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13호 집 / 민음사
사회적인 측면에서 내가 다른 누군가에게 어떻게 인식되는가는 타인과 접촉이 일어나는 순간순간의 문제이지만 내가 나 자신에게 어떻게 인식되는지는 의식이 깨어 있는 모든 시간 속에서 지속적인 문제다. 한 생명에게 신체는 존재의 최소한의 거주지다. 그런데 단 한 순간도 제외 없이 거주하고 있는 이 몸을 내 집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신변의 안전에 관심이 없게 될뿐더러 생명 보전 의식이라는 것 자체가 형성되지 않고, 더 나아가 스스로 몸을 파괴하고자 하는 경향을 띠게 될 수마저 있다.
나는 단 한 순간도 인식을 그만둘 수 없는 내 몸을 잊기 위해 중추 신경을 마비시키는 알코올에 과도하게 집착했다. 내 몸을 찢어발기는 폭력 앞에서도 완전하게 무감한 태도로 일관했다. 내 몸이라는 집을 벗어나는 것은 곧 생명의 끝을 의미함에도 말이다. 내 몸을 뒤덮은 온갖 흉터, 화상부터 절상, 자상에 이르는 상처들은 나 자신에 의해 새겨진 것과 타인에게 입은 것이 뒤얽혀 있으며, 이 구분 불가능성 자체가 폭력을 대했던 나의 입장이다. 스스로를 해하고 파괴하려고 했을 뿐 아니라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폭력들도 방치했고, 심지어는 조장하기까지 했다. (p.28-29)
최근 혈연 중심의 가족 관계로부터 친밀성을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로의 이행을 꾀하는 기획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를 형성하는 소속감, 일체감, 동질감의 패권적 결속력으로부터 어차피 같지 않음을 전제로 하는 단독자들 간의 이질적 호기심으로의 이행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이 아닌 모든 것에 경계 태세를 내리지 않으면서도 그것들의 ‘다름’에 일종의 흥미, 즐거움을 가지는 태도다.
애초에 누군가를 나와 같은 이로 규정하고 ‘우리’를 형성해서 안전감을 느끼고자 하는 속셈이야말로 무리 동물의 가장 비열한 습성일지도 모른다. ‘어머니’ 이후에 ‘나’와 같은 존재는 없으며,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집’이란 존재하지 않음에도 단지 불안과 공포를 줄이겠다는 이유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꼴이다. (p.32-33)
집 없는 사람이 더 많은 집을 갖는다. 오늘은 이곳에서 내일은 저곳에서 묵는 이에게 집은 도처에 있으니까. 소유권으로 담을 친 집에 귀가해야 한다면 다른 집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반면 빈털터리 떠돌이는 항상 새 집을 찾는다. 그곳은 임시 거처라 누추하고 다음날을 기약할 수 없다. 그는 우연히 한집에 모인 낯선 이들의 호의와 적의 모두를 감수해야 한다. 두 종류의 집이 있는 것이다. (p.39)
17~18세기 유럽은 첫 번째 종류의 집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집은 사회의 기초인 소유권의 기본 단위로 혹은 정치의 토대인 부권의 근원으로 고찰되었다. 도시화와 함께 핵가족화가 진행되었다. 부모와 자식으로 구성된 작은 가족의 따뜻한 정서가 고안되었다. 하지만 제도가 정비되고 이념이 보급되려면 멀었다. 1789년 발발한 프랑스혁명이 가정법원을 설립하고, 이혼을 합법화하고, 사생아와 입양에 대한 관념을 교정하지만, 이것은 19세기 내내 건설될 시민사회의 단편적 암시일 뿐이다.
그렇지만 많은 이들이 두 번째 집에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들은 언제 어디서나 같은 외양을 띠고 같은 악취를 풍길 것 같다.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도 구조와 역사를 찾아야 한다. 예를 들어 『세비야의 건달들』로 옮기곤 하는 세르반테스의 1613년 단편 『린코네테와 코르타디요』는 항상 내 마음을 끄는 이야기다. “나리는 어느 고장에서 왔고 어디로 발걸음을 옮기나요?―고향이라면 나는 모르고 내가 어디로 가는지는 더욱 알지 못해요.” 길에서 만난 두 부랑아는 간단히 동료이자 가족이 된다. 『돈키호테』의 작가는 번영의 열기가 식어 가는 17세기 초 세비야의 뒷골목에서 가부장제 범죄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이들의 세계를 신속하고 경쾌하게 묘사한다. (p.40-41)
그런데 철학자의 불행은 그의 무기이기도 하다. 루소는 집 없는 삶이 자신에게 부여한 철학적 특권을 자랑한다. 그는 인간을 연구한 대부분 철학자의 오류가 계급적 편견에 기인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잘 배운 돈 있는 사람 몇을 관찰하고서 인간을 규정한다. 자신은 다르다. 『고백』 초고의 선언이다. “나는 모든 사람의 집에서 겸허하고 보잘것없는 한 인간으로 받아들여졌기에, 그들을 편안하게 검토했다. (……)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기에, 누구도 당황스럽게 하거나 귀찮게 하지 않았다. 나는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아무 데나 들어가서는, 아침에는 군주와 식사하고 저녁에는 농부와 밥을 먹었다.” (p.42)
살균과 소독에 관한 사회적 관심이 날로 커 가던 중 2020년 유한양행이 유한락스 홈페이지에 올린 한 글이 주목받았다. “유한락스를 비롯하여 모든 살균소독제는 뿌리지 말고 묻히셔야 하고, 모든 살균소독제는 방치하지 말고 닦아 내셔야 하며, 어떤 경우에도 손을 씻어서 살균소독 과정을 마무리하셔야 합니다.” 생활화학제품 제조기업이 신종 바이러스라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위험에 더 안전하게 맞서는 방법을 긴 글을 통해 직접 알려 준 것이다.
이 글이 크게 주목받은 이유는 다음 대목 때문이기도 하다.최소한 살균소독제에 관해서는 최신 유행이나 프리미엄, 고급 제품도 무의미하며 비싸기 때문에 강력하지만 안전하고 편리하다는 개념은 신기루와 같습니다. (……) 왜냐하면 가난한 자가 단지 가난하기 때문에 불결할 수밖에 없다면 공중 위생은 아무리 부유한 자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자의반 타의반 공중 위생을 책임져야 하는 유한락스는 어떤 상황에서도 가격이 저렴해야 합니다.
유한양행은 긴 글에서 사용자가 화학물질과 위험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안전하게 사용해야 함을 여러 번 강조했다. 화학물질에 있어서 ‘당연한 상식’은 안전하게 사용했는데 위험한 물질은 없다는 것, 이와 동시에 위험하게 사용해도 안전한 물질이 없다는 것이다. 사용자와 소비자는 이 상식을 늘 기억해 두고 있어야 할 터였다. (p.82-83)
친환경이나 녹색을 등에 업고 행해진 변화들은 지구에 돌이킬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인도와 다수의 남반구 국가에서 1960년대부터 이루어진 ‘녹색혁명’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인구 증가 과정에서 나타난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생산성이 좋은 개량종자를 개발하고 보급해 작물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날 수 있었다. 새로운 종자를 기르는 과정에서 이전까지 많이 사용되지 않았던 화학비료, 살충제, 제초제도 덩달아 많이 사용되었다. 일례로 인도에서는 30년간 작물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했지만, 다국적 생명공학기업의 종자와 농약, 제초제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고 농민들은 막대한 빚에 시달렸다.
인구 증가에 따른 식량 부족이라는 전 세계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된 녹색혁명 이후 불법 농약 거래와 미승인 농약 판매가 증가하며 지구의 많은 토양이 화학물질로 오염되었다. 역설적이게도 농업 기술의 혁신과 녹색화를 거치며 생태계는 더욱 황폐해졌다. 이처럼 녹색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화에서부터 집을 깨끗하게 하려고 사용한 친환경 살균소독제까지 더 나은 삶을 위한 크고 작은 실천들은 녹색과 안전이라는 가면을 벗고 부메랑이 되어 인간과 생태계를 공격한다. 무엇이 나와 가족과 환경을 위한 일인가 하는 경계는 세계화와 산업화와 녹색화의 자장 속에서 계속해서 흩뜨려진다. (p.85-86)
나에게 안전한 집은 바깥에 들이닥친 재난으로부터 나와 가족과 친구를 지키거나 맞서는 공간이 아니다. 더 깊은 지하에 만들어져야 할 벙커나 저 멀리 화성에 구축되어야 할 기지는 더욱 아니다. 자연과 인간과 물질로 연결된 이상 밖으로부터 완전하게 지켜지고 분리된 안은 없다. 살균제를 뿌리고 환기를 시키고 여러 대의 공기청정기를 켜 두어도 언제고 미세먼지가 들어올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안전한 지구와 안전한 사회 없이 깨끗하고 안전한 집만이 존재할 수는 없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여러 재난 속에서 존엄하게 살아갈 권리가 보장된 공간은 어떻게 나뉠 수 있느냐보다도 나와 우리가 어디를 딛고 있느냐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p.91-92)
갈등이 있기 전에는 이슬람 사원을 재건축하려는 경북대 무슬림 학생들에 대해 잘 몰랐다. 주로 이공계 석박사 학생들인 탓에 인문사회계 쪽에서 마주칠 일이 없어서이기도 했겠지만 어떻게 대학 차원에서 이렇게까지 무심했을까 싶었다. 여러 출신국이 섞여 있지만 주로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나이지리아 출신인 학생들은 이슬람교 교리에 따라 하루 다섯 번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조용하고 깨끗한 장소를 구하기 위해 오랫동안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대학으로부터 마땅한 장소를 제공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몇 년에 걸쳐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2014년 학교 서문 근처 대현동의 구옥 하나를 구입해 사원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 집이 너무 낡고 좁아 옆 건물을 새로 구입하고 관련 허가를 받아 재건축하기 시작한 것이 2020년 겨울이다.
낯선 땅에서 좀 더 안락한 새 집을 만들려는 꿈에 부풀어 있던 이들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 닥쳤다. 2021년 2월부터 대현동, 산격동 일대에 이슬람 사원 건립을 반대하는 현수막이 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 사원을 거점으로 한 이슬람인들의 횡포”가 무섭다는 ‘주민들’의 탄원서가 북구청에 접수되자마자 공사는 어떠한 현장 조사도 없이 무기한 중단되었다. 이게 내가 무슬림 학생들의 존재를 알게 되고 만나게 된 이유다.
북구청의 무책임한 공사 중지 이후 미디어는 사원 문제를 대현동 주민들 대 무슬림 사이의 갈등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마치 무슬림은 주민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무슬림 학생들은 내가 경북대에 부임하기 전부터 사원을 마련하고 인근에서 셋방살이도 하면서 사원과 이 동네를 집으로 여기고 살아왔다. 경북대 학생이자 엄연한 지역사회 일원인 이들이 처한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던 몇몇 교수들은 소음과 냄새 등을 이유로 초기에 반대하던 인근 주민들을 설득하고 사원 측에 건축 과정에서의 조정과 양보를 요청하며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무조건 이 자리에는 지을 수 없다’는 몇몇 주민의 강경한 입장에 부딪혔고, 이슬람교에 대한 인종주의적 혐오를 증폭시키는 특정 종교인들이 사안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갈등은 격화되었다. (p.99-101)
나는 다른 글에서 반대 주민들의 ‘국경만들기(bordering)’ 실천을 ‘텃세의 공감각적인 전시’라고 명명한 바 있다. 이때 텃세는 주거 기간에 비례하거나 국적의 소유 여부에 근거하지 않는다. 사원을 반대하는 주민 중에는 대현동 토박이가 아닌 사람들도 있다. 일례로, 사원 바로 옆집 주민은 무슬림 학생들이 이미 그 집을 사원으로 사용하고 있던 시점보다 늦게 이주했다. 무슬림 학생들은 그 주민은 ‘대현동 주민’이고 더 오래 거주한 본인들은 ‘이방인’이 되는 것을 의아해한다. 텃세는 시간적 정당성을 가지고 발현된다기보다 ‘한국인성’을 시간화하고 집을 가질 수 있는 자격을 공간화하는 장치다. “국민이 먼저”라는 주장의 국민도 법적 개념은 아니다. 무슬림 건축주 중에도 귀화하여 한국 국적인 사람이 있다. 북구청장은 이를 알고 있음에도 “우리 사회의 갈등 논의 과정에서 자국민 보호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실질적인 대안 없이 기준을 알 수 없는 ‘자국민 옹호’를 외치는 것은 갈등에 불을 지피는 일이다. 한국은 이미 다문화 사회임에도 한국인성과 주민성은 특정 인종적 토대에 대한 상상과 결착된다. 이처럼 인종화된 텃세는 무슬림 주민들의 새집 만들기를 방해한다. 이들이 한국에서 자신들의 안정적인 공동체를 만들고 한국 사회에 소속감을 가질 수 없게 하는 것이다.
나를 미워하고 내가 이 공간에서 사라지길 바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매일 떠올리기란 정말 참담한 일이다. 반대 주민들은 “크고 시커먼” 사람들이 동네를 돌아다니는 것이 무섭다고 했지만, 한 덩치 큰 남성 무슬림 남학생은 현수막이 동네를 도배하고 반대 시위가 격렬해지자 밤에는 집에 오기가 무서워 늦는 날이면 아예 실험실에서 쪽잠을 자고 낮에만 다녔다고 했다. 10년 가까이 한국에서 살았던 무슬림 학생 부부는 박사를 마치고 이런 환경에서 아이를 키울 수는 없다며 미국으로 떠났다. (p.103-105)
저출생, 고령화를 돌파하는 길로 다문화사회를 내세웠지만 국가는 정작 제 역할을 하지 않았다. 이런 역할의 부재 속에서 혐오의 정치에 휩쓸린 선주민들은 스스로 집 지키는 자경대로 나선다. 다문화사회에서 이주민 통합은 그들을 빠르고 손쉽게 활용하기 위해 한국어를 가르치고 한국 문화를 주입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주민을 한국 사회 구성원으로 존중하고 같이 살기 위해서는 국가가 이들에게 일어나는 차별과 인권 침해를 예방하기 위한 제도를 마련하고, 갈등이 일어났을 때 적극적으로 새로운 해결의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이주민 관련 사회문제의 원인은 이주민의 유입이 아니다. 외국인 학생 유치로 학령 인구 감소 위기를 극복하려는 대학이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문화와 종교를 지키며 공부하도록 지원하지 못할 때, 이주자의 노동으로 지역 산업을 지탱하고 있는 지자체가 이들을 지역 주민이 아닌 일하는 기계로만 취급할 때 발생한다. 국가의 부작위 위에 돼지머리 사건이 터지면서 대구의 작은 사원은 전국적인 관심사에서 더 나아가 세계 언론과 UN이 주목하는 사안이 되었다. 하지만 2024년 지금도 여전히 이슬람 사원 공사는 기약 없이 중단된 상태다. (p.106-107)
이슬람 사원 갈등을 취재해 단편 영화를 만들었던 경북대 학생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사원에 대해 듣고 싶어 왔다는 그에게 어쩌다 관심을 갖게 됐냐고 묻자 해 준 이야기다. 경북대 편입생인 그는 어느 날 자취하는 골목에 걸린 혐오표현 현수막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처음에는 어떻게 저런 게 버젓이 걸려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 이틀, 며칠이 지나자 그 현수막 앞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다니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자 카메라를 들었다. 혐오가 나쁜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문제는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내 일이 아닐 때는 쉽게 참아 넘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배타적이고 위계적인 집 만들기, 텃세 부리기도 어느 순간 어쩔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혐오가 집이 되어 버리기 전에 상호 공존과 이해의 집을 만들어 가는, 우리 안 국경을 허무는 실천이 절실하다. (p.108-109)
마을을 나서는 길목에는 선량 측정 검사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현의 원자력 재난 지침에 따르면 방사선계수가 1만 3000씨피엠을 넘으면 시민에게 안정 요오드를 제공하고 기록에 남겨야 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검사소 직원이 그의 몸에 선량계를 대자 바늘이 한계치를 넘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선량계로 다시 측정하지 않았다. 안정 요오드도 받지 못했다. 간노는 겉옷 몇 가지를 들고 마을을 빠져나왔다.어쨌든 나가노 쪽으로 갔습니다. 밤새도록 좁은 차 안에서 아들이랑 실랑이를 벌이면서 갔어요. 아들이 자기는 “도망치고 싶지 않다.”라고 하더라구요. “어차피 어딜 가더라도 못 사는 거라면 그냥 쓰시마에 돌아가고 싶다.”라고요. (……) 고속도로를 타기 시작해 처음으로 주차를 했어요. 거기 큰 커피 전문점 체인이 있는데 그곳은 평소처럼 커피를 팔더군요. 항상 블랙커피를 마시는데, 그때는 라떼를 마신 게 생각나요. 라떼를 마시기 시작하는데 눈물이 나면서 멈추질 않는 거예요. ‘왜 여기는 다 이렇게 평범한 일상인 거지?’ 우리에게는 내일이 보이지 않는데, 여기엔 일상이 유지된다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원전사고 영향 구역에서 피난 명령을 받은 16만 4000여 명의 주민에게 ‘평범한 일상’이 사라진, ‘내일이 보이지 않는’ 날들은 이후로도 수년간 이어졌다. 집을 떠난 많은 이들이 타 지역의 가설 주택 임시 숙소로 뿔뿔이 흩어졌다. 피난자의 절반 이상이 네 곳 이상의 피난지를 전전했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집과 일자리 그리고 이웃을 잃었다. (p.118-119)
상실한 것들의 목록은 길게 이어진다. 피난 지시가 해제된 이이타테무라에 귀환한 여성들은 이렇게 말한다.손자들이 이이타테 집에 오지 않아요. 올 수 없다고 해야겠지요. 큰아들의 아이들도 한 번도 오지 않았어요. 손자는 아빠의 고향을 알지 못하겠지요. 자연이 풍요롭고, 봄에는 고사리나 부근의 나물을 따서 먹거나 쑥을 캐서 초병을 만든다거나 하던, 전부터 먹던 걸 이제 먹을 수 없어요. 밤하늘의 아름다운 모습도 손자들에게는 보여줄 수 없게 되었어요. 같이 놀고 싶어요.
사계절마다 먹을 수 있었던 이이타테의 집 주변의 푸성귀, 산나물, 그런 게 아무래도 가장 큰 게 아닐까요. 돈에 기대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었던 삶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지역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버려서 그게 슬퍼요. 키즈나(絆)라고 할까, 연(緣)이라고 할까,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런 게 없어져 버린 것 같아 쓸쓸하지요.
1986년 체르노빌 원전사고 이후 탈원전과 생태적인 삶을 실천하기 위해 후쿠시마 산속 찻집 ‘키라라’를 운영하던 무토 루이코는 원전사고 이후 도쿄전력 경영진의 책임을 묻는 소송을 진행했다. 그는 주민들에게 “마땅히 있었어야 할 시간”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정부는 복구와 부흥을 외쳤지만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에게 가족 그리고 이웃들과 연결된 생활, 주변의 텃밭과 논 그리고 숲이 내어주는 것들로 꾸리는 삶은 더는 당연하지 않았다. 제염되지 않은 집에서 평범한 일상은 회복되기 어려웠다. (p.122-123)
세입자는 임대인에 대한 설명이랍시고 ‘롤스로이스를 탄다’, ‘주택이 500채가 있다’, ‘강남에 산다’, ‘관악산에 위치한 대학교 교수다’, ‘성형외과 의사다’ 따위의 말을 듣는 일이 흔하다. 이런 말들에 기대 무지막지한 보증금을 넘겨주는 것이 세입자에게 허락된 역할의 전부나 다름없다. 세입자는 집을 들고 도망갈 수 없지만, 임대인은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은 채 잠적하거나 가짜임대인 신분을 내세우기도 하고, 심지어 계약 전부터 고의적으로 설계된 전세사기를 치는 일도 일어난다. (p.156-157)
보증금 미반환 사건 앞에서 대체로 임대인은 뻔뻔하고, 중개사는 아무 역할을 하지 않으며, 은행은 독촉할 준비를 하고, 주변 사람들은 ‘세상물정 배우는 값’이라고 말을 보탠다. 이것은 질서다. 수십 년 동안 세입자의 삶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한국 사회가 유지해 온 질서. 법률가 자문을 받아도 막무가내로 큰소리치는 임대인을 만나는 일 또한 빈번하다. 세입자는 보증금을 언제 받을 수 있을지 알지 못한 채 홀로 모욕을 뒤집어쓰고 돌아온다. (p.157)
솔직히 건물주들은 수도꼭지 하나 못 갈아요. 이런 것도 오래 사용하다 보면 마모돼서 교체를 해 줘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전기도 오래 쓰다 보면 켜고 끄고 하는 게 망가져요. 건물주들은 고쳐 줄 생각도 안 해요.
월세는 25만 원 남짓. 그나마도 매년 꼬박꼬박 올랐다. 열댓 명이 함께 쓰는 화장실은 툭하면 고장 났다. 집주인이 고쳐 줄 리 만무했다. 김정호는 모두가 함께 쓰는 집을 손봤다. 한 평 쪽방은 밥솥이며 부르스타며 꼭 필요한 살림살이만 추려도 ‘쪼글트려 자야’ 할 정도로 좁았다. 이웃들의 방에 선반을 달아 줬다. 조금이라도 발 뻗고 잘 수 있도록.
김정호가 처음부터 맘씨 따뜻한 동네 아저씨였던 건 아니다. 동자동 쪽방촌에는 명절마다 정치권이며 종교계의 봉사활동이 끊이지 않았다. 도움받는 처지로만 남는 게 그리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사는 동네를 직접 가꾸는 마을 청소는 그래서 주민들의 자부심이었다. 주민들은 고물을 팔고 박스를 주워 모은 출자금으로 주민협동조합도 꾸렸다. 은행을 이용하기 어려운 주민들을 위해 대출 사업을 운영했다. 부엌 설비가 없는 쪽방촌 한 켠에 마을 부엌을 만들어 함께 요리하고, 1000원짜리 점심을 나눠 먹었다. 김정호는 2014년부터 사랑방마을주민협동회와 동자동 사랑방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p.173-174)
다시 2024년 서울, 내가 사는 동네의 골목길에는 명절마다 현수막이 붙는다. ‘풍요롭고 행복한 한가위 되세요. ○○건설이 추석을 맞아 조합원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건설사 이름만 다른 현수막이 한 골목에도 몇 개씩 걸려 있다. 나한테 하는 말은 아니구나. 이 동네의 반이 넘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말도 아닐 터였다. 서울은 세입자가 집주인보다 많은 도시이니 말이다. 보란 듯 펄럭이는 현수막은 아주 큰 소리로, 아주 일부의 사람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듯하다. 말없이 현수막 아래를 지나가며, 김치부침개를 입에 욱여넣고 말없이 3호실로 들어가던 소년을 떠올린다. 나는 그 뒷모습을 자존심으로 기억한다. 소유주가 꽂아 둔 빨간 깃발을 말없이 지나쳐야 했던 김정호처럼, 말하지 않지만 목소리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다짐을 했을 사람들을 떠올린다. 집도 거리도 소유한 사람들만의 것이라고 말하는 세상에 나도 살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을 사람들을. (p.180-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