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17호 한국 / 민음사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한국 역사에서 민주주의는 아래에서부터, 또 위로부터 함께 빚어 만든 가치이자 문화였다. 민주주의는 인민과 개화파가 함께 빚은 역사임을 나는 《독립신문》을 완독하며 깨달았다. 오래도록 사람들이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첫 단추에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은 ‘민주주의는 외부에서 수입된 제도’라는 오리엔탈리즘적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제도를 포함한 하나의 거대한 문명이자 문화다. 민주주의 제도가 없다고 해서, 또는 민주주의를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민주주의를 몰랐다고 할 수 없다. (p.24)
이처럼 한국인은 식민지인으로서 정치 영역에서 배제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좌절하지만은 않았다. 청년, 여성, 노동, 농민, 사상 등의 분야에서 한국인만의 사회운동 단체를 만들어 대표를 선거로 뽑고 민주적으로 운영했다. 조선총독부가 언론과 출판을 탄압하고 시위와 집회를 불허하면 언론집회압박탄핵회 등의 단체를 조직하고 항의했다. 일본은 독재 원리로 한국을 식민 통치했으나 한국인은 독립운동을 하든, 사회운동을 하든 민주주의 원리로 이에 맞섰다. 식민 지배의 현실에 절망하지 않고 독립과 민주주의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한국인을 독립운동가 김산은 이렇게 회상했다.비록 달성하려는 방법은 달랐지만, 모든 조선인들은 오로지 두 가지를 열망하고 있었다. 독립과 민주주의. 실제로 그것은 오직 한 가지만을 원하는 것이었다. 자유. 자유라는 말은 자유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한테는 금덩이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자유든 조선인들에게는 신성한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일제의 압제로부터의 자유, 결혼과 연애의 자유, 정상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자유, 자기 삶을 스스로 규정할 자유를 원했다.
독립과 민주주의를 꿈꾼 한국인에게 1945년 해방은 참정권을 누릴 세상이 왔음을 의미했다. 신성한 나의 권리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 그것은 곧 내가 독립된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감을 상징했다. 2025년은 해방 80주년이 되는 해다. 올해는 “국회가 신속하게 비상계엄해제요구 결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이라고 탄핵 인용 선고에 명시된 그대로 헌법재판소가 국민의 이름으로 대통령을 파면하면서 다시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운 해로 기억될 것이다. (p.26-28)
1898년 10월 초 만민공동회는 대신 7명 전원의 비리를 폭로하며 고종에게 파면을 요구했다. 대신은 오늘날 장관에 해당하는 직위였다. 만민공동회에 참여한 인민들이 철야 시위를 감행하며 압박하자 결국 고종은 대신 7명 모두를 해임했다. 이어 박정양을 수반으로 하는 개혁파 내각이 탄생했다. 독립협회는 10월 28일부터 11월 2일까지 개혁파 내각과 함께 관민공동회를 열었다. 그런데 첫날 관민공동회에 모인 인민들은 놀라운 장면을 목도했다. 내각 수반인 박정양의 인사말에 이어 곧바로 “이놈은 바로 대한에서 가장 천한 사람”이라는 말로 연설을 시작한 백정 출신 박성춘이 연단에 올랐던 것이다.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평등하게 연설하는 관민공동회는 앞으로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높였다. (p.32)
1894년 봄 봉기한 동학농민군 지도부 또한 내각의 합의에 의한 국정 운영을 주장했다. 한성을 향한 동학농민군의 진군은 공주의 우금치에서 정부군과 일본군의 공격으로 좌절했다.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은 1894년 12월에 체포되었다. 그는 갑오개혁으로 생겨난 사법제도에 따라 재판받았다. 전봉준은 재판 과정에서 ‘나랏일을 한 사람의 세력가에 맡기는 것은 크게 폐해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몇 사람의 명망 있는 선비가 협력해 합의제에 따라 정치를 담당하게 할 생각이었다’고 밝혔다. 그를 비롯한 동학 지도자들은 서양의 민회, 즉 의회를 알고 있었다.저희의 이 집회는 조그마한 무기도 가지지 않았으니. 이는 바로 민회입니다. 일찍이 여러 나라에도 민회가 있다고 들었고, 조정의 정령이 백성과 나라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모여서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근래의 일입니다. 어찌 저희를 도적의 무리라고 지적합니까?
동학농민군 지도부에게 서양 의회를 알려 준 것은 개화파가 펴낸 신문 《한성순보》였다. 1883년 11월 10일자 《한성순보》에는 “각국 정부는 전국 국민으로 하여금 의원을 선거하게 하여 모두 정부에 모이게 해서 법률을 의논하여 정하도록 하는데, 이를 민회라 한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
김옥균과 전봉준이 함께 꾼 꿈은 대한제국의 멸망과 일본 치하의 식민지기라는 고난기를 거쳐 해방된 지 3년 만인 1948년 5·10 선거로 실현되었다. 5·10 선거는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이 참정권을 행사한 선거였다. 단 하루뿐인 선거날, 참정권이 뭐라고 너나없이 산 넘고 물 건너와 투표권을 행사했다. 국민의 40퍼센트가 글자를 몰랐기에 투표소 안에 후보자 사진을 붙여 놓아야 했던 시절이었다. 95.2퍼센트. 해방되고 3년 뒤인 첫 선거의 투표율이었다. (p.36-38)
한편 1970년대 중반부터 새로운 형태의 지식에 대한 수요가 나타났다. 민중의 현실과 민중의 삶에 근거한 생활 경험적 지식이 필요했다. 1976년 말부터 《대화》가 사회문제 종합지로 변화하며 ‘사회로’, ‘민중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며 재창간을 선언한 것에는 잡지 내부의 ‘민중 속으로’라는 요구가 작용한 것이었다. 재창간호 원고 모집 기사에도 “어느 한 편의 훌륭한 논문이나 문학작품보다 더욱 생생한 감동으로 기록된” 수기, 일기에 대한 편집진의 요청이 강조되었다. 그런 생활체험기들은 “사회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데 더없는 자료”로 이른바 지식인의 글보다 한층 더 환영받기 시작했다. 다만 잡지의 주류파는 여전히 지배 세력과의 ‘화해’와 ‘통합’을 지향한 지식인이었다.
《대화》 후반기에 저소득층이나 농민, 노동자로 구성된 소외 계층의 문제는 수많은 기사에서 다루어졌다. 노동자, 농민, 현장관찰자의 경험을 통해서 드러난 현실, 작업장의 일상, 인간적 고민과 욕구 등은 1970년대 국가와 자본 유착에 의한 착취를 폭로한 노동자의 현실로 부각된다. 이것은 지배자와 화해하고 통합하려는 잡지의 주류 흐름에 어긋나는 효과를 가져왔다. 《대화》는 정부의 눈에 거슬리기 시작해 몇 차례 경고를 받았으며, 민중의 소리가 되자는 종합지로 변화한 지 11개월 만에 폐간되었다. (p.51-53)
“단점을 지적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 장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때도 발전 가능성을 찾아내서 닦아 보여 주는 게 프로야.”
진부하게만 느껴지던 셰익스피어 희곡을 한 학기 내내 배우던 학교 수업 첫날, 선생님이 한 말이다. 졸업한 지 10년이 지나 편집자가 된 지금은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는 말. 진부하다는 판단을 끝까지 보류하면서 새로운 점을 탐색하기. 그게 내가 매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p.59-60)
문학이 시대를 거듭하며 다시 읽히고, 다시 읽히는 방식으로 새롭게 태어난다는 말. 사실이기도, 소망이기도 한 그 말이 문학사 읽기를 통해 실현된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문학사’라는 명확하고 엄정한 기준으로 기존의 비평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작품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명명해 주었을 때 가능한 그 존재 방식. 그건 나의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절대로 얻지 못할 타자의 존재감이었다. 나는 내가 교과서로 배운 모든 한국문학을 그렇게 다시 읽고 싶어졌다. 여성의 관점뿐 아니라 더 많은, 더 다양한 타자의 시선으로. (p.74)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을 통해 서양이 동양을 이국적, 수동적인 존재로 대상화하며 제국주의와 문화적 지배를 정당화했다고 비판했다. 중앙과 주변부라는 이분법적 지역성을 비판해 온 많은 학자들은 오리엔탈리즘 개념을 확장해, 도시가 시골을 열등한 존재로 타자화하는 것을 내부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비판했다. 1998년 방영된 SBS 예능프로그램 「좋은 세상 만들기」는 시골 마을 노인들의 천진한 모습을 보여 주며 시청자들의 호평을 샀다. 하지만 프로그램에선 도시와 시골의 위계적 권력관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합리적이고 세련된 도시 문명의 시청자들은 무지하고 감성적이며 자연 상태에 머물러 있는 시골을 웃음기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TV가 시골을 재현하는 방식은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다. 고향을 다루는 지상파 프로그램들을 보면 손발이 오글거리는 옛날 개그와 ‘어머니의 손맛’ 감성이 남발되기 일쑤다. 이렇게 시골이 재현될 때 “고향이라는 과거형으로 불리는 지역이 누군가에게는 현재의 정주 공간이자 일생을 통해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현재의 터전이라는 사실은 축소되고 은폐된다.” (p.140-141)
감각의 공백이 허락되지 않는 시대, 우리의 눈과 마음은 언제나 대도시를 향해 있다. 세상은 점점 더 많은 경험과 체험을 요구하고, 대도시만이 그런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을 것 같다. 꼭 경험 강박으로 인한 압력이 아니더라도 도시의 다채로운 매력은 떨쳐버리기 쉽지 않다. 나도 대도시들의 다양성과 역동성이 좋다. 상품화된 욕망의 환상일지라도 도시가 보여 주는 화려함이 좋다. 다만 그건 ‘도시라는 지역’이 갖는 하나의 특수성이다. 모든 지역은 각각의 물리적 환경과 역사적 맥락, 다양한 사회문화적 특성에서 기인한 고유의 특성을 갖는다. 무엇보다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화와 정서, 의미와 기억을 공유하고 지역과 관계 맺으며 장소성을 형성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도시 서울을 정점으로 한 위계질서 속에서 서울이라는 준거를 제시받고, 그에 맞지 않는 지역을 타자화한다. 지역 내면에까지 깊숙이 침투한 타자성을 어떻게 축출할 수 있을까. (p.147-148)
베트남전쟁과 다시 마주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지난 2018년이었다.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의 조사팀 간사로 활동하면서, 참전군인의 가해 목격담을 기록하고 현지의 피해를 조사하던 때였다. 『파월한국군전사』를 검토하던 중 예기치 못했던 이름 석 자가 나타났다. 당시 공병대 중대장이었던 이모부의 이름. 1968년 하미 마을 학살이 벌어진 다음 날 이모부는 불도저를 동원해 망자들의 시신을 밀어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유족들이 뒤늦게 학살 현장으로 돌아왔지만 뒤얽힌 피해자의 몸들은 온전히 수습되지 못했다. 훼손된 몸들은 지금도 하미 마을 위령비 근처에 있는 ‘집단무덤’에 묻혀 있다.
『파월한국군전사』에서 이모부의 이름을 발견했을 때 그는 노인성 인지장애가 악화되어 보훈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병문안을 갔던 어느 날 그에게 참전 경험을 조심스레 물었지만, ‘하미’라는 두 글자를 입에서 꺼내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병원을 다녀온 몇 달 후 그는 세상을 떠났다. 이모부에게 묻지 못했고, 그래서 영영 들을 수 없게 된 말은 이후 다른 시공간에서 다른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p.175-176)
2018년에 열린 시민평화법정은 법적인 구속력을 갖지 않는 민간법정이었지만, 2020년 퐁니·퐁넛 학살 사건에 대한 국가배상소송으로 이어졌다. 참전군인 R은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한국 군인으로서 최초로 베트남 민간인에 대한 가해 사실을 증언했다.
R은 22세의 나이로 1967년 청룡부대로 파병되어 15개월 동안 참전했고, 수류탄에 의한 다리 부상으로 상이군인이 되었다. 처음 R을 만난 날, 그는 오랫동안 베트남전쟁 가해 사실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고 말했다. 베트남전쟁과 자신의 참전 경험을 돌아본 것은 파병된 지 50년쯤 지난 2017년이었다. R은 청와대 앞에서 해병대 군복 차림으로 상이군경회 적폐 청산과 작전권 환수를 주장하는 피켓을 들고 일인 시위를 하고 있었고, 건너편에서는 베트남전쟁 시기에 저질러진 민간인학살에 대해 한국 정부의 책임을 추궁하는 시민단체의 일인 시위가 진행되고 있었다. R은 시민단체 활동가로 시위 중인 나의 동료에게 먼저 다가와 자신이 퐁니·퐁넛 마을의 학살 사건을 수행한 중대 소속이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동료에게 R의 연락처를 건네받고 나는 법정에서 필요한 증언을 확보하기 위해 인터뷰를 청했다.
인터뷰를 처음 시작했을 때 R은 첨병으로 앞장선 무용담을 늘어놓다가도, 전투나 수색 작전에서 종종 느꼈던 두려움에 대해 말하곤 했다. 특히 퐁니·퐁넛 마을에서의 일은 여전히 공포로 남아 있었다. 학살이 일어난 다음 날 마을 사람들은 항의의 차원에서 학살당한 시신들을 큰길가에 늘어놓았다. R은 소대원들과 그 길을 지나면서 자신들을 노려보던 유족들의 서슬 퍼런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그때는 정말 겁이 났다고 했다. R과 나눈 수많은 대화 중 ‘겁이 났다’고 말한 그 순간이 내겐 가장 소중했다. 약함과 두려움을 말하는 것은 오히려 존엄의 선언이 될 수 있겠다는 새로운 감각이 생겨났다. (p.178-179)
가해 경험에 대해 듣는 일은 가해자가 되어야 했던 이들의 두려움을 알아 가는 일이었다. 동시에 전쟁이 끝난 후에도 지속되는 국가에 대한 분노와 군인으로서의 자부심, 동료와 베트남 사람들에 대한 연민 같은, 전쟁의 상흔이 새겨진 자신의 몸을 마주한 R의 복잡한 감정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시민평화법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R은 “진실을 말함으로써 내 자신의 경험에 뒤늦게, 그러나 제대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병사들이 전쟁 경험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언어화하지 못한 채 긴 시간이 지났음을 알려 준다. R이 내게 들려준 말은 전우회에서 말하는 무용담도 법정에서의 증언도 아닌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자, 전후에도 그의 몸과 마음에서 지속되는 베트남전쟁에 대한 이야기였다. (p.180-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