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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 가장 한국적인 계급 지도 | 유령들의 패자부활전 / 장석준, 김민섭 / 갈라파고스

 

 『능력주의』는 전후 영국 사회에서 아직 능력주의가 대세가 되기도 전에 이를 정확히 예견했다. 다만 『능력주의』가 잘못 짚은 게 있다면, 현실에 등장한 능력주의 사회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인’ 사회를 예상했다는 점이다. 『능력주의』가 그리는 21세기 사회는 모든 시민에게 ‘균등급’이라는 이름으로 수당을 지급하며, 일자리가 없는 시민에게는 공공이 나서서 가내 하인 일거리라도 만들어 준다. 말하자면 기본소득제와 고용보장제가 실시된다. 게다가 능력주의를 통해 계급·계층 사다리의 맨 위로 올라간 이들이 투기로 지위를 공고히 하지도 않는다. 『능력주의』가 그린 능력주의 디스토피아는 모종의 사회민주주의 사회인 셈이다. 아마도 영은 사회민주주의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진화한 사회조차 능력주의와 결합된다면 얼마나 끔찍할 수 있는지 보여 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능력주의와 최악의 자본주의가 결합된 사회를 ‘실제로’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영의 『능력주의』가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유토피아 소설로 보일 지경이다. (p.33-34)

 

 노동자들이 교육제도에 참여할 기회 자체가 막혀 있던 때에는 당연히 교육 과정에서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일 따위는 노동자들의 관심 밖이었다. 그랬기에 역설적으로 노동자들은 대학 졸업장이나 학위, 시험 합격 이력 따위를 줄줄이 매단 엘리트들에게 주눅 들지 않았다. 자신에게도 교육 기회가 열렸다면 고용주나 관리자가 하는 일쯤은 충분히 해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영에 따르면, “내가 제대로 기회만 있었다면 … 나도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었을 텐데 …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 나는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게 노동자들이 품은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전 국민이 일원적인 교육 시스템에 성공적으로 통합되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제 시험 성적이나 상급학교 진학 여부에 따라 성공한 인생인지 아닌지 평가받는 현실과, 일자리에 따라 부와 권력, 명예가 달라지는 현실이 서로 뒤섞이고 점차 하나로 합쳐지게 된다. 노동계급 자녀 가운데 계층 상승 사다리를 밟는 이들도 적지 않게 생기지만, 훨씬 더 많은 이가 고용주나 관리자의 명령을 받는 자기 처지를 학창 시절의 실패나 태만, 무능력 탓이라 체념하기 시작한다. 이 새로운 세대의 노동자들은 부모 세대보다 가방끈이 조금 길어지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뭔가를 빼앗겨 버렸다. 빼앗긴 것은 평등 의식의 기반이 된 자부심이다. 대신 새로 얻은 것은 저들은 ‘잘났고’ 나는 그렇지 못하니까 당연히 저들이 위에 있고 나는 아래에 있다는 패배감이다. 이것이 영이 예상한 능력주의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다. 이 사회는 그 안에서 노동계급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어떤 점에서는 이전보다 더 심각하게 불평등하다. 불평등이 그 피해자들 사이에서 도전이 아니라 체념과 순종의 대상으로 굳어지기가 훨씬 더 쉬워졌기 때문이다. (p.44-45)

 

 안정적인 단체교섭과 복지 제도 확대 덕분에 서민 가정의 실질소득이 늘고 이에 발맞춰 대학 정원이 증가하자 이들 가정의 아들, 딸들이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에까지 발을 딛기 시작했다. 그들은 각자 자기 집 안에서 대학 학사학위에 도전한 첫 번째 세대였다. 미국에서는 2년제 이상 대학 재학생 중 노동계급의 자녀가 1920년에는 2퍼센트에 불과했으나 1940년에는 5퍼센트로 늘었고, 1960년이 되자 노동계급 자녀 중 아들은 25퍼센트가, 딸은 18퍼센트가 대학에 진학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와 서독에서는 1950년부터 1970년까지 대학생 가운데 노동계급 가정 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이 4퍼센트에서 13퍼센트로 늘었고, 이탈리아는 11퍼센트에서 20퍼센트로, 스웨덴은 14퍼센트에서 23퍼센트로 증가했다.
 60년대 말의 대학 반란은 이런 세대가 대학에 발을 들이고 나서 내놓은 전 세계 공통의 집단적 반응이었다. 특히 서유럽과 일본의 경우가 그랬다. 대중 대학의 길을 앞장서 열어 가던 미국 대학들도 대학생 수 증가 속도에 맞춰 시설과 역량을 확충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물며 다른 나라 대학들은 상황이 훨씬 더 심각했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소수 인원(또한 대다수가 남성)에게 엘리트 교육을 실시하던 시설에 노동계급 자녀나 여성, 소수 인종 같은 생소한 집단을 그것도 과거의 몇십 배나 되는 규모로 수용하다 보니 교수도 부족하고 강의실도 비좁을 수밖에 없었다. 가족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낯선 문화의 본거지에 진입한 노동계급 가정의 자녀는 이런 대학 현실에 크게 실망했다.
 이렇게 대학 시스템을 향한 불만이 고조될수록 대학에서 가르치는 내용에 관한 비판 의식도 고양되기 마련이었다. 정규 강의에서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한 학생들은 동아리 세미나나 정치조직(대개 극좌파) 모임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다. 더구나 대학생 수가 너무 늘어나는 바람에 1970년대가 되면 대졸자 취업이 점점 더 힘들어질 것이라는 예측이 난무했다. 이것은 잘못된 예상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자본주의 아래에서 관료 기구가 어느 정도나 팽창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기에 이런 우울한 전망이 꽤 먹혀들었다. 상당수가 부모 세대를 통해 노동계급 전통과 연결되거나 청소년기까지 그 문화적 자장 안에 있었던 1960년대 무렵 대학생들은 옛 좌파 문화를 재해석하고 전유하여 실망과 불안에 대처하려 했다. 자신을 ‘지식 노동자’라 여기며 시위에 나서거나 노동조합과 함께 연대 투쟁을 벌이며 뿌듯해하던 68세대의 가슴 속에서는 이런 역학이 작동하고 있었다. (p.84-86)

 

 신자유주의 초기 구호 가운데 하나는 ‘대중 자본주의(people’s capitalism)’였다. 신자유주의 국면을 주도한 금융 세력은 자산 시장을 전례 없는 규모로 팽창시키면서 이를 자신들만의 놀이터로 닫아 두지는 않았다. 대중을 자산 소유자·투자자로 합류시켜 이들이 체제를 충심으로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중심부 국가들에서 신자유주의가 굳이 군홧발이나 파시즘에 도움을 구할 필요 없이 헤게모니적 통치를 유지한 비결이었다. 이 게임에 동원된 핵심 집단이 신흥 지식 중간계급이었다. 고임금을 받으며 자기 집을 소유한 지식 중간계급은 주식시장, 부동산시장 등등에 뛰어들어 시장 규모를 배가해 주고 불로소득을 확보했다. 고등교육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에 국가나 기업의 관료 체계 안에서 자리를 잡고 나면 그때부터는 자산 시장 참여를 통해 그에 맞는 부를 쌓는 것이 지식 중간계급이 추구하는 ‘좋은 삶’의 전형이 되었다. 영의 『능력주의』에 등장하는 능력주의 체제의 지배층은 이러한 현실에 비하면 차라리 청빈한 편이다. 그들은 관료 조직 안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우월감을 느낄지언정 주식 투자나 부동산 투기는 하지 않는다. 영은 자신의 가상 세계에 ‘재테크’라는 요소를 갖춰 줘야 함을 그만 깜빡 잊고 말았던 것이다. (p.88-89)

 

 서로 다른 계급을 섞어 놓는 국가의 여러 제도 가운데 전시의 군대는 의도하지 않게 평등을 부추기지만, 평화 시기의 학교는 의도와는 달리 불평등의 외양만 바꾼다. 노동자 가정 출신 학생들은 이런 현실을 스스로 ‘간파’하고 일찌감치 수업보다는 또래집단 문화에 더 몰두하기도 했다. 영국 노동계급에게 중등교육 기회가 보장된 지 한 세대쯤 지난 1970년대 중반에 학교 현장을 연구한 폴 윌리스의 『학교와 계급재생산(Learning to Labour)』은 노동계급과 공교육의 이 불행한 결합을 생생히 포착했다. 더 많은 교육 기회의 보장으로 평등을 강화한다는 모든 시도는 어디에서든 이런 씁쓸한 결산을 남겼다.
 게다가 더 나쁜 결과가 있었다. 영이 『능력주의』에서 밝힌 불길한 예견이 그대로 맞아떨어진 것이다. 공교육 확대는 평등의 약속을 실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앞 세대 노동계급이 견지하던 자생적 평등주의만 약화시켰다. 과거에 비해 더 많은 세월을 학교에서 보내게 된 노동자들은 노동계급으로 남은 현재 처지를 인생의 결정적 시기에 ‘시험’(구체적인 시험들이라기보다는 대문자 시험)에서 실패한 탓이라 여기기 시작했다. 전혀 다른 세상에서 나고 자란 고용주 앞에서 당황하던 시대는 지나갔지만, 학교 동기일지도 모르는 관리자 앞에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낭패감을 맛볼 수 있음이 확인됐다. 저들은 시험을 통과하는 데 성공한 유능한 자들이고 나는(‘우리는’이 아니다!) 실패한 무능한 존재라는 낯선 생각이 퍼져 나갔다. 이제 노동계급에 속한다는 사실은 자본가보다 더 인간답다는 자부심이 아니라 인생의 시험에 실패했다는 자책감이 드는 쪽에 더 가까워졌다. (p.99-101)

 

 직접적 이익을 받지도 않는데 왜 능력주의를 지지하는가? 그 이유는 지식 중간계급 전체가 공유하는 특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 지적했듯 지식 중간계급이란 사회를 계층 상승 경쟁이 벌어지는 사다리로 바라보는 집단이다. 그들이 이런 세계관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좀처럼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데는 물적 기반이 있다. 초등학교에서 대학·대학원에 이르는 긴 학교 생활과, 국가기구든 기업이든 관료적 조직에서 보내는 직장 생활이다. 이 두 경험은 지식 중간계급의 일상생활과 생애 주기에서 막대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런데 오늘날 이 두 제도는 능력, 실은 지능을 주된 기준으로 삼는 끝없는 경쟁을 통해 더 높은 등급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다그치는 구조를 띠고 있으며, 개인의 성공 혹은 실패를 그 개인의 능력(지능)과 노력 탓으로 돌리게 만든다. 상위 중간계급은 이런 구조가 지배하는 일상 속에서 실제로 대를 이어 성공하는 경향이 있으며, 따라서 능력주의의 열혈 지지자가 되는 게 당연하다. 반면에 하위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은 둘 다 패배를 맛보지만, 이 패배에 반응하는 방향은 사뭇 다르다. 노동계급은 경쟁에서 일찌감치 퇴장하며 능력주의를 묵인하더라도 마지못해 그러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하위 중간계급은 학교와 관료 조직 안의 경쟁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며 다만 경쟁이 좀 더 ‘공정’해지길 바라거나 아니면 재도전 기회(내가 아니라 자녀를 통해서라도)를 얻길 바란다. 상위 중간계급의 직접적 이익뿐만 아니라 하위 중간계급의 이런 동의와 미련이 능력주의적 사고와 시스템을 지탱해 준다. (p.109-110)

 

 적어도 1996~1997년 노동법 개악 반대 총파업 때까지는 한국 사회에서도 노동계급이 전진하고 있다는 진단이 과장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그때까지 매년 반복되던 대규모 사업장의 격렬한 파업 투쟁 탓에 한국의 노동자들은 당시에 전 세계 노동계급 가운데 가장 전투적인 집단이라는 평가까지 받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이미 냉철한 노동운동가들이 불안한 눈길로 바라봤던 한 가지 결정적인 선택이 이후 노동계급의 성장을 가로막고 왜곡했다. 어떤 선택인가? 기업별 노동조합을 넘어 노동계급 조직을 건설하지 못한 것이고, 기업별 노동조합에 적응한 노동계급 내 일부 집단이 그들만의 임금 인상과 고용 안정을 계속 추구한 것이다. (p.141-142)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21세기 들어 한국 사회에서는 고등학교 졸업자의 거의 90퍼센트가 2년제 이상 대학에 진학하기에 이르렀다. 사실상 고등교육까지 보통교육이 된 상태다. 노동자 가정 자녀부터 지배 엘리트 집단의 상속 대상자까지 거의 모두가 초등학교에서 대학·대학원에 이르는 일원적 교육 시스템에서 장장 20여 년에 걸친 성장기를 보낸다. 슬프게도 계급을 뛰어넘는 이 긴 학창 시절은 졸업 후의 계급 불평등을 완화하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 오히려 학교 밖의 불평등이 학교를 계급·계층 사다리의 더 높은 곳으로 오르려는 치열한 경쟁의 장으로 만든다. 고졸인지 대졸인지, 대학 서열 체제의 어디쯤에 자리한 대학에 들어갔는지, 졸업 후 전문직 자격증을 따거나 대기업·공기업 정규직 채용 시험을 통과했는지 등등에 따라 계급 위치가 정해지고 그 결과가 평생을 간다. 각 관문은 ‘능력’에 따라 학생의 성공과 실패를 판가름한다고 내세우지만, 여기에서 ‘능력’이란 지식 중간계급의 일자리에 특화된 능력, 즉 지능을 뜻할 뿐이다. 이 한 가지 기준으로 성공과 실패, 지배자와 피지배자, 좋은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을 가르고, 역으로 각자의 삶에 나타나는 이런 커다란 차이는 개인의 지능과 노력 탓으로 돌려진다. 이런 한국 사회의 모습은 영이 상상한 ‘능력주의 사회’의 가장 순수한 구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p.150-151)

 

 상대적으로 상위든 하위든 한국의 중간계급 역시 사회를 거대한 경쟁 사다리로 바라보는 데 익숙하다. 그들이 수행하는 일이나 소득·자산 수준만큼이나 이러한 세계관이 그들을 중간계급으로 묶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관과 교육제도가 서로 단단히 얽혀 능력주의 시스템이 고착될 때에 지식 중간계급의 하위 계층은 상위 계층과 달리 승리보다는 패배의 운명에 더 많이 내몰린다. 부동산 투자는 금융위기 가능성에 가슴 조이게 하는 주택 담보대출의 무거운 짐으로 변질될 수도 있고, 교육 투자는 평생에 걸친 학자금 대출 상환 부담으로 돌아오기 쉽다. 이런 패배의 경험이 쌓이다 보면 이 계층은 현 체제의 가장 아픈 구석을 파고드는 비판 세력으로 돌변할 수도 있다. 특히 고등교육까지 마치고도 정규직 노동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연장해야 하는 이 계층의 젊은 세대는 더욱 그러하다. 2008년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나라들에서는 이 집단의 일부가 실제로 ‘밀레니얼 사회주의자’가 됐다. 지식 중간계급의 일부가 중간계급 세계관을 버리며 중간계급에서 이탈한 격이다.
 하지만 한국은 적어도 아직까지, 이와 전혀 다른 양상이다. 젊은 세대를 비롯해 하위 중간계급 대다수가 ‘강남 중산층’을 모방하고 반복하는 경쟁에서 철수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이 경쟁이 보다 ‘공정’하게 이뤄지길 요구한다. 실제로는 능력주의 시스템을 통해 안정적인 과실을 쟁취하기 힘든데도 이 시스템에 여전히 기대를 건다. 그래서 이들 사이에서는 예컨대 ‘고시’ 신화 같은 요소가 아직도 큰 힘을 발휘한다. 지식 중간계급 전체가 궁핍에 시달리던 아득한 옛날(1950년대)에 구원의 동아줄 노릇을 하던 ‘고시’와 같은 통로가 자신들에게도 열려있길 바라는 것이다. 덕분에 한국형 능력주의는 시험주의의 외양을 강하게 띠게 된다. 이런 식으로 지식 중간계급의 하위 계층 중 다수는 상위 계층보다 오히려 더 열렬하게, 능력주의의 신실한 신자가 된다. 사실 상위 계층만 있다면 능력주의가 이토록 세를 넓히며 번성하지는 못할 것이다. 능력주의의 성공 비밀은 지식 중간계급 상위 계층이 아니라, 하위 계층의 열띤 지지에 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이는 더더욱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어쩌면 현 체제를 뒤흔들 화약고가 될 수도 있는 그 집단이 체제에 누구보다 더 단단하게 결박돼 있기 때문이다. (p.153-154)

 

계급 없는 사회는 다양한 가치를 소유하는 동시에 그런 가치에 근거해서 행동하는 사회가 되리라. 우리가 사람들을 지능과 교육, 직업과 권력만이 아니라 친절함과 용기, 상상력과 감수성, 공감과 아량에 따라서도 평가한다면, 계급이 존재할 수 없으리라. 어느 누가 아버지로서 훌륭한 자질을 갖춘 경비원보다 과학자가 우월하며, 장미 재배하는 데 비상한 솜씨를 지닌 트럭 운전사보다 상받는 일에 비상한 기술이 있는 공무원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모든 인간은 … 세상에서 출세할 기회가 아니라 풍요로운 삶을 이끌기 위해 자기만의 특별한 역량을 발전시킬 기회를 균등하게 누리게 되리라.


 “지능과 교육, 직업과 권력”이 아니라 “친절함과 용기, 상상력과 감수성, 공감과 아량”에 따른 평가라? 너무 천진난만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영이 확실히 불친절하기는 하다. 그러나 영이 가리키는 기본 방향이 뭔지는 알겠다. 우리의 논의에서 사용한 어휘를 활용한다면, 이렇게 재정식화할 수 있다. 능력주의는 지능이라는 단 하나의 능력만으로 만인을 재단하는 ‘능력의 일원론’이다. 이에 맞서 영이 ‘첼시 선언’이라는 가상 문서의 문장들로 제시하는 대안은 ‘능력의 다원론’이다. 인간이 키워나갈 수 있는 무수한 능력들을 그것대로 존중하고 인정하며 더욱 발전시켜 나가게 하자는 것이다. “풍요로운 삶을 이끌기 위해 자기만의 특별한 역량을 발전시킬 기회를 균등하게 누리게” 하자는 것이다. 그런 다양한 능력들의 극히 단출한 예시가 곧 “친절함과 용기, 상상력과 감수성, 공감과 아량”이다. (p.165-166)

 

 여기에서 꼭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진실이 하나 있다. 개인의 다양한 역량을 자유롭게 발전시키려면 개인의 자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원자적 개인은 늘 가장 강력한 조직들, 즉 국가기구와 거대 기업에게 무릎을 꿇게 된다. 이 조직들의 기준 아래 정렬하려고 안간힘을 써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결국 생존마저 할 수 없는 처지가 된다. 이는 신자유주의 시기에 인류가 처절히 확인한 진실이며, 능력주의는 이런 소외의 한 양상이다. 능력주의란 국가기구와 기업이 요구하는 능력 기준에 맞춰 우리 각자의 삶을 잘라내고 끼워 맞추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해법은? 자유로운 개인은 자발적 조직들로 모여야 한다. 이런 조직들이 최소한 국가기구, 기업 등과 공존하며 대등한 힘을 발휘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자유주의가 늘 약속하지만 끝내 실현하지는 못하는 실질적인 다원주의가 보장된다. 물론 능력의 다원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p.174-175)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물음 자체다. 그람시가 강조했듯이, 인간이란 (정해져 있는 답이 아니라) “인간은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자본주의와 결합된 모든 경직된 이데올로기들은 인간을 이미 누군가로 좁게 규정해 놓는다. 서로 경쟁하는 존재이고, 항상 이익과 손실을 따지는 경제인이며, 경제적 기여에 따라 거대한 피라미드의 각 층에 배치될 수 있는 대상이다. 능력주의의 가장 뻔뻔한 점이 여기에 있다. 능력주의 안에는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이 이미 나와 있다. 능력주의 안에서 인간은 살과 피를 지닌 인공지능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창조물인 게 아니라, 오히려 이것이 인간이 도달해야 할 궁극 목표가 된다. 이 목표에 얼마나 근접했는지에 따라 부와 권력이 배분되며, 누구든 빠짐없이 이 경주에 동참하는 것이 곧 자유이자 평등(한국식 표현으로는 ‘공정’)이 된다.
 한데 돌봄 노동자들의 조직은 끊임없이 이런 고정관념에 의문을 던지고 이를 부정하거나 공격, 전복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나 삶에서 마주치지 않을 수 없는 힘겹고 고된 순간들을 떠올려 보자. 갑자기 질병의 덫에 빠지거나, 홍수나 태풍, 지진, 해일 같은 재앙이 덮치거나, 전에 없이 길어진 노년의 시간을 고독으로 채워야 할 때들 말이다. 이런 때 자기만 잘났다는 오만에 빠진 지능은 늘 실패하고 좌절하게 마련이다. 그런 순간마다 삶이 이어지도록 껴안고 부축하며 등을 두드려 주는 것은 이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역량들, 돌봄의 역량들이다. ‘돌봄’으로 번역되는 영어 단어 care는 “보살핌, 관심, 걱정, 슬픔, 애통, 곤경”을 뜻하는 고대 영어 caru에서 나왔다. 하나같이 인간이 결코 떨칠 수 없는 본래의 연약함에서 비롯된 감정이자 행동, 상황이다. 능력주의적 경쟁이 각자의 잘남을 인정받으려 함인 데 반해 돌봄이란 이렇게 우리 모두의 못남을 보살피려 함이다. 그렇기에 돌봄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생명체의 요구와 취약함을 전적으로 돌본다는 것, 그래서 생명의 연약함과 직면하는 것”은 “어렵고 지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우리는 이 어려운 일을 떠안아야 하며, 그 최전선에 돌봄 노동자들이 있다. 그러니 돌봄 활동의 역량들이란 고작 자본을 소유하고 지능을 대표하는 자들이 감히 규정하고 평가할 대상일 수 없다. (p.185-186)

 

 

의료윤리 / 마이클 던, 토니 호프 / 교유서가

 

 법의 역할은 윤리와 아주 다르다. 사회 구성원이 처벌이나 보상을 통해 법의 영향을 받는 것처럼 보건의료 전문가들도 마찬가지다. 보건의료 전문가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법을 따라야 하지만, 전문가에게는 윤리적 질문이 남는다. 이 상황에서 법을 지켜야 할까? 대부분의 상황에서 답은 일 것이다. 법이 윤리적으로 그르다고 해도,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한 개인으로서 법을 준수할 윤리적 의무가 따른다. 그러나 개인이나 집단이 부당한 법에 대해서는 그것을 어길 권리가 있다고 판단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의 발전을 가져온 예는 많이 있다. 법적 판단은 법원에서 내리지만, 윤리적 판단은 우리 스스로 내린다. 이런 차원에서 윤리는 개인의 문제다. (p.15)

 

 열 개의 구멍난 바가지 전략
 이 전략은 ‘오류가 있는 여러 개의 논증을 제시하고, 이를 전부 합쳐서 겉보기에 타당해 보이는 논증을 만드는’ 방식이다. 이를테면, 물을 먼 거리까지 옮기고 싶으면 구멍난 바가지가 아무리 많아도 소용없다. 물이 다 새버릴 테니까.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한 개(또는 여러 개)의 튼튼한 바가지다.
 여러 개의 오류가 있는 논증으로 특정 주제를 방어하려는 사람들이 이런 전략을 흔히 사용하며, 그들은 논증을 여러 개 제시하였으니 자신의 견해를 충분히 정당화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개(또는 여러 개)의 ‘탄탄한’ 논증이다. 안락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견해를 지지하는 논증 여러 개를 제시했을 때, 모든 논증이 타당하지 않다면 견해를 옹호할 수 없다.
 그 수와 상관없이 여러 개의 타당하지 않은 ‘논증’을 추가한다 해도 타당한 논증으로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각각의 항목이 개별적인 비중을 지니는 증거의 축적과 구분해야 한다.(Flew, 1989) (p.63-64)

 

 1851년 의사 새뮤얼 카트라이트는 뉴올리언스 의학 저널에 실은 논문에서 배회증(徘徊症)이라는 정신질환을 다뤘다. 이 질환은 흑인 노예가 걸리며, 백인 주인으로부터 도망가려는 증상을 보인다는 설명이었다.
 1952년 『미국 정신장애진단 및 통계편람』 1판이 출간되었다. 동성애는 정신질환으로 거론되었으며 1968년까지 그 지위는 굳건했다. 1973년 미국 정신의학회는 근소한 표차로 동성애를 정신질환 목록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유럽 대부분 지역의 질병분류체계는 국제보건기구가 발간하는 국제질병분류(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Diseases)를 따른다. 최신판에서는 페티시즘을 정신질환으로 분류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특정 무생물을 통해 성적 흥분과 만족을 얻으며…… 옷이나 신발 등을 그 대상으로 삼는다”. 20년 후에도 페티시즘은 정신질환으로 분류될까? 그것이 과연 맞는 것일까? (p.94-95)

 

 좀더 근본적인 질문을 생각해보자. 인간 생명의 값은 얼마인가? 이 질문은 불편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질문을 회피하면 오히려 생명을 잃게 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부족한 의료 자원을 분배하는 방식을 사회가 결정하는 것은 근본적인 질문이 바탕에 깔린 상황 중 하나다.
 전 세계의 어떤 보건의료체계도 모든 상황에서 모든 환자에게 최고의 치료를 제공할 만큼 충분한 재원을 확보하고 있지는 않다. 그런 큰 비용을 보건의료에 들이기는 어렵다. 새롭고 더 나은, 값비싼 치료법이 계속 개발되고 있다. 추가 비용만큼 추가 이익이 창출되는 때는 언제일까? 미국과 같은 사영 의료체계와 보험기반체계의 혼합, 영국 국민의료보험과 같은 공적부조체계를 포함한 모든 보건의료체계는 이 질문에 답해야만 한다. 최고의 치료를 항상 제공할 수는 없으므로 교환이 이뤄져야 하며, 보건의료는 ‘할당’될 수밖에 없다. 완전히 사영으로 운영되는 체계에서조차 보건의료는 할당된다. 그것은 각자의 지불 능력에 따르며, 이는 가장 불평등한 방식일 것이다. (p.13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