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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블록은 죄가 없다 / 박대근 / 픽셀하우스

 

 '연말만 되면 보도블록을 교체해서 예산을 낭비한다.'는 비난이 많다. 물론 같은 구간에 잦은 교체를 한다거나 불필요한 곳을 교체하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일반적으로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다. 보도블록을 교체하는 이유는 우리 생활과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 상하수도 관로 교체 공사, 신규 건축물 인입 관로 공사, 도시가스 공사, 공중선 지중화 공사, 통신선로 공사 등 땅속 지장물에 대한 유지관리를 위해 보도는 시도 때도 없이 파헤쳐지고 메꾸어진다. 하지만 보도가 아스팔트로 되어 있는 경우라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아스팔트를 뚫기 위해 도로 절단기를 사용하여 표면을 자른 후 일명 '뿌레카'라 불리는 해머로 아스팔트를 파쇄하여 굴착을 해야 한다. 지중 시설물에 대한 공사가 마무리되면 복구를 해야 하는데 아스팔트 조달 문제로 부분 포장이 곤란하다. 소량을 공급하기 어려운 생산 시스템의 한계라고 볼 수 있다. 복구한다 할지라도 신구 아스팔트의 색상 차이로 인한 미관저해가 또 다른 문제점이 될 수 있으며, 양생 시간이 필요하여 신속한 교통개방이 어렵다는 것도 단점이다.
 이처럼 아스팔트를 보도에 설치했을 때 예상되는 유지 보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찾은 해답이 바로 보도블록이다. 보도블록은 소규모 공사의 경우에도 필요한 만큼 걷어내고 공사 후 원상 복구할 수 있다. 또한 보도블록은 다양한 형태와 색으로 생산할 수 있어서 주변 환경과 취향에 맞춰 형태와 패턴을 연출할 수도 있다. 독일 라인 강 주변의 산책로에 물결 모양의 블록 포장 사례가 좋은 예다. 물을 땅속으로 투과시킬 수 있는 환경 친화성도 블록이 가진 장점 중 하나이다. 반면 아스팔트 포장은 물을 미워하는 성질인 소수성을 가졌기 때문에 물이 아스팔트 포장 내부로 침입하게 되면 아스팔트 포장의 파손으로 이어진다. (p.16-17)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 편의시설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길에서 쉽게 시각장애인을 목격하기 어려운 이유는 시각장애인의 숫자가 적기 때문이 아니다. 집 밖을 나와 마음 놓고 걸어 다니기가 두렵기 때문이다. 시각장애인 점자블록의 설치로 인해 유아차를 끌고 다니기가 불편하다는 민원이 종종 있었다. 점자블록이 울퉁불퉁하여 유아차에 자는 아이가 불편해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점자블록이 울퉁불퉁하지 않으면 더 이상 점자블록이 아니다. 아이는 점자블록으로 불편해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시각장애인은 점자블록이 없으면 보행이 불가능하다. 불편은 다양한 시민들의 공존을 위해 이해와 수용이 가능한 부분이지만,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지면 누군가는 삶의 일부를 포기하게 된다. (p.97)

 

 견실시공이 지켜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경계석을 설치하기 위한 기초 공사 포함 중간과정은 시공이 완료된 후에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시공자와 감독 공무원 중 어느 하나라도 자신의 역할을 태만히 하거나 대충 넘어가는 부분이 생길 경우 자연스럽게 부실시공이 뒤따른다. 또한, 하자가 드러난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분노하는 시민이 없다면 관련자들의 경각심도 낮아질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러한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관련된 모든 사람들 중 누군가가 자신의 이해와 편익에 따라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를 방치하는 시민의식 수준과 사회적 환경의 결여를 드러내는 것과 다름없다. 사회적 무관심은 결국 시공사의 일탈행위를 부추기게 되며, 시공사의 부실공사 행위가 자연스럽게 습관화되고, 그 결과 상당한 주의를 요하는 구조물에서도 나쁜 습관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져 커다란 참사가 발생되는 것이다. (p.227)

 

 그렇다면, 보도에서 볼라드를 사라지게 할 방법은 뭘까? 해결 방안은 의외로 간단하다. 보도에 주차를 하지 않겠다는 시민의 자발적 참여 내지는 행정기관의 강력한 단속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 간단한 논리 이면에는 정치적인 딜레마가 존재한다. 불법 주정차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시민의식, 자동차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주차 공간, 그리고 한시적인 단속 등 복합적인 이유 때문이다. 시민의식과 주차공간은 하루아침에 뚝딱하고 만들어지는 요소가 아니다. 행정을 집행하는 공무원 입장에서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불법주정차 단속이다. 단속할 수 있는 법적 근거와 단속 인력이 있는데 일선 자치구에서는 왜 단속을 기피하고 있는 것일까? 세수도 늘리고 보행환경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인데 말이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상징인 지방자치제가 그 원인이다. 보도상 불법 주정차 단속은 25개 자치구에 위임되어 있는 사무이다. 하지만 일선 자치구에서는 강력 단속 시행시 빚게 될 시민들과의 마찰을 꺼리고, 현직 구청장들은 차기 선거 표 의식으로 강력 제재를 기피하는 등 풀기 어려운 숙제를 가지고 있다. 정치적인 계산으로 시민들의 안전하고 쾌적한 보행권이 박탈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p.242-243)

 

 

유닉스의 탄생 / 브라이언 커니핸 / 한빛미디어

 

 1969년에 내가 벨 연구소에 정규직으로 왔을 때 아무도 내게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말해주지 않았다. 벨 연구소에서는 일반적인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새 직원을 소개해주고, 여기저기 돌아다녀볼 것을 권한 다음, 자신만의 연구 주제와 공동 연구자를 찾도록 내버려두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특별히 걱정한 기억이 없다. 연구소 내에서 아주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기에 연구할 거리나 함께 일할 사람을 찾기 어렵지 않았고, 이미 여기서 여름을 두 번 보낸 다음이라 사람들과 몇몇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알고 있었다.
 이처럼 명시적인 관리 방향이 없는 것이 벨 연구소의 표준 관행이었다. 1127 센터에서 프로젝트는 관리자가 할당해주는 방식이 아니라, 주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룹을 이루는 상향식으로 만들어졌다. 연구소의 다른 부서와 일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만일 내가 어떤 개발 그룹에 참여한다면 함께 일하자고 연구 동료를 설득해볼 수는 있었지만, 결국 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야만 했다. (p.56-57)

 

 대학교에서 20년간 학생들을 가르친 지금도 다른 사람이 한 일에 비판적인 의견을 내는 일에는 썩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필요한 일이고 때때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예를 들면 누군가를 해고하거나(다행히 나는 한 번도 그럴 일이 없었다), 학생을 낙제시키는 일(흔한 일은 아니지만 아예 없지는 않다)이 그렇다. 벨 연구소의 평가 방식이 좋았던 점은, 연구자의 일을 이해하는 다른 사람들의 공동 판단을 최종 평가의 기초로 두었다는 점이다. 더글러스 매클로이가 말했듯이 "벨 연구소 평가 제도의 특징은 동료 간의 협력 관계를 지향했다는 점이다. 그 누구의 진급도 단 한 명의 상사와의 관계로만 결정되지 않았다." 벨 연구소의 평가 절차가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꽤 훌륭했다. 나는 그보다 훨씬 더 나쁜 인사 고과 절차에 대해 분명히 보고 들은 적이 있다. (p.68)

 

 프로그래밍 스타일이자 컴퓨팅 과제에 접근하는 방법에 대한 스타일인 유닉스 철학은 더글러스 매클로이가 『Bell System Technical Journal』의 유닉스 특별호(1978년 7월) 머리말에서 요약한 내용으로 다음과 같다.

(1) 각 프로그램이 한 가지 일을 잘 하게 만들라. 새로운 일을 하려면 오래된 프로그램에 새로운 '기능'을 추가함으로써 복잡하게 만드는 대신 프로그램을 새로 만들라.
(2) 모든 프로그램의 출력이 다른(아직 알려지지 않은) 프로그램의 입력이 될 것을 예상하라. 프로그램의 출력에 관련 없는 정보를 집어넣지 말라. 엄격히 열로 구분되거나 바이너리 형식으로 된 입력을 피하라. 대화식 입력 방식을 고집하지 말라.
(3) 소프트웨어를(심지어 운영체제라도) 일찍, 이상적으로는 수주 이내에 사용해볼 수 있게 설계하고 구축하라. 어설픈 부분을 버리고 다시 구축하는 것을 망설이지 말라.
(4) 프로그래밍 과제의 부담을 덜고자 할 때 비숙련자의 도움보다는 도구를 우선적으로 사용하라. 도구를 구축하기 위해 시간이 더 걸리고 도구를 사용한 다음에 일부는 버려야 할 것으로 예상하더라도 그렇게 하라. (p.298-299)

 

 관리자들은 자신이 관리하는 일을 이해해야 한다. 벨 연구소 연구 부문에서는 일반 관리자부터 연구소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기술적인 배경을 지녔기 때문에 자신이 관리하는 조직 내부와 다른 조직에서 진행되는 일을 빈틈없이 이해했다. 부서장은 부서원들이 하는 일을 실제로 상세하게 알아야 했는데,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주장할 목적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그 일을 설명하고 서로 연결을 맺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적어도 1127 센터에서는 세력 다툼이 없었다. 관리자가 부서원들을 지지하는 협동적이고 비경쟁적인 환경이어서, 협업이 자주 이루어졌고 서로 경쟁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이것이 벨 연구소 전체에 보편적인 현상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협력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목표로 삼을 가치가 있고 이런 분위기를 잘 유지하는 관리자가 보상을 받는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p.304)

 

 

코드와 살아가기 / 엘런 울먼 / 글항아리사이언스

 

 흔히 여자는 말하는 걸 더 좋아한다고들 한다. 여자는 기계보다 사람과 어울리기를 더 좋아해서 엔지니어가 되기 힘들다는 말도 꽤 들어봤지만 그건 굉장한 오해다. 내가 사람들과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정교한 기계를 다루고 싶어하는 나의 욕구(그렇다, 욕구)를 절대 잠재우지 못한다. 나는 큰 엔진이 달린 자동차를 운전해 도로를 질주한다. 손에는 낡은 라이카 카메라를, 매끄러운 금속 몸체에 우아한 렌즈가 달린 그 기적 같은 물체를 내 몸의 일부처럼 잡고 있다. 비행기 조종도 해봤는데, 순전히 조종간을 잡아보고 싶어서였다. 내 손으로 키를 잡고 선회하는 순간, 강력한 기계에 장악된 동시에 그 기계를 장악하는 쾌감은 이루 설명할 수 없었다. 내가 엔지니어가 된 것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정교한 사물의 생명력을 사랑하고 현실에 대한 기능주의적 정의를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사물을 조작하는 법에 대한 정의가 (그리고 그 작동 방식이) 그 사물의 가장 선명한 자기표현이라고 믿는다. (p.45-46)

 

 시간이 흐르면, 코드만이 그 코드가 탄생하던 시점의 지식을 대변하게 된다. 코드는 실행되지만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는 상태다. 그대로 따를 수는 있지만 다시 한번 깊이 고민해볼 수는 없는 프로세스가 된 것이다. 지식은 코드 안에 병합되면서, 물이 얼음으로 변하듯 자신의 상태를 바꾼다. 새로운 속성을 지닌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코드를 사용하지만, 인간의 감각으로는 더 이상 그 정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p.79)

 

 그러니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면, 새 컴퓨터를 살 때마다 그때까지 내가 평생 저장해온 모든 파일을 전부 저장할 수 있는 용량의 디스크가 딸려오는 것이다. 집에 비유하자면, 이사할 때마다 원래 살던 집보다 평수가 훨씬 커져서 가릴 것 없이 예전에 샀던 가구를 몽땅 챙겨갈 수 있다는 뜻이다. 대학교 새내기 시절에 벽돌을 쌓아 만든 책장, 중고 상점에서 산 얼룩진 소파, 대학원 시절에 산 북유럽풍 커피 테이블, 산처럼 쌓인 매트리스, 배달원이 흰색 플라스틱 바퀴가 달린 몸체를 내려놓는 순간 괜히 샀다는 걸 깨달았던 밤색 벨벳 소파베드까지 전부, 브런치에 술을 곁들이고 알딸딸하게 취한 상태로 중고 장터에서 고른 깔개, 이혼 후 급하게 산 중고 식탁까지 전부, 빠짐없이. 지금까지 집을 꾸미면서 느꼈던 흐뭇함과 남부끄러움, 인생에서 물건 하나하나를 들이게 된 사건들이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존재한다. 영원하다는 건 때로 잔인하다. (p.235)

 

 나는 장보기를 좋아한다. 브로콜리가 신선한지 시식해보고, 아보카도를 살짝 눌러서 오늘은 어느 것을 먹고 내일은 어느 것을 먹는 게 좋을지 확인하며 다니는 것이 즐겁다. 하지만 등이 아프거나 일이 생겨서 나갈 수 없는 날엔 인스타카트를 이용한다. 나는 늘 배달원에게 이 일이 좋은지 물어본다. 학생인 배달원들은 수업 일정과 시험 시간을 피해 일할 수 있어 만족해한다. 어느 날 저녁 우리 집에 배달을 왔던 쉰 살 정도의 흑인 남성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시간제로 일하면서 받는 수입에 만족하는 학생이 아닌 게 분명했다. 무거운 봉투를 들고 오느라 얼굴이 땀에 절었고 시간에 쫓기는 듯 보였다. 나는 그에게 대우가 어떤지 물었다. "저는 주 70시간씩 일해요. 그래도 근근이 먹고 사는 정도죠." 그가 떠난 뒤 나는 생각했다. 연봉을 수십만 달러씩 받는 엔지니어와 개발자들의 주 70시간, 그리고 빛나는 기술 세계의 승자들을 응대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려는 남자의 주 70시간에 대해.
 하지만 배달을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에 격차가 벌어지는 이 순간은 노동자 계층을 완전한 허드레꾼으로 만드는 여정의 단편일 뿐이다. 아마존은 허접한 짐수레를 끌고 다니는 기사들을 없애고, 그 자리를 드론으로 채우려고 한다. 긱 경제의 압승과 보편화를 상징하는 결정판인 우버 기사들은 자율주행차에 자리를 빼앗기고 있다. 이 결정적인 순간을 가장 끔찍하고 냉혹하게 묘사한 인물은 미디어 및 기술 평론가 더글라스 러시코프였다. "우버 기사들은 우버의 기사 없는 미래를 위한 연구 개발 도구입니다. 이 기사들은 자신이 실업자가 될 미래에 스스로의 노동력을 소모하고 자본(자동차)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p.376-377)

 

 나는 가만히 서서 베이 너머 오클랜드를 바라보았다. 낮에 내렸던 비가 그친 뒤, 거대한 아치 모양 다리 주변에는 구름이 떠다니고 있었다. 구글 X의 프로젝트 룬(Project Loon)이 생각났다. 하늘에 반짝이는 폴리에틸렌 열기구들을 띄운다는 계획이다. 성층권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이 열기구들 안에 통신 장비를 넣어서, 열기구의 무선 인터넷 영역 안에 있는 지상의 사람들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게 해준다.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네트워크를 구축해서 전자 기술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인류의 3분의 2에게 인터넷을 선사하는 것이다. 하지만, 구글 X 웹사이트에는 지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겠다는 말이 보이지 않는다. 안정적인 전력, 깨끗한 물, 민족 전쟁에 따른 약탈로부터 이들을 보호해주는 건 고사하고 컴퓨터와 휴대전화기, 소프트웨어를 제공한다는 말도 없다. 빌 게이츠마저 회의적이었다. "말라리아로 죽어가는 사람한테 고개를 들어서 열기구를 보라고 하는 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그는 『블룸버그 비즈니스 위크』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설사에 시달리는 아이를 치료해줄 수 있는 웹사이트는 없습니다." (p.383-384)

 

 "좋아하는 일을 하라." 마치 지구에 사는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지금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직접 일을 만들라." 역시 대부분 인간에게 불가능한 도전이다.
 "생계만 꾸리지 말고, 삶을 꾸리라." 마치 삶과 일이 불가분의 관계인 것처럼, '생계'를 꾸리는 것, 남은 인생과 가족을 부양하고, 문화를 지키고, 아파트 월세와 전기세를 내는 기본적 필요를 충족하는 것 자체는 우러러볼 삶의 목표가 아닌 것처럼.
 그리고 중대한 모토가 나온다. 스타트업들이 외치고, 되풀이하고, 목표라고 선포하는 주문과 같은 한 마디다. "세상을 바꾸라!"
 더 낫게 바꾸라는 말인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만나본 예비 창업자 중, 그들이 그리는 '더 나은' 세상이 더 나쁜 세상과 얽힐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 자기 성찰이 없으면 세상을 바꾼다는 목표는 이기적인 동기로 넘어간다. 어떤 발전이 이뤄지면 삶의 일부분이 영원히 사라지거나 나쁜 방향으로 악화되기 마련이라는 진리를 깨우치지 않고, 과거가 이바지한 바를 멋대로 외면해버린다. 우리는 적어도 과거를 돌아보면서, 옛날에는 무엇이 있었고 무엇을 돌이킬 수 없게 되었는지 인지할 의무가 있다.
 세상을 바꾸라! 우버는 세상을 바꾸고 있다. 아마존은 세상을 바꾸고 있다. 페이스북은 세상을 바꾸고 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발버둥치는 운전기사와 배달원이 있고, 이민자들은 중산층에 편입할 기회를 잃어가고 있고, 가짜 뉴스가 활개를 치고, 사람들은 자기만의 방에서 믿음을 취사 선택한다. 이런 현상은 여기에서 계속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하지만 스타트업들의 부화장 안에서 창립자와 엔지니어는 자신들의 아이디어가 온 세계를 밝힐 것처럼 설득하고, 돈을 벌 수 있다고 투자자들을 안심시켜야 한다.
 벤처 투자자들을 안심시켜주는 것은 붕괴에 대한 약속이다. 기존 구조를 깨부수고 그 자리에 민간 투자자들이 소유할 수 있는 새 구조를 채워 넣어야 돈이 벌린다. 작은 가게, 책방, 택시 기사, 기자, 편집자, 학교 교사 등 기존 질서의 다양한 영역에서 나오는 임금을 룰렛 테이블에 놓인 칩처럼 쓸어 담아 돈을 따가서 승자가 독식한다. 다수에게 분산되어 있던 풍요가 소수를 위한 부로 농축된다.
 부를 쌓는 것이 동인이고, 그 뒤에 무엇이 따라오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세상을 바꾸라!"는 한낱 광고, 작은 악마와 그로 인해 야기되는 분열을 가려주는 브랜딩, 젊은이들을 단결시켜서 그들에게 괜찮다고, 단순히 돈을 벌려고 나와 있는 게 아니지 않냐고 북돋우는 구호다. 당신은 고귀하다. (p.387-389)

 

 

예일은 여자가 필요해 / 앤 가디너 퍼킨스 / 항해

 

 브루스터가 여성도 지도자로서 잠재력을 지녔다는 증거를 원했다면, 사무실 창밖으로 눈길만 주었어도 찾을 수 있었다. 두 블록 떨어진 예일대 대학원에서 미래의 연방준비제도 의장인 재닛 옐런이 경제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고, 미래의 UC 버클리 대학 총장인 캐럴 크리스트가 영문학 박사 학위를 곧 받을 터였다.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는 미래의 국무장관인 힐러리 로댐이 예일대 로스쿨에 막 합격했고, 이곳에는 미래의 코네티컷 대법원장인 엘런 피터스가 교수로 있었으며, 미래의 어린이보호기금 창립자인 메리언 라이트 에덜먼이 졸업장을 받은 지 이미 6년이 지나고 있었다.

 

 남학생뿐이던 교육기관에서 남녀 학생을 동긍하게 대우하는 교육기관으로 변모하기 위해 진정한 변화를 모색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었다. 사실 브루스터는 그러한 변화를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브루스터가 서둘러 조직한 남녀공학위원회는 가능한 "현 상태를 최대한 깨뜨리지 않으며" 여학생을 받아들이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그래서 반드시 깨뜨려야 할 것을 깨뜨리는 일은 예일 대학에 처음 발을 디딘 여학생들 몫이 되었다. 그러려면 먼저 예일 대학에 들어와야 했다.

 

 하지만 11쪽에 이르는 기사 가운데서 예일대 여학생들이 가장 또렷하게 기억하는 건 뉴욕타임스가 이들을 가리키며 붙인 말이다. 이 말은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한 초인의 여성판" 또는 "슈퍼우먼"이었다.
 이 말이 이해 예일 대학에 입학한 여학생들의 이마에 표식처럼 새겨졌다. 그녀들은 이런 말을 듣곤 했다. "아, 그 슈퍼우먼이군요." 이 말은 여학생들을 서로서로 갈라놓았다. 신입 여학생들마다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 대단한 애가 나 같은 사람과 뭐가 아쉬워 친구가 되려 할까?' 어쩌다 실수로 붙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하는 학생들에게 저 '슈퍼우먼'이란 꼬리표는 불안을 키웠다.

 

 극과 극 사이에서 미친 듯이 홱홱 방향이 바뀌는 나날이었다. 예일 대학에서 젊은 여학생이란 보이지 않는 존재인 동시에 이곳에 섞이지 못하는 존재라는 의미였다. 여학생들은 이따금 강의실을 죽 훑어보고 자신이 유일한 여학생임을 확인하곤 했다. 하지만 대개는 적어도 두세 명이 더 있었다. 어느 쪽이든 여학생은 단지 자기의 우수성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성 전체의 우수성을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꼈다. "여자치고 나쁘지 않음"이라고 한 교수는 한 여학생의 과제에 휘갈겼다. 몇몇 수업에서는 남학생들이 발언하는 여학생을 빤히 쳐다보곤 했다. 마치 가구가 의견을 낸다는 듯이. 반면 말없이 가만히 있는 여학생에게 때때로 교수는 이렇게 물으며 토론을 끝마쳤다. "자, 그럼 여성들은 이 주제를 어떻게 생각하나?"

 

 나오미는 시카고에서 살았고 뉴욕에 기반을 둔 케이트보다 덜 알려졌지만 이날 밤 함께 나눈 개인사는 청중 속 많은 여학생들에게 울림이 컸다. 특히 대학원생들에게 그랬다. 나오미는 스물아홉 살에 하버드 대학에서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시카고의 로욜라 대학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었다. 이날 밤 뉴헤이븐에서 나오미는 학문 생활의 목적과 그런 자신을 좌절에 빠뜨리던 성차별을 청중에게 털어놓았다. 하버드 대학 도서관은 남학생의 집중을 흩뜨린다는 이유로 여학생 출입을 금했다. 하버드 대학의 교수는 여성이라 장비를 깨뜨릴 위험이 크다며 꼭 필요한 연구 장비를 쓰지 못하게 막았다. 시카고 대학은 정실 인사 금지 원칙을 들먹이며 번번이 교수 임용에서 그녀를 탈락시켰는데 다름 아닌 남편이 이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오미는 더 열심히 연구하고 더 탄탄히 실력을 쌓으면 원하는 곳에 이를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개인 자격이 아무리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더라도 여성이기 때문에 늘 부족했다. 나오미가 전하는 교훈은 분명하다고 나중에 한 여성 대학원생은 썼다. "사회 구조에 변화를 꾀하려면 사회운동을 해야 한다." 혼자서는 바꿀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2월 경제학과 박사과정 여학생은 몇몇 교수가 여전히 모리스 클럽에서 모임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에 경제학과 교수 전체에 항의 서한을 보냈다. "우리는 모리스 클럽으로 대표되는 소통과 권력의 채널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밝히며, 남성들이 모리스 클럽을 계속 지원한 탓에 여성들이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받고 있는지 세세하게 적었다. 이 항의 서한에 이름을 써넣는 데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이 항의 서한을 받을 남성이 곧 어느 학생을 교수로 임용할지 결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단에는 경제학과 박사과정 여학생의 이름이 모두 쓰여 있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13명 모두. 스물네 살이던 재닛 옐런의 이름까지.
 며칠 뒤 모리스 클럽은 예일대 경제학과의 거래 불가 방침을 전달받았다.

 

 과거 예일 대학은 영향력을 이용해 정부가 특정 범주의 지원자 차별을 축소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1940년대와 1950년대의 코네티컷 민권 단체는 예일 대학이 자격 있는 흑인과 유대인 입학을 거부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애썼다. 1949년에는 주 위원회가 코네티컷주 사립대학에서 만연하는 입학 차별 유형을 광범위하고 상세하게 제시했다. 예일 대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일축했다. 코네티컷주 사립대학에는 편견을 입증할 아무 기록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상을 보면 다르다. 1924년부터 1945년까지 20년 동안 예일 대학을 졸업한 흑인 남학생은 고작 일곱 명이었다. 1920년대 초반 유대인 남학생이 학생 전체의 10퍼센트를 넘어서자 예일 대학은 이들에게 학자금 지원을 금지했다. 이 방법도 통하지 않자 예일 대학은 학업 성적을 토대로 하는 입학 정책에서 "개성이나 품성"이라는 자질을 심사하는 입학 정책으로 입학 정책을 아예 바꾸었다. 그런데 이 자질은 예일 대학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를 믿는 백인 남성이 가장 잘 갖추고 있었다. 1949년에서 1957년까지 코네티컷주의 한 의원은 모두 네 번에 걸쳐 예일 대학의 차별을 막는 법을 통과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번번이 예일 대학이 승리를 거두었다. 1959년 무렵 의회는 마침내 두 손 두 발 다 들었고 예일 대학은 그대로 차별을 고수해나갔다.

 

 보고서는 모두 29쪽으로 다양한 인용과 소수점 아래 자리까지 나온 통계와 부록이 달렸다. '정의'나 '평등'이란 단어는 보고서에 등장하지 않았다. '차별'이란 말도 딱 한 번 나왔다. 차분한 문체는 일부러 의도한 것이었다. "우리는 모든 일에서 급진적인 태도를 지양했다. 변화는 급격해야 하지만 과정은 그럴 수 없었으니까"라고 헤버스틱은 말했다.
 이제까지 예일대 여학생에 대한 형평성 이슈를 주도한 이들은 주로 대학 주변부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시스터후드나 엘가, 용감하게 모리스 클럽을 점거하거나 보건교육복지부에 제출한 성차별 고소장에 이름을 올린 소수의 여학생이 주도했다. 하지만 주변부에 있던 이들이 중심부에 단단한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이 발판 덕분에 헤버스틱 같은 이가 투사라는 낙인이 찍히지 않은 채 활동할 수 있었다. 중심부에 놓인 이 발판은 정확히 남녀공학특설위원회가 바라던 것이었다. 엘가가 아무리 찾으려 애를 써도 절대 찾을 수 없던 지점이었다.

 

 브루스터가 마지못해 예일 대학에 여학생 입학을 받아들인 1968년, 예일 대학이 남녀공학을 발표하며 (그리고 두 달 뒤에 프린스턴도 합류하며) 마침내 미국의 일류 대학에서 남녀공학 금기가 깨졌다. 1973년 무렵에는 남성뿐이던 일류 대학의 대다수가 남녀공학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최초 여학생들이 낸 목소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날카롭게 벼려 있던 이 역사의 한 모퉁이도 두루뭉술해졌다. 부끄러운 불의의 역사가 쏙 빠지고 곧바로 탕탕평평을 이루었다는 이야기만 남았다. 입학이라는 스위치를 탁 켜자마자 남학생뿐인 마을이 여학생을 공정하게 대우하는 곳으로 한순간 변신했다는 듯이. 하지만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예일대 여학생에게 한 번 물어보시라. 기막힌 이야기가 쏟아져나올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