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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에서 전합니다! / 브래디 미카코 / 다다서재

 

 여자가 아무리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위업을 이뤄도 ‘하지만 그 여자는 나쁜 엄마야.’라는 말을 들으면, 그 순간 모든 업적에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인격파탄자라는 낙인이 찍히니, ‘선량한 엄마’라는 호칭은 여자가 성공하기 위한 필수 요소인 것일까. 남자는 부친 실격자라는 평판을 받아도 당당하게 사업가나 정치가나 문화인으로 활동할 수 있다. 하지만 여자는 다른 것이다. 모친 실격자는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을 수 없다.
 여자들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좋은 엄마’라는 호칭, 또는 가면이 얼굴에서 벗겨지지 않도록 살아간다면, 그건 비굴한 것이다. ‘나쁜 엄마’를 금기시하는 것은 남자들도 사회도 아닌 바로 당사자인 여자들이다. (p.60-61)

 

 지금까지 쓴 글로부터 알 수 있듯이, 요컨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올바르다 생각하는 것을 통일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얀 비둘기를 파란 하늘로 날리며 ‘평화, 인명은 지구보다 중요해.’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언가를 추구하며 싸우다 죽는 것이야말로 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진리인지 똥인지 알 게 뭐냐, 낭만적인 소리 집어치워라, 정신 나간 놈, 하며 굳이 무법 지대로 나가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더더욱 중요한 점이 있으니 사실 인간 따위로서는 사람들 제각각의 정의 중 무엇이 정말 올바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타인이 올바르다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올바르다.’라며 ‘내가 남보다 낫다.’ 혹은 ‘나는 남보다 살짝 훌륭해서 무엇이 올바른지 아는 꽤 특별한 사람.’ 나아가 ‘나는 천황가의 후예로 신의 서자다.’ 등 수상쩍은 자신감의 근거는 그것이 환상인 이상 갖고 있어 봤자 무의미할 뿐 아니라 재앙의 씨앗이 되기만 한다.
 “점점 혼탁해질 세계”(존 라이든)를 살아가면서 조금이나마 도움 되는 것이 있다면,
 나는 자주 틀린다.
 그런 체념 가득한 인식. 혹은 부정적인 관용. 아니면 밑바닥에서 바라본 통찰.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 최근 들어 나는 진지하게 생각한다.
 ‘잔인한 행위’가 발생할 때마다 자신의 정당성을 더욱 확신하는 듯한 영미 정치적 지도자들의 그 자신감과 정의감에 취한, 빛나고, 힘이 넘치고, 의욕이 용솟음치는 얼굴을 바라보자니 말이다.
 사실 말은 이렇게 해도, 나 역시 틀렸을 수 있지만. (p.84-85)

 

 보잘것없던 것이 사실인 노동당 정권이 한 일 중 그래도 가장 훌륭했던 것은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이 개인적으로도 원했는지는 모르지만, 노동당의 전통적 이념에 따라 우선할 수밖에 없었던 정책으로서) ‘밑바닥을 끌어올리려고 했던’ 교육 정책이다.
 밑바닥 사람들을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은 교육밖에 없다.
 이런 사상을 떠받드는 노동당 정권 덕분에 얼마나 많은 빈곤층과 언더클래스 아이들이 대학과 대학원을 다닐 수 있었는가. 전부 록 스타 지망생이었던 토니 블레어가 연설에서 “교육, 교육, 교육!”이라 외쳐서 청중을 열광시킨 바로 그 정책 덕분이었다.
 텔레비전 뉴스에 등장하는 학생들은 모두 젊은이들이고 중노년 학생은 별로 화제에 오르지 않지만, 보수당 정권(실은 자유민주당이 함께하는 연립정권이지만, 시작부터 자유민주당은 없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이 교육 예산을 대폭 삭감한 탓에 아저씨·아줌마 학생을 위한 보조금과 학비 면제 제도 등도 폐지되어서 “영국은 좋은 나라야. 나이가 많아도 다양한 공부를 할 수 있고, 인생에 선택지가 많아.” 하는 일본인 유학생의 소감은 앞으로 들을 일이 없을 것이다. 지긋한 나이에 거액의 빚을 지면서까지 대학에서 공부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까.
 10대에 아이를 여럿 낳고 20년 동안 어머니로 살았지만, 아이들도 모두 어른이 되었으니 늦게나마 대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 이런 꿈이 있었던 빈민가 여성들도 현 정권에서는 ‘웃기는 소리 말고, 하층의 인간은 하층답게 영원히 최저임금이나 받으면서 일해. 주택 보조금도 끊을 거니까.’ 같은 대우를 받게 되었다. 보수당의 지지 기반이 중산층 이상인 이상, 그들은 ‘밑바닥 사람 끌어올리기’ 같은 일에 관심을 주지 않는다. 굳이 말하면, 위에 있는 사람들이 만족하도록 격차를 더욱더 넓힐 뿐이지. (p.87-88)

 

 매일 접하는 어휘 수가 중산층의 유아들과 비교하면 10퍼센트 이하. 그런 말을 듣는 빈곤층 유아들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동당 정권은 보육사들을 ‘유아 교육 전문 교사’로 만들고 보육시설에서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적합한 학습 과정을 세우게 하려 했다. 그러기 위해 유아 학습 과정을 만들 수 있는 전문가를 육성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전국 대학교에서 시작하고, 일하면서 공부하려는 보육사들에게는 학비를 전액 면제해주었다. 특히 가난한 지역의 보육시설에서 일하는 보육사가 대학교에 다니면 그 보육사가 근무하는 시설에도 장려금 등을 지급해주었다.
 내가 일했던 ‘밑바닥 어린이집’ 같은 곳이 노동당 정권의 정책에 얼마나 큰 도움을 받았는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학비 면제 제도를 이용해 대학교에 입학한 밑바닥 어린이집 관계자 중 한 사람도 새로운 정권이 내년부터 그 제도를 폐지하여 공부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플래카드를 들고 가랑눈 흩날리는 브라이턴 거리를 행진했다. (p.89-90)

 

 학생 시위에 관해 쓰고 싶어진 것에는 개인적인 이유가 있다.
 영국에서는 ‘기이할 만큼 산수에 능한 사람들’로 여겨지는 일본인의 일원으로서 나는 이따금씩 모 진보적 자선 단체가 운영하는 교육 기관의 성인 대상 산수 교실에서 보조 교사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그래서 읽고 쓰기와 산수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성인 영국인들을 재교육하는 현장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고, 그래서 노동당 정권이 얼마나 예산을 들여서 밑바닥 사람들을 끌어올리려고 했는지도 알고 있다.
 단언컨대, 일본의 열두 살이라면 그곳의 시험에 낙제할 리는 없다. 그 정도로 쉬운 산수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공부하는 성인 영국인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는가. 곱셈, 나눗셈은커녕 덧셈, 뺄셈에도 애를 먹는다. 눈금자도 읽을 줄 모른다. 마약에 빠졌다 간신히 끊었다든지 열세 살에 임신해 학교를 자퇴했다든지 하는 젊은이들만 그곳에서 공부하는 건 아니다. 의외로 평범하게 일하는 아줌마 아저씨도 다닌다.
 ‘수입 격차’도 대단하지만, ‘교육 격차’는 더더욱 대단하다.
 이 나라에 그런 사정이 있다는 걸 지식으로는 알았지만, 실제로 교실에 나란히 앉아 ‘24+8’이라는 문제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르는 어른들을 처음 보았을 때는 할 말을 잃었다. 덧셈이나 뺄셈을 하지 않아도 평생 먹고살 수 있다면 딱히 산수 따위 할 줄 몰라도 상관없을 테지만, 그들은 다양한 사정이 있어 다시 공부하기 위해 찾아왔다.
 취직하고 싶다. 승진하고 싶다. 이런 것들이 주된 이유이긴 했다. 그 외에 아이의 숙제를 봐주고 싶다, 아무리 그래도 인간적으로 덧셈 뺄셈 정도는 하고 싶다, 하는 사람도 있었다. 동네 담배 가게에서 계산할 때 맨날 나만 잔돈을 조금씩 덜 받는 것 같다는 절실한 위기의식을 토로한 사람도 있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다시 배울 기회를 무료로 제공한 노동당의 정책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 성인 대상 산수·읽기 쓰기 교실도 보수당 정권의 교육 예산 삭감 때문에 당장 내년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p.96-98)

 

 그런 점을 고려하면 성인 대상 산수 교실은 내 취향에 딱 맞는 곳이다. 그런 곳을 무시하려 하는 보수당이 얼른 정권을 내려놓기를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연 수입이나 계급 같은 배경과 무관하게 전 국민이 ‘15+7’이 얼마인지, 영하 2도와 영하 6도 중 어느 쪽이 더 추운지 아는 나라가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99)

 

 런던 올림픽 폐막식에 그토록 많은 밴드와 가수가 출연했는데도, 어째서인지 우리 집 아들이 가장 강렬한 인상을 받은 건 에릭 아이들(Eric Idle)이었다고 하는데, 그 여름이 지난 뒤에도 자주 「올웨이즈 룩 온 더 브라이트 사이드 오브 라이프(Always Look on the Bright Side of Life)」를 부르는 바람에 모친으로서 당혹스럽다.
 왜냐하면 몬티 파이튼의 명작 코미디 영화인 「라이프 오브 브라이언(Life of Brian)」에 삽입된 이 노래의 가사에 “인생은 똥 덩어리야(Life is a piece of shit).”라는 내 좌우명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노래를 아들이 부르는 것에서 무언가 피의 저주 같은 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노래는 영국인을 대상으로 ‘자신의 장례식에서 틀고 싶은 노래’를 조사했을 때 늘 상위권에 자리하는데, 굳이 여섯 살 꼬맹이가 장례식용 노래를 마음에 들어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지만, 아무래도 아들의 마음에 든 것은 노래 그 자체가 아닌 듯했다. (p.138-139)

 

 구역질 날 만큼 조국에 절망하면서도 그들은 한결같이 영어 기사를 번역하고는 모국 정부에 차단되지 않을 방법을 찾아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발신하고 있다.
 애국자만이 나라를 사랑한다고는 할 수 없다.
 애국자와 입장이 다르면서도 끊임없이 나라에 관해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잉글랜드인이라는 인종이 싫다는 이유만으로는 그런 가사를 쓰지 못한다. 그런 가사를 쓰는 이유는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존 라이든이 「갓 세이브 더 퀸」에 관해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어느 아침, 일어나자마자 식빵과 통조림콩을 먹으면서 단숨에 쓴 것이 「갓 세이브 더 퀸」의 가사였다는데, 라이든이 그 가사를 쓰게 만든 것과 친구 부부가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리 동떨어지지 않은 듯싶다.
 국가라는 정체성을 사랑하는 인간과 우연히 그곳에 태어나 살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인간. 그 두 부류는 환상을 사랑하는 낭만주의자와 실존을 사랑하는 현실주의자라고 바꿔 부를 수도 있다.
 결국 정치적 입장이라는 것은 사람들 제각각이 무엇을 사랑하는지에 따라 결정되는지도 모른다. (p.145-146)

 

 매일매일 빌어먹을 시급으로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면서 월급이 아니라 주급을 받고, 그 쥐꼬리만 한 임금에서도 세금을 빼앗기고, 대처 정권에 속아 공영주택을 구입했건만 자기 집을 수리할 돈이 없어 망가진 보일러를 고치지 못하고 한겨울에 동사한 사람도 있다고 하는, 정말로 고 대처 남작이 한 짓을 알고 있는 ‘노동자 계급’은 신문에 실린 사진 속 인물들처럼 흥겨워하지도 분노하지도 만취하지도 않았다.
 정말로 대처 때문에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과 여전히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은 이른 아침 일어나 일을 나가기 위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p.185)

 

 “애초에 엘비스 코스텔로의 그 노래는 그 여자가 죽으면 묘를 짓밟고 파티를 하겠다는 게 아냐. 그 여자보다 우리가 먼저 죽겠지 하는 슬픈 노래라고.”
 R이 말했다.
 R 같은 사람은 고인의 묘에 침을 뱉지 않는다. 그럴 틈에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있기 때문이다. 그가 탁자 위에 펼친 표에는 무료 산수 교실에 다니던 학생과 자원봉사자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혹시 여기 있는 모든 사람한테 연락하는 거야?”
 “응.”
 정치가들은 대처의 장례식 절차로 논쟁을 벌이고, ‘좌파’ 사람들은 장례식 당일의 항의 시위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리고 R은 장례식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커다란 표를 가득 채운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 것이다.
 R 같은 사람의 일은 신문과 온라인 뉴스에 단 한 줄도 쓰이지 않는다. 하지만 진심으로 대처가 남긴 유산의 뒤처리를 하는 사람들은 R처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말단의 사람들이다.
 내게 그 무엇보다 영국적인 것은 그와 같은 사람들이다. (p.189-190)

 

 “슈퍼마켓에서 매주 가족 네 명이 먹을 식료품을 사잖아. 3년 전만 해도 50파운드면 충분했는데, 이제는 똑같이 사도 80파운드가 들어. 그렇게 물가가 오르는데 급여를 깎는다니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없어.”
 폴란드인 쓰레기 수거원이 말했다. 대처의 후예들이 하는 정치란 바로 이런 것이다.
 “나는 멋대로 이 나라에 온 인간이니까 노동자의 권리 같은 번거로운 이야기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 더러워진 거리를 보면 마음도 아프고. 하지만 나도 애들 둘을 데리고 먹고살아야 한다고. 의회에 있는 높으신 양반들은 매년 수입이 오르는데 밑바닥 노동자만 수입이 줄어드는 건 이상하잖아.” (p.194)

 

 “다음에는 노동당이 정권을 잡을 거야.”
 “아마도. 그렇게 되면 좋겠는데.”
 배우자가 그렇게 모호한 말밖에 하지 못한 것은 토니 블레어 정권 시절 노동당의 노선이 눈에 띄게 보수당과 가까워진 탓에 (대처는 아예 “내 최대 공적은 토니 블레어라는 정치가가 나온 것”이라고 했을 정도다) 이제는 노동당도 보수당도 별 차이가 없다는, ‘이놈이나 저놈이나’ 같은 분위기가 너무나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수당이 미움을 받는다고 하지만, 딱히 노동당이 지지자를 모으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결코 ‘이놈이나 저놈이나’ 마찬가지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이 비슷해도, 그 핵심에 있는 가치관이 다른 이상 ‘이놈이나 저놈이나’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회 경제적 계급 피라미드에서 가운데쯤이나 조금 위쪽에 있는 분에게는 어느 당이 정권을 잡든 생활에 큰 차이가 없겠지만, 하층민의 생활은 정권에 따라 눈에 뚜렷이 보일 만큼 크게 달라진다. 예나 지금이나 보수당 정치가 해결하지 않고 떠미는 불합리는 돈도 없고 지위도 없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희박한 계층의 사람들이 떠맡아왔기 때문이다.
 보수당이 떠미는 불합리의 방향을 용인하거나, 보고도 못 본 척하거나, 그런 건 하나도 모르고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고 시치미 떼거나 할 게 아니라면 ‘이놈이나 저놈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디도 지지하지 않는다’며 허무주의적으로 고개를 가로젓는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지식층’은 모두 보수당을 지지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더 이상 중용을 추구하며 멋스럽게 방관해도 상관없는 곳이 아니다.
 길바닥에 널린 짐승의 똥과 달걀노른자를 밟은 운동화를 세탁하면서 나는 그런 변화를 직접 느끼고 있다. (p.196-198)

 

 작년에 열렸던 다이아몬드 주빌리 콘서트에서는 폴 매카트니를 비롯해서 모든 출연자가 특별석에 앉아 있는 왕실 구성원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반항’을 연기할 뮤지션조차 없었다. 다들 행복하게 노래하고 춤추며 왕실의 존재를 찬양했다.
 버칠에 따르면 오늘날 영국 대중음악계에서 ‘반항아들’이 자취를 감춘 이유는 현재 음원 순위 상위권을 차지한 뮤지션들의 출신만 봐도 알 수 있다고 한다. 영국에서는 아이 열 명 중 한 명이 수업료를 내야 하는 사립학교를 다니는데, 지금 음원 순위에 올라가 있는 뮤지션은 60퍼센트가 사립학교 출신이라고 한다. 버칠은 “20년 전에는 10퍼센트였다.”라고 한탄했다.
 실제로 음악계와 언론계는 오래전 ‘노동자 계급의 똑똑한 아이들’에게 빈민가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해주었지만, 현대에 접어들어 중산층 및 상류층의 엘리트들과 기성 업계인의 자녀들이 그 업계를 점령했다고 한다. “엄마 아빠가 없었으면 칼럼니스트가 되었을 리 없는 지루한 2세대 작가들의 대두는 현대 사회의 불쾌하기 그지없는 범죄 중 하나다. 그런 2세대 작가들의 부모라는 작자들은 ‘하층 아이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따위의 글을 신문에 쓰고 있다.”라고 버칠은 현재의 상황을 우려했다. (p.212-213)

 

 엄혹한 시대에 약자들이 하나로 뭉친다, 하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환상의 세계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엄혹한 시대일수록 살기 팍팍한 사람은 자기보다 약한 이에게 지독한 짓을 한다. 하지만 그처럼 인간의 본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시대는, 핍박당하는 사람들의 분노와 애절함이 창작과 표현 등으로 분출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p.244)

 

 “자본주의는 나쁜 의미의 아나키즘이다.”라고 좌익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정부가 계획을 세우지 않고 개개인의 경쟁에 모든 걸 맡기면 우수한 사람만 살아남고 뒤처진 사람은 자연도태가 된다. 이처럼 무계획적이고 인정사정없는 사상은 틀림없이 아나키한 것이며, 나아가 궁극의 무정부주의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니 영국 하층의 풍경에서 내가 아나키함을 느끼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브로큰 브리튼’이란 자본주의가 영락한 결과였던 것이다. ‘아나키즘 인 더 UK’는 사실 ‘캐피털리즘 인 더 UK’였다는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1945년의 시대정신」을 보았다. (본편과 인터뷰를 합치면 여덟 시간 반에 이르는 대장편이다.)
 “사회주의가 처음 나타난 건 언제일까요?”
 영화에서 켄 로치가 던진 질문에 학자가 답했다.
 “기독교는 궁극적으로 사회주의라 할 수 있다. 그러니 기독교가 탄생한 시대에 이미 사회주의가 있었던 셈이다.” (p.254-255)

 

 “영국 젊은이들은 하층의 일자리를 기피한다.”라는 것은 오래전 이야기로 실업급여와 기초생활보장이 끊기는 시대가 되며 그들은 사회로 복귀를 꾀하고 있다. 안 그러면 먹고살 수 없으니까. 그처럼 궁지에 몰린 빈민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이 하층의 일자리를 두고 경쟁하면서 시급은 점점 깎이고 대우는 나빠질 뿐인데, 그런 것이 ‘개인의 경쟁에 모두 맡긴다’는 자본주의의 양상이라면, 그 경쟁에서 승리하는 사람은 ‘잠자코 고용주에게 유린당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시장 경쟁의 원칙이란 ‘비용은 낮추고 이윤은 높이는 것’일 텐데, 인건비라는 비용은 유기물이다. 그 비용에는 노동을 제공하는 인간의 목숨과 생활이 걸려 있다.
 영국의 인건비를 내리누르는 외국인 노동자와 임금이 내려가 빈곤해지는 영국인 노동자.
 UKIP의 지지율이 높아지는 것은 그럴 만한 일이지만, 문제의 본질은 하층에서 저임금 일자리를 둘러싸고 경쟁하는 외국인과 영국인의 충돌이 아니라 비인도적일 만큼 인건비를 억누르며 경쟁에서 이기려 하는 상층의 자본주의 정신일 것이다. (p.263)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배외주의가 부활한 것일까? 영국인은 오랜 시간 동안 ‘뭐, 할 수 없지.’라며 외국인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나? 그 때문에 일본인인 나도 아이들에게 그림책 같은 걸 읽어주며 “선생님의 L 발음 이상해.” 같은 지적을 받아도 “괜찮아, 선생님은 외국인이니까, 헤헤헤.” “후후후.” “하하하.” 하고 모두와 함께 밝게 웃으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낸 것 아닌가?
 “1980년대에 배외주의가 달아올랐을 때하고는 이주민의 수가 차원이 달라.”
 배우자는 그렇게 말했다.
 “유럽연합 내에서 넘어오는 노동자가 너무 많아. 이대로 가면 하층의 젊은 애들은 정말로 일을 하고 싶어도 못 하게 될 거야. 대처는 지방의 제조업을 박살내서 실업자를 대량 생산했지만, 그래도 실업급여나 기초생활보장은 쉽게 주었어. 하지만 지금은 주던 기초생활보장도 전부 끊어버리는 시대야. 그렇게 밥그릇을 빼앗으면서 점점 더 이주민을 받아들이는 건 하층민한테 죽으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야.”
 배우자의 주장은 빈민가 인간들의 의견을 대변한 것이었다. 토니 블레어 이후, 노동당은 더 이상 노동자를 대변하는 당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UKIP 지지로 돌아서고 있다. 오랫동안 좌파였지만 느닷없이 극우로 건너뛰는 사람이 내 주변에도 꽤 많다. (p.277-278)

 

 나는 그 패라지라는 인물을 사기꾼이라고 생각하며 결국에는 그저 혼란만 일으키고 끝날 것이라고 보는데, 그 혼란에 영국의 하층민이 기꺼이 올라탄 것은 오랫동안 이 나라의 정치가 하층민을 완전히 무시해왔기 때문이다. 영국 사람들의 우경화는 정치에 대한 복수라 해도 무방하다.
 이번 선거로 유럽의회에서는 놀랍게도 UKIP가 영국의 제1당이 되었다. 게다가 이번에 UKIP에 표를 준 사람들 중 86퍼센트가 내년 총선에서도 UKIP에 투표하겠다는 모양이다. 정치가 하층민의 비명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내버려두고, 계속 세간의 현실과 동떨어진 엘리트를 위하기만 하니, 국민이 충동적으로 검지와 중지를 세워 보이는 것이다. 영국은 설령 일시적인 현상이라 해도 몹시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갈지 모른다. (p.279-280)

 

 유럽인이 언론의 자유를 명목으로 종교를 조롱하고 시비 거는 것은 유럽 문화의 모태인 기독교가 반영웅을 교조로 삼고 있는 종교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진심으로 생각한다. 멸시당하고, 무시당하고, 풍자의 대상이 되어 처형된 비참한 남자는 그가 가장 낮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신이 되었다. 뭐라 해도 그런 역설적인 면이 기독교에는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금기라는 의식이 희박한 것이다. 그리스도 역시 희롱당했으니 무엇이든 풍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는 것이 다른 문화권·종교권에 속한 사람에게도 통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신이란 임금님처럼 금박 은박을 두른 존재라고 여기거나 신은 절대적 성역이어야 한다고 믿는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반영웅을 숭상하는 문화’를 받아들이라는 건 무리한 주문이다.
 나는 반영웅도 풍자도 무척 좋아하고(무슨 인과였는지 과거에 가톨릭 세례를 받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몬티 파이튼의 코미디 영화 「라이프 오브 브라이언」을 꼽는 인간이라서 종교는 놀림을 받아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종교에는 그런 숙명이 있다고도 생각한다(그래서 종교를 믿을 수 있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종교와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지닌 건 당연하다고도 생각한다. 최근의 풍조를 보면 아일랜드인이든 잉글랜드인이든 “무슬림은 유머를 이해하지 못한다.”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주민의 유머 감각까지 교정할 셈인가 하는 의심이 든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무슬림 이주민 대부분은 ‘우리 대 저놈들’이라는 대립 구도 속에서 살아가지 않으며, 무탈한 일상을 보내기 위해 스스로 타인에게 다가간다. (p.314-315)

 

 “사실 잘 생각해보면 위험한 일 아냐? 이러쿵저러쿵해도 그 녀석들은 권력에 반대 의견을 내는 존재였잖아. 세상에서 반론이 사라졌다는 뜻이네.”
 그 주장의 옳고 그름은 제쳐두고, 세상에 반론이 활기차게 존재한다는 것은 민주주의가 살아 있다는 뜻이다. 반대 의견이 힘을 잃고 눈에 띄지 않는 사회의 민주주의란 숨넘어가기 직전이나 마찬가지다.
 그리스만 해도 국민투표로 인민이 ‘이제 긴축은 좀 그만해주세요.’라고 했는데 아직도 계속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경제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세계의 거의 모든 저명 경제학자들이 ‘그리스의 경우에는 긴축해도 빚이 안 줄어든다. 불황도 안 끝난다.’라고 단언했다. 그 긴축은 더 이상 재정·경제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유럽을 좌지우지하는 EU라는 조직의 지도자들이 생각하기에, 그 사회에 반론이 활기차게 존재하면 성가시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거스르는 놈은 긴축에, 긴축에, 또 긴축을 해서 꿈도 희망도 빼앗고 고분고분하게 만들겠다. 그와 같은 ‘훈육’의 정치가 긴축인 것이다.
 학자들이 입을 모아 ‘그건 잘못됐어.’라고 말해도, 인민이 ‘그런 거 절대로 싫어.’라고 말해도, 위정자가 억지로 자신의 계획과 의제를 밀어붙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불도저 정치가 유행이다. (p.340-341)

 

 젠더든 인종이든 다양성 문제는 요즘 추세에 편승하기 쉬운 것입니다. 다양한 인종의 모델들이 무지갯빛 티셔츠를 입고 웃는 사진 위에 ‘이제는 다양성의 시대’라는 헤드라인을 쓴 패션 잡지의 표지. 그런 건 쉽게 상상할 수 있고 실제로 비슷한 것이 광고용 사진이든 뭐든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과연 ‘앞으로는 계급의 시대’라든지 ‘빈곤에 주목하자’ 하는 헤드라인이 표지를 장식한 패션 잡지가 존재할까요. 적어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계급과 빈곤은 훨씬 오래전부터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를 말하면, 계급은 제가 지금까지 들어온 음악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노동자 계급으로 태어난 것은 부끄러운 일도 볼썽사나운 일도 아니라고 저에게 가르쳐준 것이 영국의 음악이기 때문이겠죠. 가난뱅이는 촌스럽고 한심한 존재라는 말을 들어온 지방 도시의 어린 여자아이에게 그 음악들은 바다 너머에서 들려온 복음이었습니다.
 저에게 음악이 정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인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음악은 정치적일 필요도 정치적이 될 필요도 없으며, 언제나 정치적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p.382-3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