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얼마나 정의로운가 / 폴커 키츠 / 한스미디어
“답안 작성자의 판결은 무엇인가? 유죄인가 무죄인가?” 채점된 답안지를 돌려받았을 때 가장자리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화가 나서 교수를 찾아가 따졌다. “정해진 답은 없다고 누누이 강조하셨잖아요? 그래 놓고 정해진 답이 있는 것처럼 물으시니 정말 황당하네요. 저는 이 사건에서 고려해야 할 모든 내용을 답안지에 썼어요. 어떤 판결을 내릴지는 판사에게 달린 거죠.”
교수는 한참 동안 나를 빤히 보다가 말했다. “이 사건은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여자는 죽었고 남자는 법정에 섰단 말입니다. 법학자와 철학자의 차이가 뭔지 알아요? 철학자는 와인을 마시며 사건에 대해 사색할 수 있어요. 진실을 알아낼 때까지 혹은 와인이 떨어질 때까지. 심지어 결말을 내지 않고 그냥 열어 두어도 됩니다. 정해진 답은 없으니까요. 맞는 말이에요. 이 사건을 맡은 판사 역시 와인을 마시며 사색해도 됩니다. 하지만 철학적인 답을 내놓아선 안 됩니다. 당장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해야 한단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나는 이해했다. 법은 모든 ‘철학적’ 물음을 실질적 물음으로 바꿔 답을 내놓는다. 법은 어떻게든 결말을 내야 하는 연극 차원으로 철학을 끌어올린다. 철학과 달리 법은 어떤 사건도 열린 결말로 둘 수 없다. 사람마다 견해가 다를 수 있는 문제뿐 아니라 학술적으로 불확실한 물음일 때도 어떻게든 결말을 내야 한다. 대마초는 얼마나 해로운가? 동물도 자극을 느끼는가? 아이들은 두 어머니 혹은 두 아버지보다 한 어머니 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야 더 좋을까? 모든 사람이 남성 혹은 여성 하나의 성별만 가질까? 이런 종류의 많은 물음들은 어쩌면 10년 혹은 100년 뒤에 좀 더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장’ 대마초를 피우다 법정에 선 사람이 있다면, 남성도 여성도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법치국가에 살고 법과 규칙이 삶의 질서를 세울 거라 믿는다. 법치국가는 답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답을 내놓아야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독일연방공화국이 세워진 이래로 이 물음의 답은 자주 바뀌었다. 모든 변화 뒤에는 잘못되었음을 확신했던 누군가가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확신을 위해 몇 년 혹은 몇십 년을 싸웠다. 이 책에서 읽게 될 그들의 사건이 없었다면 오늘날 독일의 법은 다른 모습일 터이다. 그들은 당신과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법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우리의 힘에 대해서도 다룬다.
정의란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무엇이 옳고 무엇이 정의로운지를 결정하는데 인간은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처음부터 두 입장이 대립했다. 자연법 옹호자들은 말한다. 정의는 창공에 있는 별과 같다고. 별들은 인간과 별개로 존재한다. 인간은 그것을 보고 묘사하고 이름을 붙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만들거나 없앨 수는 없다. 별의 위치를 바꿀 수도 없다. 정의는 인간이 법에 정의를 입히느냐 아니냐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정의는 인간의 본성에, 관념의 높은 서열에, 창조 질서에 존재한다. 우리는 이 본성을 살피고 무엇이 정의인지 인지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 본성을 묘사할 수는 있지만 바꾸지는 못한다. 인정하든 안 하든 자연법은 모두에게 적용된다. 자연법 옹호자에게는 정의가 곧 법이다. ‘정의롭지 못한 법’은 있을 수 없다.
이런 견해에서 인권 관념이 나왔다. 모든 인간에게는 어떤 상황에서도 언제 어디서나 ‘양도할 수 없는’ 자연적 권리가 있다. 아무도 인간에게서 이 권리를 빼앗을 수 없다. 자연적 권리는 국가, 정부, 법보다 강하다.
자연법 학설은 인권의 근거로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학설에는 약점이 있다. 무엇이 정의롭고 옳은지가 그렇게 명확하다면 모든 법이 정의로울 것이므로 우리는 법과 정의에 대해 토론할 필요가 없을 터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더더욱. 자연법 학설은 인권의 근거를 마련할 뿐 아니라 독재자들의 요구도 만족시킨다. 그러나 실상 개인이 ‘정의롭고 옳다고’ 여기는 것이야말로 가장 주관적이다.
그래서 자연법의 반대 입장인 법실증주의가 발달했다. 법실증주의자들은 말한다. 정의는 별이 아니라 블루베리머핀과 같다고. 그것은 해당 요리법에 따라 인간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블루베리를 좋아하든 아니든 머핀이 오븐에서 나오면 모두가 그것을 먹어야 한다. 법이란 국가가 특정 과정을 통해 결정한 것이다. 그것이 정의롭다고 여기든 아니든 모두가 그것을 지켜야 한다. 법실증주의는 정의와 도덕에서 법을 분리한다. 그러므로 ‘정의롭지 못한 법’ 역시 있을 수 있다. 정의롭지 못한 법 역시 정의로운 법과 똑같이 유효하다.
법실증주의의 자명한 장점은 법적 안정성 보장이다. 특정 법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면 그것을 바꾸도록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그 법을 간단히 무시해 버릴 수는 없다.
“군인은 살인자다.” 이것은 사실의 주장인가 아니면 개인의 의견 표명인가?
살인은 형법에서 나온 법적 개념이다. 형법에 따르면, “살인자는 살해욕, 성욕의 만족, 탐욕 또는 기타 비열한 동기에 의하여 간악하거나 잔인하게 또는 공공 위해의 수단에 의하여 다른 범죄를 가능하게 하거나 또는 은폐할 목적으로 사람을 살해한 자를 말한다.” 살인은 최고형으로 처벌되고 살인자는 중대한 범법자이다.
“군인은 살인자다”를 사실 주장으로 이해하면, 이것은 허용되지 않는 발언이다. 거의 모든 군인은 형법상의 살인을 저지르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도 표현의 자유를 근거로 거짓말을 유포해선 안 된다.
그러나 검사들만 ‘살인자’라는 낱말을 사용하는 게 아니다. 누군가 파리를 죽이면 동물 보호자는 “살인자!”라고 소리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외침으로써 파리를 죽이는 행위가 옳지 않다고 여긴다는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스티커 글귀를 이해하면 여기에는 두 가지가 내포되어 있다. 첫째, “군인은 사람을 죽인다.” 둘째, “나는 이런 살인이 옳지 않다고 여긴다.” 첫 번째는 사실 주장이고 두 번째는 의견 표명이다. 두 개가 한 문장에 담길 수 있다! 사실 주장의 내용은 진실에 해당한다. 군인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반면 이런 군사적 행동이 옳은가에 대한 물음에는 ‘참’ 혹은 ‘거짓’으로 대답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일상에서 사용하는 ‘살인’은 일반적인 동사 ‘죽이다’에 대한 가치 평가가 들어간 낱말이다. ‘살인자’를 형법상의 개념이 아니라 일상 언어로 이해하면 크리스티안의 스티커는 의견 표명이다. ‘군인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나는 혐오한다’라는.
‘살인자’라는 낱말을 해석할 가능성이 적어도 두 가지 있다. 법원은 둘 중 어느 것을 사용해야 할까? 판사는 때때로 수수께끼를 풀 수밖에 없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는 개방적인 분위기를 장려한다. 의견을 표명하기 전에 먼저 변호사에게 가서 표현을 검사받지 않아도 된다. 그러므로 어떤 표현을 황금 절대 저울에 올려선 안 된다. 표현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표현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사실 주장과 의견 표명을 극단적으로 구별해서도 안 된다. 두 가지는 표현의 의미를 해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명확히 구분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의견은 종종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 우리의 사례가 보여 주듯이 둘은 쉽게 혼합된다. 오로지 확실한 정보만 유포할 수 있다면, 이것이 자유로운 소통을 방해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견이 허공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근거가 존재하는 한, 의견에는 추측이 들어 있을 수 있다. 한 가지 표현이 여러 종류로 해석될 수 있으면, 법원은 이것을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의견으로 이해해야 한다.
법원은 ‘군인은 살인자다’라는 선언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객관적으로 해명하고자 했다. 우리가 앞에서 확인했듯이, 의견 표명일 경우 이것이 불가능하다. 오해가 깊이 뿌리를 내렸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의견을 기꺼이 ‘참’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거짓’으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 의견에 동의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아주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그러나 의견에는 옳고 그름이 없고, 모든 의견은 헌법 앞에 동등하다. 그래야 국가가 의견 감시자로 나서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내가 의견을 표명하기 위해 30년을 조사하고 좋은 주장과 근거를 수집했느냐 혹은 친목 모임에서 술에 취해 혼잣말로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모두가 의견을 가질 수 있다. 의견에 대한 근거를 대지 않아도 되고 숙고 끝에 가져야 하는 것도 아니다. 비합리적인 의견이라도 괜찮다. 감정적 폭발도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는다. 다른 사람이 내 의견을 유용하게 혹은 해롭게, 가치 있게 혹은 쓸모없게 여기느냐는 상관없다.
그러므로 헌법재판소는 군인이 일상적 의미의 ‘살인자’인지 아닌지에 대해 판결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과제가 아니다. 헌법재판소는 오로지 누군가가 군인을 살인자라고 해도 되는지만 판결할 수 있다. 헌법재판소는 판결에 대한 ‘안내서’에서 이것을 설명했다. 전쟁에서의 살해를 ‘옳은 일’로 여길지 말지는 각자가 판단해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누군가 예술을 정의하려 시도하면 즉시 ‘이의 있습니다!’라고 외칠 것이다. ‘개념 정의’는 곧 ‘한계’를 뜻하고 예술가는 바로 그런 한계를 시험하고 깨고 제거하는 일을 한다. 예술은 한계를 깸으로써 모든 개념 정의를 없앤다. 예술이라는 존재 자체가 개념 정의를 거부한다.
이런 견해는 법정 밖에서 아무 문제가 안 된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예술 개념을 가진다고 해도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 예술가도, 갤러리도, 관람객도 그것에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법정에서는 어떤 사람이 감옥에 가느냐 마느냐가 여기에 달렸다. 그러므로 법정에서는 정의를 명확히 내려야 한다. 어떤 법이 국가에게 개를 보호하라고 요구하면, 국가는 어떤 동물이 개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국가는 개를 만났을 때 개를 보호할 수 있다. 어떤 동물이 개냐 아니냐가 명확히 해명되지 않은 채 열려 있어선 안 된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국가가 예술을 보호해야 한다면 국가는 무엇이 예술인지 알아야 한다. 혹은 무엇이 예술이 아닌지도. 무엇이 예술의 자유를 누릴 수 없는지 명확히 해야 한다. 뒤샹처럼 누군가가 “내가 만드는 것은 예술이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결정할 수 없다. 그러면 모두가 예술의 자유를 근거로 교묘하게 빠져나갈 터이다.
양심을 객관적으로 점검하려면 무엇을 잣대로 삼아야 할까? 법원은 이것을 명확히 밝힐 수 없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좋은 예술’과 ‘나쁜 예술’을 구별하고 오직 ‘좋은 예술’만 보호한다면 예술은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예술의 자유에서 확인했다. 또한 ‘올바른 의견’과 ‘틀린 의견’을 구별하고 ‘올바른 의견’만 보호한다면 표현의 자유는 있을 수 없다. 양심의 자유도 마찬가지다. 누구든지 고유한 양심을 가질 수 있고 양심의 정당성을 증명할 필요가 없을 때만 양심의 자유가 보장된다. 이런 ‘주관적 양심’에 따르면, 양심적 결정의 내용을 따져선 안 된다.
인간의 존엄성은 그 무엇과도 저울질할 수 없다. 의무론적 관점과 결과론적 관점의 대결에서 보면, 인간의 존엄성은 의무론적 관점에서 결정해야 한다.
생명권은 헌법 제2조 2항에 비로소 등장한다. 생명에 관한 권리들은 법률 유보의 원칙에 따라 “법률에 기해서만 제한될 수 있다.” 생명권은 다른 가치와 저울질될 수 있다. 생명권은 다른 법률에 따라 제한될 수 있다. 이것은 껍질을 깐 삶은 달걀이다.
말하자면 국가는 상황에 따라 어떤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지만, 그 사람의 존엄성은 절대 훼손해선 안 된다.
당연히 이런 관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존엄성이 생명보다 중요할까? 존엄성도 생명이 있어야 가능한 것 아닌가? 인질범은 인질을 객체로 만들어 인질의 존엄성을 훼손하지 않나? 인간의 존엄성은 윤곽이 명확한가? 인간답지 않게 행동하는 인질범은 스스로 인간의 존엄성을 버리지 않았나?
이 모든 질문들은, 범인의 존엄성을 훼손할 수 없다는 이유로 결국 인질을 구하지 못하면 모두의 마음이 편치 않다는 걸 반영한다. 그러나 이 질문들은 또 다른 뭔가를 암시한다. 이 질문들은 국가를 범죄자와 같은 수준에 둔다. 범죄자가 존엄하지 않게 행동하기 때문에 국가가 범인의 존엄성을 더는 존중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이런 ‘덫’에 걸리지 않는 것이 법치국가의 특징이다. 국가는 모든 인간을 인간으로 대한다. 설령 어떤 사람이 짐승으로 평가되더라도 마찬가지다. 법치국가는 범죄자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 이런 우월성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국가가 때때로 무기력해 보이는 것을 감내해야 한다. 국가가 스스로 정한 규범 때문에 인질을 구출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요약하면, 시한부 환자가 의료적 도움을 거절하면 법은 환자의 뜻을 존중한다. 아프든 건강하든 자살을 원하는 사람은 자살을 해도 된다. 단, 다른 사람이 그에게 독을 주입해선 안 된다. 하지만 공공연하지 않게 조용히 독을 마련해 주는 것은 괜찮다. 어떤 사람이 독을 삼키려 하면 목격자는 그것을 말려야 한다. 그러나 E씨처럼 삶이 고통인 것이 명확하여 죽고자 하는 소망이 타당해 보일 때는 예외를 인정한다. 그 외의 모든 경우에는 혼자 몰래 독을 마셔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공통된 원칙이 하나 있다. 인간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사회는 원치 않는다. 그러나 사회는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힘겨운 상황이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이 견해는 앞에서 언급했던 아리스토텔레스와 쇼펜하우어의 주장을 조합한다. 한편으로 삶의 공포가 죽음의 공포를 압도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자살은 사회에 해를 끼친다.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 유성호 / 21세기북스
시대와 환경에 따라 삶이 끝나게 되는 원인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현재 우리나라 사망 원인 1위는 암이고 그다음이 심혈관 질환, 뇌혈관 질환이다. 1년에 사망하는 약 28만 명의 사람 중에서 13만 명이 이러한 질병으로 죽는다. 우리도 언젠가는 분명 지금의 삶에서 소멸하게 될 텐데, 사고사가 아니라면 소멸할 때 대부분의 사람이 이러한 질병에 의한 징후를 갖게 될 것이다.
질병으로 인한 생의 ‘말기’적 증상에는 다음과 같은 신체적 징후가 수반된다. 당연히 통증이 있을 것이고, 피곤하고, 힘이 없고, 입이 마르고, 손발이 저리고, 가렵고, 어지러운 증상들을 겪게 된다. 그런데 이보다도 더 큰 문제는 심리적 징후다. 이는 불안, 우울, 불면, 짜증, 무원고립감(無援孤立感), 주의력 결핍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심리적 징후가 신체적 징후를 더욱 강화시키는 측면이 있다.
우리 모두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죽음 중에서 각자가 특별히 기억하는 사건이 있을 것이다. 멀리는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고, 독재 정권에 맞서 저항한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죽음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며, 군 의문사의 대표적 사례가 된 김훈 중위의 죽음을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모두가 한 사람 개인으로서의 죽음이지만 이 한 사람의 죽음이 갖는 사회적 파장은 엄청난 것이었다. 어떤 죽음은 그 죽음으로써 사회적인 시스템을 바꾸고, 사회의 문화적 가치를 새롭게 만들어내기도 한다. 살인 사건에서의 죽음 또한 우리 사회의 여러 모습을 드러내면서 삶의 가치를 새롭게 질문하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2017년 자료로 살펴보면 자살률은 10만 명당 24.3명으로 당뇨병이나 간 질환으로 인한 사망자 수보다 더 많다. 교통사고 사망자 수보다 2배 이상 많은 높은 수치다. 전체 수로 봤을 때 2017년 자살로 사망한 사람은 약 1만 2000명에 달한다.
그런데 실제 내가 법의학자로서 느끼는 자살자 수는 실제 발표된 수치보다도 훨씬 더 많다. 날이 따뜻해지는 3월이나 4월쯤이 되면 한강에서 시신이 많이 발견되는데, 나는 그중 대부분을 부검하게 된다. 그래서 수치적으로 느끼는 감이 실제 발표되는 것보다 많다.
자살자는 그 시신이 발견되어도 통계청에서 자살 처리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명백하게 유서 같은 것들이 있지 않는 경우에는 기타 및 불상으로 분류된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보고된 자살자 수보다 실제 자살자 수가 더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나라도 알코올 접근성이 꽤 높은 나라에 속한다. 또한 모든 음주 사고에 대해 외국에 비해 처벌 수위가 낮은 편으로, 알코올에 대해서 굉장히 너그러운 나라에 속한다. 알코올을 섭취한 순간에는 기분이 좋았지만 다음 날 굉장히 우울한 감정을 느낀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살자 중 음주 상태에서 자살하는 사람의 비율은 어느 정도 될까? 2013년 통계에서는 평균 44퍼센트 정도의 자살 기도가 음주 상태에서 일어난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물론 남성의 경우는 더 높아서 49퍼센트의 수치를 기록한다. 상당수가 술을 마신 상태에서 자살을 시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이야기하는데 술은 기본적으로 뇌를 무장 해제시키는 물질로서, 음주 상태의 뇌에서는 탈억제 현상이 일어난다. 즉 억제하는 기능을 억제한다는 것이다. 뇌의 전전두엽이 뇌에서 이성을 제어하는 기능을 하는데, 술을 마시면 나를 이제까지 억제하고 있던 전전두엽의 억제 기저를 알코올이 억제시켜줌으로써 ‘나사’가 풀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는 등의 이상 증세를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술이 뇌의 기능을 저하시킴으로써 기분이 좋아지는 한편으로 우울감 또한 증폭시킨다는 점이다. 특히 술이 깰 때쯤이면 온몸의 컨디션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극심한 무기력증, 정서적 피폐 상태에 이르게 된다.
현재 우리나라 자살의 특징은 다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노인 자살의 급등, 젊은 여성의 높은 자살률, 가족 동반 자살, 대중매체의 높은 자살 보도 영향이 그것이다.
1985년에만 해도 자살을 선택하는 80대 노인은 10만 명 당 10명이 조금 안 되었으나 2010년에는 10만 명당 123.3명으로 급등했다. 정말 놀라운 증가 폭이 아닐 수 없는데 우리나라 자살률이 OECD 국가 중에서 1위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노령 인구의 자살 때문이다.
2010년 기준으로 자살자 중 80대는 인구 10만 명당 123.3명, 70대는 83.5명, 60대는 52.7명이다. 우리는 보통 자살 하면 치열한 입시를 견디지 못한 청소년 자살을 많이 생각하는데, 사실상 청소년 자살률은 입시 제도가 잘 갖춰진 핀란드보다 적다.
우리나라 자살의 세 번째 특징인 가족 동반 자살은 이제 용어를 조금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가족이 함께 죽었다고 해서 모두가 그 죽음에 동의한 것이라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가장이 죽을 때 혼자 죽지 않고 가족을 살해하고 죽는다든지 부부가 아이와 함께 죽는 일이 심심치 않게 기사거리로 올라오는데, 이것은 외국에서는 굉장히 드문 경우로, 아이나 가족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특이한 우리 정서를 반영하는 자살이다.
내가 낳은 자식이라도 자식의 생명은 엄연히 자식의 것이다. 부모의 소유물이 아닌데도 자식의 생명을 결정하는 것은 아마도 관계를 중요시하는 우리식의 정서 때문인 듯하다. ‘부모 없는 자식’의 미래를 염려해 저지르는 일일 텐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서 말한 샌프란시스코 금문교는 유독 자살자가 많이 발생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자살 방지 펜스를 설치하는 것을 두고 열띤 토론이 벌어진 적이 있는데, 방지 펜스 설치를 반대하는 측은 비용이 많이 드는 것에 비해 효과가 없다고 주장했다. 자살을 결심한 사람은 어차피 자살을 하기 마련이라며 “금문교를 찾아 자살하려는 것은 유명한 데서 죽으려고 한 것일 뿐 여기서 자살하지 못하면 딴 데 가서 자살할 것이다”라는 것이 그들의 논점이었다.
이에 실제로 그들의 말이 맞는지 조사해봤고, 그 결과 밝혀진 실상은 그들의 주장과 달랐다. 한번 자살 제지를 받은 사람 중 67퍼센트는 다시 자살 시도를 하지 않고 자신의 평균 수명을 다했다. 누군가의 자살 시도는 오랫동안 준비하고 생각해온 결심의 표출이지만 막상 그날 누군가의 중재로 당신의 잘못된 판단이 어떤 결과를 야기하는지를 진심으로 이야기해주면 그 사람의 마음이 죽음이 아닌 쪽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자살 장소로 유명했던 마포대교에 자살 방지 캠페인을 벌여 자살률을 많이 줄인 것으로 알고 있다. 삶의 소중함에 대한 글귀도 붙여놓아 자신의 선택을 돌아보게 하고 경찰도 수시로 순찰하면서 자살자를 방지하고 있는데, 실제로 효과가 있는 굉장히 훌륭한 정책이라는 것이다. 미국도 몇 년 전에 금문교에 높은 펜스를 설치했는데 이전에 어차피 자살 시도자는 죽을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설치를 반대했던 정치인은 상당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우리나라 통계도 있지만, 실제 미국 통계를 보면 전체 보건 의료 예산의 10~12퍼센트가 삶의 마지막 기간 1년 동안에 쓰인다. 마지막 한 달 동안 쓰는 비용이 거의 5퍼센트가 넘는다. 삶의 마지막을 간신히 유지하는 데 어마어마한 돈이 지출되는 것이다. 그 어마어마한 돈, 마지막 비용이 바로 중환자실 비용이다. 몸의 모든 혈관과 모든 구멍에 줄을 달고 생명을 연장하는 데 드는 비용은 사실 굉장히 비싸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내가 중환자실에서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은 죽음에 대한 대화가 단절됨으로써 오는 가족 간의 비극, 그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특히 죽음을 앞둔 환자가 부모님이라면 어떤 자식이라도 대부분, “우리 부모님 꼭 살려주십시오”라는 이야기를 한다. 정말 고생 많으셨던 부모님이라서 이렇게 보내드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입원한 경우 대개 말기암 환자이다. 사실상 죽음에 대한 준비가 필요함에도 환자와 가족은 ‘죽음’을 두고 대화하지 않는다.
나 또한 인턴, 레지던트 때는 당사자인 부모님들이 아닌, 가족에게만 병을 밝혔다. 부모님이 아시면 충격받으셔서 더 병이 악화될 수도 있으니 가족과 나만의 비밀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당사자 또한 치료를 받으면 당연히 느낌이 오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두려워서 가족 간에 대화를 못 한다. 실제로 “내가 죽는 거니?”라고 묻고 진행될 대화가 너무 두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환자가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면 그다음에 아들이나 딸이 꼭 하는 이야기가 “이렇게 보내드릴 수는 없다. 하고 싶은 말을 다 못 했다”는 등의 한탄이다. 때문에 어떻게든 살려내길 원하게 되고, 혼수상태에서 실제로 다시 깨어나기는 매우 힘듦에도 연명의료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항암제를 임종 1개월 전에 30.9퍼센트의 환자가 사용한다. 사실상 임종 1개월 전이면 이제 삶이 얼마 안 남았을 때다. 이때는 삶의 마지막 정리를 위한 통증 조절이 가장 중요한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통증 완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모르핀 사용은 2.3퍼센트에 불과하다. 그래도 미국은 50퍼센트가 넘는다.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는 2.3퍼센트에 불과한 것일까? 이것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 국민건강보험 시스템의 문제다.
물론 우리나라 국민건강보험은 전 세계적으로 비교해 봐도 대만이나 일본을 제외한다면 비할 데 없이 매우 우수한 시스템이다. 그럼에도 마지막 모르핀 사용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예산을 삭감한다. 그래서 의사들이 처방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환자가 통증이 심할 경우 이를 처방해서 통증을 없애야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마지막까지 본인의 여러 가지 일들, 자식들에게 남기는 당부의 말이라든지 삶의 정리라는 것을 할 수 있는데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또 우리나라의 경우 전체 임종 환자의 33.6퍼센트가 응급실을 사용한다. 이것은 모르핀 사용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통증 억제가 안 되니 무려 3분의 1에 해당하는 환자들이 임종 1개월 전에 응급실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불편한 시스템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은 인물은 그레이스 리라는 분이다. 뽀글뽀글한 파마머리가 대세이던 1970년대에 단발머리 열풍을 불러일으키며 한국 미용계의 대모로 활약했던 인물로, 장례식 이야기가 꽤나 뭉클하다.
50대 때부터 특별한 장례식을 꿈꿨다고 하는데, 그레이스 리는 우선 장례식장을 가득 메우는 국화가 너무 싫었다고 한다. 그래서 본인 장례식장에는 절대 국화를 놓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곡(哭)이라는 것을 했었다.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눈물이 안 나와도 곡을 해주는 분들이 있었다. 그레이스 리는 그 곡소리 또한 너무 싫어했다. 나는 후회 없이 살다 가는데 웬 곡소리냐는 것이다. 그러니 슬퍼하지 말고 대신 장례식장에 탱고를 틀어달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어떤 곡인지 곡명까지도 지정해서 말이다.
그레이스 리의 유언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장례식에는 실제로 탱고 음악이 깔리고 국화 대신 붉은 장미와 와인이 준비되었다고 한다. 망측하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레이스 리를 좋아했고 사랑했던 추모객들은 장례식장에 모여 망자에게 장미꽃을 한 다발 놓아주고 탱고 음악을 들으며 와인 한 모금과 함께 “그레이스 리는 정말 멋진 여성이었어. 사랑스러운 여성이었지”라며 그녀를 추모했다고 한다. 그렇게 서로가 살아생전 그녀의 발랄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장례식을 치렀다고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각자의 마지막에 대한 새로운 영감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멋있어 보이는 누군가의 마지막을 따라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마지막을 스스로 마무리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가지의 삶이 있고 100가지의 죽음이 있는 것이다. 나만의 고유성은 죽음에서도 발휘되어야 하지 않을까?
책과 삶에 관한 짧은 문답 / 박웅현, 인티N / 인티N
예전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삶에도 범퍼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차가 어딘가에 부딪혔을 때 범퍼가 있다면 끝까지 닿지 않고 그만큼의 여유가 생깁니다. 치명적이지는 않아요. 삶도 같습니다.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도 범퍼가 없다면 사고 났을 때 충격을 크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언가를 기필코 이루겠다는 마음보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경제적, 심리적, 시간적 범퍼를 마련하는 데 좀 더 주안점을 뒀던 것 같습니다. (p.69)
교육 현장을 보면 이상한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의 머리를 마치 컴퓨터 하드처럼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해요. 큰 용량에 데이터가 최대한 많이 축적되면 좋다고 보는 거죠. 그러니 가능한 한 많은 데이터를 축적하려고 해요. 그런데 책 100권을 읽은 아이가 50권 읽은 아이보다 정확히 두 배의 지식을 갖는 게 아니지 않나요? 인간은 유기체이고 용량도 형태도 소화력도 각자 다 다르니까요. (p.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