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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사랑 권하는 사회 / 김태형 / 갈매나무

 

 심리학자들은 부모가 자식에게 공부를 강요하는 수단으로 사랑을 이용하는 행위를 흔히 ‘조건부 사랑’이라고 부른다. 조건부 사랑이란 자식이 공부를 열심히 하거나 성적이 우수하면 사랑을 주고, 공부를 등한시하거나 성적이 나쁘면 사랑을 줄이거나 철회하는 식으로 조건에 따라 사랑을 줬다 안 줬다 한다는 뜻이다. 조건부 사랑의 목적은 타인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것은 가짜 사랑이며, 조건부 사랑을 받는 사람은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기가 존재만으로는 사랑을 받을 수가 없다는 사실,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자격을 갖춘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부모로부터 조건부 사랑을 받은 자식이 예외 없이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살아가고,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 특유의 애정 결핍증에 시달리는 건 이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은 조건부 사랑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무조건적 사랑은 어린애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가장 절실한 갈망의 하나이다. 한편 어떤 장점 때문에, 곧 사랑받을 만해서 사랑받는 경우 언제나 의심이 남는다.

 부모가 자식에게 공부를 강요하는 것을 두고 그들이 자식을 도구화한다고 말하면 어떤 이들은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물론 부모 대부분이 자식의 행복을 바라기 때문에 자식에게 공부를 강요한다는 데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과연 그들은 자식의 행복한 미래를 바라는 순수한 사랑의 마음만으로 자식들에게 가혹하고 불행한 어린 시절을 강요하고 있는 걸까?
 자식이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부모의 마음은 편안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왜냐하면 그런 모습이 자신의 불안감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반대로 자식이 공부를 안 하고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면 부모의 마음은 불편해지고 때로는 화가 나기도 한다. 그 모습이 자신의 불안감을 심각하게 자극하기 때문이다. 만일 한국 부모들이 심각한 불안에 짓눌려 있지 않다면, 어려서부터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훗날 불행해질 거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자식에게 공부를 강요하는 짓은 하지 않을 거다. 자식에게 공부를 강요하면 죄책감이나 미안함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생기기 마련인데,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런 부정적 감정을 회피하고 싶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 부모들은 공부 강요가 초래하는 부정적 감정을 회피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공부 강요가 초래하는 부정적 감정보다 이중 불안(생존 불안과 존중 불안)을 더 견디기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한국 부모들은 불안에 짓눌려 죽기 일보 직전이어서, 차라리 자식을 괴롭히며 생겨나는 부정적 감정을 차선책으로 선택한다. 심하게 표현하자면 자기가 살겠다고 자식을 괴롭히는 길을 선택하는 셈이다. (p.33-35)

 

 불안한 것은 부모이지 아이가 아니다. 어린 자식은 자신이 훗날 돈을 많이 벌지 못하면 불행해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런 생각 때문에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아이가 즐겁게 놀면 불안해지는 것은 부모다. 한국 부모들은 불안이 너무 심해서 그것을 견뎌내거나 이겨낼 수가 없다. 그 결과 부모는 자신의 불안을 완화하거나 경감하기 위해 자식에게 불우하고 불행한 어린 시절을 강요한다. 이것은 한국 부모들이 자식에게 공부를 강요하는 주된 원인이 자기 불안을 경감하거나 방어하기 위해 자식을 도구화하는 행위와 관련이 있음을 의미한다.
 지금까지의 논의가 한국 부모들이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한국 부모들은 대부분 자식을 사랑한다. 그러나 자식에게 불행한 어린 시절을 강요하고 그런 행위가 초래하는 부정적 감정과 고통을 감내할 정도로 부모들 불안이 심각하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최근 많은 심리학자가 아이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기만 하면 부모를 탓한다. 그러나 부모를 불안하게 만든 원인이 병든 사회라는 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 물론 부모에게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고, 자식들에게 직접적으로 상처를 주는 당사자는 부모이다. 그러나 부모 역시 병든 사회의 피해자이기 때문에 부모를 탓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부모 문제가 본질적으로 사회 문제라는 점이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사회가 부부의 어깨 위에 짊어지워 놓은 사적인 고투와 고통이라는 짐이 고스란히” 자식들에게 돌아가게 된다고 지적했다. 부모가 자식을 건강하게 사랑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주요 원인이 사회라고 비판한 것이다. 사실 그의 지적처럼 부모들의 공부 강요는 부모들이 사회로부터 강요당한 자기의 불안을 자식들에게 떠넘기는 비의도적 행위다. 따라서 부모의 공부 강요와 그로 인한 정신건강 악화의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 해결책은 사회를 부모를 불안하지 않게 해주는 건전한 사회로 개혁하는 것이다. (p.37-38)

 

 가스라이팅의 명수들은 다종다양한 방법을 총동원하여 상대가 자신의 판단력이나 자기 통제력을 의심하게 만든다. 상대를 걱정하여 보살피고 돌봐주는 척하면서 상대가 자신에게 의존하도록 만드는 친절한 방법도 있고, 상대의 판단이나 행동을 계속 비난함으로써 상대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잃도록 만드는 방법도 있으며, 사랑받기에 목말라하는 심리를 이용해 상대가 자신의 판단을 고수하면 그를 버릴 것처럼 굴어 판단을 자기에게 위임하도록 만드는 방법도 있다. 이를 통해 무엇이 옳은지, 내가 경험한 것이 사실인지 아니면 착각인지 계속 의심하게 해서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만든다. 그 결과 장기간에 걸쳐 가스라이팅을 당한 사람은 단지 자신의 사고력이나 판단력을 의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존감과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하며, 매사에 자기 탓을 하는 사람이 되면서 가스라이팅의 가해자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복종하게 된다. (p.43-44)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의 마음을 잘 헤아려 적절한 반응을 해주고 필요한 것을 제공하며, 자식을 보호하고 지지해 준다. 이런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마음을 파악하고 언어적, 감정적 반응을 해줄 수 있는 능력,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지적인 능력,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해 줄 수 있는 힘이나 자원 등이 필요하다. 아이는 태어난 이후 이런 부모나 어른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아, 이런 것이 바로 사랑이구나’라는 느낌과 경험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이는 사랑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으며, 어릴 때에는 사랑을 하는 것보다 받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회적 존재가 된 성인에게는 사랑하기가 훨씬 더 중요해진다. 사랑받기, 특히 양육자로부터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으려는 것은 아동기의 욕망이다. 원칙적으로 이런 아동기적 욕망은 어린 시절에 원만하게 충족되면 이후에는 그 중요성을 상실한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최우선적으로 안전의 욕망부터 충족하려고 한다. 생후 몇 년 동안 어머니(주양육자)가 정성스럽게 돌봐주면 이 안전에 대한 욕망은 원만하게 충족된다. 그러고 나면 그 이후의 발달 단계에서는 그 중요성을 거의 상실한다. 이미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가 나중에 다시 초등학교에 입학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안전에 대한 욕망에서 이미 졸업한 아이는 이후 이 욕망을 충족하는 일이 별 의미가 없다.
 그러나 만약 어렸을 때 중요한 아동기적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성인이 되어서까지 그 욕망을 충족하는 데에 매달리거나 집착하게 된다. 말하자면 아동기적 욕망에서 졸업하지 못하는 만년 초등학생이 되는 건데, 이것이야말로 성인들을 괴롭히는 마음의 상처 혹은 정신장애의 기본 원인이다. (p.84-85)

 

 오늘날 한국인이 추구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쾌감은 내가 남들보다 잘났다는 느낌에 기초한 우월적 쾌감 혹은 과시적 쾌감인 듯하다. 사람들 상당수는 이런 쾌감을 맹렬하게 추구하는 반면 다른 기쁨이나 즐거움은 거의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러나 과시적 쾌감은 병적인 쾌감이다. 내가 남들보다 잘났다는 우월주의는 타인들을 열등한 존재, 즉 아래 서열의 못난 존재로 간주하여 차별하고 무시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학대행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연쇄살인범이 사람을 죽일 때 느끼는 병적인 쾌감, 학교 폭력 가해자가 친구를 괴롭힐 때 느끼는 병적인 쾌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요즘 한국인들이 추구하는 거의 유일한 쾌감이 병적인 쾌감이라는 사실은 한국 사회가 얼마나 병들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서열을 둘러싼 치열한 개인 간 경쟁은 한국인들을 서열 동물이 되도록 강요한다. 많은 사람이 자신보다 서열 높은 개 앞에서는 꼬리를 내리고 살살 기지만 서열 낮은 개 앞에서는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동물이 되어버렸다. 누군가를 만나면 거의 본능적으로 서열을 정하려고 하고 정해진 서열에 따라 처신을 달리하며, 위쪽 서열을 차지하기 위해서 치열한 기싸움을 벌인다. (p.100-101)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자연과 사회, 그리고 자기 자신을 개조·개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인간은 혼자서는 세상을 개조할 수 없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단결하고 협력함으로써 세상을 지배하고 개조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능력 중 가장 기본은 서로의 마음과 힘을 합칠 수 있게 해 주고 서로의 성장을 촉진하는 능력이다. 이런 능력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능력인데, 이것이 바로 사랑의 능력이다. 사랑의 능력이 있어야 인간은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고, 세상을 바꿀 수 있으며, 계속해서 성장하고 발전해 나갈 수 있다. 가족 구성원이 서로를 건강하게 사랑하면 그들은 한마음 한뜻의 집단으로 뭉쳐 거친 세상에 맞서나가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건강과 성장을 촉진해나갈 수 있다.
 사회가 건강할 경우 기본적인 사랑의 능력은 어느 정도까지는 저절로 획득 가능하다. 어려서는 부모와 어른들의 사랑을 받고, 커서는 친구들이나 이웃들과 사랑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간다면 특별한 노력 없이도 기본적인 사랑의 능력을 갖게 된다. 문제는 현대 사회가 건강하지 않아서 이런 기본적인 사랑의 능력을 획득하기가 매우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특히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정신건강 악화는 사랑하는 능력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이 때문에 과거와는 달리 특별한 노력이 없이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전반적인 능력은 물론이고 아주 기본적인 사랑의 능력조차 획득하기 힘들어졌다. 비유하자면 예전에는 다들 몸이 튼튼해서 무난하게 달리기를 할 수 있었지만, 요즘은 다들 관절과 근육이 약해져서 정상적으로 달리기조차 어려워진 상황과 비슷하다.
 상황이 이렇게 바뀌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별다른 노력 없이도 사랑이 가능하다고 착각하고 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능력을 상실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사랑을 너무 쉽게 생각하며 사랑의 능력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한다고 지적하면서 “사랑처럼 엄청난 희망과 기대 속에서 시작되었다가 반드시 실패로 끝나고 마는 활동이나 사업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p.121-122)

 

 안타깝게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대인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살아가지 못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공동체)를 상실한 채 파편화되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살아간다. 이 때문에 인간은 원래 이기적인 동물이라서 개인 간 경쟁에 기초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인간의 본성에 가장 잘 맞는 이상적인 사회라는 궤변까지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계속 강조했듯이, 인간은 신자유주의 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서로 사랑하면서 하나로 뭉쳐 살아왔고 여전히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단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p.155-156)

 

 따라서 어떤 생명체를 사랑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 생명체의 본성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생명체의 본성이란 어떤 생명체를 바로 그것이게끔 해주는 근본적인 성질이나 속성을 말한다. 만일 개가 개의 본성을 잃어버리면 그 개는 개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된다. 개를 개가 되게끔 해주는 근본적인 속성이 바로 개의 본성이다. 따라서 개를 사랑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개의 본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개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개의 본성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는 개를 사랑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도구라서 사랑하는 것일 뿐이다. (p.167-168)

 

 인간은 단순한 생명체가 아니다. 인간은 육체적 생명만이 아니라 사회적 생명도 가지고 있는 사회적 존재이다. 이 중 인간에게 더 중요한 건 사회적 생명이다. 따라서 인간은 사회적 생명체의 본성에 맞게 살아야만 생존과 성장이 가능하다. 이런 맥락에서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사랑하고 있는 자―사랑의 대상인 인간을 의미한다―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들의 적극적인 관심”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삶의 의미를 상실한 채 불행하게 살아가는 까닭은 그들이 본성대로 살지 못해서다. 한국인들은 먼 옛날부터 인간 본성에 맞게 사는 것 혹은 본성을 실현하면서 사는 것을 ‘사람답게 산다’라고 표현해 왔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본성은 사랑으로 타인과 하나가 되고, 세상의 주인으로서 자유롭게 자주적으로 살아가며, 세상에 기여하는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본성을 귀중히 여기고 그것을 사랑한다는 의미는 이웃을 사랑하면서 이웃들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고, 불의에 맞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싸우며, 사회에 기여하는 활동을 하면서 살아가도록 다른 사람을 지지하고 격려해 준다는 뜻이다. 동시에 누군가가 인간 본성에 맞지 않는 삶을 살아가면 비판도 하고 이끌어주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 본성에 대한 사랑이란 상대를 무조건 감싸고도는 가짜 사랑과는 아무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정반대라는 점을 보여준다.
 한국에는 자식이 불의에 저항하지 않도록 교육하는 게 자식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부모들이 있다. 자식이 왕따 당하는 친구 얘기를 하면 “너 괜히 끼어들지 마라. 너까지 왕따 당하면 어떡하냐.”라며 훈계하고, 자식이 부당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데모라도 하면 “그러다가 나중에 밥 굶는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고 말하며 말린다. 이런 부모는 자식이 불의에 저항하면 이런저런 피해를 보게 될 것만 생각하지 불의를 묵인하거나 회피하면 정신건강이 파괴된다는 점은 고려하지 못한다. 인간의 본성은 비굴하고 비겁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나 혼자만이 아닌 만인)의 자유를 위해 용감하게 싸우면서 사는 것이다. 그렇게 살지 못하면 사람은 점점 더 무력해지고 비겁해져서 결국에는 노예 같은 삶을 살게 되고 그 과정에서 정신은 황폐해진다. 자신의 비겁함을 좋아하거나 자랑스러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심한 자기혐오에도 시달린다. (p.177-178)

 

 요즘에는 갈등이 유발되면 ‘잠수 타기’를 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 ‘잠수 타기’는 부부 싸움을 하고 나서 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거나 일체의 대화를 거부하는 방식에서부터 남들로부터 비판을 받거나 갈등을 겪으면 모든 연락을 차단한 채 칩거하다가 어느 날 다시 ‘짠!’ 하고 나타나는 것까지 다양한 양태로 나타난다. 잠수 타기의 원인은 자기 방어와 갈등 회피다. 쉽게 말하자면 잠수 타기는 문제나 갈등이 발생하여 시끄러운데, 그것을 해결할 의지나 자신감이 없어서 숨었다가 시간이 흘러 좀 잠잠해지면 다시 나타나는 행위다. 당연히 이는 갈등 해결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더욱이 그것은 타인을 몹시 화나게 만들기 마련이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일종의 자해행위이다. 연인 간의 의사소통에 관한 한 연구에 따르면 대화를 회피하는 등으로 상대의 접촉을 차단하는 행동은 관계를 악화시키는 최악의 행동 중 하나이다.
 갈등을 회피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이유는 갈등을 성공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인간관계가 더 발전하는 모습을 관찰하지 못했거나,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하면서 성장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애커먼과 동료들의 연구에 따르면 청소년기의 가정환경은 성인이 된 이후의 의견 충돌을 해결하는 과정뿐 아니라 결혼생활에도 영향을 미친다. 청소년기 이전부터 아버지와 어머니가 갈등을 원만히 해결하면서 더 좋은 관계로 발전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라난 사람은 갈등을 회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갈등을 슬기롭게 해결하는 방법도 배울 수 있다. 나아가 인간관계에서 갈등은 필수며 그것을 잘 해결하면 오히려 관계가 더 좋아진다고 믿을 것이다.
 갈등을 회피하는 경향에는 앞에서 언급한 대인관계 훈련 부족도 영향을 미친다. 어린 시절 또래들과의 놀이 경험은 갈등에 대한 태도와 해결 능력에 큰 영향을 미친다. 또래들과 놀다 보면 갈등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갈등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친구들과 계속 놀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갈등을 회피하지 않는 심리와 그것을 원만하게 해결하는 능력을 습득한다. (p.223-224)

 

 앞에서 강조했듯이, 오늘날 사람들이 가짜 사랑을 하거나 사랑이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된 기본적인 원인은 사회다. 그러나 친자본주의적이고 체제에 순응하는 학문인 미국의 주류 심리학은 다른 모든 문제와 마찬가지로 사랑에 관한 문제를 모두 개인 탓으로 돌린다. 주류 심리학은 사회가 잘못되었으니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 어떤 경우에도 하지 않는다. 오직 개인의 노력만을 줄기차게 강조할 뿐이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과 그의 부인인 사회심리학자 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은 “심리학자들과 심리치료사들은 고객의 현재의 비참함을 오직 개인의 아동기 때의 체험이라는 측면에서만 이해하려고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초점을 놓치고 만다.”라며 사랑에 대한 주류 심리학 이론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에바 일루즈도 사랑의 영역에서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데 심리학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면서, 그 결과 “사랑의 고통은 개인이 자초한 것이라는 생각은 20세기 내내 무시무시할 정도로 괴기한 개선행진을 거듭해왔다.”고 비판했다.
 진짜 사랑을 하지 못하는 데에 불건전한 욕망 같은 개인의 심리 문제가 더 직접적이고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불건전한 욕망에 사로잡혀 가짜 사랑을 하도록 만드는 주범은 병든 사회다. 따라서 진짜 사랑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이뤄낼 수 없다. 사랑을 가로막는 반인간적 사회를 개혁하여, 모두가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해야만 해결이 가능하다. 사회개혁 없이 개인적 노력으로만 사랑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건, 기차가 낭떠러지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데 승객들이 더 편안하고 좋은 자리에 앉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p.232-233)

 

 

발굴하는 직업 / 진주현 / 마음산책

 

 내게 주어진 임무는 간단했다. 한국전에서 전사한 사람들의 유해를 분석해 좀 더 효율적으로 신원확인을 많이 할 수 있도록 업무 체계를 잡아보라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보스가 나에게 직원 한 명을 붙여줬다. 석사학위를 받고 갓 취직한 직원과 나는 머리를 맞대고 정말 열심히 일했다. 수백 개의 상자를 열어 수천 점의 뼈를 정리하고, 그동안 이루어진 분석 결과를 정리하고, 어떻게 하면 좀 더 효율적으로 많은 유해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한국전 유해의 경우 한 사람의 뼈가 여러 개의 상자에 나누어져 다른 사람의 뼈와 섞여 있는 경우가 많았다. 1990년대 초 북한에서 미군 유해라며 208개의 상자를 돌려줬는데 상자 하나에 여러 명의 뼈가 혼재되어 있었다. 한 사람의 유해가 많게는 열세 개의 상자에 나누어져 있기도 했다. 이런 혼재 유해를 어떻게 분석할지 매뉴얼을 만들었고 새로운 형식의 리포트를 작성했다. 밤늦게까지 일하는 것이 즐거웠고 아침에 눈을 뜨면 어서 출근하고 싶었다.
 그리고 결과는 서서히 나타났다. 지지부진했던 한국전 실종 미군의 신원확인자 수가 빠르게 증가했다. 매년 잘해야 열 명 정도이던 수가 2016년에는 마흔일곱 명을 기록했다. 우리 기관에서는 1년에 150~200명의 신원을 확인했는데, 많을 때는 40퍼센트에 가까운 수가 한국전 프로젝트에서 나오기도 했다. 프로젝트가 성과를 올리면서 팀원도 늘어났다. 뼈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시간은 팀이 커지면서 점점 줄어들었다. (p.26-27)

 

 아이들의 방학 기간이 시작되면 사무실 여기저기에서 아이들이 보인다. 남편네 학과의 교수 회의에도 아이들이 쪼르르 따라와 뒷자리에 앉아 있다고 했다. 보스의 딸도 지금은 이십대의 늘씬한 모델이 되었지만, 초등학생 때부터 방학 때는 아빠 사무실에 와 있었다. 거기서 숙제도 하고 책도 읽고 아빠의 책장 정리도 하면서 방학을 보냈다. 다른 직원의 아이들도 수시로 나타났다. 회의실이 비어 있으면 그곳에서 공부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회의 시간에 뒷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한번은 우리 기관 전체가 강당에 모여 종무식을 할 때였다. 수백 명의 군인과 공무원이 자리를 잡았는데 여기저기서 어린이들이 보였다. 겨울방학인데 엄마는 일하러 가야 해서 아빠를 따라왔다는 아이들이었다. 종무식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기관장님이 우리더러 다 멈추라고 하더니 아이들 데리고 온 사람들 먼저 나가라고 했다. 어린이들이 덩치 큰 어른들에게 치이지 않도록 배려한 거였다.
 이건 아직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문화이고 미국이라고 다 이렇지도 않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아이가 있는 직장인에 대한 배려가 한국보다 많은 곳이 미국이다. 아이가 있다고 왜 배려를 받아야 하느냐, 오히려 아이 없는 사람에 대한 역차별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들린다. 나도 아이가 없을 때는 아이 때문에 장기 출장에서 빠지는 직원에 대해 은근히 불만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아이가 있는 건 현실이고, 아이에게 부모 손이 필요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이는 내가 좋아서 낳았으니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게 맞지만 나의 노동력이 필요한 직장이라면 내가 장기간 일할 수 있도록 내게 맞는 근무 환경을 만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
 직원을 뽑는 입장으로 바뀌면서 비단 아이의 유무 문제를 떠나 직원 개개인이 최대한 만족하며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아이가 없어도 돌봐야 할 나이 든 반려견이 있는 직원은 재택근무 시간을 늘려주고, 남편과 멀리 떨어져서 지내는 직원에게는 재택근무와 휴가를 붙여 쓸 수 있도록 해준다. 다른 직원에게 어떤 배려를 왜 해주는지는 사생활의 영역이라 서로 묻거나 알 필요가 없다. 이런 배려가 없을 때 직원들은 일을 즐겁게 하지 못하고 결국은 그만두게 된다. 그러면 다시 직원을 채용해서 교육시켜야 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물론 어디까지 얼마만큼 배려해 줄 것이냐의 문제는 있지만 무조건 같은 시간 동안 같은 곳에서 일해야만 공평하다고 여기는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나는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같은 직장에서 재미나게 일해왔다. 좋은 상사들이 내게 베풀어준 믿음과 배려의 힘이 얼마나 큰지 잘 알기에 내가 받은 것보다 더 많이 직원들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아직 갈 길이 멀다). (p.105-108)

 

 유해 송환 같은 행사 준비도 베트남 발굴 준비도 전투 준비와 똑같은 틀에서 이루어진다. 군인들은 전투나 작전 시행 전에 여러 번 상관에게 브리핑을 하는데 그와 똑같은 브리핑 슬라이드에 내용만 바꾸어서 전혀 다른 일을 보고하니 나 같은 민간인에게는 여전히 생소하다. 그리고 미국 국방부는 모든 사전 준비가 매우 철저하게 이루어진다. 한국으로 발굴을 나가는 팀의 준비 미팅에서는 만약 팀원이 다쳤을 경우에 행동반경 내 몇 킬로미터에 무슨 병원이 있고 그 병원의 시설은 어떠하며 주한미군과 어떻게 연계되는지 등등을 아주 자세히 알아둬야 한다. 브리핑 내용의 대부분이 가서 무슨 일을 할지보다 만약에 사고가 나거나 천재지변이 터질 경우의 대처법에 초점을 맞춘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는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었는데, 실제로 발굴 중에 심장마비로 급하게 이송해야 하는 사람이 생긴 걸 본 후로는 준비하는 게 맞지 싶기도 하다. (p.111-112)

 

 팀을 이끌면서 사람을 대하는 법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어떤 업무를 주었을 때 직원마다 그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이 다 달랐다. 내가 생각할 때 A에서 B를 거쳐 목표인 C에 도달하면 되는데 어떤 직원은 A에서 곧장 C로 가기도 했고, A에서 B로 갔다가 다시 A를 보고 C로 가기도 했다. 어떤 직원은 A에서 C까지 가는 모든 과정을 세세하게 알려줘야 했고 다른 직원은 A 이야기밖에 안 했는데 벌써 C에 가 있기도 했다.
 처음에는 직원들에게 내가 생각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랬더니 오히려 능률이 떨어지기도 하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순서와 방법도 달라서 내게 가장 합리적인 게 남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덕분에 지시한 방법을 팀원이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을 때도 일단 지켜보는 리더십을 배웠다. 나도 사람인지라 수시로 잔소리가 나오려 했지만 애써 꾹 누르며 기다렸다. 그러면 의외로 좋은 결과가 나오곤 했다. 뼈의 길이를 재는 법처럼 명백한 규칙에 대해서는 엄격하되 보고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써도 괜찮았다. 팀장도 팀원도 다들 성향이 달라서 서로 궁합이 잘 맞아야 분위기도 성과도 좋은 팀이 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 사실을 나는 직장에서 배웠다. (p.171-172)

 

 지금은 과연 눈알을 굴릴 때인가. 아니었다. 나는 웬만하면 눈알을 안 굴린다. 내가 설령 맞는 말을 하더라도 상대방의 기분을 확 상하게 하거나, 상대방이 틀린 걸 조목조목 짚어서 네가 얼마나 멍청한 소리를 하는지 보여주겠어 같은 식으로 나가면, 그 일에 관해서는 내가 옳을지도 모르지만 결국은 그 사람과의 관계를 망친다. 누구나 어떤 일을 할 때 자기 나름의 논리와 이유가 있다. 그게 내 눈에는 말도 안 될지 몰라도 섣불리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면 안 된다. 내가 하나씩 맞게 다 지적을 해도, 그걸 읽으면서 ‘그래, 내가 정말 멍청했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남들과 원활하게 지내는 것 역시 일 자체를 잘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일은 잘하는데, 다른 팀원들과 자꾸 부딪치는 직원은 나도 썩 내키지 않으니까. (p.184-185)

 

 청소의 장점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일이 끝나버리면 아쉬운데 청소는 늘 새로 할 곳이 있다. 생각지도 못했던 곳을 닦았는데 먼지가 하나도 없는 경우는 드물다. 냉장고는 사용할 때마다 조금씩 닦는 게 습관이 되어 따로 청소할 일이 없다. 음식 쟁여놓는 걸 안 좋아해서 딱 먹을 만큼 장을 봐 냉장고에 넣어두는 편이다. 가끔 부엌 찬장 속에 있는 걸 다 꺼내서 안 쓰는 것들을 정리하고 눅눅해진 과자를 버리고 찬장 구석구석을 깨끗이 닦아주면 속이 다 시원하다. 손세탁할 때 쓰는 빨래판의 울퉁불퉁한 부분에 낀 물때를 닦고, 청소기를 분해해서 그 속에 말려 있는 머리카락을 한 움큼 꺼내면 내 속까지 후련하다. 청소의 짝꿍이라 할 수 있는 정리도 즐겁다. 장 본 걸 꺼내어 필요한 곳에 줄 맞추어 예쁘게 넣어두면 바라만 봐도 뿌듯하다. 서랍에도 물건을 대충 채워 넣는 걸 안 좋아해서 빈 상자나 수납 상자를 이용해 정리를 한다. 책상 위의 펜도 안 쓰는 예쁜 접시 위에 올려놓으면 보기 좋다. 걸레도 각 잡아서 잘 접어 방향을 맞춰놓으면 기분이 좋다. (p.202-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