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요의 시대, 무엇이 가난인가 / 루스 리스터 / 갈라파고스
아래 내용은 지속빈곤(persistent poverty) 상태로 사는 사람들이 “빈곤이란” 뒤에 써넣어 완성한 문장들이다. 앞으로 살펴볼 빈곤의 물질적 측면과 심리사회적 측면이 모두 담겨 있다.빈곤이란,
(p.17-18)
‘누구나 갖는 꿈을 똑같이 갖고 있지만
실현할 방법이 전혀 없는 것.’
‘아이들에게 허구한 날 안 된다고 말하는 것.’
‘아이들의 실망한 눈빛 때문에 해마다 돌아오는 성탄절과
생일을 두려워하는 것.’
‘남이 쓰던 침대에서 자고 헌 옷을 입으면서
고마워하라는 요구를 받는 것.’
‘매일매일,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상태로 사는 것.’
‘쓸모없는 존재, 그보다 더 못한 존재로 취급당하면서
그걸 받아들이는 것.’
‘내면에 희망이라고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
기타 센은 “누가 정말로 가난한지 이해하려면 가구 내 불평등을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가족 내에서 소득과 소비가 불평등하게 분배된다는 것은 남성 배우자는 가난하지 않은데 여성이 가난하거나, 여성이 더 강도 높게 빈곤을 경험한다는 뜻일 수 있다. 재정 관리에 대한 영국의 수많은 연구를 살펴보면 가족 내에서 소득이 언제나 공평하게 배분되지는 않으며, 여성의 ‘개인 지출금’이 남성보다 적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런 연구는 대부분 규모가 작은 정성연구지만, 결론을 내리는 데 정량 조사 결과도 근거로 삼는다. EU 차원의 분석에 따르면, 가구 내 자원을 공유하는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가구가 전체의 3분의 1에 달한다.
소비와 박탈 측면에서 정성연구 결과를 보면, 음식과 같은 일상적인 필수재와 자동차 같은 내구소비재 모두에 남성이 ‘특권을 지닌 소비자’로서 역할을 하는 경향이 있다. 나아가 밀러와 글렌디닝이 지적했듯이 “해당 재화를 통해 얻는 혜택과 자유를 고려할 때, ‘그 남자의’ 자동차와 ‘그 여자의’ 세탁기를 동등하다고 보기는 무척 어렵다.” 제한적으로나마 가구 내 불평등을 측정할 수 있게 된 영국빈곤및사회적배제조사에 따르면 성별 박탈 격차는 1999년 이래로 줄어들고 있지만, 자녀가 있는 경우에는 격차가 더 두드러진다. 유럽의 문헌을 간략히 검토한 카라기아나키와 부르하르트는, 여성에게 불리한 가구 내 박탈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명확하지만, 그 정도는 문화적, 경제적, (특히 복지국가의) 정책적 맥락에 따라, 가족과 가구의 형태에 따라 다양하다고 결론짓는다. 특히 “개인이 가구에 투입한 소득을 나누는 문제는 자원 통제권과 관련이 있고, 배우자 간에는 여성에게 할당되는 소득이 남성보다 적은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카라기아나키와 부르하르트가 분석한 EU소득및생활조건통계 자료에 따르면 “유럽 내 가구의 성인 구성원 사이에서 불평등한 박탈의 결과를 안고 사는 성인의 비율이 상당”한데, 단일 가족 단위를 넘어서는 ‘복합 가구’인 경우에 특히 그러하다. 더욱 중요한 점은 “모든 나라에서 가구 내 박탈 불평등의 정도가 전반적인 박탈 수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p.92-93)
입에 발린 상투적인 문구가 되기는 했지만, ‘존엄과 존중’이라는 말에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존엄과 존중을 향한 갈망은 정치학자와 사회학자들이 ‘인정의 정치’라 부르는 것의 근간이 된다(이 점은 결론에서 논의한다). 인정 이론을 주창한 악셀 호네트는 인정 추구가 ‘굴욕 또는 경멸의 경험’에서 비롯한다고 말한다. 찰스 테일러가 주장하기로, 인정은 “단순히 타인에게 예의상 받는 것이 아니다.” 오직 타인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핵심적인 인간의 필요’다. 이렇듯 인정은 개개인의 자존감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내면의 존엄, 그리고 내면의 가치를 존중받고자 하는 정신적 필요에서 비롯한다.
리처드 세넷은 인정과 존중의 결여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렇게 설명한다. “노골적인 모욕만큼 공격적이지는 않지만, 존중 부족으로 받는 상처는 그와 비슷할 수 있다. 타인을 모욕하지 않지만 인정을 보여주지도 않는 경우, 그 상대는 존재 자체로 중요한 온전한 인간으로 보이지 않게 된다.” 인간 존엄과 빈곤에 관한 소논문에서 클레멘스 제드마크는 이처럼 외면당한 타자에게서 ‘인간적 측면을 보지 못하는 상황’은 빈곤 경험에서 흔하게 나타나며, 이런 상황이 “자존감의 원천인 존엄의 감각을 약화시킨다”고 말한다. 이는 사이먼 찰스워스가 인용한 어느 정보 제공자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그 사람은 자기를 ‘0’으로 취급하는 느낌이 들었다며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가 되는 그런 경험은 파괴적이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우리가 보았듯이 빈곤층의 존재가 드러나는 경우는 대체로 부정적인 측면을 조명할 때뿐이다. 따라서 ‘지식의 병합’ 사업 보고서에서는 빈곤층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p.150-151)
필에 따르면, 그들이 바란 것은 그저 ‘존중받고 존엄을 지키는 것, 무능력하고 멍청한 열등 인간 취급을 받지 않는 것’이었다. 크리스 아네이드는 ‘미국의 뒷줄’에 대한 책에서, “우리는 마약, 분노, 원한으로 채워지기 십상인 공백만을 남긴 채 그들의 존엄을 수없이 부정했다”고 말한다. 당연히 “그들은 모멸감을 느낀다.” 그렇지만 그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엄을 지키려 싸우고 있었다.” 베리스퍼드 등의 연구에서는 “빈곤이 존엄을 앗아 간다. 빈곤 상태에서는 어떠한 존엄도 지킬 수 없다”고 설명한다. 영국에서 열린 전국빈곤공청회에 참석한 젊은 실업 여성 밀리센트 심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사람이고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너무 화가 납니다.” 영국 빈곤참여권력위원회가 접수한 사례에도 이러한 분노가 상당히 많이 담겨 있다. 위원회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논평으로 시작한다. “빈곤을 경험하는 사람이 존중받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일반적으로도, 그들이 가장 자주 접하는 사람들로부터도 마찬가지다. … 빈곤 상태로 사는 사람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다는 것은 우리가 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들은, 가장 선명하고 깊이 와닿는 이야기였다.” (p.152)
존 롤스는 자존감이 ‘아마도 가장 중요한 기본적 재화’일 것이라 말했다. 센은 자존감이 핵심적인 기능화라고 판단했으며, 그 중요성은 누스바움이 더욱 깊이 있게 조명했다. 누스바움은 ‘자존감을 지키고 굴욕당하지 않을 사회적 기반, 타인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 존엄한 존재로 대우받을 가능성’을 인간에게 중요한 기능적 역량의 목록에 추가했다. 빈곤 상태로 사는 사람들을 고려한 이 원칙을 지키면 그들이 일상적인 사회관계 속에서 받는 처우가 달라지고 사회의 여러 조직도 영향을 받게 된다. 적어도 원칙상으로는, 이것이 1998년 제정된 사회적배제에대항하는프랑스법(French Law against Social Exclusion)에 반영되었다. 이 법 제1항에는 “배제에 맞서는 투쟁은 모든 인간의 동등한 가치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하는 국가의 필수재”라고 명시되어 있다. 유럽 차원에서는 EC가 회원국들에게 ‘인간 존엄을 지키면서 살기’ 충분할 정도의 사회적 지원을 받을 권리를 인정하도록 권고했다.
그렇지만 동등한 가치와 인간 존엄의 인정이라는 원칙을 대부분 입으로만 떠들고 만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만연한 현실에서는 아무 소용 없는 짓이다. 앤 필립스가 말했듯이, “충분히 부유한 사회인데도 극도의 빈곤을 외면하거나, 자의적으로 한 가지 기술에 다른 기술의 100배에 달하는 임금을 지급한다면, 그 사회는 시민을 동등한 가치를 지닌 인간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p.153)
‘의존 문화’에 기꺼이 다시 젖어 드는 수동적인 ‘복지 수급자’라는 대중의 고정관념에 문제를 제기하는 연구들도 있다. 사실은 수급자 대부분이 수급 생활에서 벗어나기를 열망하며, 임금노동에 대한 강한 신념을 드러낸다. 이 경우에는 추가 교육이나 고등교육 및 훈련을 통해 그 첫걸음을 디딜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형태의 교육과 훈련은 그 자체로 전략적 행위주체성을 키워 준다. 대부분 당장, 홀로 양육하는 어머니의 경우에는 자녀가 성장하자마자 임금노동을 시작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그러자면 상당한 장애물을 극복해야 하는 이들도 있다. 구직활동은 마음을 위축시킬뿐더러 돈도 많이 드는 일이다. 최저임금으로 살아 보기를 시도하면서 언론인 폴리 토인비가 밝혔듯이,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가 절대 만날 일 없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까닭 모를 변덕에 따라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일자리를 쫓아 감당할 수 없는 먼 거리를 오간다.” EU를 아우르는 연구를 진행한 저자들은 실업 상태인 사람들의 취업에 빈곤 자체가 걸림돌로 여겨지는 이유를 ‘소득 부족으로 구직 활동 자원이 제약되어’ 있는 탓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어려움이 클수록 의욕과 자신감은 낮아지는 경향이 있고, 의욕과 자신감이 낮을수록 임금노동을 통해 빈곤을 탈출하기 더 어려워진다. 대처하기를 하느라고 빈곤을 벗어날 방법을 찾는 데 필요한 기력을 빼앗길 수도 있다. 경제적인 불안정은 미래를 위한 계획 세우기와 투자하기를 훨씬 더 어렵게 만든다. 역설적으로, (때로 ‘복지 의존’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사회보장 급여를 삭감하고 제한하면 행위주체성이 손상되고, 채용 기회를 쫓을 능력과 의향이 떨어질 수 있다.
더 근본적으로, 특히 극심한 불안정 상태에서 나날이 닥쳐오는 견뎌내기의 부담에 시달리다 보면 미래를 ‘연 단위가 아니라 시간과 일 단위로만’ 보게 될 수 있다. 티라도의 표현으로는, “빈곤은 암울하여 멀리 내다볼 능력을 앗아 간다.” 이는 앞서 언급한 결핍의 해악에 관한 멀레이너선과 샤퍼의 연구에 담긴 논지 중 하나로, 미국의 한 연구에도 인용되었다. “[빈곤은] 장기적 이익에 ‘쏟아 낼’ 관심이 너무나 부족하고, 자기 통제 ‘근력’이 한계에 달한 절박한 상태”다. 더욱이, 사이먼 펨버턴에 따르면 빈곤과 관련된 압도적인 재정 불안정은 “생애 전략을 수립할 역량,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해 행동을 개시할 능력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하기에, 자율성의 손상”을 의미한다. (p.202-204)
빈곤 문제가 주로 개인의 책임이 되고 정치인과 언론이 ‘빈민’을 비난하는 환경에서는, 빈곤에 영향을 받는 사람이 자기가 처한 상황을 개인적인 것으로 이해하여 주로 자기를 비난하고, 같은 처지에 있는 타인들과 자신을 다르게 정의하거나 거리를 두고, 집단적인 차원이 아니라 개인적인 해결책을 찾는 경향이 있다. 도저히 다루기 힘들 것 같은 문제와 ‘자기에게 불리하게 조작된’ 듯한 제도 앞에서 절망, 무력감, 체념에 빠진 상태로는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기 어렵고, 그렇기에 행위주체성도 ‘견뎌내기’에만 한정해 행사할 수 있다. 가난하고 교육을 덜 받은 집단과 최빈 지역에서 정치적 참여에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정치효능감이 대체로 더 약하게 나타나는 것은 놀랍지 않다. 그러나 미국의 한 연구에서는 이런 현상이 반드시 각 개인이 정치적 역량을 자신하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며, 그보다는 일반적으로 복지 기관을 대하며 겪은 부정적인 경험 때문에 정치적 제도의 반응성(responsiveness) [즉, 변화와 개선]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관점을 지지하는 듯한 미국의 한 연구에 따르면 사회복지 사업의 설계 방식이 ‘빈민의 시민 참여 및 정치 참여 수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사업이 징벌적인 성격을 띨수록 참여 수준은 더욱 떨어진다. (p.209-210)
책이라는 선물 / 가사이 루미코 외 9명 / 유유
어린아이는 책을 다양한 각도에서 즐기지만 어른은 말하자면 책을 직선적으로 읽는다. 첫 글자부터 마지막 글자까지 한 자도 건너뛰지 않고 이야기와 논리의 결말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간다. 비유하자면 마라톤 같다. 처음에는 야심 차게 시작하지만 중간쯤 가면 숨이 차고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예컨대 외국 소설을 읽고 있다면 거의 백 퍼센트 확률로 중간에 등장인물의 이름을 잊어버린다. 한참을 읽다가 이 낯선 이름이 여자 주인공의 애칭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 마지막 몇십 페이지를 읽을 때는 조금 흥분한다. 처음의 집중력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해 있는데, 마치 러너스 하이 같은 상태다. 이 책도 이제 곧 끝난다, 거의 다 왔어, 10페이지 남았어, 5페이지, 3페이지, 1페이지! 왼손 손가락으로 세던 페이지 수는 마침내 제로가 된다.
책 내용은 가물가물하다. 머릿속에는 저자가 전하고 싶었을, 혹은 표현하고 싶었을 어떤 것과는 다른, 이야기의 사소한 디테일이나 아무래도 좋은 말들만 남아 있다. 친구를 떠올리게 하는 등장인물, 싫어하던 사람을 연상시키는 대사, 전혀 이해가 안 되어서 오히려 기억에 남은 구절, 낯선 장면, 몇몇 지명, 추상적인 표현. 그런 것을 곱씹다 보면 애초에 책이란 무언가를 전달하는 도구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과연 한 권의 책을 통해 독자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걸까. 아들이 그림책 구석에서 작디작은 고양이를 찾듯 나 역시 책에서 내 마음에 드는 것만 찾으려 했던 건 아닐까. (p.27-28)
술술 읽히는 책은 금방 잊어버린다. 반면 한 번 읽어서는 잘 모르겠다 싶은 책은 높은 확률로 마음에 남는다. 잘 모르겠다 싶은 책이야말로 다 읽고 나서 금세 다시 생각난다. 며칠에 걸쳐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곱씹는다. 편집자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빼 버리는 일은 어렵지 않다. 교정지에다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써도 되고, 더 노골적으로 이대로는 책이 팔릴지 걱정된다고 메일을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때때로 그렇게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부분에 중요한 것이 들어 있다.
나는 시간을 들여 그런 문장과 씨름한다. 이대로 둘까, 아니면 고쳐 달라고 할까. 하지만 결국 나는 그 알 수 없는 문장에 끌리고 만다. 생각건대 저자가 자신의 기량을 넘어 더 큰 것을 쓰려고 할 때 표현이 뒤엉킨다. 한 번 읽어서 이해되지 않는 문장이야말로 박력이 있다. 뒤엉킨 부분을 풀어주고 보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친절한 책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해버리면 그 책의 가장 좋은 부분이 손상되는 것 같다.
기존 문장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저자에게 수정이나 줄 바꿈을 제안하기도 한다. 아리송한 부분이 아리송한 채로도 빛날 방법을 고심한다. 물론 나의 판단이 매번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다. 제안한 대로 수정되어 온 교정지를 보고 내 생각이 틀렸구나, 깨달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만들고 싶은 책은 한 번 읽고 마는 책이 아니다.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싶어지는 알찬 책을 만들고 싶다. (p.35-36)
교정지를 “읽는다”라고 표현하지만, 이 일을 하다 보면 눈으로는 종이 위의 글자를 쫓고 있지만 사실 진짜 읽고자 하는 건 저자에게서 아직 나오지 않은 말, 그러니까 말 이전의 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자의 머릿속에서 형체도 없이 짙은 연기처럼 소용돌이치며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펜 끝(키보드)을 타고 종이(모니터 화면)로 흘러나올 때 옆으로 새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뒤틀린 형태로 그 자리에 굳어 버립니다. ‘사실은 이렇게 쓰고 싶었다’라는 형체가 분명 저자의 머릿속에 있는데, 원고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어떻게 하면 저자의 머릿속에 있는 말에 다가갈 수 있을까 상상력을 쥐어짜는 것이 교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것은 ‘읽는다’라기보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말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입니다. (p.97-98)
이 일을 하다 보면 어디까지가 교정일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오탈자나 말의 오류를 찾아내는 것. 이것이 교정일 겁니다. 사실 관계나 숫자는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체크하는 것. 이것도 교정(교열)이겠지요. 그렇다면 표현이나 글의 가독성, 구성 등을 지적하는 건 어느 범위까지가 교정일까요.
교정자는 다양한 시선으로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거기에는 물론 독자의 시선으로 읽는 것도 포함됩니다. 독자가 읽기 쉽고 알기 쉽게 썼는가. 저자가 책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가 제대로 전해지는가. 오식을 잡아내고 사실 확인을 할 뿐 아니라 저자가 던진 공을 독자가 무사히 받을 수 있도록, 안타까운 어긋남이나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검증하는 것도 교정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정도가 어디까지냐가 문제입니다. ‘교정’과 ‘참견’의 경계는 대체 어디일까. 잘 읽히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는 글을 어디까지 ‘고쳐야’ 할까, 그것은 교정자의 영역일까, 편집자나 저자의 영역일까. 아니 애초에 꼭 고칠 필요가 있을까. (p.107-108)
기계보다 사람이 뛰어난 점은 많습니다. 예컨대 ‘색을 보는 일’입니다. 전체적인 균형과 미묘한 뉘앙스를 파악하는 일에 있어서는 숙련된 사람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색을 맞추는 판단은 결국 사람이 합니다.
게다가 아무리 기계라도 사람의 일입니다. 인쇄 중에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복사기처럼 필요한 매수를 입력하고 ‘인쇄’ 버튼을 누르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본문의 잉크 농도가 다르거나, 색이 다르거나, 얼룩이 생기기라도 하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됩니다. 비록 본문이 흑백 단도일지라도 페이지마다 농도가 모두 균일한지 잘 관찰해야 합니다. 인쇄기에 종이가 반듯하게 들어가 있는지, 반송 도중에 걸리지는 않는지, 흠이나 얼룩은 없는지, 확인해야 할 지점이 무수히 많아서 인쇄기를 돌리는 동안은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하면, 인쇄를 담당하는 건 한 명 한 명의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제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이름도 책의 판권면에 실려야 마땅합니다. (p.121)
요즘 책을 사면서 하는 생각은 죽기 전에 읽고 싶은 책을 다 읽기는 힘들 거라는 생각이다. 평균 수명으로 따지면 아직 절반도 살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힘들 것이다. 나는 원래 읽는 것이 굉장히 느리다. 치명적이다. 게다가 늘 책이 읽고 싶은 것도 아니다. 때로는 책을 읽기 싫을 때도 있다. 그래도 책을 사고 싶다는 마음이 사라진 적은 없다. 읽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일단 산다. 그렇다고 읽기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언젠가 읽겠다는 건 내가 모르는 것을 알아 두겠다는 마음이다. 그래서 내 책장에는 아직 읽지 못한 책을 포함해 수많은 책이 꽂혀 있다. 언제 읽을지 모르는 책들이 항상 거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
대학 세미나 수업에서 책이란 책장에 꽂혀 있을 때 ‘등’으로 말하는 존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책등이 없는 중철 제본의 책은 책장에 꽂히는 순간 존재가 사라진다고 했다. 그때는 냉정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는데 제본을 업으로 삼게 된 지금은 그 의미를 좀 알 것 같다. 책을 제본하는 일은 책의 ‘등’을 생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책이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있었으면 하는지를 생각하는 것과 같다. (p.131-132)
책에 사용하는 종이는 1만 종류가 넘는다고 알려져 있다. 미술서나 사진집은 잉크 색상이 깨끗하게 표현되어야 하므로 표면이 반질반질한 종이, 소설은 글을 읽기에 편하고 분위기 있는 질감의 종이를 선택한다. 이를 두고 인쇄 적합성을 추구한다고 하는데, 실제로 종이의 종류는 수없이 많고 용도도 다양하다. 종류에 따라 두께도 다양해서 시집처럼 페이지 수가 적지만 책에 볼륨감을 주고 싶을 때는 두꺼운 용지를 쓰고, 사전처럼 페이지 수가 아주 많지만 한 권으로 묶어야 할 때는 얇은 용지를 쓴다. 두꺼운 용지라고 해서 무게가 무조건 무거운 것은 아니다. 두꺼워도 밀도가 낮고 가벼운 종이가 있는가 하면, 얇아도 밀도가 높아 무거운 종이도 있다. 컬러도 다양해서 선명한 색 표현을 원하면 화이트색, 글자를 읽을 때 눈을 편하게 하려면 아이보리색, 독특한 느낌을 내고 싶을 때는 블루 계열, 연애 소설에는 핑크 계열 등등 용지도 고르자면 끝이 없다.
매일 다양한 종류의 종이가 입고되는 모습을 보면 책 만들기에 대한 일본인의 고집이랄까 에너지 같은 것이 새삼 느껴진다. 사실 블루 계열, 핑크 계열이라고 해도 실제로 나란히 놓고 비교하지 않는 한 모두 비슷한 흰 종이로 보인다. 눈앞에 종류가 다른 두 종이가 있다는 걸 알고 봐도 섞여 있으면 전혀 구별이 되지 않는 것도 있다. 웬만큼 특징이 뚜렷한 용지가 아니고서야 종이 종류를 바로 구별해 낼 수 있는 건 제지 회사 사람 정도일 것이다.
그래도 재미있는 건 일정량의 페이지만큼 묶어서 보면 한 장 단위로는 몰랐던 종이의 특징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팔랑거리는 경쾌함이 느껴지기도 하며, 촉촉하게 감기기도 한다. 어떤 종이를 썼냐에 따라 책의 이미지가 달라지는 걸 보면 역시 종이 종류를 고집하는 데는 이유가 있겠구나, 하고 납득한다. 개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종이는 최근에 단종되긴 했지만 오지 제지사의 ‘OK 소프트아이스크림·피치’라는 핑크 계열 색상의 종이다. 이름처럼 가슬가슬 복숭아 껍질 같은 질감이 압권이다. 종이 이름은 일반 사람들이 잘 접하지 않는 것이라 그런지 재미있는 것이 많다. 같은 핑크 계열 색상의 종이 중에 ‘OK 프린세스·로즈’라는 종이도 있는데, 홈페이지의 홍보문에서 “전에 없는 고급스러운 핑크 색상을 구현했다”고 홍보하고 있다. (p.142-144)
종이의 특성상 제본이나 인쇄와 관련해 피해 갈 수 없는 애로 사항도 있다. 종이의 원료는 나무다. 나무는 종이가 된 뒤에도 여전히 숨 쉰다. 여전히 숨 쉬니 여름의 수분, 겨울의 건조함이 종이에 영향을 미치고 그러니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 종이가 책이 되어 서점에 진열된 뒤에도 습도 차이로 종이끼리 달라붙는 정도가 달라진다. 건조한 겨울철에는 책 표지가 입을 벌리듯 쩍쩍 벌어져 옆 책과의 간격에 틈이 없다. 날이 습할 때는 간격이 여유롭다. 그런 기후 변화까지 고려해 제본을 하면 책이 신기할 정도로 손에 착 감긴다. 그럴 때면 벌써부터 책이 독자의 손에서 기분 좋게 넘어가는 장면이 그려진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감상적인 말을 하지 않는다. 생각조차 않는다. 오랫동안 책을 제작하는 현장에 있으면서 재미있다고 느낀 것 중 하나가, 책을 만드는 기술자들은 정작 책에 크게 관심도 없고 서점에도 안 가지만 책을 좋아하는 세상 그 누구보다 책의 구조에 정통하고 품질을 보는 눈이 까다롭다는 것이다. 파본, 즉 잘못 만든 책(미안합니다)을 ‘못된 책’이라고 부른다. “못된 책은 거기에 쌓아 둬!” 해서 가리키는 쪽을 보면 언뜻 봐서는 어디가 문제라는 건지 도통 모르겠는 것도 있다. 휘거나 오염이 되어 누가 봐도 뭐가 잘못됐는지 알 것 같은 책도 있지만, 이 정도는 봐줘도 되지 않을까 싶은 책도 있다. 일단 책의 형태를 갖추고 나면 아무리 못된 아이, 아니 못된 책이라도 내 자식 같은 마음이 든다. 못된 책이라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쓰리다. 평소 책이라고는 한 권도 읽지 않는 아저씨들이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된다며 책을 이리저리 뜯어보는 모습은 언뜻 책에 대한 애정이 넘쳐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아까도 말했듯 사실은 책이라고는 한 권도 읽지 않으니 완전히 콩트다. 아니, 일이다. (p.145-146)
사람에 따라 책이 비싸다고 생각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럭저럭 1권 정도는 부담 없이, 좀 망설여져도 2권 정도는 살 수 있는 가격에 책이 팔리고 있다는 사실이 간혹 감동적으로 느껴진다. 기획 단계부터 시작해 책 한 권이 완성되어 독자에게 도달하기까지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손을 거칠까. 대강만 생각해도 어마어마한 숫자일 것이다. 정확한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 일의 대가라고 생각하면 단가를 좀 더 올려 달라고 하고 싶기도 하고, 어차피 팔리지 않을 거라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최고급 한정판으로 엄청 비싸게 만들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실제로 그런 책들이 존재하고 그건 그것대로 좋지만 그래도 역시 책이 일부 사람의 취미가 되는 건 아무래도 썩 내키지 않는다. (p.148-149)
내가 있는 현장에는 초판만 무려 50만 부를 찍는 주문이 들어올 때도 있다. 그 정도 수량을 전국 곳곳으로 유통시키려면 모든 면에서 합리성과 효율성이 요구된다. 무조건 많이 만드는 게 좋다는 게 아니라 불특정 다수의 독자에게 전달되는 이 강력하고도 유일무이한 체제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독자가 책을 만날 기회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선 평범한 책을 만나 책에 흥미를 가지면 그다음에는 얼마든지 많은 책과 연결될 수 있다. 그 시발점이 되는 아주 평범한 책도 알고 보면 온갖 정성을 다해 키운 아이다. 멋진 일이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각자의 전문성을 발휘해 릴레이로 책을 만드는 것이 좋다. 조직, 회사, 이해관계 혹은 제한된 환경 속에서 책을 만들고 파는 일은 때로 고달프지만 분명 미래를 향해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다. 그런 믿음을 갖고 책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언제까지나 이 일을 계속하고 싶다. (p.150)
북트럭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나 같은 책 마니아가 좋아할 만한 이른바 ‘좋은 책’을 확보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건 그것대로 책방을 운영하는 데 있어 중요하지만, 이동식 책방을 하기로 결정하고 난 뒤에는 무슨 책을 들여올까 하는 것과 동시에 매입한 책을 누구에게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누군가는 별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책일지라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책일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좋은 책’이나 ‘좋은 상품 구성’은 사람마다 다르다. 지가사키의 해변가를 산책하는 아저씨에게는 10년 전에 나온 잡지 『SWITCH』 서던 올 스타즈 특집이, 빈티지 의류 마켓에 구경 온 영국 빈티지옷 마니아에게는 닉 나이트의 『스킨헤드』(Skinhead)가, 공원에 놀러 나온 모녀에게는 『365일 베드 타임 스토리』나 『호빵맨』 시리즈가 ‘좋은 책’이다. (p.248-249)
돈으로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만 산다. 돈은 인간이 발견한 생활 속의 약속이다. 그래서 이 ‘약속’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는 돈은 전혀 쓸모가 없다. 아무리 저축통장의 자릿수가 늘어나도 돈으로 살 수 없는 물건을 손에 넣을 가능성은 높아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낮아질지도 모른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돈으로 도리어 세계를 작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p.257)
세상에 둘도 없는 것을 주고 싶다면, 사람은 온 힘을 다해 말을 하면 된다. 철학자 이즈쓰 도시히코는 언어를 통한 말 외에도 다양한 의미의 도구가 있다고 지적하며 그것을 아울러 ‘고토바’라고 불렀다. 시인에게는 고토바가 언어이고, 화가에게는 색과 선, 음악가에게는 선율, 무용가에게는 춤과 동작, 조향사에게는 향기가 곧 고토바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고토바가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 가장 열려 있는 것이 언어로서의 말이기도 하다. 지금 당장 화가나 음악가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런 준비 없이도 시인이 될 수는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면의 시인을 깨울 수 있다. 그리고 세상에 둘도 없는 시집을, 세상에 둘도 없는 소중한 사람에게 보낼 수 있다. (p.262-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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