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픽션 글쓰기 전설들 / 조문희 외 / 서해문집
책에 “동물들과 마주하면서 지냈던 시간은 나를 약자의 고통에 민감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다. 반대로 나는 무감각해졌다”라는 문장을 썼어요.
제가 ‘동물 농장’에 있을 때는 폭력이 이상한 일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그 메커니즘에 빨리 동화되는 게 중요했죠. 이를테면 동물의 등을 때린다거나, 케이지를 쳐서 말 안 듣는 동물에게 겁을 준다거나, 이런 일에 빨리 적응이 돼야 했어요. 안 그러면 동료한테 욕을 먹거나, 퇴근이 늦어져서 잠을 못 자니까요. 그 동네의 세계관이랄까, 그걸 확 빨아들이고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되더라고요. 나중에 농장을 떠나서는 알죠. 바깥 사회에서 글을 쓰고 관련 자료를 찾아서 읽다 보면, 농장에서의 기억을 되돌아보면, 그때 제 행동은 잘못된 거예요. 하지만 그 안에 있을 때는, 물론 느낄 때도 있지만, 대개는 안 느껴져요. 못 느끼게 돼요. 그런 변화가 처음에 주기적으로 반복됐던 것 같아요. ‘내가 그때 왜 그랬지?’ 싶다가도, 막상 또 그 세계에 들어가면 ‘다들 이렇게 하는 거지’ 싶죠. 잠깐 경계심이 들다가도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다 일의 막바지엔 이런 생각까지 들어요. ‘이렇게 하는 게 당연한 건데, 이걸 가지고 책을 쓰는 게 가능한가? 말이 되나?’ (p.32)
현장 특성상 책에 폭력적인 장면도 많이 나오잖아요. 돼지를 패대기치거나 개를 구타, 해체하는 장면처럼요. 욕설이나 성적인 언어도 툭툭 등장하고요. 표현에 대한 고민은 없었나요?
어떤 장면을 가장 명료하게 잡아내 생생히 묘사하는 게 제게는 중요했던 것 같아요. 욕설이라고 해도 사회적 기록이라는 생각이 더 컸던 거죠. 폭력적인 장면 묘사는, 글쎄요. 저는 작가의 실수나 잘못을 담아내는 틀로 생각하고 있어요. 르포가 어떤 교훈이랄까, 메시지를 담아낼 수 있다면 오직 작가의 잘못된 행동을 그대로 보여줄 때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작가가 아무리 간절해도 사회적, 윤리적 주장을 내뱉는 것만으로는 어떤 독자의 마음도 뚫고 들어가지 못할 거예요. 중요한 것은 독자 스스로 그러한 사회적, 윤리적 고민을 해보게끔 만드는 것일 텐데요. 저는 제 못난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독자를 같은 지점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제 그런 행동을 보면서 독자들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기대하는 거죠. ‘아, 저 사람은 왜 저기서 저런 식으로 처신하지? 저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나? 나라면 저 상황에서 이렇게 할 것 같은데’ 하는 식으로요. 이런 계기가 있어야 텍스트 외부의 독자가 텍스트 안으로 쑥 들어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p.34-35)
인터뷰는 질문이라고 보통 생각하잖아요. 인터뷰 관련 책도 다 질문을 어떻게 잘 할 것인지를 다루죠. 그런데 저는 질문만큼 중요한 것이 잘 듣는 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이야기는 질문과 무관하게 나오는 것 같거든요. 어느 순간 그 사람의 곁에, 그 자리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듣게 되는 이야기도 있잖아요. 좋은 질문이 좋은 답을 이끌어낸다고들 하는데, 좋은 질문을 하기 위해서도 먼저 잘 들어야 해요. 그런데 기자들이, 역설적이지만 잘 안 듣잖아요. 질문하는 법은 수없이 훈련하지만 누구도 듣기를 가르쳐주진 않죠. 때로 듣고 싶은 걸 듣기 위한 질문을 준비하고, 질문을 던지면서 다음 질문을 생각하기도 하고요. 질문을 잘해서가 아니라 신뢰하기 때문에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 신뢰는 결국 시간으로 쌓는 것일 테고요. 저는 빨리, 먼저 가는 기자이기보다는 가장 오래 머물고 늦게 나오는 기자이고 싶어요. 이걸 기술이나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보다는 그렇게 하느냐 하지 않느냐 차이 같아요. (p.59-60)
이상하게 느낄 수도 있는데, 저는 사람들이 글을 너무 빨리 읽고 지나간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소설이든 논픽션이든 기사든, 글이라면 걸리는 것 없이 쭉쭉 읽히도록 쓰는 게 기본이긴 하죠. 하지만 ‘가난’ ‘무연고’ 같은 단어들을 간단히 읽고 지나치는 게 맞나 의문이 있어요. ‘무연고 사망자’라는 표현을 언론이 자주 쓰잖아요.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을 묘사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말인데, 언제부터인가 삶과 죽음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매끈한 단어가 돼버린 것 같아요. 오히려 너무 자주 쓰이니까 ‘지겹다’는 반응도 나와요. 단어의 의미가 필요 이상으로 평범해졌고, 정작 속뜻은 고인이 된 당사자들이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저는 어떤 단어, 규정의 무게와 두께를 독자들이 한 번쯤 멈춰 서서 생각해 보도록 만들고 싶었어요. (p.61)
남산과 관련된 개인적 경험이 집필 동기가 됐던 건 아닌가요?
당시 어떤 선배가 ‘우리가 펜을 들고 있는 한 반드시 써서 복수를 해야 한다’고 말하긴 했어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어요.
대학 때 간첩이 아닌 사람들이 창자가 터지도록 얻어맞아 죽는 사건을 봤어요.(1974년 인민혁명당 사건) 문명대국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단 말이에요. 그들을 신원(伸冤)하기 위해서라도 누군가는 기록으로 남겨야 하지 않겠어요? 직접 운동을 해서 감옥에 가진 않았지만 정의로운 사람들이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도전에 대해 공감했죠. 하지만 세월이 지나니 그것들도 다 묻히고 건망증처럼 휘발되어 버리는 거죠. 남산 정치의 연장선에서 전두환, 노태우가 집권했는데 이렇게 가도 좋은 걸까. 그게 출발점이었어요. (p.160-161)
‘알려졌다’ 같은 표현 없이 기사를 쓰려면 취재가 너무 힘들어지지 않나요?
그렇죠. 하지만 애매모호하게 쓰면 읽히지 않아요. 그렇게 쓰면 제가 읽어도 재미가 없거든요. 저는 제 기사가 재밌으면 좋겠어요. 후배들한테도 강조해요. ‘팩트 뒤에 숨지 말라’고. 모호하게 쓰지 말고 이 사람이 이랬다, 저랬다, 단정하라고. 그렇게 쓰려면 한 발 더 깊이, 확실하게 취재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어려워요. 아시겠지만 취재란 게 늘 성공하진 않잖아요. 다행히 저희는 시간이 있어요. 저희가 취재하려는 게 일반적이고 평범한 사건들은 아니잖아요. 당사자들이 취재를 거부하고 반감을 갖고 경계하는 것, 당연한 거예요. 사람 심리가 그래요. 그래서 이번에 안 되면 다음 주, 그래도 안 되면 몇 달 뒤, 이렇게 꾸준히 시도하는 거죠.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 비교적 많다는 게 다른 매체와 다른 점이죠. (p.172-173)
그런데 그런 기사들은 다른 기자도 다 같이 보는 거 아닌가요?
그 지점이 제가 남들과 다른 것 같아요. 동료 기자들을 보면서 느꼈어요. 자기 세계 안에서 사람들은 비슷하게 생각하려고 해요. ‘똑같아지려는 욕망’이 있다는 거예요. 정치부 기자 시절 매일 아침 기자실에서 신문을 볼 때마다 느낀 거예요. 다 똑같았어요. 그렇게 열심히 신문을 보는 기자들이 다 ‘어떤 새로운 기사를 써야지’가 아니라, ‘어떤 기사를 놓쳤나’ ‘뭘 물먹었나’만 보는 거예요. ‘쟤가 이거 썼으면 나도 이거 써야지’ 하는 사고방식이죠. 기자들을 가만 보면 평균이 되려는 욕망이 있는 거 같아요. 튀지 않으려는 거 있죠?
어떤 출입처든 우리나라 언론사 대부분이 이래요. ‘쟤는 이거 썼는데 너는 왜 이거 썼어?’ 이렇게 갈구지, ‘너, 왜 쟤랑 똑같이 썼어?’ 이렇게 갈구지 않거든요. 다른 데서 했으면 우리도 해야 된다. 딱 이거예요. 저는 남들이 뭘 썼는지보다 거기 나오지 않는 내용들, 사건의 이면이 항상 궁금해요. 이 사람은 왜 저랬을까, 저 사람은 왜 저랬을까 하고요. (p.179-180)
책을 집필할 때 영상화를 함께 고민한다는 게 익숙한 개념은 아닌 것 같아요. 특히 아직 제대로 된 논픽션도 많지 않은 한국의 상황에서는요. 영상화를 고민하는 것은 논픽션 작법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뒤 책을 쓸 때 해도 되는 게 아닐까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영화적인 논픽션’이라는 표현을 쓰면 자주 듣는 반론이 있어요. ‘상업 드라마나 영화가 되는 인물이나 사건만 다루는 건 상업성만 좇겠다는 것이냐’라는 반론인데, 그렇지 않아요. 어떤 실화 인물이나 사건이 ‘영화적’이라는 것은 ‘돈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실은 ‘더 인간적인 의미를 가진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드라마적인 논픽션을 고민할 때 취재법과 접근법, 관점이 데일리 기사와 달라집니다. 영상적 관점은 사후적으로 택하는 것이 아니라 취재 단계에서 처음부터 유기적으로 연결된 것이죠.
저는 영상화를 고민하는 게 논픽션을 제대로 쓰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앞서 거론한 것처럼 이야기 논픽션에서의 기본은 장면과 캐릭터입니다. 영상 제작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도 이 두 가지죠. 드라마와 영화를 상상하면 당연한 얘기예요. 캐릭터는 주연과 조연 등 개성 있는 등장인물이고, 장면은 화면에서 보여지는 모습 그 자체죠.
하지만 이런 장면과 캐릭터 묘사는 일반적인 데일리 기사나 지식교양서에서는 보이지 않는 요소죠. 기사나 논문 같은 글의 단위는 메시지이기 때문이에요. 메시지가 중심인 글은 장면과 캐릭터가 없으니 영상으로 만들 수가 없겠죠. 논픽션은 소설과 마찬가지로 글을 이루는 기본 단위가 장면이라고 했죠. 흥미로운 캐릭터를 가진 인물이 장면 속에서 움직이죠. 영화도 같아요. 완성도 높은 이야기 논픽션을 쓰는 것 자체가 영상화의 가능성도 높다는 것이에요. (p.246-248)
실화를 소재로 했더라도 모티프만 활용한 픽션과 스토리 논픽션은 다른 종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둘 사이의 경계가 흐릿하다는 관점을 가진 창작자들도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요. 가령 다큐를 ‘팩추얼 드라마’라고 부르는 분도 늘고 있죠. 하지만 저는 여전히 실화 모티프 픽션과 논픽션은 경계가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이에요.
극적인 논픽션은 실제로 벌어진 사건을 다룬다는 힘이 있어요. 실화 모티프 픽션에는 없는 힘이죠. 논픽션의 매력은 익숙한 실존 인물과 실화 사건에서 낯선 깨달음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사실적인 픽션이라도 이런 효과는 내기 어렵다고 봐요. 픽션의 매력과 강점도 있죠. 픽션과 논픽션은 서로 다른 장르라는 얘기예요.
개연성 차이도 있어요. 논픽션 대가이자 소설가인 톰 울프(Tom Wolfe)는 ‘픽션은 개연성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 오늘날 픽션의 문제다. 그리고 개연성은 9·11 테러 같은 사건을 본 사람들이 처음 떠올릴 단어는 아니다’라고 썼어요. 미국 뉴욕에서 벌어진 테러가 현실에서 일어난 법한 개연성 있는 사건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현실의 인물과 사건이 픽션 작가들의 ‘개연성’을 규정하는 데 역설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그런 시대예요.
논픽션은 그런 일을 고민할 필요가 없죠.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해도, 실제 벌어진 일을 쓰는 것이기 때문에 개연성을 직접 설명할 필요가 없어요. 다만 개연성이 아니라 그 사건과 인물의 ‘왜’를 충분히 취재해서 담아야겠지만요.
논픽션을 쓰려는 기자들은 논픽션과 소설의 차이만큼이나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단신 뉴스와의 차이를 고민해야 해요. 뉴스의 표면에서 보이는 것과 다른 각도에서 다른 깨달음을 주는 것이 논픽션의 역할이니까요. (p.260-261)
《1968년》도 역사 논픽션이죠. 역사라는 건 결국 기록하는 것이잖아요. 이 책을 쓰기 위해서 기록된 역사를 찾아보기도 하고, 기록되지 않은 것들을 정리해 종합하면서 결국 기록으로 남기게 됐고요.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한국군이 저지른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에 대해 ‘베트콩의 자작극’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런 주장을 증명하는 자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반대로 민간인 학살은 수많은 증언과 자료들이 남아 있어요. 한국군이 지나간 다음 촬영된 퐁니·퐁녓 마을 사진에 여성들과 어린아이들의 참혹한 죽음이 담겨 있어요. 이곳은 심지어 발포 제한 구역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의혹이 있다’고 하거나 ‘자작극일지 모른다’고 하는 것은 억지로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니면 피해자들을 당연히 죽여도 되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어떤 식으로 해석해도 학살을 부인하거나 정당화하거나 책임을 면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런 사실을 다시 기록으로 남겨놓는 것이 제가 하려 한 작업이죠.
과거를 기록한다는 것은 결국 시간과의 싸움입니다. 지금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참 많잖아요.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의 목격자와 생존자, 참전군인 등 많은 사람이 지금 세상을 떠났어요. 조금만 더 일찍 만났다면 더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가 있습니다. 2001년에 퐁니·퐁녓 취재할 때 저는 그 현장에 딱 하루 갔어요. 그보다 더 오래 머물거나 자주 갔다면 좀 더 생생한 기록을 남길 수 있지 않았을까요. 당시도 많은 피해자와 목격자가 사망한 뒤였지만, 지금보다는 더 많은 이들이 생생한 이야기를 증언해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아쉬워요. 그래서 기록은 타이밍이 중요해요. 기억이란 것은 시간이 지나면 변하기도 하고 잊혀요. 사람의 기억은 퇴색하고 씻겨 내려가는 것이니 더욱 진지하게 다뤄야 하죠. 기록한다는 것은 결국 시간을 놓치지 않는 것이에요. (p.316-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