기술과학, 심곡도서관은 역사, 북부도서관은 예술, 책마루도서관은 인문・사회 과학, 꿈빛도서관은 어린이 관련 서적 구비에 각각 특화되어 있다. (p.110-112)
여행지에서 책의 역할은 여행으로 미처 채우지 못한 여백을 메우는 것만은 아니다. 책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여행지로 이미 와버린 몸과, 떠나온 그곳에 아직 남아 있는 마음 사이의 시공간적인 불균형을 맞추기도 한다. 몸은 지금 이곳이 현실인데, 마음속 현실은 저 멀리 있다면 주변의 풍광과 물산을 보아도 보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다. 독서는 꼬리를 무는 걱정과 망상을 밀어내고 현재의 자리로 여행자를 불러들인다. 책 속 이야기는 여행지의 이야기와 결합되면서, 여행지를 증강 현실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 책은 여행의 단순한 소모품이 아니라 필수품이다. (p.118)
아직 완성되지 않은 도서관에 나 외에 유일한 책 손님은 최 관장님의 딸아이다. 아버지는 딸에게 사진을 찍으며 놀라고 사진기를 하나 건네주었다. 사진 책들을 선생 삼아, 스스로 사진을 찍으며 노는 아이에게 폐교는 여전히 살아 있는 학교이다. (p.181)
좋은 일자리의 힘 / 제이넵 톤 / 행복한북클럽
선순환은 순환이므로 단순히 매출과 수익이 증가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매출과 수익이 증가하면 메르카도나는 직원에게 투자를 더 많이 할 수 있으며, 실제로도 그렇게 한다. 1999년에 메르카도나의 모든 직원들은 정규직이 되었다. 2000년에 메르카도나는 직원의 자녀를 위해 첫 번째 어린이집을 열었다. 2003년부터는 일요일에 매장 문을 닫았다. 메르카도나는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들에게는 가족과 함께할 삶이 있다." 2005년에 메르카도나는 출산휴가에 1개월을 추가로 더 제공했다.
2007년에 메르카도나는 완전 자동화된 물류센터를 설립했다. 자동화된 물류센터를 운영하는 것이 더 저렴해서가 아니라, 무거운 상자를 계속 반복해서 드는 것이 직원 건강에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류센터 담당 이사인 호세 미구엘 메네세스는 이렇게 설명했다. "한 가지 전제를 토대로 물류센터를 건설했습니다. 바로 기계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람에게 시키지 않는다는 겁니다. 직원에게 원하는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기술과 지식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p.110-111)
제품, 판촉행사, 서비스, 편의시설 등을 한정적으로 제공하고, 직원에게 더 많은 교육과 안정성, 임금을 제공하여 투자를 늘리면, 기업은 비용을 줄일 수 있고 결국 고객에 대한 비용도 줄어든다. 더 적게 제공하면 운영의 효율성과 정확도가 향상되어 고객 서비스와 매출이 개선된다. 운영이 개선되면 직원이 업무를 더 잘 수행할 수 있고, 고객은 때때로 이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 결과 직원은 자기 일에 더 많은 자부심과 즐거움을 느낀다.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면 결국 직원은 더 헌신적으로 일하게 되고 이직률은 낮아지며 이 두 가지는 서비스와 매출, 이익, 성장, 지속적 개선, 투자 수익률 향상으로 이어진다.
이 이야기가 무슨 의미인지 알겠는가? 좋은 일자리 전략은 건강한 신체와 흡사하다. 우리 몸은 신진대사, 체온, 칼슘 수준, 반고리관, 백혈구 수를 비롯하여 모든 것이 동시에 올바르게 작동해야 한다. 우리 몸은 어떤 특정한 한 가지가 아니라 모든 것이 결합하여 제대로 돌아갈 때 건강해진다. 시너지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장려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경험에 기반하여 특정 회사들이 누군가 희생하지 않고, 특히 직원이 부당한 취급을 받지 않고도 많은 주주에게 유리하게 운영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그 현상은 진짜였다. 모범적인 회사들은 내가 그 방법을 궁금해하기 전부터 오래도록 그렇게 실행했다. 연구하면서 내가 발견한 사항은 이전에 높은 성과를 나타내는 인적자원 프랙티스를 연구했던 동료들이 발견한 것과 유사하다. 여러 인적자원 프랙티스들이 함께 결합했을 때 가장 좋은 효과를 나타내는 것처럼, 일련의 특정한 운영 프랙티스가 모두 잘 결합될 때 직원과 고객, 투자자 모두에게 이익을 안겨준다. (p.158-159)
마지막으로 직원을 존중하는 것에 대해 관찰한 내용을 통해 결론을 내리겠다. 나는 소매유통업체의 직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고객을 도와줄 수 있다는 사실이 커다란 동기부여가 된다고 수없이 얘기했다. 고객을 돕는 것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들은 누군가의 하루를 더 낫게 만들면서 자부심을 느낀다. 게다가 직원들이 그렇게 일할 수 있게끔 고용주가 돕는다면 그들은 회사를 자랑스러워하고,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즐거우며, 심지어 감사를 느끼기도 한다. 그런 동기부여는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하다. 반면 직원이 고객에게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회사와 싸워야 한다고 지속해서 느낀다면, 그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p.203)
경제학부터 운영 관리까지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은 교차교육의 비용과 이득을 논의했다. 주된 비용은 교육 자체에 드는 비용과, 전문적이지 않은 직원으로 인한 효율성 상실 및 이어지는 잠재적인 산출물의 상실로 인한 비용이다. 같은 업무를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전문 직원은 전문적이지 않은 직원보다 업무를 더 빨리 처리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게다가 직원 한 명에게 여러 업무를 교육하기보다 한 가지 업무를 교육하는 게 비용이 적게 든다. 반면 교차교육의 주된 이득은 유연성이 증가하고 직원의 동기부여가 향상된다는 것이다.
고객 대면 업무와 고객 비대면 업무가 있는 서비스 환경에서 교차교육의 이득은 종종 비용을 능가한다. 6장에서 어피니티 플러스가 교차교육을 이용하여 인원수를 늘리지 않고 고객의 전화 상담을 처리한 방법을 살펴보았다. 제조 환경에서도 그 못지않게 유연성이 중요하다. 많은 공장은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고, 제품의 수요와 사양은 늘 변하기 마련이다. (p.231)
삶에서 더 많은 안정성을 누려 직원이 행복해질수록 선순환은 계속된다. 직원들은 정시에 회사로 출근하고, 쉽게 그만두지 않게 된다. 모범 소매유통업체는 직원 이직률이 낮다. 인력 공급에 변동성이 적을수록 소매유통업체는 시간대별, 또는 일주일, 매년 필요한 적정 인력을 더욱 쉽게 배치할 수 있다. 이런 고용주들은 직원들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회사가 원하는 인원수의 유연성을 누릴 수 있는 셈이다.
행복하고 헌신적인 직원일수록 당연히 실수가 적고, 일을 쉽게 처리하고자 원칙과 절차를 무시할 가능성이 줄어든다. 만성적인 직원 부족으로 늘 허겁지겁 서두르는 일도 줄어들고, 오랫동안 다니고 싶은 일자리이므로 자기 업무를 더욱 잘 수행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그 결과 교차교육을 이용하는 회사들은 운영 문제가 더 적게 발생하고, 비용도 절감할 수 있다.
동시에 교차교육 덕분에 고객은 더 낮은 가격과 더 나은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 제품이 적절한 자리에 진열되어 있고 매장은 깨끗하며, 해박한 지식으로 무장된 직원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계산대에서 기다리느라 시간을 보내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이외에도 헌신적이고 다양한 업무를 아는 직원, 즉 나무가 아닌 숲을 볼 수 있는 직원은 개선점을 제안할 수 있다. (p.235-236)
직원이나 고객과 관련된 가치가 제약을 만들 때, 회사는 그 제약 내에서 혁신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직원을 해고하지 않는 것은 사우스웨스트에서 명백한 제약이다. 코스트코의 제약 중 하나는 15퍼센트가 넘는 가격 인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비용이 올라도, 코스트코는 고객에게 제품별 가격의 15퍼센트를 초과하여 인상하지 않을 것이다. 6장에서 본 신용조합인 어피티니 플러스의 제약 가치는 늘 회원을 첫 번째로 두는 것이다 조직에게 올바른 행위라도 회원에게 그렇지 않으면 어피니티 플러스는 추진하지 않는다.
이런 제한적인 제약은 회사가 절대 생각하지 못했을 방법으로 혁신이 이루어지게 자극한다. 경기 침체기에 항공사는 직원을 해고하기가 쉽지만, 사우스웨스트는 비용을 줄이고 매출을 증가시키는 다른 방법을 찾는다. 9・11 이후 사우스웨스트는 정시 운항을 개선하는 대책을 강구하고 직원에게 비용을 절감하는 방안을 제시하라고 촉구했다. 그 결과 2001년 4분기에 보안 비용과 보험 비용이 증가했음에도 사우스웨스트 직원들은 운영비를 2.5퍼센트 절감하도록 도왔다. 게다가 사우스웨스트는 9・11 이후 펼쳐진 기회를 사로잡았고 신규 지역 시장에 진입하는 능력을 활용하여 시장점유율을 높였다. 이것은 좋은 일자리 전략을 추구하는 회사가 다른 업체는 할 수 없는 기회를 어떻게 포착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다. (p.311-312)
내가 있는 곳 / 줌파 라히리 / 마음산책
지금 우리는 둘 다 혼자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엄마는 단단히 들러붙은 예전 상태로 다시 돌아가 외로움을 떨쳐내고 싶어 한다는 걸 안다. 엄마 생각에 우리에게 가장 좋은 해결책일 것이다. 하지만 같은 도시에 사는 걸 거부하기 때문에 그 확고한 내 의사가 엄마를 아프게 한다. 외롭고 집에서 나갈 때 불을 끄지 않더라도 혼자 사는 게 좋고 내 시간과 공간의 주인임을 느끼고 싶다고 말한다면, 엄마는 날 못 미더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외로움은 결핍일 뿐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엄마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려 하지 않는다. 내가 만들어나가는 작은 만족들은 엄마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나에 대한 엄마의 집착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내가 보는 시각에는 관심이 없다. 내게 진짜 외로움을 가르쳐준 것은 바로 이 격차다. (p.45-46)
친구가 말한다.
"내 집에서는 빈둥거릴 수가 없어. 늘 할 일이 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 소파에 잠깐 앉지도 못해. 테이블은 언제나 어지럽고, 그걸 볼 때마다 마음이 무너져. 잠을 잘 때 빼고 집에서 즐기지 못해. 하지만 그 집을 만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몰라. 내게 작은 구석 자리면 충분하다는 거 아니? 너희 집처럼 편안한 집이 그리워."
친구는 결혼하기 전에 그런 집을 가졌었다. 내게 그 집 얘기를 하곤 했다. 작은 거실, 안뜰이 내다보이는 침실, 카펫을 핥는 아침 햇살. 거리의 소음, 부족한 난방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 날 친구가 고백하길 비행기 공포에도 불구하고 벽감 같은 비행기 좌석, 침대로 변하는 의자, 등 뒤의 전등, 손 닿는 곳에 필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이 즐겁단다. (p.55)
"오늘은 당신을 위해 정말 기막히게 맛있는 빵을 만들었습니다."
남자는 계산대 위 양동이에서 치즈 두 조각을 꺼내 무게를 가늠하더니 빵 안에 넣고 종이로 싼 다음 영수증을 내민다.
"받으세요."
난 공짜나 마찬가지인 빵 값을 지불한다. 엉덩이를 붙일 곳을 찾다가 놀이 공원에 앉는다. 밤에는 텅텅 비지만 이 시간에는 아이들, 부모들, 강아지들, 나 같은 외로운 사람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오늘은 전혀 혼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떠드는 소리가 시끄럽다. 자신을 표현하고 설명하고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려는 우리의 충동에 난 새삼 놀란다. 믿어 마지않는 소박한 빵 맛에 또 새삼 놀란다. 햇살에 몸을 녹이며 빵을 먹는 동안 성스러운 음식을 먹는 것 같다. 이 동네가 날 사랑한다는 걸 안다. (p.85-86)
얼마간의 돈으로 멋지지만 사실상 필요 없는 물건을 사고 나면 늘 마음이 괴롭다. 돈 한 푼이라도 신중하게 계산했고, 내게 지폐를 주기 전에 혹시나 한 장이 더 붙어 있는 건 아닌지 비벼보던 아버지 때문이 아닐까? 외식하는 걸 몹시 싫어하고, 카페에서 파는 차 한 잔 값이 슈퍼에서 파는 스무 개짜리 차 한 박스 값과 맞먹는 걸 허용할 수 없었던 아버지 때문이 아닐까? 부모님의 엄격한 규칙이 나로 하여금 늘 더 저렴한 옷과 축하 카드와 메뉴판 요리를 선택하도록 한 것일까? 그래서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기 전에 푯말을 읽으려 하는 사람처럼 상품을 보기 전에 가격표부터 확인하는 걸까? (p.100)
현재 난 충분한 돈을 벌고 가슴 졸이지 않은 채 매일 돈을 쓴다. 하지만 예상하지 않은 순간, 이를테면 세련된 표지의 포켓북이나 발코니에 놓을 예쁜 화분이 눈에 들어올 경우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런 종류의 물건을 보면 예전에 샀던 빨간색과 검은색 귀걸이가 떠올라 온몸이 굳는다. 그 때문에 이따금 배가 고파 견딜 수 없을 지경인데도 가장 싼 샌드위치를 고르거나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상점으로 들어갔는데 뭔가가 마음에 든다 해도 자신과 싸우다가 계산대에 가지 않은 채 그냥 나오며, 난 역시 아버지의 훌륭한 딸이라고 느낀다. 항복하면 그건 지는 거다.
예를 들어 오늘 같은 다소 쌀쌀한 날씨에 나는 약국 바디오일 한 병 앞에 걸음을 멈춘다. 약사는 신속하고 찬찬히 내게 몇 가지를 발라보라 부추기며 여러 가지 향을 맡게 해준다. 라벤더 향, 장미 향, 석류 향.
"이런 계절에는 피부가 건조하기 쉬워요. 원한다면 욕조에 직접 한 방울을 뿌려도 됩니다. 피부를 잘 관리해야 해요, 선생님."
하지만 날 설득하지 못한다. 그 가격을 용납할 수 없다. 집에 비슷한 제품이 분명 있을 거다. 결국 난 비상시를 대비해 가방 속에 넣고 다닐 두통약만 산다. (p.103-104)
난 운동화를 신고 해 지기 전에 산책을 한다. 밀밭을 가로지르는 오솔길을 따라간다. 이곳은 시끄러운 소음이 없다. 마을은 목가적이다. 돌돌 만 건초 더미들처럼 그렇게 잘 정리되어 있다. 모든 변화에, 모든 학살에 저항하는 곳이다. 나는 강까지 나갔다가 시계를 보고 다시 돌아온다. 고독은 시간을 정확히 계산하기를 요구하고, 지갑 안의 돈처럼 난 늘 시간을 의식한다. 시간을 얼마나 죽여야 할까, 저녁 식사 전까지 혹은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하지만 여기서 시간은 다르게 계산된다. 그래서 한 시간의 산책은 훨씬 더 길게 느껴진다.
저녁때 나만을 위해 요리한다. 보통 도시에서는 집 아래 스낵바에서 식사를 해결하거나 올리브에 절인 참치 캔 하나와 포크 하나면 족하다. 하지만 이곳에선 힘이 들더라도 진짜 식사를 준비할 생각이다. 접시에 닭다리를 몇 개 올리고, 백리향, 저민 마늘, 소금, 레몬을 뿌리고 오븐에 굽는다. 난 식기류를 좋아한다. 두꺼운 노란 접시들, 얇고 투명한 잔들. 친구 부부의 책이 관심을 끈다. 도시를 돌아다니며 관람했던 다양한 전시회 팸플릿을 본다. 시간 날 때 읽으려고 집에서 가져온 책들에는 관심 없다. 다른 특별한 것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가 늘 더 좋다. (p.131-132)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합니까 / 윌 듀런트 / 유유
역사의 대하드라마를 내려다보는 나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명백한 혼돈과 비극 속에서도 법과 질서의 존재를, 재앙에 굴하지 않는 인간 정신의 거대한 성취를 발견하곤(적어도 그렇게 느끼곤) 합니다. 확실한 것은 세계가 단순히 인간들이 진창 속에서 서로를 짓밟다 죽어 버리는 늪지대는 아니란 점입니다. 잔혹함과 비극 한가운데서 감동적인 사건들이 일어나며, 이 같은 인류의 흥미로운 유산 중에 가장 고상하고 훌륭한 것들을 널리 퍼뜨리는 일이야말로 지성인에게는 최대의 과제라고 하겠습니다. 설사 우주의 시초에 큰 그림 같은 것은 없었다 해도, 인류는 뚜렷이 존재하는 진리의 파편으로 그 그림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선한 삶에 대한 인식은 인간에게 분명히 존재하는 철학적 유산이며, 우리는 기술을 통해 자연을 극복하고 전 세계 대중에게 선한 삶의 여건을 제공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내게는 그 점이 역사라는 드라마의 가장 매력적인 가능성으로 보입니다. 그 가능성에 대한 신뢰야말로 가장 끔찍한 환멸의 순간에도 나를 계속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선한 삶, 그 자체로 사랑받고 즐거운 삶이 승리하게 하는 과업과 직결되는 지적 노동 말입니다. 이런 소소한 철학과 생각의 순환 속에서 나는 내 작은 물레방아를 계속 돌리고 있습니다. 내가 세상을 보는 관점은 이렇습니다. 그리고 심오한 사상가들도 그저 이런 세상에서 발견한 것만을 말할 수 있겠지요.
인생이란 결국 한바탕의 야단법석이다. 그러니 웃을 일을 만들자.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하자. 아무것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자. 지금 이 세대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은 확실히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각 세대는 이전 세대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것이지 이전 세대 덕분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지식을 구하려' 하지 말자. 간절히 구할수록 오히려 함정에 가까워질 뿐이니까.
하나의 이상에 헌신하지 말자. 그건 마치 호수처럼 보이는 신기루를 향해 말을 달리는 일과 같다. 도착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호수는 이미 없을 것이다. 사후 세계에 관해 뭔가를 믿는 건 괜찮지만 그곳이 이러이러할 거라고 너무 확고하게 믿지는 말자. 그러면 그곳에서의 삶도 그리 실망스럽게 시작되진 않을 테니까. 패배할 때마다 한 발짝 앞서갈 수 있는 그런 삶을 살도록 하자.
내가 항상 믿어 온(그리고 지금도 믿고 있는) 바에 따르면, 개인의 철학은 자신만의 경험이 아니라 폭넓고 편견 없는 관찰에 근거하여 성립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기 자신이 아닌 수백 명의 삶을 지켜볼 기회가 주어집니다. 자신만의 우연하고 개인적인 행운이나 불운에 근거하여 세상을 판단할 만큼 소견이 좁아서 되겠습니까? 내가 하루에 세 끼를 다 먹는다고 해서 세상 어디에도 굶주림이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요? 우리 중 일부가 건강하다고 해서 날마다 수천 명의 사람이 육체적 고통을 견뎌 내야 한다는 사실에 눈을 감아서야 되겠습니까?
가장 다행스럽게 느끼는 점이 있다면, 평생 열심히 일하면서 거듭되는 오싹한 위기와 번갈아 닥쳐오는 실망과 승리를 겪고 난 지금도 내가 여전히 낙관주의자라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써 놓은 것들을 제외하면 대체 내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낙관주의자가 아니었다면 아예 목표랄 게 없었으리라는 건 알고 있지요.
나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현자가 되어 지나친 추상적 사고에 따라오는 것처럼 보이는 온갖 우울과 절망을 받아들이느니, 지금처럼 열심히 일하는 사업가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설사 삶의 의미가 일순간 스쳐 가는 아름다움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해도(뭐가 더 있긴 한지 의문스럽지만요), 그걸로 족합니다. 빗물 속에서 첨벙대거나 바람과 싸우며 나아가는 시간, 햇빛을 받으며 눈길을 산책하는 시간, 어둠 속으로 스러져 가는 저녁노을을 지켜보는 시간만으로도 삶을 사랑할 이유는 차고 넘칩니다. 죽음더러 와 보라고 하세요. 그동안에 나는 사우스다코타의 자줏빛 언덕을, 저녁 하늘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반짝이는 별빛을 보았으니까요. 자연은 나를 파괴하겠지만 충분히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자연이 나를 만들고 내 감각을 수천 가지 기쁨으로 타오르게 했으니까요. 자연이 내게서 빼앗아 갈 것은 모두 자연이 내게 준 것이지요. 내게 오감을 준 것에 대해, 이 손가락과 입술, 눈과 귀, 쉼 없는 혀와 커다란 코에 대해 내가 어찌 충분히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