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위기 / 알바 뮈르달, 군나르 뮈르달 / 문예출판사
그러나 우선은 완전히 과거지사가 된 이데올로기의 발전에 대해 간략하게 먼저 복습해보고자 한다. 견해가 완전히 전환되는 국면에서는 과거의 견해들을 살펴보는 것도 현명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현재 무엇을 논하는지 파악하기 힘들다. 지난 수십 년간 화석처럼 보존된 사고와 이념으로부터 새로운 생각이 발현되는데 우리가 이를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죽은 이념은 우리의 상상이나 견해의 밑바닥에서 흘러다니는 끈적한 진흙처럼 존재한다.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 여기에 바로 역사적 사고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고는 우리가 죽은 자들의 삶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의 삶을 살 수 있게 한다. (p.21-22)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 원칙에 따르면,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기본적으로 평등을 전제로 해야만 정치적으로 정당하기에 이를 근거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사회의 행복을 계산할 때 사회적 행복은 각 개인의 행복을 개인 차원에서만 계산해야 하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 된다. 이런 방식의 평등 원칙은 공리주의를 주장하는 철학자와 경제학자들이 강조했으며 특히 제러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은 이 결과에 분명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평등 원칙은 보수, 진보를 모두 막론하고 그 시대의 사회경제적 사고의 주요 근거였는데 벤담이 주창하고 이후 고전주의 학파가 물려받은 ‘한계효용의 법칙’으로 더욱더 견고한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1크로나가 잉여로 남아 미약하게나마 생활의 만족도를 높일 수 있다고 한다면 소득이 클수록 만족도가 낮아짐을 의미하므로 1크로나는 부자보다는 가난한 자에게 더 “가치”가 있다. 그렇게 가정하면 당연히 사회 전체의 만족도는 더 증대될 것이기에 부자에게서 가난한 자로 분배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 소득과 자산의 평준화를 위한 정치적 행위는 이러한 관점에서 경제적으로 완전히 평등한 것이라고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p.25)
그러나 온건 사회주의자들의 요구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다비드손은 노동계급의 경제적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모든 종류의 사회정책적인 조치를 촉구했다. 그는 강력한 주거 정책을 추천했다. 개인의 근면함만으로는 노동계급이 자신이 살기에 충분한 주거 공간을 확보하고 그에 맞는 임대료를 지불할 능력을 갖추는 데 부족함이 있다면 사회, 우선 코뮌들이 개입할 책임이 있다고 했다. 그는 노동운동의 미래를 신뢰하면서 임금 인상을 이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노동계급의 도덕적, 지적 교육을 열렬히 지지했다. 그래서 그는 노동시간의 단축과 국민교육의 개혁을 추천했다. 그는 심지어 노동자들을 위한 ‘양질의 신문’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노동계급의 도덕성 교육이 높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에게 자존감을 심어주어야 한다”라고 그는 말했다. “운 좋게 더 나은 계급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노동자들이 비굴하고 복종적인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 관습은 생각보다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비굴하고 예속적인 노동계급에게는 자존감을 요구할 수 없으며 자존감 없이는 자기통제가 불가하다.” 자존감의 상승은 강력한 노동운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노동계급이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해야 한다고 다비드손은 주장했다. (p.42)
이제 잠시 우리가 어디서든 목도하게 되는 의견과 말들을 통해 사람들의 동기와 태도를 살펴보자. 오늘날 자녀는 이전의 자급자족 사회 시절보다 돈이 많이 드는 존재다. 주거 공간도 전보다 더 비싸고, 교육에 대한 요구도 더 높아졌고, 노동시장의 전망은 더 불분명하며, 전에는 집 안에서 아이가 담당함으로써 도움이 되던 일들도 이제 더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과거보다 지출에 대해 훨씬 더 많이 고려하게 되었고 이를 예전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과거에는 꽤 굳어진 계층을 기반으로 하는 안정적인 계급사회였고 다른 계층 사이의 의사소통이 미약했다. 계급사회는 도덕적이며 전통적인 것으로 인정되었다. 즉, 비슷한 사람끼리 살아왔고 세대가 지나면서도 그다지 변화가 없는 삶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산업화는 예전 계급사회를 뒤흔들어놓았다. 이제는 아래로 또 위로 의사소통이 활발하다. 사람들은 모두 상대적 생활수준을 (단지 유지가 아닌) 향상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가 짐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일반적으로 이해한다면 이렇게 생활수준의 향상을 추구하는 것은 상당히 새로운 경향 아닌가? 이러한 사고는 이전의 농경사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런 사고는 소작 계층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생활수준의 향상을 위한 노력은 현재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집단 사고방식이다. 나날이 발전하는 산업화 속에서 우리는 여성들이 자본주의 시대 이전과는 다르게 어떻게 경제적 기능을 잃게 되었는지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제 여성들은 그 기능을 시장에서 찾고 있다. 오늘날 그들이 여전히 주부로만 머무른다면 밖에서 끌어당기는 힘이 강함에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집 안에서는 아이들과 전통이 이 여성들을 속박할 것인데 예전과는 달리 직접적인 경제적 기능을 통해서 속박하지는 않을 것이다. 현대의 노동 분화와 특화는 원시 경제 상황에서 가능했던 역할들을 여성들로부터 박탈했다.
여성들에게는 새로운 동기가 부여되었는데 그 동기란 정신적인 자신감으로 노동시장에 참여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이 동기를 좀 더 합리적으로 표현해보자면 현재 출산과 육아가 동기의 실현에 점점 더 방해 요소로 인식된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볼 때 결과적으로는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의지 때문에 출산과 육아가 방해로 받아들여지게 된다는 것이다. 도시화로 말미암아 도시에 정착하게 되면서 아이를 집에 놔두고 스스로 알아서 잘 자라기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한 이유로 자녀를 출산하는 것은 경제활동에 방해가 된다. 상위 계급의 여성들은 스스로를 ‘해방’시켜 독립적인 사회생활에 대한 요구를 높이고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금방 자리를 잡는다. 경제활동에서 여성의 역할 변화와 발맞추어 진보하고 있다.
따라서 출산율 저하를 막으려면 산아제한으로 거의 무자녀를 추구하는 이 복잡한 심리적인 동기를 없애는 방법 외에는 달리 다른 방법이 없다. 즉, 자녀를 가짐으로써 드는 비용을 줄여야만 한다. 이는 가족의 지속적인 생활 향상을 위한 노력에 자녀가 방해되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자녀가 방해 요인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는 인구 감소가 위협적으로 부상하면서 야기된 사회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할 현실적인 주장이다.
간단히 말해서 가족제도의 사회적, 경제적 기반을 조직적으로 변경해 그에 따른 구조와 의미를 바꿔야 한다.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가족은 이미 산업화의 결과로 변화했고 추락하는 출산율은 그것을 입증하는 하나의 증거일 뿐이라는 점이다. 뿌리 깊은 전통과 변화된 경제적 조건 사이 어딘가에서 가족들이 타협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목표가 될 수 없다. (p.130-132)
임대료 상승으로 부동산 가격도 상승했다. 현재의 가격 하락에도 불구하고 경제 위기 중에는 이자율 하락으로 부동산 가치가 유지되었다. 부동산 소유주들은 집값의 최고점을 즐기면서 모기지론이 그대로 유지되는 바람에 말도 안 되는 이익을 보았다. 이런 이익은 안정적으로 집을 소유한 사람들이 아니라 경기의 흐름을 이용하는 부동산 투기 세력이 가져갔다. 투기 세력이 정당하지 않은 이윤을 그들의 주머니에 챙겼다는 사실은 스웨덴 사회 역사에서 아주 극악무도한 현상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프로파간다가 매우 잘 진행되었다. 이들은 여느 때처럼 자유 거시경제의 이론을 인용해 자본의 이해가 국가적인 이해와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임금상승법 내에서도 막대한 이익을 취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미 부동산 투기 등으로 취득한 이익에 대한 법적인 이해가 있었지만 1923년에야 완전히 폐지되었다. 당시 수십억의 이익은 전체 주택시장을 오늘날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꿔놓았을 수도 있었는데도 법이 미진하게 개정되었다. 건설 비용의 상승은 자재업, 도시들의 잘못된 토지정책(스톡홀름과 국가도 포함), 부동산 투기 세력과 자본 건설노동자의 임금 상승 등 다른 분야의 독과점을 부추겼다. 건설 비용의 상승 요인들은 모두 오래된 부동산의 임대료와 가격도 상승시켰다. 스웨덴의 사회기관들은 이런 막대한 불공정한 이익에 대해 책임을 물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또한 공급과 수요를 통제하지도 않았다. 이런 사기의 시대에 ‘수요와 공급’이라는 자유경제의 이데올로기를 키우고 이것이 부동산 시장을 규제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만약 이런 착취의 경제적 이론이 적용된 적이 있다면 아마 부동산 시장에서다. 이 점에 대해서 더는 언급하지 않겠다. (p.160-161)
출산율의 감소가 생활수준의 향상을 위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 국민들에게 생활수준의 향상을 포기하고 출산율을 높이거나 아니면 현상 유지만이라도 하라고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정치적 독재하에서 기술적으로 완전한 대중적 제안이라고 하더라도 명할 수 없는 것이다. 독일의 경험에서도 우리가 이를 알 수 있다. 적어도 자녀 출산에 대해서는 사람들에게 “제정신에서 벗어나라고” 설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가능한 것에서 희망하는 것으로 목표를 변경하면 가난한 자들의 생활수준을 대가로 지불해야 한다. 이를 희망할 수 없어서 우리는 이미 이에 대해 반대한다고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실제 이 계층의 생활수준에 대한 우리의 분석과 무엇보다도 생활수준과 자녀 수와의 연관 관계에 대한 이해가 인구정책의 입장을 더 분명하게 하길 바란다. (p.191)
중요한 개혁 요구는 가정의 경제적 안정을 보장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현재 가난한 가정의 경제적 위험이 너무 커서 이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하며 그들의 일반적인 생활수준이 향상되어야 한다.
이 문제는 실업급여, 생활지원금 등과 같은 다른 보조금들, 예비 인력 등으로는 만족스럽게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부부가 아이를 가지고자 하는 능력과 의지는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끝을 맺어야 하는 사안이 아니다. 인구정책적인 결과를 성취하려면 노동자들이 생산적인 직업을 가질 수 있고, 농민들까지도 일정 수준의 소득이 보장되는 경제적 민생 계획을 세워야 한다. 우리 모두가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인구정책적인 시각에서의 생활수준이 원하는 수준까지 향상되어야만 그런 성취가 가능하다. (p.197)
같은 측면에서 현재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논의가 시급하다. 법정 노동시간을 일일 8시간으로 법제화한 것은 개인의 자유 시간을 늘리기 위함보다는 생산기술적 효율성 때문이었다. 몇몇 특정 분야에서 같은 이유로 노동시간 감축이 필요해 보인다. 무엇보다 농업, 가사도우미, 기타 법제화되지 못한 일자리들도 노동시간 규제가 도입되어야 한다. 또한 중요한 것은 질서 있는 휴가 제도가 노동자들과 지위가 낮은 사무직에도 도입되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휴가를 연내 골고루 사용하게 하고 주중 노동시간의 개선된 분배로 토요일도 휴일이 되게 하는 등 수정되어야 하는 점들이 많다. (p.204-205)
또한 현재 당면한 비슷한 문제는 노동자들의 희망 사항에 부합하거나 또는 부합하지 않더라도 조기 퇴직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는 요구다. 실업률이 높을 때는 조기 퇴직의 실시로 청년들의 노동시장 편입을 도울 수 있기에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계획적인 생산정책에서는 이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고령층이 증가하는 100년 동안은 조기 퇴직으로 발생하는 사회적인 비용이 우리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클 것이다. 노인인구는 많고 생활수준은 낮기 때문에 노인 인력도 우리가 십분 활용하지 않으면 우리가 목표로 하는 생활수준에 이를 수 없다.
다른 문제는 공공 부문에서 고위급들이 자신의 퇴직 연령을 높게 정함으로써 자신들의 역량을 심각하게 저하해 일의 효율성이 문제가 될 나이까지 정년을 보장받은 것이다. 지도자 역할을 수행할 때는 그런 고도의 능력이 중요하지만, 연공서열의 승진 제도 때문에 지적으로 민첩하고 미래지향적이며 진취적인 능력이 나이 듦에 따라 저하되면 이들이 조직 내에 머물러 있는 것이 피해를 줄 수도 있다. 공무원들의 정년 연장은 신체적인 요구에 따라 이루어졌다. 고소득 고위급 공무원들은 오랫동안 위협을 느끼지 않고 일자리를 지킬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책상 일’을 하는 사무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일을 하는 사람은 앉아 있는 데 필요한 신체적인 힘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행정적인 경험도 필요하다. 고위 공무원의 정년 개혁이 요구되지만 올해 개혁이 시작되었을 뿐이다. 이 개혁의 동기는 일의 효율성 문제다.
무엇보다도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좀 더 엄격한 조기 퇴직 규제가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나이 때문에 일찍 업무 능력의 저하가 오거나 직에서 물러나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때 조기 퇴직을 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개혁은 실행하기 어렵다. 공무원들은 자신의 이익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고 자신의 직업을 개인의 경제적인 권리로 여기기 때문이다. (p.205-207)
심각한 저출산의 심리적 동기부여 메커니즘을 살펴보면 출산이 가족들 개개인에게 추가 비용을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이는 가족들이 무언의 합의를 보고 출산을 기피하는 가장 큰 동기가 된다. 따라서 각 가정의 출산으로 발생하는 추가적인 비용을 줄여야 한다. 저소득 가정뿐만이 아니라 안정적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고소득 가정도 자녀 양육에 드는 추가적인 비용이 출산을 기피하는 주요한 이유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현재의 소득 및 재분배 제도하에서는 각 개인에게 출산과 보육의 비용이 전가되고 있으며, 이 제도가 합리적인 심리와 더불어 오늘날 결국 무자녀 혼인 가정을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는 모두 청년세, 출산축하금 등의 제안에 대해 비웃어왔다. 이런 제안들이 비웃음을 산 이유는 그 혜택이 우스울 정도로 작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때로 그 동기가 우스운 것들이었다.)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지 않는다면, 각각의 개인들이 전적으로 자신의 아이들을 위한 경제적 부담을 진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근본적으로 부자연스럽다는 것이 문제다.
어떤 비용들, 또 걱정이나 책임은 늘 부모의 몫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개인의 임금과 소득은 일반적으로 자녀 보육의 부담도 고려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직접적인 비용 부담은 오히려 공공이 개입해 그 비용을 담당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그리고 그 비용을 각 가정에 부담이 발생하는 만큼 제공해야 하지 않은가? 출산율을 유지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면 사회는 다음 세대를 길러내는 가정에 경제적인 지원을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스웨덴 인구의 중단 없는 하향세 때문에만 이런 개혁의 요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부모 또는 보호자의 소득수준과는 상관없이 아이들에게 안정적인 성장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는 점이다. 아이의 수가 점점 더 적어지면 우리에게 온 아이들의 행복한 성장을 위해 돌봐야 한다는 연대 책임 의식이 생긴다.
아이들은 가정의 경제적인 행운 또는 불운을 같이 해야 할 필요도 없고 또 그럴 이유도 없다. 가장의 실업이나 질병으로 가족의 소득이 끊기고 그런 여파로 알코올중독자가 되거나 가정의 폭군이 되고 범죄자가 되어 감옥에 가거나 아니면 완전히 가족의 의존에서 벗어나게 되어도 이것이 아이들의 삶의 영속에 위험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는 불균형하고 불안정한 소득분배에서 야기되는 개인들의 사회 부적응에 대해 큰 책임을 져야 한다. 이에 대한 피해는 아무 죄가 없는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간다. (p.209-210)
마지막으로 이런 논의에서 자주 잊어버리는 주요 문제가 있는데, 바로 아이들과 사회의 이해다. 다자녀 가정의 많은 아이들이 해당 당사자다. 보육 부담을 전적으로 부모들에게만 전가한다면 가난과 협소한 주거 그리고 모든 형태의 신체적이고 심리적인 결핍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가정의 아이들은 열등해지고 또 반사회적으로 성장할 것이다.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에 매우 큰 해악으로 작용하고, 큰 비용을 발생시킨다. 이런 아이들이 행복한 어린 시절을 경험하고 사회 적응력을 갖춘 시민으로 성장했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절대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을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성장 환경을 개선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다. 더군다나 유전적으로 열등한 인자 등을 이야기하는 차에 장애 아동들이 경제적인 결핍으로 악화된 성장 환경에서 더 압박받거나 왜곡되지 않게 하는 것은 사회적인 이해와도 부합한다. 이런 이유만으로도 다자녀 가정도(아니 어쩌면 자녀가 적은 가정도) 보육 부담의 균등한 배분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p.213)
사회정책적인 제도들은 아이들을 키우는 데 드는 가족의 비용을 낮추는, 효과가 강력한 개혁의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동시에 아이들에 한해서는 계층 간의 차이를 줄여야만 한다. 예를 들어 다음의 내용들이 해당된다.
- 다자녀 가정의 주거 보조금
- 모든 아동에게 (정신과 치료, 치과 치료, 약 복용) 무상 의료 지급
- 무상 점심 급식 지급
- 집에 머무는 아이들을 위한 일부 식자재 가격 할인
- 무상 학교교육; 교과서 및 학습 재료, 교통, 필요시 방과 후 활동 포함
- 공공 유아원, 탁아소, 유치원, 방과 후 교실, 직업학교, 여름학교 등을 고품질로 무상 제공해 부모들이 아이들을 돌볼 수 없을 때나 아이들이 다른 형태의 삶을 살아야 할 경우 아이들이 보내는 시간이 충만할 수 있게 한다.
- 재능 있는 청소년을 지원하고 적절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장학금을 될 수 있으면 많이 충분하게 제공해서 학업 기간에 필요한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게 한다.
이 모든 면과 관련된 중요한 관점은 아동수당이 어떤 방식으로든 생활보호의 경멸적인 성격을 띠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보육에 대한 사회적인 비용은 가능한 한 많은 아이에게 부모의 경제적인 조건과 관계없이, 즉 이 제도의 수혜를 입어야 할 이유를 증명할 필요 없이 적용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심리적인 거부감이 들게 되면 아이를 낳으려는 의지가 생기게 하려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 여기에는 국가가 아이에 대해 공동 책임을 진다는 철학도 같이 더해져야 한다. 기술적으로 보육을 논할 때도 이와 같은 방향에서 논의가 될 것이다. 공공 보육 의무에 관해 여기에서 기술된 대부분의 지출, 예를 들어 무상 의료, 무상 급식, 무상 학습 자료, 유치원 등은 더 부유한 아이들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p.222-223)
이런 사회정책의 확대와 아동 보육 강화의 방향이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미래의 노선이다. 우리의 사회정책 대부분은 선제적으로 사회악의 원인에 대해 대처하는 대신 이제까지 증상을 치료하는 데에만 집중해왔다. 즉, 가난한 자, 실업자, 아픈 자를 돕고, 범죄자들을 감옥으로 보내고, 정신병자들은 병원으로 보내고, 또 알코올중독자들과 부랑자들을 시설로 보내는 활동을 해왔다. 그러나 우리는 기술적으로, 대규모로 사회정책을 펼침으로써 질병, 빈곤, 범죄, 그리고 반사회적인 여러 행태를 예방할 수 있다. 모든 사회기술적인 전문가들은 이와 관련한 사회정책을 도입하려 하는 중이다.
이 새로운 예방적 사회정책은 먼저 상당히 확대된 아동과 청년을 위한 보육제도를 포함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실시되는 정도에 따라 자라나는 세대의 삶의 질과 발전 가능성이 향상될 뿐만 아니라 (이 자체로는 사회의 관점에서는 이익이 되는 사회적 투자다) 각 가정의 보육 부담 비용을 국가 전체와 나눔으로써 낮출 수 있다. 우리 국민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조건으로서 사회정책이 발전하는 것은 인구정책학 측면에서도 바람직하다. (p.224-225)
현대사회 전체의 생활 리듬은 강화되고 더 복잡해지고 있다. 능력에 대한 요구는 더 엄격해지고 있다. 이것은 거의 모든 분야에 해당하는 것이나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간의 차이는 비교적 크다. 특히 농업은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점을 들어야 할 것 같다. 현재 소규모 농업이라도 하려면 육체적으로 힘든, 단순하고 매우 원시적인 노동을 통해 버틸 수 있었던 몇십 년 전과 전혀 다른 우수한 인력이 되어야 한다.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여러 가지 계산을 잘해내야 하며, 주위 환경에 대한 이해가 깊고, 관련된 직업 조직에 자리를 잡는 등의 우수함이 요구된다.
이런 경향은 시대의 이상과 같은 선상에 있다. 의식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같은 방향을 추구한다. 합리화, 생산의 고도화 그리고 전체 인간의 삶이 우리 자신에게 더 높은 수준의 능력을 요구한다. 노동운동도 이런 질적 수준의 향상에 기여한 바 있다.
노조운동의 주요 부분에서 이미 노조가 시작되는 시기에 단체행동과 단체협약의 내용이 임금 저하의 경쟁에서 능력 배양의 경쟁으로 전환되었다. 임금이 높게 측정되는 대신 그에 해당하는 만큼 노동으로 기여할 것을 최대한 내세웠고 그에 따라 노동자들의 노동력 투여가 증가했다.
크게 보면 노동운동은 어느 정도 인지한 상태에서 이 노선을 따랐다. 노동 집중도와 노동 효율은 산업 내 많은 작업 현장에서 강력하게 상승했다. 농업의 은혜로운 산업혁명에 맞춰서 그리고 이윤을 내기 어렵다는 점에서 농업 노동시장에서도 효율성 증대의 프로세스가 진행되었다. 최근 30년 동안 노동 속도와 노동의 질이 상승하지 않은 분야를 찾기가 어렵다.
이것은 시대의 요구이기도 한데, 완전히 인간의 내적 욕구로 이루어지는 이런 발전은 능력 있는 인구의 비율도 높아져야 한다는 의미다. 노동조건이 점점 더 표준화되고 기업의 합리적 경제의 태도가 강화되면서 가부장적인 고용 요소가 없어지고 불행하게도 이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은 저임금의 직업조차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없어지며, 도덕적으로 자기의 삶을 방어하거나 기본적인 삶의 요건도 충족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가고 있다. (p.230-231)
커다란 사회문제는 특히 무책임하게 논의되고 있는 (몇몇 공식 조사에서도 논의가 되는) ‘수혜자’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궁극적으로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인력의 능력을 어떻게 향상시킬 것인지에 있다. 이는 금방 해결에 성공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결과가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꽤 지난 다음에 알 수 있는 문제다. 그래서 다음으로 현재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직업 능력이 부족한 이들을 노동시장에 편입시키고 우리의 노동으로 그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원하는 생활수준에는 이르지 못하기에 그들 스스로 사회적으로 행복하고 존재의 가치를 느끼며 살 수 있게 할지에 대해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방법을 찾는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해 기본적으로 중요한 점을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직업 능력이 떨어진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기 힘들고, 또 그 때문에 반사회적으로 되기 쉽다. 반대로 어떤 이유로든 실업에 처한 사람은 바로 그 실업 때문에 앞으로 요구되는 능력이 떨어질 수도 있다. 장기 실업은 인력의 능력을 떨어뜨린다. 삶이 풍족했던 개인들도 그저 그런 사람들이 된다. 그러므로 현재 청년 실업이 사회에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일은 어차피 하게 될 수밖에 없으므로 이는 생산력의 문제가 아니라 인구 질의 저하로 이어지는 문제다. 그리고 현재 능력의 향상을 요구받고 있는 청년들의 문제다.
인구 질의 향상을 위해서는 청년 실업, 또한 실업을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 관련해 이전 장에서 윤곽을 그린 일반 민생 정책이 개편되어야 함을 다시 강조한다. 인력 전체가 회복 불가능한 질적 저하를 겪지 않기 위해서라도 모든 이들이 일자리를 가져야 한다. 치유 방법 중 가장 좋은 것은 일자리 치유다. (p.236-237)
중요한 것은 오늘날 대량 실업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특히 능력의 향상 요구에 부합하는 많은 사람 사이에서도 청년 실업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실업이 기존 경제의 해체 때문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장기 실업 자체가 미래의 인구의 질을 저하시킴에 따라 실업 상태가 계속되고 결국에는 반사회적인 발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불행의 단초다.
실업의 근본 원인이 무엇이든, 실업이 장기적인 인구의 질적인 저하를 가져오든, 인력의 질 저하의 문제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실업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공공의 지원과 ‘수혜자’ 문제에 대해 ‘의지’라는 요소가 왜곡되어 사용될 수 있다. 현 상황에서 일자리를 잃은 이들을 적게라도 지원하지 않는다면 개인의 실패 과정은 더 빠르고 잔혹하게 진행될 것이다. 결국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사회적, 도덕적 실패일 것이다. 그래서 인구의 질은 대량 실업을 이겨내면서 유지 및 향상되어야 하는데, 이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사회가 조직적으로 경제에 개입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정부가 아무리 생산과 일자리를 늘리고, 이 장에서 다루는 치유성의 조치들이 완전히 실행된다고 하더라도 엄격한 질적 향상의 시각에서 보면 뒤떨어지는 사람들이 인구의 상당한 비율을 차지할 것이다.
그들 역시 방치한다면 반사회적인 존재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이들을 지원해주고 삶을 유지하게 해주면 그런 반사회적인 태도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최근 사회정책들의 결과가 잘 보여준다. 개인적인 측면에서나 사회적인 시각에서도 위기 상황에서의 지원은 개인의 실패가 도래하는 것을 막거나 최대한 그 실패를 미래로 지연시켜주는 것이어야 한다. (현재 정치적인 상황에서 급진파들은 필요가 있는 곳에 지원이 가도록 강하게 투쟁해야 한다고 했지, 지원정책의 효과를 과장해서 이상화하지는 않았다.) 부진한 사람들을 특별 시설에 모으는 데는 비용이 많이 든다. 그리고 이는 필요 이상으로 잔인한 방법이다. 그들의 위협적인 반사회화의 가능성에서 그들 삶의 행복을 지키고, 사회를 비용 부담 측면에서 지키기 위해서는 그들도 광범위하게 노동시장에 편입되어야 한다. 능력이 좀 떨어지는 이들도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해야 하고, 소비를 할 수 있도록 임금을 받을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불필요한 실업에 노출되는, 심하지 않은 정도의 지적장애인이나 정신 질환자, 신체장애인, 가령 결핵 환자 같은 약한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동시에 복역 기록이 있는 전과자, 부랑자, 알코올중독자 및 매춘 여성 등 반사회적 낙인이 찍힌 사람들 역시 노동시장으로 회귀가 어렵기 때문에 과도기적 일자리를 통해 그들이 노동시장에 편입될 준비를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같은 문제가 앞으로 늘어나는 노인인구에게도 적용된다. (p.238-240)
이들이 근근이 살아가도록 경제적인 지원을 하는 것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는 의미가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그들이 생산적인 노동시장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예방적인 관점에서 개선된 의료 서비스와 교육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두 영역에서 기술적인 가능성이 있다면 모두 적용하고 활용해야 미래의 인재 배양에 성공해 결실을 볼 수 있다. 보건과 교육 서비스를 모두에게 제공해 그 누구도 경제적인 이유로 도움을 못 받는 경우가 없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의식적으로 예방 차원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이 마지막 주장은 아동과 청년을 대상으로 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의미다. (p.249)
어린아이들의 불만족스러운 영양 상태는 두 가지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는 원인에 기인한다. 하나는 가정 내에서 부모, 많은 경우 주부가 이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거나 적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가족의 소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전자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의 영양 상태에 사회가 전혀 책임이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나쁜 습관은 반드시 고쳐야 하고, 이해가 부족하다면 교육을 강화하고, 무책임한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바깥세상과 접점이 적은 부모들에게도 닿을 수 있는 모든 채널을 총동원해 광범위하고 사회적으로 조직된 국민 계몽과 홍보 행동이 집중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모든 채널 중에서도 학교가 계몽 홍보의 매개체로 활용되어야 한다. 이는 지식이 더 많고 책임감이 있는 다음 세대의 부모들을 길러내기 위한 방법일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이 부모를 즉시 교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상당히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의 영양 문제는 연구, 계몽, 홍보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이 문제의 장애물은 주로 경제적인 성격을 띠는 것들로 지원이 필요하다. 학교에서 급식이 이루어지는 것은 시급한 요구다. 영양 전문가들의 의견을 활용한, 건강하게 영양이 조합된 급식이 학교에서 무상으로 제공된다면, 아이들의 부모가 영양에 대해 무지하거나 아이들이 가정에서 영양을 충분하고 적합하게 제공받지 못하더라도 아이들의 영양 상태가 상당한 수준으로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학교 급식은 아이들과 부모들의 위생에 대한 관찰도 될 수 있어 올바른 습관을 가지도록 교육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 전체는 스웨덴에서 개선하기가 어려웠다. 우리의 이웃 나라들은 이에 관해 높은 수준의 개혁을 이루었다. (p.250-251)
그러나 그 주된 이유는 전혀 다른 차원, 즉 열악한 주택이나 너무 밀집된 주택에 사는 많은 가족들의 경제적인 위기다. 그들은 더 크고 더 넓은 주택을 빌릴 수 있을 만큼의 소득이 없다. 주택 감독 기관이 저소득 다자녀 가정을 위생적인 기준을 충족하고 동시에 충분히 저렴한 주택으로 안내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주거문제는 전체적으로 해결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주택법의 강화와 주택 감독의 효율화는 이러한 가족들에게 더 나은 주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공공 재정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이 지원이 정말로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그 규모가 충분히 커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제까지의 코뮌 보조금 정책에서 배울 점이 있었고, 그 교훈에 따라 더 많은 조처를 취해야 한다. 다가올 주택법 개혁의 기본적인 관점은 사회정책적으로 예방적 요건, 특히 정신위생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주거 환경이 좋지 않은 과밀한 아파트에서는 행복한 가정생활을 누릴 수 없다. 주거 과밀화는 정신건강과 영혼의 조화를 가장 해치는 요인이다. 과밀 생활 및 정신적인 건강과 전반적인 열등함 및 반사회적 경향은 서로 연관성이 있다. 과밀 주거는 부부의 결혼 생활을 악화, 왜곡시키고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와 형제자매 사이의 관계를 손상시킨다.
혼자만의 공간이 부족하면 피로와 짜증이 발생한다. 아이들은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한다. 좁은 침대에서 여러 명이 함께 잠을 자야 하기 때문에 피로는 물론이고 심지어 신체적 통증을 호소한다. 아이들의 놀이, 어른들의 여가 활동, 특히 공부와 지적 생활은 불가능하다. 과밀 주거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지 확인되었는데, 가정의 열악한 환경으로 학교가 요구하는 일을 수행하거나 교육의 기회를 완전히 활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p.256-257)
방금 언급한 공공 의료 서비스의 발전 방향을 담은 의료 서비스의 효율성 증대를 도모하기에는 우리나라가 인구에 비해서 너무 적은 의사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적인 사고를 하는 의사’들을 활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의료 서비스 체계의 구축에서 중요한 요구는 의사 교육의 광범위한 개혁이다. 미래의 공공 의료진은 기존 의료진에게 부족했던 사회위생학적인 혜안을 대학 교육 때부터 기를 수 있어야 한다. 실습 교육에서도 현재의 단편적인 병원 교육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회위생학적인 교육의 구성은 아주 기초적이어야 한다. 사회정책 개론, 사회 권리, 사회 통계 및 사회 경제를 포함해야 한다. 특히 이 직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사회위생 과목과 교육과정이 설정되어야 한다. 공공 의료진들은 곧이어 특별 교육을 받은 보건 의료진을 구성해야 한다. (p.272-273)
이 일반적인 틀에서 특히 중요한 요구 사항은 정신 건강관리다. 과장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는 이 문제가 수치스럽게도 방치되고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의 심리학 연구는 범죄와 일반적인 반사회성, 신경증, 타락 그리고 다양한 측면에서 개인적인 효율성의 부족이 얼마나 잘 예방될 수 있었는지 보여준다. 생애 초기 단계에서 정상적인 발달에서 벗어난 것으로 우려되는 오차를 보이는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올바른 사회 적응이 가능하다. 이러한 정신위생의 문제는 이제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스웨덴의 몇몇 지역에서는 ‘문제 아동’을 위한 별도의 상담소를 만들었다.
하지만 정신 건강 의료는 훨씬 더 광범위한 분야다. 그것은 그 특별한 아이를 둘러싼 모든 양육 환경, 즉 가정과 학교 모두와 관련된다. 이런 경우 필요한 치료는 종종 일종의 교육적 재구성이다. 복잡성, 열등감,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인내심과 숙련된 교육 작업이 필요하다.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에 익숙한 아이들은 가끔은 아주 조용한 심리 환경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특히 모든 아이는 효과적인 교육을 받아서 사회의 능력 있는 인재로 자라나야 한다고 목표를 높게 설정하고 이를 성취하려고 한다면, 주로 심각한 경우를 치료하기 위한 몇몇 개의 특별 의원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더 나아가 예방의 차원에서는 모든 아이의 심리적인 발달에 대한 관리와 성장 환경에 대한 전문적인 자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정신 건강 의료가 언젠가 일반적이고 효과적이려면 지속적으로 아이의 삶 가까운 곳에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 (p.279-280)
단순하게 학교의 목적에 대해서 질문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현대사회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필요하며 학교에 이를 어떻게 요구할 수 있을까? 그들은 제너럴리스트여야 하는가, 스페셜리스트여야 하는가? 이론적으로 훈련되어야 하는가, 실용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권위를 따르는 자여야 하는가, 문제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역사주의에 물든 보수주의자여야 하는가, 아니면 미래지향적이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개인주의자여야 하는가, 집단주의자여야 하는가? 억압받아야 하는가, 자유로워야 하는가? 혼자 전전긍긍해야 하는가, 협조적이고 부지런해야 하는가? 복종적이고 지도자들에게 순종적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용감하고 책임감 있고 독립적인 시민이어야 하는가? 이러한 것들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전통을 믿는 것도, 권위적인 도덕을 따르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어느 하나 절대적인 인간상은 없으며, 무엇이 더 나을 것도 더 못할 것도 없다. 어떤 세상에서 그가 살아갈 것인지 그리고 어떤 세상을 그들에게 준비해줄 것인지에 달렸다. 따라서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사회생활의 요건이 무엇인지 규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생활을 가장 효과적으로 하기에 개인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조화로운 최선의 인간상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이런 실용적인 목표를 설정한 후에는 학교가 교과과정을 정하면 된다. 현재 학교에서 어떤 인재를 길러내고 있는지 학교 내에서 하고 있는 일들을 살펴보면, 주로 순종적이며 반항하지 않는 봉건적이고 이기적인 자본주의자, 즉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사회에 적합한 인재를 길러내고 있다. 학교교육의 이상은 무의식적인 경우가 많은데 주로 이 둘의 불행한 조합인 경우가 많다. 이것은 이기적인 순종주의자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인데, 이런 학생들은 학교 조직에 조용히 적응하고 교사들 입장에서 걱정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가장 잘 적응할 수 있는 인재상은 개인적으로 독립적이나 즉, 중세의 복종적인 인간에 반대이고 집단의 협력도 가능한 개인 자본주의의 경쟁과는 반대인 인재다. 아직 이는 학교교육에서 낯선 개념이다. (p.285-286)
한 가지 강조하자면, 한 명의 시민을 교육할 때 동시대의 사회문제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지향점이 정기적으로 포함되어야 한다. 시민은 사회의 중요한 문제에 대한 판단의 근거가 무엇인지, 공동으로 책임을 지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또한 시민 의식의 개인적인 발달에 도움을 받아야 하며 궁극적으로 사회발전 전체가 달려 있는 사회적 자아상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시민은 사회 기관을 충분히 활용해 학습할 수 있어야 하며, 또 사실과 의견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하며,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이 무엇이고 사회적인 문제와 관련한 정치적인 이해가 무엇인지 알고 이를 통해 권리를 행사하면서 시민의 책임에 대해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p.298)
점점 더 증가하는 청년 실업을 잊어서는 안 된다. 노조운동은 특정 몇몇 직군의 결합이나 몇몇 특권 노동계급을 대변하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실업자들과 청년 실업의 보호만 위한 것이 되어서도 안 된다. 이런 방향으로 발전한다면 이는 노조운동의 실패를 의미하며 동시에 민주주의 사회의 위험이다. 노조운동은 전체 노동계급의 이해가 노동시장의 조직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노조운동은 각기 다른 분야와 지역의 생산 요구에 어떤 노동력을 제공할지 그 적응 방식을 조정하는 것이어야 한다. 현재는 요동치는 변화로 적응이 매우 어렵고 광범위하다. 더 합리적인 직업 선택은 이 적응 프로세스에 필요한 수단이다. 이것이 기존 노조의 입장에 변화가 있어야 함을 뜻하더라도, 직업의 선택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그냥 놔둘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각각의 노조의 이해에 관한 문제일 수는 있으나 전체 노조운동의 이해에 관한 것일 수는 없고, 사회의 이해와 자라나는 청년의 이해는 다르기 때문이다. (p.305-306)
충분한 규모의 학습 장학금이 마련되어 모든 사회계층으로부터 인재들이 나와 본인이 원하고 관심 있는 분야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가정이 자녀 교육을 위해 져야 하는 부담도 줄어들게 된다. 그리고 예외의 법칙을 적용해서 구시대적이고 해로운 직업 간의 계층 차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저소득층 아이들이 교육을 무상으로 받는 것, 적은 수의 학생이 적은 장학금을 받는 것, 적은 수의 학생들이 무이자 학자금 융자를 받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재학 기간 동안에 생계가 가능한 대규모의 장학금이 필요하다. ‘무상’ 교육은 저소득층 아이들이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원칙적으로 비용에 대해 겁먹을 필요가 없다. 공공이 지원하는 교육 장학금은 투자로 볼 수 있다. 후에 교육을 마친 아이들이 그 가치를 노동시장에서 발휘할 것이다. 즉, ‘학습 노동에 대한 임금’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자신이 희망하는 것 그 이상으로 융자를 얻는다고 하더라도 중산층이나 상류층은 보증인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대부분 농민과 노동자들은 이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능력이 있는 이들은 가족의 지원 없이도 공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야 하는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라도 충분히 크고 충분히 광범위한 재원이 마련되어야 한다. ‘학습 노동에 대한 허락’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도입할 수 있다. (p.306-307)
혈족 관계가 이전의 더 안정적인 관계보다 지금은 훨씬 더 작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현대적인 가족이 아이들을 친족이나 가족 관계로부터 더 쉽게, 심리적으로 자유롭게 해줘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현대 교육에서 역설적인 요구 사항일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을 우리 자신에게서 더 자유롭게 해야 한다. 그들이 우리에게 집착하게 내버려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들이 우리에게 너무 강하게 집착하고 우리의 생활 습관과 생활 태도에 집착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특히 자녀의 수가 감소하여 각 개인이 점점 더 강렬한 부모의 영향과 애정에 노출됨에 따라 그 위험이 임박했다.
일찍이 그들의 양육 환경을 작고 개인적인 가족의 범위에서 벗어나게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래의 삶에서 아이들은 이전보다 신뢰할 수 있는 부모가 적다. 더 큰 직업적, 지리적 이동성과 같은 유형의 현상조차도 우리가 각각의 새로운 세대를 이전 세대와 심리적으로 분리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 생활 습관과 생활 태도에 대해 너무 일방적으로 자녀를 억제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아이들의 양육 환경을 작고 개인적인 가정에서 부분적으로 사회로 이양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러나 자녀의 교육을 어느 정도 가정 밖으로 옮겨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산업화가 함께 가져온 가족제도의 또 다른 변화에 있다. 가정 내 환경은 외부의 교육 환경만큼 효과적이지 않다. (p.329-330)
물론 이런 양육은 아이들을 돌보도록 훈련받은 사람들이 담당해야 할 것이다. 자녀 양육에 대한 진정한 욕구와 적성을 가진 여성은 사회의 이익을 위해 특별히 훈련받은 다음, 8~10명의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활용되어야 한다. 현재 양육에 대해 진정한 재능과 열망을 가진 일부 여성은 자녀가 전혀 없으며, 다른 일부는 한두 명의 육아만 하고 있다. 반면, 많은 여성들은 생리적 모성과 전통에 따라 양육 관련 직업을 가지고 있을 뿐, 여기에 관심이나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기에 많은 요소가 낭비되고 있다.
또한 아이들은 의사와 심리학자의 감독하에 놓일 수 있다. 무엇보다 국민의 삶과 행복에 근본이 되는 분야에서 아마추어리즘을 전문성으로 대체하는 것이 개혁에서 일관적으로 요구된다. 그것은 가정에서 고통받는 많은 아이들과 가정에서 이런저런 유해한 영향에 (예를 들어 엄마의 신경증) 노출된 아이들 삶을 개선할 수 있는 기회도 만들 것이다. (p.333)
따라서 기혼과 미혼의 구별 없이 여성들은 점점 더 많이 직장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재 여성의 유급 고용과 출산을 둘러싼 성향 사이에 치명적인 갈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다.
우선 현 상황에서 많은 여성이 직업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결혼을 자제하는 것은 당연하다. 가족제도가, 여전히 결혼과 자녀가 가정 밖에서 유능한 고용에 상당한 장애가 될 때(또는 직업적 소속이 결혼 가능성을 감소시키는 경우, 예를 들어 교사, 간호사 등) 그러한 결과가 따라오기 마련이다. 여성 상속자나 이미 아이를 키우는 여성들만이 아이를 갖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 갈등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결혼했을 여성이 몇 명인지는 당연히 계산할 수 없다. 그러나 기혼 여성의 권리와 고용 기회가 제한되면 그 수가 증가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스웨덴은 이미 다른 나라에 비해 혼인율이 비정상적으로 낮다는 점이 흥미롭다. (p.344)
더 심오한 사회 변혁을 위한 모든 노력의 근본은 다음 세대의 변화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그 시작은 양육 문제의 해결이다. 이미 성장한 세대는 일반적으로 희망이 없다. 대부분은 이미 있는 그대로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세대에서 우리는 여전히 명확한 사회적 노선에 따라 책임 있는 사고를 할 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것 같다. 협력이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너무 낯설다. 그러나 인구문제에서도 다른 모든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문제와 마찬가지로 산업 전환기의 비사회적 개인주의를 타파하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변화가 필요하다. 그 변화는 실제 시대의 발전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결국 그것은 그 자체로 힘을 받아 앞으로 나아간다. 비극적인 것은 그동안 전통의 유산과 현재의 삶 사이에서 갈등이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부조화로 발전하도록 방치했다는 점이다. (p.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