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하는 대한민국 / 김현성 / 사이드웨이
그러므로 한국 공동체를 설명할 때 흔히 사용되는 ‘사람을 갈아넣는다’라는 말은 ‘돈을 쓰지 않는다’라는 말의 뒷면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물리적 단위이고, 이 물리적 단위가 계속해서 ‘갈려 나가는’ 상황이 오래도록 유지된다면 그 공동체의 재생산성은 붕괴될 것이다. 돈이 쓰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만큼 사람이 더 쓰인다는 것은 돈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더 쓰이는 사람에게 자원이 적절하게 배분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그럼 그 사람은 자원을 배분받지 못하면서 자신의 시간마저 잃게 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시간을 잃는다는 건 소비, 출산, 육아, 교육 등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활동에서 배제를 당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이런 메커니즘이 사회 전체로 확대되어 만약 대부분의 경제 활동 참여자가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끝내 한 사회의 재생산성이 무너지는 결말로 이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현실에도 불구하고 한국 구성원들은 공동체 유지를 위해 자신의 자원을 지출하는 일에 상당히 부정적이며, 실제로 지출할 수 있는 자원이 상당히 부족한 상황이다.
유럽에서는 프랑스와 영국이, 아시아에서는 이웃나라 일본이 수도권 집중도가 그나마 높은 편이지만 이 나라들 모두 한국의 수도권에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 수도권은 프랑스의 파리 광역권을 일컫는 ‘일드 프랑스’와 비교했을 때 기본적으로 인구 밀도가 이미 2배에 달하며, 영국의 수도권인 ‘그레이터 런던’과 비교하면 나라의 전체 인구에서 해당 지역의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인 인구비가 2배를 훌쩍 뛰어넘는다. 도쿄 광역권과 비교해도 마찬가지다. 한국 수도권은 훨씬 더 좁은 면적에서 많은 사람들이 복작거리고 있다.
결론적으로, 수도권의 인프라를 개선하는 것은 이 공간의 과밀화를 해소하는 대책이 될 수 없다. 대한민국의 모든 인구가 서울에 거주해도 불편함이 없을 정도의 인프라가 설치되지 않고서는 해결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도권의 크기는 5천만명이 거주하기에는 지나치게 협소한 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국 수도권의 인프라를 개선하는 것은 이 지역에 거주하고자 하는 예비 수요의 크기만 지속적으로 키울 뿐 문제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논리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적어도 겉에서 봤을 땐 지방에도 이러저러한 산업들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조금 더 깊숙하게 들여다보면 전체 부가가치의 규모는 제조업과 서비스업을 막론하고 수도권이 다른 지역에 대비해서 가히 압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는 경제적 관점에서 서울과 수도권으로 집중되고자 하는 예비 수요를 끊임없이 창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또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1장에서도 언급했지만 가뜩이나 생활 비용이 높은 한국 공동체에서 어느 정도 윤택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질 좋은 일자리가 있는 곳으로 사람이 모일 수밖에 없고 바로 이것이 공간에 대한 수요를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수도권에 ‘좋은 일자리’가 몰려 있기 때문에 공간 이주의 수요 역시 수도권이 독점할 수밖에 없다.
국가 기능 분산을 통한 지역 균형이 다시 화두에 오른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 시기였다. 물론 전두환 정권과 그 뒤를 이은 노태우 정권에서도 이 문제를 아예 방치한 것은 아니었지만, 1985년 중앙행정기관 외청 배치 계획 발표를 통한 정부 대전청사 이전 정도의 미온적 대응에 그쳤던 게 사실이다. 실질적인 국가 기능 이전이 다시 국민적 화두로 떠오른 것은 2000년대 초반까지 기다려야 했지만, 이때 참여정부에서 추진했던 신행정수도 건설은 당시 헌법재판소의 관습헌법이라는 전대미문의 논리에 가로막혀 다시 한번 좌절을 맛보고야 말았다. 물론 그로 인해 ‘수도’의 이전이 불가능해졌을 뿐 국가 기능의 이전이라는 본래 목표는 계속 추진되어 세종특별자치시라는 결과물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기거하는 청와대 및 중앙부처 전체가 옮기기로 예정돼 있던 신행정수도와 대통령과 국회 등은 모두 서울에 머무른 채로 행정부처만 옮길 수 있게 된 행정중심복합도시는 애당초 차원이 다르다. 9명으로 구성된 헌법재판소가 5천만명이 살고 있는 거대한 공동체의 미래를 바꾼 것이다.
그러나 지방의 문제를 토호의 탓으로만 돌리는 관점은 문제의 절반만 인식한 것과 다르지 않다. 토호의 문제가 존재하기 전에 우리는 현재 대한민국의 지방이 소멸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직 토지를 활용한 개발 이외에는 없고, 그 누구도 다른 방법을 고민해 본 적이 없다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존재함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방 향토 기득권층의 문제점을 오롯이 지방자치제의 탓으로 돌리는 것 역시 잘못된 지적이다. 토호의 문제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보다 전근대 시절이 훨씬 더 심했다는 게 명백하다. 한국은 머나먼 과거인 삼국 시대부터 호족이라는 이름 하에 각 지역의 토착 기득권층이 존재했고, 중앙집권이 약했던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왕조를 개창하기 위해서는 각 지방 호족과의 연대가 필요할 정도로 그들의 입김이 강했다.
오히려 한국 사회가 근대화, 민주화되고 이 과정에서 서울로 경제력이 집중됨에 따라 지방에 존재하는 토호들이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범위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진짜 문제는 그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범위 자체는 꾸준히 줄어들지만, 지방 사회 자체가 지속적으로 축소되면서 점차 작은 사회가 되어감에 따라 자기 범위 내에서는 더욱 강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노동생산성 공식을 다시 떠올려 보자. 노동생산성은 산업생산을 노동투입량으로 나눈 것이고, 산업생산은 생산물의 시장가치로 측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의 낮은 서비스업 노동생산성은 결국 한국인들이 ‘서비스’에 매기는 시장가치가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설명하자면, 한국은 서비스 물가가 말도 안 되게 싸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서두에서 언급했던 글로벌 생활 물가 비교표에서 한국의 유독 낮은 음식점 물가와 연결되며, 우리 사회의 비싼 생활 물가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이 이를 실제로 그렇게까지 크게 체감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실제로 한국의 서비스업 노동생산성은 금융업과 전문과학·사업지원 업종 두 가지를 제외하면 세계 최하위 수준을 달리고 있다. 유통·운수·음식숙박업의 노동생산성은 고작 3만 6363달러로 비교대상 35개국 중 31위이며, 정보통신업은 20위, 기타서비스업은 32위에 그친다. 즉, 방금 열거한 업종들은 한국에서 노동투입량 대비 제값을 받지 못하는 사업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음식숙박업에 어느 정도 종속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배달업은 배달 플랫폼 기업들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일종의 공짜 서비스 취급을 받기도 했다. 택배노동자의 노동권 문제가 하루가 멀다 하고 문제가 되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운수업의 시장가치가 한국에서 매우 낮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산업이기 때문에 임금이 낮고, 이는 다시 낮은 생산성이라는 악순환을 낳는다.
이는 다시 지역균형의 문제가 관광개발로 해결될 수 없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현재의 구도 속에서 아무리 지자체들이 지역 고용 유지를 위해 관광 산업을 유치한다고 한들, 늘어나는 것은 세계 최하위 수준의 생산성을 가진 일자리뿐이다. 이런 산업만 발전해서는 여전히 고부가가치 산업에만 집중된 수도권과의 격차를 해소할 수 없다는 게 명백하다.
지적재산권의 수출은 금융이나 보험보다도 더 큰 부가가치를 지닐 수 있는데, 이는 수출할 때 계약 형태 자체가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수익을 창출하는 계약이기 때문이다. 지적재산권의 수출은 주로 특정한 지적재산(IP, Intellectual Property)을 활용하여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데, 그것을 수입하는 쪽에서 해당 권리를 가지고 스스로 비용을 들여서 사업을 전개한 뒤 그 수익의 일부를 지적재산권 수출자에게 배분하게 된다. 즉, 지적재산권을 보유한 자는 그것이 인기만 있다면 비용 한 푼 들이지 않고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자영업률을 영세성의 척도로 놓고 봤을 때, 한국은 주요 서비스업 분야에서 비교가능한 대상국들에 비해 2~5배가량 더 영세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업종 자체의 영세성이 높다는 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 업종에선 수많은 소규모 사업장들이 경쟁을 벌이는 형태가 된다는 걸 뜻한다. 그러나 이들은 ‘영세’라는 호칭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개별 사업체의 크기가 작아서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기가 어렵다. 이들은 크기의 확장을 통해 비용을 절감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장 스스로의 또는 몇 안 되는 노동자의 인건비를 절감하는 것이 이윤을 남기는 가장 쉬운 방법이 된다. 달리 말하면 높은 자영업자 비율이 서비스업의 전반적인 물가를 스스로 억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의 자영업자 비율은 과거에 비하면 차츰 낮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글로벌 기준으로 볼 때 매우 높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더불어 한국의 자영업이 가진 또 하나의 중대한 문제가 있다. 우리 사회의 자영업자들은 근본적으로 일종의 성공을 목표로 개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의 또는 타의로 직장에서 떠난 뒤 생계 유지의 수단으로 개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뒤의 4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한국의 노동자들은 연금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퇴직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는 자영업의 신속한 노동공급으로 곧장 이어진다.
대기업 일부 업종에 생산성이 과도하게 집중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 사회에서 흔히 제시되는 방안은 또 있다. 바로 노동유연성 확보이다. 이런 논리를 펼치는 사람들은 한국은 대기업 정규직에 대한 보호가 너무 지나쳐서 이들이 경제적 해자, 즉 진입장벽을 가지고 있고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비정규직과 중소기업의 생산성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러한 주장은 자연스럽게 대기업 정규직의 해고를 자유롭게 하면 한국의 많은 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관점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틀렸다. 틀렸을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해고를 통한 노동유연성의 확보는 많은 문제 해결책 중 가장 ‘나쁜’ 해결책이다. 그 이유로 우리는 한국 특유의 형편없는 사회 안전망을 들 수도 있겠지만, 그전에 한국은 이미 노동이 상당히 유연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한국 노동시장이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다는 잘못된 판단은 다양한 원인에서 기인하지만, 대개 우리와 심리적 거리가 가까운 미국의 노동시장과 주로 비교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고용주가 말 한 마디만 떨어트리면 바로 시큐리티가 등장하여 대충 짐을 싸게 한 후 건물 밖으로 내쫓는 것이 유연화된 노동시장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금과옥조처럼 섬기게 된 것이다.
해당 연구의 결과 한국은 OECD 고용보호법 규제지수상 상용직 개별해고 규제지수는 OECD 평균인 2.0과 유사한 2.3을 기록하였고, 집단해고 규제지수는 OECD 평균 2.9보다 낮은 1.9를 기록하였다. 임시직의 고용 규제지수 중에서 파견 근로자 고용 규제지수는 4.3으로 OECD 평균인 2.5 대비 상당히 높았으나, 기간제 근로자의 경우 평균 1.7 대비 0.8로 상당히 낮은 수준을 보였다. 또한 해당 연구는 이와 아울러 법제적 지표로만 판단할 경우 임시직 고용은 다소 경직적일 수 있으나, 우리나라의 임시직 노동자가 전체 임금노동자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OECD 평균 대비 매우 높은 점(한국 21.9% vs. OECD 평균 13.8%), 반대로 임시직의 상용직 전환율은 OECD 주요국 평균치를 크게 하회한다는 점(한국 11.1% vs. OECD 평균 35.7%)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요컨대, 실질적으로 한국의 노동시장은 정규직 근로자의 개별 해고가 다소 어렵다는 점을 제외하면 특히 외부수량유연성의 측면에선 이미 꽤나 유연한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당시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정책의사결정권자들이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은 노년층의 수도권, 특히 서울 거주 수요가 굳건함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부동산 보유세 실효세율은 2018년 OECD 기준 0.16%로 OECD 평균인 0.54% 대비 3배 이상 낮은 수준이다. 그러나 부동산 보유세율을 높여 생산 동력이 떨어진 노년층의 이주를 유도하려 했으면 필연적으로 병행하여 추진했었어야 했던 것이 바로 지역균형전략이었다. 그렇지만 이는 정권을 가리지 않고 어떤 정부에서도 성공적으로 수행하거나 적어도 장기적인 전략이나마 구축해 둔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나이가 들어 거동은 불편하고 몸은 점점 아픈데 지하철도 병원도 없는 곳으로 이주할 노인은 어느 사회에도 없을 것이다.
그 결과 실제로 서울은 점점 늙어가는 도시가 되어가고 있다. 2014년과 2023년 서울의 동별 평균 연령을 살펴보면,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2014년 대비 9년이 더 늙었다. 원래 평균 연령 52세가 넘는 동은 이미 도심 공동화가 끝난 중구의 한복판 정도였으나, 이제는 강남과 강북을 가릴 것 없이 서울 전역의 수많은 곳들이 그러하다. 높은 주택 가격을 감당하지 못한 청년층은 서울에 들어오지 못하고, 서울에 살던 사람은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 그 안에서 그대로 늙어가는 게 최선이다. 세계적인 메갈로폴리스이지만 그 속은 마치 감옥과도 같이 변해가는 공간. 그게 바로 한국 공동체의 모든 것이 집중된 수도 서울의 모습인 것이다.
실제로 한국에서 조금이라도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임금의 수준을 조정하려 하면, 반드시 나오는 반론이 “최저임금 미만으로 일하고 싶은 사람도 많은데 최저임금을 올리면 이들은 계속 실업 상태에 처하게 된다”이다. 그러나 이는 최저임금 미만의 노동공급이 발생한 원인을 완전히 잘못 해석하는 반론이다. 한국 공동체의 노년층은 사회 안전망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보호가 미미하며, 자산 축적에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임금이 아니라 사회 안전망의 확대로 구제를 해야 한다. 최소한의 생존만을 위해 노동시장에 존재하는 그룹은 장기적으로 그 시장 전체를 망가뜨린다는 인식이 필수적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질문해 보자. 청년 문제는 과연 청년 문제 단독으로 존재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청년 문제는 엄밀히 따졌을 때 노인 문제에서 파생된 하나의 결과에 불과하다. 노인들이 경제력이 집중된 곳에서 비켜설 생각을 하지 않으니 청년들은 노인들이 쌓은 거대한 성에 가로막혀 소득 증대와 자산 축적이 불가능해진다. 그럼에도 지푸라기라도 잡기 위해 전국의 모든 청년들은 수도권으로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청년이 떠나 텅 빈 지방은 이제 세상을 떠날 날만 기다리는, 오래전부터 그곳을 고향이라 생각했던 소수의 노인들에 의해 지켜지다가 그들마저 세상을 떠나면 기본적인 것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산부인과, 그다음에는 소아과, 그다음에는 어린이집과 유치원, 그다음에는 각급 학교, 그리고 대중교통시설, 마지막으로 대학이 문을 닫고 인력 조달이 어려워진 기업들마저 떠나면, 이제 남는 것은 버려진 황무지 외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국민연금은 원래 국민의 노후를 100% 커버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아니다. 실제로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은 나라별로 차이가 있지만, 실제로 보통 25%에서 30% 사이의 소득대체율이 일반적이다. 이는 OECD에서 권고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채우는가? 바로 퇴직연금과 개인연금이다. 상당수의 선진국에서는 퇴직연금으로 약 20~30%, 개인연금으로 10~15%의 소득대체율을 충당하고, 국민연금으로 25~30%를 충당하면 최종적으로는 약 65에서 75%의 연금으로 노후를 보내게 된다. 그러나 국제보험협회연맹(GFIA)이 지난 2023년 7월 발간한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의 연금 총 소득대체율은 고작 47%에 불과한데, 국민연금의 경우 26%로 글로벌 기준을 어느 정도 충족하였으나 퇴직연금과 개인연금의 소득대체율은 각각 12%와 9%에 불과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한국 정부는 우리의 통념보다 훨씬 더, 놀랄 만큼 인색하다. 실제로 한국 정부는 우리나라보다 더 자유방임적인 경제를 운용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나라들보다도 돈을 안 쓴다. 이는 한국의 일반정부지출(General Government Spending)이 2020년 기준(이후 데이터가 업데이트되지 않았음) 38.1%로 OECD 최하위권이라는 사실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 순위에서 한국 뒤에는 리투아니아, 코스타리카, 스위스, 칠레, 콜롬비아, 아일랜드가 있는데, 조세피난처의 성격을 지녀 명목 GDP가 과장되는 경우가 잦은 아일랜드와 스위스를 제외하면, 한국은 사실상 선진국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재정을 운용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여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단지 한국의 재정 규모가 작다는 사실만으로는 문제의 핵심까지 도달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가뜩이나 많지 않은 규모의 정부 지출이 과연 어디에 쓰이고 있느냐이기 때문이다. 2020년 OECD 일반정부지출 데이터를 세부적으로 나눠보면 한국의 재정 규모가 전반적으로 매우 작은 것도 확인할 수 있지만, 분야별로 볼 때는 복지 부분이 평균 대비 특히 작은 규모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보편적 복지가 자리 잡지 못한 상황에서, 선별적 복지가 곧 복지 그 자체라고 일반화되고 있다는 건 또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복지라는 제도를 빈곤계층의 최후 생존 수단 또는 농업적 근면성의 증대 수단 정도로 머무르게 함으로써 복지의 근본 이념 자체를 훼손하는 사회적 부작용이 바로 그것이다. 복지는 빈곤과 생존이란 키워드로만 연결되는 피상적인 것이 아니며, 사회 구성원 모두의 행복과 통합을 제고하는 수단도 될 수 있다. 누구든 자신의 경쟁력을 꽃피울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주는 것도 복지의 역할이다.
지금까지 설명했던 민간으로의 사회복지 외주가 초래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점이 있다. 사회 구성원들의 가처분소득을 추가적으로 감소시키는 현상을 발생시킴으로써 증세의 거부감을 더욱 심화할 가능성을 키운다는 게 그것이다. 국가 재정을 투입해 정부가 제공하거나, 또는 민간에서 생산하더라도 정부가 주도적으로 수급을 감독하는 재화의 경우엔 가격을 낮게 억제하기 위해 보조금이 투입될 수 있는 등의 장치가 준비되어 있다. 반면 민간의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서 제공되는 복지 서비스나 재화의 경우 이들 민간 업체는 항상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가격을 탐색하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민간 위주의 복지 공급은 중산층의 낮은 실질 가처분소득과 연결되어 사회 구성원들의 복지 태도를 악화시키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이렇듯 자기 자신에 대한 방어엔 적극적이나 공동체에 대한 투자에는 인색한 한국의 사회 환경은 현재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게 만든다. 돈을 써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시쳇말로 사람을 ‘갈아넣는’ 구조가 지속될 수밖에 없게끔 강제하기 때문이다. 이 장 서두에 언급하였던 쓰레기통의 문제로 되돌아가 보자. 거리를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쓰레기통을 현재의 5배 수준으로 증가시키되, 비용을 더 부담하고 싶지는 않으므로 이를 관리하는 인력은 그대로 둔다고 가정해 보면 어떨까. 이 경우 당장 산술적으로만도 그 사람의 일은 5배가 늘어난다. 하지만 대개 이러한 상황은 사고가 터질 때까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만약 그러던 중 현장에서 사고가 발생하거나 누군가가 과로사를 하게 되면, 언론에서 일제히 이슈가 되고 여론의 눈치를 살피던 정부는 그제서야 감독기관과 사정기관을 동원하여 감사 및 수사에 나선다. 몇 사람이 적당히 징계를 받거나 심하면 처벌을 받게 되고, 이렇게 일이 마무리될 때쯤 모두는 그 일을 잊게 된다. 끝끝내 돈을 더 써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는 일어나지 않는다.
한국의 높은 산재 사망률은 무엇 때문이라고 봐야 할까? 근본적으로 안전관리에 자원이 투입되지 않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노동자의 부주의를 탓하기도 하지만, 노동자의 부주의는 안전교육이라는 방법으로 해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산재 사망의 문제는 곧 돈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3장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우리나라의 대다수 취업자가 일하고 있는 중소기업의 생산성은 아주 낮은 수준이다. 그 말은 우리나라 대다수 기업체들의 생산성이 매우 낮다는 뜻이고, 안전관리에 돈을 투입하는 것보다는 사람이 죽어 나가더라도 거기엔 돈을 쓰지 않는 것이 더 이익인 경제 구조가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정부가 생산성이 낮은 기업 대상으로 안전관리 바우처를 지급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중대재해처벌법과 관련된 후속 조치로 그러한 지원책은 전혀 도입되지 않았는데, 이마저도 인색한 정부만 탓하기는 쉽지가 않다. 전국의 모든 중소 제조업을 상대로 그런 지원을 해 주려면 상당히 많은 재원이 필요할 게 분명하지만, 반복적으로 지적했듯 우리 사회는 공동체를 위해 그 누구도 추가적인 재원을 지출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는 아주 불쾌한 생각이긴 하지만, 그나마 지갑을 열 정도의 수준이 되는 이 사회의 몇몇 사람들은 지방 중소기업에서 산재에 노출된 사람들의 목숨이 “그들이 소싯적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 치르는 일종의 대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의료수가 문제를 조금 더 자세하게 들여다볼 경우 한 가지 특이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전방위적으로 낮은 의료수가의 구조 속에서 인간의 생명과 더욱 가까울수록, 그리고 수술의 케이스가 많을수록 의사들이 특정 의료행위를 경제적으로 기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표면화되면 외과, 흉부외과, 비뇨기과, 산부인과의 고질적인 인력 부족 문제로 연결된다. 특히, 우리나라는 2000년 의약분업 관련 분쟁 당시 의대 정원을 감축하여 2006년 의대 정원이 3058명까지 줄어든 이후 18년째 정원은 그대로이나, 수도권의 병상 수는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지속적으로 증가한 까닭에 쏠림으로 인한 상대적 인력 부족 문제도 심해지고 있다.
의사 수가 그대로인 상황에서 병상 수만 늘어나면 의사들은 당연히 과로에 시달리게 된다. (앞의 쓰레기통 문제와 정확히 일치함을 상기하자.) 그럼에도 한국의 의료계는 의대 정원 확대에 부정적인 경우가 많다. 이는 으레 의사 집단의 이기주의로 이해되기 일쑤지만, 그렇게만 매도할 것은 아니다. 의사의 육성에도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현재와 같이 필수의료의 원가 보전이 되지 않아 아무도 기피과를 가지 않으려 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의대 정원을 확충해 봤자 수익성이 높은 과로 쏠리는 현상은 동일할 것이고, 의료접근성이 떨어지는 지방의 의료 문제나 소아과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 자명하다. 이는 지역불균형 해소를 위해 관광업을 개발하는 것이 돈을 들인 만큼 수도권-비수도권 간 격차를 해소하지 못한다는 사실과 정확히 일치한다.
실제로 같은 기준을 적용하면 과거에도 동일 업종 동일 직급 간에는 임금 격차가 없거나 적었을 것이다. 아예 여성은 다른 직급으로 채용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과거 은행권의 경우 남성은 ‘행원’으로, 여성은 ‘여행원’으로 채용하는 것이 아예 제도로 정착돼 있었는데, 당연히 행원은 군 복무 기간을 근무연수에 산입하는 한편 바로 주임, 대리로의 승진이 가능했고, 여행원은 당연히 낮은 임금으로 시작하여 행원이 되려면 시험을 치러야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일부 여행원들은 결혼을 하면 퇴직을 하겠다는 각서를 쓰기도 했다. 이는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엄밀한 사실이다. 제일은행을 기준으로, 1992년 여행원 제도가 최초로 폐지될 때까지의 일이다.
여성 경제활동의 강도를 남성의 그것과 올바르게 비교하기 위해서는, 동일업종 동일직급이라는 의미 없는 척도를 사용해서는 곤란하다. 그 직급의 성비가 남성 90에 여성 10이라면 개개인의 임금 수준이 같더라도 성별 집단의 경제력 격차는 심각하다는 뜻과 같으며, 그것이 사회 전반의 흐름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 대신 취업 시점에 각 성별 취업자 수의 분포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먼저다. 3장에서 다루었던 노동생산성 문제로 되돌아가서, 누가 더 생산성이 높은 직종이나 기업에 종사하고 있는지를 검증한 후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탐색하는 것이 성별 경제력 격차를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개념적으로만 두리뭉실하게 이해하는 경력단절의 경제적 실체이다. 남성의 취업률은 35~39세 연령대에서 91.2%를 기록한 후 54세까지 86.6% 정도로 유지되지만, 여성 취업률은 30대 후반 58.5%로 최저치를 기록한 후 54세에 도달하더라도 66.1%까지만 회복되어 20대 후반의 취업률 70.4%를 회복하지 못한다. 이러한 추세는 출산이나 육아를 위해 일터를 떠난 여성의 상당수가 경제 활동의 무대로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 의미한다. 게다가 오랜 기간 경력이 단절된 사람이 노동시장에 복귀하더라도 이전과 같은 생산성을 부여받지는 못하기 때문에 남성과의 생애주기상 소득의 격차는 더 크게 발생하게 된다.
이렇듯 대한민국의 남성들은 30대까지 거의 90%의 취업률을 달성하지만, 여성들은 20대 후반 70%의 취업률이 가장 높은 것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경제력 상실의 위험성을 언제나 인지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여성들이 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결혼을 미루거나, 결혼을 하더라도 경력단절을 회피하기 위해 출산을 하지 않거나, 극단적인 경우 아예 결혼까지도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질문해 보자. 동일업종 동일직급에서 임금 격차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과연 성별 격차가 없다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같은 인간이 성별만 다른데, 그에 따라 한쪽의 취업률이 유의미하게 낮은 경향이 관찰된다면 이는 명백한 차별적 사회 현상이다. 문제는 이것이 명백한 차별적 성향을 띠는 형상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차별을 지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근거는 다양하다. 여성들이 선택하는 전공이 대개 취업 시장에서 인기가 없다든지, 여성들이 쉽고 편한 일자리만 찾는다든지, 심지어는 부가가치가 높은 일자리로 연결될 확률이 높은 분야 자체를 여성들이 유전적으로 선호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일견 그럴 듯하지만 원인으로 결과를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적절한 견해가 아니며, 여성들이 내리는 ‘선택’의 기반이 사회적 학습이 아닌 개인의 선호에만 존재한다고 보는 점에서 심각한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어쨌든 국가 전체를 운영하는 기틀 자체가 시험이라는 제도 위에 토대를 세우고 있다 보니, 한국 공동체는 그 경제적 구조와 토대에 관해서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대신 그 제도의 규칙을 어떻게 더 만족스럽게 고칠 것인가에 사회적 역량을 낭비하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특히 시험으로 획득할 수 있는 권리가 축소될수록 규칙에 대한 집착은 더욱 강해지고, 반칙으로 여겨지는 행위에 대한 반발심도 거세지게 된다. 이러한 폐쇄적인 순환이 계속된 결과 한국은 대학도 시험으로 입학하며, 대기업도 인적성 ‘시험’을 통해 입사하게 되고, 공공기관도 시험을 통해 입사하며, 시험을 통해서 거머쥘 수 있는 각종 자격증이 성행하는 사회가 되었다. 세계적으로도 의사와 변호사 이외의 직종에 대해 한국처럼 정부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자격증을 관리하는 국가는 드물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왜 시험이 공정하다는 허상에 집착하는가?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이는 우리가 시험의 결과가 ‘수치’로 공개되는 투명성을 공정성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시험, 그 중에서도 특히 수능은 점수뿐만 아니라 자신의 위치가 대충 같은 수험생들 사이에서 어디쯤인지는 비교적 상세하게 공개한다. 또한 우리는 그 계산의 결과가 신뢰도가 높다고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와 누군가의 위치를 투명하게 공개한다고 해서 그 제도 자체가 공정하게 될 수는 없다. 시험이야말로 가장 공정한 제도라고 우기는 사람들은 기계적 투명함을 사회적 공정함으로 바꿔치기하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돈이 많은 사람이 시험을 잘 본다고 했을 때 시험 제도가 불공정하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 제도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진짜 문제는 사실은 불공정한 제도를 우리 모두가 공정하다고 믿고 따를 때에 발생한다. 모두가 인정하는 공정한 제도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에, 그 제도를 통과한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많은 것들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제도가 부분적으로나마 불공정하다는 사회적인 합의가 있다면 어떨까? 누군가가 그 제도에서 아무리 우수한 결과를 이루어 봤자 얻을 수 있는 것은 지금처럼 넘칠 만큼 많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 제도 자체에 지금과 같은 절대적인 가치를 매기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제도가 오직 공정하다는 합의만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을 경우 거기에는 아주 높은 가치가 부여된다. 특히 그 제도에서 이득을 얻는 사람의 수가 적을수록 거기에 매달리는 사람들은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현재 한국에서 우수한 입시 성적을 거둔다는 것은, 균형 잡힌 사회에서 성실하게 학업을 수행했을 시에 미래에 통상적으로 수취할 수 있는 사회적·경제적인 대가만 거머쥘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뛰어난 입시 성적을 쟁취한 이들은 한국 사회의 불균형으로 인해 발생한 쏠림 현상으로 한쪽에만 생성된 추가적인 사회경제적인 대가를 보너스로 받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너무 순순히 노력의 대가로 치부하고 만다. 그 이유 역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시험은 우리 모두가 공정하다고 합의한 제도이기 때문에, 그 제도를 통과한 자가 얻어낼 수 있는 대가의 크기와 관련없이 우리는 그런 보너스를 주는 것까지도 인정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시험이라는 토대 위에 운영되는 사회에서 승리한 자가 마지막으로 거머쥘 수 있는 것은 바로 발언권의 티켓이다. 세계 어느 나라든 그러한 경향이 있지만, 한국은 유독 어느 분야에서든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한 자가 아니면 발언권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과거에 대학 간판이 모든 것을 설명하던 시기에서는 다소 벗어나 이제 전문적인 분야는 그 분야의 전문가를 존중하려 하는 단계까지는 와 있으나, 입시의 결과로부터 시작되는 경제력 배분과 그 경제력 배분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발언권의 차이는 아직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발언권의 격차는 사회적 소수자들이 세상에서 아예 지워진다는 다른 문제도 만들어 낸다. 장애인, 이주노동자, 미혼모 등의 사회적 소수자들은 대개 경제력이 약하고 시험이라는 관문을 높은 수준으로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배경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대개 이들은 발언권이 매우 약한 상황이며, 한국 공동체의 대부분은 이러한 존재가 잘 있는지도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이 같은 현상은 진짜 사회적 소수자들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그 무엇으로 만들어버리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끼리 자신의 약점 또는 불행을 내세우며 이전투구를 하게 하는 환경을 조성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 자신의 약자성에만 과도하게 집중하거나, 또는 타인의 약자성을 아예 해결해야 할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 사회는 결과적으로 봤을 때 ‘공동체에 인색한 사회’로 회귀하는 특성이 있다. 특히 이것은 한국에서 시험에 통과한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주류의 기준을 ‘분류’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결국 한국 사회는 약자가 아무도 없거나, 모두가 약자여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공동체가 된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가 차츰 다원화되면서 더 많은 사회적 약자 또는 소수자들이 등장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문제는 이들이 소수자의 위치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는 계속 늘어나지만, 한국이라는 공동체가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파이의 크기는 차츰 그 한계점에 도달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모두가 이 사회의 주류와 유사한 크기의 권리를 누리려면 누군가는 비용을 지출해야 하는데, 사실상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비용을 지출할 실질적인 여유가 없는 경우가 많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또 상당수는 그들의 소수자성 혹은 비주류성을 그들 스스로의 선택이나 책임으로 여기기도 한다. 가령 화물차 운전기사가 운수 노동 행위에 대한 원가 보전을 운임으로 제대로 받지 못해도, 그것은 그들이 노력을 열심히 하지 않은 대가라고 치부하며 ‘노력을 열심히 한 우리’가 그들을 위해 사회적 비용을 지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구성원들이 사회를 위한 비용 지출을 꺼리는 일은 주류든 비주류든 그 대상의 성격을 가리지 않고 진행된다. 5장에서 살펴보았듯, 심지어 한국은 어느 정도 기득권을 점유하고 있는 의사라는 직업마저도 여기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필수의료 분야가 아무리 그 원가 보전이 어렵다고 한들, 의사들은 고소득자이기 때문에 굳이 우리가 비용을 추가로 지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생산성이 낮은 사람들은 단순히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비용을 지출할 수 없고, 생산성이 높은 사람들은 나보다 형편이 좋기 때문에 비용을 지출할 수 없다. 그래서 한국 공동체에선 그 어떤 그룹도 자신이 가진 약자성에서 탈출할 수가 없다. 기묘하게 짜인 균형 아래에서 모든 것이 시나브로 사라지기만을 기다리게 될 뿐이다.
이처럼 내 아이가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 상대방을 사법적 조치로 손봐주려는 추세가 강화될 때, 이는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 후세대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교원을 아동학대로 고발한 건의 절반 이상은 기소요건조차 갖추지 못했지만, 수사와 재판이라는 것은 사람의 일상생활을 크게 훼손하기 때문에 이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은 당연히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되고, 본래의 직업적 기능이었던 훈육을 포기하게 될 확률이 높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직업적인 성실함을 유지했던 몇몇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몰린 끝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주변에서 이런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면 이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고, 학교와 사회 전체를 위축시킨다.
이것이 몇 년 지속되면 그 공동체는 붕괴한다. 모두가 가성비만 따졌을 때 공동체가 어떻게 파멸하는지 학교 현장이 가장 앞서서 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각 종합대학 사범대는 원래 전공 만족도가 가장 높은 과 중 하나였지만, 2010년대 중후반부터 그 만족도가 큰 폭으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 영향력이 입시에까지 닿아서, 이제는 10대 시절 성실하게 공부한 학생들이 사범대 진학을 기피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원래 한국은 사회적으로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교육 현장에 배치되는 것으로 이름난 나라였지만 이제 그것도 사실상 끝났다.
앞서 일본의 예를 들었지만, 한국의 경우 GDP 대비 사회보장비 지출 비중 자체도 OECD 최하위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보다도 미래의 상황이 좋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이 바뀌려면 필요한 많은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증세에 대한 합의일 것인데, 내가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지만, 한국에서 증세에 대한 합의를 얻어내는 것은 태평향 한복판의 섬나라가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것보다도 어려울 것이다. 한국은 프랑스와 함께 조세저항이 매우 강력한 국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과거 프랑스를 뒤흔들었던 노란조끼 시위와 비교하면 한국의 조세저항은 매우 조용해 보이지만, 실제로 《한겨레》의 조사 결과 코로나 대유행 한복판에서도 증세 반대 여론이 59.8%에 이르렀다는 점, 민주화 이후 한국에서 증세를 시도했던 정권은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모두 교체당했다는 점은 한국의 조세저항 강도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이민자들이 한국 공동체의 소멸을 막으려면, 지금 한국인들이 겪는 문제가 선행하여 해결되어서 이민자들은 그 문제를 겪지 않아야만 한다. 그래야만 이들이 기존에 한국 공동체를 구성하던 사람들과 지나치게 불필요한 갈등을 겪지 않고 한국 사회를 지탱해 나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제에서도 우리 공동체 구성원들은 이중적인 태도를 드러내곤 한다. 우선 한국이라는 사회의 소멸은 막아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민자들이 우리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그 무엇에만 관심이 있고 그들을 위한 지출에는 벌써부터 다소 인색한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즉, 체리피킹(Cherry picking)을 한다는 것이다.
공동체를 위해 필요한 것들이 있음을 인식하면서도 그 비용을 체리피킹하고자 하는 한국 사회의 문제점은 이민에 관한 인식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민을 받으면 단순히 인구가 늘어나 공동체 소멸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나른한 생각은 이 지점에서 이미 오류를 범하고 있다. 우리는 인구 감소로 인한 미래의 공동체 소멸을 막기 위해 이민이 필요할 수 있음을 강하게 인식하면서도, 그 이민자의 성격에 대해선 한국인들이 자체적으로 규정한 정상성을 벗어나지 않는 범주에서의 이민만을 받아들이고자 한다.
요컨대 한국인들은 이민으로 인한 사회 통합성의 훼손을 극도로 경계하며, 이 때문에 자신들과 같거나 상위의 질서 내에서 행동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서구권 고학력자들의 이민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 사회에 이미 편입되어 있는 외국인들은 한국의 불평등 구조를 고스란히 적용받고 있지만, 우리는 그들이 처한 문제를 제대로 들여다보기는커녕 한국에 올 일이 없는 ‘고급 인력’만을 목놓아 기다리는 상황이다. 이를 근본적으로 반성하지 않는 한 이민은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담보하는 해결책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살고 있는 공동체의 소멸은 과연 어떠한 형태로 다가올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인구의 감소를 통한 자연적인 축소와 소멸을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인구가 감소했을 때 어떠한 일이 구체적으로 발생할지에 대해서는 다소 형해화된 말들만 부유하고 있다. 국민연금의 고갈, 부동산 가격의 폭락, 국방력의 약화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하지만 인구의 감소는 이러한 거시적인 수축과 더불어 미시적인 부분에서 촘촘히 영향력을 발휘하며 우리 삶을 더 가난하게 만들 것이다. 인구의 감소 현상 자체가 사회 전체의 병폐가 종합된 결과이기 때문에, 그 현상이 불러일으키는 외부 효과 역시 각각의 병폐들에 대응해서 전방위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급격한 인구 감소 예측에도 불구하고 재정 투입을 증가하는 대신 연금 가입자들이 소득에서 납부하는 보험료의 비율인 ‘요율’ 인상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현재 한국의 의사결정권자들은 정부 수립 이후부터 언제나 복지를 민간에 아웃소싱한 한국 재정정책의 관성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낮은 생산성이 유지되는 사회에서 준조세만 계속 늘어나면 공동체의 다른 유지보수 비용을 지출할 여유는 지속적으로 사라지기만 할 것이다. 원화라는 통화의 힘이 그리 강하진 않기에 국가 부채를 무한정 늘릴 수는 없겠지만, 증세가 정말로 어렵고 증세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준조세 형태로 민간에 전가를 하는 것보다는 국가 채무를 조금씩 늘리더라도 정부가 돈을 더 투입해서 민간이 쓸 돈에 여유를 만들어주는 것이 미래를 위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은 현재까지의 관성을 앞으로도 유지할 확률이 높다. 증세를 시도하면 정권이 바뀌기 때문이다. 모두가 손해를 보기 싫어 어정쩡하게 세월이 흐르는 사이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조금씩 가난해지는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한국식 공동체 소멸에는 또 다른 암울한 면이 있다. 사회의 가장 약한 끝 부분부터 차츰 소멸해 나감에 따라, 원래부터 모든 것이 쏠려 있었던 서울과 수도권의 가치가 더더욱 높아지는 방향으로 전개된다는 전망이 바로 그것이다. 지방에서도 가까스로 명맥을 이어나가는 곳이 존재하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곳은 현재도 입시 실적이 좋은 지방 주요 학군지일 가능성이 높다. 공동체의 소멸은 지방부터 시작될 것이 자명한데, 지방이 소멸하면 할수록 소멸의 끝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더더욱 서울과 수도권으로 몰려들게 될 것이다. 그 와중에 지방에 있더라도 서울행 티켓을 끊을 수 있는 지방 주요 학군지는 그나마 어느 정도의 가치를 보전하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구가 줄어들수록 우리는 여러 차원에서 사회적 쏠림을 막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다. 이미 지금도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의 인구는 우리 공동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데, 인구가 감소하는 구간으로 접어들면 수도권의 유권자 비율이 나머지 지방 전체의 유권자 비율보다 많아질 것은 당연하다. 이는 한국의 선거 제도와 결합되어 수도권 지역구의 지속적인 증가와 지방 지역구의 감소 및 통폐합으로 이어질 것이고, 미래에는 의회가 수도권의 이해관계만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대의기관이 될 위험도 있다.
또한 한국 사회는 서구 국가들이 현재 겪고 있는 이민으로 인한 문제를 다양한 매체를 통해 너무나도 많이 접해왔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이민을 둘러싼 심리적 장벽은 서구권 국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으며, 이민에 대한 담론 역시 정치적 성향을 가리지 않고 합리성을 상실한 채 전개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보수 진영은 벌써부터 이민자들이 한국의 선진적인 시스템에 탑승하여 건강보험 등의 사회보험에서 무임승차자 역할을 한다는 식으로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건강보험 재정수지를 봐도 한국 공동체 거주 외국인들은 오히려 손해를 보고 있다는 게 명백한 사실이다. 2018년부터 2022년까지의 외국인 건보 재정수지는 2조 2742억원 흑자를 기록했다. 중국인 그룹만 분리할 경우 2022년 기준 229억원 적자를 보였지만, 이는 2018년 1509억원 적자에 비하면 계속 개선되는 추세이다.
물론 이 모든 점들을 고려하더라도 정부 주도의 재정 확장에 반대할 수 있다. ‘시장 주도의 경제 성장’이라는 또 다른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성장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새로운 먹거리를 보장하고 큰 부가가치를 올릴 수 있는 밸류체인 내에 자리를 잘 잡으면 많은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사회 체계와 구조를 전면적으로 바꾸지 않는 이상 새로운 성장이 가능하다고 한들 그 과실의 대부분은 수도권이라는 공간과 고생산성 직종이라는 일부 계층에게만 돌아갈 것이라는 불편한 진실뿐이다. 경제에 낙수 효과라는 것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 낙수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미 죽은 것으로 검증된 이론을 계속 어루만지고 있는 셈이다.
또한 ‘경제의 성장’과는 거리가 있는 영역에 돈을 사용한다고 해서 이것을 일종의 소득 분배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엄밀히 따지자면 지금까지 개인의 선택을 통해 개인이 소비·지출하게끔 맡겼던 영역을 조금씩 정부의 몫으로 돌려놓는 것에 가깝다. 연금의 재정 지원이 그 시작이 될 수 있으며, 보육 및 노인과 관련된 인프라 제공의 문제, 유아차나 전동휠체어를 끌고도 자유롭게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게 만드는 문제 같은 간단한 것들의 해결이 이 거대한 순환을 조금씩 풀어낼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버스와 지하철에서 유아차를 본 적이 거의 없을 것이다. 보지 못했기 때문에 아예 문제라는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우선적으로 해결하여 일상생활의 고비용을 차츰 축소해 가야 한다. 일상생활의 고비용이 해결이 되어야 공동체 구성원들의 곳간이 다시 채워지고, 그것이 일정 기간 지속이 되어야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소멸을 막기 위해 더 지갑을 열어보자는 이야기를 꺼낼 수가 있다. 젊어서 매일 밤새도록 일해도 은퇴하고 나면 답이 없고, 수도권에 살지 않으면 아플 때 찾아갈 병원조차 없으며, 유아차를 끌고 커피 한 잔 마시러 가려면 두 시간을 넘게 소비해야 하는 공동체에서는 심리적으로든 금전적으로든 아무도 자신의 일부를 사회와 공유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기존에 저렴한 가격으로 이용해 왔던 몇 안 되는 서비스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 활동을 하면서 늘 가졌던 궁금증 중 하나는, 우리 공동체 구성원들은 왜 그렇게 자신의 이익 보호에는 유독 민감하면서 공동체의 유지 보수를 위한 지출에는 인색할까 하는 것이었다. 특히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세금에 대한 태도였다. 많은 사람들은 세금에 관하여 자기 노력의 결과물을 국가가 부당하게 약탈해 가는 것이라 인식하고, “피 같은 세금”이라는 말을 매일같이 써가며 공동체를 향한 지출을 적대시하곤 한다. 나는 그것이 언제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금은 국가와 시민 간의 일종의 거래일 뿐이다. 그 거래가 누군가에게 그렇게까지 부당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다.
세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계약의 징표다. 유무형적으로 국가가 제공하는 인프라에 대해 해당국에 거주하는 시민이 내는 사용료다. 우리가 매일 당연하게 타고 다니는 버스와 지하철, 수도꼭지만 돌리면 나오는 깨끗한 물, 스위치만 누르면 켜지는 전기 등은 공짜가 아니다. 공짜일 수가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심지어 유럽연합에 입국할 때 영국 및 주요 선진국들과 한국인의 여권이 같은 줄에서 취급받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역시 세금의 대가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