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 Read Code

 

8초 인류 / 리사 이오띠 / 미래의창

 

 우리는 더 이상 벗어나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돌이킬 수 없는 시스템 속에 들어와 있다. 오늘날 평균적인 사용자가 아이폰을 잠금 해제하고 사용하는 횟수가 하루에 약 80회, 1년에 거의 3만 회(지금은 이미 그 이상일 것이다)에 이른다는 애플의 데이터나 하루에 스마트폰을 만지는 횟수만 해도 2,617회에 이른다는 또 다른 연구의 결과는 더 이상 놀랍지 않다. 웹 전문가 니르 이얄(Nir Eyal)은 《훅(Hooked: How to Build Habit-Forming Products)》에서 스마트폰 소유자의 79퍼센트가 매일 아침, 잠에서 깬 후 15분 이내에 기기를 확인한다는 자료를 내놓았는데, 내가 보기에 이는 사실과 다른 것 같다. 실제로는 그보다 더 짧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내 경우에는 잠이 완전히 깨기도 전에 숨 쉬는 것처럼 자동적으로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둔 스마트폰을 집어들 뿐만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문자를 찍고, 눈을 제대로 뜨지 않고도 페이스북 앱을 열 수 있다.

 

 윌리엄스는 내게 “그 소프트웨어는 나중에 유튜브에서 제공하는 ‘추천 비디오’ 기능의 개선을 포함한 다른 프로젝트들에 사용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고 강력한 알고리즘이 화면 저 너머에서 내게 플랫폼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라고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플랫폼에서 나와 전원을 끄고자 하는 나의 의지와 온라인에 나를 계속 남아 있게 하려는 알고리즘의 대결은 이미 시작부터 진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온라인 시스템 전체가 그 같은 목표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소용돌이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페이스북 알림의 색깔도 우리의 관심을 더 많이 끌기 위해 고안된 것이고, 주소록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려주는 것도 호기심을 자극해 온라인에 더 오래 머물게 하기 위해서다. 평범한 글보다는 자극적이고 악의적인 게시물이 더 인기 있다(“분노는 다이어트 식단에 올라온 감자튀김 한 접시와 같은 것입니다.” 윌리엄스가 내린 최고의 한줄 평이다). 트위터의 ‘좋아요’ 버튼을 별 대신 빨간색 하트로 교체한 것도 고심하여 설계된 것으로, 클릭 수를 28퍼센트 올려주었다고 한다. 상징의 힘은 위대하며, 우리의 마음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나를 가장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책 중 하나인 《정리하는 뇌(The Organized Mind)》에서 신경과학자 대니얼 레비틴(Daniel Levitin)은 우리가 초당 120비트 정도의 인지적 처리 능력(우리가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정보 트래픽의 최대 속도 한계치)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범람하는 자극의 양에 비하면 말도 안 되게 낮은 수치다. “뇌는 하루에 제한된 양의 결정만 내리도록 설정되어 있으며, 일단 그 한계에 도달하면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우리는 더 이상 결정할 수 없다. 최근 신경과학계에서는 뇌의 의사결정 네트워크는 우선순위를 두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전례 없는 수많은 양의 정보에 노출되어 있으며,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정보를 생산한다”. 온라인에서는 초당 2,800만 권의 책에 해당하는 정보가 생산된다(이탈리아 최대 도서관인 피렌체 국립 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책의 3배에 달하는 규모다). 이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나에게 쏟아지는 모든 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더 이상 무능력하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1초당이다. 클릭 한 번 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우리의 뇌는 우선순위를 정할 줄 모른다. 위로가 된다.

 

 오늘날 우리는 만성적으로 산만한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교묘하게 다른 단어로 포장한다. 언어는 종종 우리를 속이는데, 우리는 그것에 정통으로 걸려들었다. 어떻게 그렇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역사상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산만함을 ‘산만함’이라 부르기를 그만두었다. 이 말의 근저에 깔려 있던 모든 부정적 의미와 함께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멀티태스킹(multitasking)’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컴퓨터의 기능에서 차용한 용어다. 마치 우리가 컴퓨터와 똑같은 존재인 것처럼, 우리와 운영체제가 하나인 것처럼 말이다. 흥미로운 형태의 전이다. 안타깝게도 실제로 컴퓨터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없다. 다만 프로세스 A에서 프로세스 B로 넘어가는 속도가 엄청나게 빠를 뿐이다. 빠른 속도 때문에 두 가지 프로세스가 동시에 일어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별개의 두 가지 단계인 것이다. 우리는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단어를 차용했을 뿐 아니라 멋대로 긍정적인 의미까지 부여한 것이다. 사람들은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멀티태스커가 되었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심지어 잘할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애석하게도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 분야에서 많은 연구를 수행한 마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완전히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몸짓이 아닌 이상, 인간은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하는 것은 전환입니다. 굉장히 빠르게 앞뒤로 왔다갔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매 순간 우리가 주의를 다시 집중시킨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하루 종일 이 업무 전환(task switching)이 쌓이면 스트레스가 됩니다. 그리고 스트레스는 집중력과 두뇌에 막대한 대가를 치르게 합니다. 집중력이 낮아지는 것을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노출되는 정보의 양이다. 기사 하나를 읽을 때마다, 페이스북 피드를 끝없이 스크롤할 때마다, 앱 하나를 선택할 때마다 진도를 나가기 위해 우리가 무시해야 하는 정보의 양은 엄청나다. 앞서 언급한 대니얼 레비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모든 무시와 결정에는 인지적 비용이 듭니다. 일상생활에서 수많은 사소한 결정을 처리해야 한다는 것은 신경의 피로를 유발하여 정작 중요한 결정을 위한 에너지를 남기지 않게 되죠. 최근 연구 결과를 보면, 예를 들어, 볼펜으로 쓸지 만년필로 쓸지 같은 대수롭지 않은 결정들을 내리도록 요구받은 사람들은 충동 조절 능력이 떨어지고 후속 결정들에 대한 판단력이 떨어졌습니다.”

 

 아이폰 위로 C자처럼 구부러진 충격적인 내 모습을 본 후로, 나는 지하철에서, 거리에서, 사무실에서, 해변에서, 레스토랑에서, 영화관에서 스마트폰 위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관찰하고 마음속으로 목록을 만들기 시작했다. 새로운 표본을 모으는 수집가처럼 목록을 채워나갔지만, 사실 이 목록은 내가 그런 자세를 취하는 유일한 사람이 아니라는 위안을 주는 것 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 사실 턱을 낮추고 목을 구부리고 등을 구부정하게 구부리지 않고는 스마트폰을 사용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스마트폰은 민주주의의 원칙을 확실히 지키고 있다. 여성과 남성, 부자와 가난한 자, 청소년이든 선생님이든 상관없다. 업무용 이메일을 작성하는 데 사용하든, 어떤 질병의 증상을 알아보는 데 사용하든, 유튜브에서 고양이의 모험을 지켜보든,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게시하든, 《뉴요커》의 기사를 읽든 상관없이 모두가 한결같이 똑같은 움직임으로 (마치 새로운 종교의 신도석에 무릎을 꿇는 것처럼) 스마트폰을 사용한다.

 

 나는 이런 애플리케이션들뿐만 아니라 하루가 끝날 때 내가 스마트폰을 몇 번이나 확인했는지, 어느 소셜 미디어를 가장 많이 사용했는지, 주간 평균과 비교하여 내가 얼마나 향상 또는 더 악화되었는지 알려주는 앱들이 도무지 좋아지지 않는다(게다가 그런 것들을 알려면 스마트폰을 1분 더 봐야만 한다). 그것들은 나에게 도움을 주는 도구라기보다는 내 추락의 보고서처럼 보였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종류의 확인으로 뭘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하루에 몇 시간 동안 왓츠앱에 빨려 들어가 있었는지, 아니면 잘못된 자세로 등을 몇 번이나 구부렸는지에 대한 보고는, 감염은 진행 중인데 매일 내 체온을 측정하고 내게 고열이 있다고 확인만 시켜주는 의사만큼이나 필요치 않으니까 말이다. 문제를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것이다.

 

 일부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의 추론 능력을 분석하면서 사람들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가 더 이상 논리적인 용어로 생각하지 못하며, 이는 부분적으로 우리가 답을 찾으려고 스마트폰을 향하는 속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스마트폰에서 찾은 것을 기억하기만 할 뿐, 더 이상 논리적 사고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전에 우리는 해답이 어디에 있을지,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아니면 어떤 것의 가치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 일생 동안 몇 백만 번이나 추론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인터넷에서 즉시 해답을 구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성을 행사할 기회를 잃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고하는 기계인 뇌에는 아주 귀중한 연습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해서 사고하는 기계이기를 원하죠.”

 

 2017년에 노벨 의학상은 일주기 리듬(대략 하루 24시간을 기준으로 하는)을 제어하는 분자 메커니즘을 발견한 공로로 세 명의 연구자(마이클 워런 영, 마이클 로스배시, 제프리 코너 홀)에게 수여되었다. 태양광뿐만 아니라 스마트폰에서 방출되는 청색광과 같은 단파장에 노출되면 우리의 신체는 모든 관점에서 ‘활성화’되어 반응한다. 반대로 양초의 빛과 같은 붉은빛의 긴 파장에 노출되면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잠이 들려는 성향이 있다. 24시간 주기의 리듬이 깨지면 당뇨병이나 비만, 우울증, 심부전, 천식과 같은 심각한 질병의 발병 위험이 높아진다. 특히 어두운 방에서 잠들기 전에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은 정말 잘못된 행동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에스타케는 이 점을 강조했다. 어둠 속에서 방출되는 청색광은 뇌가 마치 아침인 것처럼 활성화할 시간이라고 믿게 만들 뿐이다. 자기 전에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정말 안 좋다.

 

 나는 〈라따뚜이〉의 깐깐한 음식 평론가가 수프를 한 숟가락 맛보고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감동할 정도로 행복해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캐서린 프라이스 역시 자신의 책에 이렇게 썼다. “하나의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저장할 때 그 기억은 뇌의 어떤 서랍 속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다른 기억들의 네트워크에 존재하게 된다. ‘스키마’라고 부르는 이러한 네트워크들은 각각의 새로운 정보를 이미 가지고 있는 정보와 연결함으로써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스키마’는 예를 들면 오븐에 들어 있는 쿠키 냄새와 같은 단일 자극이 어떻게 해서 다른 많은 기억들을 활성화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준다.”
 우리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측하기 위해 과거를 돌아보기도 한다. 무언가를 내다보기 위해서는 기억에 기대야 하는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묶는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는 실이 있다. 이 네트워크가 활성화되지 않는 것은 구슬 목걸이가 끊어져서 구슬들이 전부 땅에 떨어지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이러한 비유가 얼마나 과학적일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에스타케는 계속해서 설명했다. “핵심은 기억이 우리가 내부에 동화시킨 것과 외부에 있는 것 사이의 매우 섬세한 균형이라는 점입니다. 모든 것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인간은 언제나 신탁이나 책, 지도, 친구와 같은 외부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손에 들고는 말했다. “이 기기들은 엄청난 외부 메모리일 뿐만 아니라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만의 개인적인 메모리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외부 기억으로만 채워져 있다면 거기에 내가 있는 걸까요? 지식에 액세스할 줄만 안다면 내 지식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나는 약간 불안한 심정으로 에스타케에게 그 고독한 성찰이 사라진 결과는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그는 수염을 쓰다듬고는 잠시 생각하더니 두 팔을 벌리며 대답했다.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들 모두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나는 새로운 세대들이 몹시 걱정됩니다. 예를 들어, 언어의 신경망은 뇌의 좌측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언어는 타고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아이가 3~4세에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나중에 말을 하는 데 매우 심각한 문제를 겪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항상 과잉 자극 상태에 놓여 있으면 이 신경망은 활성화되지 않아요. 다행히도 아직은 기기들을 남용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를 되돌아보아야 하며 무엇보다도 사람들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알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같은 정보를 스스로 얻을 수 있는 사람은 기기들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을 알게 되지만, 정보를 얻지 못하는 사람은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가 진보할 때 자주 발생하는 사회적 차이를 훨씬 더 두드러지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어떤 계층은 혜택을 누리고 어떤 계층은 그렇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노르망디의 바다 냄새를 뒤로하고 파리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불평등의 심화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모두가 더 어리석게 되고 더 기억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우울한 전망이다. 게다가 모두가 똑같은 방식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기에, 그 사실이 가져오는 모든 결과는 끔찍하고 무자비하다. 최근에 읽은 조너선 프랜즌(Jonathan Franzen)의 에세이 모음집 《지구 종말의 끝(The End of the End of the Earth)》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었다. “그리고 분명히, 그 새 책을 사서 읽을 만큼 형편이 좋은 가족은 기술에 노출되는 것을 제한할 수 있을 것이고 상황은 훨씬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기술의 유혹에 저항하기에는 너무 불안하거나 너무 외롭고, 악순환에서 벗어나기에는 너무 가난하거나 지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현재 벤처 투자 전문가로 일하고 있는 팔리하피티야는 그 강연에서 자신이 몸담았던 세계에 대한, 소름 돋는 다른 세부적 이야기도 덧붙였다. 예를 들어, 실리콘 밸리에서는 사용자들의 심리와 행동을 이용하여 뇌의 연결 시스템을 재편하면서 부를 축적한다고 했다. 물론 그런 것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방어하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다.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이 도구들을 더 이상 사용하지 마십시오! 저는 수년 전부터 그것들을 쓰지 않습니다. 제 페이스북 페이지를 보시면 지난 7년 동안 제가 포스팅한 횟수는 열 번도 안 될 겁니다. 저들이 당신들을 새로 프로그래밍하고 있다는 사실을 당신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고의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결정해야 합니다. 얼마나 포기할 의향이 있는지, 지적 독립성을 얼마나 희생할 의향이 있는지를요.” 그가 한 모든 말의 의미는 분명했다. 어찌 되었든 그 시스템을 만드는 데 이바지한 사람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는 것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마치 빌 게이츠가 컴퓨터를 켜면 구역질이 나온다고 하는 것 같은 소리였다.

 

 이탈리아에서는 지방 자치 단체들의 등기부에서 사회경제적 배경과 소득 및 건강 상태를 고려하여 선발한 약 1만 2천 명의 사람들이 연구에 참여했다. 질문은 모든 OECD 국가에서(총 20만 명) 동일하게 적용되며, 일반교양에 대한 것은 없었다. 인터뷰 대상자는 추론과 이해, 숫자 및 컴퓨터 능력에 대한 테스트만 수행했다. 일부 질문은 기본적 수준의 것이었다. 예를 들어, 슈퍼마켓에서 판매되는 4개 품목에는 상품명, 킬로그램당 가격 및 포장 날짜가 명시되어 있는데, 참가자들은 이중 먼저 포장된 것이 어느 것인지 고르거나 라벨을 읽고 유통기한을 알아내야 했다. 또한 어떤 문제는 논리적 사고에 대한 것이었는데, 세 사람이 시간대가 서로 다른 세계의 3개 도시에 흩어져 살고 있는데, 서로 이야기를 나누려면 몇 시에 전화를 걸어야 하는지를 이해하는지 알아보는 문제다. 그 외에도 약의 복용 설명서를 읽고 이해하는 것과 같은 간단한 질문에서부터 6개 회사의 취업 공고를 읽고 이중 어느 회사가 야간 근무자를 찾고 있는지 알아내는 것 등 텍스트의 이해에 관한 문제들이 있었다. GMO(유전자변형 농수산물)에 대한 일련의 연구를 분석한 글을 읽고 유전공학이라는 주제에 대해 가장 덜 유용한 정보를 주는 출판물을 구별해내는 것 같은(이것은 ‘가장 덜 유용한’과 같은, 부정적인 것을 물어봄으로써 혼란에 빠뜨리려는 질문으로 보인다) 좀 더 복잡한 문제(5단계)도 있었다.
 OECD의 프로그램 결과는 우리에게 이탈리아 성인의 고작 3퍼센트만이 중상급 언어 능력 수준에 도달해 있고, 수학 능력과 관련해서는 성인의 3분의 1이 기본 수준을 넘지 못한다는 현실을 보여주었다. 3퍼센트면 인구 6천만 명 중 약 18만 명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는 순수한 인지적 생존을 나타내는 수치다. 하지만 이뿐만이 아니다. 보르고노비는 이 연구가 오류와 격차를 수량화하는 데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데 사용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도 필요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어떤 해답에(틀린 답이라도) 도달하는 방법을 이해하는 것은 종종 그 해답 자체보다 더 흥미로운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들이 복잡한 문제에 직면하면 쉽게 포기해버린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인내력이 많이 줄어든 것입니다. 스포츠계에서 말하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투지, 절제력, 훈련 정신은 더 이상 없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장애물에 직면하면 포기하고 맙니다.”

 

 오늘날에는 그 누구도 더 이상 “나는 모른다”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것 같다. 이따금 내 입에서 그 말이 나올 때면, 옆에서 스마트폰을 들고 내 눈앞에서 군악대장의 지휘봉처럼 돌리면서 눈을 찡긋하고는 “오케이! 구글, 이 단어가 뭐야?”라고 물어보는 사람이 꼭 있다. 어떤 대답을 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검색 엔진은 네트워크의 심연을 파헤쳐 우리에게 정답을 내놓는다. 굴욕적이고, 때로는 기분이 상하기도 한다. 가끔은 모른다고 말한 것에 대해 사과라도 해야 할 것 같다.
 가끔은 무언가를 모른다는 것, 의심에 빠진다는 것이 참으로 위안이 되었는데,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단어들의 올바른 문자열을 입력하기만 하면 엄청난 양의 온라인 정보들 사이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답에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답이 쉽다고 믿게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자신이 실제로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이 옳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은 틀릴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어떤 주제에 대해 가장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해 가장 확신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이었다. 그러다가 나는 이것 또한 학술적인 이름을 가지고 연구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두 심리학자 데이비드 더닝(David Dunning)과 저스틴 크루거(Justin Kruger)의 이름을 따, 더닝 크루거 효과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이들은 자신감과 오류의 상관관계, 즉 낮은 인지력과 자신의 우월성에 대한 편견과의 관계를 입증했다. 사람들은 아는 것이 적을수록 자신이 많이 알고 있다고 더 확신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사전에는, 기기에서 읽는 방식을 나타내는 단어들 중 ‘읽다’라는 단어의 어원을 가진 용어를 찾아볼 수 없다. 피상적으로 훑어보는 ‘스키밍(skimming)’, 중간중간 텍스트의 구절을 건너뛰는 ‘스키핑(skipping)’, 항해한다는 뜻의 ‘브라우징(browsing)’, 소셜 게시판이나 일반적으로 온라인에서 보는 모든 것을 빠르게 물 흐르듯 보는 움직임을 나타내는 ‘스크롤링(scrolling)’ 등의 단어들 말이다. 바치노는 현대의 ‘스크롤링’이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 두루마리(실제로, ‘스크롤’이라는 단어는 두루마리라는 뜻이기도 하다)에서 따온 단어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 옛날 필경사가 파피루스를 펼칠 때 그랬던 것처럼 웹의 텍스트를 펼친다(나는 사실 두루마리 화장지를 펼칠 때를 연상했다). 바치노는 설명을 이어갔다.
 “스크롤링 방식은 긴 텍스트를 한 화면 공간에 압축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우리로 하여금 가능한 한 빨리 텍스트를 읽도록 유도하여 점점 더 많은 페이지를 보게 합니다.” 이것은 스크롤링이 텍스트에 있는 단어들의 공간 좌표를 지속적으로 이동시켜 시각적 기억에 위협을 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텍스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들이 있는 위치를 자동적으로 기억해서 필요한 경우 다시 돌아갈 수 있는데, 이 단어들의 위치가 계속해서 바뀌면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크롤을 사용하지 말고 킨들처럼 페이지에서 페이지로 넘어가며 읽도록 전환하는 것을 제안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스마트폰과 PC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점이고, 프로그래머들은 이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단에 작은 버튼을 두어서 이러한 작업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을 테고 기기에서 책장을 넘기듯이 페이지가 넘어가게 만들 수도 있을 테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인터넷 비즈니스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 우리를 기기에 붙어 있게 만드는 데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은 우리가 한 페이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흘러가도록 고안된 것이다. 내 게시물들을 볼 때 내가 하는 행동을 떠올려보면 슬롯머신의 레버를 당기는 것과 굉장히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독자였던 우리는 이제 게시판을 스크롤하는 엄지손가락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소설을 깊이 있게 읽을 때, 우리와 아주 동떨어져 있는 등장인물들의 입장이 되기 위해 모든 인지 능력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관점으로 생각해보는 것은 공감의 기초이며 이것은 상대방에 대한 깊은 이해의 한 형태입니다.” 우리가 흔히 ‘관점의 변화’라고 부르는 것이 신경과학자들에게는 “독서를 하는 뇌의 회로에 광범위한 흔적을 남기는 인지적·사회적·정서적 과정의 복잡한 조합”인 것이다. 과학자들이 시인이나 작가의 직관적인 표현에 대해 생물학적인 설명을 내놓을 때마다 나는 늘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프루스트는 독서라는 행위가 타인을 알고 우리의 경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에 대한 준비라고 말했다. 독서는 더욱 풍부하고 다양해진 모습으로 돌아오게 되는 여행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과 삶의 복잡성을 인식하는 것은 다름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는 가장 효과적인 해독제이자 편견에 맞서는 귀중한 훈련이기 때문이다.

 

 “이용 가능한 정보가 많을수록 우리는 더욱더 빠르고 피상적인 방식으로 단순화하여, 우선순위를 따라가면서 처리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는 인터넷이 제공하는 모든 것을 읽어야 한다는 불안감과 쓸 수 있는 시간 사이의 타협의 한 형태입니다. 깊이 읽기를 담당하는 회로가 손실될수록 사람들은 인지적으로 조급해집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찾으러 갑니다. 그들은 빠르고 친숙한 정보를 원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다른 관점이란 존재하지 않는 거죠.” 이 마지막 문장을 이야기하면서 그녀는 계속해서 손가락으로 머리를 두드리고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들에게는 다른 관점은 존재하지 않는 거죠.” 한 줄도 안 되는 짧은 이 한 문장으로, 우리에게는 탈출구도 기회도 전혀 없음을 알 수 있었다.

 

 “메시지나 이메일에 언제나 곧바로 응답할 필요는 없습니다. 답장은 나중에도 쓸 수 있어요. 대부분의 경우, 당장 답을 해야 할 정도로 급한 메시지는 없습니다. 그리고 매번 뭔가가 기억나지 않을 때마다 즉시 구글에서 정보를 확인할 필요도 없습니다. 불확실성을 품고 있다는 것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내게 설명했다. “우리는 강박을 예의로 착각하고, 부족한 정보를 찾아 인터넷에 몸을 던지는 것을 지식에 대한 갈증으로 착각합니다. 우리는 깨닫지 못하지만 그것들은 단지 정신적 자동증, 즉 자극에 대한 통제되지 않는 반응일 뿐이고,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강화되는 정신적 충동일 뿐입니다.”

 

 인류세라는 이 이상한 국면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유한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해야 한다. 모든 정보를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을 알 필요도 없으며, 모든 것에 대해 항상 어떤 의견을 갖고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해야 한다. 상처나 모난 부분을 받아들이고, 지루함과 고통을 굳이 다른 것으로 돌리려 애쓰지 않고 우리의 마음에 자리를 내주며, 쉽사리 다시 찢어지더라도 마음속의 구멍을 메우고 꿰맬 수 있어야 한다. 슬픔과 외로움, 무력감은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언제든 다시 돌아올 감정들이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파도와 같은 것이라고 인정하고, 감사와 연민의 마음을 키워야 한다. 무엇이 우리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지 인식할 준비를 하고, 또 가능한 한 그것을 확대하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마치 소리굽쇠가 깊고 긴 울림을 내듯이 일상의 모든 몸짓을 조율하는 것이다.

 

 

업스윙 / 로버트 D. 퍼트넘, 셰일린 롬니 가렛 / 페이퍼로드

 

 좀 더 큰 틀에서 볼 때, 경제적 평등의 추세는 대체로 보아 순수 경제 분야 이외의 분야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정치는 배경 스토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 문제는 곧 다음 장에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가 레이건주의를 논의할 때 주목했던 것처럼, 정치의 인과적 역할은 복잡하다. 평등주의 정책에서 불평등주의 정책으로 급선회한 현상은 레이건 대통령의 압도적인 선거 승리 이전부터 이미 존재해왔다. 이런 면에서 정치는 경제적 변화의 선행 지표가 아니라 후행 지표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이 책의 여러 곳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사회적 규범의 변화도 평등/불평등 곡선을 설명하는 스토리의 중요한 부분이다. 학문으로서의 경제학은 이런 “주관적” 요인들을 측정 기준으로 채택하는 것을 꺼린다. 그것들은 측정하기가 아주 까다로운 까닭이다. 폴 크루그먼, 토마 피케티, 에마누엘 사에즈, 앤소니 애트킨슨, 피터 다이아몬드 등 대통합과 대분산을 연구하는 오늘날의 경제학자들은 다음의 사항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즉, 공정과 정의에 대한 규범을 감안하지 않고서 경제적 평등의 극적인 방향 전환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p.103-104)

 

 이 장과 앞 장에서 검토된 전도된 U자형 곡선은, 지난 125년 동안에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양극화가 보조를 맞추어 진행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러 세대에 걸쳐 사회학 전공자들이 말하고 있듯, 상관관계가 인과관계를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 분야의 개척자들인 놀란 맥카티, 키스 T. 풀, 하워드 로젠탈 등은 불평등이 양극화를 가져온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 둘의 타이밍이 서로 맞지 않는다고 널리 인정되고 있다. 우리의 분석에 따르면 불평등은 뒤쳐진 변수이다. 다시 말해, 점증하는 불평등은 점증하는 양극화보다 뒤에 나타난 현상인 것이다. 따라서 그 둘의 관계에서 불평등이 주된 추동력일 것 같지는 않다. 좀 더 최근에 정치학자들인 브라이언 J. 데트리와 제임스 E. 캠벨은 이런 주장을 폈다. “소득 불평등은 점증하는 양극화의 의미심장한 원인인 것 같지 않다.” 반면 경제학자인 존 V. 듀카와 제이슨 L. 세이빙은 불평등과 양극화의 인과관계는 원인과 결과의 양방향으로 움직인다고 결론지었다. 불평등과 양극화가 시간이 흘러가면서 고도의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사실은 그 둘이 어떤 정체를 알 수 없는 요인의 결과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p.154-155)

 

 1백 년 전의 미국은 오늘날보다 젠더차별과 인종차별이 훨씬 심했다. 그 시기에 설립된 대부분의 단체들도 성별과 인종별로 구분되어 있었다. 민간단체가 눈에 띄게 늘어난 좋은 사례는 무스와 이글스 같은 우애 단체다. 역사가 데이비드 베이토는 이런 추산을 했다. “아무리 짜게 잡는다 하더라도, 1910년에 이르러 19세 이상의 남성 중 3분의 1이 이런 단체들의 회원으로 등록했다.” 우애주의는 급속한 사회 변화의 시대에 개인주의와 아노미 현상에 대한 반작용이었고, 혼란하고 불확실한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처였다. 상호성의 원리―오늘의 기증자가 내일의 수혜자가 된다―에 바탕을 둔 상조가 이런 단체들의 핵심 특징이었다. 베이토는 또 이런 말도 했다. “이런 단체의 지부에 가입함으로써, 입문자들은 일련의 가치들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단체들은 상호주의, 자기신뢰, 사업 훈련, 근검절약, 리더십 요령, 자치, 자기 통제, 훌륭한 도덕적 성품 등에 헌신하는 것이다. 20세기 초에 우애 단체들에 서비스 클럽들(로타리, 키와니스, 라이온스, 제이시 등)이 가입해왔고 또 전문가 협회들도 포섭되었다. 이러한 신규 단체들 덕분에 우애 단체는 더 많은 사업 건수를 확보하고, 좀 더 현대적인 면모로 일신하고, 좀 더 열성적인 외부 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
 비록 19세기 말에 나타난 새로운 단체들 중 다수가 여자와 소수자들에게는 문을 닫아걸고 있었지만, 이러한 조직적 이노베이션의 번성이 백인 남성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경제적 성장은 여성들과 소수 인종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이루어졌고, 심지어 백인들보다 흑인들 사이에서 더 급속히 이루어졌다. 스콕폴이 강조한 것처럼, 이런 민간단체들은 인종과 젠더에 상관없이 중산층과 노동자계급을 모두 포용하는 경향이 있었고 상조와 사기 양양의 기능을 담당했다. 오늘날 우리는 인종과 젠더에 따른 차별을 혐오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20세기 초에는 사회적 자본의 상위 형태인 민간 조직에서 그런 차별이 심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런 조직들이 중산층 백인 남성들만 받아들인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남북전쟁 이후에 여성의 교육 기회가 향상됨에 따라 설립된 여성 단체들은 이 시기 자신들의 관심을 독서와 대화에서 대중적 운동 쪽으로 전환시켰다. 그리하여 금주, 아동 노동, 여성의 고용, 도시의 가난, 유치원, 여성 참정권 등의 문제들과 관련하여 사회적·정치적 개혁을 추진했다. 이러한 노력은 진보시대의 말엽 헌법 수정안 18조와 19조로 결실을 맺었다. 20세기 초에 새로 여성 단체의 회장으로 뽑힌 사라 플라트 데커는 자신의 단체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단테를 읽기보다 구체적 행동을 더 선호하고 시인 브라우닝보다는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를 더 좋아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문학 행사에 너무 젖어 있었습니다.” (p.173-174)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단체의 여러 기록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준다. 20세기의 첫 65년 동안에, 미국인들의 각종 민간단체 참여율은 꾸준히 증가하다가 대공황 때 잠시 주춤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20세기의 마지막 35년 동안에, 우편 주문 회원 등록이 꾸준히 확대되어, 회원들이 실제로 모임에는 참석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민간단체가 생겨났다. 물론 예외가 되는 케이스들도 있다. 가령 현재의 풍랑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맞서 항해하면서 성공을 거둔 일부 민간단체도 있었다. 그렇지만 크게 보면 공동체 조직에 대한 참여율은 떨어지는 추세였다. 그리고 지난 50여 년 동안에 민간단체의 정식 회원 수는 4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클럽과 다른 민간단체의 적극적 참여율이 절반으로 줄어듦으로써 반 토막이 났다는 것이다. 많은 미국인들이 자신은 여전히 각종 단체의 “회원”이라고 주장하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예전처럼 공동체 조직에 나가서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우리 미국인은 더는 위원회 일을 하지 않고, 민간단체의 임직원으로 일하지도 않고, 단체 모임에도 나가지 않는다. 교육 수준이 향상되었는데도 이런 일들을 하지 않는 것이다. 전에는 그런 교육이 우리에게 관련 기술, 자원, 관심사를 제공하여 민간 활동을 격려했는데 말이다. 간단히 말해 지난 50년 동안, 미국인들은 공동체 내의 단체 생활로부터 떼 지어 이탈해왔다. 이것은 1백 년 전에 벌어진 것과는 정반대 현상이다. (p.191-192)

 

 바로 이 무렵 대서양 건너편에서 서부 변경과는 무관해 보이는 과학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바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었다. 이 논문은 예기치 않게 도금시대의 개인주의를 더욱 강화시켰다. 다윈이 그 용어를 싫어했는데도 불구하고 영국인 추종자 허버트 스펜서는 다윈의 원리인 “적자생존”을 바탕으로 하여 “사회적 진화론”이라는 말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미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윌리엄 그레이엄 섬너는 스펜서의 전례를 따라서 “적자생존”이라는 개념을 인간사회에 적용했다. 섬너는 이렇게 주장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인생의 경쟁에서 더 뛰어나다……. 더 뛰어난 자들은 야만의 정글에서 기어 나와 그들의 재능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그러면 그들은 더 높이 기어오른다……. 가난한 자의 곤경을 완화시켜 주는 방식으로 진화를 배척하려는 시도는 부도덕하고 경솔한 것이다.”
 이런 식의 사회적 진화론은 1870년경에 발진하여 1890년에서 1915년 사이에 영향력의 최고점에 도달했다. 이 사상은 도금시대가 진행되면서 미국 지식인층과 중상층 계급을 휩쓸었고, 도금시대가 지나가버리자 퇴조하기 시작했다. 사회적 진화론은 과학적 인종차별주의, 우생학, 자유방임 자본주의의 유사 생물학적 옹호 등을 가져왔다. 과학적 인종차별주의는 그 당시 남부 사람들과 그들에 동조하는 자들에게 편리한 이론적 도구를 제공했다. 이들은 소위 “구원의 시대(Redemption Era)”라는 개념을 내세우며 짐 크로법을 입법하여 해방된 노예들에게 억압과 멸시를 부과하려 들었다. 맨해튼의 어퍼 이스트사이드에 사는 부자들은 추문 폭로자 제이콥 리스의 『다른 반쪽은 어떻게 사는가』(1890)라는 책을 보고서 심란해했다. 그 책은 맨해튼의 로워 이스트사이드 빈민가에 사는 사람들의 참상을 폭로한 것이었다. 사회적 진화론은 부자들에게 그들이 충분히 그런 부를 누릴 자격이 있음을 강력하게 확인해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도금시대의 참상은 진보에 따르는 불가피한 대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경쟁력을 강조하는 과학은 “각자도생”의 원리를 재촉하는 저 오래된 완고함과 섞여들었다. 간단히 말해서 부자들은 그들이 가진 것을 누릴 자격이 있으니, 가난한 자들은 악마에게나 가라는 식이었다. 노골적인 개인주의를 향해 가는 문화적 운동은 그 최고점에 접근했다.
 그러나 교육을 받은 다른 중산층 미국인들은 점점 더 그런 견해를 거부하고 나섰다. 역사가 제임스 클로펜버그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가들이 너무나 다양한 진보주의의 가닥들을 발견했으므로 어떤 일관된 운동을 꼭 집어서 그 특징을 말하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20세기의 첫 20년 동안에 새로운 정치사상과 개혁 방안들이 다양하게 나타났다.” 진보주의자들조차도 그들 사이에 의견이 다양했다. 그러나 지나친 개인주의에 반대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그들은 개인주의가 미국의 가치를 배반했고, 온 나라를 휩쓸고 있는 경제적·사회적 위기를 촉발시켰다고 주장했다. (p.248-250)

 

 1929년의 증권시장 붕괴는 광란의 20년대에 막을 내리게 했다. 일자리가 없는 것이 개인의 성격적 결함 때문이라는 얘기는 대공황의 현실에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실업률은 1929년 약 3퍼센트에서 1933년에는 약 25퍼센트로 치솟았다. 개인의 노력으로는 이런 대규모 집단적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다. 범교파적 주교들의 위원회는 이런 주장을 폈다. “사회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상은 잘못된 것임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그것은 경제적 사실주의의 관점에서도 그렇고 기독교적 이상주의의 관점에서도 그러하다. 강건한 개인주의에 대한 우리의 근본 철학은 협력 시대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하여 수정되어야 한다.” 역사가 찰스 비어드도 이런 주장을 펼쳤다. “냉정한 진실은 이런 것이다. 각자도생하고 악마는 낙오자를 잡아간다는 개인주의적 사상이 서구 문명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주범이다.”
 문학에서 사회적 양심과 사회적 리얼리즘이 득세하여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1939)에서 정점을 찍었다. 영화 분야에서는 프랭크 카프라가 〈스미스 씨 워싱턴에 가다〉(1939)와 〈멋진 인생〉(1946) 같은 작품에서 공동체 정신을 강조하던 시절이 있었다. 카프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영화는 모든 남자, 여자, 아이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려 하는 것입니다……. 평화와 구원은 그들이 서로 사랑할 줄 알게 되면서 비로소 현실이 될 것입니다.”
 정치 분야에서도 뉴딜정책은 진보시대의 공동체주의를 다시 활성화시켰다. 많은 뉴딜정책 수행자들이 진보 운동이 벌어지던 시대에 성인이 된 사람들이기도 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1900~1903년의 하버드 대학 시절에 일관되게 공동체주의적 진보주의를 지지했다. 그는 당시 백악관에서 근무하던 먼 사촌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롤모델로 삼으면서 그런 사상을 흡수하게 되었다.
 1912년 젊은 주 상원의원으로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이런 주장을 폈다. “공동체의 자유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특정한 책임을 부과하는 자유 말이다.” 뉴딜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 중 다수가 사회적 복음 운동과 사회 복지관 활동을 해본 경력이 있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최측근 고문관인 해리 홉킨스, 재무장관 헨리 모겐소 주니어, 초대 노동부 장관 프랜시스 퍼킨스, 영부인 엘리너 등은 진보시대에 청년으로서 진보적 이상을 갖게 된 이들이었다. (p.259-260)

 

 『떨쳐내는 아틀라스』는 우파 밈(meme)의 원천이 되었고, 21세기에도 통용될 듯하다. 이를테면 “만드는 사람(makers)”과 “가져가는 사람(takers)”이라는 밈인데, 랜드 자신은 “생산자(producers)”와 “약탈자(looters)”라는 용어를 썼다. 이 밈에 의하면 사회는 두 계급의 사람들로 구성된다. 물건을 만들어내는 사람과 그 물건을 가져가는 사람이다. 가져가는 사람은 대체로 정부의 권력을 이용하여 만드는 사람으로부터 물건을 가져간다. 그리하여 만드는 사람은 소설 제목이기도 한 신화 속 아틀라스처럼 사회의 부담을 모두 짊어지게 된다. 사회의 자유와 번영을 구가하기 위해서는 아틀라스가 이런 무모한 약탈자들을 떨쳐내야 한다. 『떨쳐내는 아틀라스』와 50년 후 밋 롬니의 악명 높은 발언과는 직접적 연관 관계가 있다. 롬니는 2012년 선거 캠페인에서 이런 말을 했다. “미국 국민 중 47퍼센트는 연방정부의 세수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는 소비하는 계급이면서도, 보건과 식량과 주택 등에서 각종 혜택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랜드의 사상적 영향은 특히 실리콘밸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녀는 1964년 『플레이보이』 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그 자신의 최고로 도덕적인 목적이다. 그는 남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시켜서는 안 되고 반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들을 희생시켜서도 안 된다.” 랜드의 이러한 철학은 자수성가한 사업가들에게는 크게 매력적인 소리였다. 2016년 『배니티 페어』는 그녀가 테크놀로지 산업에서 스티브 잡스를 능가하는 최고로 영향력이 큰 인물이라고 서술했다.
 랜드의 극단적 자유주의에 영감을 받은 뉴라이트는 개인주의, 제약 없는 자본주의, 평등주의와 단체주의에 맞서는 개인 간 불평등을 강조했다. 이런 점에서 “적자생존”이라는 용어가 21세기에 들어와 부활한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이미 과거 첫 번째 도금시대에 자유주의자들이 선택한 슬로건이었던 것이다. (p.277-278)

 

 왜 미국이 평등, 통합, 그리고 더 포괄적인 “우리”를 향해 계속 밀고 나아가지 않고 “가속 페달에서 발을 뗐을까?” 이에 대한 한 가지 설명은 단순하게 말하자면 백인들이 강경하게, 그리고 종종 맹렬하게 그런 전진에 필요한 여러 조치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에 많은 흑인들 역시 진보적인 지배층의 여러 약속, 그리고 너무 느리게 진행되는 통합 계획에 대한 신뢰를 잃기 시작했다. 1978년 『뉴욕 타임스』는 이런 여론 조사 데이터를 보도했다. 대다수 흑인들이 대체로 백인 이웃의 자유화 지지 태도를 알고 있지만, 44퍼센트의 흑인들은 백인이 “흑인들의 더 나은 혜택”을 지원하는 일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1960년대 중반 “우리”에서 “나”로의 문화적 변화는 시민권 혁명에 대한 백인의 반발과 관련이 있다. 또 짐 크로 법 인종차별에서 때로 “자유방임 인종차별”로 불리는 새로운 부류의 백인 인종차별로 변화한 것도 “우리”에서 “나”로 바뀐 현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97년 로런스 보보와 그의 동료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흑백 분리 지지, 인종 간 결혼에 대한 혐오, 그리고 흑인의 선천적 열등함에 대한 믿음은, 짐 크로 법 시대의 이념적 주춧돌이었다. 새로운 자유방임적 인종차별 시대의 중심에는 집단적인 인종적 적개심이 있다.” 도널드 킨더와 하워드 슈먼은 2004년 이런 현상을 관찰하며 메리 잭먼의 말을 인용했다. “백인은 개인주의의 이념을 옹호하게 되었다. 그것이 흑인들을 돕는 여러 정책을 반대하는 데 있어서, 원칙에 입각한 중립적 정당화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p.356-357)

 

 어떻게 해서 직업적 남녀 분리가 미국 경제의 지속적인 특징이 되었을까? 19세기 말 철강, 벌목, 채광, 그리고 기계 같은 급성장하는 여러 미국 산업들에는 여성 노동에 대한 수요가 거의 없었고, 집 밖에서 일을 찾는 여성은 직물, 의복, 그리고 통조림을 생산하는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여성들은 전형적으로 진입에 아무런 자격이 없는 대신 승진 기회도 없고, 건당 품삯을 받는 일자리에만 진출하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20세기가 시작될 때 기업들의 규모가 아주 커지기 시작했다. 소매점도 전보다 상당히 더 커졌고, 언론 출판과 공익사업 같은 분야도 극적으로 확장되었다. 경제의 구조적 변화는 사무직 노동자를 더욱 많이 필요로 했고, 이런 수요의 대부분은 여성들이 채웠다. 1900년에 여성은 사무직 노동자의 18.5퍼센트를 차지했지만, 1930년이 되자 그 수가 거의 두 배인 33.2퍼센트로 높아졌다. 비슷하게 1900년 여성은 서기와 판촉 일자리에서 20.2퍼센트를 차지했지만, 1930년이 되자 두 배인 40.4퍼센트를 차지했다. 여성, 특히 교육을 받은 여성은 더는 빨래를 하거나 하숙을 치는 비공식적 일자리에 머무르지 않았으며, 공식적으로 고용이 되더라도 고생스러운 저급 수준의 산업 일자리로 제한받지 않았다.
 하지만 클라우디아 골딘이 말한 것처럼 여성의 일자리에서 발생한 이 “극적인” 변화는 다른 부작용을 가져왔다. 여성의 승진과 임금에 차별적인 제한을 만든, 직장에서의 젠더 구분이라는 오래 지속되는 관행을 발생시킨 것이다. 여성이 점점 더 많이 남성과 같은 공장과 가게와 기업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에겐 특정 직업 범주로의 진입이 제한되었다. 더 낮은 초봉을 받고 고용되었으며, 승진이 없는 자리에 “주저앉게” 되었다. 게다가 심지어 역량과 경력을 늘려 승진이 가능해진 순간에도, 승진한 뒤 여성의 임금 상승은 비슷한 경우의 남자보다 훨씬 느렸고, 특히 사무직과 전문직, 기업의 일자리에서 더욱 이런 차별이 있었다. 이 시기 동안 더 많은 여자가 결혼 이후에도 계속 일자리에 머무르기는 했지만, 많은 회사가 “결혼 빗장(marriage bars)” 정책을 유지했다. 이는 기혼 여성을 특정 지위에 두지 않거나 여성이 결혼했을 때는 퇴직 혹은 강등시키는 정책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여성을 대상으로 한 직업적 분리와 차별은 종종 생산의 압박에 밀려서 사라졌다. 그러나 중공업 분야에서 이러한 여성의 혜택은 길게 유지되지 못했다. 역사학자 제임스 패터슨에 따르면 전쟁이 끝났을 때 “가장 큰 손해를 본 사람은 전쟁 중에 산업에서 일자리를 찾은 여성이었는데, 이런 일자리는 병사들의 제대 급증에 의해 사라지거나 민간인으로 복귀한 참전 용사에게 돌아갔다.” 리벳공 로지(여성)는 전쟁 중에 더 나은 일자리와 임금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런 사정은 평화 시라면 그런 일을 할 수 없었던 여성들에게 큰 매력이었고, 전반적인 평등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 남성들에게 중공업과 제조업의 일자리를 돌려주어야 하자, 그런 일이 여성에게 “너무 힘들다”는 낡은 이야기가 되살아났다. 그리하여 여성은 다시 남녀 분리된 산업과 예전의 하찮은 지위로 돌아가게 되었다. (p.385-387)

 

 남북전쟁으로 집안이 몰락한 남부동맹 군인의 아들인 톰 존슨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무척 어린 나이부터 버지니아 주 철도에서 신문을 팔았다. 정규 교육은 1년밖에 못 받았지만, 나중에는 가문의 연줄을 통해 뒤퐁 가문이 소유한 루이빌 시내 전차 회사의 사무원으로 고용되었다.
 열심히 일하고 재주가 많은 존슨은 빠르게 승진했다. 기계학에 관한 뛰어난 이해와 발명 재주로 여러 특허권을 획득했고, 그런 권리에서 나오는 사용료를 통해 자기 사업체를 사들일 수 있게 되었다. 존슨은 이내 자신이 “가난뱅이에서 거부가 된” 다른 악덕 자본가들을 뒤따르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1890년대가 되자 그는 클리블랜드, 세인트루이스, 브루클린, 디트로이트, 인디애나폴리스 시내 전철 회사의 대주주가 되었고, 철강 산업에도 엄청난 돈을 투자하여 오하이오와 펜실베이니아 주에 여러 개의 철강 공장을 지었다. 이 공장들은 그가 소유한 수많은 시내 전철 회사에 철도용 철강을 공급했다. 하지만 한 열차의 차장으로부터 헨리 조지의 『사회 문제』(1883)를 읽어볼 것을 권유받아 완독하고 나서 톰 존슨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급진적인 비평에 공감하게 되었다.
 헨리 조지는 정치 철학자로 1879년에 첫 책 『진보와 빈곤』을 펴내어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1890년대에 이 책의 판매량은 성경을 제외한 다른 모든 책을 능가했으며, 진보주의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들 중 대다수가 조지의 견해를 접한 뒤 사회적, 정치적 개혁을 향해 자기 삶의 방향을 바꿨다고 했다. 조지는 독점 사업의 천문학적인 부를 단속하고, 파괴적이면서 호경기-불경기의 순환 주기를 가져오는 주범인 독점 사업체들의 영향력을 통제하는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간절하게 호소했다. 톰 존슨은 헨리 조지의 부와 빈곤에 관한 급진적인 사고방식에 매혹되었고, 재산 대부분을 조지의 생각을 확산시켜 실행시키는 데 사용했다.
 존슨은 마을 전체가 휩쓸려 나가 2,200명 이상의 주민이 사망한 1889년의 존스타운 홍수를 목격하고 더욱 극적으로 변모했다. 이 인명 참사는 헨리 클레이 프릭과 다른 실업계 거물이 소유한 개인 호수의 유지에 사용된 댐이 터지면서 생겨난 것이었다. 댐은 부주의하게 건설되었고, 불충분하게 관리되었지만, 추후 여러 차례 소송에도 불구하고 프릭과 그의 동료들은 단 한 번도 유죄 판결을 받지 않았다. 존슨은 개인적으로 피해자들에게 구호품을 제공하면서도, 광범위한 제도의 실패로 유발된 문제에 대해 자선 활동이 크게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서 가슴 아파했다. 존슨은 존스타운의 참상을 회고하며 이런 글을 남겼다. “자선을 필요하게 하는 원인을 찾을 수 있을 만큼 우리가 현명하다면 어느 정도 희망이 있을 것이다.”
 존슨은 새로 얻은 정치적 의식에 따라 행동하면서 공직에 출마해서 하원의원으로 두 번, 클리블랜드 시장으로 네 번 임기를 지냈다. 클리블랜드에서 독점적 시내 전철 사업의 거물들을 상대로 벌인 싸움이 주목을 받을 때 그는 전철 사업에서 자신의 지분을 매각하며 전철의 완전 공유화를 주장했다. 존슨은 공적 생활에서 그의 예전 사업 동료들이 과도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에 맞서서 치열하게 싸웠고, 끊임없는 열정으로 사회의 부패를 근절시켰다. 그는 주택 환경, 위생, 치안 유지 활동을 향상시켰다. 공원, 시민회관, 노인과 빈민을 위한 집도 건설했다. 공유화를 통해 공익사업의 비용을 낮추는 데 성공했고, 미국에서 최초로 포괄적인 공공건물 규정을 확립했다.
 1905년 추문 폭로자 링컨 스테펀스는 『매클루어스 매거진』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톰 존슨은 개혁을 지향하는 사업가이다……. 그는 자신을 먼저 개혁했고, 그 뒤 정치적 개혁에 착수했다. 그의 정치적 개혁은 자기 계층의 개혁과 함께 시작되었다.” 스테펀스는 이어 존슨이 “미국에서 가장 훌륭하게 운영되는 도시의 가장 뛰어난 시장”이라고 선언했다. 존슨의 생각 중 다수가 당시 진정으로 혁신적이었으며, 새로운 형태의 시정을 확립했고, 여전히 다른 많은 존슨의 아이디어를 미국 전역의 개혁 성향 시장들이 따라하고 있다. (p.482-484)

 

 20세기 초창기 미국 사회에 업스윙을 가져온 건 어떤 하나의 정당도, 하나의 정책이나 공약도, 한 명의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도 아니었다. 그것은 무수한 시민들이 자신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에 관여하고, 힘을 합쳐 비판과 변화의 광대한 소동을 일으킨 것에서 생겨난 결과다. 이른바 “나” 개인주의에서 “우리” 공동체주의로의 진정한 변화였다. 19세기 말 격변하는 몇십 년을 살았던 미국인들에게 그런 방향 전환은 절대로 필연적이거나 심지어 예상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방향 전환이 분명하고 꾸준하게 발생했다. 우리는 그 현상을 이 책에서 생생한 세부 사항을 제시하며 예증했다. 양심을 자극하고 애국심을 결집시키면서 나타난 이데올로기적으로 다양한 진보주의 개혁가 세대는 공동주택, 이웃, 구, 그리고 노동조합에서 변화를 실험하고, 혁신하고, 조직하고, 일했으며, 이런 것이 주 의회, 연방 의회, 대법원, 그리고 백악관까지 파급 효과를 미치게 했다. 역사가들은 그들의 동기와 방법에 대해 다양하게 논쟁하지만, 진보주의자들의 유산은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경제적 평등, 정치적 공동체주의, 사회적 결합, 문화적 이타주의에 관한 여러 객관적 평가 기준에서, 그들은 20세기 첫 65년 동안에 벌어진 진정한 업스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월터 리프먼은 업스윙에 들어선 14년차에 희망찬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현실이 우리 목적의식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것을 느꼈다. 우리는 이러한 진보주의자들의 유산으로부터 그런 확신을 얻는다.”
 우리가 오늘날 마주하는 환경과 특유한 난관은 종종 불가사의하게 친숙한 과거의 반복이긴 하지만 미국인이 제1차 도금시대에 마주했던 난관과는 중대한 측면에서 좀 다르다. 그런 이유로 우리가 따라가야 할 길과 우리가 만들 해결책은 필연적으로 다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초 개혁가가 활용했던 사고방식, 수단, 방책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과거를 회고하는 일은 우리가 당면한 현재의 표류를 극복하고 고유한 통제의 형태를 성취하고, 우리의 경로를 뒤바꾸는 정보와 힘을 주어, 궁극적으로 미국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미국의 업스윙을 꾀함에 있어, 과거의 선배들이 그랬던 것 이상으로 우리의 눈높이를 높여야 한다. 그리하여 미국의 “우리” 공동체주의―흑백 통합이기 때문에 지속가능한 공동체 정신―라는 가치 있는 프로젝트를 달성하겠다고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새로운 미국을 만드는 어렵지만 가치 있는 계획에 맹렬히 헌신해야 한다. (p.501-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