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다음 / 희정 / 한겨레출판
죽음을 뜻하는 한자 ‘사(死)’는 ‘부서진 뼈 알(歹)’ 자와 ‘사람 인(人)’ 자를 합쳐 만든 글자이다. 백골이 된 시신 앞에서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는 형상이다. 죽는 이 옆에는 사람이 있다. 혈혈단신으로 살았거나 임종을 지킨 이가 없다고 해도, 결국 마지막엔 사람을 필요로 한다. 최초의 누군가가 주검 위에 흙을 덮은 순간부터 죽음은 1인칭이 아니었다. 죽음만큼 사람을 필요로 하는 일도 없다.
시신은 수습되어야 하고, 죽은 이의 신변은 정리되어야 하며, 그 죽음은 알려지고 애도받아야 한다. 남겨진 사람에게는 남겨진 사람의 몫이 있다. 사람의 몫이라는 건 노동을 의미한다. 손과 발, 눈과 입, 관절과 오장육부, 모든 것을 동원해 처리하고 정리하고 기억한다. 그 노동이 집중되는 시공간은 장례이다. (p.16)
“우리 일이 흔한 직업은 아니잖아요. 특수한 일이지.”
아무리 특수하다 해도 일이니만큼 경건하기만 할 순 없다.
“바느질이 재미있지. 죽죽죽 하다 보면 완성이 됐을 적에는 재미나. 뭔가 한 가지라도 재밌으면 계속할 수 있는 거예요.”
30년을 할 수 있었다. 임미숙은 그 재미를 전하지 못하고 기술이 사라지는 게 아쉽다. 수의 만드는 법을 배우겠다는 사람이 없다. 아쉬워 기록으로 남겨두려 한다고 했다. 수의 제작법에 관해 조금씩 적어둔다. 그는 글쓰기 동무를 만난 듯 나를 염려해준다.
“몇 글자 적으려고 해도 머리가 아픈데. 나는 내가 아는 걸 적어도 그런데. 남의 머리에 있는 걸 가져다가 그걸 정리해서 적으려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일은 다 힘들죠. 그 사이로 재미있는 게 하나라도 있으면 계속할 수 있으니까요. 나도 그를 따라 말하고 싶어진다. 임미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작업장 구석으로 가더니 칡같이 검고 질긴 나무줄기를 한 움큼 들고 온다. 삼베 줄기란다. 저 검은 줄기가 색이 뽀얘질 때까지 인간의 손을 탄다. 같은 마음으로 같은 옷을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다. 손은 한번 기술을 익히면 달라질 줄 모르는데, 마음은 간사해 찰나에도 달라진다. 그런 마음을 습관처럼 다잡는다. 누구 하나 보지 않는 곳에서도. (p.128-129)
“나 죽으면 갈 자리를 다 해놨어요. 우리 할머니(아내) 옆에다가 해놨는데. 애들이 매장을 하겠어요? 요즘은 다 화장이지. 상여를 하려고 해도, 상여 멜 사람이 없는 거야. 동네에 젊은 사람 여덟 명, 열두 명이 어디 있어. 그런데 장례 비용은 화장하는 게 덜 들어가. 그건 그래.”
그는 오래 자리를 지켜왔지만, 그가 지켜온 자리가 이어지지 못할 거라는 걸 안다. 그가 모아온 땅에도 벼와 과수가 자라지 못할 것이다. “요즘 누가 농사를 짓나.” 자신이 모은 농지가 뿌듯하다가도, 나 죽고 나면 저 땅이 고스란히 팔릴 것을 알아 잠시 울적하다가도, 그렇게라도 자식에게 무언가를 남겼다는 마음에 다시 뿌듯하다.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면서도 심경이 교차한다.
요즘 시골 노인들은 한동네에서 살아온 이들과 마지막 인사조차 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도심 병원이나 요양원에 가면 그걸로 끝이다. 다신 보지 못한다. 상여를 메고 마을로 오지 않는다. 아들딸이 사는 어느 도시에서 장례를 치렀다더라 소식만 들려온다. 아마도 그는 세상을 떠난 후 처음으로 이 고래실을 떠나게 되지 않을까. (p.143)
“예전엔 사람들이 못하는 일을 내가 대신해주고 있어, 그러니 난 대단한 일을 하는 거라는 자부심도 가지고 있었는데, 착각이었어요. 사람들이 당연히 할 수 있고, 당연하게 해야 하는 과정을 내가 뺏는 걸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장례 전문가라 이야기하지만, 전문가란 다른 의미로 지식을 독점하는 위치이기도 하다. 의사 한 명 한 명의 노고와 무관하게 현대 의학은 우리가 내 몸을 이해하고 판단할 권한을 소수의 전문가들에게 국한한다. 장례라고 다를 순 없다.
“제가 상조회사에서 일할 때, 이런 적이 있어요. 나이가 좀 있는 여자 유족분이었는데, 여자 장례지도사가 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더니 자기랑 같이 입관을 하자고 했어요. 그래서 ‘이 일 해본 적 있으세요?’ 물었더니 없대요. 모르지만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때는 제가 나이도 어리고 해서 속으로 짜증이 많이 났거든요. 잘하는 사람이랑 하면 한 시간 걸릴 걸 두 시간을 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살면서 그분 생각이 계속 나더라고요.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게 멋지다. 상주잖아요. 이 초상의 주인. 장례는 나의 상이지 장례지도사의 상이 아니거든요.” (p.159)
“저는 제 일이 되게 대단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지만, 하찮다고도 여기지 않거든요. 내가 땅에 떨어진다면, 언젠간 다들 떨어지니까, 그렇다면 거름이 되면 좋겠지요. 그냥 아무 의미 없는 시간이 되진 않았으면 좋겠거든요. 내가 조금 힘들었던 거, 고생했던 거를 다음 사람들은 좀 덜 겪게, 덜할 수 있게 해주는 게 앞서 지나간 사람의 예의라 생각하거든요.”
토양이 있어야 거름이 양분으로 쓰임이 있을 텐데. 이해루는 장례인으로서 정체성을 지닐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순환보직을 받아들이며 떠나가는 후배들을 본다. 장례인이라기보다 화로에 관을 넣었다 빼는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으로만 보는 안팎의 시선 속에 자부심을 잃어버린 채 화로 앞에서 시들거나 이곳을 떠난다. 하루에 적어도 열두 번, 어떻게든 주검을 화장로에 밀어 넣어야 한다. ‘화장장 포화 상태’가 제일 무서운 말이 되어버린 장례 정책 속에 장례인으로서의 고민과 갈망을 놓을 곳이 없다. (p.162-163)
“사람들이 사는 데 급급해서 정작 사는 걸 모르고 있는 느낌이에요. 사람들이 정말로 살아 있는 것처럼 살지 않고 꿈꾸듯이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어요. 심리학에서 페르소나라고 하잖아요. 그 가면이 나인 줄 알고 휘둘려 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아요. 장례 문화만 봐도 사별자가 이거를 진짜로 하고 있는 게 아닌 거예요. 울어야 할 것 같아서 울고, 사람들한테 보이는 거를 신경 쓰다 보니까 진짜 슬퍼할 수 없는 거예요.”
《인생 수업》이란 책엔 이런 말이 나온다. “죽음은 삶의 가장 큰 상실이 아니다.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죽어버리는 것이다.” 내 안의 본연한 나를 상실하는 일. 그는 어머니 장례를 마치고도 눈물이 나지 않아서 한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그가 찾아간 곳은 연기학원이었다. 7개월간 이런저런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배웠고, 거기에는 슬픔도 있었다.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눈물을 쏟는다는 건 울음을 흉내 내는 일이 아니었다.
“지나온 삶에서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찌꺼기 같은 마음까지 함께 흘려보냈던 거 같아요.”
그제야 이해루는 애도를 시작할 수 있었다. (p.164)
“어떤 형태로든 간에 사람들이 생전장례식을 했으면 좋겠어요. 동네잔치가 되어도 좋고, 전시를 할 수도 있고, 그냥 소박하게 자기 이야기를 글로 써서 SNS에 올릴지라도. 생전장례식이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는 작업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누구든 그런 경험은 꼭 해봤으면 좋겠어요.”
동네잔치라. 이런 기능을 옛날 옛적에는 환갑이나 칠순 잔치가 대신했을지도 모르겠다. 예순 살만 되어도 장수했다고 하던 시절이다. 잔치의 주인공들이 어찌 마냥 만수무강만 빌었을까. 자신에게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인정하고 준비하는 마음으로 잔치가 열리는 마당에 들어섰을 것이다. 그 시절엔 자신이 살아온 삶을 증명하는 존재가 가족과 자손이었겠지. 그러니 손주에 증손주까지 불러 모아 자신이 이룬 것을 돌아본다. 핏줄로 자신을 증명하는 게 당연하지 않게 된 오늘날,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거나 인정할 시간을 얻지 못한 채 죽음으로 직행한다. (p.192)
나를 빗대어 보더라도, 내가 상주 완장을 차고 나타난다면 이모들이 득달같이 달려와서 한마디씩 할 것이 눈에 선했다. “이럴 때 든든한 남편이 옆에 있으면 얼마나 보기 좋았겠니.” 아마 나는 상주 자리를 외삼촌이나 사촌 남동생에게 빼앗길 수도 있을 테다. 여기까지 생각이 머무니 기분이 이상하다. 나에게 닥칠 장례를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도, 내게서 누군가 상주 자리를 가져간다고 생각하니 먹먹하다. 아니 울화가 인다.
“가족을 보내는 주체가 내가 되고 싶고, 당연히 내가 해야 되는 일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건데.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내가 보내고 싶은 건데. 계속 부정당하는 거예요.”
이 말이 남의 일처럼 들리지 않는다. 오늘날의 상주란, 가문을 이어받는 자리가 아니다. 떠난 이와 나의 관계를 증명하는 자리에 가깝다. 내가 보내주어야 한다. 내가 책임지고 싶다. 잘 보내주고 싶다. 이 마음이 성별을 이유로 가로막힌다면, 장례의 장은 정말로 ‘경합과 투쟁’의 장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나는 다시금 여자 상여꾼들을 소환한다. 상엿소리에 고기잡이 노래가 섞이고, 그 노래가 전수되고, 머리가 좋은 여성이 나타나 소리를 기억해 읊었다는 이야기가 섬의 전설처럼 내려오는 게 좋았다. 신비로웠다. 하지만 관을 메는 여성들의 등장을 피치 못한 비극적인 사건으로 보는 몇몇 기록을 발견할 때면, 남자만 불러대는 장례식장에 소환된 기분이 들었다. 전쟁터에 사람을 끌고 가는 일이 비극이고, 전쟁통에 양민을 학살하는 일이 비극이다. 상부계를 꾸려 이전부터 돈독하게 서로를 돕던 여성들이 에혀~ 에혀~ 구령 맞추고 발맞춰 나가는 것은 비극이 아니다.
“처음 멨는데도 어찌나 잘하는지” 자랑도 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큰일을 잘 치렀다는 안도감에 꽹과리를 치며 “쾌지나 칭칭 나네”를 불렀다. 연도 섬의 전통이다. 옛날에도 했다. 그때도 맡은 바를 다하려 했다. 즐겁게 했다. 여자 상주는 일탈이 아니다. 살아가는 일이다. (p.207-208)
흔히 생각하듯, 도시는 단순히 시골의 반대말이 아니다. 근대 이후 형성된 도시는 ‘시장’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장소이다. 시장은 공간이 아니다. 모든 존재가 사고 팔리는 상품이 되는 세계의 작동 원리이고, 이곳에서는 인간마저 노동력이라는 상품이다. 이 세계는 모든 곳을 시장으로 만든다. 전문가를 통해 두려움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두려움은 시장에서 구매를 추동하기 위해 활용된다. 장례가 상업화되고 있다는 말은 단순히 장례가 돈이 되는 사업이란 의미가 아니다. 죽음을 향한 우리의 감각과 정동이 시장에 들어섰다. 아니, 시장에 갇혔다.
“나의 개인적인 감정이랑 맞닿아 있는 일이고. 그런데도 내가 스스로 결정 못 하면, 그게 후회로 남거나 이후에 어려운 순간이 찾아올 거예요.”
화장기사 이해루가 했던 말을 곱씹는다. 장례는 이사가 아니니까. 사별과 애도는 가구 배치와는 다른 일이니까. 장례지도사가 장례의 모든 순간을 주관하고, 사별자는 이를 ‘컨펌(승인)’하는 역할에만 머문다면, 결국 이들은 ‘잘하면 고객 만족, 잘못하면 진상 고객’이 된다. 어느 쪽이든 고객이다. 우리가 삶의 어디에서나 고객인 것처럼.
우리의 생애에서 외주화된 것이 어디 이사와 장례뿐일까. 현대 사회에서 생애주기의 모든 영역이 상품이 되어 집 바깥으로 이동한다. 출산, 양육, 돌봄, 부양의 모든 순간을 개인의 판단에 맡기고 가족의 몫으로 돌리지만, 실제 그 모든 것이 가족 안에서만 해결된 적은 없다. 그건 환상에 불과하다. 시장은 그 환상을 외주화된 노동으로 메꿔왔다. ‘집안의 노동자’의 돌봄 노동을 나눠 갖는 임금 노동자들을 만든 것이다. 우리는 돌봄, 육아, 질병, 노화 등의 시간에서 스스로 주도권을 갖지 못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아픈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잃는다.”
질병 경험자이자 그 자신이 의료인인 아서 프랭크의 말이다. 주어를 바꿔 ‘아픈 사람’ 자리에 우리 생애주기의 어떤 순간을 놓는다고 해도 어색할 것이 없다. 임신부들은 차가운 수술대에 누워, 노인들은 요양 시설 병실에 누워 자신의 것이 아니면서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몸에 절망한다. 장례에는 ‘엔딩 플래너’가 등장하게 되었다. A 패키지, B 패키지, C 패키지를 내밀며 세트 상품을 고르듯 장례를 준비하라고 한다. 소비자가 된 사별자가 그 순간에 해야 하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다. 울음과 회한 가득한 장례식장에서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사별자가 해야 하는 일이 상품 선택과 문상객 맞이뿐이라는 것도 쉽게 수긍되진 않는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만들어내는 생산품(노동)에서만 소외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애에서 소외되고 있다.
나는 내 죽음에서 소외되고 싶지 않았다. (p.232-233)
어떻게 해야 신명 나게 놀 수 있을까. 채비의 장례 교육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어느 마을에서 치러진 장례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전하며 채비가 바라는 장례를 어렴풋이 더듬어본다.
“제주도에 노부부가 살았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거예요. 마을에 열여덟 가구가 있었거든요. 할아버지 소원이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 거라 저희가 제주로 갔어요. 할아버지 주무시던 방에서 입관했어요. 할아버지가 정원 가꾸는 걸 좋아하셨대요. 마을 사람들이 꽃을 어마어마하게 가져오는 거예요. 지인 중에 어떤 사람은 연주를 하고, 누구는 춤을 추고, 또 시 낭독을 하고. 저마다 자기 방식대로 추모하는 거예요. 마지막 날엔 다들 모여 앉아서 밤새 수다를 떨었죠. 할머니 외롭지 말라고, 옛날이야기도 하면서 대화를 나눈 거예요. 마지막 날, 마을에 있는 나무에 수목장을 했어요. 할머니가 서클 댄스(포크 댄스의 일종) 동아리를 하셨더라고요. 동아리 회원들이 와서 나무를 빙빙 돌면서 서클 댄스를 추고. 날도 너무 좋고 아름답고. 우리가 하고 싶던 마을 장례의 모든 것을 해봤던 그런 날이었어요.” (p.249)
애도되어야 할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을 나누는 기준이 엄격하지 않은 곳에선 더 많은 이의 죽음이 기억된다. ‘잘못된 죽음’이란 없기 때문이다. 《좋은 시체가 되고 싶어》에서 장의사 케이틀린은 멕시코 죽은 자들의 날 축제에 간 지인 세라의 말을 전한다.
“내 슬픔을 내려놓을 곳이 여기라는 게 느껴져요. 그건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었어요. 이곳에서는 나 때문에 사람들이 불편해하지 않아요. 나는 숨 쉴 수 있어요.”
세라는 유산을 한 적이 있다. 죽은 자들의 날 가운데 11월 1일은 어린 영혼을 애도하는 날이다.
“이들이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만으로도 세라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죽음’에서 벗어났다. 받아들여지지 않는 죽음. 한국에서도 갓난쟁이(또는 태아)의 죽음은 잊어야 하는 사건으로 취급되어 왔다. 20세기 한국 사회에서 애장(兒葬)의 의미를 분석한 이도정은 ‘애장의 익명성’을 제시한다. 그 한 예로, 진도에는 부모가 죽은 아이를 묻을 경우 다음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다. 그리하여 갓난아이가 죽었을 경우, 부모가 아닌 이가 아이의 무덤을 쓰게 해 왔다. 부모는 아이가 묻힌 곳을 모른다. 무덤을 찾아갈 수 없고 고인을 기릴 수도 없게 된 죽음은 그 사회에서 “그냥 없어져 버리는 거”로 받아들여진다. 애도를 박탈해 죽음에 실체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애장의 익명성은 진도 지역의 특정 문화가 아니다. 어린아이의 무덤을 쓰지 않는다든가, 장례를 치르더라도 부모(특히 어머니)의 참석을 금하는 관습은 곳곳에 남아 있다. “일상 의례의 궤적에서 이탈하는” 죽음은 서둘러 잊혀야 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p.258-259)
스웨덴의 경우, 누구라도 사망하면 “유산으로 충당하지 못한 시신 운구비, 장례식장 사용료, 시신 안치비, 화장 비용, 25년간의 묘지 이용”을 국가가 지원한다. 이 비용은 장례세라는 명목으로 국민 세금으로 충당된다. 장례법에 따라, 스웨덴 지자체들은 공공 매장지를 관리하고 장례 관련 업무를 규정한다. (다만 루터교가 국교인 나라답게 장례의 실질적인 수행은 교회의 몫이다. 2500여 개소의 공공교회가 공공묘지를 관리한다.)
유럽의 경우, 지방자치단체가 공동묘지를 관리하고, 주민들에게 의무적으로 공동묘지를 분양하는 국가가 다수이다. 가족묘지를 제외하곤 모두가 3평 남짓 되는 땅에 묻힌다. 자리를 정할 수도 없다. 순서대로 묻힌다. 재산 여부나 직위와 무관한 일이다. 묘지를 복지 시설로 규정해 그 관리 비용은 국가가 제공한다.
일본의 경우, 국민건강보험과 후기고령자의료제도(75세 이상을 피보험자로 하는 의료 제도)에서 장제비 지원을 규정하고 있다. 이때의 지원 대상은 피보험자 모두이며, 재산 등을 기준으로 지급 대상 자격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보편적 복지에 가까운 형태를 띤다는 것이 특징이다. (p.287-288)
어린이 시절엔 한집에서 같이 자란 동물의 죽음으로 생과 사를 배운다. 나 또한 그랬다. 죽음도 처음이지만, 사후 처리도 처음이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마당이나 동네 뒷산에 병아리나 개구리를 묻어주고 그 위로 나뭇가지를 엮어 십자가 모양도 만들어줬던 것 같다. 어디서 본 풍경인지 몰라도, 동네 아이들은 서로 돌아가며 반려동물 장례를 치러줬다. 집마다 키우던 열대어, 햄스터, 병아리…. ‘애완동물’ 문화가 퍼지던 때라 가정마다 자녀를 위해 키우는 작은 동물이 하나쯤 있었다. 하지만 학교 앞 노점이나 수족관에서 사 온 동물들은 금세 수명이 다했다. 제대로 못 돌본 것이다. 우리는 물론 부모 세대도 낯선 생명을 키우는 데 소질이 없었다. 그들이야말로 어릴 적에 집 지키는 용도로나 개를 키웠을까. 작은 동물들은 자주 세상을 떠났고, 그때마다 우리는 장례를 치른다며 무덤을 만들었다. 아마도 그게 내 인생의 첫 장례식이자 조문이겠다.
오랫동안 떠올리지 않은 기억이다. 나는 늘 죽음에 무지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어릴 적에 이미 품앗이하듯 서로를 찾아가 추모를 했다니. 그때 동물 사체는 생활폐기물 봉투에 넣어 버려야 한다며 합법적 방식으로 사후 처리를 했다면,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p.311)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를 외치며 스스로 몸에 불을 붙였다. 전태일의 친구이자 삼동회(피복 제조업 종사자 친목 단체) 회원이던 이승철은 일감에 밀려 허덕이던 중에 소식을 들었다. “태일이 타버렸다.” 이 말을 전한 친구 신진철의 손에는 전태일이 입던 바바리가 들려 있었다. 전태일이 그날 아침에 반듯하게 다려 입은 옷이었다. 그걸 본 어머니 이소선은 “어디 좋은 데 가니?”라고 물었다고 했다. 몇 시간 후 이소선은 라디오에서 아들의 이름을 듣게 된다.
“서울 도봉구 쌍문2동 208번지 사는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 씨가 평화시장 구름다리 아래에서 오늘 낮 1시 20분경에 분신, 중태에 빠져 급히 병원으로 이송하였습니다.”
때마침 소식을 전하러 온 아들 친구(김영문)와 병원으로 향하며, 이소선은 다짐하듯 괜찮을 거라는 말을 거듭했다. 하지만 병실에서 온몸을 붕대로 감고 있는 아들을 보자 알 수 있었다. 살 수는 없겠구나. 이소선은 아들의 임종을 지켰다.
“지금부터 제 말 똑바로 들으세요.”
입술마저 타버려 자꾸만 뭉개지는 발음을 붙잡으며 아들은 말했다.
“엄마, 내가 지금까지 한 말, 약속을 다 지키겠어?”
그게 유언이 되어버렸다.
“너하고 약속한 거는 절대로 지킬 거다.”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소선은 장례를 거부했다. 병원을 찾아온 기자들에게 말했다.
“우리 아들의 뜻인 근로조건 개선이 이루어질 때까지 사체를 여기에 둘 겁니다.”
전태일과 삼동회가 요구한 내용이 관철되기 전까지는 장례를 치르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덕분에 장례 치를 준비를 서두르던 평화시장 업주들과 정부 기관에선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빈소로 찾아와 관도 수의도 최고급으로, 영구차도 꽃차로 만들어 보내겠다고 했다. 일가친척까지 와서 이소선을 설득했다. 그러나 이소선은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평화시장 업주들은 삼동회의 노동조건 개선 요구를 받아들인다.
엄혹했던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도, 전태일의 장례는 노동단체장으로 치러진다. 11월 18일, 전태일의 관을 실은 운구차가 평화시장을 지났다. 하루 16시간 근무도 이상할 것 없던 평화시장이 그날은 다 셔터를 내렸다. 장례 주최 측의 요구였다. 버스 13대가 운구 행렬을 뒤따랐다. 버스마다 만석이었다. 그럼에도 그날 몰래 출근을 종용하던 업주들도 있었다. 그들은 이 순간이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발인이 있고, 열흘 후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된다. (p.342-343)
지배층(조선총독부)의 애도 대상과 사회 구성원들의 애도 대상이 극히 상이했던 식민지 조선에서 사회장은 ‘우리(공공의 결속)’를 찾게 하는 기폭제 역할을 하곤 했다. “슬픔은 복잡한 수준의 정치 공동체에 대한 느낌을 제공해준다”라는 주디스 버틀러의 말처럼 애도는 내가 속한 공동체를 확인하게 한다. 저들이 인정하지 않는 죽음을 애도하는 ‘우리’가 드러난다. 일제강점기, 민심을 의례라는 틀로 수렴하려는 시도는 계속됐다. 동시에 ‘우리’의 범주에 대한 질문이 생겨난다. 김윤식 사회장 무산 사건이 던진 화두이기도 했다. “사회적으로 애도할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때의 애도 자격은 개인의 도덕성과 (민족)사회 기여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애도하는 공동체의 성원이자 정치적 주체는 누구인가? 주체가 행하는 정치와 윤리적 가치에 따라 공적 애도의 대상은 달라진다.
‘특정한 우리’의 애도는 동지장에서 드러난다. 식민지 조선에서 동지장이라는 형식의 애도 문화가 만들어진 데는 이유가 있다. “항일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이 조직화”되는 상황에서 일제가 인정하지 않는 죽음은 늘어만 가는데 국장과 사회장이라는 “두 형식만으로는 제국 일본이라는 국가 권력에 희생된 수많은 죽음을 애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장보다 작은 범주의 단체장마저 일제의 탄압과 통제를 받는 상황에서, 동지장은 특정 단체를 내세우지 않는 일종의 편법이자, 특정한 지향과 가치, 정동을 공유한 이들의 추모라 할 수 있겠다.
동지장 역시 금지되는 경우가 많았다. 번번이 불허되어 가족장으로 축소되고, 가족 외에는 단 한 명의 운구 행렬도 허가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탄압과 통제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조선에서 단체장과 동지장 시도는 언론에 알려진 것만으로 50여 건이 넘는다. ‘애도 불가능성’에 맞서는 길은 애도하는 행위였다. 애도 불가능한 이들을 애도하고자 하는 마음의 분출은 시위와 다를 바 없었다. 일제가 애도의 장을 불허한 까닭이며 “이것이 그토록 많은 나라에서 시위와 장례식을 구분하기 어려운 이유다”. (p.351-352)
한국을 휩쓴 참사로부터 우리가 상실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다름 아닌 “나”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당사자가 아님에도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오랜 시간 함께한 사람들을 만나면 종종 듣는 말이 있다. “그게 나였을 수도 있잖아요.” 자신을 운이 좋아 살아남은 자라고 여겼다. 그 마음이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때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의 일상과 안온이 흔들리는 일을 우리는 참사를 통해 경험한다. ‘나였을 수도’라는 말은 나를 둘러싼 세계의 상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의 세계는 안전하지도 명료하지도 않다. 삶의 불확실성은 ‘나’라는 개인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는 ‘우리’ 공동의 운명을 드러낸다. 우리는 살아내야 하기에, 우리의 취약함을 인정하고, 타자에 의존하고 의지하며, 서로를 돌보는 길로 걸어간다. (p.356)
불과 50년 전만 해도 집에서 죽지 않으면 객사라고 슬퍼했고, 오늘날엔 집에서 죽으면 잘못된 죽음처럼 여긴다. 그러더니 새로이 ‘홀로 집에서’ 죽기를 권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고 보면, 내가 객사의 개념을 달리 받아들인 건 데파코트가 쓴 〈죽음의 위계화에 저항하며〉를 본 이후였다. 단정적이고 간결한 문장으로 쓰인 선언문은 ‘집을 떠나 맞는 죽음’을 이리 말했다.
“집이 없는 존재들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장소, 내가 선택하지 않은 장소에서 죽음을 맞아야 한다.”
집이 없는 존재들이 존재한다. 세상이 그들의 ‘집’이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거나 선택하지 않은 장소에서 죽음을 맞아야 한다. 이들의 죽음은 집이라는 물질성과 무관하게 ‘객사’다. 그렇다면 객사는, 내가 원하고 선택한 곳이 아닌 장소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일이다.
장소는 시공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경험과 기억, 가치와 관계 등 유·무형의 상호작용으로 장소성이 만들어진다. 우에노 지즈코가 말한 집은 주택이라는 의미를 뛰어넘는다. 내가 주체적으로 꾸려온, 안전하고 편안하고 일상적인 공간의 상징이 집이다. 그러한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 우리는 사는 것이 아닐까. 삶은 그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분투의 연속이다. 열심히 싸웠고, 이제 고요하게 떠나면 되는 일인가. 산뜻하다. 산뜻하긴 한데 좀 헛헛하다. 시끌벅적한 것이 인생인데 너무 고요해서일까.
편하고 고요한 1인실을 두고 6인실 병실에 입원하는 이유는 단지 비용 때문만이 아니다. 가족이나 간병인이 상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6인실 병실에서 돌봄은 순환한다. 옆자리 병상의 가족이나 그쪽 간병인이 내 침대를 올려주기도 하고, 환자인 내가 옆자리 환자를 위해 간호사를 불러오기도 한다. 사람이 있는 곳엔 어디든 돌봄이 있다. 주검이 들어가는 관은 ‘1인실’일 수 있어도 삶은 1인실이 아니다. 1인실에 머물 수 없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돌봄은 끊임없이 확장된다. 그리고 돌봄은 죽음의 순간에도, 그 시간을 넘어서도 계속된다. 우리의 안온한 집은, 여럿의 확장된 돌봄이 없다면 마련되지 않는다. 그러니 혼자 죽지만 혼자 죽는 일 같은 건 없다. (p.366-367)
문화학자 기시 마시히코는 자신의 저서에 이런 말을 옮겨 담았다. “내가 죽더라도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는 소리를 들으면, 그게 제삿밥이지.” 애도는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에는 “이런 사람이었지” 하는 기억이 담긴다. 꼭 고인이라는 사람을 경유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고인이 살아온 시공간에서 저마다 자라고 늙어간 사람들이 모여 기억을 나눈다. 누군가는 동화책을 읽고, 누군가는 자신을 피해간 수용과 학살의 과거사를 떠올린다. 마을 단위에 머무는 일도 아니다. 때로 저 멀리, 국경을 넘어 애도가 온다. 제주 4.3 희생자들의 시신이 해류를 타고 대마도로 흘러갔을 때, 그곳 사람들은 시신을 거둬 안장했다. 이후 일본에서 4.3을 배우고 기리는 모임(한라산회)이 만들어졌고 지금껏 매년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우리는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인간이자, 동시대의 어떤 일을 겪고 보고 들은 시민이자, 삶을 꾸려온 존재다. 그 실존의 감각이 빈소를 채운다. 그렇게 나와 어딘가 닮은 ‘그’를 알게 된다. (p.3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