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컨슈머 / J. B. 매키넌 / 문학동네
국가의 총생산량을 파악하는 쿠즈네츠의 척도는 국내총생산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오늘날에는 주로 GDP라 불린다. 1950년대 무렵이 되자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들은 경제 수익 중 투자자와 기업가가 가져가는 몫과 노동자와 사회 전체가 가져가는 몫 사이의 오래된 긴장을 해소하는 마법 같은 해결책으로 GDP 성장을 열렬히 받아들였다. 마침내 부자의 돈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일 없이 모두의 부를 키울 수 있는 방법을 찾은 듯했다. 그 방법은 바로 1인당 주어지는 돈과 물건을 매해 더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 방법의 지지자들은 곧 ‘경제성장 우선주의’를 ‘모든 배를 뜨게 하는 밀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GDP는 처음부터 비판에 부딪혔고, 비판자 중에는 쿠즈네츠 본인도 있었다. 그는 이 주제에 관해 의회에 제출한 첫 번째 보고서에서 한 국가의 번영은 그저 국민소득을 측정하는 것으로는 “추론이 거의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새로운 통계가 부의 분배에 대해서는 말해주는 바가 거의 없음을 명확히 지적했다. 예를 들어 대공황을 통해 분명히 알게 되었듯이, 성장의 밀물과 썰물이 대부분의 배를 띄워 올리거나 내려앉힌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와 경제가 어떻게 조직되느냐에 따라 어떤 배는 특히 더 높이 올라가고 어떤 배는 특히 더 낮게 내려앉을 수 있었다.
또한 쿠즈네츠는 모든 경제성장이 동등하지는 않다는 점을 인정했다. 훗날 그는 “‘더 큰’ 성장의 목표는 무엇의, 무엇을 위한 성장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라고 『뉴 리퍼블릭』에 말하곤 했으며, 독재 정권에서는 두려움이나 외적을 향한 증오를 동력으로 더 열심히 일하도록 사람들을 몰아가거나 억압함으로써 성장을 이뤄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쿠즈네츠는 국가의 회계장부에 더하기 칸과 빼기 칸이 다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각 칸에 어떤 경제활동이 포함되느냐는 토론의 여지가 있다고 보았다. 쿠즈네츠 본인은 군사비를 오늘날처럼 GDP에 더하는 대신 GDP에서 빼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방위비는 잠재적 공격자 때문에 국가가 어쩔 수 없이 지출하는 항목이며 그 돈을 국민의 생활수준을 향상하는 데 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쿠즈네츠는 소비문화의 대단한 팬이 아니었다. 어떤 경제활동은 바람직하지 않고 파괴적이라고 생각했던 애덤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쿠즈네츠는 GDP가 “물질을 숭배하는 사회의 관점이 아니라 더욱 계몽된 사회철학의 관점에서 나온” 경제적 목표를 반영해야 한다고 단언했다. 그가 ‘이익이 아닌 해악’이므로 빼야 한다고 생각했던 경제활동 중에는 광고와 금융 투기가 있었다. 또한 그는 가정주부의 무보수 노동이 국가회계에 포함되어야 할 활동은 아닌지 공개적으로 고민했다. (p.113-114)
재앙의 역설은 사람들이 종종 그때를 애틋하게 돌아본다는 것이다. 1920년대에 소수의 사회과학자가 ‘재난 연구’라는 분야를 만들면서 그 이유가 파악되기 시작했다. 초기의 중요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는 것과 달리 전쟁이나 지진, 허리케인 같은 대재앙을 겪은 사람들은 서로를 이용하기보다는 돌보고, 원초적 두려움이 아닌 이유와 목적을 지니고 행동할 확률이 높다.
재난 연구의 선구자 중 한 명인 사회학자 찰스 E. 프리츠는 제이차세계대전으로 5년째 공포와 궁핍에 시달리고 있던 영국에 도착했다. 그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는 가족 및 친구들의 죽음과 부상에 원통해하고 오랫동안 자신의 생활을 박탈당한 데 분노하는, 전쟁에 지쳐 공황 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상상할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발견한 것은 최선을 다해 삶을 즐기고 놀라우리만큼 명랑함과 삶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찬란하게 행복한 사람들이었다.” 지금도 쓰이는 표어 ‘평정심을 유지하고 하던 일을 계속 하라(Keep Calm and Carry On)’에서 잘 드러나는 영국의 이 사례는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독일을 비롯한 많은 국가에서도 이와 비슷한 회복력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알려지지 않았는데, 독일에서 공중폭격의 심리적 영향을 평가한 결과 폭격을 가장 심하게 당한 도시가 사기 또한 가장 높았다. 물론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 누구도 전 세계의 절박한 난민들이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절대적 결핍의 사례를 제외하면 재난을 마주한 사람들은 더 적게 가진 삶에 빠르고 꾸준히 적응하며, 보통 그 과정에서 더 친절하고 참을성 있는 사람이 되고 서로 더 똘똘 뭉치고 관대해진다.
미국의 작가 리베카 솔닛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직접 경험한 강력 지진에서 영감을 얻은 저서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이러한 존재 방식이 재앙의 한복판에서 우리에게 그토록 강렬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보통 때는 그러한 방식이 부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평소에 우리 대다수는 사회적 고립과 끝없는 시간의 압박으로 씨름하며, 소득과 기회의 불평등함, 또는 자기 삶에 목적이나 의미가 없다는 기분을 느낀다. “일상은 이미 일종의 재난이며, 실제 재난은 이러한 일상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라고, 솔닛은 말한다. (p.129-130)
“숟가락은 전형적인 사례다.” 베블런이 말했다. “비싸고 이른바 아름다운 제품을 사용하고 감상하는 데서 오는 더 큰 만족감은 보통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으로 가장한, 가격이 비싸다는 것을 아는 데서 오는 만족감이다.”
과시적 소비는 베블런에게 이름을 얻은 이후로 널리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소비는 1980년대의 여피 문화, 21세기의 요란한 장신구와 인스타그램 문화, 전용기의 좌석 안전벨트를 24캐럿으로 도금한 억만장자 미국 대통령의 권세에서도 익히 드러난다. 사람들 앞에서 값비싼 립스틱을 바르고, 람보르기니를 몰고, 5000달러짜리 샤넬 ‘호보 백’을 들고, 단거리 비행에서 비즈니스 클래스를 이용하는 것은 전부 전형적인 과시적 소비를 보여주는 현대의 대표적 사례다.
과시적 소비는 광고 산업이 가장 많이 광고하는 대상이자 우리가 쇼핑을 말할 때 주로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또래 집단의 영향력은 아무도 없는 데서 소비하는 상품보다 타인의 눈앞에서 소비하는 상품에서 언제나 더 크게 나타납니다.” 1990년대에 과시적 소비 연구의 부활을 이끈 미국의 줄리엣 쇼어가 말한다. 점점 더 많은 소비가 과시적으로 변하고 있다. 난방기와 온수기, 침실 커튼처럼 쇼어가 1990년대에는 ‘타인의 눈앞에서 소비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상품들이 오늘날에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의 사진 속에서 과시적으로 소비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모르는 사람은 고사하고 친구와 가족도 휴가지나 식당에서 무엇을 소비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으나, 이제는 실시간으로 알 수 있다. 공교롭게도 베블런은 이러한 세상이 찾아올 것을 예측했다. 그는 말했다. “물건의 과시적 소비는 서서히 중요성이 커지다 결국 최저한도의 살림만을 남긴 채 구할 수 있는 모든 상품을 집어삼킬 것이다.” 이제는 거의 모든 것이 ‘베블런재(Veblen good)’다. (p.132-133)
물질주의는 그동안 다각도로 연구되어왔으며, 모든 연구 결과가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아이들과 노인, 그 사이의 모든 사람에게서 물질주의의 부정적 효과가 발견된다. 소득과 교육 수준, 젠더, 인종, 문화적 배경이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서, 심지어 변호사와 경영대 학생, 사업가 집단처럼 거의 모두가 매우 물질주의적인 집단에서도 물질주의의 부정적 측면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실제로 물욕이 클수록 부정적 효과가 커진다. 성공의 증거로 돈과 물건에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 돈과 물건이 많아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인간관계보다 돈과 물건을 우선시하는 사람에게 부정적 영향력이 가장 강하게 나타난다. 또한 어떤 사람이 얼마나 물질주의적인가를 보고, 그 사람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옹졸하고 다른 사람을 조종하는 성향을 어느 정도 가졌는지 예측할 수 있다. 물질주의자는 타인을 효용적 태도로 대하는 경우가 더 많으며(이들은 ‘사용자’이다), 더 짧고 얕은 대인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더 크고, 외로울 확률도 더 높다. 물질주의는 공감을 가로막기 때문에 타인을 자발적으로 돕거나 환경을 염려할 확률을 낮춘다.
즉 물질주의가 지속적인 위안과 만족, 행복을 제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의 정신에서 물질주의가 맡은 역할이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물질주의의 역할은 초조함을 키우고, 불안을 일으키고, 침대에서 나와 세상 속에서 성공을 추구하게 만드는 것이다. 캐서는 내게 말했다. “행복의 자양분은 아니죠.” (p.158-159)
그러나 2020년의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은 미국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시위로 발전했고, 겨우 몇 주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변화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노예 무역상을 기념하는 동상들이 철거되었고, 미시시피주는 주기에서 노예시대를 상징하는 무늬를 뺐다. 풋볼팀 워싱턴 레드스킨스는 인종 차별적인 구단명을 변경하기로 합의했고, 로스앤젤레스와 미니애폴리스 같은 대도시에서 이전과 극적으로 다른 치안 유지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나이와 교육 수준, 인종과 상관없이 수많은 사람이 이 운동을 지지했고, 앞선 2년보다 이번 2주간 모인 지지자의 수가 더 많았다. 여론의 분열을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것 같던 국가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캐서가 말했다. “사람들이 이 신념을 더 잘 받아들이게 만든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요.”
여기에는 두 가지 심리학적 측면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비영리적 시간의 효과다. 많은 사람이 근무와 학업, 통근, 소비를 중단하면서, 수백만 명이 더 큰 문제로 관심을 돌릴 수 있는 드문 자유의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내재적 가치로 방향을 전환한 것 또한 한몫했을 수 있다. 연구는 덜 물질주의적인 사람이 덜 자기중심적이며 타인에게 더 공감한다는 결과를 꾸준히 내놓고 있다. 이들은 인종·민족적 편견이 적은 경향을 보이며, 사회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을 불편해한다.
즉 경찰의 너무나도 익숙했던 살해 행위에서 평소보다 더 큰 변화가 비롯된 이유는, 인구 대다수가 평소 일하고 소비하는 단조로운 일상을 유지할 때와 확연히 다른 사고방식으로 이 끔찍한 사건을 해석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소비를 멈춘 세상에서는 개인의 전환이 사회의 격변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이러한 변화는 겨우 몇 분 만에 시작될지도 모른다. (p.171-172)
오늘날 우리가 구매하는 상품이 5년 전이나 10년 전, 또는 20년 전의 상품보다 품질이 나쁘다는 것이 정말 사실일까?
“소비자 제품에 관해서는 확실히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의 물질과학자인 데이비드 에노스가 내게 말했다. 미국의 핵 비축량을 관리하는 샌디아국립연구소에서 일하는 에노스는 제품 내구성의 전문가다. 그의 일은 극심한 압력 속에서 매우 오랜 시간 버틸 수 있는 물질을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순수 증기 속의 산 내부에, 핵폐기물이 무해한 물질로 분해될 만큼 오랜 시간 동안 저장할 수 있는 컨테이너를 생산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에노스는 “우리가 목표하는 시간 단위는 백 년이나 천 년, 수백만 년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커리어 초반에 에노스는 평범한 잉크젯 프린터에 들어가는 전기회로를 만들었다. 잉크젯 프린터는 부품 중 하나인 구리 트레이스가 부식되지 않도록 그 위에 0.00002인치 두께로 금을 씌운다. “0.00002인치는 절벽 가장자리에 겨우 걸쳐 있는 것과 같아요. 그보다 얇아지면 내구성이 뚝 떨어지거든요.” 에노스가 말했다. 그때가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안다. 프린터가 고장나고 새 프린터를 사야 한다.
에노스는 만약 회사가 트레이스에 금을 0.000025인치 두께로 씌운다면 프린터는 훨씬 더 견고해질 거라고 말했다. 문제는 그렇게 되면 대다수가 그 프린터를 사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금을 0.00002인치 두께로 씌운 다른 프린터가 값이 덜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최대한 저렴한 것을 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에노스가 말했다. “10년 동안 쓸 수 있는 핸드폰을 만들 수 있냐고요? 당연하죠. 우리에겐 분명 그럴 수 있는 기술이 있습니다. 하지만 비용이 점점 높아지기 시작하죠. 핸드폰 구입에 5000달러에서 1만 달러를 쓰고 나서 내 핸드폰은 10년이나 간다며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대다수는 이럴걸요. 뭐, 그것도 좋지만 난 싫어. 난 이삼 년 지나면 새것을 사고 싶어.” (p.189-190)
2017년 보고서에서 영국에 기반을 둔 엘런 맥아더 재단은 ‘의복을 입는 평균 횟수의 증가’가 어쩌면 의류 산업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줄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일지 모른다고 밝혔다. 예를 들어 옷의 착용 횟수를 두 배로 늘리면 의류업계의 기후 오염을 거의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 전 세계가 의류 생산을 1년간 정지하면, 1년간 모든 국제선 운항을 중단하고 해상운송을 멈추는 것과 동일한 효과가 발생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다시 딜레마에 빠지고 만다. 수백만 명이 그 옷들을 생산하며 생계를 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노동자 대다수는 의류 산업에 크게 의존하는 가난한 국가에 산다. 세계에서 옷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국가는 중국이다. 그다음은 방글라데시로, 이 국가는 미국 절반 규모의 인구가 아이오와보다도 작은 땅에 산다. 방글라데시는 제조업 일자리의 3분의 1 이상과 수출의 거의 85퍼센트가 의류 산업에서 나온다. 주민의 5분의 1이 국가 빈곤선 아래에서 살아가는 국가에서 의류 산업이 400만 명 이상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 의류 산업 종사자 열 명 중 여섯 명은 여성이다. (p.204)
무언가가 너무 저렴하면 다른 누군가가 그 대가를 치른다는 말이 있다. 마헤르의 직원들은 일주일에 6일을 일하고 한 달에 120달러에서 140달러를 버는데(국제 기준뿐만 아니라 방글라데시 기준으로도 낮은 금액이다), 이들이 하는 일은 패스트패션의 주기가 빨라질수록 스트레스가 극심해진다. 공장 문밖에서는 국가가 산업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원칙을 무시한 결과 발생한 환경 피해를 견뎌야 한다. 한때 ‘동양의 댄디’로 알려졌던 나라양간지의 공기는 보통 회색빛이 도는 황토색이며 가끔 외국 방문객에게 구역질을 일으킨다(나라양간지는 코로나바이러스로 봉쇄령이 내려졌을 때 기적처럼 파란 하늘이 나타난 도시 중 하나다). 방글라데시는 기후변화의 타격이 가장 극심한 국가 중 하나인데, 방글라데시의 1인당 탄소 배출량은 부유한 국가에 비해 압도적으로 낮은데도 그렇다(예를 들어 독일이나 일본보다는 25배가량 낮고, 미국이나 캐나다보다는 약 40배 낮다). 방글라데시의 영토 대부분은 히말라야의 물이 흘러내리는 방대한 저지대의 강 삼각주에 위치해 있어서, 빙하가 녹는 속도가 빨라지고 더 강력한 사이클론이 더욱 빈번하게 발생하고 해수면이 높아지는 상황에 특히 취약하다. 마헤르가 대학을 다닌 도시인 치타공은 현재 거의 1년 내내 만조 때마다 곳곳에서(도시의 60퍼센트) 홍수가 발생한다. “물이 가정집까지 차올랐다 빠져요.” 마헤르가 말했다. “점점 베네치아처럼 되고 있죠. 이 베네치아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지만요. 이 도시의 구질구질하고 더러운 물에 누가 빠져 죽고 싶겠어요.”
그러나 마헤르를 가장 짜증나게 하는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피해, 바로 그의 회사에서 생산한 옷이 전혀 존중받지 못하는 가격에 판매되는 것을 지켜보는 모욕감이다. “Z세대와 밀레니얼은 윤리적 상품을 요구합니다.” 마헤르가 말했다. “하지만 패스트패션 티셔츠를 4달러, 또는 2달러에 살 때 이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아요. ‘어떻게 이 티셔츠가 베를린이나 런던, 몬트리올에서 이 가격에 팔릴 수 있지? 어떻게 4달러에 목화를 재배하고, 솜을 만들고, 실을 잣고, 엮고, 염색하고, 날염하고, 꿰매고, 포장하고, 운송할 수 있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과 닿아 있는지 전혀 몰라요. 자기가 낸 돈이 그들의 임금으로 돌아가지 않으니까요.” (p.208-209)
“태어나자마자 단것에 완전히 둘러싸였어요.” 도쿄의 번화가인 롯폰기의 토라야 매장에 앉아 구로카와가 말했다. 사방에서 옷을 잘 차려입은 도쿄 사람들이 페이스트리를 먹고 있다. 서구인의 눈에는 작은 소시지를 연분홍색 스펀지케이크 안에 넣어 젖은 이파리로 감싼 것처럼 보인다. 사실 이 과자는 쌀가루를 증기에 쪄서 만든 얇은 반죽 안에 말도 안 되게 부드러운 팥앙금을 넣어 만든 것이며, 이파리는 벚나무 잎을 1년간 소금물에 절인 것이다. 단맛과 짠맛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이 과자의 이름은 사쿠라모찌로, 올해 불안할 만큼 일찍 찾아온 벚꽃 시즌을 기념한다. “이파리는 먹지 않아도 돼요.” 구로카와가 내게 말했다. 이파리는 맛있었다.
토라야에서 만드는 과자는 와가시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와가시가 사로잡는 감각에는 무려 청각도 포함되는데, 하늘 여행, 아와의 바람, 사라시나의 가을달처럼 고요한 심상이 머릿속에 떠오르도록 개별 이름을 정하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밤의 매화라는 이름을 가진 까맣고 단단한 작은 양갱이다. 양갱을 자르면 하얀 통팥의 단면이 드러나고, 그 모습이 ‘캄캄한 밤에 희미하게 빛나는 하얀 매화와 그 떠다니는 향기’를 상기시킨다. (p.222)
수천 가지 사례가 혁신은 돈과 성장을 위한 욕구에서 나온다는 개념을 반박한다. 아마 그중 가장 유명한 사례는 우주에서 수익을 내려는 목적보다는 냉전 경쟁과 탐구열의 결과에 더 가까웠던 1969년의 미국 달 착륙일 것이다. 또다른 사례는 이메일인데, 이메일은 프로그래머 레이 톰린슨이 정부자금을 받은 인터넷의 전신 아르파넷을 연구하다가 부수적으로 개발한 것이었다. 이후 톰린슨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후원자였던 미 국방부는 이메일이 필요하다는 류의 말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내 상사도 이메일에 관해 뻥긋도 하지 않았어요. 그냥 컴퓨터와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이메일을 만들면 재미있을 것 같았습니다.” 투자금 10억 달러를 끌어들이려고 덧없이 사라질 또 하나의 앱을 만들려는 현대 스타트업과는 완전 딴판이다.
최근의 소비 재난에서 혁신을 찾아볼 수 없었다면, 그건 우리 사회가 소비 주도적 경제 회복을 기다리며 마냥 손을 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소비가 영원히 둔화된다면 독창성이 돌연 사라지기보다는 오히려 폭발할 가능성이 높다.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드 데커가 말했다. “혁신이 아주 많이 필요합니다. 다른 의미의 혁신이요.” (p.233)
수십 년간 셔브는 우리가 소비라 느끼지 않고 무언가를 소비하게 되는 방식에 대해 연구하고 글을 써왔다. 예를 들면 옷을 세탁하고, 냉장고를 소유하고, 만약 교외에 산다면 차를 끌고 식료품점에 가는 것이 이러한 소비에 해당한다. 사실 ‘평범한’ 삶은 변화하는 기대와 패턴, 구조의 모음이며, 이것들이 우리의 개인적 소비를 크게 늘릴 수 있다. 셔브는 그중 많은 것이 ‘세 가지 C’, 즉 편안함(comfort)과 청결함(cleanliness), 편리함(convenience)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가정 냉난방은 편안함의 기준이 변화한 사례다. 세탁기와 건조기 및 이 기기들의 판매자들은 청결함의 의미를 바꿔놓았다. 이 기기들은 주부가 세탁에 들이는 시간을 크게 줄여 여가를 더 많이 즐길 수 있게 할 잠재력이 있었으나, 결국 여성들은 빨래를 더 자주 하게 되었다(오늘날 영국인들은 100년 전보다 빨래를 다섯 배 더 많이 한다. 그러나 이 또한 미국인의 세탁 횟수에 비하면 적은 편이며, 그뿐 아니라 미국인은 더 큰 세탁기에 더 많은 양의 옷을 세탁한다). 최근 편리함의 개념이 변화하면서, 디지털 연결로 조직화된 음식 배달이 식료품점이나 식당에 차를 몰고 가는 것에 더해 배달원의 차량 이동까지 만들어냈다. (p.259)
18세기 말 토머스 맬서스는 인구 증가가 식량 공급을 위협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이 문제의 해결책은 인류의 생산성이 끝없이 증가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그때 이후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자원이 한정적이라는 것이 경제학의 중심 개념이 되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일부 사상가가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자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원이 너무 풍부해서 발생하며, 자원은 늘 너무 풍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는 1949년에 그들 중 최초로 잉여 재산의 문제를 설명했다. 그는 “생명체와 인류에게 근본적 문제를 안기는 것은 필수품이 아니라 그것의 반대인 ‘사치품’이다”라고 말했다. 사회는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재산을 어느 정도 흡수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재산은 곤란한 곳에 쌓이기 시작한다. 바타유는 두 번의 세계대전이라는 끔찍한 폭력이 발생한 이유가 위험한 군비 전쟁을 벌일 수 있을 만큼 국가의 부가 쌓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한 과잉 재산을 ‘저주받은 몫’이라 칭했다.
바타유는 “원하든 원치 않든, 이 몫은 명예롭거나 비극적으로 쓰일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과거의 여러 문화는 (“의식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나마”) 이 사실을 이해하고 이따금 고의로 재산을 파괴했다. 이들은 축제를 벌여서 돈을 탕진하고 신에게 재산을 바쳤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재산을 고인과 함께 묻었고,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에서는 장엄한 공공건물과 기념비 건축에 돈을 쏟아부었다. 중앙아메리카의 일부 마야인 마을에는 오늘날까지도 토지나 돈이 많이 쌓이기 시작한 사람에게 그해의 가장 성대한 축제를 후원할 영광을 주는 ‘평준화 메커니즘’이 존재한다. 축제가 끝나고 나면 후원자는 큰 존경을 받게 되고, 더 이상 부유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관습이 시대와 지역을 가리지 않고 널리 퍼져 있기에 인류학자들은 의도적인 재산 파괴가 ‘인간 생태계’와 자연 생태계의 핵심 차이점이라고 주장해 왔다.
우리 시대도 이 규칙의 예외가 아니다. 20세기 초에 서구는 엄청난 양의 부(사용 가능한 양보다 많은 재화)를 생산할 수 있는 산업의 새 능력으로 무엇을 할지 논의했다. 그렇게 찾은 해답이 바로 알아서 파괴되는 상품을 만드는 것, 즉 계획적 진부화였다. 소비주의는 풍요를 빠르고 끊임없이 쓰레기로 만드는 끝없는 축제에 비유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풍요의 파괴를 경제의 동력으로 삼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더 많은 풍요가 창출되는 문제적 결과가 발생했다. 우리는 소수의 수중에 전례없는 양의 잉여 재산이 쌓이는 모습을 본다. 이러한 불균형이 전 세계의 생활비를 끌어올리는 모습을 본다. 미리 계획한 질서 있는 방식으로 재산을 파괴하지 못할 때는 주로 비자발적으로 재산을 파괴한다. 이러한 상황을 묘사할 때 우리는 매우 인상적인 단어를 사용한다. 경제의 ‘조정’. 대침체 시기에 전 세계의 백만장자와 억만장자가 잃은 금액만 2조 6000억 달러(그 규모를 더욱 실감할 수 있도록 숫자로만 쓰면 2,600,000,000,000달러)이며, 그 여파가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로 번졌다. 그러고 나서 성장은 재개될 수 있었다. 바타유의 말처럼, “생산되는 에너지의 상당량을 연기 속에 날려 보내야 한다.” (p.281-282)
클라크는 북대서양참고래의 일상을 ‘청각적 지옥’이라 묘사한다. 인간이 부산하게 활동하는 바닷속에서 두 고래가 (짝짓기를 하고, 새끼 고래의 뒤를 따르고, 먹을 것을 발견했음을 알리기 위해, 또는 그저 다른 고래와 함께하는 단순한 기쁨을 위해) 서로의 소리를 들을 확률은 1세기 이전의 10분의 1 정도다. 때때로 고래들은 선박의 소음이 너무 크고 끈질겨서 의사소통을 포기하고 침묵에 잠기는데, 이러한 행동은 보통 강력한 폭풍이 일어났을 때만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클라크는 내게 “인간은 자신이 바다를 얼마나 심각하게 모욕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모든 소음의 주요 원인은 우리에게 물건을 배송해 주는 상업용 선박의 프로펠러와 엔진이다. 준치사적 영향에 둘러싸인 북대서양참고래의 건강 상태는 눈에 띄게 악화되고 있다. 30년 전보다 더 여위었고, 이가 더 심각하게 들끓으며, 피부 병변과 상처도 더 많다. 암컷 고래들은 새끼를 전만큼 많이 낳지 않는다. 고래의 상태가 얼마나 나쁘고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지, 이들이 받는 영향은 이제 준치사가 아닌 치사 수준이 되었다. (p.291)
고전적인 경제 이론은 소비자가 무엇이 자신에게 최선인지를 이해하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도록 합리적으로 행동한다고 가정한다.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까지 영향력을 떨치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이상에 더 가까운 것은 주류 소비자가 아닌 반소비자다. 반소비자는 무엇을 소비하고 싶고 소비하기 싫은지를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선택할 가능성이 높으며, 광고와 유행에 덜 휘둘리고, 소비에 발목이 묶였다고 느끼거나 소비를 도피 수단으로 사용할 가능성이 낮다. “제가 늘 금욕적으로 사는 건 아니에요.” 루어스가 말했다. “그보다는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죠.” (p.309-310)
간소한 삶을 사는 이들은 보통 자신이 케인스가 말한 절대적 필요의 충족이라는 ‘경제적 문제’를 해결했다고 느낀다. 그들의 방법은 절대적 필요를 줄이는 것이다. 현재 캐플로는 침엽수가 빽빽이 들어선 가파른 언덕에 자리한 동네에 산다. 여기서 시애틀은 현대 메트로폴리스라기보다는 나무 위에 지은 집들의 도시처럼 느껴진다. 캐플로가 남편과 함께 사는 집(전에는 딸과 함께 살았다)은 70제곱미터로, 이는 오늘날 미국에서 지어지는 일반적인 집의 3분의 1 크기이며 아파트 평균보다도 더 작다. 워싱턴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가르치다 은퇴한 캐플로는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중고가 아닌 가구는 하나도 구매한 적이 없다. 최근 사고로 고장이 나기 전까지 25년 된 스바루를 몰았으며, 주행거리는 전국 평균의 4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캐플로는 식기세척기를 소유한 적이 없다(이것이 간소한 삶을 사는 이들의 기준점인 것 같다). 20년 넘게 버스로 통근했고, 책은 대부분 도서관에서 빌려 보며, 양말과 속옷, 신발 외에는 새 옷을 좀처럼 사지 않는다. “전 예쁜 옷을 정말로 좋아해요.” 캐플로가 말했다. “하지만 예쁜 옷이 엄청 많은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아요.”
캐플로는 자신이 가진 특권을 조심스레 언급한다. 그는 백인이며, 그동안 원한다면 언제나 그리 어렵지 않게 돈을 벌 수 있다고 느꼈다. 재정 상태가 정말로 심각해지면 친척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캐플로는 인생의 거의 대부분 가난한 편에 속했다. 그는 오랫동안 1만 5000달러 미만의 연봉으로 살았는데, 그럼에도 점차 ‘은은하게 풍요롭다’라고 느끼게 되었다. 원하는 것을 전부 가졌고, 빚 대신 저축이 있으며, 여행을 할 수 있고, 편안한 마음으로 은퇴했고, 딸의 대학 진학을 도울 수 있었다. 캐플로에게는 보통 돈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는 없는 경제적 안정감이 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미국 경제가 폭락했을 때 그는 이 경제 위기가 전혀 염려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이미 가진 것 없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쭉 하던 대로 하면 돼요.” (p.310-311)
현재 다카노가 더 관심 있는 것은 일본 인구 감소의 근원이다. 그는 사람들이 이 현상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시골의 인구 감소, 전 세계에서 나타나는 시골에서 도시로의 이동 패턴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본인 대다수는 이미 도시에 살고 있으며, 국가 전체에서 인구가 줄고 있다. 도쿄는 출생률이 가장 낮은 곳 중 하나로, 사도섬보다도 출생률이 낮다. 시골에서 이주해 오는 사람들을 빼면 전 세계적 대도시인 도쿄는 인구학적으로 멸종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매 세대가 이전 세대보다 줄어들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일본의 쇠퇴를 유발하는 것은 시골이 아닌, 거대하고 잠들지 않으며 탐욕스럽고 매력적인 도시다. 사람들은 도시 안으로 사라지고 있다. 왜 그럴까? 다카노는 그동안 이 문제를 깊이 고민했다.
“문화가 성숙 단계에 이르면, 그것을 직접 파괴하고 끝내려는 것이 인간 본성의 경향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타고났는지도 몰라요.” 다카노가 말했다. “어쩌면 일종의 신이 인간 수를 줄이고 있을 수도 있고요.”
이를 자신의 세상이 서서히 사라지고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 사람의 종말론적 관점이라고 일축하긴 쉽다. 그러나 다카노의 말은 소비의 딜레마를 자꾸 따라다니는 듯 보인다. 우리는 쇼핑을 멈출 수 없지만, 반드시 쇼핑을 멈춰야 한다. 소비는 기후를 파괴하고, 숲을 쓰러뜨리고, 삶을 어지럽게 흩뜨리고, 우리의 머릿속을 쓰고 갖다 버리는 사고방식으로 채우고, 밤하늘에서 별을 빼앗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소비가 달리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고,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을 잃게 한다는 것이다. 어느 길로 가든, 소비는 우리를 실패로 이끈다.
소비를 뜻하는 일본어는 쇼히(消費)다. 이 단어는 19세기에 서로 다른 두 단어가 합쳐져 생겨났는데, 히는 쓰다라는 뜻이고 쇼는 불태워서 재로 만들듯 소멸시킨다는 뜻이다. 영단어의 어원도 비슷하다. 본래 소비는 불길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듯 기존에 존재하던 것을 완전히 소진해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우리가 갈수록 더 많은 것을 소비한다면, 모든 것이 소비의 대상이 될 것이다. 더 많은 기회와 소진, 더 많은 경험과 산만함, 더 많은 깊이와 얄팍함, 더 많은 온전함과 공허함. 우리는 시간과 공간, 삶과 죽음을 소비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소비하고 자기 자신을 소비할 것이다. 모든 것이 불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p.350-351)
많은 수렵·채집인 문화가 과잉 수확을 피하기 위한 조치를 취한다는 것은 오늘날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어 부시포테이토를 제철에 다 수확하지 않고 남겨두면 부시포테이토가 다시 번식할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어쩌면 제 능력을 다 발휘하지 않는 것은 오래된 의미의 경제 행위일지 모른다. 자원이 미래에 사라지지 않도록 신중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또한 긴 노동시간은 주콴시가 생각하는 풍족한 삶의 개념을 훼손한다. 자발적으로 간소하게 살아가는 이들과 비슷하지만 그들보다 더 강력하게, 주콴시는 칼라하리사막의 한가운데에서도 비교적 쉽게 충족할 수 있는 필요만 아주 적게 가짐으로써 케인스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했다. 더 적게 가진 삶에 주어지는 보상은 본래 풍부한 여가 시간이어야 한다.
인류학자 제임스 수즈먼은 서구인 역시 오래전부터 언젠가는 자신의 물질적 욕망을 충족하고 여유로운 삶을 살 것이라 믿어왔다는 점을 지적한다. 문제는 그러한 만족에 이르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 만족을 움켜쥐지 못한 것이었다. 2008년에 정치과학자 로버트 E. 구딘과 그의 동료들은 선진국 사람들이 빈곤선을 간신히 넘을 만큼만 노동하고, 집안일을 사회에서 용인하는 기초적 수준으로 유지함으로써 풍족한 자유 시간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대다수는 별장과 집수리, 더 많은 옷, 최신 유행 가구, 새로 나온 전자기기, 모험 여행을 위해 더 많이 노동하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술이 우리를 일상의 노동에서 해방해줄, 영원히 뒤로 미뤄지는 그날이 오기를 꿈꿨다. (p.356-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