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 Read Code

 

파리의 클로딘 /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 민음사

 

 "누군가 널 괴롭게 만들면 좋겠구나. 나한테 와서 털어놓을 수 있게……."
 나는 그의 어깨에 기댄 채로 있었다. 센 강변을 따라 포석 위를 달리느라 고무바퀴가 울리는 소리, 흔들리는 방울 소리가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낭만적인 생각을 깨워 냈다. 그러니까, 나는 언제인가 밤에 역마차를 타고 달려보고 싶었다. (p.152)

 

 책을 읽고 또 읽고, 정말 책만 읽었다. 닥치는 대로 읽었다. 책이 나를 이곳에서 끌어내 줄, 나 자신으로부터 꺼내 줄 유일한 것이었다. 이제 숙제도 없다. 어째서 나태가 모든 악의 원천이 되는지 1년에 두 번 쓰던 작문 숙제는 끝났지만, 나는 이제 잘 알고 있다. 나태는 적어도 몇 가지 악의 원천이다. (p.223)

 

 

작은 아씨들 1 / 루이자 메이 올컷 / 펭귄클래식코리아

 

 무릇 젊은 독자들은 등장인물의 '생김새'를 궁금해하는 법이니, 이쯤에서 네 자매를 간략히 묘사할까 한다. 때는 12월의 황혼 녘, 바깥에는 조용히 눈이 내리고 집 안의 벽난로에서는 불꽃이 타닥거렸다. 네 자매가 앉아서 뜨개질을 하고 있는 거실은 오래되었지만 안락한 공간이었다. 색바랜 양탄자에 가구도 평범했지만, 벽에는 좋은 그림이 한두 점 걸려 있고 우묵하게 들어간 곳에는 책이 가득했다. 게다가 창가에는 국화와 크리스마스 장미가 활짝 피어 있어서 평화로운 가정에서 배어 나오는 기분 좋은 분위기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조는 한숨을 내쉬며 신문으로 머리를 덮고는 글을 눈물로 적셨다.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서 칭찬을 받는 것은 조가 항상 마음속 깊이 바라왔던 간절한 소원이었고, 이제 그 행복한 결말을 위한 첫걸음을 내디딘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쓰기의 말들 / 은유 / 유유

 

 "나는 다양한 길과 방법으로 나의 진리에 이르렀다"라고 말한 니체는 "행동하는 자만이 배우기 마련이다"라며 그러므로 "모두가 가야 할 단 하나의 길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단언했다. "자기만의 길을 가는 이는 누구와도 만나지 않는다"라는 니체의 말은 '나는 너무 뒤처진 게 아닐까' 비관하는 늦깎이 작가에게 자기만의 보폭으로 길을 가도록, 자기만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글을 쓰도록 힘을 실어 주었다. 니체의 문장이라는 연료를 넣은 덕분에 나의 글쓰기는 휘청일지언정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어느 가구 디자이너에게 들은 얘기다. 목공 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졸업 작품 전시회부터 작품이 날개 돋친 듯 팔려 그 분야에서 일찍 자리 잡았다. 비결이 있다. 엄청난 작업량이다. 대학 때 학교에서 먹고 자고 살았다. 공강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는데 친구들이 당구 치거나 술 마시러 갈 때도 그는 작업실로 향했고 나무 하나라도 잘라 놓았다. 또 한두 시간 틈이 나면 대패질을 했다. 그렇게 밑 작업을 해두면 일을 하려고 '큰마음'을 먹지 않아도 된다. 일상의 자투리를 이용해 한 공정씩 진척시키기. 말 그대로 '틈틈이' 일해 가구 하나가 뚝딱 완성되니, 그 성취감이 계속 일을 하게 했다는 것이다.

 

 읽고 쓰며 묻는다. 몸으로 실감한 진실한 표현인지, 설익은 개념으로 세상만사 재단하고 있지는 않는지. 남의 삶을 도구처럼 동원하고 있지는 않는지. 앎으로 삶에 덤비지 않도록, 글이 삶을 초과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그런데 읽는 사람 입장이 되면, 끝나지 않는 글이 고역이다. 중언부언 반복되고 추상적이고 장황하고 어수선한 글은 매력 없다. 빤한 얘기로 채워진 글은 지루하다. 정보만 많은 글은 눈이 뻑뻑해진다. 그걸 알기 전까지 연애 초보처럼 굴었다. 이젠 점검한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주례사 같은 글을 쓰고 있지는 않는지. 적절한 자리에 마침표가 딱 찍힌 글인지.

 

 딸아이의 고양이 관련 발화들. "코 색이 빠졌다", "코의 경계가 뚜렷하다", "물을 마셨는지 코가 촉촉하다", "더워서 입을 벌리고 잔다", "얼굴에 비해 귀가 크다", "발바닥 '젤리'를 만지면 싫어한다", "졸려서 무표정하다", "등의 갈색 점이 제일 크다" 등등 24시간 밀착 감응과 보호 관찰의 말에서 나는 딸아이의 고양이 사랑을 읽는다. 그 독자적인 안목과 문체는 평범한 고양이가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사랑이라는 낱말을 쓰지 않고 사랑을 표현한다.

 

 아프게 하지도 가렵게 하지도 못하고, 구절마다 범범하고 우유부단하기만 하다면 이런 글을 대체 얻다 쓰겠는가? ― 박지원

 

 빌헬름 라이히도 『파시즘의 대중심리』에서 같은 이야기를 했다.
 "배고픈 사람이 음식을 도둑질하거나 착취당한 사람이 파업을 한다는 건 당연하다. 오히려 설명되어야 할 것은 배고픈 사람들 중 대부분이 왜 도둑질을 하지 않으며 착취당한 사람들 중의 대부분이 왜 파업을 하지 않는가 하는 사실이다."

 

 나쁜 글이란 무엇을 썼는지 알 수 없는 글, 알 수는 있어도 재미가 없는 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을 그대로만 쓴 글, 자기 생각은 없고 남의 생각이나 행동을 흉내 낸 글, 마음에도 없는 것을 쓴 글, 꼭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도록 쓴 글, 읽어서 얻을 만한 내용이 없는 글, 곧 가치가 없는 글, 재주 있게 멋지게 썼구나 싶은데 마음에 느껴지는 것이 없는 글이다. ― 이오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