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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커 씨, 사실인가요? / 이승엽 / 어떤책

 

 그런데 로슬링의 논리 전개는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범주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 범주 혼동의 오류다. 아무리 자연재해의 사망자 수가 지난 세기 동안 줄었어도, 극단적 빈곤율이 20년 전에 비해 줄어들었어도 사람들은 세상의 변화에 대해 제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그 의미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한 사람들의 대답은 그 판단의 준거를 어떤 가치에, 어떤 시점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도 로슬링은 자신이 준비한 통계만으로도 간단히 세상이 좋아진다는 가치판단이 굳건히 정당화된다고 의심치 않는 모양이다. 그는 세상이 나빠지고 있다는 사람들의 판단이 어떤 가치와 사실에 준거를 두는지는 따지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들이 세상의 변화에 대해 침팬지보다도 무지하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깨닫고 로슬링의 강연에 매료된 사람들은 로슬링에게 이미 설득되어 버렸다. 로슬링이 선사한 상쾌한 충격이 그의 호언장담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뒤집은 것이다. (p.32-33)

 

 빈곤은 줄었고, 세상은 더 평화로워지며, 사회는 더 민주적으로 변한다는 신낙관주의자들의 주장을 실증적으로 검증하려 들면, 당장에 ‘빈곤’과 ‘평화’, ‘민주주의’같이 인류가 만들어 낸 개념들을 어떻게 측정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부상한다. 사회과학자들은 조작화(operationalization)를 통해 측정 가능한 방식으로 개념을 다시 정의해 연구에 사용한다. 그래서 사회과학 연구에서는 과연 측정하고 있는 현상이 애초에 연구하고자 했던 개념과 얼마나 정확히 대응하는지가 방법론적 관심이 될 수밖에 없다. 신낙관주의자들의 팩트폭격에서 생략된 건 바로 이런 의미관계이고, 팩트물신화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팩트의 제작 과정을 들여다보며 의미관계를 치밀히 검토해야 한다. 팩트의 배후에 무엇을 측정할지, 혹은 측정하지 않을지를 결정한 그 제작자들의 선택이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렇게 우리는 팩트를 해부해 볼 수 있다. (p.62-63)

 

 핑커는 국제 무역의 확대라는 세계화의 경제적 차원이 가져다 주는 분명한 이득과, 세계화와 관련한 공공 담론에서 중요한 쟁점이 되어 온 정치적 차원의 정책 변수를 구분하지 않고 그저 세계화가 빈곤을 줄였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세계화인지였다. 세계화에 동참하는 것만으로 높은 경제성장률과 생활 수준을 이룰 수 있다면, 정치의 역할은 세계화의 도도한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며 대류에 순응하는 것뿐이었을 테다. 즉, 세계화라는 경제적 힘이 빈곤의 종식을 가져올 것을 낙관하며, 그 흐름을 거스르려는 무지한 대중의 포퓰리즘을 방어해 내면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방식으로 세계화에 참여하는지가 결과를 크게 좌우하는 중요한 매개라면, 정치가 가진 역할의 무게가 사뭇 달라진다. IMF,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구의 주도하에 이뤄진 워싱턴 컨센서스에 입각한 세계화가 1980~1990년대에 많은 개발도상국에 야기한 생활 수준의 후퇴 혹은 정체, 그 이후의 반등은 정치적 선택이 결과의 큰 차이를 낳은 핵심 변수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p.102-103)

 

 극단적 빈곤의 측정을 통해 보았듯이, 여러 추상적 개념을 측정해 분석하고자 하는 사회과학에서는 측량 가능한 지표들을 종합해 구성개념을 요약적으로 정량화한 지수(index)의 활용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표들의 구성 과정에서 무엇을 어떤 기준으로 측정하며, 혹은 무엇은 측정하지 않을지, 그리고 어떤 지표를 각각 어느 정도의 비중으로 반영할지 등의 문제에 관한 제작자의 정성적 판단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지수의 구성 과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사회과학적 주제를 다루는 커뮤니케이션에서 필수다. 이런 비판적 검토가 생략된 팩트물신주의적 태도는 때로 우리의 논의를 오도한다.
 우리가 팩트물신을 해체하며 팩트의 구성 과정을 들여다볼 때, 그제야 팩트의 권위 뒤에 가려져 있던 정치적 파워 게임이 드러난다. 극빈율 통계의 산출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고 우리에게도 익숙한 물가지수의 뒤에도 이런 정치적 입장과 움직임이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 보자.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지수의 뒤에 숨어 작동하는 것은 큰 편차를 만들어 내는 파워 게임이었다. 물가지수로는 물가동향의 편차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닛잔과 비클러의 분석은 ‘팩트’라고 일컬어지는 숫자가 우리에게 강권하는 객관성에 대한 믿음을 얼마간 유보하고 분석의 목적에 비추어 비판적으로 이를 검토할 때, 정말 중요한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좀 상투적으로 말하자면, 사실이 곧 진실은 아니다.
 정치학자 김상배와 공저자 김유정은 논문에서 현실을 지수로 집약하기 위해 현상의 어떤 요소와 지표를 사용할지, 어디에 가중치를 부여해 지수로 변환할지를 결정하는 일련의 과정이 현실과 지수 사이의 불일치를 야기할 가능성을 환기한다. 두 저자는 이 불일치는 결국 “수많은 요인들과 복잡한 조건 가운데 무엇을 보여 줄 것인가를 선택하는, 일종의 권력의 반영물”이라고 말한다. 또한 어떤 지수의 구성은 현상 배후의 정치적 역학을 숨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자신이 몸소 정치적 힘을 휘두르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공신력 있는 국제금융기구들이 만들어 온 지수가 제시하는 표준이 현실의 정책 결정에 적잖은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이다. (p.105-106)

 

 식민지 시기 한국에서 근대적 경제성장이 이뤄졌다는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을 뒷받침하는 가장 강력한 팩트인 낙성대경제연구소의 장기 통계에도 이런 문제가 가로놓여져 있다. 오늘날 국민계정체계와는 달리, 식민지 초기 만들어진 공산품 관련 통계들은 자가소비되는 가내생산물을 일관되게 포함하고 있지 않다. 과거로 갈수록 당시 가계에 중요한 요소였던 가내생산물의 파악이 부정확해 누락이 컸다면, 과거의 생활 수준은 과소평가되었을 것이며, 근대의 성장률 또한 과대평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경제사학자들도 이런 점을 알고 수정 및 보완 작업을 통해 통계의 구멍을 추정치로 채워 넣지만, 대체로 그 과정에서 불확실한 가정들이 개입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식민지 시기 농가의 필수 식품이었을 간장과 된장의 산출량은 원료인 대두의 소비량에 대비해 추정되는데, 이는 가내생산 위주의 조선식 간장, 된장 생산이 비교적 정확히 파악되는 1935~1936년 대두 소비량에 대비한 산출량 비율이 이전 식민지기 전체에 걸쳐 비슷했을 것이라는 가정에 의존한다. 이런 추정들은 대체로 연구자들이 판단하기에 당시의 실정과 가장 부합하는 가정에 근거할 테지만, 그 불확실성을 제거할 수는 없다. 그리고 가정이 많이 개입할수록 그 가정에 근거해 만들어진 팩트가 현실과 동떨어질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식민지 근대화론과 실증적으로 논쟁해 온 경제학자 허수열은 역사적 GDP 통계에 미친 자의적 결정의 영향을 비판적으로 해석하며 “식민지 근대화론은 조선총독부 초기 통계가 갖는 여러 문제점들을 충분히 수정하지 않고 사용함으로써 지나치게 성장률을 과대평가하였다”라고 주장했다. (p.125-126)

 

 신낙관주의자건 아니건, 수명 증가가 괄목할 만한 진보라는 데에는 이견이 있기 어렵다. 수명과 건강의 영역 밖에서도, 인류가 거의 모든 영역에서 과거에 비해 큰 진보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이러한 진보들을 핑커가 말한 것처럼 “일관성 있는 현상”으로 구성해 내고자 하는 신낙관주의자들의 내러티브다. 더 나아가, 이 내러티브가 어쩌면 진보에 대한 지나치게 단순한 이해와 그로부터 비롯된 과한 낙관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인류는 물질적 궁핍을 극복하는 데에도, 높은 사망률의 질곡으로부터 탈출하는 데에도 성공했지만, 그것이 어느 하나를 이뤄 내면 다른 하나도 저절로 따라 나오는 모종의 패키지와 같은 것이었을까? “진보는 한 덩어리의 패키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서도 이 복수의 진보들 아래에 “일관성 있는” 이유가 있다고 말함으로써 핑커와 신낙관주의자들은 이 진보들을 하나의 패키지처럼 설명하고 만다. 그렇기에 신낙관주의자들에게 감소하는 극빈율 데이터가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물결이 가져온 경제적 진보를 증거한다면, 향상하는 기대수명 데이터는 그와 똑같은 진보가 건강의 영역에도 관철되었음을 의미한다. 초기 산업화 시대에 자본의 축적 과정이 얼마나 착취적이고 폭력적이었는지에 대한 인문사회과학자들의 고발은 눈부시게 향상한 수명 그래프와 수명과 경제적 번영의 강한 상관관계를 그리는 소득-수명 그래프 앞에서 무색해지고 만다. 덕분에 ‘이렇게 수명이 빠르게 증가했는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라는 논리는 다시 극빈율 데이터가 역설하는 내러티브를 보강한다. ‘수명이 이렇게 빠르게 향상됐는데, 당연히 빈곤도 감소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그런 탓에 “그 인과의 방향을 확실하게 추적하기가 불가능할 때도 있”다면서도 ‘무심코 “산업화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수명을 두 배로 늘리고, 극심한 빈곤을 감소”시켰다고 말하거나 혹은 “돈과 건강” 사이의 인과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다면서도’ “경제성장이 발전의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서 “생존의 80퍼센트를 설명”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핑커와 로슬링의 진보 내러티브가 경제성장과 기대수명의 인과관계를 사회과학적으로 입증하고자 하는 어떤 진지한 시도 없이 인과의 플롯으로 연결되는 것은(특히 핑커가 그렇다) 이런 이유에서다. (p.166-168)

 

 스레터는 오히려 산업혁명기의 경제성장이 기대수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산업화와 도시 인구의 과밀로 질병에 취약한 환경이 조성됐기 때문에 산업혁명기 가장 급속한 경제성장을 겪었던 도시들은 오히려 기대수명이 전국 평균에 비해 낮았으며, 1820~1850년 이 지역들 상당수가 기대수명의 감소를 경험했던 것이다. 또한 산업화에 뒤따른 사회구조의 변화는 정치적으로 수명 증가를 위한 개혁이 이뤄지기 어려운 대립 구도를 형성했다. 산업화는 신진 자본가와 그들에게 고용된 임금노동자, 장인 계층부터 봉건적 사회구조의 잔재인 지주 귀족까지, 여러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새로운 계급 질서를 만들어 냈다. 그런데 도시 위생을 개선하려는 정치적 시도들은 공장이나 작업장 등을 소유한 자산가, 지주 등의 이익과 때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스레터는 산업혁명을 계기로 성장한 도시 프티부르주아 계급의 반대가 위생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상수도 인프라를 건설하고 하수 처리 시스템을 완비하는 등 위생개혁의 구체적인 과제를 수행하려면 정부의 경제력이 커질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작은 정부’를 지지하는 자본가들의 이익과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충돌하는 것처럼 보였고, 나아가 당시 산업 자본주의의 근간을 이루던 자유지상주의적 원리를 얼마간 유보해야 하는 일이었다.
 스레터에 따르면, 이런 정치적 난제들 속에서 해결에 물꼬를 튼 것은 노동자 계급의 요구에 부응해 이루어진 선거법 개정이었다. 새롭게 유권자가 된 노동자들의 표심을 잡기 위한 정치적 경쟁이 시작됐다. 위생개혁이라는 어젠다는 지방자치 단위에서 먼저 정치적 쟁점으로 떠올랐으며, 점차 영국 전역으로 확산됐다.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지방자치 단위 위생개혁의 선두에 있었던 버밍엄 지역의 ‘도시사회주의’는 공공연히 “공산주의”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버밍엄의 도시사회주의 모델이 확산되며 경쟁적으로 전개된 상하수도의 시영화는 당시 영국의 수인성 질병이 감소하는 데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정리하자면, 영국의 수명 증가는 경제성장의 부산물로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어려운 조건 속에서 이룩한 정치적 쾌거였다. (p.177-179)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이스털린의 역설이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어 기본 욕구가 충족되면 소득이 증가해도 행복은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는 이론’이라는 오해가 널리 퍼져 있다. 영어로 생산된 정보에 직접 접속하지 않고, 한국 포털사이트를 통해 정보에 접근하는 방식으로는 이스털린의 역설을 원래 의미로 풀이한 한국어 텍스트를 찾기가 매우 어렵다. 한국인 인터뷰어가 이스털린과 인터뷰하면서 포털사이트에 잘못 적힌 내용대로 이스털린의 인터뷰 발언을 오역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스털린이 내놓은 분석 결과에 따르면, 소득 수준이 낮을 때만 GDP의 증가가 행복을 증가시킨다는 관계도 없었다. 즉, 경제적 개발 수준이 낮은 국가에서도 장기적으로는 GDP의 성장이 행복을 증가시키지 않았다. (p.252-253)

 

 사망률과 유병률, 발생률은 서로 관련이 있지만 각기 다른 개념을 계량화하고 있다. 사망률이 어떤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비율이라면, 유병률은 해당 질병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의 비율, 발생률은 해당 질병이 새로 발생한 사람들의 비율이다. 같은 질병에 대해서도 이 세 지표의 추세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예로, 전 세계의 HIV 혹은 에이즈의 유병률은 줄어들고 있지 않거나 오히려 증가하는 중이지만 사망률은 줄어들고 있다. 효과적인 치료법이 보급되며 HIV를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증가하면서도 사망률은 감소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어떤 사망의 원인 인자를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 반드시 그로 인해 사망하지는 않는다. 발생률은 사망률과 함께 줄어들고 있지만, 두 지표가 감소하기 시작한 시점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 전쟁으로 인한 사망률이 증가(혹은 감소)한다는 것이, 반드시 그 원인 인자인 전쟁이 증가(혹은 감소)하거나 혹은 새로운 전쟁이 발발하는 빈도가 증가(혹은 감소)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아닐까? 전쟁으로 인한 사망률을 대리변수로 삼아 폭력성의 추세를 파악하는 핑커의 방법은 특히 의약의 발전으로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게 된 전근대와 근대 사이의 추세를 비교하는 데 있어서는 유효하지 않을지 모른다. 전쟁의 폭력성이 감소하지 않아도 의약의 발달로 사망률은 감소할 수 있지 않은가. (p.294-295)

 

 신낙관주의는 팩트에 충실하면 종교와 이데올로기가 오염시킨 세계의 진실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로슬링의 대중 강연과 《팩트풀니스》가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침팬지보다 못했던 대중의 오답률을 단 몇 분 만에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은 팩트 그 자체보다 그것에 관한 관점을 그들에게 처방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낱개의 단편적 토막 정보, 팩트를 하나로 엮어 주는 관점 말이다. 건강, 부, 삶의 질, 행복, 불평등, 환경, 평화, 민주주의……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인류는 계속 진보해 왔다는 핑커의 팩트들도 그의 관점 아래에 하나의 일관된 서사로 배치되고 있다. 그 많은 팩트들 배후에 “일관된 현상”으로서 도사리고 있는 진보가 있다고 말하는 그에게 저 팩트들은 ‘진보의 승리’라는 스토리로 엮이고 있다. 그리고 그 진보의 정체란 대략 그가 좋아하는 거의 모든 것에 가깝다. 그것은 “계몽”이며, 즉 세속주의적 휴머니즘이고 열린 사회이며, 코스모폴리타니즘이고, 이성과 과학인가 하면, 고전적 자유주의, 자유시장, 자본주의다. 여러 진보들을 그 배후에 잠복하고 있는 일관된 현상의 연장으로 취급하는 그에게 이런 연상 작용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p.306-307)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저 데이터를 들여다보면 된다는 신낙관주의의 주장은 안일하다. 어떤 데이터도 스스로 혼자 말하지는 않는다. 빈곤, 평화,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신낙관주의가 주장하는 팩트에는 항상 신낙관주의자들의 해석의 층위가 있었다. 신낙관주의 혹은 핑커의 기대와는 달리, 어떤 사실도 사람들의 이해관심 바깥에서 개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해석의 층위에서 팩트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실관계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겠다는 신낙관주의의 팩트도 복잡하게 펼쳐진 사실관계 가운데 선별된 것일 수밖에 없고, 무엇보다 신낙관주의의 팩트가 강력한 힘을 갖는 것도 사실관계와 이해관심의 제약하에 (종종 정치적인) 의미를 갖기 때문임을 무시할 수 없다. 신낙관주의자들은 이런 의미관계를 물신화해, 마치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자신들의 팩트에는 주관적 이해와는 무관한 자기완결적 의미가 있는 것처럼 가장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사실관계와 이해관심이 부여하는 의미의 힘은 취하는 정치적 효과를 누리고 있다. 신낙관주의의 팩트물신주의가 정치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문제적인 까닭이 여기 있다.
 우리가 빈곤과 건강, 수명, 교육, 행복, 평화와 민주주의 등 사회 지표의 진보에 관심이 있다면, 신낙관주의 일각의 팩트물신주의가 질식시킨 사실관계의 함의를 복원하고, 신낙관주의의 정치적 귀결을 제대로 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작업은 곧 사실관계에 기초한 합리적 정치 커뮤니케이션을 모색하는 진보적 실천이기도 하다. (p.308-309)

 

 팩트체크의 진정한 목표가 그저 팩트 하나의 진위만을 감별하는 데에 있는 것이라면 몰라도, 팩트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에 필요한 가치 기준, 문제, 목적 등을 공유하는 일은 대단히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활동이다. 팩트체크를 통해 우리는 어떤 것을 문제로 인식할지를 결정하고, 그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지, 어떤 태도를 취할지를 결정한다. 신낙관주의자의 팩트들이 세계가 조직되어 있는 방식과 지배적인 개발 패러다임을 낙관하는 태도를 독자에게 심어 주는 역할을 수행했듯이 말이다. 스티븐 핑커가 국민소득은 “인간의 번영을 나타내는 모든 지표와 관련이 있다”며 “1인당 GDP가 수명, 건강, 영양과 관계가 있다”는 팩트를 말할 때, 기실 그는 자본주의적 경제성장 본위의 개발 패러다임에 대한 지지를 독자에게 호소하고 있는 셈이다. 신낙관주의의 팩트들을 가장 적극적으로 퍼트려 온 이들 상당수가 동시에 자유시장 자본주의에 강한 이념적 편향을 드러내는 이들인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p.357-3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