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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르다는 착각 / 데번 프라이스 / 웨일북

 

 ‘게으름’이라는 단어는 거의 항상 도덕적 비판과 비난이 담긴 어조로 사용된다. 우리가 누군가를 ‘게으르다’고 부르면 단순히 에너지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 단어를 통해 우리는 그들이 큰 잘못을 했거나 무언가 부족하고, 그 결과로서 맞닥뜨리는 모든 나쁜 일을 당해 마땅하다고 암시한다. 게으른 사람은 충분히 열심히 하지 않았고 좋은 결정이 가능해 보일 때도 나쁜 결정을 한 것이다. 게으른 사람은 도움이나 인내심, 연민을 받을 자격이 없다.
 (…)
 우리가 생각하기에 ‘충분히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다’고 판단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많은 장벽과 문제에 대항해 용감하게 싸우고 있다. 나는 이것을 학생을 가르치면서도 보았다. 겉보기에 ‘게으르고’ 성적이 낮은 학생들을 들여다볼 때마다 나는 그들이 정신 건강의 문제, 엄청난 업무 스트레스 혹은 아픈 아이나 노인 가족을 부양하는 책임과 같은 커다란 개인적인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때 내 학생 가운데는 부모 중 한 사람이 죽고, 그 후 자연재해로 집이 파괴되고, 우울증에 걸린 자신의 딸이 입원하는 일을 한 학기 안에 모두 겪은 학생이 있었다. 그 학생은 자신이 겪은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과제물을 제출하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이 모든 비극을 ‘가짜’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위해 어딜 가나 이 일들이 정말로 벌어졌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증빙 서류를 지니고 다녔다. ‘게을러’ 보일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 정도로 강했다. (p.26-27)

 

 우리는 어떻게 게으름이라는 거짓에 세뇌되는가? 대개 부모는 자녀를 앉혀 놓고 이 원칙들을 주입하지 않는다. 그보다 긴 세월 동안 관찰하고 패턴을 인식해 서서히 흡수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노숙자는 너무 ‘게을러서’ 도움을 받을 자격이 없으니 돈을 주지 말라고 말하면, 게으름이라는 거짓의 씨앗이 아이 뇌에 심어진다. 텔레비전에서 장애인이 당연히 누려야 할 도움을 받는 대신 순전히 의지력으로 장애를 ‘극복’했다고 묘사하면,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좀 더 강력해진다. 꼭 필요한 병가를 낸 것에 대해 관리자가 문제를 제기하거나 비난할 때마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개인의 심리에 한층 더 파고든다.
 우리는 근면 성실이 보상받고 한계를 갖는 것은 수치의 원천으로 여겨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니 많은 사람은 끊임없이 무리하고 무언가 거절하면 어떻게 보일지 걱정하며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p.31)

 

 나는 무리해서 일하는 사람들 수십 명과 이야기해 봤는데, 그들 모두 이러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많은 시간 동안 일하고 실제로 버틸 수 있는 것보다 더 자주 일을 수락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게으르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속으로 자신이 이기적이고, 부족하고, 동기가 결여되어 있다는 두려움에 고통받고 있다. 모순처럼 들리지만 이것이 바로 게으름이라는 거짓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 믿음이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우리 모두 나태해지고 무능해질 수 있으며, 약하다는 신호는 무엇이든 불길하다고 말한다. 이 거짓 때문에 많은 사람이 마음속으로 자신은 동기가 있고 유능한 사람인 척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확신한다. 이기적이고 나태한 본능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고, 쉬지 않고,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일의 속도를 늦추지 않는 것이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의 이러한 측면은 우리에게 기본적인 욕구와 필요를 두려워하고 혐오하라고 가르친다. 피곤한가? 그건 잠이 필요하다는 신호가 아니다. 그냥 게으른 것이다. 어떤 복잡한 것에 집중하기가 어려운가? 정신이 산만해졌거나 힘들어서가 아니라 정 반대다. 집중을 잘하려면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한때 좋아했던 일이 싫어졌는가? 철이 없는 것이다. 부끄러울 정도로 동기가 없다면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더 몰아붙여야 한다. (p.37)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우리가 불가능한 수준의 생산성을 바라도록 조장한다. 근무 중 8시간 동안 흐트러지지 않고 집중한 후, 저녁에 운동하고 인스타그램에 나올 법한 근사한 집밥을 해 먹고, 꽤 괜찮은 부업을 하게 한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에 따르면, 가치 있는 사람은 하루를 이상적으로 근면 성실하게 채운다. 의사와의 진료를 빼먹거나, 주유할 때를 놓치거나, 헬스장에 가지 않는 일 따윈 없다. 누군가 선거일에 3교대로 근무하느라 너무 피곤해서 투표를 하지 못하면,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이 나라 정치에서 잘못된 모든 일은 다 그들의 탓이라고 비난한다. 학생이 파트타임으로 종일 아이를 돌본 후 공부할 기력이 없으면,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그가 학위를 딸 만큼 충분히 똑똑하거나 성실하지 않다고 말한다. (p.39)

 

 게으름이라는 거짓을 믿는 사람들에게 경제 개혁, 노동자를 위한 법적 보호, 복지 제도와 같은 것은 불필요해 보인다. 성공을 원하는 사람은 그저 혼자서 열심히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지난 30년 동안 연구한 결과, 미국인 대다수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본능적으로 누군가의 불행에 대해 먼저 그를 탓하며, 특히 그 불행을 게으름의 탓으로 돌린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세상이 공정하고 자업자득이 통한다고 믿으면, 사회복지 제도를 지지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의 궁핍에 대해 동정심을 가질 가능성이 줄어든다.
 노숙자에게 돈을 주지 말라고 자녀에게 말하는 부모와 마찬가지로 미국인들은 게으른 사람에게 베푸는 관대함, 연민, 상호부조는 ‘낭비’라고 여긴다. 아울러 세상이 독립적인 사람들에 의해서만 만들어졌다고 믿으면, 서로 의지하고 연민을 가질 필요가 사라진다. 심지어 타인에게 의지하면 발전에 위협이 된다고 본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에 수십 년 간 노출되면 공적인 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많은 사람이 경제적 불평등의 희생자들이 없이 사는 것은 다 그들의 탓이라고 쉽게 말한다. 이런 관점은 우리 자신의 한계를 혐오하게 만들어 피곤함이나 쉬고 싶은 욕구를 실패의 신호로 보게 만들었다. 더불어 한계나 경계 없이 계속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강력한 내적 압박감을 갖게 했다. 소셜 미디어와 디지털 업무 도구들이 등장하는 바람에 이런 압박을 떨쳐내기가 더 어려워졌다. (p.47-48)

 

 때때로 사람들은 우울증이나 트라우마 때문에 무심해진다. 반복적으로 권리를 박탈당한 후 관심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심리학자들은 이 현상을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부르며, 우리는 이 현상을 학대 피해자, 감금된 사람, 대대로 가난과 인종 차별을 겪은 가정에서 볼 수 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영향력을 잃으면 에너지를 얻거나 동기가 부여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손을 떼고 포기해 감정적으로 자신을 보호한다. 예컨대 직장에서 관리자가 무능하면 직원들은 열심히 해봤자 알아주지 않기 때문에 손에서 일을 놓게 된다. 이런 상황은 미국의 낮은 투표율에서도 볼 수 있다. 투표하지 않는 사람의 대다수는 유색 인종이며 가난하다. 그들은 그들이 택할 수 있는 정치적 선택지들이 그들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느끼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노력을 덜 하는 게 훨씬 합리적이다. 좋다고 볼 수 없지만 이것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p.83)

 

 표현적 글쓰기는 왜 그렇게 효과가 있을까? 우리가 흔히 경시하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마주해야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수성가를 칭송하고 강인한 사람을 미화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 문화적 메시지와 그것이 우리에게 가하는 모든 압박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욕구를 간과하도록 배운다. 심지어 나약하다는 느낌을 갖거나 힘든 감정을 품었다고 스스로를 혐오하기도 한다. 표현적 글쓰기는 종일 꾹꾹 참고 발설하지 않은 취약한 측면을 찾아내고 그것에 경청할 기회를 주기 때문에 효과가 있는 것이다.
 또한 글쓰기 과정이 다른 사람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 타인이 볼 글을 쓸 때, 우리는 스스로 검열하고 글이 충분히 좋은지에 관심을 두게 된다. 표현적 글쓰기는 특히 비생산적이도록 고안되었다. 두서없고, 누가 읽기에도 적합하지 않은 글을 쓴 후 버리면 된다. 이것은 자신이 가진 모든 감정과 교감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p.111-112)

 

 인간은 로봇이 아니다. 우리는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결과물을 내놓을 수 없다. 사실 우리는 하루 2시간 이상 꾸준한 결과물을 낼 수 없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면 놀라곤 하지만 이게 진실이다. 우리는 하루 8시간 내내 일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국가에서 하루 8시간이 타당하고 ‘인간적인’ 일일 근무 시간이라고 여겨진다.
 일터에서 생산적이고 유능한 것은 의지와 결단력의 문제가 아니다. 일을 잘하려면, 휴식을 취하고 삶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몇 시간 더 일한다고 해서 생산성이 그만큼 올라가지 않는다. 인간의 주의와 의지력에는 한계가 있으며, 양질의 일을 하려면 휴식할 시간이 필요하다. (p.133)

 

 심리학 연구는 타인과의 경쟁보다 개인의 성장에 중점을 두는 게 훨씬 더 건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끊임없이 최고가 되고, 가장 생산적이고, 가장 유능하고,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건 몹시 지치는 일이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우리를 늘 불안하게 만드는데, 그래야 우리를 착취하기 쉽기 때문이다. 최고가 되길 원한다면, 결코 숨을 돌릴 수가 없다. 이 세상에는 항상 어떤 식으로든 나보다 ‘뛰어난’ 누군가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신에게 해로운 세계관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치유의 여지가 없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사색의 순간도 없다. 자신에 대해 연민을 갖고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기대를 멈출 때, 비로소 모든 느리고 ‘비생산적인’ 활동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 (p.208)

 

 뉴스는 무서운 속도로 계속 생산된다. 단 몇 시간 안에 어떤 이야기가 알려지고, 대화를 촉발하고, 반응을 낳은 후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 입증될 수도 있다. 업데이트를 위해 온라인 상태를 유지하고 계속 확인하지 않으면, 진짜 진실을 놓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매일 트랜스젠더, 여성, 이민자의 권리를 공격하는 새로운 글이 올라온다. 뉴스는 기후 변화, 제도적 인종차별주의, 팬데믹 확산, 혹은 살인사건에 대한 충격적인 사실의 한 면만을 다룬다. 이런 맥락에서 스마트폰을 끄고 뉴스를 무시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무책임해 보이지만, 불쾌한 사실과 역겨운 선전으로 인해 감각의 지나친 과부하가 발생하도록 방치하는 것도 좋을 게 없다.
 미국심리학회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95퍼센트는 뉴스 업데이트를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중 56퍼센트는 뉴스 따라잡기가 상당한 스트레스를 유발한다고 말한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이 지식과 정보에 대한 우리의 접근 방식에 스며든 게 분명하다. 우리가 계속 많은 것을 알고자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계속 온라인 상태를 유지해야 할 책임감을 아무리 강하게 느낀다 해도 진실은 명백하다. 우리는 너무 많은 데이터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 결과 심각한 해를 입고 있다. (p.223-224)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매우 이분법적인 사고를 부추긴다. 사람들은 상황에 상관없이 열심히 일하거나 아예 관심을 끊는다. 결단력과 개인의 노력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거나 아니면 해결이 불가능하니 노력해 봤자 헛수고라고 생각한다. 이런 식의 사고는 우리가 관심을 갖는 문제에 대해 집착적으로 매달리도록 조장한다.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게 불가능해지면,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포기하는 게 낫다고 말한다. 어떤 주제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실제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방법이 아니다. 마음이 분주해지고 늘 신경을 쓰게 되기 때문에 생산적인 것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실제로는 진짜 싸움을 할 에너지를 앗아간다. (p.229-230)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가 운영되는 방식대로 따라가면, 끊임없이 분노와 두려움을 느끼는 상태로 빠져들기 쉽다. 우리 대부분이 짊어진 무거운 정보의 짐을 극복하기 위해 한계를 정해야 한다. 처음에는 이러한 단계들을 밟아나가는 것이 귀를 막고 세상의 잔혹함에 눈을 감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즉, 무관심이나 게으름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한다. 게으름은 없다. 우리의 한계를 아는 것은 지속할 수 있는 길이자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이다. 정말 중요한 사항들에 집중하도록 방향을 재설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정말 마음을 쓰는 일들에 집중하고 불필요하게 우리에게 해가 되는 일에 대한 노출을 줄일 때, 더 유능하고 건강한 옹호자가 될 수 있다. (p.233-234)

 

 정보를 과도하게 소비하고 싶은 충동을 잠재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 마음을 편하게 먹는 것이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에 중독된 세상에서 끊임없는 자기 계발의 압박은 어마어마하다. 많은 사람이 깨어 있는 모든 순간을 일, 성취, 새로운 기술 습득으로 채워 넣으려 한다. 생산적이고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가 사회에 기여하는 가치가 더 커진다는 게 여기에 깔린 논리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재충전할 시간이 필요하고, 우리의 삶은 생산성에 집중하지 않는 시간을 가질 때 더 활기 넘치고 즐겁다. 무엇보다, 모든 주제에 대해 다 잘 알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오만이고 비현실적이다. 겸손하게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훨씬 더 건강한 방법이다. (p.245-246)

 

 사회 문제를 해결해야 할 응급 사태로 취급할 때, 우리가 열심히 하기만 하면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현실적으로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세상을 더 정의롭게 만들기 위해 싸우고 또 싸울 수 있지만, 내 목표가 수십 년 묵은 문제를 ‘해결’하거나 없애는 것이라면 실패하고 소진될 수밖에 없다. 때때로 그러한 공포감과 죄책감을 다루는 최선의 방법은 그런 감정이 잠시 나를 덮치도록 놔두고 우리가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혹은 그것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슬픈 경험일 수 있지만, 동시에 우리를 해방시키는 경험일 수 있다.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상실에 대해 애도할 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인정하게 된다. 이렇게 하면 문제들을 현실적이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다룰 수 있다. (p.323)

 

 노숙자, 실업자, 가난한 사람을 ‘게으름’의 희생자로 볼 때, 뼈 빠지게 일해야 할 동기는 한층 더 강해진다. 노숙자가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은 충분히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뀌고, 이것은 다시 한계를 넘어서까지 자신을 몰아붙이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을 비난하는 끝없는 고투로 삶을 전락시킨다.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 없으면 우리는 자신에 대해 친절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게으름이라는 거짓과의 싸움은 온종일 일하는 사람에게 힘을 빼고 더 많이 쉬라고 장려하는 일에서 그치지 않는다. 과로하려는 강박은 게으름이라는 거짓의 핵심 요소이므로 그런 충동에 저항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해야 한다. ‘게으른’ 사람들을 혐오하는 문화는 인간관계, 자녀 양육, 신체 치수, 투표를 막는 요인 등등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이 거짓은 우리에게 더 많이 일하는 사람이 더 가치가 있다고 가르친다. 그런 식으로 사람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불안과 비판으로 점철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치료법은 한없는 연민이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을 해체하고 해방되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사회가 우리에게 가르친 ‘게으름’에 대한 모든 비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이 가운데에는 탈학습하기 매우 어려운 것도 있다. 당신이 휴식과 불안전함과 게으름과 나태함의 순간을 누릴 자격이 있다면, 노숙자도 우울증을 겪는 사람도 알코올 중독자도 그럴 자격이 있다. 당신의 삶이 당신의 생산성과 상관없이 가치가 있다면, 다른 모든 인간의 삶도 가치가 있다. (p.326-327)

 

 이 책의 조언을 따르면 그 결과 당신의 침실은 더 어수선해지고, 수신함에 읽지 않은 메일들이 쌓이고, 사람들이 더 이상 당신의 근면함에 대해 칭송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변화 하나하나가 위협적이지 않고 편안하고 자연스럽다고 느낄 때 게으름이라는 거짓을 탈학습하는 데 성공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하루아침에 그런 경지에 도달하는 사람은 없다. 나는 아직도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를 기준으로 삶을 평가하려는 충동을 끊임없이 느낀다. 일에 충분히 몰입하지 않고 성취를 좇지 않는 사람들을 보고 여전히 비판한다. 이런 사고에서 한발 물러서는 데 도움이 되는 색다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나의 반려동물 친칠라를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반려동물과 마찬가지로 이 친칠라는 평생 동안 ‘생산적인’ 일을 한 적이 없다. 하는 일이라곤 먹고, 자고, 내가 준 목각 장난감을 부수는 게 전부다. 하지만 대낮에 축 처져서 졸고 있는 모습을 봐도 나는 친칠라가 얼마나 ‘게으른지’ 경멸하지 않는다. 음식과 휴식과 놀이 시간을 누릴 권리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그 녀석을 사랑하고 귀엽다고 느낀다. 내게 그 녀석의 가치는 활동 수준이나 내 삶에 그 녀석이 ‘기여하는’ 것과 전혀 무관하다. 그것의 가치는 아름답고 불완전하게 살아 있는 데서 온다.
 이 작은 동물의 삶이 그 녀석이 무엇을 하든 말든 상관없이 본연의 가치가 있고 아름답다면, 내 삶도 본연의 가치가 있다는 뜻일 것이다. 친칠라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도 무언가를 많이 할 때 못지않게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인간이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와 상관없이 좋아하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사랑과 안락함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이렇게 누구나 갖는 본연의 가치가 생산성과 무관하다고 깨닫는 건 멋진 일이다. (p.338-3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