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를 사랑하는 기분 / 정부희 / 동녘
“미국의 어느 법학자가 있었어요. 그는 정년 후에 본인의 평생 직업을 버리고 하고 싶은 일을 했어요. 그 하고 싶은 일이 뭐냐 하면 곤충 연구예요. 쉬지 않고 열심히 연구한 덕에 여든 살 넘어 곤충 전문가가 되었어요. 그 법학자에 비해 엄청나게 빨리 시작하는 거니 용기를 가지세요.”
‘딱정벌레’는 말 그대로 날개가 딱딱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딱정벌레는 앞날개 2장, 뒷날개 2장으로 모두 4장의 날개를 가지고 있는데, 앞날개는 매우 딱딱해 ‘딱지날개’라고도 부른다. 딱정벌레는 딱지날개를 비롯한 몸의 피부가 매우 단단하다. 몸을 강력한 외골격이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외골격은 피부를 보호해줄 뿐만 아니라 뼈 구조를 유지해주며 운동 기능도 있다. 외골격의 주성분은 키틴과 단백질이다. 다당류의 하나인 키틴은 외골격을 튼튼하면서도 탄력성 있게 만들어주는데, 가장 바깥층 각피를 ‘큐티클’이라고 한다. 이 외골격 물질은 양잿물에 끓여도, 산성 물질에 담가놔도 녹지 않을 정도로 질기다.
딱정벌레는 이렇듯 단단한 피부 덕분에 나무껍질 아래, 모래 속, 흙 속, 식물 위 등 사는 곳을 다양하게 넓혀나갔다. 그래서 딱정벌레목의 수는 약 38만 종(35만 종으로 추산하는 학자도 있다)이나 되며, 곤충의 40퍼센트를 차지한다. 이는 지금까지 지구에 알려진 생물 종의 5분의 1이 넘고, 동물 종의 4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딱정벌레목의 종 다양성은 매우 높다.
잎벌레는 식물의 잎을 먹는 초식성 곤충으로, 흥미롭게도 대부분의 종들은 좋아하는 먹이식물을 정해놓고 먹는 편식쟁이다. 이를테면 좀남색잎벌레는 소리쟁이 같은 마디풀과 식물만 먹고, 버들잎벌레는 버드나무 잎만 먹는 식이다. 여러 종의 식물들이 어지럽게 섞여 있어도 잎벌레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먹이식물의 냄새를 귀신처럼 잘 맡기 때문에 다른 식물을 먹을 확률이 거의 없다. 만일 다른 식물을 먹으면 그 식물의 독성을 소화시키지 못하거나 중독되어 죽을 수도 있는데,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식물의 입장에선 꽃을 만들려면 비용이 굉장히 많이 든다. 잎사귀가 부지런히 광합성을 해 저장해둔 영양분 중 많은 양을 꽃피우는 데 투자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을 중매해줄 곤충을 불러들이려면 그런 것쯤은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식물의 노력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많은 곤충들은 푸짐하게 차려진 꽃 밥상에 날아온다. 꿀벌, 나비류, 꽃등에류, 꽃하늘소류 등 다양한 곤충들이 화사하게 치장한 꽃을 들락거리며 꽃 식사를 한다. 식물이 많은 비용을 투자해 만든 꽃은 아이러니하게도 곤충에게는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고마운 식량이다. 특히 꽃가루와 꽃꿀에는 탄수화물뿐만 아니라 단백질, 지방, 비타민, 유기산 등 영양분이 많다.
복수초 꽃은 꽃 자체가 오목거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꽃잎이 포개져 암술과 수술을 에워싸고, 꽃의 한가운데가 둥그스름하게 들어가 있다. 이때 꽃잎들이 병풍처럼 겹겹이 늘어서서 태양열을 꽃 안에 모으고, 이렇게 모인 태양열을 오목하게 들어간 꽃 한가운데(수술과 암술이 있는 부분)로 다시 모은다. 그래서 꽃 안은 난로를 피운 것처럼 따뜻하다. 더구나 암술과 수술이 피어날 때 물질대사로 생기는 열까지 보태지면 꽃 안은 더욱 훈훈해진다. 꽃 안의 온도는 바깥의 온도보다 최소한 5~7도 정도 높아, 추위에 약한 변온성 곤충들에게 충분히 따뜻한 휴게실이 되어준다.
특정 식물을 먹이식물로 정해놓고 먹는 곤충은 잎벌레과(딱정벌레목), 거위벌레과, 나비와 나방의 애벌레, 진딧물 등 꽤 많다. 그래서 식물만 봐도 그 지역의 곤충지도를 대충 그릴 수 있다. 마침 길옆에 버드나무 몇 그루가 쭈르륵 서 있다. 버드나무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곤충들이 북적댄다. 실제로 버드나무 앞에 한나절만 서 있어도 스무 종 이상의 곤충을 구경할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곤충에 처음 흥미를 갖게 된 분들께 버드나무를 찾아보라고 권한다. 버드나무의 대표 곤충은 봄에 볼 수 있는 버들잎벌레(딱정벌레목 잎벌레과)이다. 버들잎벌레는 낙엽더미 속이나 나무껍질 아래에서 겨울잠을 잔 뒤, 버들잎이 돋아나는 봄이 되면 양지바른 쪽 버드나무를 찾아온다.
몸길이가 6밀리미터밖에 안 되는 버들잎벌레는 수많은 나무 중에서 오로지 버드나무를 귀신처럼 찾아내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 버드나무를 찾기 위해 여러 감각기관을 총동원하는데, 특히 더듬이나 털 등을 통해 버드나무가 내뿜는 냄새를 맡는다. 버드나무만이 갖는 독특한 냄새의 정체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내뿜는 독성 물질(방어 물질)이다. 그중 하나는 아세틸살리실산으로, 오늘날 필수 비상약인 아스피린의 원료이다. 제약회사 바이엘은 진통 해열제인 이 아스피린 하나로 백 년 가까이 스타덤에 올라 있으니 버드나무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에게는 구세주 같은 이 진통제 성분이 곤충들에게는 치명적인 독약이다. 하지만 버들잎벌레는 그 독성 물질의 냄새를 먹이 찾는 수단으로까지 이용한다.
곤충의 서식지는 다양하다. 바꾸어 말하면 곤충마다 먹는 밥이 달라 서식지가 다양한 것이다. 동물처럼 식물도 때가 되면 죽는데, 죽은 나무는 곤충들에게 중요한 밥이다. 하늘소 애벌레, 비단벌레 애벌레, 사슴벌레 애벌레, 거저리 애벌레 등 수많은 목식성 곤충들이 죽은 나무를 찾아와 썩은 나무 조직을 먹고 산다. 잠시 머무는 게 아니라 약 10개월의 애벌레 시절 동안 나무 속에 틀어박혀 산다. 죽어 쓰러진 나무는 곤충들의 밥상이자 쉼터인 셈이다. 그들은 썩은 나무 조직을 먹으면서 자신의 몸도 살찌우지만, 나무를 잘게 분해시켜 또 다른 식물의 거름으로 되돌려준다.
요즘 공원, 도로 옆, 휴양림 등에서는 환경미화와 탐방객 안전을 이유로 숲속 또는 산책길의 쓰러진 나무들을 말끔히 치운다. 나무를 삶터로 삼는 곤충들은 영문도 모른 채 어느 장작 숯불구이 식당에서, 어느 집의 화목 난로 속에서, 소각장에서 화장당하고 있다. 숲 곤충이 사라지면 죽은 나무를 누가 분해할까. 죽은 나무를 치우는 건 살상이다. 그저 내버려 두면 죽은 나무 주변의 생태계는 알아서 잘 돌아간다. 죽은 나무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작은 생태계가 깨지는 순간, 침묵의 숲이 되는 건 시간문제다.
학위 과정 중에는 학교 간 학점교환제를 이용한 적이 있다. 연구에 꼭 필요한 과목인데 개설되어 있지 않은 경우, 이 제도를 이용하면 개설된 학교에 가서 공부할 수 있다. 나는 한 학기 동안 매주 어느 지방 대학교에 개설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오가며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 꼬박 하루를 소비해야 했다. 게다가 나는 나이가 많다 보니 어느 강의를 듣든 간에 첫날에는 담당 교수를 찾아가 인사를 했다. 그날도 강의 시작 전에 담당 교수실을 찾아 신고식을 했는데, 처음 만난 담당 교수는 나와 나이가 엇비슷해 보였다. 간단하고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는 도중, 의외의 질문을 받고 매우 당황했다.
“자녀가 몇이에요?”
“아들 둘입니다.”
“애들은 어찌하고 이리 돌아다니십니까?”
너무 당황해서 말문이 막혔다. 송곳보다 더 아픈 질문에 순간적으로 나는 두 아들에게 죄인이 되어 자괴감이 들었다. 내가 표본을 확보하기 위해 야외채집을 다니고, 여러 기관의 표본실을 찾아다니고, 지방의 대학까지 내려와 강의를 듣는 것이 그 교수의 눈에는 ‘돌아다니는 것’으로 여겨진 모양이다. 아이를 키우는 여성은 자신의 일을 위해 돌아다니지 말고 집에서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말로 들렸다. 더군다나 당시 큰아들은 대학 입시를 앞둔 고3이었기 때문에 심장이 찔린 것처럼 아팠다. 두 아들이 혹독한 사춘기를 보내는 것이 다 내 탓인 것만 같아 하루에도 몇 번이나 학업을 중단할까 말까 고민하며 자학하던 시기라 더 그랬다. 그 교수는 별 뜻 없이 내뱉은 말이었겠지만, 이미 자책감에 시달리던 나는 내적 갈등에 휩싸였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대학원생들과 책임연구자가 모두 모여 있는 자리에서, 자문위원인 A 박사가 해당 과제에 대해 자문하면서 나를 존경한다고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그 순간 모든 참가자들의 시선이 내게 향했고, 나는 갑작스러운 칭찬 모드에 당황했다. 딱 거기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그 다음 발언이었다.
“회의 끝난 후에 정 박사님께 물어봐야겠어요. 언제 살림하고, 언제 아이 돌보고, 언제 이 많은 연구를 하는지 말이에요.”
참가자들은 박장대소했지만 나는 불쾌했다.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이 고스란히 묻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주부가 아니라 연구자다. 아직도 남성 연구자들은 여성 연구자를 진정한 연구자로 대하지 않는다는 걸 그때 새삼 깨달았다. 왜 ‘여성’에게 ‘유리천장’이라는 단어가 따라다니는지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가사일과 연구를 병행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즉, 주부와 연구자 역할을 둘 다 잘할 순 없다. 어느 하나를 포기하지 않으면 둘 다 부족할 수밖에 없다. 나는 주부를 포기한 지 오래였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편견은 피나는 노력을 통해 실력이 쌓이면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느슨하게 연구했다간 그 편견이 언제 떠오를지 모르기 때문에 한시도 연구를 게을리한 적이 없다.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하며 얻은 나만의 경험은 뒤에 올 후배들에게 틈날 때마다 전해준다. 또한 내 개인의 역사가 그들의 거울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 지금껏 곤충을 분신처럼 달고 산다. 험한 길을 먼저 헤쳐온 내가 탄탄한 실력을 갖춘 연구자가 되어야, 나와 비슷한 상황에서 출발하는 이들에 대한 편견이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숲속은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숲 바닥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깜깜하다. 그때 운문산반딧불이 수십 마리가 나와 깜박깜박 반짝반짝 불춤을 춘다. 초여름밤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 해도 운문산반딧불이와의 만남이다. 경상남도 운문산에서 처음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깜빡이 비상등을 켜고 달리는 자동차처럼 영롱한 불빛을 내면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휘익 날아가는 반딧불이의 반짝임이 얼마나 현란하고 강렬한지, 너무 아름다워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감히 손전등을 켜지 못하고 한자리에 서서 하염없이 감탄사만 연발하며 바라본다. 한 마리당 1분에 50번 이상 깜박이니, 수십 마리에서 수백 마리가 동시에 불빛을 내면 숨이 멎을 정도로 신비롭다.
반딧불이의 불춤은 우리나라 어느 곳보다 제주도 곶자왈에서 압도적이다. 개체수도 많거니와 상록의 키 큰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면서 수관부가 하늘을 가리고 있어 숲속이 그야말로 칠흑같이 깜깜하기 때문이다. 습도가 높은 탓에 반딧불이 애벌레의 밥인 달팽이류가 많은 것도 한몫한다. 보통 밤 10시가 넘어가면 곶자왈 숲속에서 반딧불이들이 불춤을 추기 시작하고, 밤 11시부터 새벽 2시 사이에 절정을 이룬다.
사실 대중서를 쓰는 일은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 가장 버거웠다. 책 원고의 작업은 논문 작업보다 열 배 이상 힘들다. 그렇다고 논문 작업이 쉽다는 것은 아니다. 논문 한 편이 나오기까지는 채집부터 원고 작성까지 피눈물 날 만큼 혹독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럼에도 책 원고 쓰는 게 더 어렵다. 논문은 내가 연구한 결과를 학회지의 형식에 맞춰 일목요연하게 작성하면 되지만, 책 원고는 누구든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전문적인 내용을 일반인의 눈높이에 맞춰 여러 번 가공해야 한다. 어떤 날은 한 줄도 못 쓴 날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지인, 지도교수, 동료 곤충학자, 학계의 원로 등 많은 사람의 응원과 부추김에 용기를 얻어 틈틈이 시간을 냈다. 나는 새벽형이라 새벽 4시 전이면 저절로 눈이 떠지는데, 동트기 전의 시간은 나에게 신기에 가까운 맑은 기운을 선물한다. 그 덕에 재작년에, 작년에, 지난달에, 일주일 전에, 엊그제 산과 들에서 만난 곤충들을 책상 위로 불러내 그들과 조곤조곤 나누었던 대화를 글로 옮겼다. 새벽마다 곤충들과 대화하는 호사를 누리니 그저 행복했다. 천일야화 같은 곤충 이야기가 새벽마다 내 컴퓨터에 쌓여갔다.
그런 시간들이 축적되면서 내 인생에 놀랄 만한 반전이 일어났다. 인문학 골수분자인 내가 자연에 눈을 뜬 것이다. 자연이나 생태 관련 분야는 아이들 몫이라고 생각했는데, 가랑비에 옷 젖듯이 대자연이 몸과 마음속에 스멀스멀 기어들었다. 쫓아낼 수도 없을 정도로 자연에 매료되어가고 있었다. 길가에 올망졸망 핀 야생화, 경쾌하게 지저귀는 새소리, 땅속에서 불쑥 솟아오른 매혹적인 버섯, 계곡물을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 들이 어느덧 내 속에 들어와 나와 하나가 되어갔다.
큰 계기는 이른 봄 언 땅을 뚫고 고고하게 핀 처녀치마 꽃과 맞닥뜨릴 때였는데, 이후부터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식물에 관심이 생겨 전국의 산과 들을 누비며 식물 공부를 했다. 지금이야 도감이 풍년이지만 그 당시는 흔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야생화 이름을 몰라서 애를 태우기도 했다. 식물도감을 어렵게 구해 식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알아갔다. 다행히 야생화는 원래 피었던 자리에서 또 피고 지니, 해마다 그 자리에 가고 또 가면서 야생화의 매력에 푹 빠져 살았다. 마치 주술에 걸린 듯 야생화에 미쳐 몇 년을 보냈다.
매미가 땅속에서 기어 나와 날개돋이(우화)를 하는 경이로운 순간을 한 번이라도 본다면, 그 벅찬 감동은 무엇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차오른다. 매미의 날개돋이를 보려면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 여덟 시쯤이 적당하다. 매미는 공원, 아파트 화단, 산, 들판 등 어디에나 쌔고 쌜 정도로 많으니 시간에 맞춰 아주 천천히 걸으면서 나무줄기를 살피면 날개돋이 장면을 구경할 수 있다.
운 좋게 이 순간과 마주한다면 절대로 괴롭히면 안 된다. 휴대폰으로 촬영한다고 불빛을 과도하게 비춰도 안 되고, 건드려도 안 된다. 그저 숨죽이고 바라만 봐야 한다. 날개돋이 과정은 보통 한 시간 넘게 진행되는데, 중간에 손으로 잡거나 괴롭히면 중단한다. 물론 우화에 실패한다고 죽는 건 아니고, 장애를 갖게 된다. 신이 허락한 시간 동안 불구의 몸으로 살다 죽는 것이다. 매미 본연의 습성대로 살지 못하니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어떤 사람들은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를 원망한다. 가뜩이나 여름밤은 무더워 잠을 설치는데 매미가 밤늦게까지 울어대니 짜증낼 만도 하다. 심지어 새벽부터 울어대는 매미가 꿀맛 같은 아침잠도 훼방을 놓으니, 사람들은 매미 울음소리 때문에 시끄러워 죽겠다며 화를 낸다. 그러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주행성인 매미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우는 이유는 사람에게 있다. 조상 대대로 낮에만 노래해온 매미 앞에, 탄생 순서로 보면 후배인 인간이 별안간 나타나 전깃불을 발명했기 때문이다.
전 생애를 물속에서 사는 하루살이 애벌레는 조류(algae)나 식물 부스러기를 먹고 산다. 그 자신 또한 수많은 물속 생물의 먹이가 되므로 담수 생태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종마다 사는 곳이 다양해 물속 환경과 수질오염 정도를 가늠하는 지표종으로 이용된다. 차갑고 깨끗한 계곡에서 사는 애벌레, 완만히 흐르는 강물에서 사는 애벌레, 퇴적층이 많거나 오염된 물에서 사는 애벌레 등 종에 따라 애벌레의 서식지가 달라서 물의 오염 정도를 판단할 수 있다.
꼽등이는 우리 주변을 깨끗이 청소해주는 환경미화원의 역할을 도맡아 한다. 잡식성이라 아무거나 잘 먹는다. 특히 작은 생물의 사체, 썩은 열매나 식물, 음식쓰레기 등을 가리지 않고 먹어치운다. 그것도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밤에 먹는다. 야행성이라 그렇다. 모든 생명은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는데, 고맙게도 꼽등이나 파리 같은 분식성 곤충들은 사체를 먹어치우고 분해해서 식물의 거름으로 되돌려준다. 생태계에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존재이다.
더구나 꼽등이에겐 독이 없어 사람에게 아무런 해를 주지 않는다. 사람이 먹는 식량이나 채소는 입에도 안 댄다. 겁도 많아서 사람들을 보면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재빨리 도망친다. 게다가 아무 힘이 없어 연가시에게 꼼짝없이 기생당하는 피해자이다. 연가시는 곤충이나 거미 같은 절지동물에게만 기생하는데, 호모사피엔스에게도 기생한다고 오해받는다. 연가시는 결코 척추동물인 호모사피엔스에게 기생하지 않는다. 그러니 누명 쓰고 사는 꼽등이는 얼마나 억울할까. 역지사지다. 내가 한 번쯤 곤충의 입장이 되어보면 곤충 한 마리 한 마리 소중하지 않은 게 없다.
다행히 우리나라에 사는 애벌레들은 독나방과 쐐기나방만 빼고 몸에 독성이 없다. 북슬북슬한 애벌레의 털을 만져도 두드러기도 생기지 않고 그저 멀쩡하다. 그런데 징그럽다는 이유로 관련 기관에 민원을 넣는다. 공무원은 곤충보다 민원을 더 무서워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니는 곳엔 어김없이 정기적으로 살충제 세례를 퍼붓는다. 애벌레들은 부지불식간에 떼죽음을 당한다. 이러한 살충제는 곤충뿐만 아니라 곤충의 천적까지 죽이고, 토양오염을 일으키고, 비 온 후에는 수질오염까지 시켜 결국 많은 생물을 몰살시킨다. 곤충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열리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다. 징그러우면 고개를 돌려 안 보면 될 일이다. 굳이 민원까지 넣어 많은 무고한 생명을 몰살할 일은 아니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본 매미의 날개돋이 장면은 환상 그 자체였다. 등 쪽의 탈피선이 갈라지자 등과 머리가 서서히 허물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한다. 옥색 머리에 동그란 두 눈이 까맣게 빛나고, 두 눈 사이에 홑눈 세 개가 루비 보석처럼 박혀 있다. 참 청초하고 아름답다. 맨눈으로 보면 움직이지 않는 것 같지만,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 보면 아주 미세하게 떨면서 날개와 다리가 허물에서 슬슬 빠져나오고, 이어 통통한 배가 빠져나온다. 아직 날개는 구겨진 휴지처럼 꼬깃꼬깃 뭉쳐 있다. 허물에서 빠져나올수록 중력의 힘을 이용하려고 몸은 자꾸 뒤쪽으로 젖혀진다.
50분쯤 지나자, 배 꽁무니만 남기고 몸이 거의 빠져나왔다. 이제 뒤로 젖힌 몸을 윗몸일으키기 하듯이 움직이면 배 끝이 허물에서 완전히 빠져나온다. 이제 남은 건 날개 펴기. 쉬지도 못하고 혈림프(사람의 피에 해당)를 펌프질해 날개맥으로 보내며 쭈그러진 날개를 다림질하듯 곱게 편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옥색 날개가 펼쳐지자 내 입에선 아! 아! 감탄사만 맴돌 뿐 그 외경심을 표현할 길이 없다. 여섯 다리로 나무줄기를 꼭 잡고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서 허물 속을 탈출하는 데 걸린 시간은 무려 1시간 20분이었다. 살짝만 건드려도 다칠 것 같은 말랑말랑한 몸은 굳어지려면 몇 시간이 걸린다. 새벽이나 되어야 몸과 날개가 딱딱하게 굳어 힘찬 날개짓을 하며 날아갈 수 있다.
외래종이 놀라운 속도로 번식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생태계 파괴에 있다. 건물과 도로가 들어서고, 때맞춰 소독하는 바람에 도시 주변의 숲은 침묵의 숲이 되어간다. 곤충은 점점 사라져가고 풀과 나무만 있는 숲. 생태계가 파괴되면서 환경 변화에 취약한 곤충들은 점점 사라지고, 파리, 모기, 외래종 같은 생존력 강한 곤충들이 주로 살아남았다. 물론 온난화도 무시할 수 없다. 그 온난화도 인간의 활동 때문에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곤충의 종 다양성이 떨어지면서 촘촘했던 생태 균형은 느슨해지고, 그 틈을 생명력이 질긴 외래종이 파고든 것이다.
더구나 토종 천적까지 줄어드니 ‘넓은 땅’을 차지한 외래종은 활개를 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외래 곤충은 환경이 파괴되어 생태 균형을 잃은 도시 주변에 많고, 청정 지역인 심심산골에는 거의 발붙이지 못한다. 다양한 곤충들이 촘촘한 먹이망을 이루며 살기 때문에 외래종이 들어와도 천적에게 잡히고, 설령 살아남는다 해도 대번성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 파괴된 생태계가 회복된다면 외래종이 못 들어올까? 글로벌 시대이다. 이미 세계는 하나의 지구촌이다. 무역이, 사람 간의 이동이 빈번하기 때문에 곤충들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른 나라에 상륙할 처지에 놓여 있다. 다만 생태계가 균형이 잡혀 있으면 외래종이 정착하지 못할 수도 있고, 설령 정착한다 해도 지금처럼 엄청나게 번성해 문제를 일으키기보다는 적당한 선에서 개체수를 유지할 것이라고 감히 장담한다.
곤충은 영양 면에서 고단백질·고불포화지방산 식품이다. 영양소는 육류와 생선을 대체할 만큼 매우 풍부하다. 단백질, 불포화지방, 칼슘, 철, 아연 등을 품고 있어 그 어느 식품보다 영양적인 면에서 탁월하다. 대표적인 예가 요즘 대체식량으로 뜨는 밀웜이다. 갈색거저리의 애벌레인 밀웜은 사람의 음식뿐만 아니라 실험실 동물의 먹이로도 각광받는다. 밀웜은 영양분 중 단백질이 46.44퍼센트인데, 대두박의 경우 45.13퍼센트이다. 수치로 보면 고단백질 식품인 대두박보다 곤충이 더 많은 단백질을 지닌 셈이다. 밀웜은 단백질 외에도 지방, 비타민, 섬유질, 미네랄이 많다. 또 오메가3나 지방산도 매우 풍부해 소나 돼지보다 높고, 등 푸른 생선과 맞먹을 정도다.
온실가스도 다른 동물보다 현저히 적게 방출한다. 암모니아 배출량은 돼지 같은 가축보다 훨씬 적다. 곤충은 몸이 작아서 먹이를 적게 먹기 때문에 소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물질대사의 산물이 적은 편이다. 소의 경우 반추동물이라 먹이를 소화할 때 트림, 방귀, 분뇨 등에서 메탄이 발생하는데, 이 메탄은 온실효과를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다. 온실효과는 태양의 열이 지구로 들어와서 나가지 못하고 순환되는 현상인데,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주범으로 주목받는다. 메탄가스는 대개 동물의 장에서만 만들어지는데, 반추동물(예: 소, 양, 염소)은 4~5개나 되는 위에서 많은 메탄가스가 생성되고, 되새김질을 하는 과정에서도 생긴다. 메탄은 이외에도 매립지, 썩은 벼의 분해 과정 등에서 만들어진다.
소는 초식동물이라 원래 풀을 먹지만 사료도 먹는다. 사료의 원료는 대개 옥수수이다. 사람들은 양질의 옥수수를 대량으로 얻기 위해 살충제를 뿌린다. 이러한 살충제는 옥수수 밭의 곤충뿐 아니라 인근 지역의 곤충까지 몰살시킨다. 식물의 중매자인 곤충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것이다. 게다가 토양을 오염시켜 토양 생물을 죽이고, 빗물에 떠내려가 수질오염을 일으키며 수많은 물속 생물도 죽인다. 소고기 1킬로그램을 얻으려면 먹이(사료) 10킬로그램이 드는데, 그 사료를 얻기 위해 살충제를 뿌리니 환경오염을 유발한다. 이에 비해 밀웜 1킬로그램을 얻기 위해 필요한 먹이(곡물)는 1킬로그램이고, 살충제를 뿌리지 않으니 환경오염이 덜하다.
곤충이 사라지고 있다. 야외에 나가면 그 심각성을 더욱 체감하는데, 나는 7~8년 전부터 이런 현상을 몸소 느끼고 있다. 처음엔 ‘해걸이(결실이 한 해에는 많고, 다음 해에는 아주 적은 현상이 반복되는 것)를 해서 그렇겠지. 내년에는 낫겠지’라고 생각했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곤충이 줄어드는 게 눈으로 보인다.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한 희귀한 곤충은 아예 보이지 않게 되었고, 너무 흔해 사진조차 찍지 않았던 곤충들은 어쩌다 한 번 보인다. 몸집이 큰 대형 나방은 깊은 산속에서나 만날 수 있게 되었는데, 초여름과 여름 사이에는 더 심각해 가뭄에 콩 나듯 가끔씩 보인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늘 야외로 나가는 내 눈엔 심각할 정도로 곤충 수가 줄었다.
이상기후, 지구온난화 등 기후위기가 심각해지면서 많은 생명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하등동물인 곤충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있는 것조차 모르게 사라지고 있다. 문득 15년 전 은사님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곤충 조사를 하던 1980년대 초만 해도 곤충이 많았어. 그땐 교통편이 안 좋아 식물, 조류, 곤충의 여러 분야 전문가들이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며 합동조사를 했는데, 특히 사구 곤충을 조사하러 섬에 들어가면 배 시간에 쫓겨 짧은 시간에 조사를 마쳐야 했어. 그런데 곤충이 얼마나 많은지 아무 곳이나 모래를 파면 노다지처럼 쏟아져 나와 연구할 맛이 났지. 지금은 환경이 죄다 파괴되어서 야외에 나가면 마음이 쓰려.”
그렇다. 은사님이 통탄했던 15년 전보다 지금은 상황이 훨씬 더 나빠졌다. 온난화는 추운 곳에 사는 곤충을 막다른 길로 내몬다. 태생적으로 차가운 온도에 적응해온 탓에 높은 온도를 견디지 못하고 죽든지, 그나마 차가운 곳에 사는 녀석만 살아남는다. 더욱이 곤충들은 대개 애벌레 시절이 길어서 온난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다. 애벌레 시기에는 날개가 없어 이동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늘소나 사슴벌레 애벌레처럼 10개월 이상 나무 속에서 사는 녀석들은 나무 밖의 사정을 잘 모른다. 나무 속이나 땅속의 온도는 비교적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겨울잠을 자는 동안 야외 온도가 영하로 떨어져도 특이하게 몸은 얼지 않는다. 곤충의 몸에서는 자동차로 치면 부동액 같은 부동물질이 나오기 때문이다. 몸이 어는 것을 어느 정도 막아주는 글리세롤을 많이 비축해 매서운 추위를 견뎌낸다. 혹독한 추위와 맞서는 게 녹록치 않지만, 곤충에게 겨울은 잠시 성장을 멈추고 한숨 쉬어가는 계절이자, 거친 환경을 이겨내는 단련의 계절이다. 이와 달리 ‘휴지’는 환경 조건이 나빠지면 일시적으로 잠을 자는 것인데, 발육이 정지되었다가 외부 환경이 정상화되면 활동을 재개한다. 물론 때에 따라서 외부 환경이 정상화되는 데 오래 걸리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계속 휴지 상태를 유지한다.
이렇게 곤충들은 계절을 탄다. 바뀌는 계절에 순응하며 머물기도 하고 떠나가기도 한다. 머물 때와 떠나갈 때를 진정으로 아는 존재다. 야외에서 1센티미터도 채 안 되는 곤충과 눈을 맞추다 보면 외경심이 들 때가 많다. ‘예쁜 곤충’이라고 강요하고 싶진 않지만, 이 ‘징그러운’ 녀석들은 적어도 우리와 공존하고 있는 이웃인 건 분명하다. 그러나 이제는 무분별한 개발과 지구온난화에 몸살을 앓고, 살충제 때문에 죽어가고, 끊임없이 들어서는 건물과 도로에 쫓기는 중이다. 징그러워도 좋으니 제발 많은 곤충이 불쑥불쑥 나타나주기만 해도 좋겠다. 더 늦기 전에 들로 숲으로 나가보자. 계절과 상관없이 그곳에는 작은 생명 곤충이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