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즐거운 남의 집 / 이윤석, 김정민 / 놀
집을 새 물건들로 가득 채울 수도 있다. 하지만 경제적 여건이 허락된다고 해서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 번 이사를 다니면서도 처분하지 않고 같이 살아왔던 가구와 함께하는 생활 방식도 엄연히 존재한다. 반려동물, 반려식물뿐만이 아니라 반려책상, 반려식탁, 반려조명이라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집을 ‘하우스(house)’가 아니라 ‘홈(home)’으로 만드는 힘은 여러 시간이 녹아 있는 데서 자라난다. (p.27)
취향이라는 건 가치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고들 하지만, 사실 사람들은 남의 취향을 판단하곤 한다. “저분은 취향이 참 고급이에요.”, “저 사람은 돈은 많은데 취향이 참 촌스러워” 같은 말들이 자주 들리지 않는가. 취향은 자본이 되어서 일종의 스펙으로 작동하고 있다.
텔레비전에 보이는 몇몇 연예인들의 집은 취향이 좋다고 일컬어진다. 사실 좋은 취향이라 여겨지는 것들 대부분은 자본으로 만들어진 뷰(view)일 뿐이다. 취향이 좋다고 감탄하는 대상의 정체는 사실 취향이 아니라 자본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좋은 취향을 가진 사람처럼 보일 수 있을까? 나에겐 돈이 없고, 따라서 주어진 뷰도 고만고만하다. 내가 거쳐온 집들은 대개 ‘옆집 창문 뷰’, ‘빨간 벽돌 뷰’, ‘화강석 벽 뷰’였다.
대중매체에서 ‘좋은 취향’에 대해서 말하고 또 판단하다 보니 사람들은 이제 취향을 배우기까지 하는 것 같다. 디자이너들이 추천하는 명품 가구를 집에 들이거나, 유명하다는 인테리어 소품을 사들이고, 요즘 유행하는 인테리어를 무작정 따라 하는 식이다.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유행 따라 사 입어 보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인테리어 역시 내 취향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유행하기 때문에, 남들이 추천한다는 이유로 했다가는 이것 또한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닐 테다. (p.52-53)
그런데 이 ‘가성비’라는 개념은 어느새 우리의 일상 깊이 파고들어 훼방을 놓는다. 무언가 사려고 할 때면 자연스럽게 가성비라는 개념을 떠올리며 이 상품의 가격이 성능에 걸맞게 책정되었는지 따져본다. 그러면 내가 좀 더 똑똑한 소비자가 된 것만 같아 만족스럽다. 하지만 이 만족스러움은 얼마 가지 않아 불안함으로 변하곤 했다. 내가 내린 선택에 자꾸만 의심이 들었다. 그 의심을 잠재우려 블로그 후기를 찾아보고, 유튜브 제품 리뷰를 모두 섭렵하면서 내 소비가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찾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가성비라는 개념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었다. 만족의 기준이 나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캐스퍼의 디자인이 주는 만족감, 그리고 집이 주는 마음의 편안함 모두 주관적인 느낌이다. 성능을 판단하는 기준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그런데 요즘의 가성비라는 개념은 마치 모두가 동의하는 기준이 있는 것처럼 사용된다. 가성비를 따지다 보니 결국 그 기준이 남에게 있다. 내 소비에 대한 효능감을 남의 인정에서 찾게 된다. 소형차의 가성비가 좋지 않다고 말하는 이유들도 곱씹어 보니 모두 남의 시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왠지 소형차를 탄 나에게만 불친절한 것 같은 발레파킹 직원, 30대 후반인데 경차를 타느냐 하는 주변의 수군거림 같은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p.60-61)
하지만 아파트에 살고 있지 않은 나머지 50퍼센트의 사람들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 이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무도 빌라에는 관심이 없다. 어차피 아파트가 될 과도기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목적지가 아닌 경유지로 여겨진다. 버스 정류장을 봐도 알 수 있다. 아파트 이름만이 버스 정류장의 이름이 될 자격을 갖고 있다. ‘행복빌라’처럼 작은 이름을 가진 건물들은 빌라촌이라는 구역으로 뭉뚱그려져서 ‘검단신도시 2차 노블랜드 에듀포레힐’처럼 크고 긴 이름을 가진 아파트들의 배경이 된다. 멀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해상도 낮은 풍경의 일부가 된다. 아파트는 수많은 연구와 공간적 진화 실험의 대상이 되어 개선을 거듭한 반면, 그 밖의 주택들의 현주소는 몇십 년 전과 다를 게 없다.
아파트의 깨끗한 창이 부럽다. 가릴 필요도 없이 안전한 자신감으로 반짝거리는 창. 얼마를 지불해야 저 자신감을 얻을 수 있을지 생각하다 보니 여느 때처럼 심통이 났다. 왜 나의 시선만 가로막혀 있을까? 내가 가진 자본의 차이로만 이해하기에는 이 헐거운 플라스틱으로 가려진 내 시야가 너무 안됐다. (p.78-79)
서울에서 뷰를 빼앗긴 건 한강뿐만이 아니다. 남산, 인왕산, 도봉산, 청계산, 아차산…. 수많은 산과 그 산을 조망할 수 있는 뷰 또한 소수에게만 허락된다. 그나마 이런 뷰를 가리지 않기 위해 서울의 사대문 안에는 고도제한이 있지만 요즘은 이 또한 인센티브라는 형식으로 완화되는 추세다. 녹지율을 높이면 고도제한을 풀어준다나. 어찌 보면 지상의 녹지는 많아지기 때문에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언젠가는 높은 빌딩들이 산을 둘러싸서 빌딩 밖에선 산을 못 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렇게 강과 산을 차지한 아파트들은 으레 이름 앞에 ‘포레’, ‘마운틴’, ‘리버’ 같은 단어를 붙여 멋드러진 뷰를 자랑하곤 한다.
자연이 특정 계층의 사람들만 소유할 수 있는 명품이 되어가는 기분이다. 세계보건기구는 1인당 평균 최소 9제곱미터의 생활숲 조성을 권고하고 있다. 하지만 이 또한 불평등하게 주어진다. 연립주택이나 다세대주택 비율이 높은 지역은 1제곱미터도 갖기 어렵지만, 고급 아파트의 비율이 높은 지역은 기준을 훨씬 상회하는 35제곱미터까지도 주어진다. 이 빌어먹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물과 나무도 돈을 주고 사야 하는 모양이다. 집 안의 초록은 근린공원이 대신하고, 집 안의 파랑은 꿈조차 꿀 수 없다. 한강과 숲이 조금 더 공공에게, 더 많은 사람에게 열리고 다양한 크기의 공원이 생활공간 곳곳에 더 많이 생겨나면 자연스럽게 모두가 조금씩의 자연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p.85-86)
식물을 키운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키울수록 잘 모르겠다. 갑자기 시들거나 죽어도 그 이유를 파악하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식물 전문 서적, 블로거, 유튜버들을 통해 정보를 얻어보려 해도 노랗게 변한 내 식물의 이파리가 과습으로 마른 건지, 아니면 반대로 과도한 직사광선을 맞아 생긴 잎 마름인지 진단하기 어렵다. 내 공간의 환경적 특성을 오랜 시간 자세히 관찰해야 알 수 있는 일인데, 과학 실험처럼 변인들을 통제해 가며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꽃시장까지 가서 직접 물어봐도 “물만 잘 주면 된다”라는 두루뭉술한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꽃시장은 습도와 환기, 햇빛이 모두 충분해 이미 완벽한 환경이니, 꽃집 사장님들에게는 손님들이 사간 식물들이 죽었다는 것이 미스터리일지도 모르겠다. 꽃시장에서는 시들시들한 식물을 본 적이 없다. (p.148-149)
원룸에 살 때였다. 오후 4시쯤 되면 방으로 빛이 한 조각 들어왔다. 다른 집들에 의해 다 잘려 나가고 남은 손바닥만 한 빛이었다. 그 빛이 그리는 궤적을 따라 방의 작은 화분들을 늘어놓곤 했다. 잠시나마 이 작은 생명체들이 태양으로부터 직접 여행해 온 빛을 쬐게 해주고 싶었다. 총성이 난무하는 현실 속에서도 한쪽 옆구리에 화분을 끼고 다니던 레옹과 마틸다처럼 비장한 마음이었다. 그때는 정말 내 한 몸 챙기기에도 복잡한 시간이었지만, 내가 챙길 수 있는 대상이 있으며 그 대상이 나에게 주는 분명한 행복이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주고받는 관계가 위안을 주었다. 그것이 내가 이 아담한 공간에 굳이 그들의 자리를 만들고 계절마다 집으로 데려오는 이유다. 식물에도 통각이 있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는 이상 계속할 것이다. 넓이는 부족해도 깊이는 늘일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p.154-155)
예를 들면 을지로의 어떤 가게 앞에 놓인 의자를 떠올려 본다. 7천 원짜리 백반을 파는 식당에서 자주 봤던 것 같은 낡은 업소용 의자다. 쇠로 만들어져 오래되었지만 멀쩡해서 버리기는 아까운 그런 물건이다. 가게 앞에 놓고 쓰다 보니 쿠션이 다 갈라졌고 오래 앉아 있으면 엉덩이가 배긴다. 가게를 뒤져 보니 지난 겨울에 쓰다 남은 수도 동파 방지용 단열재가 있다. 꽤 푹신한 게 의자 쿠션에 덧대놓으니 쓸 만하다. 잠깐 앉았다 가는 사람들도 잘 만들었다고 한다. 의자 등받이 뒤에다가는 빨간색 전기 테이프로 ‘주차금지’라고 써 붙여놓았다. 의자로 쓰지 않을 때는 가게 앞 작은 주차 공간을 수호하는 입간판으로 쓴다.
이런 일상의 발명품들은 몇 가지 특성을 공유한다. 매번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대략 이렇다. 첫 번째로, 두 가지 이상의 존재를 합쳐 만든다. 을지로의 그 의자를 철제 의자에 단열재와 전기 테이프를 더해 만들었던 것과 같이 말이다. 수도관을 감싸기 위한 단열재가 쿠션으로 이용되었던 것처럼, 재료들이 원래 용도와 다르게 쓰이는 경우를 자주 관찰할 수 있다. 물건의 새로운 의미를 찾아낸다.
두 번째로, 디테일이 유려하진 않지만 태도가 대범하다. 물건이나 공간을 디자인하는 사람들은 보통 이질적인 것이 만나는 부분에 과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일상의 발명가들은 이에 관대하고 능숙하다. 케이블타이, 접착제, 실리콘이나 테이프 같은 부자재들을 활용해 뚝딱 만들어낸다. 발명품들을 접착하거나 엮어서 조립하는 방식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응급 상황에 빠르고 능숙하게 대응하는 기술자 같다. 만들기 쉬운 발명품이라는 점에서 확장성을 띠기도 한다. 한 집에서 만들면 옆집에서 따라 만든다.
세 번째로는, 구수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특히 도시 속에서 발명품들을 발견할 때면 주변과 묘하게 어울리면서도 생경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익숙하면서도 기묘한 물체가 도시에서 유영하는 풍경은, 개인으로서 감히 도전할 수 없는 도시에 균열을 내는 유머처럼 느껴진다. 찬란한 도시의 표면을 비틀고 꼬집어서 만든 생채기 같다. 모든 것이 매끄럽게 포장된 세계 안에서 삐져나온 누군가의 깊은 속마음 같다.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난다. (p.162-164)
하지만 욕조를 찾아서 이집 저집 하루씩 빌려 다니는 게 아니라, ‘욕텔’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욕조가 있는 집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래서인지 한번은 집을 설계하며 욕실을 꽤 크게 디자인한 적이 있다. 천창도 내어서 따사로운 빛이 내리쬐도록 하고, 옆에 선베드도 둘 수 있게 하고 말이다. 내 욕망이 너무 크게 들어간 디자인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내가 이 집에 산다면 욕실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낼 것만 같다. 매일 아침 따뜻한 물을 받아놓고 음악을 들으며 물속에 온전히 몸을 담그고 싶다. 눈앞에 보이는 게 타일이 아니라 러그가 깔린 거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그리고 그 너머로 큰 창을 통해서 바다나 숲이 보였으면. 그렇게 점점 물속으로 꼬르륵꼬르륵 하는 상상을 한다. (p.174)
하지만 더 이상 내 주변에는 남과 함께 사는 사람이 없다. 학생도 아니고 커플도 아니며 그렇다고 결혼할 사이도 아닌 두 성인이 함께 사는 경우는 찾기 힘들다. ‘관련 없는’ 사람끼리 함께 산다는 이야기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공유를 상상하기 힘든 도시에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공유는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이고, 도시는 조금의 손해도 보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만들어져 있으니까. 너와 나의 것이 명확하게 구분된 담장, 건폐율과 용적률을 꽉꽉 채워 올린 뚱뚱한 건물들, 잠시 앉아서 머물 곳도 없는 보행 환경이 그렇다.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물리적으로 구현된 ‘각자도생’의 프로파간다를 피부 깊숙이 내재화한다.
나 혼자 살아가기에 힘든 세상이니 남과 함께 사는 것이 대안이지 않겠냐는 논리는 한국 사회의 가족주의적 문화 안에서는 보편화되기 어렵다. 한평생 가장 많은 재화를 나누어 쓰는 경험은 아마 혈연과의 나눔일 텐데, 그것에 공유라는 표현을 붙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유라는 개념은 ‘남’과의 관계에서만 성립하고, 지금의 한국은 함께 사는 방법을 잊어버린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저마다의 방이 모여 만들어진 도시는 아무도 책임지고 싶어 하지 않았던 학창 시절 내 방 앞의 복도 같다. 거리는 방들이 뱉어낸 책임들로 가득하고, 그 유기된 책임들이 모여 도시가 된다. 남은 공사비 안에서 고른 화강석 외장재, 전선을 이고 진 채 위태롭게 기운 전신주, 산란기에 접어든 물고기처럼 필로티 속에 자동차를 가득 품은 다세대주택들이 그렇다. 전봇대 아래 쌓인 쓰레기 더미, 몸통을 휘적이며 가게를 홍보하는 입간판, 전국 팔도에 똑같이 깔린 보도블록의 색깔과 패턴들도 그렇다. 도시의 거리는 보행자의 시각적 안위에는 관심이 없다. 한때는 이런 거리의 모습을 보는 게 너무 싫어서 겨울을 가장 좋아했던 때도 있었다. 안경에 김이 서리면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되는 ‘어차피의 풍경들’을 편히 외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이 도시는 실패한 공유의 경험들로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공유를 상상해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또다시 도시를 만든다. (p.197-198)
세상은 다양한 경험을 하라고 말한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눈을 넓히라고. 하지만 경험만 해야 한다. 뷔페에서 이런저런 음식을 맛보듯이, 맛만 봐야 한다. 오래도록 앉아 맛을 음미하거나 그 세상에 드러눕는 것은 절대 허락되지 않는다. 어딘가에선 가장 쉬운 혐오의 방식으로 노키즈 존을 만들어내고 있고, 노인복지시설 설계 설명회에선 혐오 시설이라며 반대를 외치는 주변 아파트 주민들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특수학교인 서진학교가 설립되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반대의 목소리가 있지 않았는가. 서진학교 설립 주민토론회에서는 장애 학생의 부모들이 무릎을 꿇으며 설립을 호소하기까지 했다. 특수학교를 짓는 것이 무릎을 꿇으면서 호소해야 할 일이라니, 얼마 남지 않은 인류애가 정말 바닥날 지경이다.
지역 이기주의가 사회 이곳저곳에 너무나도 많이 도사리고 있다. ‘NIMBY(Not In My Backyard)’를 외치는 사람들의 주장은 ‘혐오 시설’을 두지 말자는 것인데, 이 ‘혐오 시설’이라는 말을 들으면 화가 나다 못해 슬퍼져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저렇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동네 분위기를 망친다거나 보기에 좋지 않다는 식으로 돌려 말하곤 한다. 하지만 그 내면엔 집값 하락이라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걸 모두가 안다. 인간이라면 응당, 사회라면 당연히 포용해야 할 사람들을 ‘집값’으로 치환해서 벽을 세우는 모습은 두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다. (p.215-216)
먹는 우리 / 이용재, 김남윤, 송원경, 이하림 / 중림서재
이하림 저는 아이한테 요리할 때 콩나물 같은 거 다듬게 시키고 그러거든요. 그러면 어느 순간에 아이가 그래요. ‘엄마! 콩나물 삶는 냄새가 나! 오늘 밥 콩나물국이야?’ 이렇게 얘기를 하거든요. 저는 이런 게 너무 좋은 거예요. 보내는 어린이집에서도 요리 활동을 해요. 선생님들이 대부분 하시지만, 아이들이 그 일련의 과정에 참여하는 거죠. 그래서 그런 교육도 필요하다고 봐요. 어릴 때부터 식재료에 대한 충분한 경험이 필요하다는 거죠.
김남윤 저는 군대에 취사병으로 있을 때를 제외하면 사실 그런 교육을 받았던 게 가물가물한 것 같긴 해요. 유치원이나 초등학교는 사실 거의 기억이 안 나는데, 중고등학교 때 기술가정 시간은 기억이 나요. 한 학기에 1~2시간 실습 시간을 제외하면, 그냥 책 펴놓고 이 영양소가 몸에 들어오면 어떤 질병이 예방되고, 탄수화물은 어떻게 분해되고, 이런 거를 배우는데 막상 기억에는 안 남았어요. 그냥 글로만 보고 실질적으로 내가 뭘 접하고 있는지에 대한 시각적인 거나 촉각을 자극할 만한 경험이 기억으로 안 남다 보니까 성인이 돼서도, 뭐가 어디서 자라고 어떻게 오는지에 대한 감이 단순히 공교육만으로는 쌓이지 않는 거죠. (p.82-83)
이용재 저는 사실 요즘은 덜한데 음식을 덜 쌓아 놓고 먹으려고 애쓰고 있어서. 근데 사실 뭐 마트를 매일 가기도 하거든요. 일부러, 집에서 일하니까 몸을 움직이려고. 그러니까 그냥 소금 한 봉지 사러 가고 그래요. 이렇게 가서 몇 년 전부터 느껴온 건데 사람들의 음식 선택 그러니까 계산대에서 사람들이 산 거를 쭉 보잖아요? 그럼 되게 좌절스러워요. 원경 님도 혹시 그런 건 느끼세요?
송원경 네.
이용재 왜냐하면, 생 재료를 거의 안 사요. 특히 큰 마트에 가면 갈수록….
송원경 코스트코 이런….
이용재 작은 마트는 급할 때 급한 식재료 사는 경우에서도 쓰이지만, 코스트코 같은 데도 코스트코는 육류나 이런 식재료들이 좋은 편이거든요? 싸고? 근데 사람들이 사는 거는 거기에 초점이 전혀 안 맞춰져 있어요. 물론 이게 하루 이틀은 아니에요. 제가 2009년에 한국 돌아와서 본 현상이고 사람들이 뭘 사냐 그러면 라면, 김. 김 같은 거 사면 사실은 정말 다행이에요. 왜냐하면, 밥을 먹는다는 얘기잖아요. 그래서 굉장히 좌절스러운데 이 얘기를 참 어디다 하기가 힘들어요.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식생활은 굉장히 개인적인 선택이잖아요. 거기에 사실 뭐라고 얘기를 한다는 것은 월권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사실 제가 책을 써서도 뭐 “당근을 맛있게 먹는 방법은 요렇게 요렇게 해서 이렇게 하면 이런 원리로 이렇게 된다.”라고는 얘기를 하지만 “당근을 많이 먹어야 건강에 좋다.”라는 얘기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욕을 먹는 게 두렵진 않은데 그게 저의 직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죠.
제가 가장 좌절할 때가 ‘우리 밥을 잘 먹자. 밥을 잘 먹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가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식단, 음식, 이런 거 파스타를 이렇게 삶아 드시면…’ 이런 거를 막 이렇게 밤 10시까지 쓰잖아요? 그러면 저는 힘 빠져서 밥을 제대로 못 먹는 거예요. 밥 먹기 싫고 균형 잡힌 식사를 하기 싫고 막 이럴 때 엄청난 좌절을 느끼는데요. 그런 차원에서 고민이 많아요. 저 같은 사람도 힘든 거죠. 물론 저는 잘 먹어야 한다는 것에 관해 이론적으로도 어느 정도 무장이 돼 있고, 또 그 이론을 잘 지키는 것이 실천하는 사람으로서 올바른 직업인이라는 강박도 있습니다. 하지만 궁지에 몰리면 제가 선택하는 음식들도 그다지 건강하거나 아니면 거창하게 전 지구적으로 보았을 때 지속가능하지 않은 식사를 선택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 과연 다른 사람들은 어떤가.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슨 변화를 얘기할 수 있는 상황인가? (p.126-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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