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기계 / 루스 해리슨 / 에이도스
식육용 송아지를 키우는 극단적인 환경의 시설을 방문한 적이 있다. 밝은 햇빛이 있는 곳에서 창문이 없는 헛간의 암흑으로 들어갔다. 농부가 불을 켜자 헛간 한쪽 끝에 폭이 좁고 막혀 있는 지옥 같은 감금 사육틀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농부가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감금 사육틀 앞에 있는 덧문을 하나를 올리자, 송아지가 겨우 자기 몸집만 한 공간에 서 있었다. 송아지의 눈이 커지면서 우리를 응시했다. 송아지의 얼굴은 고통 그 자체였다. 송아지는 하루에 두 번, 여물을 먹을 때만 전깃불을 볼 수 있다. 여물을 먹지 않을 때는 어둡고 비좁은 감금 사육틀 안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겨우 목숨만 붙어 있다. 도축되기 전까지 말이다. (p.14)
돼지는 아마도 모든 가축 중에 가장 괄시받는 동물일 것이다. 사실 돼지는 고지식할 정도로 깨끗하고 활기차며 지적인 동물이다.
돼지는 피부가 질기고 땀샘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른다. 게다가 피부를 감싸고 있는 지방층이 단열재 역할을 해서 온도가 높은 환경에서는 낮은 체온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돼지는 사육시설이 적절한 곳이 아닌 경우에는 피부를 적실 수 있는 물이나, 햇빛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진흙을 찾는다. 진흙투성이 돼지는 동물의 선천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가축 관리인의 자질이나 농부의 돼지에 대한 이해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p.169)
권태는 밀집식 사육의 나쁜 점으로, 과도하게 밀집된 시설의 특성이다. 생산자들은 권태를 없애는 것에 제일 애를 먹는다. 권태는 '악행'을 일으킬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결국에는 '악행'으로 이어진다. 모든 생산자들은 닭들 사이의 깃털 쪼기와 카니발리즘, 돼지들의 싸움과 꼬리 물기를 매일 걱정한다. 왜냐하면 손상된 지육은 심각한 이익의 감소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가축도 선천적으로 자신의 배설물 가까이에 눕거나 다가가지 않는다. 태어난 지 하루 된 새끼 돼지가 초조하게 화장실로 가는 모습은 정말 놀랍다. 그러나 우리는 밀집사육방식으로 가축을 사육하면서 자신의 배설물을 피하고자 하는 동물의 본능 또한 부정한다. 당연히 우리는 배설물보다 그들의 존재를 미덕으로 여기고 우선한다. 경제적인 이유에서이다. 동물을 따뜻하게 키움으로써 연료를 절약할 수 있고, 돼지 먹이를 바닥에 뿌려 먹이통이 차지하는 공간을 없애고, 돼지들이 바닥을 깨끗하게 핥게 해 농부가 하기 싫은 잡일을 없앴다.
닭의 자연적인 수면 주기도 가장 흔하게 부정당하는 본능이다. 배터리 케이지에서 키우는 닭을 대상으로 조명을 조절하는 실험은 언제든지 할 수 있다. 닭의 모든 기능은 달걀을 낳기 위해서 작동하고, 목적을 위해서 닭장에 갇힌 채 그 목적에 맞는 양이라고 여겨지는 빛을 받고 있다. 어떤 농장에서는 하루 23시간 동안 빛을 쪼이는 실험을 한 적도 있다. 육계는 삶의 3분의 2를 어둠 속에서 보낸다. 식육용 송아지는 평생을 어둑한 조명 또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보낸다. 종종 돼지는 어두운 축사에서 사육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축사에 조명을 설치하지 않는 게 돈이 적게 들기 때문이다. (p.282-283)
법률 제정만으로는 동물에게 적절한 헌장을 만들 수 없다. 우리는 오직 인간의 이익을 위해 태어난 동물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교육이 필요하다.
농장동물의 세계에서는 모두 다 잘 지내고 있다는 조작된 확신이 팽배해 있다. 그리고 미래에도 그런 거짓된 확신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많은 분야에서 밀집사육의 압박이 우리의 어깨를 무겁게 할 때, 전문가들과 대중을 안심시키고자 하는 이들은 우리 곁에서 밀집식 사육방식과 관련된 학대는 없다고 설득하고 있다. 만약 학대가 발생한다면 동물보호법이 적절하게 보호해줄 것이라고 설득하고 있다. 우리는 밀집식 사육방식의 제품이 과거보다 더 영양가가 많고 낫다고 믿기를 강요받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잘 먹는 국민이며, 매일 더 좋은 것을 먹는다고 믿기를 강요받고 있다. 다 잘 지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의심하는 사람들은 소수의 까다로운 사람으로 그리고 더욱 극단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은 괴상한 사람으로 치부될 것이다. 우리를 안심시키는 세력은 가공할 만하다. 자격으로 무장하고, 미소로 우리를 무장해제시키는 무미건조한 얼굴들이 티브이에 계속 등장해 불안 요소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우리를 안심시키는 상투적인 말들을 쏟아낼 것이다. 이에 대항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본 대로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론을 내리는 일은 이 책을 읽는 당신에게 달려 있다. (p.332-333)
부의 지도를 바꾼 회계의 세계사 / 다나카 야스히로 / 위즈덤하우스
라틴어는 우리의 주변에서도 흔히 자주 쓰이고 있다. 숫자를 나타내는 'No'는 'Numero'의 단축형이며, 오전과 오후를 나타내는 'am/pm'은 'ante/post meridiem'의 생략형, 그리고 '&'는 라틴어 'et', '@'는 'ad'의 합자다.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라틴어가 영향력이 큰 언어인지 알 수 있다. (p.82)
산업혁명 이후 회계의 역사는 가계부적인 '수입과 지출'의 계산에서 벗어나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실적을 적절하게 표현할까? 달리 말하자면 '수입과 지출'에서 탈피해 어떻게 '수익과 비용'을 계산할까? 이것이 기업회계가 진화해온 역사다.
이 진화는 증기기관차가 세상에 처음 나온 20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감가상각을 할 수 있다면 '미래의 지출을 앞당겨서 몇 기의 비용으로 배분할' 수도 있다(충당금). 선급비용이나 미수수익과 같이 '수입과 지출'을 '수익과 비용'으로 배분하는 계산도 할 수 있다. 장기공사로 받는 '미래의 수입'을 앞 기간에 수익으로 배분하는 공사진행기준도 인정받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이익’으로 진화하는 과정은 쉼 없이 훗날 등장하는 시가회계나 감손회계까지 질주해간다.
이런 수지에서 이익으로의 진화를 '현금주의 회계에서 발생주의 회계로의 이행'이라고 한다. (p.153-154)
중세 이탈리아에서 부기가 시작되고 나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회계는 '자신', 곧 경영자 본인이 주인공이었다. 회계는 '자신의 이익을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 존재했던 셈이다.
그런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증기기관차가 등장하던 무렵부터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무연고 주주에게서 대규모 자금조달을 하던 철도회사에서는 '주주를 위해' 감사 제도를 도입했으며 정확하게 재무 보고를 해야 했다.
이어서 미국 대공황을 계기로 광의의 '투자가 보호'를 전면에 내세우게 되자, CPA에 의한 감사를 포함한 정보공개제도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해서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동하면서 정확하게 재무를 보고하는 전통이 만들어져 갔다.
마지막으로 국제적인 투자가가 등장하자, 투자가에게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회계의 목적이 되었다. 이제 회계의 주인공은 사업가 자신이 아니라 정보를 받는 투자가로 바뀌었다. 요컨대 500년의 역사 속에서 회계는 '자신을 위해' 시행되던 것에서 주주, 투자가와 같은 '타인을 위해' 시행되는 것으로 역할이 바뀌어갔다.
물론 회계의 기본은 '경영 활동을 기록하고 계산하고 설명하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자신을 위해' 실행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영국에서 미국, 그리고 국제적으로 전개되어가는 회계의 역사를 보면, 시나브로 '투자가'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기능이 중시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흐름은 몇 가지 중요한 회계 규칙을 바꾸었다. 예컨대 자산 평가 방식이 '원가주의에서 시가주의'로 전환되었다. (p.232-233)
파이낸스 이론에서 잉태된 '기업가치'는 부기 및 결산서에 대한 500년에 걸친 불만이 폭발한 결과일지 모른다. 회계는 고집스럽게 '과거의 자취를 좇기'만 했으며, 경영자나 투자가들은 그런 점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거기에서 한 발 나아가 오래된 틀을 깨고 나온 것이 관리회계다. '과거'의 결과만 보여주는 재무회계와는 달리 관리회계는 예산을 짜서 '미래'를 계획하는 길을 열었다. 게다가 파이낸스는 '미래'의 현금흐름을 예측하여 기업가치를 산정할 수 있도록 했다. (p.362)
감손회계가 등장하기 이전, 공장이나 임대용 빌딩 등의 사업자산은 '취득원가에서 감가상각비를 뺀 장부가액'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감손회계가 도입되면서 그다음에 해야 할 과정이 완성되었다.
가령 그 자산의 '미래현금흐름'이 크게 하락한 경우 하락한 액수, 즉 '가치' 상당액까지 평가액을 내리고 평가손을 계산해야 한다. 이 감손회계에도 분명하게 파이낸스의 '가치' 사고가 들어가 있다. (p.365)
기계는 유지관리를 하면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지만, 인간관계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어느 날 갑자기 팀워크가 붕괴되는 일도 일어난다. 비즈니스의 경우에는 그 순간에 '미래현금흐름'을 잃고 만다. (p.375)
네 번째 원고 / 존 맥피 / 글항아리
논픽션 작가는 연대기의 사실들을 바꿀 순 없지만, 이야기를 제시하는 데 타당한 방식이라고 판단되면 동사 시제 등 독자를 안내하는 뚜렷한 길잡이를 활용하여 자유롭게 플래시백을 구사할 수 있다. (p.72)
모든 오류는 영원하다. 세라가 저널리즘 스쿨의 학생들에게 말한 대로, 일단 지면에 실린 오류는 "도서관에서 계속 살아가며 정성스레 목록화되고, 꼼꼼하게 색인화되고 (…) 실리콘칩으로 변환되어 대대로 연구자들을 현혹할 것이다. 이 모든 연구자가 최초의 오류에 의지하여 새로운 오류를 거듭거듭 생산함으로써 오류의 기하급수적 폭발이 빚어질 것이다". 팩트체커는 이 건널목의 초입에 칼을 빼 들고 서 있다. 그것이 얼마간 이 직업이 존재하는 이유이며, 세라의 표현을 빌리면 간행물이 "직업적 회의주의자 무리를 그 교정쇄 위에 풀어놓는" 이유이기도 하다. (p.226)
벽. 이 벽은 몇몇 작가를 수개월씩 침잠시킨다. 일부 작가들은 평생 못 헤어나오기도 한다. 모든 작가가 매일 집필에 착수할 때마다 벽에 부딪히는데, 이것도 항상 짧거나 사소하지만은 않다. "친애하는 조엘……" 이건 내 제자들이 피학적으로 자초한 일상적 작업 루틴의 마비로 고통받을 때, 그들의 울부짖는 아우성에 응답하여 쓴 편지에서 그냥 무작위로 뽑은 구절이다. "친애하는 조엘……" 훗날 이 조엘은 큰 상을 받고 수많은 저서를 집필하고 전국의 매체에 실리는 칼럼을 쓰게 되지만, 당시 이 편지 속의 그는 실제 세계와 집필의 세계를 가른 전기 철조망을 넘으려면 적어도 글쓰기 자체만 한 창의력이 필요함을 막 깨닫는 중이었다. "친애하는 조엘. 자네가 이를테면 회색곰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치자. 그런데 한마디도 떠오르지 않는다. 6시간, 7시간, 10시간이 지나도록 한마디도 떠오르지 않는다. 벽에 부딪혔다. 막막하다. 가망이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럴 땐 '사랑하는 엄마에게'라고 써라. 엄마한테 글을 쓰다가 막혔다고, 막막하다고, 나는 무능하고 가망 없는 인간이라고 써라. 나는 이 직업에 맞지 않는다고 우겨라. 징징거려라. 훌쩍여라. 이런 식으로 지금 처한 문제를 늘어놓다가, 그건 그렇고 그 곰이 허리둘레 55인치에 목둘레는 30인치가 넘지만 세크러테어리엇과도 정면 대결할 수 있을 만큼 빠르다고 써라. 그 곰이 누워서 쉬는 걸 좋아한다고 써라. 하루에 14시간씩 늘어져 있다고 써라. 이런 식으로 최대한 길게, 쓸 수 있는 데까지 써라. 그런 다음에 되돌아와서 '사랑하는 엄마에게'를 지우고, 훌쩍이고 징징대는 부분을 전부 지우고 곰만 남겨놓아라." (p.256-257)
국가의 숨겨진 부 / 데이비드 핼펀 / 북돋움
나는 경제 성장과 웰빙의 문제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사회적 신뢰'의 수준, 즉 서로 모르는 사람이 상대를 신뢰하는 정도는 나라마다 매우 다르다.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는 60~70퍼센트가 대부분의 사람을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런 생각으로 타인을 대한다. 더구나 이런 문화적 관습은 오랜 기간 변하지 않고 유지된다. 일례로 미국 각 주의 신뢰 수준은 4~5세대 전 각 주로 이주해온 사람들의 출신 국가 분포를 기초로 예측할 수 있다. 미국에서 오늘날 가장 신뢰 수준이 높은 미네소타 주는 여러분도 쉽게 예측할 수 있듯이 스칸디나비아인을 조상으로 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나아가 높은 사회적 신뢰는 경제 성장의 촉매로 작용한다. 사회적 신뢰가 높다는 것은 사람들이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동료가 제 몫을 할 거라고, 물건을 파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했을 거라고, 돈을 빌리는 사람이 제때에 돈을 갚을 거라고 믿는다는 뜻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사회적 신뢰는 '거래 비용'을 낮추어줌으로써(거래를 할 때마다 변호사를 고용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그리고 정보의 흐름을 촉진함으로써 경제 체계가 잘 돌아가도록 하는 윤활유의 역할을 한다. 이뿐 아니라 사회적 신뢰가 높으면 주관적 웰빙 또한 높다고 예측할 수 있다. 개인적 차원에서나 국가적 차원에서 모두 그렇다. (p.57-58)
영국의 예를 살펴보자. 몇 년 전 머지(Mersey) 지역 경찰이 범죄율이나 범죄 소탕률뿐 아니라, 시민이 경찰과의 대면 경험에 만족하는지에 관한 데이터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캐나다에서 그랬던 것처럼 데이터의 진정한 힘은 만족감의 주된 요인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데서 나타났다. 그리고 그 요인은 경찰이 예측했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예를 들어 집에 도둑을 맞았다고 경찰에 전화했을 때, 보통은 경찰이 얼마나 빨리 출동하느냐가 만족도에 가장 중요한 요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는 달랐다. 더 중요한 것은 경찰이 약속한 시간에 출동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경찰이 약속한 시간에 나타나기만 한다면 출동하는 데 두 시간이 걸리든 세 시간이 걸리든 별로 개의치 않았다. 경찰은 이를 바탕으로 운영 행태를 조정했고, 그로서 효율성과 시민의 만족도 모두 향상되었다. (p.89)
주택 및 기타 고정자산의 값이 치솟는 것을 경험한 나라는 영국만이 아니다. 하지만 특히 영국에서는 다른 형태의 불평등까지 더해져,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불공정을 조장하는 강력한 흐름이 형성되고 말았다. 나는 여기서 재산 상속의 문제에 대해 취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 조처를 제안할 것이다. 그에 앞서 자본 불평등 뒤에 깔린 제한된 토지의 공급과 토지 가격의 상승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주택 공급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인센티브 체계를 바꾸어야 한다. 이는 본질적으로 주택 건설에서 얻어진 이익을 주변의 시민에게 좀 더 직접적으로 전해지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영국의 경우, 남동부 지역의 그린벨트를 완화하는 정책을 채택해야 한다.
우리는 지자체가 세금을 통해 이익을 환수하는 정책을 활용함으로써 이 방향으로 움직이고자 노력해왔다.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그린벨트를 완화하면서 주변 지역 시민에게 지방세를 10년간 면제해 주는 등의 방식으로 지역 주민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정치인들은 이런 이야기에 질겁을 한다. 그러나 가짜 환경주의자들의 주장은 제쳐놓고,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주민들에게 적절한 보상과 인센티브를 주는 합리적인 정책을 통해 진정한 선택권을 시민의 손에 되돌려줄 수 있다. 그리고 이상적인 주거 환경을 갖춘 지역의 땅값이 가장 비싸기 마련이므로, 기획 시스템 내에 적절한 가격 결정 체계를 갖추어야만 효율적이면서도 공정하게 주택 개발을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자녀 세대에게 살 곳을 마련해주려면 주택 공급을 늘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이 주택 개발에 지지를 보낸다.
택지 공급의 확대는 이중의 재분배 효과가 있다. 첫째, 장기적으로 주택 가격을 좀 더 감당할 만한 수준으로 낮춤으로써, 지금으로선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 해도 도저히 집을 살 능력이 없는 전체 젊은 층의 30~40퍼센트가 점진적으로 집을 살 수 있는 선택권을 누리게 될 것이다. 둘째, 자산가치의 나선식 상승에 제동을 걸 수 있다. 이런 자산가치의 상승은 겉으로 드러나는 자본 불평등뿐 아니라 집값을 등에 업고 벌어지는 주거 지역의 양극화를 일으키는 주범이다. (p.149-151)
정치인은 종교와 편치 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영국의 경우 토니 블레어는 총리직에 있는 동안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비밀에 부쳐두었다. 그의 신앙에 대해 대중이 반감을 보일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미국에서는 어느 정도 기독교 신앙을 드러내지 않고서는 당선되기가 쉽지 않다. 세계 각국에서 정치인들은 도덕적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이는 위험한 게임이다. (…) 그럼에도 도덕적 가치에 대한 상식, 용인되는 행동의 범위에 대한 공통된 인식은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게끔 하는 핵심이다. 이는 성공하는 국가가 가진 '숨겨진 부'의 일부인 셈이다. (p.22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