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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벅뚜벅 이탈리아 공공의료 / 문정주 / 또하나의문화

 

 내친김에 나는 용기를 내어 속에 있는 말을 꺼냈다. 가정의학과 의사로서 일차의료에 특히 관심이 있고, 이탈리아의 일차의료제도가 매우 흥미로워서 깊이 알고 싶고 견학도 하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안나마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이탈리아 일차의료는 세계에서 최고야.”
 아, 나는 잠시 숨을 들이켰다. 저 말에서 이탈리아를 대한민국으로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나마리아의 말이 이어졌다.
 “프랑스나 다른 나라에도 일차의료가 있지만, 이탈리아처럼 효과적이지는 않아. 나는 내가 하는 이 일이 정말 좋아.
 그런데 점점 힘들어지고 있어. 정부에서 비용이 많이 든다고 왕진을 제한하는 거야. 왕진은 그저 환자를 편하게 하려고 그의 집에 가는 게 아니야. 집에 가보면 생활 여건을 알 수 있어서 환자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이런 왕진을 단순히 비용 때문에 제한한다는 건 잘못이야. 난 정말 화가 나.
 그런데 요즘 젊은 의사들은 우리와 달라. 왕진 같은 데는 관심이 없어. 컴퓨터만 들여다보면 다 될 것처럼 생각하는 게 아닌지 걱정이야.” (p.47-48)

 

 동네 의사의 활동을 ‘일차의료’라 부르고 거의 모든 선진국이 이를 제도화해 운영한다. 그 제도 안에서 사람들은 동네에 있는 가정의를 자기 일차의료 의사로 정해 등록한다. 이 의사는 평상시 건강관리를 맡아 가벼운 진료와 상담을 제공하고, 환자가 검사나 입원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가야 할 때면 의뢰서를 작성해 준다. 병원에서는 검사나 입원 치료를 시행한 뒤, 결과를 가정의에게 알려 주어 그가 환자의 건강관리를 지속하게 돕는다. 가정의가 제공하는 상담과 진료 등 일차의료는 환자에게 무료다. 대신에 의사는 그에게 등록된 주민이 몇 명인지를 기준으로 국가나 의료보험조합에서 보수를 받는다. 일차의료가 활발하면 국민의 건강 수준이 향상되고, 입원 횟수가 감소하며, 응급실을 이용하는 횟수가 줄어들고, 만성질환을 앓는 환자의 합병증도 감소한다. 질병을 평소에 예방하고 초기에 치료하므로 국가적 의료비용이 줄어든다. (p.52)

 

 아파서 일할 수 없는 사람에게 생계비를 지급하는 상병수당은 유럽 사회보장의 기본이다. 19세기에 이탈리아 시민들이 만든 상조회 보험이나 독일제국에서 비스마르크 수상이 만든 질병보험이 바로 아파서 벌이를 못하는 노동자에게 생계비를 지급하는 제도였다. 19세기 노동자는 장시간 일하고도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의 푼돈을 겨우 받았다. 그 절망적인 처지를 1845년에 출간된 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가 생생히 전달한다. 부모인 노동자가 다치거나 아파서 일하러 나가지 못할 때 굶어 죽지 않으려면 어린 딸이 성냥팔이에라도 나서야 했으니, 임금을 대신해 생계를 지켜 주는 상병수당이 절실했다. 20세기 후반 들어 의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의료보장이 제공하는 혜택 중에 의료비 보조의 중요성이 점점 커졌으나, 병을 앓는 노동자에게 생계비가 필요하다는 데는 변함이 없어 상병수당 지급도 유지된다.
 현 OECD 회원국의 대부분이 아픈 사람에게 상병수당을 지급한다. 회원국 중 상병수당이 없는 나라는 한국, 미국, 스위스뿐이다. 우리나라는 1970년대에 의료보험제도를 만들던 애초부터 의료비만 보조할 뿐 상병수당을 도입하지 않았다. 국민이 납입해야 할 보험료 액수를 낮추고 정부의 예산도 아끼려는 목적이었다고 하지만, 결국 아픈 사람의 생계 보호를 등한시하는 제도가 되고 말았다. 그 시절에는 국가의 형편이 빠듯해 어쩔 수 없었다 해도, 세계 제11위의 경제력을 갖게 된 지금까지 이를 도입하지 못한 것은 반성해야 할 일이 아닌지. (p.113-114)

 

 아파도 쉬기는커녕 출근해서 일하고 과로에 시달리는 것이 예사인 우리나라 직장인의 처지를 떠올리다가, 문득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난히 ‘주사 맞기’를 즐겨 한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병원에서 외래진료를 할 때 ‘링겔(수액) 주사를 맞으러 왔다’는 환자가 종종 있었다. 굳이 맞지 않아도 된다고, 의학적으로 당신에게 그 주사가 필요한 상태가 아니라고, 링겔을 맞는 것은 그저 물을 마시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설명해도 듣지 않았다. 자기는 그걸 맞으면 기운이 나는 체질이라거나, 어렵게 직장에 양해를 구하고 나왔으니 꼭 주사를 맞게 해달라고 했다. 주사에 관해서 비과학적인 맹신이 퍼져 있다고만 여겼는데, 이탈리아 진료실에서 상병수당을 접하게 되니 그 ‘맹신’의 뒷면이 보인다. 주사, 특히 두어 시간씩 침대에 누워 맞는 링겔 주사는 노동자를 잠시나마 쉬게 해 준다. 아파도 일해야 하는 권위적인 직장, 일차의료도 상병수당도 없는 빈약한 복지제도, 노동자의 건강 보호를 하찮게 여기는 사회 환경을 견디게 잠깐의 휴식을 준다. 쉬어야 하는데 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렇게나마 잠시 쉬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비과학이 아니라 오히려 합리적인 선택이다. 우리가 참, 너무 고단하게 산다. (p.114-115)

 

 그룹 진료에 관한 의견을 물었는데 ‘일차의료란’으로 시작하는 답변을 내놓는다. 여러 사람의 답변을 꿰뚫는 공통 줄기는 ‘의사-환자의 관계’다.

의사-환자의 관계가 일차의료의 중심이에요. 오랜 관계를 통해서 가정의는 등록한 환자의 건강뿐 아니라 가족, 직업, 주거 환경 등 생활 여건 전반을 이해하게 돼요. 건강 보호에 책임을 지는 일차의료는 이와 같은 관계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해요. 환자의 편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오랜 유대 관계가 있을 때 의사를 신뢰할 수 있습니다. 가정의는 전통적으로 ‘혼자 개원’해 자기에게 등록한 환자와 일대일 관계를 맺어 왔어요.

 그 답변은 정확히 안나마리아가 자기 환자와 맺는 관계를 묘사한다. 안나마리아에게 환자는 ‘잘 아는 사람’이다. 그의 이름과 나이, 건강, 치료의 경과뿐 아니라 살아가는 형편까지 기억한다. 자료를 찾거나 데이터를 확인하지 않고도 ‘한 인간인 환자’를 알고 있다. 안나마리아가 진료실을 여는 시간은 하루에 두서너 시간으로 비록 짧지만, 그곳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다져진 관계가 있고 환자에 대한 가정의의 묵직한 책임감이 있다. (p.157)

 

 우리나라의 개인 의원,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진료실이 열리는 그곳을 떠올린다. 의원의 진료 시간을 조사하면 OECD 회원국 중 한국이 가장 길 것이다.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일주일에 5-6일간, 아침 9시나 10시에 열어 저녁 7시쯤 닫으니 하루에 보통 9시간을 운영한다. 이렇게 장시간 근무하느라 힘들지만, 경쟁이 심한 환경 때문에 이웃 병의원보다 진료 시간을 줄이기는 어렵다. 심지어 일주일에 한두 번씩 야간진료를 하는 곳까지 있다.
 진료실을 열어 두는 시간의 길이로 의료의 효과가 결정된다면 한국은 최고의 의료, 최고 수준의 건강 상태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다. 2017년 OECD 자료를 보면 한국에서 자신의 건강 상태가 양호하다고 응답한 사람의 비율(32.5%)이 이탈리아(66.6%)의 절반에 미치지 못하고, OECD 회원국 중에 꼴찌다. 또 만성질환자가 병이 악화해 입원하는 숫자가 한국에서는 인구 10만 명 당 당뇨병 281명, 기관지 천식 309명으로 많은데 이탈리아에서는 각각 40명, 64명에 그친다. 이 점에서 이탈리아는 OECD 회원국 중에 일차의료가 가장 뛰어나다고 인정받는다.
 이탈리아에서 가정의가 하루에 두서너 시간만 진료하면서 환자의 건강을 높은 수준으로 지킬 수 있는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이 밤에 모인 가정의 열두 사람이 한 목소리로 강조하는 것은 ‘의사-환자의 관계’다. 이것이 그대로 답이거나, 혹은, 적어도 답을 찾을 실마리일 것이다. (p.159)

 

 그런데 이 나라에서 주는 단순히 행정적으로 나뉜 구획이 아니다. 주마다 고유한 역사와 전통, 산업, 음식과 옷이 있고 심지어 언어도 일부 주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5세기에 이탈리아반도에서 로마제국이 사라진 뒤 크고 작은 여러 국가로 나뉘어 제각기 다른 길을 걸었던 천 년 역사에서 비롯된 차이로, 그런 만큼 지역별 정체성이 뚜렷하다.
 19세기 통일운동 때 지역별로 자치권을 갖는 연방 형식의 국가를 세우려는 열망이 있었다. 그러나 통일 뒤에 탄생한 이탈리아왕국은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도입했고 20세기 들어 파시스트 무솔리니가 애국과 민족 부흥을 명목으로 중앙 권력을 더욱 강화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군주제를 폐하고 공화국을 만들면서야 헌법에 자치 분권 조항을 넣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정당 간 이해관계와 대립에 가로막혀 시행이 지연되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 주별 자치가 시작되었다. 그 뒤로는 점차 주의 입법 권한을 확대하며 자치를 강화하고 있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실제로는 이탈리아에서 지방자치가 법적 규정에 상관없이 일상에 깊이 뿌리 박혀 있다. 사람들의 관심은 자기가 사는 동네, 도시, 넓게 잡아도 그 도시가 소속된 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심지어 전문가조차도 그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물론 전문가는 범국가적인, 유럽연합 차원의, 범세계적인 인식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관심의 주된 초점은 자기가 사는 도시와 주에 맞춰진다. 온갖 통계가 지역 단위로 생산되고 지역 언론이 활발하며 지역의 기자, 전문가, 작가가 쓴 지역 기사와 칼럼이 풍성하다. 주정부도 지역 대학과 긴밀히 협력하고 그 학문적 결실을 정책에 흡수한다. (p.181-182)

 

 국영의료는 그 법에서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증진하고 유지하며 회복하게 하는 모든 기능·시설·서비스·활동”으로 정의된다. 즉 보건의료의 전 범위를 끌어안는다. 이에 따라 아슬의 사업도 보건의료의 전 범위에서 시행된다.
 가브리엘레는 아슬의 사업 범주가 셋으로 나뉜다고 말한다.
 첫째 범주는 공중보건. 이는 인구 집단의 건강을 보호하고 향상케 하는 활동으로 건강증진, 보건교육, 전염병 예방, 환경보건, 식품위생, 산업보건 등을 넓게 아우른다.
 둘째는 ‘테리토리 의료’. 일차의료, 전문의 외래진료, 요양 등을 시민이 일상에서 손쉽게 이용하도록 제공하는 것으로 아슬의 가장 큰 사업 범주다.
 셋째는 병원의료. 병원에서 시행하는 입원, 수술, 분만, 응급의료 등이 이에 해당한다. (p.194)

 

인구 1천 명당 1명 정도씩 가정의가 필요해요. 그 숫자에 비례해서 전문의, 간호사와 조산사, 사회복지사, 상담심리사의 인원을 정하지요. 가정의와 전문의는 계약으로 확보하고 간호사 등 다른 인력은 직원으로 고용합니다.

 아까 수천 명이라고 한 아슬 직원이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는지 대강 알 수 있다. 저마다 전문 자격을 갖춘 인력이니 인건비가 만만치 않겠다.
 가브리엘레는 ‘그래도 병원에 비교하면 동네의료가 경제적’이라 한다. 질병 예방과 조기 진단, 조기 치료로 거두는 건강 수준 향상의 효과가 큰데, 그런 사업에 들어가는 인건비와 사업비를 다 합해도 병원 운영비보다 적은 까닭이다.

동네의료의 반대편이 병원의료예요. 동네의료가 효과적일수록 병원의료 이용이 줄어듭니다. 우선 사람들이 건강해지니까요. 게다가 동네에서 의료를 편리하게 이용하고, 그 서비스가 다양하고, 질이 높으면 굳이 병원에 갈 필요가 없어요. 특히 응급실에 가는 환자가 줄어들지요. 입원환자도 줄고요. 그러면 아슬이 병원 운영에 써야 하는 돈이 줄어 재정에 여유가 생겨요. 그 돈으로 동네의료에 더 많이 투자합니다.

 놀랍다. 아슬의 사업 범위가 넓고 책임이 무겁지만, 동시에 상당한 자율권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p.196-197)

 

 이 상담실은 일찍이, 국영의료가 도입되기에 앞서 설립된 공공기관이다. 1975년에 여성의 건강을 보호하는 법률이 제정되고 이에 근거해 설립되기 시작했다.

가족상담실은 모성에 관련해 여성의 건강과 사회적 권리를 보호합니다. 조산사와 사회복지사가 여성을 상담하고 의사가 진료하지요. 임신, 출산, 산후 돌보기, 임신 중단, 피임, 입양, 성병, 성교육, 가정 폭력, 위기 가정 등에 관해 상담하고 진료해요. 누구에게나 무료입니다. 외국에서 이주한 여성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기관이에요.

(…)
 눈길을 끄는 것이 임신 중단이다. 임신한 지 90일 이내에는 여성이 임신을 중단할 권리가 법률로 보호되므로 여성이 원하면 상담과 진료를 거친 뒤 사후피임약을 받거나 중절 수술을 받을 수 있다. 의사가 증명서를 발급하고 병원을 추천해 무료로 수술받게 해 준다. 에밀리아로마냐주에서 2015년 한 해 동안 가족상담실이 시행한 임신 중단이 17,000건을 웃돈다. 가톨릭의 본고장인 이 나라에서 여성이 임신을 중단할 권리를 국가가 보호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논쟁을 거쳤을까. (p.200-202)

 

 1948년에 세계 최초로 국영의료를 시작한 나라가 영국이고, 이탈리아가 1978년에 국영의료를 도입할 때 참고한 나라도 영국이다. 그 영국에서 국영의료가 위기에 처했다. 정부가 재정 적자를 이유로 국영의료 예산을 줄이고 민간 자본을 끌어들여 민영화를 추진한다. 효율성을 높인다는 목표 아래 공공병원을 사립병원과 비용에서 경쟁하게 해, 의료의 질이 좋아지게 하는 것보다는 운영비 줄이기에 전념하게 만든다. 이대로 가면 이윤을 노리는 민간 자본의 입김으로 국영의료가 위축되리라는 우려가 크다.
 그런데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나라가 영국만이 아니다. 2008년에 미국의 금융위기에서 시작한 경기 침체로 이탈리아 경제도 크게 타격을 입었다고 알려져 있다.
 “미국의 금융위기가 세계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영국이 민영화를 추진하는 것처럼 이탈리아도 국영의료를 축소하고 민영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나요?”
 가브리엘레는 껄껄 웃는다.
 “아니요. 다행히도 우리에겐 영국의 대처 총리가 없어서요.” (p.211)

 

과거에 간호사는 주로 병원에서 입원환자를 돌보는 일만 했어요. 동네의료에서 역할은 거의 없었지요. 그러나 고령 인구가 많아지고 만성질환자가 늘면서 상황이 달라졌어요.
 1994년에 간호사의 전문성을 넓게 정의하는 법령을 제정했답니다. 대학을 졸업해 자격을 취득한 간호사가 질병 예방, 환자 돌봄, 보건교육의 넓은 영역에서 전문 인력이라고 법으로 인정한 거예요. 그때부터 간호사가 병원 입원환자의 간호뿐 아니라 동네에서 하는 만성질환 관리, 가정돌봄 둥으로 활동 범위를 넓히게 되었어요. 독립 직업인이므로 단독 개업도 할 수 있고요.
 건강의집에서도 간호사의 활동 범위가 넓어요. 진료실, 가정돌봄, 사례 관리, 다분야 팀 활동 등 여러 역할을 맡으니까요. 그중에 간호사 진료실은 가장 기본적인 의료를 제공하는 곳이에요.

(p.228-229)

 

이탈리아에는 정신병원이 없어요. 정신병원 운영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죠.

 뭐라고요? 깜짝 놀라는 나를 보며 루카가 빙긋 웃는다.

정신과 환자를 병원이 아닌 동네에서 치료한답니다. 정신병원에 입원하면 환자가 사회와 격리되고 그 기간이 길어지면 퇴원 뒤 사회에 적응하기 어렵지요. 격리 상태에서 환자의 인권도 침해되고요.
 적절한 약을 먹고 치료하면 입원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 없이 생활할 수 있어요. 환자가 외래진료로 꾸준히 치료받도록,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곳이 정신건강센터예요.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다. 그러나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하는 게 동네, 아니, 지역사회 정신의학이다. 언제부터 이탈리아에서는 정신과 치료를 그렇게 했을까?

1978년에 정신보건법이 획기적으로 바뀌면서 정신질환자를 강제로 입원시키지 못하게 되었어요. 이미 입원한 환자는 퇴원하게 하고 새로 정신병원을 만들지도, 환자를 수용하는 시설을 만들지도 못하게 했어요. 정신질환의 예방, 치료, 재활의 전 과정이 지역사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그 법에 못 박았지요.

 천지개벽이 따로 없었겠다. 정신병원을 비우고 아예 없어지게 하다니 어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1978년이면 국영의료 법률이 통과된 해인데 그렇다면 국영의료를 계기로 바뀐 것일까?

국영의료 도입과는 별개였어요. 1960년대에 프랑코 바살리아(1924-1980)라는 정신과 의사가 시작한 시민운동의 결과예요. 그때까지 정신과 환자를 병원에 강제로 입원시키고 감금했어요. 병동에서 치료라는 명목으로 물리적 폭력이 일상적이었고 전기쇼크요법, 인슐린쇼크요법이 빈번히 사용되었고요.
  바살리아는 환자의 고통과 비참한 처지를 사회에 알리고, 정신병원에 가두는 것이 오히려 환자의 증세를 악화시킨다고 주장했어요. 정신질환자를 무질서와 범죄의 원인이라 낙인찍는 사회 제도를 비판했고요. 1968년에 출판된 그의 책 《시설을 거부하다》는 베스트셀러였어요.

(p.235-236)

 

 지역사회로 돌아온 환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정신질환에 종류가 여럿이고 환자의 연령층이나 증세도 제각각일 텐데 누가 그들을 도와주었을까. 집이 있어야 하고 같이 살 사람, 이웃과 어울림, 직업도 있어야 한다. 그 일을 누가 어떻게 감당할까?

아슬이 정신질환자에게 필요한 전체 서비스를 총괄해요. 바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정신건강센터가 시민이 가장 쉽게 접근하는 곳이에요. 건강의집, 외래진료센터, 종합병원 등 곳곳에 있어요. 인구 87만 명을 담당하는 볼로냐 아슬에 정신건강센터가 33개니 동네마다 있는 셈이지요. 환자나 가족이나 친구나 누구라도 언제든 센터에 와서 상담하고 정신과 전문의 진료를 받을 수 있어요. 필요하면 정신과 의사가 환자의 집을 방문해요. 환자의 가정의와 정신과 전문의가 협력하고요.
  종합병원에는 정신과의 미니 입원 병동 말고도 낮 병동이 있어요. 낮에 몇 시간만 환자가 머무르는 곳이에요. 정신요법을 받거나 약 처방을 변경할 때, 굳이 종일 입원할 필요는 없으니 이곳을 이용하지요.
 동네에 데이케어센터가 있어요. 환자의 사회적 재활을 돕는 곳이에요. 케어의 범위가 넓지요. 대인관계나 생활에 필요한 기술을 익히고 직업 훈련까지 하니까요. 환자마다 필요한 게 뭔지, 가족 관계나 생활환경이 어떤지 고려해서 개인별 프로그램을 만들어요. 비슷한 환자끼리 그룹이 되어 일부 프로그램을 같이 이용하게도 하고요.
 거주 시설도 있어요. 환자가 몇 명씩 모여 사는 집이에요. 또 요양원도 있고요. 요양원에는 밀착 관리가 필요한 환자가 입소해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요. 일부 환자는 요양원에 오래 거주하기도 하죠. 이 시설은 모두 도시 안에 있어야 한답니다. 외딴곳에 있게 되면 환자가 사회에서 격리될 우려가 있으니까요.
 지역사회 그 자체가 실은 큰 역할을 해요. 시민단체가 환자에게 사회적 버팀목이 되어 주고 경제적 자립을 돕지요. 특히 가족이나 친척이 단체 활동에 적극적이에요. 환자가 평생을 동네에서 살아가야 하니까요.

 입체적이고 방대한 지역 체계다. 교과서로만 배운 ‘지역사회 정신의학’이 실현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시·군·구 정신건강복지센터의 열악한 현실이 새삼 떠오른다. (p.239-241)

 

 쿠프의 예약 업무가 드러내 보여 주는 몇 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 의료기관의 운영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고 의료기관이 서로 협력 관계에 있다. 쿠프가 ‘대기 기간 최소화에 목적을 둔 공동의’ 예약 접수를 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둘째, 외래진료센터와 병원에 일차의료를 지원하는 기능이 부여되었다. 쿠프가 가정의의 검사 처방을 이들 기관의 검사실에 직접 전달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셋째, 국영의료를 시행하는 의료기관은 어디든 의료의 질에 큰 차이가 없다는 신뢰가 있다. 쿠프가 예약할 기관을 정하는 기준이 ‘대기 기간이 가장 짧은 곳’으로 단순한 것은 그 때문이다.
 겉에서 보면 쿠프는 그저 평범한 접수창구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서비스를 여기서 제공한다. 쿠프는 어쩌면, 국영의료와 우리의 시장형 의료 환경이 어떻게 다른지 그 차이를 가장 선명히 보여 주는 특별한 창구가 아닐까 싶다. (p.263)

 

 전산망 쿠프의 쓰임새가 예약 접수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예약은 접수하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고, 예약 상황을 모니터링하는 데까지 포함해요. 모니터링으로 환자들이 얼마나 대기하는지 알 수 있고 의료 수요와 공급에 관한 데이터도 얻어요.

 리치아가 자기 노트북을 내게로 돌려놓는다. 화면에 ‘대기 환자 모니터링-에밀리아로마냐주-안과 진료’란 제목 아래 수평으로 띠그래프 여남은 개가 가지런하다. 띠마다 아슬의 이름이 붙었다. 길이 전체가 초록색인 띠가 절반쯤 되는데 나머지에서는 띠 오른쪽 끝부분에 빨간색 토막이 짧거나 길게 있고 그 왼쪽으로 짧게 노란색 토막, 그다음부터가 초록색이다. 색색의 토막마다 숫자가 적혀 있다.

우리 주에서 안과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를 보여 줘요. 띠 하나가 각 아슬이고 띠의 가장 오른쪽 토막이 지금 막 예약한 환자, 왼쪽으로 한 칸씩 가면 1주 전, 2주 전, 3주 전, 가장 왼쪽은 4주 전 예약한 환자예요. 토막에 적힌 숫자는 그 기간에 예약을 접수한 환자 수고요.
  국영의료에서 대기 기간에 상한선이 있는데, 전문의 진료에 대기는 최대 30일이에요. 이 날짜를 넘지 않아야 하는 거죠. 그 기준을 전체 예약 건의 90% 이상이 충족하면 초록색, 60-89%가 충족하면 노란색, 기준을 충족하는 예약 건이 60%에 미치지 못하면 빨간색으로 표시해요.
 일부 아슬 띠에서는 오른쪽 토막이 빨간색이지요? 그 권역에서 지금 안과를 예약하는 환자가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걸 보여 줘요. 그런데 왼쪽 토막으로 가면 노란색을 거쳐 초록색으로 바뀌어요. 그건 환자가 처음 예약할 때는 오래 대기하는 날짜를 받지만, 1-2주 지나면서 날짜가 앞당겨져 대기 기간이 짧아지기 때문이에요. 앞에 예약한 환자가 예정된 날짜보다 일찍 진료받게 되어 뒤에 있는 환자의 날짜도 덩달아 당겨지거나, 아슬이 그 과에 진료 공급을 늘린 결과예요.

(p.266-267)

 

 대기 환자 모니터링 화면을 언제나 켜놓고 있을 리치아에게 한 가지 더 질문한다. 어떤 아슬에서 어떤 과에 공급이 수요를 맞추지 못해 환자가 오래 대기한다면, 그래서 대기 기간이 상한선을 넘어간다면, 어떻게 하는지?

필요하면 아슬이 긴급히 대응해요. 신속하게는 사립병원 등 사적 의료와 계약해서 진료 공급을 늘리지요. 환자에게 사립병원을 이용하게 하는 건데, 다만 그럴 때 환자가 돈을 더 내게 하지는 않아요. 비싼 사적 의료 이용료가 아닌 국영의료의 법정 본인부담금만 내고 진료받게 하죠. 아슬이 보장해야 할 진료니까요.
  공급 부족이 일시적인 현상에 그친다면 그렇게 임시 조처로 마무리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반복되면 아슬의 계획을 바꿔야 해요. 내년도 사업 계획에 또는 3년 주기인 우리 주 국영의료계획에 그 내용을 반영해 안정적으로 공급되게 하지요.

(p.269)

 

 그는 외국 생활을 처음 시작하게 되면 의료제도가 달라서 어려움을 겪는 예가 흔히 있다고 했다.

이탈리아 병원이 불편하다고 말하는 한국 교민들이 있지요. 가정의를 거쳐야 병원에 갈 수 있고 진료받으려면 기다려야 하니까요. 한국에서처럼 병원을 찾아가면 바로 진료받는 건, 응급환자가 아니면 꿈도 못 꿔요. 처음 온 교민들은 그걸 많이 불편해하죠.

 그런데 K는 근래 한국에 몇 번 다녀가면서 다른 것을 느끼게 되었다.

지난번 한국에 오는 기회에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어요. 서울에 도착해서 예약했는데 금방 진료받게 날짜가 잡혀서 진짜 한국이 좋구나 했지요. 의사 선생님이 검사를 여러 가지 하라고 해서 그 많은 걸 언제 하나 했는데 다 빨리 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검사 결과를 설명 들을 때, 의사 선생님이 다른 결과는 말해 주면서 그중에 가장 값이 비싼 검사 결과를 알려 주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궁금해서 제가 물어봤더니 당황하면서 그제야 결과를 찾더라고요. 제가 묻지 않았으면 모르고 지나갔을 것 같아요.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게 필요한 검사였을까? 내게 꼭 필요해서 의사 선생님이 그 검사를 하라고 했을까? 이탈리아에서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말이죠.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실은 차이점을 하나 더 느꼈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이 진료하면서 내 얼굴을 거의 안 봐요. 차트나 검사지 같은 기록만 들여다보고요. 환자의 말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어요. 이탈리아에서 의사들은 그렇지 않거든요.

 난처했다. 나는 그에게 한국에서 의사가 날마다 진료해야 하는 환자가 얼마나 많은지, 그래서 의사가 져야 하는 진료 부담이 얼마나 큰지 설명하며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그러고는 화제를 돌려 토스카나 와인과 볼로냐 소시지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헤어질 무렵에 나는 K에게 물어보았다. 만약 셋째 아이를 낳는다면 이탈리아와 한국, 어느 나라의 병원에서 낳고 싶은지?

아이를요? 음, 이탈리아 병원에서 낳고 싶어요. 인간적이어서요. 한국보다는 이탈리아 병원이 더 인간적이에요.

 ‘인간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병원에 관해 말할 때 이 표현을 거의 쓰지 않는다. 우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주로 병원의 규모, 시설, 장비, 의료 수준, 서비스 정신, 비싼지 덜 비싼지 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K는 우리와 다른 관점에서 병원을 보고 있다. 병원이 인간적이기를, 우리는 기대하지 않는 것일까. (p.308-309)

 

 로마에 있는 제멜리 대학병원은 사크로 쿠오레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병상이 1,558개인 큰 병원이다. 가톨릭대학교가 사립 기관이므로 이 병원도 사립병원인데 이탈리아와 유럽 전체에서 가장 큰 사립병원에 해당한다. 사립병원이라도 주정부의 공인을 받고 아슬과 계약하면 국영의료 공급에 참여할 수 있어, 이 병원 역시 그와 같은 공인 절차를 거쳐 공공병원과 다를 바 없이 국영의료를 제공한다.

수술실에서 보니까 베로네시같이 뛰어난 의사가 이탈리아에서 배출된 게 이해가 되었어요. 거기 의사들은 정해진 대로 치료하는 게 아니라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새롭게 접근해요. 틀에 박히지 않고 환자에게 맞는 방법을 끊임없이 찾는 거예요. 제가 연수했던 분야가 유방이라 특히 그런지 몰라도, 수술이 예술적이라는 생각마저 들었어요.
 이탈리아 사람들이 예술에 강하죠. 그건 알고 있었지만, 음악이나 미술이 아닌 수술까지 그렇게 하는 걸 보니 놀라웠어요. 예술적인 능력이 유전자에 단단히 박혀 있나 봐요.

 병원의 수술과 창의적인 예술이 그렇게 연결되는구나 싶었다. 사실이지, 이탈리아 사람들의 예술적인 기질은 어디서나 드러난다. 무심해 보이는 실내 공간, 길모퉁이 가게의 진열대, 조그만 샌드위치 포장에서조차 독특한 손길과 색감이 언뜻 느껴지곤 했다. 그러니 외과 의사가 자기 역량을 다해 암 환자를 수술하는 데서야 더 말할 나위가 있을까. (p.317)

 

 병원 의사의 생활은 어느 나라에서나 비슷할 거라고 했다.

수술이 아침 8시에 시작되니까, 병동 회진을 몇 시에 하겠어요? 아침 7시면 벌써 시작이에요. 물론 전공의는 더 일찍 나와서 준비하고요. 회진 마치면 수술하고, 외래진료하고, 점심때 먹는 음식은 대개 딱딱한 빵에 살라미와 치즈가 전부고요. 이탈리아에서 의사 생활이 어쩌면 우리나라에서보다 더 빡빡할 거예요.
 일이 거기서 끝나는 것도 아니죠. 세미나, 논문, 학회 준비도 해야 하니까요. 제멜리 병원에서 의사들은 늘 바빴어요. 아마 세계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겠죠.

 잠시 후 J는 솔직히 말해 이탈리아 의사에게는 우리와 다른 것이 있고, 그래서 부러웠다고 했다. 말에 고민이 묻어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의사가 사회적으로 존경받아요. 사람들이 의사에게 우호적이고요.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꼭 그렇다고 할 수 없잖아요. 의사를 신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게 아니죠.
 사실, 이탈리아에서 소득세율이 높아서 의사가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해요. 월급이 500만 원을 넘어가면 그중 40%가 세금으로 나가버리니까요. 병원이 월급을 올려 주거나 또는 의사가 사적 의료로 환자를 진료해서 수입을 올린다고 해도 세금을 떼고 나면 오르기 전과 다를 것이 별로 없어요.
 대신에 사람들이 알아주는 거예요. 의사가 새벽부터 병원에 나가 일하고 공부하고 연구한다는 걸 말이죠. 돈을 크게 더 버는 것도 아니면서 환자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을요. 그래서 의사를 존경해요. 그렇게 인정받고 존경받는 것이 부러웠어요.

(p.320-321)

 

 코로나19 사태의 가장 큰 원인은 따로 있다. 우리나라의 일부 언론에서 주장하기를 유럽의 코로나19 대유행으로 공공의료가 무기력하다는 게 입증되었다고, 유럽의 국영의료 등 공적 의료제도는 부실하고 허약하다는 게 드러났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비록 이번에 코로나19 유행을 미리 막지 못했고 병상 부족으로 긴급 비상대책을 세워야 했지만, 대규모로 감염이 퍼진 상태에서 많은 환자를 치료하고 추가 확산을 통제한 것은 바로 이 공적 의료제도를 통해서였다. 특히 이탈리아에서 북부의 엄청난 유행이 중부 이남으로 번지지 않고 차단된 데서 국영의료의 대응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사태의 원인은 너무 늦게 대응을 시작한 데 있다. 한 달 앞서 동아시아에서 유행이 일어났을 때, 유럽이 하려고만 했다면 자기들에게 닥칠 위기에 대비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 국가가 시행한 대응책을 참고해 미리 방책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대신에 오히려 비판했다. 중국이 대도시를 통째로 봉쇄한 것을 두고 권위주의적 정부의 행태라고, 한국이 모바일 정보를 이용해 접촉자를 추적하는 것을 사생활 침해라고, 온 나라가 마스크를 쓰는 것을 맹목적인 집단행동이라고 했다. 특히 일부 정치인들이 위기에 둔감했고 위험을 과소평가했다.
 이탈리아 북부동맹 대표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외출해 즐기라고 시민을 부추기고, 밀라노 시장은 트위터에 사람들과 포옹하고 외식하는 사진을 올리고, 영국의 존슨 총리는 병원에서 코로나19 환자와 악수했다고 자랑하고,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19 유행이 정치적인 날조라고 비웃었다. 겨우 몇 주 뒤 스스로 전면 봉쇄에 돌입해야 했음에도. 그러니 이번의 코로나19 사태에는 정부의 잘못된 판단이, 즉 의료보다 정치의 영향이 더 컸다.
 초기 골든타임을 허비하면 대가가 크다. 전파가 일어나는 초기에 방역의 기회를 놓치면 뒤늦게 의료 방책만으로 대유행을 피할 길은 거의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대응 시점이 늦었더라면 재난에 가까운 사태가 일어났을지 모른다. (p.334-336)

 

 코로나19 비상사태에 우리나라는 마치 ‘평소 국영의료체계가 있는 것처럼’ 대응했다. 국무총리를 정점으로 대책본부를 설치하고,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본부가 감염 통제를 지휘하고, 지방자치단체장이 지역 대응의 정점에 서고, 보건소가 선별검사소 설치와 격리 대상자 관리를 전담하고, 국가가 코로나19 환자를 치료할 입원 병상을 확보하고, 환자는 완전히 낫기까지 무료로 치료받고, 비용은 건강보험과 국비로 충당했다. 그래서 누구든 생생히 볼 수 있었다. 국민을 지킬 힘이 정부에게 있음을, 시장이 아닌 공적 체계가 재난을 막아줄 안전망인 것을.
 그런데도 일각에서는 코로나19 대응으로 우리식 ‘시장형’ 의료제도의 우수함이 입증되었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에서 병원 대부분이 사립기관이고 저마다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려 병상을 늘린 까닭에 인구 당 병상이 유럽보다 몇 배나 많아 ‘과잉’이라 지적되었는데, 그 덕분에 코로나19 환자가 입원할 수 있었으니 ‘시장형’ 제도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주장이 잘못된 것을 알게 된다.
 코로나19 환자의 입원 치료를 거의 전적으로 공공병원이 도맡았다. 지역마다 국립대 병원과 지방의료원 등 공공병원이 병동을 비우고 환자를 받아들여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치료했다. 우리나라에서 공공병원은 전체 병원 중 겨우 5%에 불과할 만큼 숫자가 적고 평소에 전혀 주목받지 못하지만, 코로나19 환자의 치료에는 크나큰 기둥이었다. 물론 사립병원도 협력했다. 그러나 대개 선별진료소를 설치해 감염 여부를 진단하는 데 그쳤고 환자를 입원시켜 치료한 병원은 몇 되지 않는다. 이는 감염병 치료에 필수인 음압 격리 병상을 제대로 갖춘 병원이 드물기 때문이고, 또 그런 시설을 갖춘 데서는 감염 관리의 부담을 이유로 혹은 코로나19 환자가 있으면 다른 환자가 그 병원에 오지 않을 것을 우려해 입원시키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 많은 사립병원의 병상 대부분이 코로나19 위기 대응과는 무관했다.
 게다가 우리나라에 병상이 많아도 병상의 환자를 돌볼 의료 인력은 매우 적다. 인구 대비 의사 수가 OECD 회원국 중에 최하위권으로 평균의 70%에도 미치지 못하며 간호사 수도 하위권으로 평균의 77%에 머문다. 오직 병상만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많으니 병상당 인력을 계산하면 OECD 평균의 30%도 되지 않아 부끄러울 지경이다. 이처럼 열악한 여건에서 의료진은 과로, 사고, 감염 등의 위험에 고질적으로 시달린다. 이번에 코로나19 환자가 입원한 병원에서도 인력이 부족해 의사도 간호사도 장시간을 초과 근무해야 했고 신체적, 정신적으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견뎌야 했다.
 그래서 의료 시장 덕분이 아니다. 우리가 코로나19에 대응한 힘은 시장이 아닌 국가 공동체에서 왔다.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을 비롯해 정부 공무원 다수가 현장을 지키며 임무에 충실했다. 학계가 위원회를 꾸려 실시간으로 방역과 임상진료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수많은 의료인이 비상근무에 응하고 자원봉사에 나섰다. 자치단체의 공무원은 보건소 직원이든 아니든 다 함께 자가 격리자 관리와 다중이용시설 감시 등 추가 업무를 나누어 맡았다. (p.337-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