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만난 도시의 미래 / 김정후 / 21세기북스
연이어 파격적인 결정을 내린 테이트 재단의 접근은 터빈 홀의 '프로그램'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테이트 재단은 헤르조그와 드 뫼롱과 다양한 대안을 비교 및 검토한 후에 이 공간을 특별한 변형이나 디자인 없이 그대로 비우기로 결정했다. 미술관 내부 공간의 절반이 넘는 면적을 비우는 결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확신을 가지고 시행에 옮겼다. 과연 어떤 생각이 이와 같은 결정을 가능하게 했을까? 넓게 비운 터빈 홀은 언제든지 자유롭게 현대미술품으로 채울 수 있고, 미술품을 넘어 다양한 행사와 행위를 포용할 수 있다. 즉 테이트 모던 터빈 홀의 비워진 공간은 예술가와 시민에게 자유롭게 개방한다는 선언이었다. 채우기보다 비움으로써 무엇이든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p.44)
여러 면에서 열악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런던시는 왜 이러한 예상 밖의 결정을 내렸을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시청이 이미 번화한 도심에 자리하는 것은 도시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이다. 시청은 필연적으로 관련된 부가 업무 기능과 서비스 기능을 동반하므로 시청 자체를 넘어 집단적 행정공동체다. 시청 자체와 연관 사무실, 그리고 각종 서비스 업무 관련 종사자를 합치면 어마어마한 수의 유동 인구로 구성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떠올릴 수 있는 역발상은 소외된 지역에 시청이 자리하면 주변 지역을 활성화시키는 강력한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청과 주변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물론이고, 시청을 이용하는 시민들로 안정적인 유동 인구를 확보하는 것은 쇠퇴 지역을 개선하는 결정적인 힘이다. (p.89)
킹스 크로스 재생사업은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다양한 특성을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마디로 정의하면 '보행 친화형 활성화사업'이라 할 것이다. 전체 8만여 평의 사업 부지에서 차량이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은 손에 꼽을 정도이고, 거의 모든 공간이 보행 중심이다. 앞서 설명한 일련의 프로젝트 중에서 서비스 차량을 제외하고 일반인의 차량 출입이 가능한 장소는 단 한 곳도 없다. 그야말로 대단한 성취가 아닐 수 없다.
부지 전체가 보행 중심이므로 곳곳에 자리 잡은 공공공간은 큰 시너지 효과를 낸다. 매일 엄청난 수의 유동 인구가 오가지만 킹스 크로스 재생사업 부지는 곳곳에 충분한 양과 규모의 공공공간이 존재하므로 한가하게 느껴진다. 킹스 크로스 재생사업이 보행을 중심에 두고, 충분한 공공공간을 마련한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사람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것이다. 과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p.250-251)
시티 오브 뉴욕 / 최이규, 음성원 / 서해문집
뉴욕에서 정착된 용도지역제는 미국 전역에 걸쳐 연방도시계획법이 만들어지는 초석을 제공하게 되고, 1926년 '유클리드 판결'을 통해 법적인 정당성까지 얻게 된다. 유클리드 판결이란 1926년 미국 오하이오 주의 '유클리드'란 마을에서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앰블러 부동산회사'가 지자체의 용도지역 조례에 대해 위헌 소송을 제기했다가 패소한 사례다. 앰블러는 포화 상태에 있던 인근 클리블랜드의 기업들을 유치하기 위해 유클리드 마을의 토지를 공장지로 개발하려 했는데, 마을의 정취가 훼손될 것을 염려한 지자체가 지역제 조례를 통해 이를 규제하고자 한 것이다. 앰블러는 조례가 재산권 침해 요소가 있다고 강하게 주장했지만, 미국연방대법원은 공공복리를 위해 용도와 층고・건축면적에 개발의 제한을 두는 것은 공권력을 정당하게 사용한 것으로써 합헌이란 판결을 내렸다. 이 판례는 소규모 지자체도 토지 이용계획과 규제를 수립할 수 있다는 원칙을 미국 도시계획사에서 확립하는 계기가 됐다. 이 유클리드 판결로 이어지는 단초를 마련한 곳이 바로 에퀴터블이다. (p.48)
브라이언트 파크에서 벌어진 이노베이션의 가장 큰 주역은 앞서 말했다시피, 공원이라는 공공의 영역을 뉴욕 시 당국으로부터 넘겨받아 관리하는 민간 운영 방식, 즉 브라이언트파크회사 자체다. 연간 820만 달러에 달하는 예산을 확보할 때도 전혀 시 당국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 BPC는 현재 브라이언트 파크 주변의 기업과 건물로부터 받은 스폰서와 노점상의 영업권, 이벤트, 각종 자선기부금 등 자체 경영을 통한 수익에서 형성된 자금을 관리하고 있으며, 오히려 일부 수익금을 뉴욕의 다른 지역 공원 개선을 위한 기여금으로 뉴욕 시에 납부하고 있다.
공공지에서 사적인 사업을 허락해도 되는지의 논의는 도시계획 역사를 통해 줄곧 이어져왔다. 공원과 같은 공유지는 전적으로 세금으로 관리하고 유지해야 하며, 사기업의 진출을 철저히 배제해 순수하게 공적인 장소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보통의 상식일 것이다. 그러나 BPC의 운영 사례를 보면 그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다. BPC는 공원 운영에서 발생하는 모든 수익을 공원의 각종 무료 프로그램이나 공원 관리를 위해 사용한다. 1996년 이후 뉴욕 시로부터 지원금을 전혀 받지 않고도 어려움 없이 자립할 수 있었던 데는 운영의 묘를 통한 기여가 컸다. 많은 사람은 공원에서 사기업의 로고나 광고 문구를 보는 것을 꺼려한다. BPC는 후원을 받더라도, 기부자의 이름이나 회사명을 매우 적절한 크기와 컬러로 표시해 거부감을 줄였다. (p.66-67)
주목할 것은 뉴욕 교통국이 실시한 보행 플라자 정책의 특이한 시행 과정이다. 뉴욕 시는 탑다운 방식이 아니라, 값싸고 빠른 파일럿 프로젝트를 통해 시민들의 공감대를 마련했다. 보행자 공간과 자전거 도로는 유럽 도시에서 이미 앞서 있는 것이지만, 교통국은 무리하게 영구적 시설을 설치하기보다는 값싼 페인트와 예술가의 참여를 통해 주변 상인과 관광객, 보행자, 그리고 운전자의 반응을 살폈다. 임시성, 이동성, 가변성, 유연성, 시의성, 능동적 변화 등이 이러한 정책 방향을 정의할 수 있는 단어다. 중장비로 먼지를 일으키며 포장을 뜯어내고 고급 석재 포장으로 대체하는 대신, 예술가를 고용해 바닥에 흥미로운 그림을 그리게 해서 도시정책을 축제와 문화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무겁고 비싼 벤치를 놓기보다는, 개당 1만~2만 원밖에 하지 않는 플라스틱 소재 해변 의자를 가져다 놓고 시민들이 이 공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관찰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언론에는 수만 건의 여론과 의견 개진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교통국은 1년간의 평가 기간 동안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분석을 위해 데이터를 수집했다. 교통사고율은 획기적으로 줄었고, 차량의 통행속도가 오히려 개선되었으며, 새로운 상점이 속속 문을 여는가 하면 지역상인과 건물주,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계속되었다. 명백히 긍정적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교통국은 보행 플라자 사업을 영구히 한다고 확정지었다. 극히 작은 예산으로 맨해튼의 공적 공간은 획기적으로 변했으며, 블룸버그 시장의 최대 업적이 된 것은 물론, 교통국 수장인 자넷 사딕칸은 세상을 바꾸고 있는 정책가로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이 이야기의 결말이다. (p.137-138)
2010년에 출간된 '뉴욕 시 그린인프라스트럭처 플랜 보고서(NYC Green Infrastructure Plan)'는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며,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과거의 집중형 하수처리장의 증설을 대신하는 분산형 빗물 집수시설, 즉 그린인프라의 도입이다. 빗물이 하수관거에서 오수와 합류되면, 하수처리장의 처리 용량을 넘어서게 되고, 그 결과 우오수 합류수는 그대로 하천과 해안으로 방류된다. 이것을 고치기 위해 하수처리장 용량을 늘리는 것은 천문학적 비용을 동반하며,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그리 타당하지 않다. 비가 내릴 때만을 위한 기계적 시설투자보다는 사계절 내내 즐길 수 있는 녹지를 늘림으로써, 하수관으로 유입되는 우수의 양을 줄이고, 토양으로의 침투를 촉진하며, 도시와 지역에 사회적, 생태적 혜택을 동반하자는 것이 뉴욕 시 그린인프라 프로그램의 주된 아이디어다. (p.141-142)
도시의 수평적 팽창과 신도시 건설은 교통과 인프라에 소요되는 비용을 급증시키고, 공해를 심화시키며 자동차 위주의 생활패턴을 촉진한다. 체계적으로 고층건물의 배치를 계획하지 못하면, 기업은 도시 곳곳의 싼 필지를 찾아 기회주의적으로 단독으로 초고층을 시도하기 마련이다. 대개 대중교통과 연계되지 못한 이러한 개발 형태는 또 다시 대형 주차장과 교통 체증을 불러오는 악순환을 유발하며, 주변의 저층 주거단지나 상업지구와 이반되는 상황을 초래하기 십상이다. 또 사회적 형평성의 측면에서 도시적 맥락(urban fabric)과 동떨어진 초고층 건물은 종종 특혜와 부정부패를 불러온다. 도심의 고밀화와 주거-사무-상업의 복합 개발은 젊은 노동 인력이 먼 외곽이 아닌, 직장과 가까운 곳에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데 기여한다. 미드타운 맨해튼은 이 모든 것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는 배움터이며, 그것이 어바니스트와 일반 관광객과의 관점의 차이다. (p.151-152)
링컨센터를 참고로 할 때, 우리는 뉴욕이라는 특수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자체의 재정 상황이나 시민의 문화적 취향, 장르별 호응도나 관객층의 두께를 고려할 때, 지방 도시에서 기존 시설과 중복되는 오페라하우스나 음악당 설립을 추진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도시를 살리기는커녕 미래 세대의 부담으로 돌아올 예견된 재앙일 뿐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1960년대 미국보다는 훨씬 더 민주적인 개발 절차를 요구하고 있다. 링컨센터는 록펠러 가문이 있었기에 만들어졌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제대로 된 클래식 공연에는 어마어마한 예산과 운영비가 소요되기 때문이다. 링컨센터가 기존의 카네기홀이 하던 역할을 나누면서 설립되었을 때, 과연 한 도시에 공연장 두 곳을 유지할 만큼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토대가 충분한지를 놓고 논쟁이 있었다. 세계 최고의 부와 예술가를 보유한 뉴욕에서 나왔던 우려다.
음악을 모르는 행정가일수록 공연장 건립을 가볍게 생각한다. 짓는 게 능사가 아니라 경제적, 인적 자원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런 점에서 특히 앞으로 지방 도시에 지어질 공연장은 링컨센터보다는 좀 더 지속 가능한 모델을 생각해야 한다. 즉 공연 때만 사용하고, 대부분의 시간은 텅텅 비어 있는 형태가 아니라 사시사철, 일주일 내내, 주야로 활용되며, 복합적 프로그램을 통해 시민들이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는 실용성을 전제해야 한다. 아트센터 모델을 도입한다면, 고급문화를 모아둔 0.1퍼센트의 취향이 아니라 지역의 실질적인 공간 수요에 부합할 수 있는 형태여야 한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클래식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대중이 원하는 음악을 수준 높게 전달하는 데 목표를 둬야 한다. 결혼식이든, 파티든, 종친회든, 동창회든 지속적인 대관을 통해 자체적인 생존의 방편을 마련할 수 있어야 하고, 지역사회와 호혜적 관계가 되는 문화시설을 개발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링컨센터의 실수를 답습하지 말고, 도시적 흐름과 부드럽게 연결되며 기존 건물이나 주변 건물과의 시너지 효과를 모색해야 한다. 무조건 다 철거하고 새로 짓는다고 해서 명품 건축이 되라는 법은 없다. (p.213)
인류가 만든 가장 큰 창작물, 뉴욕은 지구상의 도시가 할 수 있는 실험을 먼저 해 왔다. 때로 그것은 성공했고, 때로 실패했다. 눈부시기도 했고, 절망적인 때도 있었다. 지독하게 차가 막히고, 사람들이 신호등을 지키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은 다른 말로 하면 차량 흐름이 느려 지나가는 행인에게 덜 위협적이고, 보행자가 우선권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도시의 상징이 되는 아름다운 초고층 빌딩이 많아 수십 킬로미터 밖을 내다볼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것은 반대로, 그 빌딩 아래쪽 도로와 광장이 어둡고 싸늘하며 대부분의 사무실에서는 하늘 한 조각 갖기 힘들다는 의미다. 뚱뚱한 노란색 옐로우캡이 고전적인 뉴욕의 상징이긴 하지만, 반대로 오랜 시간동안 서비스의 품질에 획기적인 개선이 이뤄지지 못했다는 역설이기도 하다. 모든 인종과 문화가 뒤섞여 다양성이 높다는 사실은, 곧 언어의 소통이 불편하므로 빠른 속도로 사회적 변화를 추동하기 어렵고 문화 간 충돌에 따른 불화가 잦다는 뜻도 될 수 있다. 새로운 사업과 투자, 성공의 기회가 열려 있다는 것은 언제든 바닥도 없이 추락할 수 있음을 전제한다. 홈리스가 많다는 사실, 그리고 집값이 턱없이 높다는 사실은 주택 공급량이 딸리고, 신증축에 대한 시장 외적 제약이 많다는 의미기도 하고, 혹은 도시의 경제적 성공으로 인한 급속한 인구 유입의 탓일 수도 있다. 화려한 조명으로 밤이 아름다운 도시는 그만큼 빛 공해가 심한 곳이란 의미이기도 하다. 도시는 항상 이중적이다. (p.276)
건축이 바꾼다 / 박인석 / 마티
그렇다면 건설산업에서 '생산과정 효율화'의 가능성은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대할 것이 없다. 혁신은커녕 인건비 절감을 위한 고용 구조조정조차 불가능할 지경이다. 왜냐고? 더 이상 절감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당장 인터넷을 켜고 오래전부터 뉴스에 자주 등장했던 기업 구조조정과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노사 갈등 관련 뉴스들을 검색해보라. 모두 자동차, 철강 산업, 또는 금융업이나 공무원 노조들 뉴스다. 건설업체들이 이 문제로 뉴스거리가 되는 일은 거의 없다. 왜냐고? 한국 건설업은 원래부터 일용 노동자들, 즉 비정규직 노동력으로 운용해온 산업이기 때문이다. 하도급에 또 하도급을 거듭하는 고질적인 다단계 하도급으로 불거진 부실공사 문제가 한국 건설업 뉴스의 단골 메뉴였음을 다들 기억할 것이다. 이 다단계 하도급 연쇄 고리 말단에 일용직 건설노동자들이 있다.
실제로 고용노동부가 매년 발표하는 '고용형태 공시 결과'를 보면 2016년 현재 건설업 종사 노동자 중 일용직 등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이 76.4%에 이른다. 한마디로 한국 건설업의 고용 구조는 이미 '유연화'된 상태이므로 더이상 '노동시장 유연화'를 통해 생산비용을 절감할 여지가 없다는 이야기다.
"건설업의 고용구조는 원래 그런 건데 한국 건설업만의 문제인 것처럼 따질 일은 아니다"라는 반론이 있을법하다. 이제껏 건설업의 하청구조와 일용직 노동에 워낙 익숙한 터라 '건설업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는 전혀 틀린 말이다. 일본의 경우 건설업 총 취업자 중 비정규직은 12.8% 수준에 머문다. 건설업 노동자 중 87.2%가 정규직이라는 이야기다. 일본만이 아니다. 스웨덴은 92%, 독일은 90%가 정규직이다. 독일은 일용직 고용을 금지하고 있어서 나머지 10%도 기간을 정하여 계약한 기간제 비정규직이다. (p.59-60)
소규모 건축물들은 시민들 매일의 삶터이자 동네와 도시공간환경의 중추다. 소규모 건축물의 질에 투자하는 정책은 도시의 질과 시민 삶의 질을 높이는 직접적 효과를 노리는 정책이다. 이와 더불어서 생산 주체인 소규모 건설업체들이 질 좋은 건축생산에 힘을 기울이도록 이끄는 정책이다. 이를 통해 소규모 건설업체들 속에서 경영 상태가 건실한 건강한 업체들이 늘어나도록 하는 정책이다. 이때 비로소 고질적인 건설업 고용구조 역시 개선의 실마리가 잡힐 것이다. (p.65)
코끼리와 벼룩 / 찰스 핸디 / 모멘텀
1956년 당시 셸은 신입사원인 내게 회사 연금 규정을 말해주면서, 과거의 통계치가 정확하다는 전제 아래 내가 은퇴 후 18개월 동안 연금을 수령할 것이라 덧붙였다. 실제로 나의 아버지는 은퇴 후 정확히 20개월을 더 사셨다.
하지만 1981년에 이르자 사정이 달라졌다. 은퇴에서 사망까지 18개월이 아니라 18년의 세월이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텔레비전 시청, 여행, 골프 등 아무리 많은 여가 활동을 동원한다 해도 18년은 그런 것들로 간단히 채울 수 있는 세월이 아니다. 게다가 국가 연금이라는 것이 그런 사치를 허용해줄 것 같지도 않다. 사람들은 그 시간을 장밋빛으로 포장하기 위해 '제3시대(Third Age)'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름만 그럴듯하게 붙이면 뭐하나.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어떻게 보낼지, 또 이 기간 동안 생활비는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p.20)
나는 아버지의 주례로 결혼한 사람들, 아버지에게 세례를 받은 그들의 자식들, 성장하고 나서 다시 아버지 교회에서 아버지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린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아버지의 무덤 곁에 서서 이 '조용한' 사람에게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달려온 수백 명의 사람들이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과연 내 장례식에 눈물을 흘리면서 찾아줄 사람이 있을까? 성공이란 무엇이고 나와 내 아버지 중 누가 더 성공한 사람인가? 인생은 무엇을 위한 것이며 우리가 지상에 존재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질문도 아니었다. 나는 철학을 공부했고 이런저런 이론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것들을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적용해본 적이 없었다. (p.56)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열두 살 혹은 열다섯 살에 학생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은 길다. 그러니 선택을 가능한 한 미루는 것이 좋다. 학습에 관한 잠재력보다는 표현된 재능을 근거로 학생을 판단하는 교육제도는 대단히 불합리하다. 그것은 학생이 10대 중반에 흥미를 느끼는 과목에 근거해 학생의 미래를 결정짓는 것이다. 이런 결정에는 학생들이 그동안 만난 교사나 그들이 감당해야 하는 학교 시간표 등의 요인이 너무 크게 작용한다. (p.69)
대학 시절 나는 내가 제출한 논문들을 크게 소리 내 읽었다. 지도교수는 반드시 낭독을 시켰다. 나는 교수가 게을러서 그렇다고 생각했으나 읽는 것보다 듣는 데 에너지 소모가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낭독은 나의 글쓰기 스타일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요즈음 학자들이 즐겨 쓰는 괄호 속의 긴 문장을 쓰지 않는다. 괄호 속 문장은 부드럽게 읽어 내려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훗날 나는 이탈리아 아이들의 학과목 시험이 주로 구술시험이라는 사실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니 이탈리아 사람들이 말을 잘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인터넷보다 전화를 더 좋아한다. (p.80)
나는 학교가 인생을 미리 실험해보는 안전한 장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시험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재능을 발견하는 곳, 자기의 과제와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을 배우는 곳,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언제 필요한지를 깨닫는 곳, 인생과 사회에 대한 가치와 신념을 탐구하는 곳이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내가 볼 때 그런 것들이야말로 지식 위주의 교과 과정보다 더욱 매력적인 교육이다.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학생들 모두에게 황금 씨앗을 주어야 한다. 음악가, 기업가, 사회사업가인 어니스트 홀은 세계적인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고 말했다.
"왜 우리는 학생들에게 그들의 본질을 가르치지 않는가? 우리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넌 네가 누구인지 아니? 넌 하나의 경이로움이야. 넌 독특한 아이야. 이 세상 어디에도 너하고 똑같이 생긴 아이는 없어. 네 몸을 한번 살펴봐. 다리와 팔, 귀여운 손가락, 그것들이 움직이는 모양 등 모두 하나의 경이로움이야. 넌 셰익스피어, 미켈란젤로, 베토벤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어. 네게는 어떤 것이든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넌 정말로 하나의 경이로움이야." (p.91)
앞으로 몇 십 년 동안 새로운 코끼리들이 직면해야 할 문제는 각양각색의 파트너 체인망(네모꼴의 피라미드가 아니라 항공망도와 같은 것)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다. 게다가 그 체인망을 관리하는 직원들이 저마다 생각과 야망을 가진 개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코끼리 기업의 경영자들이 안고 있는 문제가 얼마나 복잡한지 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컨설턴트들은 그렇게 생겨나는 회사 조직이 기본적 구조틀(matrix) 이상을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 틀이 아주 복잡한 네트워크 같은 것이 되리라 전망한다. 동시에 그런 네트워크를 연방(federation)이라 부르고 싶다. 연방은 첫 번째 도전에 대한 나의 처방전으로, 조직이 크면서도 작아야 할 필요를 강조한다.
연방주의(Federalism)는 인간적 규모의 공동체를 거대 규모의 복합체와 연결시키는 검증된 방식이다. 하나의 마을, 하나의 시장, 하나의 생태계, 하나의 정치 체제를 갈수록 더 지향하고 있는 세계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거대 규모의 복합체가 필수적이다. 반면 개인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소규모의 조직이나 공동체의 존재도 필요하다. 이 두 필수 사항을 종합하려면 연방주의가 제격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연방주의가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두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정부나 기업은 물론이고 보건, 교육, 자원봉사 분야에도 연방주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p.124-125)
이제 대기업들은 사회적 책임을 재규정해야 한다. 이익금의 일부를 떼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려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회사가 이익을 얼마나 올리고 그 수익금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궁리하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회사를 얼마나 정직하게 운영하며 서로 다른 이익단체의 요구를 얼마나 균형 있게 들어주는지가 중요하다.
환경과 사회봉사 감사 결과를 공표하고 이 두 가지 기준에 대한 기여도가 회사 재무제표의 맨 아랫줄에 표시되어야 한다. 이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선진 대기업의 표준 절차가 되어가고 있다. 젊은 중역 그룹의 권유를 받아들여 BP는 'BP(British Petroleum)'가 '석유를 넘어서(Beyond Petroleum)'를 의미한다고 발표했다. 대단히 파격적이고 멋진 아이디어인 만큼 BP는 그 멋진 표어에 상응하는 실질적인 결과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대기업의 이런 움직임은 직원들이 주주의 이익을 늘려주는 것 외에 자신의 시간과 노동에 대한 보람을 느끼고자 한다는 강력한 표시다. 자신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일한다고 느끼고 싶은 것이다. 회사들이 약간의 자선 행위로 명성을 살 수 있었던 시대는 지났다. 사람들은 이제 회사들이 돈을 얼마나 버는지가 아니라 그 돈을 '어떻게' 버는지에 집중한다. 국가 예산보다 더 많은 매출을 올리면서 그 돈이 만들어지는 방식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p.143)
하지만 회사의 많은 자산들이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것, 즉 단 하루 만에 사직 예고를 하고 퇴사할 수도 있는 직원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마당에 주주들이 회사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사치 앤드 사치의 이사회가 회사명을 제공한 사람인 모리스 사치를 사장직에서 해고했을 때 사치는 그 결정에 순순히 복종한 대신 브리티시 에어웨이스와 마르스 같은 주요 거래처와 핵심 직원을 데리고 나갔다. 그 직후 회사의 주식이 절반으로 떨어졌고 사치 앤드 사치의 주주들은 반토막이 된 회사를 소유하게 되었다. 사실 주주의 소유권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정의를 내릴 수가 없다. 내가 셸의 주식을 약간 갖고 있다고 해서 그 회사 사무실을 임의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비상시에 돈을 빌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회사에는 주주인 나나 다른 사람이 소유한 노예는 단 한 명도 없고 단지 법과 계약에 의해 규정된 권리를 가진 직원들만 있는 것이다. (p.148-149)
아이들이 함께 놀지 못하는 세상은 대체 어떤 세상인가? 최근의 미국 방문에서 로버트 포겔이 지적한 목적의식의 상실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아주 오래된 딜레마다.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면 손에 들어온 그것을 더 이상 원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공의 역설이기도 하다. 역설적이게도 사회 구성원에게 그들이 얻고 싶어 하는 것을 비교적 젊은 나이에 얻게 해주는 사회는, 나중에 그 사회에 번지는 권태의 파도에 그들을 일찍 노출시킨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돈은 많은 것을 살 수 있는 구매력을 주지만, 그런 물질적 욕구가 충족된 이후의 삶의 목적까지 제공해주지는 못한다. 물론 구매를 유혹하는 친도구는 더 많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곧 시들해진다. 그러니 보람 있는 인생을 영위하려면 자기 자신의 범위를 뛰어넘는 목적을 반드시 지니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기적 자본주의는 이런 목적을 홀대해 중요도 리스트의 맨 밑바닥에 놓고 있다. (p.221)
세계의 가난한 나라들은 성공적인 자본주의를 만들어낼 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데 단 하나, 자본이 없다. 가난한 나라들은 엄청난 자산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자산을 유동적인 가용 자본으로 전환하는 힘이 전혀 없다. 발전도상국의 국민이 가지고 있는 자산, 즉 집, 가게, 회사의 80퍼센트가 합법적인 것이 아니므로 '죽은 자본'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자산이 비공식 경제 속에 편입되어 있을 뿐 합법적인 부동산 권리제도 내에 등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자산의 주인들은 그것을 담보로 돈을 빌릴 수도 없고 그것을 판매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현재 상태에 갇혀 옴짝달싹 못한다. 이제 세계는 부동산 권리가 확립되어 자본을 만들어내는 나라들과, 부동산 권리를 지니고 자본을 만들어내는 소수 계급과 전혀 그렇지 못한 다수 계급으로 구성된 나라들로 나뉜다. 합법적인 재산은 자산을 등기하는 제도의 정비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생각하는 방식의 변화를 촉진하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그 자산을 이용해 잉여 가치를 만들어낸다는 사상을 심어준다. 서방 세계의 사람들은 부동산 권리를 너무나 당연하게 여긴다. 하지만 전 세계 2백여 개 국가들 중 겨우 25개 국가만이 보편적인 재산권을 확보하고 있어 그것을 가용 자본으로 전환할 수 있다. (p.233)
남들보다 낫기보다는 남들과 달라야 한다. 이 화두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나는 새로운 통찰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으려면 자신의 전문지식 분야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회사들을 상대로 종종 지적하듯이 진정한 혁신은 해당 산업 바깥에서 온다. 회사 내부에서 오는 것은 친숙한 것의 변형일 뿐 진정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다. 나는 이 통찰이 남보다 낫기보다는 다르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사물을 새롭게 보거나 새로운 무언가를 보기 위해 때때로 낯선 세계를 거닐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자신에게 그것을 강요해야 한다. (p.263-264)
타당한 개념을 발견하는 것과 그것을 회사 주변의 삶을 조명하기 위해 직접 적용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암기 교육을 강조하던 나의 학창시절을 회상해보면 사용하지 않은 지식은 며칠 후나 몇 주 후에 증발해버렸다. 몇 년에 걸쳐 프랑스어의 동사어미 변화를 기계적으로 암기했지만 정작 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 지식은 내 머릿속에서 증발된 지 오래였다. 물론 내가 경험한 흥미로운 지식을 그대로 쌓아두는 것이 해가 될 리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면 그것은 곧 사라져버린다. (p.268)
당신은 당신 내부에 있는 검증되지 않은 가능성을 최대한 발현해야 한다. 당신은 그런 의무를 회피할 수 없다.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것을 르네상스 시기의 철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는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우리 내부에 있는 가장 위대한 '그것'이다." 피치노는 '그것'을 영혼이라 불렀다. 그의 모든 저작은 그 위대한 자아에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p.273-274)
하지만 곧 나의 빈 시간표는 즐거움이 아니라 근심거리가 되었다. 황홀함은 고통으로 바뀌었다. 회사는 일종의 감옥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한 가지 큰 혜택이 있었다. 회사는 일을 준다. 전화, 팩스, 이메일, 회의실, 복도에서의 우연한 마주침, 결재서류함 등을 통해 당신에게 끊임없이 임무, 과업, 기회의 흐름을 제공한다. (...)
하지만 마감일이 없는 인생은 아무런 우선 사항도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것을 해내야 한다는 압박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설정한 마감일은 손쉽게 바뀌거나 사라진다. 나를 원하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는 느낌이 들면서 마치 나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다른 책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역할 저부하는 과부하보다 스트레스가 훨씬 크다. (p.277-278)
포트폴리오 일은 그것이 일종의 윤작이라는 데에 매력이 있다. 공부하는 일도 쉬는 시간이 충분해야 비로소 윤택해진다. 너무 많이, 너무 빨리 쓰면 그 다음 날은 아무것도 못한다. 어느 날 저녁에 어떤 책을 너무 많이 읽으면 그 다음 날 그 책을 다시 읽어야 한다. 나는 어떤 날은 그냥 글을 읽거나 쓰고, 어떤 날은 앉아서 생각을 하고, 어떤 날은 그냥 앉아 있기만 한다. 바쁜 생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런 생활을 설명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p.285)
진정으로 변화시키겠다는 의욕을 갖고 있다면 세상은 변화한다. 개개인이 해야 할 일은 자기 판단에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인생관으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나가는 것이다. (...)
중국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다. "행복은 할 일이 있는 것, 바라볼 희망이 있는 것, 사랑할 사람이 있는 것 이 세 가지다." (p.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