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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의료 / 셰이머스 오마호니 / 사월의책

 

 1980년대 이후 의학 연구는 글로벌 비즈니스가 되었고 경제의 견인차로서 의산 복합체에 지적인 동력을 제공해왔다. 일반인들의 눈에는 의학 연구가 진리에 대한 열망, 질병을 치유하고 생명을 구하려는 열정으로 가득한 이타주의자들의 박애주의적 노력으로 비친다. 많은 자선단체가 이런 숭고한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모금을 하고 있고, 자선사업 자체가 실속 있는 비즈니스 영역이 되었다. 의학 연구는 좋은 일이고 더 많은 돈을 쓸수록 좋다고 하는 사회적 합의가 폭넓게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이들 자선단체에 돈을 기부하는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의 의학 연구가 시간과 돈의 낭비라는 사실을 알면 깜짝 놀랄 것이다. 그것이 시간과 돈의 낭비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대부분의 의학 연구가 잘못된 방식으로 수행되고 있고, 둘째는 연구가 주로 연구자의 필요와, 연구자와 연계된 상업적 이익에 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p.31-32)

 

 나는 비록 과학 지식에는 어떤 의미 있는 기여도 하지 못했지만, 의학 연구가 수행되는 방식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배웠다. 과학적 호기심에서 영감을 얻는 과학자는 거의 없었고, 내가 만난 선임 연구자들은 주로 승진, 연구비, 논문, 수상 같은 것에서 동기를 부여받았다. 의학 연구 실험실은 일종의 공장으로 ‘데이터’라는 원료물질을 생산해냈다. 이런 데이터로부터 학회 발표, 학술지 논문, 박사학위, 연구비 신청, 심지어는 항공 마일리지까지 여러 가지가 탄생했다. 근처 병동에서 일어나는 일은, 데이터를 뽑아내는 체액(‘임상시료’)의 공급처라는 점을 빼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졌다. 학계 브라만들―교수, 학과장, 학장―은 학술적 성격이 거의 없는 부서에 대한 임면권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위원회를 차지하고서 서로에게 연구비를 나눠주었다. 그들의 임상적 역할은 명목상으로만 존재했다. 당시에 국가보건서비스 수련병원은 주로 경험 많은 수련의에 의해 굴러갈 수 있었고, 특히 외과 분야 선임 전공의는 거의 40세가 돼서야 전문의로 임명되었다. 선임 전공의들은 전문의, 특히 연구자 전문의보다 임상적으로 더 능력이 있었고 민첩했다. 내가 아는 한 연구자 전문의는 일주일에 한 번 회진을 돌았는데, 그의 처방은 비정상이거나 위험하고 항상 잘못된 것이어서 병동 간호사와 선임 전공의는 연구자 전문의가 마치 포툠킨 마을을 둘러보듯 가짜 회진을 돌게 안내하고 나서는 다시 진짜 회진을 돌았다. 다른 연구자 전문의는 외과의였는데 수술장에서 너무 위험하게 수술을 했다. 그는 교육 담당 교수로 승진했는데, 수술장에서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브라만 귀족들은 선임 전공의에게 일을 떠맡기고서 연구라는 게임에 자유롭게 몰두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과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을 주로 충원하였으므로, 이 체제는 저절로 유지되었다. (p.38-39)

 

 1970년대 초반부터 제약 산업은 점차 의학 연구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스미스클라인프렌치 산하 연구소의 제임스 블랙은 1972년 『네이처』에 위장에 있는 히스타민 H2 수용체에 대해 발표했고, 이 내용도 기념책자에 실렸다. 이 수용체는 위에서 위산 분비를 조절한다. 블랙은 이 수용체를 차단해 위산 분비를 줄이는 약물을 개발했다. 시메티딘(스미스클라인프렌치에서는 ‘타가메트’)이라는 상품명으로 출시된 이 약물은 효과적인 위궤양 치료제로는 처음 개발된 약제였고, 이른바 ‘블록버스터’라고 하는 약물의 시초가 되었다. 이 성공은 훗날 개발되어 더 많은 수익을 가져다준 블록버스터 약물들―그리하여 엄청난 수익으로 오늘날 ‘빅 파마’(Big Pharma)로 불리는 거대 제약회사를 탄생시킨 약물들―의 모델케이스가 되었다. 시메티딘이 궤양을 아물게 하는 것은 맞지만 치료가 종료되면 예외 없이 재발하기 때문에 대부분은 이 약을 무한정 복용해야 한다. 시메티딘은 궤양 치료에 분명한 진전을 가져왔으나 그것을 완치시키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한계가 상업적 성공의 핵심요소였고 첫 번째 블록버스터 약물이 된 이유였다. 환자들이 몇 주 정도 먹는 게 아니라 몇 년씩 먹어야 하기 때문에 판매량이 엄청났던 것이다. 스미스클라인프렌치는 큰 이익을 거뒀고 제임스 블랙 경은 1988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p.54-55)

 

 오늘 아침 의학 관련 온라인 데이터베이스인 ‘펍메드’(PubMed)를 검색해보니 헬리코박터에 관한 논문이 4만 580건 검색되었다. 나도 그중 한 편의 공저자이다. 다른 도시에 있는 연구소의 한 유망한 연구자가 셀리악병 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헬리코박터의 유병률에 대한 논문을 쓰자고 제안해왔던 것이다. 여기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혈액검사를 통해 헬리코박터를 진단하는 기술이 있었고 나는 거대한 셀리악병 환자 혈액시료 은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논문을 쓰자고 한 것이다. 연구를 통해 확인할 흥미로운 가설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도 새로운 것을 발견하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논문으로 발표되었다. 이 연구는 망치 가진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는 과학적 기회주의의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헬리코박터와 셀리악병을 연결시킬 만한 그럴듯한 생물학적 이유도 없었고 임상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별로 관심을 가질 만한 주제가 아니었지만, 논문은 발표되었다. (p.57-58)

 

 요즘 사망에까지 이르는 질환들 대부분은 노화로 인한 것이거나 그와 관련된 것들이다. 나이가 드니 단순히 닳는 것이다. 현대의 주된 사망 원인은 치매, 심장질환, 뇌졸중, 암 등이지 천연두나 스페인 독감이 아니다. 의학은 여전히 치명적인 병에 걸린 젊은이를 극적으로 구해낼 수 있지만 이런 개가는 상대적으로 드물게 일어난다. 거대과학 이론의 또 다른 결함은 의료의 주요 과제들이 기계 고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질환과는 크게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개업의들의 주요 업무는 사람들이 질병에 대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보다 소위 ‘엿 같은 인생 증후군’ 같은 삶의 문제에 대처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내 외래 환자의 50퍼센트 이상은 심신성 조건 때문에 생기는 과민성대장증후군 같은 증상들로 내원을 하는데, 이런 증상은 분자생물학으로 완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인간은 유사 이래 항상 스트레스와 고통을 겪어 왔는데, 유독 20세기에 들어와서 사람들은(적어도 부유한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피할 수 없는 인생의 부침을 갑자기 의학적 문제로 보기 시작했다. (p.71-72)

 

 그렇다면 의학 연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거대과학 모델―‘원인’을 먼저 발견하고 나서 ‘치료’를 한다는―이 적용되어야 할 질환들은 따로 있다. 예를 들어 장의 만성적 염증 질환인 크론병은 젊은 환자에서 발생하여 장기적으로 장애를 유발하고, 위험할 수도 있는 면역억제제의 항시적인 복용이 필요한 경우가 많아서, 거대과학이 크론병을 완치시킬 수 있다면 분명히 이익이 된다. 하지만 불행히도 의학 연구는 노화나 사망 같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문제들 대부분에는 도움을 주지 못한다. 노화와 사망은 인간의 숙명임에도 우리는 의학이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역학자들이나 공중보건의들이라면 의학이 이제는 선진국 국민의 건강에 크게 기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것이다. 요즘은 빈곤, 교육 기회의 부족, 사회적 박탈 등이 건강 부실의 주요 원인이다. 비록 20세기 중반에 예방접종이나 항생제가 인간 수명을 연장하는 데 의미 있는 기여를 했다고는 하나, 오늘날 의학이 인구집단의 건강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부분은 10퍼센트 정도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 일부에서는 현재까지 입증된 연구 결과를 합리적이고 공평하게 적용하기만 해도 보건의료가 변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편다. (p.72-73)

 

 거대과학은 아직까지 기대하는 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의학 연구비 대부분을 차지하는 바람에 더 생산적일 수 있는 다른 형태의 연구들은 연구비 부족 사태를 겪고 있다. 왜 거대과학 모델이 실패인가? 내 연구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거대과학은 연구비를 받아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생물물리학자인 존 플랫은 1964년 『사이언스』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우리 과학자들은 경건하게 측정을 하고 ‘과학의 신전에 쓰일 벽돌’이 될 작은 연구들을 수행한다고 하지만, 벽돌 대부분은 공장에 방치될 것이다.” 거대과학 모델의 또 다른 한계는, 예측 없이는 발견도 결코 없을 것이고 연구는 사전에 계획된 행위라고 전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페니실린이나 헬리코박터가 그렇듯이 위대한 과학적 발견의 상당수는 기대하지 않은 것이고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의사이자 논객인 브루스 찰턴은 현대 의학연구 문화가 너무 순응주의적이어서 정말로 창의적인 연구자는 성공하기 어렵고, 과학이 지성과 창의성 대신 인내심과 사회성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현대 과학은 가장 똑똑하고 창의적인 사람을 잡아두거나 열정을 고취하기에는 너무나 단조롭고 지루하다. 특히 자신이 선택한 독립적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졸업 후 10년, 15년 내지 심지어 20년까지 수련을 받아야 하기에, 생기 넘치고 자존감 강한 누구라도 이 일에 들어오기를 주저하게 만들고, 지금 당장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을 철저히 배제한다. 10년 또는 20년의 수련을 끝낸다 해도, 과학적으로 중요해서가 아니라 연구비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연구 주제를 택하기가 십상이고, 그러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연구팀에서 기계의 톱니바퀴 역할을 할 게 뻔하다. 어느 쪽이든 과학자들은 자기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문제를 풀기 위해 일할 공산이 크다. 정말로 똑똑한 사람이라면 왜 이런 일을 하려고 하겠는가?

 찰턴은 현대 의학 연구가 많은 세부 전문가들의 협력과 조정이 필요한 집단적인 활동이기 때문에 팀플레이가 핵심적인 속성이라는 것을 관찰했다. 그는 가장 훌륭한 과학자들이 팀원으로 낭비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최고의 과학자들은 독립적일 때만 제 역할을 해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과학을 소명감으로 수행하기 때문이다. 찰스 다윈의 예를 들면, 그는 대학에 소속되지 않고 연구비도 없이 주로 집에서 혼자 일했다. 그는 독립적으로 생활할 만큼의 자산이 있었고,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주제에 대해서만 연구했다. (p.73-75)

 

 두 사람은 “이력서에 쓴 경력이 길수록 인센티브를 더 주는 과학 커뮤니티 생태계가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고 주장한다. 학술지들은 통계적으로 유의한(positive) 결과를 낸 연구를 선호하는 편견이 있다. 이러한 편향은 연구자들로 하여금 거짓양성(false-positive)을 자주 결과로 내는 연구 기법과 통계 방법을 선택하도록 만든다. 거짓양성 결과를 담은 논문 대부분은 의도적인 속임수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p-해킹’의 결과이다. 통계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유의한 p값이 나올 때까지 원 자료를 돌리는 연구 관행을 p-해킹이라고 한다. (여기서 p는 ‘probability’ 곧 확률 또는 개연성을 가리키는 말로, p값이 0.05이면 결과가 우연히 그렇게 나올 확률이 20번 중의 한 번, 0.01이면 100번 중의 한 번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p값 0.05는 통계적 유의성의 하한선으로 간주된다.) p-해킹은 데이터 고문(data torture) 또는 데이터 준설(data dredge)이라고도 한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스말디노와 매켈리스는 비관적이다.

연구 기관이 바뀌기는 어렵다. 변화를 이루려면 대대적인 개편이 필요한데, 변화를 먼저 수용하는 기관들은 큰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변화는 과학의 진실성을 담보하는 데 꼭 필요하다. … 더 근본적인 방안은 선택을 강제하는 압력, 곧 성공에 대한 인센티브를 변경해서 적합성의 기준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p.78-79)

 

 이 회의의 요약보고서는 연구 결과가 재현이 안 되는 문제가 단일 원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결론짓고 있다. 그들이 발견한 요인들은 다음과 같다.
 ⑴ p-해킹. ⑵ HARKing(Hypothesising After the Results are Known)―사전에 가설을 수립하고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얻은 후에 데이터를 조사하여 그럴듯한 설명을 만들어내는 것. ⑶ 유의한 결과를 얻지 못하면 연구 결과를 발표하지 않는 것. ⑷ 통계적 검정력의 부족―연구대상 수가 너무 적어서 효과가 참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 ⑸ 기술적 오류. ⑹ 실험방법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아서 다른 연구자들이 연구를 재현할 수 없는 경우. ⑺ 엉성한 실험 설계.
 이밖에 회의 참석자들은 문화적 요인도 지적했는데 “극심한 경쟁적 연구 환경, 영향력이 큰 학술지 게재나 연구 주제의 색다름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풍토”가 그것이다. 이 모든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웰컴트러스트 회의에 참석한 명망 있는 과학자들은 뻔하고 진부한 제안 몇 가지를 내놓는 데 그쳤다. 예를 들면 “과학자들에게 연구 방법론에 대한 추가적 교육 제공”, “연구비를 제공하는 단체들의 적절한 감독”, “개방성과 투명성 제고” 같은 것들이다. (p.79-80)

 

 학술지의 명성은 ‘영향력지수’(impact factor)라는 정량지표에 의해 결정된다. 영향력지수는 해당 학술지에 실린 논문들이 한 해에 인용된 횟수를 계산해서 구한다. 예를 들어 『뉴잉글랜드의학저널』의 영향력지수는 72.4이고 『랜싯』은 44인 반면 『아일랜드의학저널』은 0.31이다. 의학계의 성취도는 인용 횟수와 h 지수(h-index, 발표 논문수와 각 논문의 인용 횟수로 계산하는) 같은 정량지표로 평가된다. 불가피하게 학계에서는 이 지표를 염두에 두게 된다. 그러나 영국 경제학자의 이름을 딴 ‘굿하트의 법칙’(Goodhart’s law)에 따르면, 어떤 변수를 정책의 목표로 채택하는 순간 원래 그 지표로 측정하고자 했던 현상이나 특성에 대한 파악 능력이 급속도로 사라지게 된다고 한다. 새로운 지표를 채택하면 “그 지표에 맞춘 점수를 최대로 높이려는 행동이 나타나고, 왜곡된 인센티브와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이 초래된다”는 것이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UCLA) 법학 및 과학기술학 교수인 마리오 비아졸리는 개인이나 기관이 영향력지수, 인용지수, 순위와 같은 지표를 어떻게 높이는지 분석하면서 이 법칙을 인용하였다. 점수를 높이는 방법도 점점 더 고도화되고 있는데, 연구자들이 사용하는 새로운 책략 중 하나는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하면서 가능 리뷰어를 같이 추천할 때 가짜 이메일 주소를 제공하는 것이다. (학술지에서는 투고 원고들을 같은 분야의 전문가 리뷰어에게 보내 검토를 의뢰하는데 이것을 ‘동료평가’(peer review)라고 한다.) 저자는 가짜 이메일을 이용하여 훌륭한 논문이라는 검토 의견을 학술지에 회신함으로써 출판 가능성을 높인다. 어떤 대학―특히 개발도상국의 대학―에서는 인용지수를 높이려는 목적으로 연구자들에게 같은 기관에 있는 다른 연구자의 논문을 인용할 의무를 비공식적으로 지우기도 한다. 비아졸리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대학의 감독 문화―정량지표, 영향력지수, 인용통계, 순위에 대한 선호―는 새로운 유형의 나쁜 행태에 인센티브를 줄 뿐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p.82-83)

 

 박애자본주의―저커버그, 브로드, 빌 게이츠 같은 사람들의 의학 연구 지원―는 국제 보건의료에 새롭고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빌앤드멀린다 게이츠 재단은 훌륭한 일을 많이 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런 재단이 책임성이 결여되어 있고 그들의 부를 창출해준 마이크로소프트나 페이스북 같은 산업에 대한 비판 여론을 피하려는 방패막이로 이용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박애자본주의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록펠러, 포드, 카네기 등은 그들의 비즈니스 방법이나 노동자 처우에 대한 비판이 일어날 때마다 자신들이 하는 자선활동을 내세웠다. 과격한 자유주의자이자 트럼프를 지지하는 피터 틸(페이팔 창업자) 같은 새로운 금권 정치가들은 현재 돈으로 살 수 없는 유일한 것, 즉 영생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거대과학을 지원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박애자본주의가 보건의료나 의학 연구 모두에 사악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보고 있다. 에이즈 활동가인 그레그 곤살베스 예일대 교수는 게이츠 재단에 대한 우려를 이렇게 표명했다. “아침에 게이츠가 침대의 어느 방향에서 일어나느냐에 따라 국제보건의 영역이 바뀔 수 있다. …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것은 입헌군주제도 아니다. 이것은 빌 게이츠와 멀린다가 무엇을 원하느냐에 달려있다.” 이 재단은 제약회사들과 파트너십을 맺는 데 관심이 많고 이 분야의 전직 경영자들을 많이 고용하고 있다. 2009년에 『랜싯』에 발표된 한 연구에서는 재단의 지원금이 상업적 기관으로 가고 NGO로 가는 지원금의 대부분은 고소득국가의 NGO로 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런던 퀸메리대학교의 국제공중보건 교수인 데이비드 매코이는 이렇게 말한다. “억만장자에게 자선활동을 더 많이 하라고 호소하는 것은 국제보건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억만장자를 그렇게 많이 만들어내지 않는 시스템이다. 그런 시스템이 만들어질 때까지 이런 종류의 자선활동은 우리의 주의를 분산시키거나, 정치경제를 변화시킬 필요성에 대해 잠재적으로 해로운 영향을 끼친다.” (p.91-92)

 

 근거기반의학은 일찍부터 필요치료수(number needed to treat, NNT)라는 이해하기 쉬운 통계 개념을 도입했다. 이 개념은 약물 복용과 같은 의료적 처치의 효과를 간단히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방법이다. 즉 한 명의 나쁜 결과―심장마비나 뇌졸중 같은―를 예방하기 위해 평균적으로 몇 명을 치료해야 하는지를 나타내는 지표가 바로 NNT이다. 좋은 예는 1998년 『뉴잉글랜드의학저널』에 발표된 연구인데, 이 연구는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스타틴의 일종인 프라바스타틴(pravastatin)의 효과를 관상동맥질환이 있는 환자 대상으로 조사한 것이다. 이렇게 이미 질병이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추가 합병증 발생을 막는 것을 ‘이차예방’이라고 한다. 연구자들은 9천 명의 환자를 프라바스타틴군과 위약군으로 나누어 6년 동안 추적 조사했다. 저자들은 프라바스타틴을 복용한 집단이 위약군에 비해 심장질환으로 사망할 위험이 24퍼센트 감소한다는 인상적인 결과를 보고하였다. “6.1년 동안 프라바스타틴 복용 환자군으로 무작위 배정된 1천 명 중 48명이 (각 환자별 효과를 중복 계산해서 30명의 사망, 28명의 비치명적 심근경색, 9명의 뇌졸중을 겪지 않고) 예방 효과를 본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 결과를 NNT로 바꾸면 훨씬 덜 인상적으로 보인다. 1천 명 중 48명이 효과를 본 것이라면, 나쁜 결과 1명을 예방하기 위해 21명이 6년 동안 약을 복용했고 그럼에도 21명 중 20명은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다는 얘기가 된다. 나아가 스타틴의 ‘일차예방’에 대한 연구―즉 연구 대상에게 심장병이 없는 경우―에서는 NNT값이 수백 명에 이르기까지 한다. (p.111-112)

 

 이오아니디스는 이 모든 이슈들을 아우르는 말로 ‘잘못된 의학정보 대혼란’(the medical misinformation mess)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대다수 의사와 거의 모든 환자는 의학정보가 엉망이라는 사실을 잘 모른다. 이런 문제를 개략적으로 알고 있는 의사들도 근거를 평가하는 데 필요한 기술은 가지고 있지 않다. 통계맹이기 때문이다. 호주 본드대학교의 근거기반의학 교수인 폴 글라시우는 이런 비판적 평가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의학교육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구 결과를 비판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21세기의 임상의는 청진을 못하거나 혈압을 재지 못하는 의사만큼이나 준비되지 못한 의사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의학교육은 회의주의를 장려하지 않는다. 체코 출신의 박식한 이단자 페트르 스크라바넥(1940~1994)은 더블린 트리니티칼리지 의과대학에서 이런 기술을 1980년대부터 가르쳤는데, “의대생들에게 근거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가르치는 내 강좌는, 흄 회의론자(Humean sceptic)가 앞으로 성직자가 되려는 신학생을 대상으로 기적에 대한 강의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한탄한 바 있다. 의학교육은 핵심적인 재능을 계발하고 학문을 가르치는 대신, 실습과 기계적인 암기에 지나치게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내가 연구 펠로우로 3년간 일하면서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은 의학저널에 실리는 거의 모든 논문이 싸구려 물건이라는 사실이다. 이오아니디스는 글라시우나 이아인 찰머스 경과 같은 메타 연구자들과 함께한 연구에서 의학 연구의 85퍼센트는 쓸모가 없어 폐기된다고 추정하였다. 국제적으로 따져 보면 매년 2천3백억 달러가 낭비되고 있다는 것이다. (p.118-119)

 

 근거기반의학이 처방에 대한 임상지침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앨번 파인스타인의 예측은 현실이 되어, 특히 노인 환자들을 중심으로 과도한 처방이 행해지고 있다. 2004년 국가보건서비스는 일반의와 계약하면서 예방적 처방(고혈압, 콜레스테롤, 골다공증)에 과도한 인센티브를 부여함으로써 영국 국민의 약물 복용을 큰 폭으로 증가시켰다. 스코틀랜드 거주 성인의 20퍼센트는 5개 이상의 약물을 장기간 복용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60대 인구의 25퍼센트가 5개 이상의 약물을 복용하고 있으며, 이런 경우가 70대에서는 46퍼센트로 늘어나고, 요양원에 있는 사람들에서는 91퍼센트가 넘는다. 파인스타인은 이런 약물 사용을 지지하는 근거들이 실제 약물을 복용하는 사람이 아닌 젊고 건강한 사람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늙고 아픈 사람들―요양원에 있는―은 신약의 임상시험에서 자주 제외되지만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은 약물을 복용하는 사람들이다. 아프고 죽어가는 사람들은 요양원에서 급성 환자를 보는 종합병원으로 옮겨진다. 이 환자들 대부분은 10개 이상의 약물을 복용하고 있고 명백하게 삶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는데도 약물 복용을 계속한다. 아일랜드에서 요양원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2년 더 생존하는데, 이런 환자들은 약물 부작용이나 약물 간 상호작용을 훨씬 더 많이 겪고 있으며 이로 인해 사망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 (p.120-121)

 

 개별적으로 보면 각 약물의 처방은 저마다 적절한 근거에 기반하고 있으므로 정당화가 가능하다. 스타틴은 심장마비나 뇌졸중의 위험을 낮추고, 혈압을 낮추는 약물은 뇌졸중의 위험을 낮추며, 아스피린도 심장마비의 위험을 낮춘다. 골다공증 약물은 골절의 위험을 낮추고, 항응고제의 복용은 뇌졸중의 위험을 낮춘다. 이처럼 개별적으로는 모두 근거에 기반하고 있으나, 이 모든 약물을 함께 복용할 때 환자 개인에게 도움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 (p.122)

 

 스위니는 통계적 유의성과 임상적 유의성 너머에 ‘개인적 유의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지금 이 환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주장하기를, 의사의 역할은 근거가 적절한지 평가하고 환자의 소망과 선호를 분석하여 그에 따라 조언하는 것이라고 했다. 의사의 경험, 수련, 인격이 이런 토의에 영향을 미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환자의 기여”라는 것이다.
 의학은 순수과학이 아니라 응용과학이다. 많은 사람이 의학은 결코 과학이 아니고 기술이고 실행이라고 한다. ‘과학적 의학’이라는 용어 자체가 우리가 실제로는 의학이 과학임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과학적 물리학’이라는 용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많은 점에서 과학과 의학은 정반대이다. 의심은 과학의 핵심인데, 의심을 드러내는 의사는 환자들에게 높이 평가되지 않는다. 이런 현실은 보건의료에 퍼져 있는 소비자주의와 함께, 인체는 기계이고 고장 난 주방기구처럼 효과적으로 간편히 수리되어야 한다는 데카르트적 사고를 동시에 반영한다. 가장 성공적인 의사는 모호함 없이 명쾌한 진단을 내리고 치료에 대한 완벽한 믿음을 환자에게 심어주는 의사이다. 오늘날 보완대체의학이 여전히 인기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치료사는 환자의 문제가 어떤 원인에 의한 것인지 언제나 명확하게 정의한다. 치료사가 어느 유파에 속하는지에 따라 원인은 효모로 인한 알레르기이거나 척추의 정렬이 똑바르지 않아서 등등이 될 수 있다. 무엇이 되었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진단에 대한 절대적 확신이다. 치료 효과에 대한 믿음도 비슷하게 주입된다. 사실 환자들이 의사 앞에 들고 오는 문제들 대부분은 일시적인 것이거나 스스로 치유가 된다. 무슨 방법을 쓰든 좋아지게 되어 있다. 이것이 보완대체요법의 지속적 성공을 설명해준다. 치유는 자연이 하고, 동종요법이 돈과 신뢰를 얻는 것이다. 그것들의 정체는 암과 같은 좀 더 심각한 질환을 다룰 때 가끔씩 드러나곤 한다. (p.124-126)

 

 제약회사들의 가장 대단한 아이디어는 초점을 아픈 사람으로부터 건강한 사람에게로 옮겨놓은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스타틴 같은 약물을 평생 복용하는 환자라는 새로운 시장을 창조할 수 있었다. 이반 일리치는 바로 이런 상황을 예측했다. “어떤 사회라 해도 제약회사 침입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 각 사회는 나름의 독극물, 나름의 치료제, 나름의 위약, 그리고 그것들을 관리하기 위한 나름의 의례적 절차를 가지는데, 이 모든 것이 아픈 사람보다는 건강한 사람을 겨냥한 것이다.” 의료계는 일리치를 괴짜 또는 ‘비관적 선지자’(a Jeremiah)라며 묵살했는데, 40년이 지난 지금 그가 경고한 많은 것들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제약회사의 침입이 아픈 사람보다는 건강한 사람을 겨냥할 거라는 예언은 ‘질병팔이’의 도래로 정말로 실현되었다. 건강한 거대 인구집단을 약이 필요한 집단으로 재정의하면서 새로운 시장이 창조되고 있다. 이 시장이야말로 인식개선 캠페인이 진정으로 그 능력을 인정받는 곳이다. 환자단체와 의사들이 검사나 검진을 받아보라고 부추긴 결과, 자신이 건강하다고 여기던 많은 사람들이 혈압이나 콜레스테롤 수치 때문에 차후 어떤 병에 걸릴지 걱정하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에게 특정 약물이 위험을 낮춰줄 것이고, 그 약물을 평생 복용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오나 히스는 ‘질병팔이’란 “관심을 아픈 사람으로부터 건강한 사람에게로, 가난한 사람으로부터 부유한 사람에게로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고 썼다. (p.166-167)

 

 암은 주로 노화에 따른 질환이다. 충분히 오래 살면 결국은 모두 암에 걸리게 된다. 노인 인구가 계속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암은 아무리 노력해도 계속 문제로 남을 것이다.
 암 연구는 거대 비즈니스이며 많은 이해당사자와 수혜자가 있다. 버락 오바마와 조 바이든은 2016년 ‘암 발사 계획’(Cancer Moonshot Initiative)을 시작했는데, 바이든은 이 계획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남은 인생을 이 일에 바칠 것이고, 우리는 지금 대단한 진전을 이루기 직전에 와 있다고 본다.” 오바마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미국을 암 완전정복 국가로 만들자”고 했다. 암과 관련된 용어는 (‘우주선 발사’ 같은 말이 그러하듯이) ‘오만한 부종’이니 ‘악성 비대’ 같은 표현으로 오염되어 있다. 우리는 오로지 이익에만 초점을 맞추고 비용은 거의 생각하지 않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 암 치료에서 진전을 이루었다는 말은 1차 세계대전 때의 참호전을 생각나게 한다. 수천 명을 희생해서 겨우 몇 백 미터 땅을 차지했던 것 말이다. 변변찮은 진전이 새로 이루어질 때마다 ‘대전환’이니 ‘게임체인저’니 하는 환호가 쏟아진다. (p.176-177)

 

 파월은 말했다. “보건의료에 대한 소박한 가정은 일정량의 ‘필요한’ 의료서비스가 있고 이 ‘필요’가 충족되면 더 이상의 수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가정이다. 의학이 발전할 때마다 그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필요가 만들어진다.” 보건에 대한 지출이 적정 수준에 이르렀다고 대중과 보건전문가들이 동의하는 때는 결코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가보건서비스를 설계한 사람들은 무상 보건의료서비스가 사람들을 더 건강하게 함으로써 결국 서비스 수요를 꾸준히 감소시킬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었다. 파월은 이런 믿음의 오류를 지적했는데, 나중에 나올 이반 일리치의 주장을 예견한 것이었다. 일리치는 더 많은 보건의료서비스를 대중에게 제공할수록 더 많은 수요가 발생하는 것을 의미하는 ‘시시포스 증후군’(Sisyphus syndrome)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기술 변화와 높아진 기대수준이 결합해 지속적인 의료비 증가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p.196-197)

 

 국가보건서비스는 영국이 전시에 응급의료서비스를 동원했던 것과 똑같은 조직 및 사회적 협력을 평상시 보건의료서비스의 설립에도 쉽게 적용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단순한 통찰에서 시작되었다. 원숙한 지성인인 노엘 애넌은 그의 저서 『우리 시대』(Our Age)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쟁 중에 사람들은 평등한 치료가 가진 품격을 목격했다. … 전쟁 때 그랬듯이 새치기하지 마라. 당신의 몫을 받아들여라.” 국가보건서비스의 도덕적 기초는 1942년에 나온 「윌리엄 베버리지 보고서」인데 여기에서는 불결, 무지, 궁핍, 나태, 질병이라는 5대 사회악이 제시되었다. 클레멘트 애틀리와 어나이린 베번은 복지국가를 정부와 국민 사이의 쌍방계약으로 이해했다. 1950년 페이비언협회 연설에서 베번은 국가보건서비스가 새로운 책임성을 가져야 하고, 이용자들에게 책임감, 신중함, 그리고 더 큰 선의를 가지고 행동하도록 요구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는 영국이 “선택뿐 아니라 거부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진, 그래서 누가 최우선 순위이고 후순위인지 말할 수 있는 시민을 양성하지 못한다면 성숙한 문명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가 말한 ‘성숙한 문명’은 실현되지 못했고, 시민들은 자신들의 도덕적 의무를 소홀히 했다. 그리하여 이제 정부와 시민은 공모하여 서로를 속이는 중이다. 즉 보건 분야 지출을 무한정 늘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늘려야 하고, 보건서비스를 모든 이용자에게 계속 무료로 제공하는 동시에 사기업과 똑같은 선택권과 소비자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기만이라는 것이 지금 고통스럽게 드러나고 있는 중이다. (p.198-199)

 

 의사들이 일상적으로 내리던 결정을 법원으로 가져가는 경우도 이제 흔하다. 영국 언론에 널리 보도된 찰리 가드, 아이제이아 하스트럽, 앨피 에번스 사건은 크게 보면 모두 비슷한 사건이다. 세 남자아기는 모두 치명적이고 회복 불가능한 뇌 손상을 입어서 집중치료실 안에서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담당 의사들은 부모들에게 더 이상의 집중치료는 무의미하고 아이들에게 (진부하지만 공식적인 언어로서) ‘존엄한’ 죽음을 허용해야 한다는 지극히 이성적인 충고를 건넸다. 세 경우 모두 부모들은 동의하지 않고 의사와 병원을 상대로 모든 가능한 법정 소송을 진행하였고, 신문과 소셜미디어를 통한 홍보전도 병행했다. 법원은 세 사건 모두에서 병원 입장을 지지하는 판결을 내렸고, 이후 세 아기는 짧은 생을 마감했다.
 언론은 이 사건들을 윤리적 딜레마로 다뤘지만, 어떤 경우도 딜레마는 아니었다. 딜레마는 2개 이상의 대안 가운데 최선이나 차악을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어린 찰리 가드가 살아남아 그레이트오먼드스트리트 병원의 중환자실 밖에서의 삶을 누릴 수 있는 대체 시나리오는 존재하지 않았다. 문제는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권위와 전문성에 관련된 것이었다. 병원은 항상 중증의 뇌 손상 어린이와 부모들을 다뤄왔다. 각 사례는 여전히 개인의 비극이다. 의사와 간호사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고 결정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부모에게 이제는 보내야 할 때라고 말했다. 변한 것은 오늘날의 젊은 부모들이 의사들의 말을 듣거나 그들의 권위와 경험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전문가와 권위 있는 인물에 대한 존경심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 인터넷을 통한 지식의 민주화, ‘전문가’에 대한 새로운 불신, 소셜미디어의 선동 효과가 그런 것들이다. (p.238-239)

 

 2001년 『영국의학저널』 편집인으로 있던 리처드 스미스는 ‘가짜 계약’에 대해 쓴 적이 있다. 가짜 계약이란 오늘날의 의학이 놀랄 만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환자들의 믿음에 바탕을 둔 것인데, 의사들이 아픈 이유를 쉽게 진단할 수 있고,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사회적 문제를 포함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치료를 전적으로 맡기는 것을 말한다. 의사들은 이런 믿음이 유아적인 것이고, 계약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의사들은 현대 의학이 제한된 능력만을 가지고 있고, 때로는 위험하며,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모든 것을 알고 있지도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그들이 확실하게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은, 많은 일들이 얼마나 어려운지와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일과 해가 되는 일 사이의 차이가 아주 미세하다는 것뿐이다. 가짜 계약은 수십 년에 걸친 우리 삶의 의료화가 낳은 필연적 결과이다. 내가 의사로 일하는 동안만 해도 의학은 노화, 약물남용, 어린이행동 등을 의료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위대한 의료사학자인 고(故) 로이 포터는 『인류 최대의 혜택: 인류 의료사』(1997)라는 저서에서 “의학에 대한 오늘날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태도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치료 환경이 좋아지고 사회의 의료화가 널리 진행된 데 따른 누적 반응이라 할 수 있다”라고 썼다. 리처드 스미스가 가짜 계약에 대해 쓴 이후 17년 동안 의사의 불행은 심화되기만 했고 사회적 지위는 계속 내려앉고 있다. 아마도 우리는 “의학은 제한된 능력만을 가지고 있다”,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노화는 질병이 아니다”라는 구호로 인식개선 캠페인을 다시 시작해야 하리라. (p.242-243)

 

 맥나마라가 사임하고 3년 후에 사회학자이자 여론분석가인 대니얼 얀켈로비치(1924~2017)는 ‘맥나마라 오류’(the McNamara Fallacy)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영국계 아일랜드 작가인 찰스 핸디가 1994년 『텅 빈 레인코트』(The Empty Raincoat)라는 책에서 이 용어를 유행시킨 후 그것의 원조로 잘못 인용되곤 한다.)

첫 번째 단계는 측정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측정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다. 두 번째 단계는 쉽게 측정할 수 없는 것은 무시하거나 임의의 수치를 매기는 것이다. 이것은 인위적이고 잘못되기 쉽다. 세 번째 단계는 측정할 수 없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맹목이다. 네 번째 단계는 쉽게 측정할 수 없는 것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거의 자살행위이다.

 의학은 늘 혼란스럽고 부정확하고 불확실한 상태에 있고, 그런 상태로 지내왔다. 맥나마라 오류는 이 모든 복잡성을 수치 분석으로 풀어낼 수 있다는 망상이다. 이런 생각은 병원사망률 같은 조악한 정량지표에 대한 지나친 신뢰와 자의적 목표 설정으로 이어지곤 하는데, 이 목표들 대부분은 환자 치료를 개선하지 못할뿐더러 일부는 오히려 해를 끼치기까지 한다. 그러는 사이 치료의 연속성이나 연민 같은 측정 불가능한 속성들은 무시된다. (p.254-255)

 

 맥나마라의 이력은 20세기 후반 들어 비즈니스뿐 아니라 보건의료, 교육, 정부를 포함해 인간 행동의 수많은 영역을 지배하게 된 관리통제주의 문화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맥나마라는 새로운 관리자 유형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경영과학의 훈련된 전문가로서, 하나의 기술적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제너럴리스트였다.” 로버트 헤이스와 윌리엄 애버네시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기고에서 관리통제주의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미국 경제를 쇠퇴시킨 원인이라고 비난했다.

학술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재계에서 그간 발전한 것을 꼽자면, 전문 관리자라는 그릇되고 얄팍한 개념에 열중해온 것을 들 수 있겠다. 전문가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가짜 전문가’인 이 개인들은 어떤 산업 내지 기술 분야에도 특별한 전문성이 없으면서도, 익숙지 않은 회사에 들어가 엄격한 재무관리와 포트폴리오 개념과 시장주도 전략으로 회사를 성공으로 이끌려고 한다.

 의학에서 정량지표에 집착하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관리통제주의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인 비즈니스 방법을 보건의료라는 복잡계에 쉽게 적용할 수 있다는 망상이 게리 로빈슨 같은 (기업가이자 방송인으로) 유명한 관리통제주의자들에 의해 계속 이어져 왔다. (p.270-271)

 

 의료에서 정량지표가 하는 역할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지만, 이런 지표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현대 의료를 원래의 목적에서 멀어지게 한다. 숫자는 우리의 도구이지 폭군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가 의료계에 대해 주로 우려하는 점은 연민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런 우려는 스태퍼드 스캔들이 보여주듯 정당한 것이고, 많은 의사와 간호사들은 이런 우려를 현대 보건의료의 가장 중대한 도전과제로 보고 있다. 친절함, 용기, 능력, ‘뚝심’ 등과 같이 연민을 구성하는 요소는 모두 정량화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보이지 않는 접착제―한때 국가보건서비스 같은 기구를 하나로 묶어주었던 선의―가 사라져가고 있다. (p.276-277)

 

 연민(compassion)과 공감(empathy)은 종종 구분 없이 사용되지만 완전히 다른 특성이 있다. 연민이 없는데도 공감할 수는 있다. 사이코패스와 남을 괴롭히는 사람은 사람의 감정을 간파하는 재능을 가진 경우가 많다. 이와 비슷하게 공감 없이도 연민을 느낄 수 있는데, 좋은 의사들이 종종 그러하다. 공감은 의사들이 일할 때 방해요소가 될 수 있다. 환자의 고통에 대한 지나친 동일시는 의사로 하여금 환자의 고통을 경감해주는 것과는 다른 길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 나이가 있고 냉철한 환자들은 능력, 정직, 존중 같은 다른 특성을 더 값지게 여긴다. (p.292-293)

 

 의학에서 일어난 모든 새로운 ‘발전’은 호리병에 다시 가둘 수 없는 마법사 지니와 같다. 거대과학이 갑자기 사려 깊고 학구적인 작은 과학이 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제약회사들이 이제 와서 새삼 사회적 양심을 키우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잘못된 의학정보로 인한 혼란은 배수가 안 되어 악취 나는 늪처럼 계속 남을 것이다. 한때 가난했던 나라들이 발전하고 부유해지면 각종 일상재에 대한 서구적 취향도 확대되는데, 특히 의료서비스가 그러하다. 예를 들어 부유한 인도인들은 생의 마지막 단계가 되면 최악의 미국식 과잉 의료서비스를 받는다. 오늘날 의학의 ‘진보’는 자립성 상실과 만성질환에 시달릴 때까지 우리를 충분히 오래 살게 해주겠다는, 터무니없이 비싸고 미심쩍은 선물을 우리에게 선사해주고 있다. 우리는 늙어서 노쇠할 때까지 생존하는 것보다는 좀 더 나은, 더 고귀한 포부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그저 한 사람의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경제적 인간)이거나 호모 인피르무스(homo infirmus, 병약한 인간)라는 진단서 뭉치가 아니다. 의료는 교육의 기회를 빼앗고, 적당히 살아갈 만한 집을 빼앗고, 예술을 향유할 기회를 빼앗고, 좋은 대중교통을 빼앗아가는 악당이다. 의료에 대한 지출을 계속 늘린다고 해서 우리에게 더 큰 위안과 기쁨이 오는 것도 아니다. (p.304)

 

 뒤보의 『건강 유토피아』는 의외로 의학의 황금시대가 절정일 때 출간된 책이다. 황금시대의 가장 위대한 성취인 항생제 개발에 기여한 뒤보는 책의 첫 장에서부터 자신이 참여했던 위대한 프로젝트에 대해 의문을 표했다.

질병과 고통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는 삶의 과정과 병존할 수 없다. 삶의 과정 자체는 개인과 환경 사이의 연속적인 상호작용인데, 종종 손상이나 질병을 가져오는 투쟁의 형태로 나타난다. … 질병으로부터의 완전하고 지속적인 자유는 인간 복락을 위해 설계된 에덴동산이라는 상상으로부터 나온 꿈에 불과하다. … 인간의 영혼이 전력을 다해 지혜와 관용을 발휘하는 것보다는 과학의 정신으로 자연의 회복력을 발휘케 하는 것이 더 쉽다. … 질병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서 건강과 행복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뒤보는 토머스 매키언 등이 말했던 것처럼, 공중보건과 인간 수명의 획기적 향상은 의학 연구의 황금시대 훨씬 전부터 있었던 일이고 위생과 영양의 개선을 통해 달성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의학이 어떻게 이런 공로를 가로채게 되었는지를 위트 있는 말로 표현했다. “조수가 해변에서 밀려날 때는 양동이로 물을 퍼내서 바닷물을 비울 수 있다는 착각을 하기 쉽다.”
 인류는 언제나 유토피아를 열망했지만, 이런 열망이 의료적으로 실현되리라고 본 것은 오로지 우리 시대뿐이다. 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1946년에 설립된 세계보건기구(WHO)는 그 헌장에서 건강을 “단지 질병이 없거나 허약하지 않은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온전히 안녕을 누리는 상태”라고 정의했다. 페트르 스크라바넥은 농담하기를, 보통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느낌을 “오르가즘이나 약물을 했을 때나 느낄 것”이라고 했다. 1975년 WHO 사무총장으로 있던 덴마크인 할프단 말러는 ‘2000년까지 모든 이에게 건강을!’이라는 연설을 했다. 이런 우스운 슬로건이 1970년대와 80년대 WHO 사명선언문으로 채택되었는데, 새로운 세기가 와도 말러가 말한 유토피아는 오지 않았다. 말러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1987년 아일랜드의 저명한 심장전문의인 리스티어드 멀케이는 『아이리시 타임스』에 “2000년까지 심장병, 중풍, 호흡기질환, 암과 같은 가장 흔한 사망원인이 사라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p.309-310)

 

 영국 일반의들이 우울증을 진단하는 데 사용하는 현재 기준은 너무 허술해서, 불면증을 동반하는 우울감이 2주간만 지속되면 ‘주요우울증에피소드’로 진단할 정도이다. 그러나 인구의 50퍼센트 정도는 살아가는 동안 한 번쯤은 이런 사건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는 사이 정작 중증의 지속적 우울증―‘멜랑콜리’라고 부르던 증상―을 가진 환자들은 정신과 서비스를 받기 위해 애를 먹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자폐증, 양극성장애의 진단도 크게 늘어나고 있는데, 이것을 해당 질병의 유병률 증가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종교나 철학에서는 인생이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데, WHO는 그렇게 한다. (p.310-311)

 

 특정병인 교리는 불확실한 과학적 근거 위에 서있다. 예를 들어 결핵은 결핵균에 의해 생긴다고 가정되는데,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이 균을 지니고 있지만 결핵으로 발전하지는 않는다. 결핵균 외에 빈곤, 영양결핍 등이 있어야 결핵이 발생한다. 비슷하게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균은 위궤양과 십이지장궤양의 ‘원인’이지만, 이 세균에 감염된 수많은 사람에게 다 궤양이 생기지는 않는다. 이 병은 헬리코박터가 원인으로 밝혀지기 오래전부터 이미 급격하게 감소하기 시작했다. 아스클레피오스적 사고는 아마도 거대과학―진보를 달성하겠다고 하는 새로운 유전학과 정밀의학―이 지금까지 범해온 실패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의학저널』의 전 편집인 리처드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다. “명백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마법의 탄환 모델은 유전학과 맞춤의학 시대에도 잘 살아남았다. 제약회사는 마법의 탄환을 파는 상인으로 이런 환상을 유지하는 데 매우 열성적이다. 그것은 대중에게도 매우 매력적인데, 알약 하나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인간과 인간 질병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무한대로 복잡하다. 위대한 암 생물학자인 로버트 와인버그는 겸손하게 이 점을 인정했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성취하고자 하는 대부분의 의학적 진보를 달성했고, 어떤 영역―항생제 내성 같은―에서는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 우리가 현재 보유하고 있고 이미 알고 있는 모든 과학적 지식을 균일하게, 공평하게, 그리고 합리적으로 적용하기만 해도 의학과 보건 수준이 크게 변화할 것이라고 많은 사람이 주장한다. (p.312-313)

 

 의학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지 더 이상 모른다. 모든 질병을 제거하는 것이 의학 연구의 궁극적 목표인가? 그렇다면 의학은 인간을 불사의 존재로 만드는 것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물론 불가능하다) 우리는 정말로 그것을 원하는가? 성인 인구 전체를 대상으로 더욱 많은 질병을 스크리닝해서 지속적인 감시 하에 두는 것이 현재 임상의학의 목표인가? 수명 연장이 다른 모든 고려사항보다 우선인가? 의학(특히 의학 연구)은 경제적, 도덕적 진공상태에서 일하면서, 엄청난 비용이 들지만 효과는 미미한 암 치료법이나 정밀의학이 사회적으로 갖는 의미를 무시한다. 우리는 또 세계화의 이점은 누리면서 의무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적은 예산만으로도 예방과 치료가 가능한 질병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부유한 나라에 사는 우리는 약간의 성과만 볼 수 있는 일에 막대한 예산을 지속적으로 투여한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적절한 통증 경감이나 완화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어간다. 『랜싯』의 ‘완화치료 및 통증 경감에 관한 접근성 제고 위원회’(2017)는 극심한 건강 관련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세계적으로 6천1백만 명에 이른다고 설명하면서, 그중 80퍼센트가 저소득 및 중위소득 국가에 산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 매년 사망하는 사람의 45퍼센트는 심각한 고통을 겪으면서 사망하고, 그중 어린이가 250만 명이라고 한다. (p.315-316)

 

 참호전은 그것을 지속해온 문명이 탈진하거나 붕괴하면 결국 끝나게 되어 있다. 로널드 라이트는 『진보의 함정』(A Short History of Progress)이라는 저서에서 (수메르, 로마, 마야 같은) 다양한 문명들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붕괴했는지를 서술했는데, 주로 문명을 지탱하는 환경이 파괴되면서 붕괴했다고 한다. 8세기경 이스터 섬에 정착한 폴리네시아인들도 그러했다. 조상숭배가 이들 정착민들의 주요 종교행사였고, 각 부족은 조상을 기리기 위해 저마다 석상을 만들었다. 석상을 세우는 데는 많은 양의 목재, 밧줄, 인력이 필요했는데, 석상의 크기가 계속 커졌다. 섬의 목재가 나무의 자체 성장으로 조달할 수 있는 양보다 더 빠르게 베어졌고, 결국 땅이 황폐해지고 말았다. 황폐해진 땅은 희소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으로 이어져서 마침내 인구집단의 붕괴를 초래했다. 로널드 라이트는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광증으로 변하는 진보의 어떤 종류에 유혹되곤 하는데, 일부 인류학자들은 이것을 ‘이념적 병리’라고 부른다. 유럽인들이 18세기에 이 섬에 당도했을 때 최악의 전쟁은 끝났고, 섬에는 석상 하나 당 한두 명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만 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쿡 선장은 이 안쓰러운 생존자들을 ‘작고 마르고 수줍고 불쌍한 존재들’이라고 표현했다.”
 이스터 섬의 석상 숭배는 이념적 병리이다. 모든 질병을 박멸하거나 예방하겠다는 의학의 아스클레피오스/데카르트적 목표 역시 이에 맞먹는 자기 파괴적 광증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얼마나 당치 않은 짓인지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빨리 입증될 것이다. 과밀한 초연결 세상은 새로운 감염병의 이상적 배양 환경이 되고 있고 현재의 항생제는 무력화될 것이다. 인류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조지프 테인터는 이렇게 경고했다. “만일 붕괴가 다시 온다면 이번에는 지구적인 규모일 것이다. … 세계 문명 전체가 해체될 것이다.” (p.317-318)

 

 의료는 유사 종교가 되고 있다. 우리는 환자들이 이 종교를 배교하고 포기하도록 친절히 격려해야 한다. 조지 버나드 쇼는 자기 독자들에게 조언하기를, 건강을 다 써버리고 그 이상 오래 살지 말라고 했다. 우리도 그와 비슷하게 환자들에게 제임스 매코믹이 말한 ‘적당한 쾌락주의의 삶’을 누리도록 격려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자신의 삶을, 피해야 할 위험이 가득한 여행으로 보기보다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단 하나의 인생으로 충분히 누릴 수 있게 해야 한다.” 의사들은 그들이 가진 지식을 너무 높게 평가했고 환자들에게도 너무 많이 약속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죽음과의 전쟁에서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미 알고 있고 가지고 있는 것을 공평하게 나누는 일에 에너지를 돌려서 치유와 통증완화에 가치를 두는 새로운 의학으로 나아가야 한다.
 대성당 같은 수련병원과 생의학 연구가 정점에 있고 지역사회와 호스피스 의료는 바닥에 있는 현행 의학의 우선순위도 반대로 뒤바꿔야 한다. 나는 이런 변화가 쉽게 일어날 것이라고 낙관하지 않는다. 강한 사회적 힘이 현 체제를 지속시키려 할 것이다. 이런 사회적 힘에는 모든 인간 삶의 상업화, 거대 다국적기업의 오만한 힘, 정치와 전문직의 쇠락, 순응과 통제의 고착, 안전의 물신화,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의 자기몰입 등이 포함되고, 이 모두에 앞서 우리를 지속적 감시와 유지가 필요한 디지털 기계로 축소시키는 이 시대의 영적인 왜소화가 포함된다. 의산 복합체라는 것이 무슨 방대하고 조직적인, 의도적으로 짠 음모 같은 것은 아니다. 그것을 만든 사람들만큼이나 오류투성이이고 너저분하고 비이성적이다. 하지만 의산 복합체가 너무 강대해진 나머지 의료는 이제 이반 일리치가 말한 티핑포인트를 지나서 사람들에게 도움보다는 해를 더 많이 끼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의학에서 어떤 새로운 발전이나 치료법이나 패러다임이 나왔다고 하면 먼저 두 가지 간단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첫째는 퀴 보노(Cui bono), 누구에게 이익인가? 둘째는 그것 때문에 삶이 더 행복해질 것인가? 이 질문들을 유전체학, 디지털헬스, 인식개선 운동에 던져보면 답은 명백하다. (p.322-323)

 

 의사들과 환자들 모두 의산 복합체의 노예가 된 상황이지만, 이제는 모두가 반란을 일으킬 때가 되었다. 우리 사회는 노화와 죽음에 대해 새로운 화해를 할 필요가 있다. 의사들은 전문성과 임상적 판단이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항상 그들이 하는 일의 핵심이라고 선언해야 한다. 프로토콜이나 정부의 지시나 처벌의 두려움 뒤에 숨어서는 안 되고, 오로지 인간 삶의 조건을 좀 더 견딜 만하게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 과학과 진료의 정통학설은 늘 생겼다 사라지지만, 진료 행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완치를 시키지 못할 수도 있지만 여전히 치유할 수는 있다. (p.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