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과학이 필요하다 / 플로리안 아이그너 / 갈매나무
괴델이 불완정성 정리로, 수학이 어느 때라도 와르르 무너질 수 있는 불안정하고 구멍이 숭숭 뚫린 구조물임을 입증한 것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논리학이 늘 옳지는 않다고, 또는 정확한 증명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결코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괴델이 참인 명제나 거짓인 명제 따위가 정말로 존재하는지 의심했던 것일까요? 아니지요. 그랬더라면 그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학자가 아니라 오래전에 잊힌 괴짜가 되었을 겁니다.
예나 지금이나 참인 진술이 있고 거짓인 진술이 있습니다. 평면 위에 있는 정삼각형의 모든 각은 60도라는 진술은 참입니다. 48이 소수라는 진술은 거짓이고요. 둘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진술에 괴델수를 부여하여 상황이 더 복잡한 진술도 기호로 표시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것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증명된 진술은 괴델 이전이나 이후에나 마찬가지로 확고부동한 사실입니다. 참인 진술에서 새로운 진술을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경우 이 새로운 진술 역시 참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참이지만 결코 증명할 수 없는 진술도 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수학에서는 놀랍도록 많은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소수가 무한히 많다는 것도 증명할 수 있지요. 하지만 증명을 찾을 때까지 오랜 세월 그냥 추측으로 남는 것들도 있습니다.
가령 ‘2보다 큰 모든 짝수는 두 소수의 합이다’라는 진술은 소위 ‘골드바흐의 추측’이라 불리며 오래전부터 추측으로 남아있었습니다. 6은 3 더하기 3이고, 8은 5 더하기 3이며, 24는 13 더하기 11이지요. 수십억 개의 짝수를 두 소수의 합으로 나타내는 방법을 최소 한 가지 이상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추측이 무한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에 통하는지는 오늘날까지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젊은 시절 다비트 힐베르트는 골드바흐의 추측이 모든 짝수에 적용되는지, 아니면 어떤 수에 이르러서는 그 추측에 위배되는지를 증명하는 일은 그저 시간문제일 따름이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런 증명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잘 압니다.
이를 멋지게 생각하든 슬프게 생각하든 그건 개인 취향입니다. 괴델의 결과는 수학의 품격을 결코 떨어뜨리지 않으며, 수학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늠하는 우리의 시각을 더 예리하게 다듬어 줍니다. 천문학이 우리에게 그 빛이 결코 도달할 수 없기에 우리가 볼 수 없는 별이 많다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이미 알려진 별들에 대한 지식을 평가 절하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인식을 통해 우리가 앞으로 어떤 지식을 기대할 수 있는지, 영원히 어둠 속에 남을 지식은 무엇일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따름입니다. (p.83-85)
관찰을 기록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학문이 아닙니다. 팩트 자체는 지루합니다. 그것이 진실일지라도 말입니다. 병의 진행을 관찰하고 메모하는 사람, 딱정벌레를 수집하여 그들에게 라틴어 이름을 지어주는 사람, 별들의 위치를 측정하고 긴 수열로 그것을 적어 내는 사람은 자연의 장부를 기록한다고 할 수는 있지만 자연 과학을 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자료들의 연관과 패턴을 알아채고 많은 관찰로부터 단순한―데이터를 그저 열거하는 것보다 훨씬 짧고 함축적이며 유용한―과학 법칙을 깨달을 때, 비로소 기록은 흥미로워집니다.
관찰에서 자연 법칙으로, 실험에서 이론으로 나아가는 걸음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엄밀히 말해 걸음이 아니라,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가 뒤로 한 발 물러나는 복잡한 춤입니다. 자연에 시선을 주면 우리는 새로운 이론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습니다. 동시에 우리 머릿속 이론이 자연을 바라보는 눈에 영향을 미칩니다.
팩트에서 이론으로의 발전은 우리가 어떤 실험을 수행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서 이미 시작됩니다. 측정 가능한 모든 데이터가 정말로 흥미로운 것은 아닙니다. 저는 값비싼 측정 도구와 정밀한 방법을 동원해 제 양말 무게가 달의 위상이나 우간다의 은세네네 덤불 귀뚜라미 수에 따라 변화하는지, 둘 사이에 연관이 있는지를 규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관찰을 통해 우주에 대해 뭔가 의미 있는 것을 배울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사람은 없을 테지요. 이런 관찰로 그다지 얻을 게 없다는 점을 어떻게 알까요? 그 점을 간파하려면 이미 우리 머릿속에, 무엇이 무엇과 연관되며 틀림없이 무엇과는 연관되지 않는지 말해 주는 이론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결과를 평가할 때도 우리가 믿는 이론들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측정하거나 관찰하거나 계산한 결과를 정말로 믿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보아하니 분명 무언가 잘못되었으므로 그것들을 그냥 곧장 폐기해 버려야 할까요? (p.104-105)
가장 흥미로운 것은 귀납법입니다. 귀납적 추론 역시 논리적 정확성을 따지자면 신뢰할 수 없습니다. 제가 오래전부터 관심 있게 보아온 까마귀들이 모두 검은색이었다고 하여, 내일 새빨간 까마귀가 제 창틀에 둥지를 틀고 저를 빤히 쳐다보며 비웃는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이 세상 모든 까마귀가 어느 순간에 비밀 명령을 받은 것처럼 검은 깃털 옷을 하나같이 다 떨구어 버리고, 그 아래 돋아난 새로운 하늘색 깃털 옷을 내보일지 누가 알겠습니까?
귀납법은 경험적 지식에 근거합니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경험적 지식은 신뢰하기 어렵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다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개별 사례를 바탕으로 귀납적으로 일반 규칙을 추론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지극히 평범한 일이지요. 우리는 특정한 약이 도움이 되는 여러 환자를 보면서 그 약에 효험이 있다고 추론합니다. 새로운 기계를 시험 가동할 때마다 그 기계가 우리 의도대로 작동하면, 그것을 제대로 만들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어느 작가의 책을 여러 권 만족스럽게 읽고 나서는, 이 사람이 정말 대단한 작가이고 앞으로 쓰는 책들도 우리 마음에 들 거라고 판단합니다. 관찰 횟수가 늘어날수록 우리의 명제가 옳을 가능성이 더 크게 느껴지지요. 그리고 어느 순간 모든 의심은 사라지고, 우리는 그 명제를 신빙성 있는 사실로 여깁니다.
우리는 왜 그토록 귀납적 추론을 신뢰할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그것이 입증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늘 개별적인 경험에 근거하여 일반적인 규칙을 도출했으며, 이것은 대부분 잘 통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다시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미래에도 잘 통할 새로운 규칙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상정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귀납적인 결론이지요. 우리는 정확히 이런 방법을 활용하면서 논리적 추론의 유효성을 변호하는데, 이것이 불굴의 논거는 아닙니다. (p.119-120)
어떤 가설에 반박 가능성이 있는가 하는 것은 과학을 유사 과학이나 비과학과 구별하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누군가 우리를 붙들고 감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세계 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유니콘이 사는 영적인 세계가 있으며, 그 세계에서는 유니콘들이 숨겨진 차원에서 보내오는 비밀 메시지를 받는다며 열심히 썰을 푸나요? 그런 말들은 전혀 반박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이론을 살펴보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바보짓이지요. 유니콘이 그 어딘가에 발자국이라도 남길 수 있어야 비로소 그 이론은 흥미로워집니다.
점성가들의 모호한 예측, 돌팔이 치료사들의 병을 낫게 해 준다는 예언,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굳은 약속을 남발하는 동기 부여 트레이너들의 진부한 조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강연을 듣거나 코치를 받은 뒤 우리가 성공하면 그것은 트레이너들 덕분이고, 우리가 성공하지 못하면 그것은 우리의 의지가 강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무슨 일이 일어나든 기본 명제는 반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로써 그런 명제들은 학문적인 의미에서는 가치를 상실합니다. 언뜻 볼 때는 반박거리가 없어 보이는 바로 그 점이 그 이론을 완전히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p.135-136)
피터 웨이슨은 다른 실험으로 이런 경향을 더 분명히 보여 주었습니다. 이번에 웨이슨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수열의 규칙을 알아맞히는 과제를 내었는데, 우선 2-4-6이라는 수열을 제시하고, 이 수열이 자신이 생각한 규칙을 따르는 예라고 말해 주었지요. 그러고는 이제 참가자들더러 숫자 세 개를 말하게 하고, 세 수가 자신의 규칙에 맞는지 안 맞는지를 확인해 주는 방식으로 참가자들이 규칙을 알아맞히도록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2-4-6이라는 수열에서 금방 패턴을 인지하고 4-6-8이나 8-10-12처럼 비슷한 수열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수열들도 규칙에 맞는다는 대답을 들었지요. 그러자 많은 사람이 곧바로 올바른 규칙을 찾았다고 확신하고는, 웨이슨이 생각한 규칙이 ‘연속된 세 짝수’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웨이슨은 그건 자신이 생각한 규칙이 아니라고 답했고요.
피터 웨이슨이 생각한 수열의 규칙은 사실 훨씬 단순했습니다. 정답은 (홀수든 짝수든 상관없이) 그냥 작은 수부터 아무거나 세 개를 나열한 것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3-7-28도 맞고, ‘-1, 파이, 6 곱하기 10의 23승’도 맞지요. 하지만 참가자들은 대체로 여기서도 역시 자신이 생각한 가설을 확인해 주는 예들만을 테스트했습니다. 확인을 우선시하는 테스트를 ‘긍정 테스트’라고 합니다. 그러나 같은 열심을 발휘하여 자신의 가설을 반박할 수 있는 예들을 찾는 것이 더 영리합니다.
몇 번 수열을 제시한 뒤 연속되는 세 짝수가 규칙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의식적으로 이런 가정에 위배되는 수열을 테스트해 보는 게 좋습니다. 가령 3-5-7처럼 말입니다. 그런 부정 테스트의 결과가 정말로 부정으로 나오면, 모든 것이 예상대로이고 자신의 가정이 맞는다는 믿음이 확고해집니다. 그러나 3-5-7이라는 수열이 기대에 반하여 역시나 규칙에 맞는다면, 거기서 중요한 것을 배우게 됩니다. 이 경우 ‘아하! 연속되는 세 짝수가 규칙이 아니구나’ 하고 깨닫게 되지요. 자신의 가설을 확인해 주는 긍정 테스트만 해서는 그 점을 결코 알아낼 수가 없습니다. (p.139-141)
위르뱅 르 베리에는 아이작 뉴턴과는 다른 나라, 다른 시대 사람이었지만, 자연 과학 연구에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르 베리에와 뉴턴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고, 서로 호감이 있었는지 역시 아무래도 좋습니다. 계산이 잘못되었을 때 서로 다른 언어로 신경질을 부린다는 것도 중요하지 않고요. 둘은 수학의 언어를 완벽히 숙지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르 베리에는 미지의 또 다른 행성에 대한 명제를 연구하기 위해 뉴턴의 공식을 활용했습니다. 뉴턴은 오래전에 고인이 되었으나, 그의 생각은 학술적으로 이해 가능하게 서술되어 다른 연구자들의 머리에서 계속 살아 움직였지요. 과학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생각을 전달해 줄 수 있습니다. 영국인이 간파한 자연 법칙으로 프랑스인이 행성 궤도를 계산하고, 두 독일인이 그 정당성을 검증해 내고야 맙니다. (p.149-150)
과학 혁명과 정치 혁명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군중이 깃발과 횃불을 들고 왕궁을 습격하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오는 이유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그저 그런 소소한 세부 사항을 조율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황제가 법무부 장관에게 넥타이를 바꿔 매게끔 하고 고양이 사료 가격을 낮추겠다고 제안해 봤자, 야유하는 군중들은 별로 시답잖아할 것입니다.
혁명은 규칙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꾼다는 뜻입니다. 민중이 왕궁을 불태우고 공화국을 선포하며 대통령을 선출했을 때, 누군가가 “아, 그러니까 대통령이 새로운 왕인 셈이군”이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혁명을 이해하지 못한 셈이지요. 대통령은 왕과 완전히 다릅니다. 새로운 규칙은 옛 규칙의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다른 개념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종종은 옛 시스템을 새 시스템과 비교하기가 힘듭니다.
과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전에는 별 의미가 없었을 아주 새로운 질문들이 제기되곤 합니다. 특정 원자가 방사성 붕괴를 거쳐 다른 원자로 변화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현대 양자 물리학으로는 그 확률을 계산할 수 있습니다. 원자는 영원불변하다고 믿었던 19세기 화학자들이나 고대 그리스 최초의 원자론 신봉자들 앞에서 이런 질문을 제기했다면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원자 붕괴’와 같은 단어를 입에 올렸다면, “얼른 집으로 가서 일단 원자론의 가장 중요한 기초부터 공부하고 와!”라며 지청구를 들었을 테지요.
하지만 과학 혁명과 정치 혁명 사이에는 차이도 있습니다. 과학 혁명은 대부분 피를 흘리지 않고 일어납니다. 무기가 동원되는 경우는 거의 없지요. 누군가가 스스로를 물리학의 군주로 선언하며 앞으로 어떤 자연 법칙을 지켜야 할지를 선포한 예도 아직 없고요. 또한 패러다임 전환은 비밀스러운 공모와 모의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어납니다.
과학 혁명에서는 패러다임 전환이 언제 마무리되는지도 이야기하기 힘듭니다. 모든 새로운 개념을 불필요한 허섭스레기 정도로 여기며, 대학 강의실에서 오래전에 반박된 패러다임을 계속 설파하는 꽉 막힌 사람들이 늘 존재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 봤자 다음 세대는 새로운 사고 패턴을 자연스럽게 넘겨받아 자라납니다. 그리하여 몇 년 뒤에는 이런 젊은이들이 강의실로 들어가, 예전엔 불필요하다고 여겼던 이론을 이제는 자명한 것으로 정립하여 다음 세대에게 전수하지요.
새로운 패러다임은 꼭 모두가 새로운 견해를 확신하기 때문이 아니라, 옛 견해의 신봉자들이 더 젊은 사람들로 대체되기 때문에 관철됩니다.
가끔은 노벨상 수상식이 아니라 오히려 이론의 장례식이 과학 발전에 기여합니다. (p.176-177)
유감스럽게도 다음과 같은 오해가 놀랄 정도로 만연해 있습니다. “계속해서 변하는 과학을 믿을 순 없지! 우리의 모든 지식이 언제든지 반박될 수 있다면, 과학적 인식들을 어떻게 신뢰하겠어. 오늘 우리가 200년 전에는 과학적 진리로 여겨지던 생각들을 비웃는다면, 지금으로부터 200년이 흘러 후손들도 지금의 과학 지식에 황당해하지 않을까?”
아닙니다.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과학이 변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수십 년간 1밀리미터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일관적인 게 아니라, 십중팔구 죽은 상태입니다. 과학과 반대로 몇백 년간 전혀 변하지 않은 신념 체계들이 있지요. 하지만 이런 신념 체계들은 과히 신뢰할 수 있는 것이 못 됩니다.
가령 점성학은 여전히 고대 바빌로니아 시대 때처럼 1년을 12개의 별자리로 나눕니다. 그 후 지축이 이동하고 별자리가 밀려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또한 맥 탐지자들은 몇백 년 전과 동일하게 여전히 점 지팡이로 수맥이나 광맥을 찾지요. 강령술과 심령술에 활용되는 위저 보드는 1891년에 특허가 출원되었는데, 그 이래로 강령술에 발전이라 할 만한 사건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에도 옛날에 쓰던 것과 같은 형태의 위저 보드가 판매되고 있습니다.
이런 안정성은 신념 체계가 든든하다는 표시가 아닙니다. 변화가 없다는 점을 높이 사서 미신이나 유사 과학을 신뢰한다면, 이는 변치 않는 시간을 가리키는 고장난 시계를 믿는 것처럼 의미 없는 일입니다.
완전히 거짓으로 입증할 수 있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저는 제 책상 서랍에 초콜릿이 하나 들어 있다고 굳게 확신하면서 서랍을 엽니다. 그러나 서랍이 비어 있음을 확인하고 실망하지요. 이로써 저의 초콜릿 명제는 반증되고, 전혀 쓸모가 없어지면서 단번에 버려지고 잊힙니다. 반면 검증할 수 있는 많은 진술을 제공하고 이미 성공적으로 테스트된 바 있는 중대한 이론에는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이론의 ‘반증’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조심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이론이 한계에 봉착했다고 하여 그 이론이 거짓이 되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기여하는 바가 있고 유용한 결과들을 제공한다면, 그 이론은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입니다. 과학 혁명에서 더 정확하거나 더 포괄적인 이론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옛 이론이 곧장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일은 없습니다. (p.179-180)
우리가 궁극적인 ‘세계 공식’을 찾아낼 수 있다면, 자연 과학 전체가 수학처럼 논리정연해지는 걸까요? ‘세계 공식’을 토대로 한 발 한 발 물리학에서 화학을 거쳐 생물학에 이르기까지 차례차례 자연 과학 이론 전체를 정확히 증명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그럴 수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수학과 다른 모든 자연 과학은 기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완벽히 정확하게 돌아가는 건 수학뿐이지요. 수학에서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고 해서 결코 무언가를 생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자연 과학에서는 단순하게 하고 누락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것이 과학의 원칙입니다.
행성 궤도를 계산할 때 원자핵에서 어떤 힘이 작용하는지는 우리에게 별 상관이 없습니다. 그에 대해 골머리를 싸매는 것은 과학적 실수일 테지요. 우리는 행성 궤도를 마치 원자가 없는 것처럼 단순화하여 계산합니다. 하지만 이는 모델을 더 나쁘게 만드는 단순화가 아니라 모델을 더 좋게 만드는 단순화입니다. 근삿값을 구하고 대략 어림하고 단순화하는 것은 좋은 과학의 요건입니다. 이것은 무마해야 할 흠이 아니라 경축해야 할 강점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과학을 완전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계 공식’, ‘모든 것의 이론’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선반을 벽에 고정하려 할 때 완전한 진리 따위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과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도구를 우리 손에 쥐여 주기 위해 존재할 뿐이지요. 이런 도구들이 완벽할 필요는 없습니다. 완벽에의 요구를 높이 끌어올릴수록 일이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p.220-221)
많은 위대한 과학적 발견은 처음에 작은 이상 현상으로 시작했습니다. 기묘한 것이 눈에 띄는데, 측정상의 오류거나 착각에서 비롯되었으려니 합니다. 밤하늘에서 빛나는 점이 예상과는 약간 다르게 보이거나, 어디에선가 안테나가 석연치 않은 무선 신호를 포착하지요. 또 어딘가에서 평균적으로 예상보다 조금 더 빠른 회복세를 보이는 환자들이 관찰됩니다.
새로운 효과가 탄생할 때 그것은 종종 아주 미세하고 약하고 별것 아닌 듯 보입니다. 그런 효과는 애정과 노력을 담아 크게 키워야 합니다. 하늘의 광점을 더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 더 좋은 망원경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무선 신호를 명확히 살펴보기 전에, 안테나에서 깨끗한 수신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제거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특정 약물이 놀랍게 잘 듣는 환자군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환자 데이터를 더 정확히 확인해야 할 수도 있지요. 그러고 나면 후속 연구 단계에서는 다른 환자군을 누락하고 정확히 이런 환자군을 주시할 것입니다. 그러면 더이상 작은 효과가 아닌, 아무도 왈가왈부할 수 없는 분명하고 큰 효과가 갑자기 나타납니다.
전기가 기묘한 현상으로 느껴져 모두가 고개를 갸우뚱하던 시대에 이탈리아의 연구자 루이지 갈바니는 개구리 다리로 실험을 했습니다. 개구리 다리는 전기를 흘리면 움찔하고 움직였지요. 직관만을 도구로 사용했다면, 전기는 오늘날까지도 그저 미신적인 현상으로만 여겨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학자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열심히 연구하여 이런 현상을 더 정확히 관찰하고,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고, 배후의 중요한 법칙을 수학 공식으로 정리해 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늘날 전등빛 속에서 편리하게 생활하고, 전기레인지도 사용하고, 전동 칫솔로 양치질도 할 수 있지요.
과학을 하는 사람은 진보를 보고자 합니다. 오늘 희미하게 보이는 현상은 내일 혹은 미래엔 부인할 수 없이 명백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반면 미신이나 신비주의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냥 모호한 감으로 신비로움을 발견하는 데에서 만족하고 그칩니다.
과학은 닫힌 시스템이 아닙니다. 과학은 계속 넓어지고 새로운 인식들을 받아들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과학과 미신이 대결하면 과학이 이길 수밖에 없지요. 미신적인 주장이 과학적으로 반박되거나, 아니면 미신적인 주장이 사실로 확인되어 과학적 진실로 편입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과학이 옳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옳은 것이 과학이 됩니다. (p.234-235)
무언가를 연구하기 위해 우선은 어떤 조건이 미치는 효과가 없다고 가정합니다. 이것을 영가설(null hypothesis, 혹은 귀무가설)이라 부릅니다. 초콜릿 실험의 경우 영가설은 초콜릿이 체중 감량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두 집단 모두 기대되는 체중 감량은 동일하지요. 그럼에도 마지막에 순전히 우연히 두 집단 중 한쪽의 평균 체중이 더 많이 빠졌다고 나타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이 차이가 순전히 우연이라면, 실험에서 관찰되는 차이가 이렇게 우연히 발생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입니다. 연구 결과를 의미 있는 진실로 선포하기 전에 이 확률을 무조건 계산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현상이 우연히 나타날 확률을 종종 ‘p값(p-value)’이라 일컫습니다.
초콜릿을 먹은 집단의 참가자들이 다른 집단의 참가자들보다 다이어트 기간 마지막에 평균 12밀리그램 더 체중이 줄었다고 하면, 그 결과는 그다지 유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정도의 차이는 우연히 나타날 확률이 아주 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두 그룹 사이의 차이가 적으면 p값이 커지고, 두 그룹 간의 차이가 크면 p값이 작아집니다. p값이 작은 경우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한 것일 수 있어서, 영가설을 기각하고 실험 결과를 ‘통계적으로 유의미’하다고 볼 수 있지요.
우리가 매일매일 제기하는 추측 중 많은 부분은 이런 통계적 유의미성(유의성)의 장벽을 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할머니가 특별히 만들어 준 기침에 잘 듣는다는 차를 마시고는, 기침이 평소보다 이틀 먼저 사라진 것처럼 느낍니다. 그리고 화분 식물에 2주간 미네랄워터로 물을 주고는, 식물들이 더 푸르러 보인다는 인상을 받지요. 무척 흥미롭지만, 순전한 우연으로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계산해 보면 통계적 유의미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나올 것입니다. (p.240-241)
이런 효과로 말미암아, 우리가 접하는 연구 결과 중 다수는 거짓말이 됩니다. 상상을 해 봅시다. 여기 검증해야 하는 1000가지 명제가 있습니다. 가령 그것이 살 빼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1000가지 식품이라고 합시다. 그리고 그중 100가지는 실제로 효과가 있는 식품이라고 해 보지요. 다른 900가지는 원래 체중 감량 효과를 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순전한 우연으로 인해 때로는 이런 효과 없는 식품을 섭취한 그룹의 체중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p값이 5퍼센트 이하로 나오는 모든 결과를 ‘통계적으로 유의미’하다고 치면, 이런 900가지 식품에 대한 연구에서 우연히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결과가 나올 확률이 5퍼센트입니다. 즉, 약 45개 식품에서 그런 결과가 나옵니다. 게다가 진짜로 효과가 있는 식품들에 대한 연구에서도 오류가 빚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정말로 효과가 있는 100가지 식품 중 90가지가 효능이 있다는 결과로 나오고, 10개가 효능이 없는 것으로 나온다고 합시다.
자, 이제 종합해 보면 총 135가지 식품이 살 빼는 데 효과가 있다고 인정받습니다. 하지만 그중 90가지만이 실제로 효과가 있지요. 이런 연구 결과들이 공개되면, 체중 감량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발표된 135가지 식품 중 45가지가 사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도움이 되는 것처럼 와전되고 맙니다. (p.245)
단순해 보이지만, 사실 상관성과 인과성을 혼동하는 오류는 놀랄 만큼 자주 벌어집니다. 그리하여 위험한 선입견을 만들어 내고 극심한 인종 차별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사람들을 피부색에 따라 분류한 다음, 어떤 그룹이 가장 높은 빈도로 대학을 졸업하고, 어떤 그룹이 가장 높은 빈도로 감옥에 들어가는지를 연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는 인종 간에 되돌릴 수 없는 타고난 차이가 있음이 수학적으로 확실히 증명되었다며 으스댈 수 있지요.
하지만 그것은 통계적 방법을 활용한 세련된 거짓말과 다름없습니다. 실제로 단순한 상관성을 발견했을 뿐, 인과성을 발견한 것은 아니지요. 어찌하여 피부의 멜라닌 색소 양이 지능이나 폭력 성향에 인과적 영향을 미치는지 아무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반면 사회적 지위, 부모와 조부모의 수입, 혹은 사회적으로 뿌리 깊은 차별이 일생 동안 성공의 기회를 좌우한다는 사실에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할 것입니다. 인과적 연관은 바로 여기에 있고, 이 연관은 다양한 연구에서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증명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과학은 단순히 연관을 감지하는 것이 아니라 연관을 설명하는 학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관찰로 만족해서는 안 되며 논리적 이음매를 찾아야 하지요. 원인과 결과를 서로 연결하는 이론을 개발해야 합니다.
이것은 어떤 분야에서는 더 힘듭니다. 공중으로 던진 돌이 포물선을 그리며 다시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이유를 논리적·인과적으로 설명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복잡한 사회적 혹은 정치적 사안들을 논리적으로 분류하고, 명확한 인과적 연관을 분별해 내는 것은 훨씬 어렵지요. 그럼에도 그렇게 하려고 해야 합니다. 분야를 막론하고 모든 과학의 목표는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검증된 관찰을 토대로 새로운 생각을 논리적으로 기존의 커다란 망 안에 통합할 때에야 비로소 과학은 진보합니다. (p.249-250)
한 연구 분야에서 주로 활용하는 방법을 그 분야와 거리가 떨어진 분야에도 적용하는 짓은 무의미합니다. 이웃한 과학 분야를 서로 연결하는 것은 중요하지요. 그러나 서로 다른 문제는 서로 다른 도구를 필요로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학계에는 서로 다른 분야의 학자들이 서로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전통과 문화가 팽배한 듯합니다. 특정 전문 분야에서 훈련을 받고 나면 자기 분야의 규칙을 당연시하면서, 다른 분야 사람들이 아주 다른 규칙을 활용하는 모습을 보면 경멸적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젓곤 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심리학이나 사회 과학은 소수점 이하 다섯째 자리까지 규정하는 정확한 예측을 해낼 수 없다는 이유로 자연 과학자들이 사회 과학자들을 비웃는다면, 무척 잘못된 일입니다. 심리학이 물리학보다 정확한 예측을 내어놓지 못하는 것은 심리학자들이 자연 과학자들보다 멍청하거나 수학 수업을 덜 들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학에서는 물리학과는 비교도 안 되게 복잡한 대상을 연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학문이 다루는 대상은 원자·톱니바퀴·행성과는 달리 수학 공식으로 잘 정리가 안 됩니다.
자연 과학은 사회적·역사적·문화적 맥락과 전혀 무관하게 단순히 벌거벗은 수만 제시한다는 이유로 사회 과학자들이나 정신 과학자들이 자연 과학자들을 비웃는다면, 그 역시 잘못입니다. 자연 과학이 사회 과학보다 더 객관적인 것은 자연 과학자들이 사회 과학자들보다 멍청해서 사회 문제를 도외시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연 과학이 누군가가 어떤 시대에 어떤 상황에서 발언했는지와 무관하게 정확하고, 신뢰성 있고, 참인 진술만을 허락하기 때문입니다. 핵무장 정책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상관없이 핵물리학 공식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점에 놀라지는 말아야겠지요.
자연 과학자들은 어떤 주제들은 단지 문화적·역사적·정치적 맥락에서만 논의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정확한 답을 찾을 수 없는 학문적 질문도 있지요. 그럼에도 그런 질문을 연구하는 학문은 가치 있고, 연구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인식들은 소중합니다.
사회 과학자와 정신 과학자들은 자연 과학이 어마어마한 정확성과 신뢰성만을 허락한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영원히 믿을 수 있는 답이 존재하는 학문적 질문도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다른 방법을 선호하지만, 그럼에도 학문에서 우리 모두는 동일한 망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리학과 사회학, 화학과 심리학은 서로 경쟁 관계가 아닙니다. 다른 분야에 몸담은 사람들이나 그들의 방법을 나쁘게 말하는 데에서 그 누구도 이익을 얻지 못합니다. 사실 우리는 같은 목표를 추구합니다. 우리 모두 세상을 더 잘 이해하고자 하지요.
우리는 태양이 왜 빛나는지, 대륙이 왜 움직이는지, 포유류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인간이 왜 그렇게 복잡한 종인지를 알려고 합니다. 이 모든 질문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p.272-274)
과학은 책이나 학술 논문에서만이 아니라, 연구자들이 쉬는 시간에 커피를 마시면서 나누는 이런저런 두서없는 잡담에서도 나타납니다. 한 교수가 퇴근길에 그날 어떤 학생이 했던 기습적인 질문을 떠올립니다. 다시금 따져 보니 ‘언뜻 보기보다 그리 황당한 질문은 아니네?’라는 생각이 들지요. 과학은 이렇게도 이루어집니다. 국제 학회가 열리는 동안 전 세계에서 온 학자들이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어리숙한 농담과 새로운 생각들을 나누다 냅킨에 공식을 끼적여 봅니다. 늦은 밤까지 그렇게 하다가 오류가 어떻게 빚어졌는지 드디어 깨닫곤 하지요. 과학은 그렇게도 생겨납니다. 연구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머리를 맞댈 수밖에 없습니다.
뇌세포 단독으로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많은 세포가 하나의 뇌로 뭉칠 때에야 비로소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으로는 과학을 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의 망으로 뭉칠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과학이 탄생할 수 있습니다. (p.287)
우리가 과학을 얼마나 잘할 수 있는지 특기할 만합니다. 지난 세기에 학자들은 자신의 반생을 바쳐 어려운 문제를 숙고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세심하게 피력했습니다. 그렇게 발견된 수학 공식은 오래된 책들에 실렸고, 우리는 오늘날 필요에 따라 그 수학 공식을 취해서 계속 써먹을 수 있지요. 우리는 이 공식이 발견되기까지의 오랜 세월에 걸친 사고 과정을 반복하지 않아도 됩니다. 선배들이 생각을 멈추었던 곳에서 바로 시작하면 돼요. 이건 정말 엄청난 사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과학 서적을 이해하는 것도 만만치는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수록된 내용을 손수 발견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쉽지요. 우리는 고집스러운 착오와 화를 돋우는 측정상의 오류, 시간을 잡아먹는 헷갈림을 줄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빽빽한 원시림을 걸어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누군가가 앞서서 길을 개척해 놓으면 뒤따라 가는 사람은 훨씬 편해집니다.
그리하여 과학은 다음과 같이도 정의할 수 있습니다. 과학은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공유된 진리입니다. 과학이란 다른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지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연구를 할 때 우리는 자신의 눈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전에 같은 질문에 천착했던 모든 이의 눈을 함께 활용합니다.
오늘날 학교 교과서에 실린 내용들을 알아내기 위해 뉴턴, 다윈,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들은 얼마나 애를 써야 했던가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들보다 영리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후배로서 그들보다 훨씬 더 폭넓은 과학 교육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기에 그들보다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습니다. 거인의 어깨 비유는 과학의 발전을 설명할 때 애용되는 비유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발을 디딘 거인이 그리도 커 보이는 것은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의 어깨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거인은 없고, 서로 키가 다른 난쟁이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피라미드만 있을 뿐인지도 모릅니다. (p.288-290)
우리는 진짜 전문성을 갖춘 경우와 반쯤 아는데 자신감이 넘치는 경우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언론에서 이것은 특히나 까다롭습니다. 미디어에서는 보통 양편 모두에게 동일한 발언권을 주기 때문입니다. 여당이 뭔가를 주장하면 야당이 자기들 시각에서의 반론을 제시하는 것은 중요하지요. 하지만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과 서둘러 급조된 직감 사이의 토론이라면, 그 둘을 동등한 자격으로 세워서는 안 됩니다.
텔레비전 쇼에서 아이들에게 위험한 질병에 대한 예방 접종을 해야 하는지 논의합니다. 주최측은 몇십 년간 관련 연구를 해 온 노련한 의사를 초빙했습니다. 옆에는 몇몇 사례를 들먹이며 예방 접종이 위험하다고 분노에 싸여 주장하는 백신 반대론자가 자리하지요. 둘은 같은 발언 시간을 부여받고, 모니터에도 똑같은 비중으로 비추어집니다. 기후학자들이 기후 변화를 부인하는 사람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토론하고, 정치학자와 음모론자가 마주 앉으며, 양자 물리학자가―에너지 보존 법칙을 깨뜨리고 영구 동력 장치를 만들겠다는―야심찬 아마추어와 동등한 자격으로 프로그램에 출연합니다.
여기서 어떤 가정·주장·명제는 애초부터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은 공정이 아니라 중대한 실수입니다. 모든 인간은 동등한 가치를 지니지만, 모든 의견이 동일한 가치를 지니지는 않습니다. (p.296-297)
하지만 우리는 과학사를, 앞선 시대를 살았던 우월한 거장들의 긴 반열로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고귀한 품위와 범접할 수 없는 지능을 가진 거장들이, 벽에 원목 패널이 대어진 연구실에서 거룩한 과학 문서들을 배출하고, 그다음 우리가 이 문서들을 고분고분 떠받드는 이미지는 과학과 거리가 멉니다.
과학의 진보는 한 세대에 한 번 천재가 세상을 뒤집는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대학을 없애고, 손에 꼽는 슈퍼 스타들을 위한 소수정예 집중 엘리트 교육 프로그램만 운영해도 되겠지요. 그렇게 하면 돈도 엄청나게 절약될 것입니다. 하지만 과학의 진보는 많은 똑똑한 사람이 여러 날카로운 질문에 관해 다양하게 정답을 찾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물론 빛나는 아이디어를 제시하여 과학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긴 천재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천재 한 사람의 옆에는 그와 비슷하게 똑똑한 인재로서 어느 연구소의 좁다란 방에 앉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연구를 수행했던 무수히 많은 연구자가 존재합니다. 과학의 커다란 돌파구는 시대가 무르익었기에 열리는 것이지, 세상에 구원자가 탄생했기에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작 뉴턴은 과학을 어마어마하게 진보시켰습니다. 하지만 뉴턴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이 이미 신뢰할 수 있는 천문학 데이터를 어마어마하게 수집해 놓은 뒤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자신보다 앞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해 낸 수학 개념들을 활용했습니다. 미적분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기에 스스로 개발해야 했지만, 사실 거의 같은 시기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도 미적분을 고안한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이작 뉴턴이 아니었다 해도 오늘날 우리는 적분 푸는 법을 알았을 것입니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은 생물학 전체에 혁명을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그 혁명 역시 빛나는 한 천재만의 소산물은 아니었지요. 1858년, 자신의 이론을 정리하던 다윈은 자연 연구가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로부터 편지를 받아, 그가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윈은 서둘러 이론 정리를 마무리해야 한다고 느꼈고, 부리나케 그의 유명한 저작 《종의 기원》을 써서 1859년에 출판했지요. 그러므로 다윈이 천재적이고 비중 있는 학자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가 없었다 해도 오늘날 학생들은 학교에서 진화론 수업을 들었을 것입니다. 다만 그것은 ‘월리스의 진화론’이라 불렸겠지만요. (p.300-301)
정치는 단순히 과학적으로 맞는 것들을 실행에 옮기는 일이 아닙니다. 다리 건설을 건축가에게 맡기듯 나라의 운영을 단순히 과학 전문가에게 위임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정치는 자유와 정의, 안전과 편익, 소수를 위한 큰 유익과 다수를 위한 작은 유익 사이에서 세심한 고민이 이루어지는 장입니다. 이런 고민을 해결해 줄 측정기 같은 것은 없지요. 어떤 수학 공식도, 물리학·생물학 실험도 어느 정치 이데올로기가 옳은지 말해 주지 못합니다.
물론 그럼에도 좋은 정치는 사실을 기반으로 삼아야 합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학문적 인식들을 알고, 진지하게 여기고,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러나 그렇게 하더라도 막상 정치적 결정을 내릴 때는 도덕·전통·문화 등등이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과학과 직감, 두 가지 모두 필요합니다. 이것은 정치에서나 다른 많은 삶의 영역에서나 똑같습니다. (p.315)
과학에서 선구적이고 위대한 아이디어는 누군가가 상품을 만들어 부자가 되고 경제 발전을 견인하려 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커다란 목표 없이도, 새로운 발견에 흥미가 있었기 때문에 탄생했지요. 과학의 가장 큰 유익은 지식 그 자체입니다. 아는 것이 언제나 모르는 것보다 낫습니다. 세계를 더 많이 이해할수록 더욱 영리한 결정을 내릴 수 있고, 그를 통해 비로소 진정 자유로운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지식이 없기에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면, 자유로울 수 없겠지요.
과학은 두려움을 없애 줍니다. 세계를 이해하면 우리는 자연의 무력한 장난감으로 살아가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진을 막을 수는 없지만, 지진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압니다. 따라서 지진이 났을 때 희생 제물을 바치지 않아서 크툴루가 노했나 봐, 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지요. 우리는 질병을 더이상 운명의 채찍으로 여기지 않고, 어떻게 치료할지를 숙고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시 내일 태양이 떠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엄포를 놓으면, 코웃음을 치며 넘길 수 있습니다.
과학은 음악·문학·회화처럼 아름다움을 만들어 냅니다. 어떤 교향곡도 세상의 굶주림을 끝내지 못하고, 어떤 그림도 병자를 치유하지 못하며, 어떤 시도 추운 데 가면 몸이 꽁꽁 어는 것을 막아 주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바보가 아닌 이상 예술을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과학도 예술과 비슷하게 멋집니다. 세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 주는 새 이론은 음악 작품처럼 우리에게 감동을 선사하지요.
자연을 더 잘 알면, 자연의 아름다움도 더 강하게 다가옵니다. 별이 빛나는 하늘을 올려다 보며 거대한 펄서와 블랙홀, 멀리 있을 외계 행성을 떠올리면, 별들을 그냥 단순한 빛의 점으로 올려다볼 때보다 훨씬 숭고한 기분이 들고, 마음이 몽글몽글해집니다. 예쁜 꽃도 그것이 우리와 동일한 원자로 구성되며 인간을 탄생시킨 것과 같은 진화사의 산물임을 알면, 더욱 놀랍고 아름답게 느껴지지요. (p.326-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