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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로 턴! / 우치다 타츠루 / 이숲

 

 ‘러다이트(luddite)’라고 들어보셨을 겁니다. 19세기 초 산업혁명에 반대한 영국의 노동자를 말합니다. 그들은 기계가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아가자 공장에 난입해 기계를 때려 부수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공장의 기계를 파괴한 자는 사형에 처하는, 너무 가혹한 정책으로 대응했지만, 그래도 러다이트 운동은 전국으로 번져나갔습니다. 고교 시절 세계사 시간에 러다이트 운동에 관해 듣고는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계 따위는 부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까요. 기계는 감정도 의지도 없는 그저 가치중립적인 도구일 뿐입니다. 기계 발명은 인류 지성의 성과로 기계 자체를 증오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리버풀에서 실제로 방직기계를 보자 러다이트의 기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불길하고 사악한 얼굴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시스템 작동을 멈추려면 자본가의 책상을 점령해 장부나 서류를 찢어버리면 그만입니다. 혹은 공장법 제정 운동을 펼쳐 노동자법을 정비해도 될 겁니다. 그런데도 러다이트는 기계에다 분노를 쏟아냈습니다. 기계가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각건대 엔지니어들은 무의식 중에 ‘분노를 자아낼 수 있을 정도로 의인화한 기계’를 만들어 버린 겁니다. (p.9-10)

 

 강제적이지만 금융경제 말고도 성숙한 사회에서 경제성장을 실현할 방법이 있습니다. 성숙한 사회를 미성숙한 사회로 되돌리는 겁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자력으로 구할 수밖에 없는 사회로 되돌아가면 되는 것이죠. ‘중세화’라고 부를 수 있겠는데, 그렇게 되면 소비활동이 살아납니다.
 성숙한 사회를 없애는 간단한 방법은 전쟁입니다. 사회 기반 인프라가 전부 파괴되겠죠. 철도가 사라지고, 도로는 유실되며, 통신망이 끊깁니다. 또한, 댐이 무너져 수돗물이 공급되지 않고, 병원과 학교는 문을 닫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복구하거나 아예 모든 걸 다시 만들어야겠죠. 내전 중인 나라가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라면 미래라도 헐값에 팔아치워 당장이라도 손에 넣어야 합니다.
 그런데 전쟁처럼 극단을 달리지 않아도 되는 해결책이 있습니다. ‘준중세화’로 전환하는 방법입니다. 지금까지 누구나 똑같이 받을 수 있었던 공공서비스를 상품화하는 것이죠.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 전부를 시장에서 사고팔 수 있게 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자연환경, 상하수도, 교통·통신망, 전기, 가스, 교육, 의료, 치안, 소방 등 사회공통자본을 무상으로 혹은 저렴한 비용으로 누리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공통자본은 공공에서 관리하며 기본적으로는 사유화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물과 공기를 사유화한다든가 도로나 경찰을 사유화해 그런 서비스가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받고 제공하는 일은 허용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볼리비아에서 수도를 민영화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수도회사는 요금을 인상했는데, 너무 올려 종국에는 수도요금이 노동자 평균 월수입의 25%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분노한 시민이 “물은 상품이 아니다.”라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많은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영화 007 시리즈 「퀀텀 오브 솔러스」의 소재가 된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본래 사유화하면 안 되는 것을 사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준중세화’입니다. 근대 시민사회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공적으로 관리해 모든 시민이 똑같이 누릴 수 있게 함으로써 성립됐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부정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은 ‘수익자 부담’ 원칙을 적용합니다. ‘원한다면 돈을 내라’는 규칙으로 전환하는 것이죠. 이미 교육과 의료 분야에서는 그런 ‘준중세화’ 전환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p.24-26)

 

 부유층은 양질의 교육과 의료 및 치안 서비스를 누리지만, 빈곤층에게는 어려운 일입니다. 실제로 이런 상황이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조지아주 풀턴 카운티 샌디스프링스 이야기입니다. 부자들이 많은 곳인데, 그들은 자신이 낸 세금이 빈곤층에게 투입되는 걸 자신의 손해로 여겼습니다. 결국, 그들은 주민투표를 통해 카운티에서 독립했습니다. 아울러 합리화를 명목으로 행정 서비스와 경찰·소방 시스템을 자신들에게만 충실히 제공되도록 해놓았습니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큰 폭의 절세 혜택을 받게 됐고, 동시에 쾌적한 주거환경을 확보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와 달리 풀턴 카운티 나머지 지역은 세수가 줄어들어 병원과 학교가 문을 닫게 돼 삶의 질이 한순간에 나빠지고 말았습니다. 전기요금 절약을 명분으로 가로등도 꺼버려 치안 상태가 악화했습니다. 샌디스프링스 주민은 풀턴 카운티 나머지 지역의 공공 서비스 질이 나빠진 것이 그들 책임이라고 말합니다. 교육이나 의료, 치안 서비스를 무상으로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은 언감생심이며 원한다면 돈을 내라는 겁니다.
 공공 서비스도 ‘상품’이며 돈이 없다면 교육, 의료, 경찰, 소방 등 서비스가 열악해지더라도 감수해야 한다는 샌디스프링스의 사고방식에 많은 미국인이 동조했습니다.
 이런 선례에 따라 행정구역을 독립하려는 부유층의 움직임이 지금 미국 전역으로 확산하고 있습니다. (p.26-27)

 

 아베 정권 이후 정치의 주식회사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총리 측에서 상정한 법안은 실질적 심의가 이뤄지지 않은 채 대부분 국회를 통과합니다. 국회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죠. 야당이 아무리 강경하게 반대하더라도 위원회는 법안 체결을 강행하고, 본의회가 열려도 찬반토론은 의례적일 뿐 기계적으로 다수결에 부칩니다. 법안의 중요성이 크면 클수록 심의다운 심의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최근 2년간 벌어진 국회 심의 과정을 보면 누구라도 이제 ‘국회는 국권의 최고기관이 아니고, 국민의 뜻을 대표하여 국가의 위상을 논의하는 장’이 아니라는 인상을 받을 겁니다. 이제 국회는 심의의 장이 아닙니다. 일본은 민주주의 국가이며 입헌정치가 이뤄지고 있다는 알리바이를 위한 ‘정치쇼’ 무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입법부의 형해화(形骸化)는 어느 정도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이 본회의장에서 졸고 있다거나 스마트폰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다거나 하는 태만한 모습을 인터넷 공간에 거침없이 떠돌게 하는 것이 전형적 수법이죠. 국회의원이 ‘일을 제대로 안 한다’고 인식하게끔 조작하는 데는 웬일인지 우파 매체든 좌파 매체든 일치단결하고 있습니다. 미디어가 연일 전하는 뉴스는 국회의원 추문이나 수뢰, 공금 유용 등 자질을 의심케 하는 내용뿐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보도를 접하면 ‘국회의원이 되면 타락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원래 품위도 없고 윤리적이지 못한 인간만 국회의원이 된다’고 인식하게 됩니다. 일면으로는 분명히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유권자는 허망함을 느끼겠죠. 그러나 정당 지도부가 변변찮은 인물만을 굳이 후보로 내세워온 결과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p.47-48)

 

 입법부의 위상 저하와 무력화로 국가권력 최고기관은 입법부에서 행정부로 바뀌었습니다. 얼마 전 총리가 국회에서 “나는 입법부의 수장”이라고 실언했죠. 프로이트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내가 입법부의 수장’이라는 확신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낸 겁니다.
 행정부가 입법부와 사법부 위에 있고, 사실상 그 두 가지 기능을 대행하는 정치체제를 ‘독재’라고 부릅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하는 사실은 독재체제가 반드시 혁명이나 쿠데타로만 성립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입법부의 위상이 사라져 국민이 ‘입법 기능은 끝났다’고 판단하는 시점에서 독재체제는 자동으로 성립합니다.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프랑스의 페탱 정부도 모두 “논의했지만 더는 국민적 합의점에 도달할 수 없게 됐다. 따라서 긴급 대책으로 행정부에 전권을 이관한다.”라는 민주적 의사 결정 과정을 통해 성립했습니다. 국민의 합의 형성 기관으로서 국회가 무능하고, 지도력과 비전을 상실했음을 인정할 때 민주제는 끼워팔기식으로 독재체제로 넘어갑니다.
 다수가 오해하는 듯해서 말씀드리지만, 민주제와 독재는 대립 개념이 아닙니다. 독재의 대립 개념은 민주제가 아니라 공화제입니다. 공화제란 일시적인 열광이나 인기에 휘말려 나라의 근간 정책이 변경되지 않게 하는, 다시 말해 사안이 좀처럼 쉽게 결정되지 않게 설계한 정치체제입니다.
 또한, 민주제는 독재와 모순 관계에 있지도 않습니다. 얼마든지 민주제에서 독재로 변할 수 있죠. 그렇다고 행정부가 내놓은 정책이 연이어 성공해 국민적 지지를 받아야 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독재로 가는 데 필요한 것은 입법부의 위상 전락, 그것 하나로 충분합니다.
 실제로 지금 일본 정부가 내놓는 정책은 대부분 실패하고 있습니다. 외교는 물론 내정에서도 중요 정책은 ‘참담한 실패’와 ‘변변찮은 성과’ 사이 어딘가에 있습니다. ‘무능하다’는 행정부에 대한 평가는 그나마 나은 쪽에 속합니다. ‘국정 홍보’ 기관으로 전락한 언론을 통해 정치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정부 정책이 모두 대성공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입법부에 대한 국민의 인식은 그저 ‘무능’ 정도가 아니라 ‘무의미’입니다.
 ‘무능’하다는 평가에는 능력을 더 발휘해달라는 요구가 포함돼 있습니다. 반면에 ‘무의미’하다는 평가는 다릅니다. 국회 따위는 사라져도 상관없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그런 여론이 조성되고 있습니다. 총리 측에서는 전력을 다해 국회 심의가 얼마나 무의미한 과정인지를 널리 드러내려 하고, 그런 전략은 차근차근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입헌정치와 민주주의가 살아남으려면 국회가 기능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특별히 제가 국회 심의를 거친 훌륭한 정책이 계속해서 실현되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만, 그런 일을 떠나 총리 세력이 상정하는 법안이 국회 심의 과정에서 간단하게 통과되지 않고, 또 모든 사안이 간단하게 결정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p.57-59)

 

 일본의 연금제도와 관련해서 “노인들에게만 유리하고 젊은이들에게는 불리하다. 노인들을 쫓아내고 우리만의 연금제도를 만들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얼핏 들으면 합리적인 것 같지만 그런 사고로는 상호부조 공동체를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젊은 세대만의 공동체’ 역시 ‘준 몫’과 ‘받을 몫’이 정확하게 일치하기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강자 연합’도 구성원들이 점차 늙어가고, 병들거나 파산하거나 해고당하거나 이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원을 받을 시기는 ‘받을 몫’이 ‘준 몫’보다 많은 때입니다. 또한, ‘강자 연합’은 ‘공동체에 기생하는 무임승차자를 배제한다’는 규칙에 동의한 사람들이 만들었기에 자신도 역시 ‘받을 몫’이 ‘준 몫’을 넘어서는 순간, 배제된다는 조건에 동의해야 합니다. 따라서 ‘강자’만의 상부상조 조직은 쇠약을 거듭하다가 결국 구성원이 아무도 남지 않게 됩니다.
 공동체 내부에서 재화나 서비스 교환을 상거래처럼 생각하면 왜 안 되는지 그 이치를 조금은 이해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 필요한 사회제도 모든 것은 선대의 선물입니다. 본래 국민국가도 그런 규칙에 따라 운영됐을 겁니다. 되도록 손실 없이, 되도록 풍족하게 후세에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국민국가의 주류를 차지했던 시기에는 삶의 촉감이 좀 더 부드럽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일본을 보면, 권력과 재화는 물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누리는 자들이 자신이 누리는 것을 선대의 선물로 여기지 않고, 또 그것을 다음 세대에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손에 넣은 모든 건 자기 노력으로 얻은 것이고, 그것을 누리거나 처분할 권리도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뭐가 아쉽다고 나의 재능과 노력으로 이룬 성과를 남들과 나눠야 하느냐.”라며 목에 핏대를 세우는 인간이 성공인이랍시고 대중매체에서 인기를 끄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들처럼 주식회사의 논리를 깊이 내면화한 사람은 안타깝지만 공동체를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사회제도, 언어, 학문, 종교, 생활문화 등 모든 것이 선대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자력으로 얻은 건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되도록 온전한 형태로 미래세대에 넘겨줘야 합니다. (p.70-71)

 

 정확하게 말하자면 도시의 회사에 취업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가 됐을 정도로 고용시장이 무너졌습니다. 급여 수준은 줄곧 제자리고 취업에 성공해도 비정규직이 태반인 데다 인건비 상승을 억제하려는 기업의 운영방식 때문에 언제 해고될지 모르죠. 야근은 물론이고 휴일 출근도 당연한 일이 됐습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몸과 마음을 바쳐 업무에 전념한다고 해서 앞날이 보장되지도 않습니다. 일본경제의 앞날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상장회사도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상황에서 정년까지 일한다는 건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혼자 살면서 임금노동을 하는 청년 일인 가구라면 더욱 리스크에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혈연이나 지연으로 이뤄진 공동체가 없는 도시에서는 쌓아놓은 돈이 없다면 아프거나 실직했을 때, 한순간에 노숙자로 전락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 기억으로 전후 70년간 이 정도로 사회안전망이 흔들린 적은 없었습니다. 사회안전망을 헌법이 법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헌법 25조에서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문화적으로 최소한의 생활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라고 규정하듯이 생존권에 바탕을 둔 사회복지와 사회보장제도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현재 인터넷 언론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생활보호 수급자 때리기’에 발 벗고 나섰습니다. 빈부격차로 ‘생존권’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생활보호 대상자가 늘어나는 상황인데도 마땅히 누려야 할 생존권을 부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가난은 자기 책임이다!” 길거리에 나앉게 된 책임은 본인에게 있으니 세금을 쏟아부어 구제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재능이 없으면 노력이라도 하라’면서 말이죠. 다시 말해 자신이 번듯한 집에서 호의호식하는 건 자기가 노력한 덕분이므로 자기가 거둔 결실을 나눠주고 싶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미국 자유론자의 논리를 어설프게 흉내 내면서 분노하는 자들이 일본 사회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당 정치인과 정권에 기생하는 논객들이 사회보장제도 덕택에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을 처벌하고 그들의 특권을 뺏으라고 하면, 인터넷 여론이 갈채를 보내는 시대가 된 겁니다. (p.110-112)

 

 자본주의 경영은 한마디로 ‘비용의 외부화가 어디까지 가능할까’를 궁리하는 일입니다. 공장이 오염수를 바다로 내보내고, 배기가스를 대기로 방출하는 것은 공해 대책 비용의 외부화입니다. 교통 인프라 정비 같은 일을 행정적으로 요구하는 것도 유통 비용의 외부화입니다. 원자력발전소 가동을 요구하는 것도 제조비용 외부화의 일환입니다. 글로벌 인재육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재육성 비용을 ‘대학’이라는 외부에 맡기는 겁니다. 이처럼 기업 활동에 필수적인 요소를 마련하는 데 드는 비용을 다른 누군가에게 억지로 떠넘기는 것이 비용의 외부화입니다. 그래서 기업은 농업경영에 필수적인 산림의 관리나 하천·해양의 관리, 교통 인프라 정비에 드는 비용을 내지 않을 겁니다. ‘그것은 행정이 해야 할 일’이라든가 ‘그런 일은 세금으로 해야지’ 또는 “그러라고 법인세 내잖아.”라고 내뱉으면서 말이죠.
 그렇게 농업이 가능하도록 환경을 정비하는 데 드는 비용을 전부 다른 곳에 떠넘기면서 영리 목적의 농업에만 전념한다면 확실히 개별기업으로서는 최소한의 이익을 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실제로는 지금까지 농업종사자들이 무임금 노동으로 맡아왔던 비용을 자사의 이익으로 대체했을 뿐입니다. 비용을 외부화한 것이죠.
 ‘강한 농업’이란 생산성이 높은 농업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인건비를 들이지 않는 사업을 의미합니다. 원리적으로 봤을 때 강한 농업은 해당 지역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내지 않죠. 광대한 농지에 농사꾼은 없고 기계가 돌아가는 상태가 강한 농업의 이상입니다. 그렇게 일하는 사람이 사라지면 현지의 소비활동은 위축되겠죠. 기업을 유치해봤자 고용 창출 효과도 없고, 지역경제에 보탬도 되지 않는다면, 행정 쪽에서도 ‘사기업을 위해 그렇게까지 세금을 투입할 수 없다’는 말을 꺼냅니다. 그러면 기업은 ‘그렇다면, 그만두겠습니다’라면서 사업을 철수합니다. 그 시점까지 투자한 돈을 회수하고 남은 돈이 단 1엔일지라도 기업적으로는 성공일 테니까요. 남는 건 황폐해진 산하와 아무도 없는 경작 포기 농지뿐입니다. (p.138-139)

 

 살아가는 데 근간이 되는 필수 서비스가 차례로 상품화하여 시장에 투입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공동체 내부에서 종종 무상으로 서로 도우며 이뤄졌던 육아, 교육, 의료, 돌봄 서비스를 시장에서 사고팔 수 있게 됐습니다.
 사람이 살아갈 때 필요한 모든 것이 가격표를 달고 시장에 나와 있으니 돈만 있으면 누구나 살 수 있습니다. 돈만 있다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시장에서 살 수 있으니 어떤 의미에서 편리하기도 합니다. 돈 버는 일에만 집중하면 될 테니까요. 이보다 살기 좋은 세상이 없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돈 없이는 살아가는 데 필수적 지원조차 받을 수 없다는 말도 됩니다. 과거에는 삶의 질을 높이고자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친족이나 친구와 신뢰를 쌓아왔습니다. 어른스럽거나 정의롭거나 남을 잘 돌볼 수 있다면 집단 내부에서 편히 지낼 수 있었죠. 그런데 그런 것들이 돈의 유무로 대체된 겁니다.
 편안한 삶을 누리는 데 필요한 조건이 돈으로 일원화되는 것은 무서운 현상입니다. 급속하게 격차를 한쪽 방향으로 확대하기 때문입니다. 일정한 기간에 1만 엔을 100만 엔으로 늘리는 일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지만, 1억 엔을 1억 천만 엔으로 늘리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100억 엔을 101억 엔으로 올리기는 더 간단하죠. 하지만 늘어난 금액 자체만을 따지면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돈을 가진 사람이 더 쉽게 부자가 됩니다. (p.149-150)

 

 집에서 하는 ‘밀실 육아’에는 많은 스트레스가 따르지만, 공동육아의 장이 있다면 육아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저런 이벤트도 있습니다. 가이후칸의 젊은 남자 문하생들도 놀러 갔다가 아이를 달래거나 기저귀를 갈아주기도 합니다. 지금 일본에서 미혼 남녀가 육아를 접해볼 기회는 거의 없습니다. 난생처음 안아보는 아기가 바로 자신의 아기인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렇다 보니 육아는 당연히 힘들고 스트레스가 많은 일로 여기게 됩니다.
 가능하다면 많은 사람이 일찍부터 다양한 성격의 아기를 접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면 공동육아는 단순히 육아라는 짐을 여럿이 나눠 지는 것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육아의 기회를 접함으로써 한층 더 인간적으로 성숙해진다는 교육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원래 특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미래 세대를 육성하는 일은 집단이 맡아야 할 사업이지, 부모 개인이 전적으로 도맡을 일이 아닙니다. 그런 상식을 회복해야 합니다. (p.153-154)

 

 저의 견해로는 지역에 뿌리내린 상호부조 공동체가 대안입니다. ‘확대가족’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확대가족은 커트 보니것의 『슬랩스틱』에 나오는 아이디어입니다. 소설 속 화자는 ‘간단하고 실용적인 고독 퇴치 계획’을 내세워 미국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그는 모든 국민에게 ‘새로운 미들네임’을 붙이자고 제안합니다. 미들네임으로 ‘꽃, 과일, 열매, 채소, 콩, 새, 파충류, 물고기, 연체동물, 보석, 광물, 화학물질’ 등의 이름에 1부터 20까지의 숫자를 하이픈으로 연결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우라늄-3’라는 미들네임을 가진 사람은 ‘우라늄’이라는 미들네임을 가진 모든 사람과 사촌이 됩니다.

“이렇게 크고 거친 나라에서 살려면 되도록 많은 일가가 필요하다고, 우리는 방금 의견 일치를 보지 않았습니까? 예를 들어 말입니다. 만약 당신이 와이오밍에 가게 됐는데 그곳에 가족이 많다면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커트 보니것 『슬랩스틱』, 아사쿠라 히사시 옮김, 하야카와문고, 1983년, 179쪽)

 ‘이제 혼자가 아니야(Lonesome no more)’는 화자가 대통령 선거에서 사용한 슬로건입니다. 확대가족을 구성하는 조건이 ‘우연’이라도 상관없다는 데서 커트 보니것의 탁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도 친족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죠. 자라다 보니 사촌의 존재를 알게 된 거죠. 자기 의지와 전혀 상관없습니다. 그렇지만 사촌은 그 나름대로 친밀감도 있고, 곤란한 일이 생기면 발 벗고 도움을 줘 혈육이라는 걸 느끼게 합니다. (p.156-158)

 

 집단은 성원의 자질과 능력이 다양할수록 위기 상황에 강해집니다. 그런데 그런 집단의 구성원은 각자가 너무나 특이한 능력을 소유했기에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으로 이뤄진 집단은 최강입니다. 이는 논리적으로도 당연한 일입니다.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거치적거리는 동료를 내쳐도 자신은 손해 볼 일이 없습니다. 마음이 조금 아플지 모르지만, 동료에게 관심을 끊어도 자신은 곤란하지 않죠. 하지만 혼자서 살 수 없는 사람은 그러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동료를 지키려고 합니다. 동료가 떠났을 때 그를 ‘누군가가 대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집단이라면 한 사람이라도 외면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강인한 집단을 만들려면 강자 연합을 이루기보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고 믿는 약자를 모으는 편이 낫습니다. 인류학적 경험치도 그와 같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p.163)

 

 다시 격차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글로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교육에서도 격차가 발생합니다. 학교 교육을 ‘교육상품 구매’로 가정한다면 당연한 말이겠지만, 돈 있는 사람은 질 높은 교육을 받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교육 기회에서 멀어집니다. 경제적 격차가 교육자원의 분배 격차로 그대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본래 학교 교육은 시장에서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것과 성질이 전혀 다릅니다. 교육은 공동체의 미래를 짊어질 차세대 젊은이가 성숙한 시민이 되도록 지원하는 공동 활동입니다. 그들이 성숙해야 사회가 존속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학교 교육의 진정한 수혜자는 교육받는 자가 아니라 집단 전체입니다. 믿을 만한 다음 세대를 길러내지 못하면 공동체는 소멸합니다. 따라서 공동체는 젊은 세대가 교육받을 수 있게 온 힘을 다해 지원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일본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대부분 학력을 부동산이나 자동차, 옷과 시계처럼 ‘몸을 치장하는 상품’으로 여깁니다. 학력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죠. 그러다 보니 가난하면 교육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그런 빈곤층은 세금을 축내는 무임승차자라고 비난하면서 세금으로 그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건 부당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나날이 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고방식은 교육을 무너뜨리고 맙니다. 실제로 이미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p.164-165)

 

 지금 일본에는 한계집락과 준한계집락이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공개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지방정책의 기본방침은 그런 지역을 빨리 ‘소멸시키는 것’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한계집락을 유지하려면 행정 비용이 들기 때문이죠. 도로나 철도를 건설하고, 전기와 통신 서비스를 보급하고, 의료기관과 학교, 관공서를 세우면 유지·관리 비용이 발생하는데 지방세수로는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시장원리를 적용해 ‘주민이 적은 지역에서는 행정 서비스를 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릴 게 분명합니다.
 실제로 제가 사는 효고현에서 JR은 적자 노선을 계속해서 없애고 있습니다. 물론, 철로 주변 지역에는 아직 사람이 살고 있죠. 그래도 열차 운행은 채산성이 없으니 앞으로는 자동차를 이용해달라고 주민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도로도 손상될 겁니다. 터널 벽이 떨어져 나가거나 산사태로 도로가 유실돼 끊어지는 일이 반드시 일어납니다. 그러면 국토교통성은 철도 폐선을 정당화했을 때와 같은 논리로 “소수 주민 편의를 위해 세금을 투입해 공사를 벌이는 게 합리적이냐.”라고 말할 겁니다.
 “앞으로도 거기서 살겠다면 스스로 책임지며 살아라. 자력으로 도로를 깔고, 터널을 보수하라.”라는 의견에 해당 지역 주민을 제외한 많은 사람이 찬성할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인구가 줄어들면 ‘주거 불능’ 지역이 됩니다. 그런 지역에서 학교는 물론 의료시설도 사라집니다. 경찰서도 소방서도 없는 ‘문명권 밖’의 땅이 됩니다. 그런 지역에서는 불이 나도 끌 수 없고 범죄가 발생해도 경찰의 도움을 받을 수 없어 더는 사람이 살 수 없습니다. (p.177-178)

 

 식문화에는 굶주림에서 벗어나려던 인류의 고민이 집적돼 있습니다. 농업의 목적도 모든 연구도 기아 방지가 가장 큰 주제입니다. 그런데도 TPP 농업정책에서는 ‘어떻게 해야 기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같은 문제의식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농작물을 자동차나 컴퓨터, 의류 제품처럼 여깁니다. 제조비용이 가장 낮은 곳에서 생산해 시장가격이 가장 높은 곳에 판매하겠다는 생각뿐이죠.
 그렇게 생산원가를 낮추려고 광활한 토지와 노동자 임금이 저렴한 곳을 찾습니다. 환경법규가 미비한 후진국을 골라 농약을 마구 살포하죠. 환경오염이나 토양 파괴가 일어나도 개의치 않습니다. 그리고 단일작물을 상품으로 재배해 큰 이득을 얻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일본처럼 경작지가 협소하고 인건비가 높고, 환경규제가 까다로운 나라에서 농업을 하는 것은 경제적 합리성이 없다. 그러니 일본은 더 잘하는 분야에서 돈을 벌어 그 돈으로 중국이나 베트남에서 생산한 저렴한 농작물을 들여오면 된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잘하는 분야에서 돈을 벌어 값싼 농산물을 사들여 오다가 어떤 이유로 농산물 수입이 중단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과연 일본 농정은 어떻게 리스크를 분산할 수 있을까요? 저는 TPP 논의에서 ‘기아 리스크 방지를 위해 국내 농업 유지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도 그런 일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멕시코와 미국, 캐나다는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를 체결했습니다. 이에 따라 세 나라의 농작물 수입 관세가 단계적으로 폐지됐죠. 멕시코에 미국산 옥수수가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멕시코 국민은 멕시코산보다 값이 싼 미국산 옥수수를 구매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멕시코 옥수수 농가는 괴멸 수준의 타격을 입었습니다. 멕시코 사람은 자신의 주식인 옥수수를 자급할 수 없게 된 겁니다. 그런데 그 후 옥수수가 바이오매스 발전 연료가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옥수수 시장가격이 급등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멕시코에서는 미국산 옥수수를 살 수 없게 됐습니다. 주식을 먹을 수 없게 된 겁니다.
 농작물을 상품으로 간주하면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시장가격에는 매우 불안정한 구석이 있습니다. 외부적 요인으로 특정 농작물의 수요 증감에 따라 시장가격이 출렁입니다. 이처럼 단일재배는 리스크가 큽니다. 그래서 단일 농작물에 외화벌이를 의존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시장가격 변동과 상관없이 자국민의 기아 방지가 가능한 정도의 농작물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국내에서 생산해야 합니다. 사실 EU나 미국은 자국의 농업에 거액의 보조금을 쏟아 넣고 있는데, 기본적 이유는 ‘기아 방지’입니다.
 무엇을 위해 농업이 존재하는지 근본적인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시장경제를 따르는 식으로 농정을 펼치면 언젠가 우리는 실정의 대가를 다른 형태로 치르게 될 겁니다. (p.184-186)

 

 글로벌화가 진행되는 한편으로 국민국가 내부에서는 지역으로 분할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글로벌화에는 반드시 로컬화가 따릅니다. 국민국가의 구심력이 약해지면 지역의 독립 의지가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예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해체입니다. 인접 국가와 긴장 관계를 유지할 때는 인종이나 종교, 언어가 서로 다른 여러 지역이 하나의 국가 형태로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작은 차이를 버리고 한마음으로 뭉쳐 적을 대하는’ 전략이 실효성을 잃자, 이제는 서로의 차이를 구실로 분해해 버렸습니다. 티토 대통령 시절에는 ‘일곱 개의 국경, 여섯 개 공화국, 다섯 개 민족, 네 개 언어, 세 개 종교, 두 개 문자, 그리고 하나의 국가’인 다민족 국가를 내세웠지만, 티토 사후 각 공화국에서 내셔널리스트가 권력을 잡으면서 무참한 내전 상황으로 접어들고 말았습니다.
 스코틀랜드는 영국에서 독립하는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쳤습니다. 부결됐지만 찬반이 팽팽하게 맞섰죠. 하지만 영국의 유럽 공동체 탈퇴 후 스코틀랜드의 독립 열기가 다시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이탈리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 수준이 높은 북부는 가난한 남부와 분리돼 독립하려고 합니다. 자신이 낸 세금으로 남부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자신이 낸 세금은 자신을 위해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계속해서 늘어난다면, 더는 국민국가를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국민국가의 말기적 현상은 외교 차원에서 벌어지는 문제에서 비롯한 것만은 아닙니다. 내부의 국민 통합 공동화(空洞化)도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국민국가는 결국 ‘상상의 공동체’입니다. 국민의 귀속의식도 일종의 환상이라고 할 수 있죠. 역사 환경이 바뀌고 국민국가의 구심력이 약해지면 사람들은 ‘내가 도대체 어디에 속해있는지’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럴 때 자신과 밀접하게 이어진 뭔가를 찾게 됩니다. 종교나 언어, 의례나 제사 등 생활문화 같은 것에 매달립니다. 글로벌화와 국민국가의 액상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과정에서 ‘나는 어느 집단에 속하는지’를 결정할 선택지가 없고, 또 무엇을 기준으로 자신이 속할 집단을 정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광신적 배외주의나 인종차별은 바로 ‘나는 어떤 공동체 소속인지 모르겠다’는 초조와 불안이 빚어낸 현상입니다. (p.195-197)

 

 언젠가 혐한 기사로 재미를 보는 주간지 기자에게 ‘왜 그렇게 기사를 심하게 쓰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망설임 없이 ‘딱히 진심으로 쓴 건 아니다’라고 대답하더군요. 편집장이 쓰라고 해서 ‘그런 기사’를 썼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걸로 판매 부수는 늘어났다고 덧붙였습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입니다. 정말로 한국이나 중국이 싫다는 신념을 갖고 한국과 중국을 매도하는 기사를 썼다면 모를까(이것도 좋은 일은 아니지만) 자기 생각과 상관없는 기사를 ‘잘 팔린다’는 이유로 쓴다면 더는 저널리스트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변명만 하고 있습니다. ‘결국, 출판도 비즈니스다’ 혹은 ‘상부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다’가 대표적이죠. ‘돈과 권력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핑계를 대면서 품격 없는 행동을 모두 눈감아주고 있습니다. 앞에서는 ‘그런 일을 계속한다면, 내가 볼 때도 저널리즘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한다’며 솔직하게 고백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일을 그만두겠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나 혼자 안 한다고 미디어의 퇴보가 멈추지는 않는다. 나 혼자 정론을 외친다고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다. 차라리 시류를 따르는 게 속 편하다는 거죠.
 ‘그런 식으로 앞으로 5년, 10년을 계속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는 ‘생각해본 적 없다’고 대답합니다. 현실 파악 능력이 딱 그 정도 수준에 있어서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편집회의에서 혐한 소재는 이제 그만 다루자고 제안하면 상사는 이렇게 반응한다는군요. “그럼 대안을 가져와, 잘 팔릴 대안 말이야. 없으면 입 닥쳐!”
 최근 들어 ‘대안을 가져와’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졌더군요. 국회나 인터넷에서 정부 정책을 비판하면 “대안이 뭔데? 없으면 조용히 있어!”라고 합니다. 어떤 정책에든 ‘말도 안 된다’며 문제를 제기할 수 있지만, 그럴 때마다 대안을 내놓으라고 하면 곤란하죠.
 일반 시민 주변에는 기안을 마련해줄 관료나 주장을 대변해줄 국회의원 또는 자문받을 수 있는 지식인이 없습니다. 대안을 내놓으라고 한들 정부가 내놓는 정책 수준으로 완성도를 갖춘 대안이 나올 리 없습니다. 대안이 없으면 잠자코 있으라는 말은 ‘조정의 명령에 반항하지 말라’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더 좋은 생각은 없는지 좀 더 이야기하면서 함께 지혜를 모으고 서로 납득할 만한 ‘타협점’을 찾아보자는 겁니다. 이것이 가장 현실성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습니다. 함께 논의하고 지혜를 모으는 일이 뭐가 그리 괴롭다고 마다하는지 모르겠습니다. (p.215-216)

 

 지금 자율규제에서 가장 자유로운 매체는 라디오입니다. 저는 여러 해 전부터 간사이 MBS 라디오에서 아나운서 니시 야스시가 진행하는 「변방의 라디오」라는 부정기 프로그램에 정신과 전문의 나코시 야스후미 선생과 함께 출연하고 있습니다. 정규 방송이 끝난 심야시간대에 광고도 없이 내보내는 방송으로 말 그대로 변방에서 발신하고 있습니다만, 덕분에 정말 자유롭게 참여하고 있습니다. 어떤 말을 해도 트집 잡힐 일이 없죠.
 도쿄의 키국(Key Station) TV 뉴스 해설 프로그램 같은 데서 경솔한 발언을 했다가는 곧바로 총리 측 연락을 받을 겁니다. 그러면 방송국 고위층은 저런 녀석을 누가 불렀냐며 난리를 치겠지만, 라디오는 괜찮습니다(총리 측 누구도 라디오는 듣지 않으니까요). 정부라도 인적 자원에는 한계가 있죠. 설마 간사이 로컬 방송을, 그것도 정규 심야방송이 끝난 시간대까지 점검하겠습니까(해도 상관없지만, 업무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릴 겁니다).
 앞으로 미디어 생존 여부는 기동력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제작비가 적게 들어 대기업 광고 수주가 필요하지 않은 환경 조성과 소규모라도 안정적인 독자·시청자 확보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일이 미디어 운영에 관건으로 작용할 겁니다.
 지금까지 미디어는 규모가 클수록 유리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규모가 클수록 오히려 ‘조직 유지비’가 부담으로 작용합니다. ‘이런 기사라도 써야 팔린다’는 주간지 기자의 말은 요컨대 그들이 쓰고 싶은 기사를 외면하는 독자를 상대로 장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기자 자신이 쓰고 싶은 기사를 썼을 때 외면하는 독자를 상대하는 사업이라면 사업 계획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p.219-220)

 

 대체로 신문 구독자 중에는 고령자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충실한 독자라도 생물학적 한계로 계속해서 구독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신문의 질이 향상되더라도 종이신문에 익숙한 사람들은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제 주변만 봐도 40대조차 신문 구독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아래 세대는 말할 것도 없죠. 최근의 통계로는 10대의 신문 열독률(하루 15분 이상 신문을 읽는 경우)은 고작 4%입니다. 이 수치는 앞으로 점점 더 줄어들어 제로에 가까워질 테고, V자형 회복을 보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매일 수백만 부를 팔아야만 수지가 맞는 신문산업의 비즈니스 모델은 앞으로 10년 안에 무너질 겁니다. 물론 신문사는 본업 말고도 부동산 수입 등이 있어 당분간은 임대 수입이나 토지 매각으로 ‘독자 없는 신문’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는 있겠죠. 그러나 그것을 ‘저널리즘’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전국지 소멸’이라는 사회적 대사건을 전국지 자신은 전혀 보도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신문이라면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역사적으로 볼 때 어떤 맥락에서 일어난 사건인지, 문명사적으로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그나마 숨이 붙어있을 때 고민해야 합니다. 아울러 전국지 소멸로 사회는 어떻게 변할지, 그것이 부정적 변화를 가져온다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신문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와 같은 긴박한 국민적 질문을 마주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기사를 내는 신문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도 ‘모르는 척’만 하고 있습니다. 신문의 존폐가 달린 문제에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사고 정지 상태를 드러냅니다. 이처럼 비판 기능을 상실한 매체라면 미래가 없다고 봅니다. (p.221-222)

 

 내용의 진위 파악은 기계적으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 미국 매체들이 하는 ‘팩트체크’(공인의 발언 내용이 어느 정도 진실인지 따지는 행위)는 기자들이 수작업으로 합니다. 그래서 지극히 한정된 공인의 특정 발언에만 적용합니다. 원래 팩트체크에 방대한 인적 자원을 투입하는 일은 저널리즘의 본령이 아닙니다. 정치인이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관계없이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는 기본 윤리를 지킨다면 하지 않아도 되는 작업이죠.
 하지만 인제 와서 새삼스럽게 “거짓말은 하지 말아주세요”라고 말할 수도 없으니 우선은 자력으로 온라인상에서 오가는 정보의 진위를 판별해야 합니다. 불량 정보와 가치 있는 정보를 선별하는 메커니즘을 스스로 만들어야 합니다.
 방법이 있다면 ‘신뢰성 높은 1차 정보’를 발신하는 사람과 접촉해 직접 소스를 받아내는 겁니다. 물론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정치계에서는 그야말로 정부 부처 내부인이나 정당의 핵심 인물이 아니라면 그런 정보를 발신할 수 없을뿐더러 자칫하면 기밀누설로 몰려 처벌받을 위험이 있으니까요.
 더 현실적으로는 ‘1차 정보 발신자가 아니지만, 고급 정보를 아는 사람’을 접촉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내뱉는 말이 딱히 비밀 정보가 아니더라도 미디어 리터러시가 높으면 왕래하는 정보에서 ‘신뢰성이 높은 것’과 ‘정크’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을 ‘2차 정보의 허브’로 삼는 겁니다.
 미디어 리터러시란 정보의 진위를 판별할 정도로 사정에 밝은 것을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대부분 정보의 진위를 곧바로 알 수 있을 만큼 지식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국제정치나 경제의 미래도 마찬가지지만, 서평이나 영화평도 그것이 맞는 주장인지 아닌지 자기 지식을 바탕으로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충분한 지식이 없어도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 믿을 만한지 아닌지 정도’는 판단할 수 있습니다. 화제가 된 이야기의 진위나 평가 여부는 모르지만, 그걸 말하는 사람을 신뢰할 만한지 아닌지는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미디어 리터러시를 갖췄다는 건 지식이 많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식은 없어도 진위를 판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뭔가를 말하는 사람의 신뢰성을 가늠하는 것’인데 우리는 그동안 나름대로 남들과 의사소통 경험을 쌓아왔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p.229-230)

 

 제가 볼 때, 지나칠 정도로 ‘객관적 평가를 원하는’ 모습이 현재 젊은 세대의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재능 있는 청년일수록 평가받기를 열망합니다. 지역에서 성적이 좋고 인기도 많아 높은 등급을 받은 사람일수록 더욱더 ‘엄격한 평가’에 목말라합니다. 마치 기업이 신용평가회사에서 AAA 등급이나 AA 등급 받기를 바라는 듯이 그들도 점수를 받고 싶어 하죠. 같은 세대 100만 명 가운데 내가 몇 등인지, 어느 정도 직급과 연봉을 받을 수 있는지, 어느 정도의 생활 수준을 목표로 해야 할지, 어느 정도 수준의 배우자를 만날 수 있을지, 그런 모든 걸 궁금해합니다. 결과가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일단 알고 싶어 합니다. 자기 등급을 모르면 뭘 해야 좋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가 아니라 ‘뭘 해야 좋을지’, ‘뭘 목표로 삼아야 좋을지’를 알고 싶을 뿐입니다. (p.236)

 

 실제로 현대 일본 사회에서 활력이 사라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능력 있는 청년이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이미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는 분야에서 내 순위는 어느 정도인지’를 우선으로 고려합니다. 그 결과, 경쟁이 치열할수록 사회의 활기가 사라지는 역설적 현상이 빚어졌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등급 판정의 정밀도는 샘플 수량에 비례합니다. 같은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등급의 정확도가 높아지니까요. 따라서 정밀도가 높은 평가를 원한다면 ‘모두가 몰두하는 일’을 찾으면 됩니다. 예컨대 TOEIC의 경우 응시하는 사람이 많아서 평가의 정밀도가 올라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정밀도가 높은 객관적 평가를 바라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해당 집단의 다양성은 사라집니다. 규격화한 청년, 호환성이 높은 청년들만 넘쳐나겠죠.
 현대의 젊은이가 기질적으로 평범해서 규격화·동질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정확한 사회적 위치를 알고 싶어 하는 한결같은 바람으로 그들 스스로 다른 이들과 수치적 차이 이외에는 구분하기 어려운, 말하자면 개체식별 불능 상태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젊은 층의 일자리 환경이 열악해졌습니다. 사용자가 그토록 일방적으로 임금을 낮출 수 있었던 이유는 ‘고용 없는 경제성장’이라는 자본주의 말기 현상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런 추세에 젊은 노동자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는 데에도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 스스로 규격화를 수용해서 언제나 호환 가능한 노동자가 돼버린 탓이라 하겠습니다. (p.237-238)

 

 아이가 기울인 ‘노력’의 대가로 사랑과 긍정을 보내는, 마치 상거래 같은 육아 방법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부모를 종종 보게 됩니다. 확실히 그런 육아 방식이라면 어릴 적부터 아이에게는 ‘노력하면 얻을 수 있다’는 사고가 생기겠죠. 그런 아이들은 학교 시험 같은 단순한 ‘시련’에는 강합니다. 학교 성적은 들인 노력에 따라 결과가 나오니까요. 노력한 만큼 보상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이들은 ‘세상은 합리적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거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러나 현실 세계는 그렇게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노력과 성과가 일치하는 영역은 지극히 한정적이죠. 공부도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따라잡을 수 없는 천부적 재능의 벽’을 만나게 됩니다. 운동도 마찬가지로 고등학생이 국가대표급 선수와 맞서게 될 때 노력만으로는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연애나 취업도 마찬가지고, 출세나 사업도 똑같습니다. ‘노력해도 보람이 없는’ 때가 흔하고 ‘노력하지 않았는데(혹은 그렇게 보이는데) 보상받는’ 때도 있습니다.
 그런 좌절의 경험이 청년들을 ‘노력과 성과가 상응하는 경쟁’으로 향하게 합니다. 따라서 딱히 하고 싶어 하는 일은 아니지만, 노력한 만큼 순위에 오르는 단순 게임에 끌리는 거죠. (p.243-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