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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동물 / 김도희 / 은행나무

 

 그러나 인권 담론은 가장 큰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로 인해 비판받기도 한다. 서구의 근대적 자연관에 의거하여 인간을 다른 생물 및 모든 물질과 구별되는 유일한 존재로 인식하고, 인간의 가치만을 중요하게 인정하여, 인간 이외의 존재들을 인간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관점으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노예, 유색인종, 여성, 아동 등이 초기 인권의 우산 아래 들어오지 못했던 ‘비인간’이다. 초창기 인권 개념에서의 인간은 생물학적 백인 남성만을 지칭했기 때문이다. ‘동성애자(역시 남성에 한정)’에게 더 이상 사형이 선고되지 않게 된 것, 유대인에게 프랑스 시민의 자격을 인정한 것은 사회계약론으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1791년이다. 노예제가 완전히 폐지된 것은 1794년이었고, 모든 성인 남성에게 선거권이 부여된 것은 1848년 2월 혁명을 통해서였다. 여성은 프랑스혁명으로부터 200년 가까이 지난 20세기 후반에야 온전한 시민권을 얻었다. 이처럼 인간이라면 모두 똑같이 누린다는 인권 개념이 시대적·정치적 상황에 따라 얼마나 변화무쌍하게 바뀌어왔는지는 몇 가지 증표만으로도 쉽게 확인된다. (p.6-7)

 

 인간중심주의 사회에서 인간계(여기서 인간‘계’는 계통분류학적으로 쓴 것이 아니고 편의상 붙인 것이다) 내에서 여성, 아동, 장애인, 퀴어, 이주민 등이 소수성을 가진다면 생물계로 확장했을 때는 동물, 식물, 곤충, 미생물, 균이, 비생물계까지 확장했을 때는 사물, 기계, 인공지능이 소수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동물은 비인간으로 시야를 확장하는 가장 가까운 통로다. 니체가 말한 사유의 양심이 조금이라도 작동한다면 식물, 미생물, 사물, 기계로 옮아가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심지어 영靈 같은 것까지도). 그동안 이렇게나 비인간으로 둘러싸인 세계에 살면서 인간만 보며 살았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다른 세계와 조우하게 된다. 그 세계는 새로운 감각을 일깨워 주고,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안겨준다. 물론 이마저도 굉장히 인간중심적 관점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동물이 갖는 소수성이 드러낼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불화/불일치를 목도하며 자기투쟁을 하는 대리인으로서 그것이 길어낼 비인간에 ‘의한’ 정치를 기대한다. (p.13-14)

 

 동물보호법을 비롯한 지금의 동물 관련 법제는 ‘고통을 느낄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보호할 동물을 정한다. 동물보호법과 관련 법령이 이 법의 적용을 받는 ‘동물’을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개체로 한정하기 때문이다. 고통은 신경계가 자극되거나 손상됨으로써 발생하는 방어기제 같은 것이다. 고통을 느끼는(느낀다고 인정된) 동물은 척추동물인 포유류, 조류, (식용이 아닌) 파충류, 양서류, 어류가 있다. 바꿔 말하면 포유류, 조류, 파충류, 양서류, 어류가 아닌 동물들은 동물보호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고통은 일차적이고 즉각적이며, 다른 감각이나 감정에 비해 ‘알아채기 쉽기 때문에’ 기준으로 삼기 유용하다. 공감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상대의 고통을 보며 자연스럽게 동정과 연민을 느낄 테니 ‘동물보호’라는 목적에도 부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인권선언에 고문받지 않을 권리, 잔인하고 비인도적이거나 모욕적인 처우 또는 처벌을 받지 않을 권리가 포함된 것도 같은 이유일 터이다. 노예의 권리, 여성의 권리, 아동의 권리, 장애인의 권리 역시 이들을 둘러싼 고통에 반기를 들고, ‘탈고통’을 위해 시작된 권리투쟁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고통을 법문에 내세우는 지금의 동물보호법, 그리고 우리 사회는 충분히 동물을 보호하고 있지 못하다. 고통이라는 기준은 그 자체로 ‘동물이 고통을 느끼지 않게만 하면 된다’는(고통을 느끼지만 않는다면 무엇을 해도 괜찮다는) 명분이 되어 인간과 동물 사이의 위계와 차별은 물론 ‘고통을 느끼는 동물만이 보호할 가치가 있다’는 동물과 동물 사이의 위계와 차별까지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p.30-31)

 

 그러나 모든 그리스 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우리에게 ‘피타고라스의 정리’로 친숙한 수학자이자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제자들에게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신의 창조물이고, 윤회를 통해 인간도 동물이, 동물도 인간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채식, 절제, 침묵을 통해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의 이름을 딴 공동체에 입회하려면 수년간 채식, 절제, 침묵의 계율을 지키고 훈련해야 했다. 영혼이 인간과 동물을 구별 없이 오간다고 생각했기에 지위에 차이를 두지 않았고, 그런 점에서는 가장 급진적인 동물권 사상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그로부터 700년 뒤, 피타고라스의 유산을 이어받은 플루타르코스는 〈육식에 대하여(Of Eating Flesh)〉에서 “(잠시의 쾌락을 얻기 위한) 약간의 살점을 먹기 위해 우리는 그들에게서 태양과 빛을, 즐기려고 태어난 삶과 시간을 빼앗는다. 그리고 그 동물이 우리에게 보내는 비명소리는 불명확한 소음일 뿐이라고 여기며, 그것이 항의와 간청과 애원의 소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썼다. 그는 동물도 이성을 지니고 있다는 철학을 공유하며, 오히려 동물이 인간보다 용기·절제·지혜 면에서 나은 존재라고 설파했다. 그러나 동물의 도덕적 지위, 나아가 인간과의 평등한 지위를 인정하려는 견해들은 고대 그리스 문화가 암흑기로 접어들면서 1,000년 이상 잊힌 듯했다. 동물과 관련하여 후대 사상가들에게 주로 영향을 끼친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였고, 특히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아리스토텔리스의 견해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p.34-36)

 

 싱어는 동물을 좋아하지 않지만 반종차별주의를 역설했고, 카롱도 동물을 좋아하지 않지만 존중한다고 했는데, 이런 이들은 사실 얼마든지 있다. 소수자의 권리를 외치는 모든 사람이 소수자집단·계급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꼭 필요한 것인지, 혹은 사랑이란 건 너무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감정이 아닌지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도리어 묻고 싶다. 한 존재를 깊이 사랑해보지 않고, 신념이나 분노만으로 진정한 박애(보편적 사랑)가 가능한지. 흔히 말하듯 사랑에는 국경도 피부색도 상관 없다면, 어떤 종인지도 지워질 수 있다. 여기서 사랑의 의미는 통념적인 사랑과 같은 부분도 있지만 조금 다르기도 하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나의 삶에 침투하고, 대체불가능하며, 만나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또한 사랑은 수동적이지만 교통사고 같은 것만은 아니다. 사랑을 하려면 먼저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사랑은 상대방을 바꾸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나를 바꾸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에 비해 연결성이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불교에서 말하듯 살아가며 나 아닌 이를 한 명도(실은 나조차도) 제대로 만나지 못하는 것 같다. 그건 나와 다른 존재를 만나고 받아들일 준비,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준비를 할 의지나 여유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이러한 준비는 어떤 사랑을 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존중도 책임도 거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사랑의 상대에게 고통을 넘어선 기쁨을, 적극적 권리를 어떻게 누리게 할 것인가. 다르게 지각하고, 다르게 소통하고, 다르게 표현하는 존재들과 사랑하는 과정에서 나와 공동체는 분명 그전과는 다른 사유, 다른 윤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야말로 동물에 의한 정치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앞으로 편의상 동물권이란 용어를 자주 쓰겠지만, 칸트나 레건이 말하는 본래적 가치뿐만 아니라 고통을 넘어선 기쁨, 보다 적극적인 권리, 유대와 사랑을 포함하는 개념으로서의 동물권을 말하려 한다. (p.72-73)

 

 노예와 여성과 아동을 마음대로 사고팔 수 있던 시대, 주인이, 남편이, 부모가 아무렇지 않게 이들을 폭행하고 죽일 수 있는 존재였던 시대의 권리 투쟁은 이들의 법적 지위를 우선 ‘인간’으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2021년 9월 동물의 법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동물은 물건이 아님을 선언한 다음의 민법 개정안이 정부입법안으로 국무회의를 통과했고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다.

제98조의2(동물의 법적 지위)
①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
② 동물에 대해서는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물건에 관한 규정을 준용한다.

(p.80-81)

 

 이와 같은 이유로 국내에서도 동물에게 법인격을 인정해 달라는 소송은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주로 서식지 보존을 위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통칭 ‘자연물 소송’이라고 하는데, 법을 바꾸는 것이 어렵다면 판례를 만들어서 돌파해 보자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국내에서 자연물 소송으로 가장 유명했던 사건은 2003년 천성산 지역 터널 공사에 대한 공사착공금지가처분 재판일 것이다. 이 소송의 원고는 ‘도롱뇽과 친구들’이었는데, 대법원은 기각 판결을 내리며 “자연물인 도롱뇽 또는 그를 포함한 자연 그 자체로서는 이 사건을 수행할 당사자 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p.84)

 

 자연물의 법인격을 검토함에 있어 법원은 20년간 일관되게 현행법과 관습법에서만 근거를 찾고 있는데, 이것은 법의 오래되고 게으른 습관이다. 법의 판단의 근거는 그뿐만이 아니고 그뿐만이 되어서도 안 된다. 관습법, 조리(條理)도 법원(source of law)이 될 수 있으며, 외국의 입법례나 판례 등을 참고할 수도 있다. 국제연합(UN), 세계무역기구(WTO), 국제노동기구(ILO) 등 국제기구에서 맺은 수많은 조약, 협약, 협정들이 있고, 민법 제1조는 ‘법률에 규정이 없으면 관습법에 의하고 관습법이 없으면 조리에 의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게다가 법원의 보수적인 해석과 달리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우리나라에는 부동산을 소유하는 나무가 존재한다. 경상북도 예천군에 사는 ‘석송령’이라는 소나무는 수령이 무려 600년이 넘는 천연기념물 제294호다. 1927년에 이 마을에 살았던 이수목이라는 사람이 이 소나무 주변의 토지 1,000여 평을 석송령 소유로 등기했는데 이것이 받아들여져 토지를 소유한 나무가 되었다. 이후 석송령은 지금까지 소유 부동산에 대한 종합토지세를 내는가 하면 이 토지에서 생기는 금전적 이익을 모아 장학금을 조성하여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다. (p.86-87)

 

 한국 복지시설의 기원은 외국의 선교사들이 국내에 들어와 자선단체를 만들고 구호 사업을 시작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까지 종교 단체가 운영하는 복지시설이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는 이유도 그 영향이 크다. 그런데 복지시설은 본래 국가에서 설립하고 운영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는 복지에 대한 전문성도 없고, 계속되는 로테이션 속에 실무자가 지속성을 갖기도 어렵다 보니 전문기관에 위탁하는 경우가 많다. 대체로 국가나 지자체가 복지사업을 맡을 사회복지법인에 보조금을 주고, 해당 법인에서 복지사업을 수행하면 국가는 사업을 잘 수행하는지 관리·감독하는 식으로 역할 분담이 이루어진다. 이런 구조 탓에 과거에는 입소인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기초생활급여를 시설에서 착복하는 일이 많았다. 입소인 대부분이 기초생활수급자이기 때문에 수급비를 관리해 주겠다는 명목이었다. 형제복지원 사건 수사 중에 원장의 개인금고를 열었을 때도 현금 20여 억 원이 나왔다고 한다. (p.196-197)

 

 시설과 보호소를 다니다 보면, 사람들과 동물이 함께하는 곳들을 자주 마주치게 된다. 그동안 이렇게 모를 수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장애인 거주시설과 정신병원을 운영하는 어느 사회복지법인에서는 시설 근처에 축사를 운영하면서 동물들을 도축하는 일에 거주자들(보통 정신장애가 있지만 신체 능력이 뛰어나고 힘센 사람들)을 거리낌 없이 동원하고 있었다. 혼자 소 50명을 돌보고 축사 청소, 논밭 일까지 도맡아 하느라 매일 11시간씩 일했다는 어느 지적장애인은 중학생 때부터 일했지만, 한 번도 임금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 축사 주인은 기초생활수급비와 장애인 연금까지 매월 90만 원을 가로챘다. 그가 이렇게 빼앗은 돈이 수억 원에 이르는데도, 소송을 통해 돌려받을 수 있는 돈은 3년치 임금뿐이다. 사설 유기동물보호소의 소장은 외국인 노동자의 급여를 가로채 자신의 차명계좌로 빼돌렸다. 보호소 내 노동자 대부분은 임금이 체납된 상태였지만, 미등록 상태라 제대로 항의 한 번 못 하고 쫓겨났고, 체불임금을 받으려다가 체류 기간을 넘겨 외국인보호소로 보내졌다. (p.202)

 

 동물원 폐쇄 운동은 탈시설 운동과 매우 닮았다. ‘아픈 동물들, 돌연변이 동물들은 야생에서 살아남지 못하잖아’라는 이유로 동물원에 수용하자는 주장은 중증장애인에 대해 이들을 돌볼 인프라가 없어 지역사회에서 생활할 수 없으니 시설이 필요하다는 주장과 정확히 일치한다. 동물원에서 태어나 야생을 경험하지 못한 동물들은 좀 더 신중해야겠지만, 어린 동물은 최대한 훈련해서 야생으로 돌려보내고 남은 동물들이 번식하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금지해야 한다. 물론 돌려보낼 야생의 공간이 얼마 남지도 않았고 많이 망가졌기 때문에 동물들의 삶터를 복원하는 일도 병행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이를 핑계로 동물원을 유지해서는 안 된다. 동물원에 대한 행동풍부화(Behavioral Enrichment)를 통해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주자는 말은, 시설이라는 구조의 문제는 그대로 둔 채 나쁜 시설을 좋은 시설로 개선하자는 것과 근본적으로 같다. 동물들을 서식지로 돌려보내고 남아 있는 개체를 위해 앞 장에서 다룬 것처럼 동물에 대한 처우 개선 차원에서 단기적으로 실시할 수는 있어도, 동물원을 유지하자는 근거로 언급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돌연변이나 아픈 개체에 대한 치료와 돌봄이 필요할 수 있지만, 이들을 반드시 동물원에 데려와 전시하면서 돌봐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방사는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아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하지만, 적어도 야생동물 구조센터에서 구조하고 치료한 동물은 야생에 방사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p.205-206)

 

 이러한 구조가 유지되려면 ‘고기’를 소비하는 사람들 대신 동물을 살육하고 착취하는 노동을 수행할 대리인들이 필수적이다. 만일 제육볶음을 먹기 위해 직접 돼지를 죽여야 한다면, 사람들은 제육볶음을 먹을 수 있을까. 돼지 멱 따는 소리, 솟구쳐 흐르는 붉은 피, 공포와 슬픔으로 가득한 눈을 견딜 수 있을까.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루타르코스도 〈육식에 대하여〉에서 스스로 육식인이라고 생각하면 자신이 잡아먹으려는 대상을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영리한 인간은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한다. 소, 돼지, 닭을 대신 죽여줄 사람, 거위의 털을 뽑고 여우의 피부를 벗기는 일을 대신할 사람을 만들어 그 부담을 전가하고,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로 만들어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청부 도살은 주로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계층에게 외부화된다. 미국 노동부 작업안전위생관리국의 사고 보고서에 따르면 날아온 칼날에 정맥이 잘려도, 연육기에 걸려 팔이 절단돼도, 기계 체인에 걸려 목이 잘려도, 가죽과 살점을 분리하는 기계에 머리가 깨져도, 내장을 익히는 기계에 걸려 죽어도 정육 공장의 컨베이어는 멈추지 않는다. 이런 환경에서 분변에 오염되거나 쥐와 같은 다른 동물의 사체가 묻거나 치명적인 세균에 감염된 고기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청부 도살을 떠맡은 사람들은 죽이는 일이 일상이 된 환경에서 폭력에 점차 무감해지거나 해소하지 못한 감정들을 동물과 사람에게 퍼붓다가 결국 긴장과 고통을 마비시키기 위한 방어기제로 중독적·폭력적 행동을 하게 된다. 이는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이 호소하는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과 너무나도 닮았다. (p.223-224)

 

 배양육 산업을 보면 의도적으로 이슈를 만들어 투자를 유도하는 일, 가령 저명한 전문가나 인플루언서의 지원을 받아 주가를 폭등시키고, 천문학적인 연구비가 투여되는 일이 반복된다. 그 과정에서 채식이나 탈육식에 관한 논의는 빛을 잃는다. 배양육은 면죄부가 되어 채식, 탈육식을 가책 없이 외면하게 만든다. 동물복지농장도 마찬가지다. 인도적 축산은 공장식 축산의 대체제로 동물권단체와 소비자단체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식육 산업은 확장되었다. 사람들이 소, 돼지, 닭이 드넓은 초원에서 방목될 것이라는 환상 속에서 면죄부를 얻은 듯 마음 편히 고기를 먹게 된 것이다.
 배양육과 동물복지농장은 동물 착취나 육식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사라지게 만들고 면죄부를 줌으로써 동물을 자원, 원료, 대상으로 바라보는 종차별적 태도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종차별적 태도에 대한 철저한 성찰이 이뤄지지 않는 한, 육식을 비롯한 동물 착취를 해결할 수도, 육식주의를 바꿔낼 수도 없다. (p.244-245)

 

 감각·생각의 차이와 관련해서, 종종 논비건들은 비건들과 있을 때 비건들이 마음속으로 자신을 혐오하거나 도덕적으로 비난하고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내 주변의 비건들을 보면 자신도 논비건으로 오랫동안 살아왔으므로, 그동안 만들어진 신체와 감각을 바꾸는 일이 쉽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아쉬워할 수는 있으나 비건이 아니라고 해서 누군가를 쉽게 원망하지 않는다. 그건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하는 것과 같다. 다만 상대방이 비건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내게 비건을 권유, 심하게는 강요한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감각만큼은 알 것 같다. 그러니 기억해주기 바란다. 비건은 세상에 비건이 많아지기를 바라지만, 그렇다고 비건이 아닌 사람을 탓하거나 비난하는 건 애초에 비거니즘이 아니다. 무엇보다 지금과 같은 육식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100% 비건으로 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당연히 나도 완벽한 비건이 아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완벽한 1명의 비건보다 비건을 지향하는 100명, 1,000명의 사람들이 사회적으로는 훨씬 득이 된다. ‘비건지향’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도 그래서다. 그런 의미에서 비건들이 말하는 ‘비건세상’도 ‘비건지향사회’일 수밖에 없다. (p.290-291)

 

 국가가 정책적으로 채식을 장려하는 방안도 있다. 프랑스에서는 2021년부터 유치원 및 초·중·고등학교 급식에 매주 1회 이상 채식 메뉴를 포함하고, 국가에서 운영하는 기관의 구내식당과 공기업에서는 매일 채식 메뉴를 제공하는 기후 회복법(La Loi Climat)이 제정되어 시행 중이다. 그리하여 프랑스에서는 병원, 군대, 교도소에서도 매일 채식 식단을 의무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을 가장 먼저 시작한 유럽의 나라는 포르투갈이다. 포르투갈은 2015년부터 일찌감치 학교와 병원 등 모든 공공기관의 식당에서 매일 하나 이상의 채식 메뉴를 제공하도록 하여 채식선택권을 보장한다. 최근 뉴욕에서는 시장이 2030년까지 뉴욕시 기관 전체에서 식품 구매로 인한 탄소 배출량을 33%까지 줄이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육류와 생선, 계란, 유제품 등 동물성 단백질은 막대한 탄소를 배출하므로 동물성 식재료 구입을 획기적으로 줄임으로써 탄소 배출량을 줄이겠다는 계획이다. 한국에서는 몇 년 전 교사와 채식을 하는 학생과 학부모가 학교에서 채식선택권을 보장하라는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헌법재판소는 이에 대해 아무런 의견도 제시하지 않고 각하하였다. 하지만 이후 국가인권위원회 진정을 통해 국방부가 급식 방침을 개정하여, 적어도 군대에서는 채식이 가능해졌다. 서울시교육청도 ‘2021 그린(GREEN) 급식 활성화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일부 학부모와 축산업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 달에 두 번 채식 급식을 제공하고 있다. (p.294-296)

 

 동물해방물결은 ‘달 뜨는 마을’을 ‘제1호 비건 마을’로 거듭나게 하는 것을 다음 목표로 삼아 지역 주민들과 관계를 맺고, 군청과 협상하고, 마을을 설계하고, 소를 돌보고 있다. 소를 돌본다는 말은 고작 다섯 음절이지만 단순하지 않다. 소라는 종이 가진 신체적·정서적 특성부터 소의 습성과 성격, 소가 진화해온 역사와 살아온 환경, 소가 무엇을 선호하고 무엇에 강하거나 취약한지 등 하나부터 열까지 공부하고 맞춰갈 것투성이다. 소들을 돌보는 돌보미 가족과 동물해방물결 활동가들은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점점 소들과 소들이 먹는 밥, 소들이 자는 곳, 소들을 둘러싼 수많은 존재들과 상호돌봄의 역량을 늘려가고 있다. 가령 축사라는 ‘죽음의 시설’에서 ‘탈시설’한 소들은 콩과 옥수수만 먹지 않는다. 건초보다 수분이 많은 연초를 좋아해 우리는 연초를 준다. 소들이 좋아할 뿐 아니라 광합성을 많이 해서 이산화탄소 흡수량이 높다는 양삼을 재배해 주기도 했지만 썩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고, 바나나와 사과는 언제 주어도 환영받는다. 커다란 전용 긁개로 몸을 스르륵 빗질해 주면 나른하게 고양된 소리를 들려주고 무더운 날 물을 뿌려주면 펄쩍펄쩍 뛰며 좋아한다. 소들은 배를 바닥에 붙이고 엎드리거나 옆으로 누워 잔다. 따사로운 햇볕이 들면 밖에서 일광욕하는 것을 좋아하고, 비가 오면 당연히 비를 피하러 집으로 들어간다. 곧 소들의 산책로도 만들 계획이다. 수면 시간이 10시간 이상으로 꽤 길고, 낮잠을 자기도 하고, 코를 골기도 한다. 그밖에 언제 어떻게 배변을 하는지, 언제 즐거워하고, 언제 놀라고, 언제 공격적이 되고, 언제 관대해지는지 함께 부대끼면서 하나씩 습득한다. 소를 둘러싼 인간과 식물과 곤충과 미생물과 백신과 땅과 울타리와 연결감을 느끼며 서로 리듬을 맞춰간다. (p.298-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