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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받을 권리 / 티머시 스나이더 / 엘리

 

 미국의 질병, 미국의 병폐는 환경오염 사망, 마약성 약물 중독 사망, 수감 중 사망, 자살, 신생아 사망, 그리고 현재의 노년층 집단 사망을 너무도 흔한 것으로 만든다. 미국의 질병은 그 어떤 통계보다 더 심각하며, 유행병보다도 더 고질적이다. 우리가 더 짧고 더 불행하게 살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신종 바이러스가 대유행을 하는데도 미국인들을 계속 무지몽매하게 놔둔 채 그 혼란과 고통을 이용해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 데는 이유가 있다. 미국의 질병은 아플 때 어디에 손 내밀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우리를 팽개쳐 고립시킨다.
 미국은 마땅히 자유의 나라이건만, 병과 두려움이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다. 자유롭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다워지는 것, 자신의 가치와 욕망을 좇아 세상을 누비는 것을 뜻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행복을 추구하고 발자국을 남길 권리가 있다. 행복을 감지하지 못할 만큼 아프거나 행복을 추구하지 못할 만큼 허약해지면 자유란 불가능하다. 의미 있는 선택, 특히 건강에 관한 선택에 필요한 지식이 부족하면 자유를 얻기란 불가능하다.
 ‘자유’라는 말이 우리를 병들고 힘없게 방치하는 상황들을 야기하는 이들의 입에서 나온다면 그것은 위선이 된다. 만약 우리의 연방정부와 상업 의료 시스템이 우리를 병들게 한다면, 그들은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p.26-27)

 

 자유는 각자의 일이지만, 우리 중 누구도 다른 이의 도움 없이는 자유로울 수 없다. 개인의 권리를 위해선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 〈독립선언문〉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난다”고 천명하며 그 원칙을 수호하겠다는 모든 서명인들의 의지 표명으로 마무리된다. 권리란 우리가 응당 누려야 한다고 확신하는 무엇이지만, 존재하는 권력자들에게 촉구될 때만이 세상의 현실이 된다.
 흑인 인권 운동가였던 프레더릭 더글러스가 되새겨주듯, “인간 자유의 진보가 새겨진 모든 역사는, 이제껏 자유의 준엄한 요청에 응답한 모든 양보가 진정한 투쟁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 그 투쟁은 우리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한 싸움이 될 것이다. 그 싸움은 우리가 의료보장을 하나의 인권으로 주장할 때 시작된다. (p.28-29)

 

 건강은 생존에 있어 너무나 기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의료보장에 대한 신뢰는 자유를 이루는 중요한 일부이다. 만약 필요하면 언제든 치료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과 재능을 다른 문제들에 쏟아 더 자유로운 선택을 하고 더 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반면 의료보장을 특혜라고 여긴다면, 그때는 혜택의 안쪽에 있는 사람들이 그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에서 즐거움을 얻기 시작한다. 의료보장이 보편적 권리가 아니라 특별한 혜택이 되면, 혜택받는 사람들을 비인간적으로 만들고 혜택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모든 이가, 종국에는 으레 그런 것으로 여겨지게 될 가학적 시스템에 빠져들게 된다. 개인으로서 행복을 추구하기보다, 모두 함께 집단적 고통을 만들어내게 된다.
 따라서 우리 미국의 질병은 모두의 문제이다. 우리는 모두 집단적 고통에 동참하고 있다. 형편이 나은 사람들은 덜 그러한 이들에게 해를 끼치고 있다. 의료보장이 경쟁이 되어버리면, 승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한편으로, 그들이 받는 보장 역시 더욱 안 좋아진다. 상대적인 우위에 우쭐해 정신을 잃는 바람에,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침으로써 스스로에게 또한 해를 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의료보장이 보편적 권리가 된다면, 우리는 ‘모두 다’ 더 나은 치료를 받을 수 있고, 다 함께 집단적 고통에서 해방될 것이다. 의료보장은 우리의 몸을 위해서도, 우리의 정신을 위해서도, 특혜가 아니라 권리가 되어야 한다. (p.53-54)

 

 수십 년에 걸쳐 현명한 의사들은 내게 의료보장이란 통증과 알약이 다가 아니라고 알려주었다. 1992년 런던에서 내 편두통을 치료하던 한 의사는 내게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으세요” 했다. 그때는 그 말이 이상하게만 들렸다. 1994년에서 1995년까지 1년 동안 공부하면서 혼자 지낸 파리에서는 편두통이 너무 심해져서 시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책과 문서 들을 읽을 수 없고, 심지어 텔레비전을 보면서 머리를 식힐 수조차 없게 되자, 나는 내게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어느 날 밤, 신호등도 지도도 볼 수 없는 상태로 비틀비틀 병원으로 향할 때, 나는 “어질어질하다” “별이 보인다” 같은 프랑스 말을 연습하고 있었다.
 나중에 나는 파리에서 신경과 의사를 찾아갔다. 돈이 얼마 없었지만 진료비가 비싸지 않았다. 그 병원에 갈 때 나는 에펠 탑을 거쳐가는 버스를 탔다. 나는 늘 에펠 탑을 바라보곤 했다. 뒤이어 버스에 탄 파리 시민들로 눈길을 돌렸는데, 그들 중 단 한 사람도 아주 잠깐이라도 에펠 탑에 눈길을 주는 이가 없었다. 나를 섬세하게 진찰하고 여러 검사를 마친 뒤 신경과 의사는 내 상태가 악화된 이유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있기 때문일 거라는 소견을 냈다. 젊었던 나는 그가 전형적인 프랑스인이거나, 아니면 나를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은 한참이 지난 뒤였다. (p.66-67)

 

 얘기할 시간이 있는 사람이 전혀 없고, 다른 대안을 찾을 도리가 없게 되면, 우리는 고통과 알약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느끼게 된다. 의약품 광고가 건강 정보의 주요 출처인 이 나라에서는 고통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책임이며 약이 바로 치료라는 교훈을 거듭 학습하게 된다. 진통제가 말을 들으면 특히나 위험해지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가 고통의 더 뿌리 깊은 원인을 방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복용량을 늘리게 되면 곤란한 지경에 이르거나 약물이 더 이상 듣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통을 참는 것과 스스로 약 처방을 하는 것은 모두 외로운 일이다. 자유로운 선택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를 속박 상태에 내버려두는 불균형을 만들어낸다.
 미국 사람들은 통증을 부인하는 상황에서 진통제가 듣지 않음을 부인하는 상황으로 미끄러진다. 약을 먹지 않고 모든 것을 참고 견디는 상황에서 만사를 포기하고 약만 먹는 상황으로 미끄러진다. 삶이 고통과 알약 사이에서 영위된다면, 우리는 너무 많은 분노와 너무 부족한 공감, 너무 많은 고독과 너무 부족한 연대로 끝나고 말 것이다. (p.70-71)

 

 소규모 농업을 생계수단으로 유지하기는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어린 나에게 끄떡없어 보였던 농부들은 이제 다른 직업군에 종사하는 사람들보다 더 많이 자살한다. 농부들을 위한 연방정부의 자살방지 상담전화는 폐지되었다. 이것은 아메리칸드림의 보루들이 거대한 규모로 붕괴되고 있는 상황의 일부일 뿐이다. 의욕에 찬 고독한 농부들을 지원으로 연대해주었던 사회복지는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육체의 강인함은 농장과 공장에서 적절한 수입을 보장했다. 고통을 참는 일은 생산성의 일환이었다. 만사를 감내하는 것이 올바른 행동일 수 있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열심히 일하는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더 나은 삶의 기회가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경제가 변하고 사회복지가 약화되자, 고통이 목적을 잃고 인내가 쓸모를 잃자, 사람들은 당연히 혼란에 빠졌다. 육체노동자들은 줄었지만, 사람들은 이제 더 많은 육체적 고통을 호소한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고통은 경제의 일부, 정치 시스템의 일부가 되었다. 미국의 정치가들은 더 찬란한 미래의 비전을 경쟁하듯 펼쳐 보이곤 했다. 그러나 지금의 정치는 대부분 고통을 간청하고 고통을 조작한다. (p.72-73)

 

 우리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상업적 의료 시스템하에 놓여 있다. 우리가 그렇게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나은 길들이 존재한다. 아들이 태어나고 아내와 내가 오스트리아 병원에서 나올 때, 병원에서는 메고 다니기 편한 기저귀 가방에 아기 옷과 담요가 든 ‘키트’를 주었다. 빈 시에서 제공하는 서비스가 망라된 안내 책자도 받았다. 거기에는 아이를 돌보기 힘든 엄마들을 위한 개별 지원 프로그램, 공공 육아 서비스, 그리고 공립 유치원과 학교 정보가 들어 있었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소아과에 데려가 ‘여권’에 예방접종 기록만 차곡차곡 쌓으면, 이 모든 것이 무료였다.
 한 살과 세 살이 된 아이들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다시 이주했을 때, 우리는 우리가 사는 노동계급 거주지역에 있는 공립 유아원의 수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미국에서 보았던 사립 어린이집과 유아원 규모의 시설과 활기찬 분위기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점심식사 비용으로 매달 찬조하게 되어 있는 40유로 말고는 정말로 모두 무료였다. (점심을 지역 산물로 조달하는 것에 자부심이 대단해서, 요리사들과의 저녁 모임은 말할 것도 없고 한 시간 넘는 교사-학부모 모임의 주제이기도 했다.) (p.101-102)

 

 음악 수업을 시작하고 몇 주 뒤 나는 친해진 다른 엄마와 이런 조바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들이 자기들 바로 앞에 있지 않으면 엄마들은 조바심을 치는 것 같은데 대체 이유가 뭔지 그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돌아온 대답은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제 생각엔 엄마들이 결국, 자기가 혼자 이 일을 감당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에요.”
 엄마들이 (그리고 아빠들과 다른 보호자들이) 그렇게 느끼지 않는 미국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빈에서 아내와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은 유아차를 위해 길을 양보했고, 누가 부탁하지 않아도 문을 잡아주었다. 어느날 아침 딸은 유아차에 앉히고 아들은 유아차 뒤쪽 아래에 연결된 보드 위에 세운 채, 언덕 아래로 달려 내려가던 일이 기억난다. 아이들을 유치원에 제시간에 데려다줄 수 있는 마지막 전철을 타기 위해, 나는 지상에 있는 정거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해를 등지고 있었기에, 나는 전철 차량의 창문을 통해 승객들이 우리가 탈 수 있게 버튼을 눌러 문을 열어주고 그다음엔 우리가 끼어 탈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주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부모들과 어린아이들에 대한 이런 태도는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미국 사람들보다 더 친절하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가 결코 아니다. 이것은 아이를 키우는 일이 한 부모 혹은 한 가족이 다른 누구의 도움도 없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지 여부와 관련된 문제다. 공공 병원에서 공립 유아원, 모든 지하철 정거장에 승강기가 설치된 대중교통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도와주었던 제도들은 아이들이 있는 가정에만 주어지는 일방적인 혜택이 아니었다. 이러한 제도들은 사람들을 한데 뭉치게 하고, 결국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게 해줄 연대의 인프라였다. (p.104-106)

 

 자유의 역설은 어느 누구도, 도움 없이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자유는 혼자 지냄을 뜻할지 모르지만 연대를 필요로 한다. 고독 속에서 자유로워지는 법을 터득한 어른은 어린 시절 연대의 혜택을 입은 사람이다. 따라서 자유는 세대를 거듭하며 빌려주었다가 또 돌려받는 빚과 같다. 아이들에게는 그 첫 5년 동안 집중적이고 사려 깊은 관심이 필요하다. 이 특별한 시간은 아이들끼리는, 어른들끼리는 주고받을 수 없다. 아이들은 이 특별한 종류의 시간을 어른들로부터만 빌려올 수 있다. 아이들은 그 빚을 나중이 되어서야 비로소,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에게만 되돌려줄 수 있다. 자유로운 국가는 세대를 거듭하며 번성한다. (p.109-110)

 

 진실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때문에, 우리를 억압하는 사람들은 진실에 저항한다. 어떤 참사든, 특히 자신들이 초래한 참사라면, 폭군들은 우리가 듣고 싶어하는 감언이설의 요소를 담아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자신들의 책임을 면피할 구실을 찾아낸다. 2020년 초반에 사람들은 당연히 미국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없다는 얘기를 듣고 싶어했다. 하지만 기만당하면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역사가 영국 총리였던 네빌 체임벌린을 고약한 인물로 기억하는 이유는 그가 1938년에 영국 국민들이 듣고 싶어했던 말, 즉 전쟁을 벌일 필요가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역사가 윈스턴 처칠을 호의적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그가 영국인들이 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 말, 즉 히틀러를 막아야만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병에 걸리기 전 나는 아들과 딸에게 『반지의 제왕』을 읽어주던 참이었다. 톨킨의 영웅 전설에 나오는 고귀한 인물인 마법사 간달프는 원치 않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엄청난 힘이 있지만 혼자서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 그의 임무는 위협이 닥친 현실을 다른 이들에게 납득시켜 연합을 꾸리는 일이다. 거듭해서 간달프는 덜 현명한 이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나쁜 소식을 품고 있는 자라고 조롱당한다. 삶과 마찬가지로 이야기에서도 사람들은 체념을 받아들이는 구실을 삼을 요량으로 무지를 선택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어찌 알 수 있었고, 무슨 일을 할 수 있었겠나?” 이것은 인간적이 되는 한 방편이겠지만, 자유로워지는 길은 아니다. 간달프는 마침내, 알지 못하면 자유를 얻을 기회는 없다고 응수한다. 위협을 판별해서 대비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생명과 자유를 잃는다. 알고 싶어하지 않으면 억압을 불러오게 된다. 질병에 관해 알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정치가들에게 당신의 몸을 감시하고, 집단 사망에 이르게 하는 감정들로 당신을 조종해달라고 요청하는 꼴이다. (p.124-125)

 

 미국 대부분의 지역은 현재 뉴스의 불모지다. 뉴스의 불모지는 우리에게서 일상 생활에 필요한 정보들을 빼앗아감으로써, 나아가 건강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행동에 나서야 할 중차대한 순간에 우리를 혼란에 빠지게 만듦으로써,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비근한 사례는 환경오염이다. 지역 언론인들이 부재하기에 어느 누구도 정치가들과 기업들 간의 부적절한 관계를 감독하지 못한다. 물과 공기를 오염시키는 프로젝트들이 홍보를 통해 쉽사리 일을 벌인다. 지역 언론인들이 없으면 어느 누구도 건강 관련 민원에 마땅히 응대하거나 물과 공기를 검사하지 않는다.
 켄터키주 루이빌시의 〈커리어 저널〉은 한때 노천 채굴과 오하이오강의 오염, 그리고 하수 찌꺼기와 방사능 폐기물의 투기 행위에 조치를 취하게끔 압박했다. 지금은 그 지역의 (아니 미국 전역의) 어떤 기자도 환경 문제를 담당하지 않기에 이러한 사업들은 제멋대로 시행된다. 어느 누구도 과다 벌목, 산꼭대기 채굴, 혹은 방치된 탄광의 위험 같은 지속적 위협 사안들을 보도하지 않을 것이다. 예견된 위험들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고, 아무것도 보도되지 않을 것이고, 사람들은 죽어나갈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사람들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죽게 될 확률이 환경오염으로 인해 늘어날 것이 분명한데도, 코로나 바이러스를 구실로 삼아 환경오염을 합법화했다. 합법화의 결과들을 취재 보도할 기자들이 우리에겐 없다. (p.145-146)

 

 2020년 지역 언론인들의 부족은 환경오염과 마약성 약물 위기 경우에 그랬던 것과 비슷하게, 코로나 바이러스의 결과에도 영향을 미쳤다. 우리에겐 전국적 참사를 규명해줄 사람들이 부재했다. 우리는 여전히, 이것이 어느 지역에 가장 먼저 닥쳤는지 알지 못한다. 감염병 대유행이 시작된 지 몇 달이 지났지만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은 여전히 워싱턴에서 오는 낌새와 동향에 반응하고 있을 뿐이다. 그 질병이 이미 자신들의 이웃을 감염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지역 언론인들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소셜 미디어가 지역 신문의 자리를 대체해버렸기 때문에 음모 이론들이 퍼진다. 러시아나 중국에서 흘러온 선동 문구들이 동네 주변의 현실보다도 더 손쉽게 저녁 식탁의 화제로 등장한다.
 사망자들의 모습을 전달하는 일은 지역 기자들의 몫이다. 요양원에서 벌어지는 집단 사망에 관해 보도한 것도 그들이었다. 지역 기자들은 시신들이 방치되고 있던 장소들을 찾아냈고, 사망한 간호사들과 의사들의 이름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들은 주정부가 사망 관련 수치들을 은폐한 사례들을 밝혀냈다. 안타깝게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런 이야기의 대부분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단지 그런 이야기를 보도해줄 기자들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p.147-148)

 

 오하이오주에서 검사가 시작되었을 때 양성 결과의 5분의 1이 의료진에서 나왔다. 전국 각지에서 의사들이 사망했다. 사망자 가운데는 한 공공 병원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기로 한 총애받는 의사도 있었고,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사망한 너무 많은 주검들을 목격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응급실 의사도 있었다. 간호사들 역시 목숨을 잃었다. 교도소에서 근무했던 간호사, 바이러스에 감염된 동료를 돌보던 간호사, 딸아이가 자기 아빠는 끄떡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던 간호사, “엄마 없이 우린 아무도 살아갈 수 없어”라는 절박한 문자를 보낸 딸을 둔 간호사. 세인트루이스에서 최초로 알려진 희생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간호사였다. 간호조무사들, 기사들, 구급대원들, 환자이송원들, 그들 모두가 병에 걸렸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 나는 청소 담당 직원들이 아마도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일을 맡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병에 걸렸다. 걸프전 참전군인이었던 경비원도 목숨을 잃었다.
 더 나이 든 참전군인들은 수십 명씩 요양원에서 죽음을 맞았다. 트럼프는 이 유행병 사태를 내내 “전쟁”이라고 칭했는데, 이 발언은 1년에 군비로 지출하는 7000억 달러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바이러스를 막은 것인지(제로였다) 의구심을 갖게 만들었다. 공공방위에 쓰이는 군비는 공중보건에 더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트럼프가 이 사태를 전쟁에 비유한 짓은 옳지 않다. (p.165-166)

 

 지역공동체의 의사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도시와 교외에서 힘든 만큼이나 그 지역을 벗어난 곳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의사들이 그런 형태의 진료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어떤 의사들은 지역에서 활동하기를 꿈꾼다. 한 번에 한 사람씩 자문을 하고 치료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울 따름이다. 일반의보다 전문의가 더 벌이가 좋고, 미국의 젊은 의사들은 대체로 빚을 지고 있다. 그 결과 소아과 의사와 내과 의사가 되려는 이들의 수가 희박하다. 고령자들을 보살피는 노인 의학의 전 분야는 소멸 중이다.
 일반의보다 전문의가 돈을 더 잘 버는 이유 중 하나는 수술이 1차 진료보다 청구서 발행이 더 쉽고, 보험 회사에 청구하기도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차 진료야말로 우리의 건강, 특히 우리 아이들의 건강에 가장 중요하다. 또다시, 이윤이 남는 일은 건강해지는 일과 무관하다. (p.181-182)

 

 미국과 같은 시장경제는 사람들이 존중될 때 더 잘 작동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자유라면, 우리는 인간의 자유를 시장의 독단에 희생시킬 것이 아니라 시장이 자유를 위해 작동하게 만들어야 한다. 시장경제 신봉자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있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소수독점체 내지는 그가 소비에트 중앙계획경제에 비유한 소수의 소유권에 반대했다. 우리의 의료산업복합체는 소수독점체의 집합이다. 미국의 빅 데이터 산업 역시 소수독점체의 집합이다. 하이에크가 옳다. 소수독점체는 해체되어야 한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노예의 길』에서 하이에크는 “궁핍한 중산층”을 우려했는데, 상업적인 민영의료 시스템이 지금 이들을 양산하고 있다. 그는 문명국가에선 당연히 만인이 의료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라 보았다. 그는 “국가가 포괄적 사회보험의 체계를 구성하는 일에 발 벗고 나서게 될 공산이 매우 크다”고 썼다. 그는 “국가가 이런 방식으로 더 거대한 안전망을 제공하는 일과 개인의 자유를 보전하는 일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올바른 정책은 우리를 더 안전하게 보호함으로써 우리를 더 자유롭게 한다. 이는 특히 아이들의 경우에 그러하다. 만약 우리가 지금 아이들과 보낼 시간을 마련해줄 수 있는 사회구조를 형성해낸다면, 미국은 앞으로 더 자유로운 국가가 될 터이다. 그러는 동안 우리가 부모 노릇을 잘하는 데 필요한 서비스와 권리는 시장을 왜곡시키기보다 온전하게 만들 것이다. 어린아이들의 부모가 불충분한 육아휴직과 병가와 휴가 때문에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직장을 구해야 하는 상황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 이로 인해 가족들의 삶에는 스트레스가 생기고 고용주들에게도 비용이 발생한다. 숙련된 기술이 끊임없이 불필요하게 낭비되고 항시적인 재교육에 투입되는 추가 비용이 증가한다. 병가, 육아휴직, 그리고 휴가를 낼 권리가 있는 고용인들이 더 행복하고 더 능률적이다. 또한 더 자유롭다. (p.192-193)

 

 

햇빛도 때로는 독이다 / 박은정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

 

 기존의 안정성 시험에서는 그 유해성이 밝혀지지 않아 안전한 식품첨가물로 분류된 물질이라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유해성이 밝혀져 사용이 제한되기도 한다. 이 경우, 장기간 섭취한 소비자들이 호소하는 개인적인 증상이 계기가 되어 그 유해성이 밝혀지는 경우가 많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식용색소 ‘적색 2호’다. 적색 2호는 딸기 사탕을 더욱 딸기색처럼 보이게 하는 등의 역할을 했던 인공색소다. 그러나 현재는 발암물질로 분류되어 사용이 금지 혹은 제한되었다. 여기서 ‘금지’는 이해할 수 있는데, ‘제한’은 소비자 입장에서 볼 때 좀 의아한 면이 있다. 제한이라는 것은 허용기준치를 극소량으로 하여 사용을 허락하고 있다는 것으로, 어린이가 즐기는 기호식품에는 금지됐어도 과자류 중에서 한과에는 허용하고 있다. 같은 식품이라도 한과는 어린이 기호식품이 아니므로 어린이가 노출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 이유였다. 혹시라도 한과를 좋아하는 자녀를 둔 어머님들은 꼭 기억하자. 소량이지만 성인 기호식품에는 식용색소 ‘적색 2호’가 허용되고 있다. (p.48-49)

 

 눈부시게 흰 옷이 극대화되어 청결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지금, 혹시 적정 용량 이상의 세제를 사용하고 있진 않은가? 더 깨끗하게 화장실을 청소한다고 반드시 차가운 물을 사용해야 하는 락스를 뜨거운 물에 넣어 사용한 적은 없는가? 설마 희석하지도 않고 원액을 들이부어 맨손으로 청소용 솔을 문지르지는 않았는가?
 ‘괜찮겠지.’ ‘지금까지 아무 문제도 없었어.’라는 안일한 생각이었다면 이제부터라도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샴푸도, 세탁용 세제도, 락스도 많은 용량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 성능이 월등히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환경오염으로 이어져 생태계에 영향을 주고, 최종적으로는 생태계 제일 위에 자리 잡은 우리 인간에게 그 영향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세제와 섞어 쓴 락스가 오존층을 파괴하는 물질로 변해 지구의 종말을 가속화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세제나 락스를 매일 아침 떠먹는다는 상상을 한다면,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반복하진 않을 것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제품은 안전한 것 아닌가요?”
 “유명 회사 제품이라 믿을 수 있어요.”
 “성분의 함량이 허용기준치보다 낮다면 안전한 것 아닌가요?”
 “안전하다는 말은 독성이 없다는 뜻이 아닐까요?”
 “친환경이라고 해서 안심하고 있어요.”
 “제품에 무독성이라고 쓰여 있는데요?”
 내가 만난 많은 사람이 이렇게 반문했다. 정말 그럴까? 많은 이의 말처럼 브랜드를 믿으면 되는 걸까? 관련 부처에서 관리하고 있으니 시판되는 모든 제품을 믿고 안심해도 되는 것일까? 허용기준치는 정말로 안전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돌아보자. 소비자들의 무한한 신뢰를 받는 유명 기업들의 제품이었는데도 엄청난 수의 피해자가 폐 손상으로 사망했으며, 살아남은 사람도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투병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물론 대부분의 기업은 자사 제품의 품질 연구를 철저히 하여 소비자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노력한다. 또한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도 국민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 불철주야 수고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이 아니라 실수를 많이 하는 인간이며,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부족한 존재다. 그렇기에 ‘관련된 보고가 없다.’고 무독성인 것이 아니라 ‘아직은 알 수 없다.’일 뿐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또한 A라는 성분이 가진 독성에 대하여 모든 것을 완벽히 파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알아야 한다. 더 큰 문제는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제품에 사용된 화학물질의 허용기준치가 다른 다양한 성분들과의 복합작용(Cotail effects)을 고려하지 않은 농도라는 사실이다. A가 B라는 화학물질과 만나고, 그것이 또 C라는 물질과 섞여 어떤 반응을 일으킬지는 함부로 예단할 수 없다. 더구나 어떤 환경에서 안전한지, 소비자가 또 어떤 뜻밖의 환경을 만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p.52-53)

 

 해가 없는데 효과는 우수한 살균·소독제는 근본적으로 있을 수 없다. 해가 없으면서 효과가 없거나, 몸에 해로우면서 효과가 뛰어난 두 종류만이 있을 뿐이다. 그 독성은 얼마나 정확하게 용법과 용량을 준수하였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더 안전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가급적 공기 중 분무 대신 닦아내는 방식을 취해야 하며, 불가피한 경우 분무를 하더라도 분무 후에는 반드시 멸균된 천으로 닦아야 한다. 효율적인 살균 및 소독을 위해 제조사에서 권장하는 시간이 경과한 후 멸균된 천으로 한 번 더 닦는다면 더욱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다.
 아울러 가능하다면 손 소독제를 사용하기보다 손을 물로 자주 씻는 것이 좋다. 물이 없어 불가능한 경우에는 손 소독제를 이용하되, 물을 사용할 수 있는 장소로 옮겼을 때 씻는 것이 바람직하다. 판매 승인된 살균·소독제들의 작용 기전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지만, ‘살균·소독’이라는 최종 목적은 같다. 따라서 그 종류와 상관없이 눈과 입에 닿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p.58-59)

 

 현재 일본은 후쿠시마의 반경 20km를 지정하여 금지 구역으로 정했다. 그러나 두려운 것은 아직도 후쿠시마 원전에서 오염수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감당하지 못한 일본은 오염수를 태평양 바다로 흘려보내겠다고 주장한다. 정말 그들의 말처럼 인간의 건강에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일까? 충분히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을까?
 사고 발생 후, 10년이 지난 지금도 원자로에서 방사성 물질이 계속 공기 중으로 누출되고 있고, 방사능에 오염된 빗물과 원자로 밑을 흐르는 지하수도 여전히 태평양 바다로 누출되고 있다. 이 문제는 2021년 일본의 올림픽 개최와 맞물려 국제적인 이슈가 되기도 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인재였던 체르노빌 원전사고와 달리 천재지변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사고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후 처리에 인간의 실수가 보태어진다면 이는 명백히 인재로 보아야 한다. 도호쿠 지방의 농산물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먹어서 응원하자.’고 했던 가수 야마구치 타츠야는 2012년 3월에 세슘-137에 내부피폭이 되었다는 진단을 받았다. 일본은 기준치 이하라 문제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의 생애 동안 호흡기·음식물·피부를 통해 반복적으로 노출되어도 건강에 전혀 문제가 없는 방사능 농도 설정에 대한 과학적 근거자료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정보가 부족할 때는 일단 중단 또는 감소시키는 것이 독성학의 근간인 ‘사전예방주의 원칙’이다. 무사안일주의, 안전불감증, 간과, 이런 용어들이 초래한 건강 문제는 당연히 인재다. (p.106-107)

 

 우리의 강과 바다를 이렇게 심각하게 오염시키고 있는 미세플라스틱은 어디서부터 흘러온 것일까? 사실 자연 상태에서 발견되는 미세플라스틱들은 대부분 플라스틱 제품이나 그 파편이 마모되어 발생한 것들이다. 이들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미세섬유’다.
 미세섬유? 섬유가 플라스틱이라고? 언뜻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명백한 사실이다. 앞서 플라스틱의 용도를 설명할 때 ‘합성섬유’를 예로 들었다. 요즘의 우리 옷은 합성섬유로 만들어진 제품이 대부분이고, 세탁기에 넣어 세탁하는 과정에서 옷 한 벌에 약 1,900개 이상의 미세섬유가 쏟아져 나온다. 더 큰 문제는 세탁기가 이를 충분히 걸러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탁량과 세탁기의 크기와 비교해 여과 필터의 용량이 너무 적어서다. 세탁기의 이런 문제점을 간파한 프랑스는 2025년부터 판매되는 모든 세탁기에 미세플라스틱 필터를 의무화하는 법안을 2020년에 마련했다. 국내 글로벌 가전업체들이 프랑스에 세탁기를 판매하려면 이런 조건을 갖춰야 할 텐데, 부디 수출만 하지 말고 국내에서도 판매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데 대체 얼마나 많은 미세섬유가 세탁기에서 흘러나와 바다로 가고 있는 것일까? 영국 노섬브리아대학교 연구진이 기업과 협력하여 수행한 연구내용을 2020년 6월 과학 저널 〈PLUS ONE〉에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매일 쓰레기 트럭 2대 분량에 해당하는 13,000톤의 미세섬유가 유럽 지역 바다에 버려지고 있다고 한다. (p.168-169)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경험한 국가다. 제품 판매를 승인하는 과정에서 소비자에게 발생할 수 있는 노출 시나리오가 충분히 고려되지 못한 것이 주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고통은 고스란히 제품을 구매한 소비자의 몫이 되었다.
 2020년 8월 7일 기준으로 확인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는 1,558명이었으며, 정부에 피해 신고를 한 사람만 해도 6,833명이었다. 2020년 7월 27일,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는 가습기살균제 사용으로 인한 건강 피해 경험자가 약 67만 명에 달하며, 사망자는 약 1만 4,000명으로 추산된다고 발표했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도 전무후무한 화학물질에 의한 참사이자, 화학물질에 대한 케모포비아가 대중 사이에 공공연하게 자리를 잡게 된 계기였다. (p.179-180)

 

 코로나19 팬데믹 시대에 살균·소독제를 현명하게 사용하는 방법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살균·소독제는 공기 중에 뿌리지 말고 가구, 식탁, 테이블 등 단단한 물체 표면에 분무한 후 반드시 걸레(행주)나 티슈로 닦아내자. 또한 강산성, 미산성 염소계 살균·소독제는 증발하는 과정에서 인체에 해로운 산가스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밀폐된 공간에서 사용하지 말고 사용 후에는 반드시 충분한 환기를 해야 한다.
 둘째, 물로 손, 입, 코 주변을 자주 닦자. 물로 닦을 수 없다면 손소독제를 사용하되, 손소독제를 바른 손으로 입이나 코, 눈 등을 만지지 않는다.
 셋째, 계면활성제의 기능은 임계미셀농도에서 개시되고, 그 반응의 크기도 거의 최대에 이르는 것으로 관찰되고 있다. 또한 이 농도는 온도, 습도, 이온 존재 여부 등 다양한 조건에 의해 변화할 수 있다. 따라서 살균제와 소독제는 혼합해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인체에 대한 유해성 또한 임계미셀농도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어서다. 만약 살균·소독제를 두 가지 이상 사용해야 한다면 혼합하지 말고 번갈아 사용하도록 하자.
 넷째, 제품 사용설명서에 기록된 사용법을 반드시 지키자. 용량을 더 넣는다고 해서 효과가 커지는 것은 아니다.
 다섯째, 선별진료소 등에 근무하는 의료진과 소독을 위해 근무하는 직원들은 살균·소독제에 대한 노출 고위험군이다. 관련 종사자들이 충분한 휴식을 통해 폐기능 손상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재정적·행정적 조치가 필요하다. (p.186-187)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원한 건 무병장수였으나 현실은 유병장수가 되었다. 편리함과 윤택함을 위해 개발된 새로운 화학물질이 환경을 오염시키고, 그 환경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건강을 해치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휴지통을 장악한 일회용 플라스틱 컵들과 필수품이 된 마스크, 새벽 배송이 많아진 시대에 늘어나는 스티로폼 박스와 아이스 팩들, 심지어 우리들의 실험실에서 배출되는 일회용 피펫이나 팁, 튜브 등 플라스틱 쓰레기들은 끝도 없이 쏟아진다. 쓰레기 매립 문제가 국제적인 이슈나 분쟁의 소지가 되어가는 요즘, 차라리 저 멀리 우주 밖으로 던져버릴 수는 없을까 싶을 정도다.
 현재 몇몇 지역에서 운영되고 있는 환경성질환센터에서는 아토피 피부염, 천식, 알레르기 등을 주로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의 모든 만성 질환이 환경성 질환에 속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곧 환경이 오염되면 결국 우리 모두의 건강에도 부정적인 영향이 미치고, 이와 반대로 환경이 깨끗해지면 유해물질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워져 건강한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뜻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생각보다 아주 단순하다. 단지 작은 실천이 필요할 뿐이다.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기 전에 오존층의 파괴를 먼저 걱정하고, 미세먼지로 인한 폐 질환을 걱정하기 전에 그 발생원을 감소시키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 세제 사용량을 줄이고, 전자제품과 자동차의 교체 시기를 늘리고, 옷 소비를 줄이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전기 사용량을 줄이고, 플라스틱 사용량을 줄이는 것이 모두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그렇다고 환경오염을 막기 위해 지금 쓰는 가방을 버리고 친환경 소재로 만든 가방을 구입하는 것은 환경을 지키는 바람직한 행위가 아니다. 새 옷보다 지금 옷장에 있는 옷을 오랫동안 예쁘게 입도록 하자. 커피전문점에서 판촉 행사로 사용하는 다회용 컵은 최소 4회 이상, PP텀블러는 최소 50회 이상 사용해야 환경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깨끗한 환경 속에서 우리와 우리 자손의 건강이 지켜질 수 있다. 유해물질이 가득한 쓰레기로 범벅이 된 지구를 유산으로 물려줄 수는 없지 않은가? 바로 오늘 이루어진 우리의 노력만이 안전한 미래, 안전한 세상을 만든다. (p.220-221)

 

 신기술과 신산업의 발달로 새로운 화학물질이 평균 27초에 1개씩 미국 화학물질 등록시스템에 등록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2030년까지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에 등록될 물질 수는 대략 7,343종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많은 화학물질의 유통은 ‘물질안전보건자료’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신규 화학물질의 개발 속도보다 유해성을 평가하는 시간이 너무 오래 소요된다. 결국 충분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생산 및 연구 현장에서 유통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나노물질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국가 차원의 나노 소재 기술개발 사업을 시행하는 중이다. 나노물질은 원료가 동일해도 제조과정에 따라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최종 산물이 만들어질 수 있다. 물리·화학적 특성이 다르다는 것은 독성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규제 및 관리를 위한 가이드라인도 이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
 여기서 가장 안타까운 사실은 산업 성장 및 기술개발에 초점을 맞춘 국가 정책으로 안전성 검증에 필요한 인프라 확보가 어렵다는 것이다. 옛말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있다. 전쟁 후 급성장한 경제 발전 속에서 환경오염 문제는 어두운 그림자로 남아 그 부담은 고스란히 우리 자손들에게 전가되었다.
 물론 기성세대에게도 변명할 여지는 있다. 먹고살 길이 막막하던 시절, 가족들을 먹여살리는 데 집중한 나머지 미래 세대에게 또 다른 부담이 전가될 수 있다는 것을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우리는 이미 많은 국내외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소비자의 안전을 확보한 제품을 만드는 것만이 기업의 지속적인 성장을 보증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경험은 미래를 위해 쓰여야만 한다. 기업은 이제 제품의 안전성에 대한 충분한 검증을 위해 적극적으로 투자해야만 한다. 그리고 정부는 기업들이 요구하는 안전성 검증에 필요한 전문가 양성과 시설 확보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독성전문가는 초고령화 사회에서 급격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성 질환과 환경성 질환의 예방과 환자 관리를 위한 정책 수립, 더 나아가 직업성 질환의 예방과 제품의 안전성 확보를 위한 국가 경쟁력 강화까지 국민 건강 및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일군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p.231-233)

 

 새로운 화학물질의 등장은 신기능의 제품과 직결되는 경우가 많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해당 제품 고유의 특성과 기능을 더욱 높이거나 부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기능은 분명 소비자에게 유익할 수 있다. 반면, 노출 시나리오를 반영한 건강 영향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채 판매된다면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가습기살균제 사건’이다.
 유공(SK케미칼, 현 SK디스커버리)은 1994년에 가습기살균제 ‘가습기메이트’를 처음 출시했으며, 옥시, LG생활건강, 애경산업 등도 유사 제품을 연달아 생산·판매하기 시작했다. 특히, 옥시는 상표에 ‘아이에게도 안심’이라는 문구를 넣어 소비자들을 안심시켰다.
 이들 제품에는 PHMG, PGH, MIT/CMIT(제품명, Kathon), BKC 등의 화학물질이 사용되었으며, 판매가 금지된 2011년까지 18년여 기간 동안 총 43여 종의 가습기살균제가 약 998만 개 이상 팔려나갔다.
 놀라운 것은 1991년 미국 환경보호청(EPA)이 MIT/CMIT를 2급 흡입독성물질로 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제품의 개발부터 판매까지 흡입독성에 대한 검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이 또 있었다. 토끼를 대상으로 한 ‘안구 독성 실험’에서 그 독성이 매우 심각하다고 판명되었음에도 제품설명서에는 독성이 가볍다고 기재했다는 사실이다. SK케미칼 직원들은 이에 대해 ‘단순 실수’라고 해명했다고 한다.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0년 7월 17일 기준 제품 사용으로 인한 사망자가 1,553명이고, 건강피해 경험자는 67만 명에 이른다. 단지, 호흡기 건강을 위해 마트에서 구입한 제품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1,500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했다.
 화학물질의 독성은 다양한 노출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호흡기로 유입될 수 있는지, 눈이나 코에 닿아도 문제가 없는지, 각 연령층 모두에게 안전한 것인지 모두 확인해야만 최소한의 안전성 검증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가습기도 차가운 물을 그대로 사용하는 제품과 가열하여 따뜻한 수증기를 분출하는 제품이 있다. 화학물질이 어떤 상태에서 어떤 경로를 통해 인체에 유입될 수 있고, 또 그렇게 유입된 화학물질이 어떤 독성을 유도할 수 있는지에 대해 충분히 고려되지 않는다면 안전성 검증이 완벽하게 이루어졌다고 말하기 어렵다. (p.238-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