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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캐럴 / 찰스 디킨스 / 비꽃

 

 외부기온이 높거나 추운 건 스크루지에게 아무런 영향도 못 끼쳐. 날씨가 아무리 더워도 안 덥고 아무리 추워도 안 춥거든. 스크루지만큼 모질게 물어뜯는 바람도 없고 스크루지만큼 집요하게 퍼붓는 눈보라도 없고 스크루지처럼 매정하게 때리는 빗줄기도 없어. 아무리 궂은 날씨도 스크루지보다 심하진 않아. 엄청난 폭우와 폭설과 우박과 진눈깨비가 스크루지보다 낫다고 자랑할 수 있는 건 딱 하나야. '넉넉하다'는 사실 말이야. 스크루지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거든.

 

 스크루지는 유령이 하는 말에 화가 치밀어서 자기도 모르게 현재의 자신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처럼 말했어.
 "그런 게 아니오, 유령님. 그런 게 아니오. 영감님한텐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힘도 있고 불행하게 만들 힘도 있소. 우리가 하는 일을 편하거나 힘들게, 즐겁거나 고통스럽게 만들 힘 말이오. 입에서 나오는 말과 표정 하나하나에서, 너무 사소하고 하찮아서 덧붙일 수도 없고 셀 수도 없는 행위 하나하나에서 그런 힘이 솟구쳐 나온다면 유령님은 뭐라고 하시겠소? 영감님이 베푸는 행복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값진 것이오."

 

 닭고기나 칠면조를 파는 정육점은 아직도 절반이 문을 열고 과일 가게는 저마다 화려한 자태를 뽐냈어. 알밤을 잔뜩 넣어서 올챙이배처럼 동그란 바구니는 명랑한 배불뚝이 노신사가 입은 조끼처럼 생겼는데, 알밤이 문가에서 삐져나와 중풍에 걸린 뚱보처럼 거리로 굴렀어. 스페인산 양파는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얼굴에 넓은 허리띠를 두른 스페인 수도사처럼 뚱뚱한 몸집을 자랑하며 선반에 놓였는데 지나가는 아가씨들한테 음흉한 눈빛으로 윙크하다가 벽에 걸린 겨우살이 나뭇가지를 점잖게 바라보았어. 배와 사과를 수북하게 쌓은 모습은 피라미드에 꽃이 활짝 핀 것 같고 포도송이는 눈에 잘 띄는 고리에 매달아서 사람들이 지날 때마다 공짜로 군침을 흘리도록 상점 주인이 선심을 썼어. 잎사귀가 붙은 갈색 개암열매는 잔뜩 쌓인 채 향긋한 냄새를 풍겨서 발목까지 빠지는 낙엽을 헤치며 숲을 거닐던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고, 동쪽 지방에서 수확한 사과는 땅딸막하고 가무잡잡해서 샛노란 오렌지와 레몬을 돋보이게 하지만, 과즙이 풍부하고 생김새는 얼마나 앙증맞은지 '나를 종이봉투에 넣고 집으로 가져가서 후식으로 먹어주세요' 하고 간절히 애원하는 듯했어. 최고급 과일이 즐비한 사이에서는 어항이 눈에 띄는데, 금붕어와 은붕어가 둔하고 굼뜬 종족인데도 여느 때랑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 같아. 나름대로 흥분한 듯 아가미를 뻐끔거리면서 자기네가 사는 비좁은 세상을 느릿느릿 돌고 또 돌았거든.

 

 "인간이라면, 돌덩이가 아니라 심장을 지닌 사람이라면, 넘치는 인구가 무슨 뜻이며 그래서 어떻게 사는지 제대로 깨닫기 전에는 사악한 입으로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어떤 사람이 살고 어떤 사람이 죽을지 네가 결정할 작정이냐? 하느님 보시기에 너 자신보다 이렇게 가난한 집 아이 수백만 명을 살리는 편이 훨씬 소중하다. 아, 하느님! 나뭇잎에 달라붙은 버러지가 먼지 구덩이에서 굶주리며 살아가는 형제한테 너무 오래 산다고 떠들어대는 소리를 들어보소서!"

 

 특별한 게 조금도 없는 집안이야. 가족이 잘생긴 것도 아니고 입성도 변변치 않아. 신발은 방수와 거리가 멀고 입을 옷조차 부족해. 피터는 전당포까지 들어갔다 나온 경험이 있을 가능성도 커. 하지만 가족은 함께 있는 시간이 행복하고 감사하고 즐거우며 현재에 만족했어. 유령이 횃불로 불꽃을 눈부시게 뿌리며 헤어지느라 보브네 식구가 희미하게 보일 때도 여전히 더할 수 없이 행복하게 보이는데 스크루지는 그 집 식구 한 명 한 명을, 특히 꼬맹이 팀을 마지막까지 계속 쳐다보았어.

 

 세상 사람 일부는 스크루지가 변한 모습을 보고 비웃기도 하지만 본인은 남이 비웃건 말건 개의치 않았어. 앞에 나선 사람이 처음에 조롱하는 분위기를 못 견디면 세상에 좋은 일은 영원히 안 일어난다는 사실을, 자신은 이런 비웃음을 못 본 척하면 그만이지만 사람들은 얼굴을 찡그리는 대신 차라리 비웃기라도 해서 눈가에 주름을 잡으면 훨씬 좋다는 사실을 깨달았거든. 그래서 마음이 편해. 스크루지는 그걸로 충분했지.

 

 

지상의 모든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 게리 폴 나브한 / 아카이브

 

 오늘을 사는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가 먹는 음식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기껏해야 주식으로 삼는 주요 작물들의 지리적·문화적 기원을 막연하게 알고 있을 뿐이다. 그저 우리가 먹고 싶기만 하면 종자 관리자와 식물 육종가, 묘목업자, 농부들이 농작물 공급 및 배급망을 동원해 언제든 식량자원을 구해 올 수 있을 것이라 쉬이 믿어버린다. 그러나 1941년 레닌그라드의 종자 지킴이들처럼 우리는 지금 시간과 싸움을 벌이고 있다. 지구의 종자 다양성은 바람이 휙 불면 꺼져버리는 촛불처럼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 그 어떤 생명공학도 세계 구석구석 농부들의 밭에서 자라는 다양한 종자 속에 이미 존재하는 유전적 변이를 '발명'하거나 대신할 수 없다. 우리는 이제야 다양한 씨앗을 형태론적 특성에 따라 분류하기 시작했을 따름이다. 이 씨앗들의 유전적 관계와 잠재적 용도가 무엇인지는 아직 제대로 이해조차 못 하고 있다. 생명공학을 이용해 새로운 품종을 개발할 수 있건 없건 간에 수천 년간 농부들이 선발하고 재배한 다양한 종자는 미래의 작물 개량을 위한 주요 수원지이자 유전자 풀(gene pool)이다. (p.41)

 

 식량다양성과 풍요, 건강과 식량안보, 즉 공동체나 국가가 영양결핍과 기아를 막는 능력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이 바빌로프다. 바빌로프는 그의 주요 저술에서 이런 관계를 충분히 증명했다. 사람들은 아일랜드의 감자 기근을 겪은 후에도 주요 작물의 유전자 풀이 작을 경우 다양한 병충해저항력을 갖출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바빌로프가 그런 원리를 설명하지 않았다면 아직까지도 아일랜드 감자 기근은 예외적 사례로 여겨질지 모른다. 오늘날에도 작물다양성이 장기적인 식량안보를 보장해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기아와 영양결핍 문제에 깊이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조차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실정이다. (p.52)

 

 유전자 침식 또는 생물다양성 소실의 원인은 여러 가지다. 우선 다양한 전통작물이 한 가지 환금작물에 자리를 내주었으며, 산업화 또는 도시화 때문에 농업경관이 달라지거나 붕괴되었고, 작물 생산에 쓰이던 물이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다. 게다가 기업이 홍보하는 하이브리드 종자에 농부들이 현혹되다보니 시골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종자 보존 지식마저 사라지는 실정이다. 식물특허법과 자유무역협정으로 다양한 전통작물의 현지 생산이 금지된 것도 한몫하고 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는 지난 세기에 작물 유전자다양성의 4분의 3이 소실되었으며 6300종의 가축 중에서 1350종이 위험에 처해 있거나 벌써 멸종했다고 추정한다. 가축과 종자의 다양성 모두가 현저하게 감소한 것이다. (p.54)

 

 

뒤에 올 여성들에게 / 마이라 스트로버 / 동녘

 

 도서관이 나를 달래줬다. 거대하고 조용하고 질서 정연하며 차분한 곳, 일상의 소동과 법석으로부터의 도피처다. 나는 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살아왔다. 어린 시절엔 브루클린의 공립 도서관에서, 그 후로는 코넬과 터프츠, MIT, 하버드의 도서관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장서에 빠져드는 특권을 누렸고, 그 덕에 앞선 이들의 지혜와 어리석음을 읽어 내려가며 숱한 시간을 보냈다.

 

 엄마는 어릴 때 자신에 대해 포부가 컸지만, 환경 탓에 포부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고등학생 시절 우등생이었고, 선생님들은 법과대학에 가라고 권했다. (1920년대 초반에는 고등학교에서 바로 법과대학으로 진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외삼촌이 공부를 더 하는 건 이기적이라고, 맏딸이니 취업해서 부모님 짐을 덜어드리라고 말했다.

 

 "밀은 모두가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할 권리가 있다고 했어. 사람들에게 지워지는 제약은 대부분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부과된 것이라고, 좋은 사회는 이런 사회적 제약을 없애는 사회라고 말했지."

 

 다른 한편으로 경제학자들이 '불완전한 정보'라고 부르는 상태로 박사과정을 하기로 결정한 것은 행운이다. 훌륭한 대학교수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 길을 갔을지 잘 모르겠다. 나는 기회를 놓쳤을 것이다, 그것도 크게.

 

 우리는 새뮤얼슨의 수식을 붙들고 머리를 싸매며 숱한 시간을 보냈다. 역설적으로 명쾌한 강의를 들었을 때보다 수업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새뮤얼슨의 수업을 경험한 뒤, 명석한 학생들에게 전혀 정리되지 않은 내용을 던져주는 것이 아주 좋은 수업 전략이 아닐까 진지하게 의심했다.

 

 요즘은 대중매체에서 경제에 대한 논쟁을 접할 때마다, 모든 비평가들이 솔로의 수업을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 멍청한 소리도 훨씬 덜하고, 불경기에 정부가 '가정처럼' 예산 수지를 맞춰야 한다는 헛소리도 덜할 것이다. 불경기나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려면 지출을 늘려야 한다. 다른 나라가 우리 상품을 수입하는 것을 제외하면, 지출의 주체는 소비자와 사업체, 정부다. 그리고 소비자와 사업체가 지출을 줄이는 것이 바로 경기 침체의 특성이다. 소비자 중 상당수가 실업 상태거나 실업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사업체는 소비자와 다른 사업체들이 지출을 줄이면 이익을 거둘 투자처를 찾지 못하기 때문에 지출을 줄인다. 이런 상황에서 지출이 늘어나려면 정부의 지출을 늘릴 수밖에 없다. 불경기는 정부가 긴축예산을 꾸릴 시기가 아니다. 기간 시설 보수나 교육 등에 공공 지출을 늘릴 시기다. 하지만 정부는 호황기에 지출을 삭감해서 이전 경기 침체 시기에 쌓인 적자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단서 조항이다. 정부 지출은 계속 적자를 만드는 게 아니라 경기순환과 거꾸로 움직여야 한다.

 

 나는 사교 모임에서 친절한 동료들이 내 작업에는 적의를 드러내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샘에게 이 문제를 이야기하니 직설적인 답이 돌아왔다. 그들은 나를 인간적으로 좋아하지만, 동료로 삼는 데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엄마에게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살아남는 거지." 엄마는 굳세게 대답했다.
 엄마가 80대 후반에 접어들었을 때, 나는 오래 살아서 무엇이 제일 좋은지 물었다. 엄마는 눈빛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다음 페이지에 무엇이 있는지 보는 게 좋단다."

 

 시간을 쓰는 방법은 살아가는 방법이다. 시간을 아끼는 데 끊임없이 초점을 맞추면 단순한 즐거움을 시야에서 놓치고 만다. 개인 생활이나 직업에서 압박의 한복판에 있다 보면 대개 삶의 기쁨에 초점을 맞추기 어렵지만, 언제나 노력할 가치가 있다.

 

 

어떻게 일할 것인가 / 아툴 가완디 / 웅진지식하우스

 

 사람들은 성실함의 미덕을 과소평가한다. 아마도 '성실'이라는 단어가 주는 재미없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이 말에는 뜻한 바를 이루고자 부단히 노력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데 주위의 누군가가 자신의 주된 인생 목표가 성실이라고 한다면 그 삶은 정말이지 답답하고 야심도 없어 보이지 않나. 그러나 위대한 성취의 이면에 항상 자리하는 것이 바로 이 성실한 자세다. 동시에 위험 부담이 크고 중대한 소임을 맡은 사람들이 가장 등한시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성실성은 일과 인간 행동에 대해 높은, 어쩌면 불가능해 보이는 기대치를 설정한다.

 

 숭고한 목표를 한 꺼풀만 벗기면 거기에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고되고 불분명한 노동이 자리하고 있다. 소아마비 근절이 기념비적인 일이라면 이는 곧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의료 행위를 기리는 기념비일 터이다. 원대한 꿈이 세세한 주의를 기울이는 근면성을 만났을 때 성취될 수 있는 결과를 보여 주는 기념비 말이다.

 

 설명을 듣다 보니, 이들은 민간 의료계에 종사하는 우리가 기껏해야 한 번 시도할까 말까 한 어떤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업무의 과학적 체계 만들기, 즉 이미 갖고 있는 지식과 기술을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늘 연구하고 개선하는 시도가 그들에겐 일상이었다. 그들은 어마어마한 성과를 불러온, 지극히 간단하고도 진부하기까지 한 변화들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질병과 싸우는 이 일은 유전자나 세포와의 씨름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 관계 설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의사라는 직업이 그렇게 복잡하면서도 매력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각각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느냐에 따라 의사를 신뢰할 수 있는지, 환자의 말을 제대로 듣는지, 올바른 진단이 내려지는지, 적절한 치료가 이뤄지는지 여부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영역에서 완벽한 공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한때는 의사로서 가장 힘든 싸움이 기술을 터득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비록 일에 자신감이 붙기 시작하려는 찰나 실패를 겪고 좌절하곤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업무가 주는 긴장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가끔 지칠 대로 지쳐 너덜너덜해지기는 해도 말이다. 내가 깨달은 바로는, 의사라는 직업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는 능력 안의 일과 능력 밖의 일을 아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 의사들이 살릴 수 있는 환자와 가망이 없는 환자를 훤히 알고 있기라도 하듯 묻곤 한다. 분석가들은 종종 공공 의료 예산의 4분의 1 이상이 임종 전 마지막 6개월에 투입된다는 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꼬집는다. 그렇다. 어떤 환자가 6개월 이상 살 것인지 알 수만 있다면 결실 없는 소비는 막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확신도 없는 상황에서도 분명한 것은, 우리는 끝까지 싸우는 의사이고 싶다는 사실이다.

 

 버지니아 아프가가 분만에서 그 가능성을 보여 준 것처럼, 성과를 평가하는 유효한 방법을 찾아내는 일은 그 자체가 창의적 발명이다. 하지만 그 잣대를 실제로 적용하는 일에는 또 다른 종류의 창의력이 요구된다. 그리고 개선이란 과업에는 궁극적으로 이 두 가지 창의력이 모두 필요하다.

 

 의료계는 나날이 진보하는 복잡한 지식과 치료법을 따라잡으려고 부단히 애쓰면서도 가장 단순한 처치 하나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 버윅은 의료계를 뜯어 고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우리 스스로를 헤아려 보고, 우리의 일을 공개하는 것이다. 수술 합병증 비율에서부터 환자에게 약을 제때에 제대로 처방하는 횟수에 이르기까지, 의사와 병원의 치료 성과를 빠짐없이 살피면서 정기적으로 비교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뿐 아니라 병원은 환자에게 전적으로 정보를 개방해야 한다. "'비밀 불가'가 내 도망불의 새로운 원칙입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버윅은 당혹스러운 점이 있기야 하겠지만 공개가 곧 의료 질 향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렇게 되면 의사보다는 환자의 복지와 편의가 으뜸이 되고 또한 근본적인 도덕적 선에도 이바지할 것이다.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잘 알게 될 테니 말이다.

 

 워릭은 매일매일 99.5퍼센트의 성공과 99.95퍼센트의 성공 사이의 차이를 살피는 데서 탁월함이 나온다고 믿었다. 물론 인간이 하는 다른 수많은 일도 마찬가지다. 높이 뜬 공을 잡아 내는 것도 그렇고, 마이크로칩을 제조하는 일도 그렇고, 익일 배송 소포를 배달하는 일도 그렇다. 의료 분야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사소한 차이에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한다는 사실이다.

 

 돈 버윅은 우수한 성과의 비결을 찾아서 배우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 누가 실적이 좋은지 모르기 때문에 그러한 교훈은 숨어 있다. 모든 결과를 알아야만 그 '긍정적 일탈자'를 찾아 그들에게서 한 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

 

 등급을 매기는 추세는 의료계의 일만이 아니다. 소방관, CEO, 영업사원 들이 그렇다. 심지어 교사마저 등급이 매겨진다. 어떤 곳에서는 이미 그에 맞춰 대우를 한다. 이렇게 등급으로 평가된다는 사실은 매우 거북하다. 제대로 된 평가를 하는 것 같지도 않다. 불가항력적인 상황을 고려하지도 않는다. 쉽게 평가되므로 부당한 처사다…. 하지만 어떤 말을 들이대도 단순한 사실 한 가지는 변하지 않는다. 인간의 활동에는 모두 종형 곡선이 존재하고, 대개 그 차이가 결정적이라는 점 말이다.

 

 앞서 손 씻기나 부상병 치료, 분만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기존의 의료 성과를 체계화했을 때 수천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성과 개선을 위한 체계화의 노력이야말로 향후 10년 동안 실험실 과학이나 게놈 연구, 줄기세포 치료법, 암 백신, 그 밖에 우리가 뉴스를 통해 듣는 그 어떤 연구 결과보다 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과학 예산 집행에서 지극히 작은 몫밖에 차지하지 못하지만, 그것에 거는 기대만큼은 역사상 가장 높다.

 

 의사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부분은 많았다. 압도적으로 밀려드는 환자도 그렇고 가난도 그렇고 의료품 부족도 그렇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부분, 가령 기술 같은 영역에서는 늘 개선할 방도를 강구했다. 그들은 의학적 지식과 성취의 세계를 더 넓히는 데 그들이 일조한다고 여겼고, 게다가 그 세계에서 자신들이 다른 이들에 필적하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궤양 문제를 놓고 수년 동안 궁리를 거듭해 오던 모트와르는 직접 더 나은 수술법을 개발할 수 있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마침 약간 낡은 복강경 장비를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었다. 조수 한 명이 책임지고 장비를 깨끗하게 정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모트와르는 조심스레 자신의 기법을 갈고닦았다. 나는 모트와르가 수술하는 광경을 지켜본 일이 있는데 한마디로 우아하고 신속했다. 심지어 무작위 실험을 하고 회의에서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표준적인 방법에 비해 합병증도 적고 환자의 회복도 훨씬 빨랐다. 먼지로 뒤덮인 마하라슈트라주의 외딴 벽지 소도시에서 모트와르와 그의 동료들은 세계에서 가장 유능한 궤양 전문 외과의로 거듭나 있었다.

 

 유효한 해법을 찾는 일은 어쩔 수 없이 느리고 어려운 과정이다. 그렇지만 나는 더 나아질 수 있음을 직접 보았다. 천재성은 필요 없다. 필요한 것은 성실함이다. 도덕적 투명성이다. 새로운 사고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꺼이 시도해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또한 글 쓰는 행위 자체의 힘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나도 의사가 되고 나서야 필요를 느끼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의학은 그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머리보다는 몸이 고된 일이다. 의료는 소매업과 같다. 의사들은 한 번에 한 명씩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러한 까닭에 고되고 단조롭다. 좀 더 큰 목적의식을 잃어버리기 쉽다. 하지만 글쓰기는 그런 순간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문제를 헤쳐 가게 해준다. 더없이 분노에 찬 외침이라 할지라도 글 쓰는 사람은 어느 정도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의사의 선택은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할 수밖에 없지만 사람들의 삶을 바꾼다. 현실이 이러하다 보니 남들이 하는 대로 따르는 것, 하얀색 가운을 걸친 기계 부속이 되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로 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의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의사뿐 아니라, 사회에서 위험과 책임을 진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래서는 안 된다.
 새로운 시도를, 변화를 모색하라. 자신이 성공하고 실패하는 횟수를 세어 보라. 그것에 관한 글을 쓰라. 사람들의 생각을 물어보라. 그렇게 대화를 지속해 나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