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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외로운 선택 / 김현수 외 / 북하우스

 

 과거 청소년정책연구원에서 한국, 미국, 일본, 중국, 이 네 나라의 부모와 청소년의 관계에 대해 조사했는데, 자녀의 이야기를 가장 들어주지 않으면서 자기 이야기만 쏟아내며, 모든 대화를 기승전-공부 방식의 대화를 고집하고 있는 부모는 우리나라 부모들이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럴 만한 시대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많은 어른들은 청소년·청년 이야기를 듣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청소년, 청년들에게 해야 할 잔소리가 너무 많으며, 청년들에게서 마음에 드는 구석이 그리 많지 않고, 차라리 내가 해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할 뿐 아니라, 청년들이 살아가고, 서 있고, 뿌리내릴 자리를 그냥 없애버립니다. 그리고 실제로 자리를 내주지도 않습니다.

 

 아마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청년들의 위기를 간과한 몇 안 되는 정부 중 하나일 겁니다. 유럽연합이 청년들에게 여행비를 지원할 만큼 고민의 범위를 섬세하게 확대하는 동안 우리는 청년들을 위한 정책을 거의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교육, 고용, 주거에 대한 정책이 최근 10년을 전후해서 생겨났지만 아주 일부에 국한되었고, 특히 청년들을 위한 복지 정책은 거의 없었습니다. 청년들은 가난하지도 않고, 삶의 위기에 빠질 상황도 없다고 보았던 것일까요? 아니면 청년들의 가난과 삶의 위기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고, 이것을 이겨내는 것 또한 너무 당연한 것이라 여긴 것일까요?
 그간 정부는 청년 이슈가 시작된 이래 아주 최근까지 주거와 일자리 분야에서 비효과적인 정책으로 일관했습니다. 이 결과가 청년들의 마음에 큰 그늘을 만들고 사회적 불신을 만들기도 했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문제를 일부라도 해결해서, 희망의 서광이 비치도록 해야 하는데, 현재 여권, 야권 할 것 없이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청년들은 각자도생의 쓰디쓴 삶, 각박하고 관용 없고 차디찬 사회적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큰 내적 고통을 겪으며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청년 정책이 입시 정책의 오류를 반복하는 것과 같다는 비판이 큽니다. 입시 정책은 서울 및 수도권 소재의 대학에 진학하는 30%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는 정책이 주류를 이루었고, 이는 70%를 차지하는 비서울, 지방대 진학 학생, 비진학 청년들을 무기력화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실제로 가장 청년 정책을 필요로 하는 청년들은 지방대졸, 고졸, 독거, 비숙련, 비정규직, 여성들인데, 이 대상은 흔히 청년 정책의 대상에서 소외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청년 정책의 대부분이 취업과 일자리 중심의 정책이면서, 동시에 중장기 정책의 양질성 정책이 아니라 단기성, 선심성 정책이다 보니 이 정책에 대한 호응을 이끌어내기 어렵고, 청년들의 지속적인 취업을 위한 특정한 연계망이나 인적 네트워크가 형성되기 어렵습니다.

 

 생명 존중 가치관에 대한 세대 간의 갈등은 시간이 갈수록 더 커지고 있습니다. 기성세대는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젊은이들에게 더 크게 나타난다며 현 청년 세대들을 비판합니다. 기성세대에게서 이런 비판적 관점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지금의 삶이 ‘어렵지 않다’라고 보는 기성세대의 태도 때문입니다. 기성세대의 시각으로 보면 현재의 젊은 세대들이 ‘지금의 삶이 너무 어렵다, 부모 세대의 삶보다 더 어렵다’라고 주장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고, 이렇게 관점의 차이가 클수록 가정 내 갈등이 크고, 자녀들의 내적 고통도 큽니다.
 과거에는 ‘빈곤’과의 싸움이었다면, 지금은 ‘인정’과의 싸움입니다. 과거가 ‘신체적 고통’, ‘배고픔’, ‘생존’의 문제에서 고통을 경험했다면, 지금은 ‘내적 고통’, ‘외로움’, ‘삶의 의미’와 같은 마음의 문제에서 더 큰 고통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이런 시대적 고통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의 문제가 오히려 큰 이슈가 되어야 합니다.
 기성세대는 청년의 고통에 충분히 공감하지 못하고 있고, 청년들은 공감받는다는 느낌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청년들을 어렵게 하는 것은 이 모든 청년들의 심리적 고통이 사회적 구조와 산업구조의 영향이라는 사회적 이해보다 개인의 노력, 개별 가족의 능력 부족으로 간주되다 보니, 더 자신을 착취하고 자신에 대한 심리적 증오와 애증 속에 살아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지금의 청년들이 겪는 또 다른 유형의 큰 어려움은 사회적으로 공유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리광으로 치부되거나 나약함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몇 년 전 삿포로에서 일본의 사회복지학과 교수인 무카이야치 이쿠요시 교수와 나눈 대화가 큰 영감을 준 바 있어 인용을 해보고자 합니다.

“온갖 죽음과 수치감 속에 너무 많이 고생하며 살아남은 어른들과 전후의 처참한 상황을 복구했던 어른들이 일본을 세계 두 번째 경제 강국으로 부흥시킨 후부터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엄청난 숫자의 어른들이 모두 한결같이 일본 청년 세대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그 어른들은 모두 청년들을 혼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일본 청년들은 외국으로 나가고 싶어 하거나 무기력해지거나 은둔하거나 아예 부모와 다른 세계, 철저하게 작고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자신만의 세계에 집착하는 쪽으로 바뀐 것 같습니다. 개인화되고, 파편화되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은 세대 간의 통합, 세대 간의 계승과 발전에서 완전히 실패한 것 같습니다. 지금 그 실패가 일본 무기력의 큰 원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국도 비슷한 길을 걷지 않을까 우려가 됩니다.”

 

 2020년 우리나라 전체 자살사망자 수는 총 1만 3,195명이었습니다. 이는 전년 대비 604명(-4.4%)이 감소한 것입니다. 일평균 자살 사망자 수는 35.1명으로 2019년(37.8명)보다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으며, 인구 10만 명당 자살 사망자 수는 25.7명으로 2019년 26.9명 대비 1.2명 감소했습니다.
 자살률(인구 10만 명당 명) 감소를 보인 연령층은 40대 이상이었습니다. 30대 이하에서는 오히려 증가했습니다. 특히 20대의 자살률이 전년 대비 12.8%로 가장 많이 증가했고, 10대는 9.4%, 30대는 0.7%의 증가율을 보였습니다. 70대와 60대는 자살률이 전년 대비 각각 16%와 10.7%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0대는 자살률뿐 아니라 우울증도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의료보험공단에 따르면 20대 우울증 환자는 2016년 6만 4,497명에서 2020년 14만 6,977명으로 두 배 이상 급증한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30대에서도 사망자 4,759명 가운데 1,874명이 자살로 사망해서, 자살사망자가 거의 두 명 중 한 명꼴에 가깝습니다.

 

 우리 청소년·청년들은 자신을 미워하고 증오하고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비율이 높습니다. 더 완벽해지고 더 성취하고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 더 인정받으려고 하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좌절이 자해, 자살로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 자기 증오(self-hate)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그 씨앗이 부모로부터 기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청소년기에 자신이 키우며, 청년기가 되면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 데다 어떤 경우 자신의 것이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이 강력한 자기 증오가 자신을 살해하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부모의 기대를 채워줄 자녀는 자신밖에 없고, 부모는 자신에게 올인했고, 취업은 어렵고, 경쟁을 뚫기는 불가능하고, 이런 가까운 이들의 기대에 찬 시선이 화살로 변해 자신의 마음을 여러 번 관통하면, 그러다 보면, 버티고 버티다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때 도움을 요청하면 되는데, 도움을 청하지 못합니다. 도움을 청하면 기대가 깨지고, 타인에게 자신의 실체가 드러나면 다 같이 죽게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합니다. 차라리 혼자 죽으면 주변은 살릴 수 있는 기분이구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독립이고 자립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 고통이 자살 생각을 이끄는 요인으로 작동할 정도로 때로는 강력하게 작용합니다.
 도움을 요청했을 때 받을 사회적 무시와 타인의 시선에 대한 지나치게 과장된 두려움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해독제는 말 그대로 ‘자기 독립’이고 ‘회복’이고 ‘자신의 온전한 자립’입니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바라보고 건강한 경계를 세우고 연결하고, 연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죽고 싶은 마음을 가져본 적이 있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면담한 여성 청년들은 “어떻게 죽고 싶지 않을 수가 있어요?”라고 제게 되레 되물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죽고 싶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신기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죽고 싶지만, 단지 자살이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커다란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행위이기 때문에 그것을 선택하기는 어려웠다고 하였습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의미가 없지만’ 버티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용어가 한국 사회에 유행하듯, 삶의 근본적인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이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이란 일상 속에서 느끼는 아주 작은 것들이었습니다. 예컨대, 사고 싶은 물건을 마침내 사게 되었다든지, 맛있는 음료를 마셨다든지, 그날 읽었던 책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발견했다든지 하는 것들이지요. 반면,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라보면 이들에게 삶이란 너무나 암울하고 희망이 없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의미를 발견하기가 힘들다는 것이었죠.

 

 또한, 응답자의 56.2%가 코로나 19 이후에 돌봄노동이 증가했다고 답했으며, 33.5%가 독박 돌봄노동을 수행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설문조사에서는 자녀의 연령대에 따라 겪는 돌봄노동의 부담에 대해서는 따로 조사를 수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직접 만나본 젊은 여성들 중 아이가 있는 경우에는 양육의 부담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심하게 느끼고 있는 경우가 상당히 있었습니다. 특히, 집안의 경제적 상태가 좋지 못하거나, 남편을 비롯한 주변 가족의 도움을 받지 못하거나, 이혼 후 싱글맘으로 혼자 양육을 하는 경우에는 그 스트레스가 매우 심했으며 우울감을 호소하기도 하였습니다.

요즘엔 솔직히 결혼을 왜 했나, 아이를 왜 낳았나 하는 생각을 해요. 아이가 둘인데, 하나는 초등학생이고 하나는 아직 안 들어갔는데… 애들 생각하면 미안하지만, 결국 결혼하고 아이 낳은 여자들만 죄인인 거예요. 저희 또래 친구들은 다 저랑 비슷한 생각인 것 같아요. 한 번은 너무 우울하고 미칠 것 같아서 친구와 전화했는데, 둘이 이야기하다가 펑펑 울었어요. 너무 힘들고, 너무 지치고… 이곳저곳에서 압력은 너무 많고… 또 아이들이 어리니까 다 챙겨줘야 하고… 우리끼리 그랬어요. 이러다가 인류 멸망할 거라고. 적어도 여자들은 없을 거라고. 하나하나 다 죽어서 말이에요.

 

 특히, 오늘날 여성 청년이 경험하는 사회는 극단적인 비난이나 혐오가 만연한 사회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남녀 갈등, 동성애, 인종 차별, 장애인 문제, 학벌 문제 등등의 여러 가지 위계와 차별 구조에 직면하고 있으며, 자신이 조금이라도 ‘다수의 의견’에 반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든지 비난받거나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불안과 공포를 느끼고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살아가는 일상의 공간은 늘 ‘위험하고 안전하지 않은’ 공간으로 나타납니다.

저는 여대를 입학했을 때 나름의 큰 환상? 기대? 같은 걸 가지고 입학했는데 어… ‘여대가 결코 안전한 공간은 아니다’ 그런 생각이 지금도 많이 들고… 그래서 올해 초 사건 때도 많이 들었고… 말씀하신 것처럼 너무 극단적인… 너무 극단적으로… 익명성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너무 서로가 극단으로 가는 것 같은 느낌? 너무 이분법적으로 사고하고?

극단적인 의견을 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다 보니까 인종 차별, 장애인 차별, 정말… 학벌주의에 기반한 차별… 이것도 정말 심했어요. 제가 있는 여대에서는 “다른 학교랑 묶이는 게 정말 싫다. 우리는 더 고고해야 한다” 그러는데 ‘그 고고함의 기준이 대체 뭐지?’ 저는 그 안에 구성원으로 있으면서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고, 그냥… 나와 비슷한 무리, 그리고 나머지는 다 타인으로 배제하려는 그런 게 점점 더 극화되는 거 같아요.

 위의 언급은 모두 여대에 재학 중인 20대 여성들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이들은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남성의 여성 혐오에 대한 불안과 불편함을 느껴왔기에, 여대는 적어도 그런 문제로부터는 안전하다고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막상 여대에 들어와도, 학과 온라인 대화방이나 게시판에서 동성애 혐오, 인종 차별, 외국인 혐오, 채식주의에 대한 불인정 등등, 타인들이 선택한 삶에 대해 관용과 인정이 존재하지 않고 쉽게 혐오가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것을 깨닫고 절망하게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온라인 환경에서의 대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보다 세밀한 분석이 필요할 것입니다. 관찰한 바에 따르면, 20~30대가 주로 활동하는 익명으로 이루어지는 온라인 환경에서 만일 어떤 사람이 중국인에 대한 혐오 감정을 드러내면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씩 거기에 동의하고 그 혐오 감정을 점차 강화하면서 일종의 ‘진실’을 구성해버리는 방식의 대화를 진행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기와 ‘다른’ 존재들에 대한 혐오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동조 집단을 형성함으로써 일종의 ‘정체감’ 내지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만일 누군가 한 명이 그 의견에 대해서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면, 이미 다수로 이루어진 혐오 집단이 그 한 사람을 대상으로 극단적인 비난을 퍼붓고 ‘사상 검증’을 하려 들었습니다. 사실 온라인 대화방의 모든 성원이 중국인 혐오에 대해 동의하는지는 알 수 없었는데, 반대 의견을 드러내게 되면 쉽게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기에 불편한 감정을 느끼더라도 차라리 잠자코 있는 것을 선택하리라는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여성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KDWI Brief, 2020년 7월 31일), 한국의 가정 폭력 신고율은 워낙 낮아서 가정 폭력 신고율 등으로 가정 폭력의 증감을 유의미하게 확인할 수는 없지만, 현장에서는 가정 폭력이 증가되고 있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한국여성의전화 상담소 통계를 근거로 코로나 19가 확산되기 전후 전체 상담 중 가정 폭력의 비율을 비교할 때, 2020년 1월 26%에서 2~3월 40%대로 가정 폭력 상담 비율이 증가하였습니다. 전국가정폭력상담소 현장에서는 코로나 19 장기화로 재택근무, 등교 중단, 실직 등이 늘어나고, 경제적 문제까지 가중되면서 갈등과 폭력이 증가해 가족 상담 요청이 많았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여성긴급전화 1366의 전국 현황을 보면, 2020년 가정 폭력 피해상담 비율은 57.6%이고, 작년 동기간 4~6월 전화 상담률이 감소했던 것과 달리 올해는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여성 청년들은 심각한 고민이 있거나 심리적인 어려움에 처했을 때 대부분 주변 사람에게 말하거나 도움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거의 모두 무작정 혼자 괴로움을 견디거나 일기를 쓰거나 산책을 하는 등 개인적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개인적인 해결책은 결과적으로 고립감과 외로움을 더 강화하고 다시 우울감을 발생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다르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지 않았으며, 개인적으로 병원을 찾아갈 정도가 되기 전에는 어떠한 전문적인 기관에 도움을 청하려고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우울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우울감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혼자 시간을 견뎌내는 방식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좀 더 세분화해서 살펴보았더니, 80년대생의 자살사망률이 심각하게 나타났지만, 더 심각한 연령층은 90년대생이었습니다. 90년대생 중에서도 9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더 자살사망률이 높았습니다. 80년대생의 엄마 세대인 1951년생의 자살사망률과 1981년생의 자살사망률을 비교해보았더니 1981년생의 자살사망률이 5배나 높았습니다. 1997년생 청년 여성은 1951년생이 청년일 때와 비교했을 때 7배나 높았습니다.
 이것은 엄마들 세대보다 딸들의 세대에게 20대에 자살을 선택하게 만드는 삶의 조건들이 5~7배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쩌면 이대로 두었다가는 아마 지금으로부터 10년 뒤에는 30~40대 자살사망률이 높다는 뉴스가 나올 것이고, 20년 뒤에는 40~50대의 자살사망률이 최고로 높다는 얘기가 나올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상황은 코로나 19가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20~30대 여성의 자살사망률 증가는 코로나로 촉발됐을 수는 있지만 어느 정도 예견된 결과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합니다. 사회는 발전하였고 대한민국은 선진국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보건의료 체계도 크게 개선되어가는데, 자녀 세대는 그 혜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자살은 불행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사회환경 요인이 몰고 간 절망이자 인위적인 생명의 단절입니다. 우리나라는 2011년에 자살예방 및 생명존중문화 조성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어 2012년 중앙자살예방센터가 신설되었습니다. 자살 예방과 관련된 국가적인 책임을 구체화하면서 체계적인 정책 실행을 위한 기초가 마련되었습니다. 2019년에는 범부처 정책 대응을 위해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자살예방정책위원회’도 신설되었습니다. 하지만 감소하지 않는 청년 자살률은 우리 사회 청년에게 맞는 자살 예방 정책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청년은 사회가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한두 개 정책이나 서비스만으로는 청년의 자살 고위험을 낮추기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청년 자살률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이 사회가 살기 어려운 곳이라는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세대를 위한 정책이 필요합니다.
 청년의 불행이 여성들만의, 남성들만의 불행일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한 세대의 절망은 모든 세대의 불행으로 상호 확산됩니다. 마치 감염된 절망감처럼 모두에게 편하지 않은 사회, 아무도 경청해주지 않는 삶으로 표현되는 이 시대 청년의 일상을 어떻게 하면 더 나은 하루로 만들어갈 수 있을까요?
 어떤 사회 서비스를 누구에게 어떻게 전달하도록 설계하여야 할까요? 근본적인 기획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매년 상당수의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자살 시도를 하고, 특히 청년의 자살이 증가하고 있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여러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기성세대가 만든 지금의 ‘사회’ 속에서 청년들이 행복하게 살기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이, 선생님들이, 상급자들이 만들어낸 사회는 청년들의 공정심, 형평심, 자존감을 지켜주고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루하루 파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청년들은 어떤 곳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까요? 고시원 등 최소 주거 기준에 미치는 못하는 공간에서 생활하는 경우는 2.39%였습니다. 지역적 차이는 크지 않으나 1인 가구는 전체 청년 인구에 비해 3배 가까이 높았습니다. 최소 주거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집’ 아닌 ‘방’에 거주하며 마음 편히 있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월세 체납으로 인한 퇴거 위험은 약 24%의 청년이 경험했고, 월세 증가로 인한 퇴거 위기는 절반 가까운(44.16%) 청년이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심각하게는 주거비 부담으로 식비를 줄인 경험 역시 절반 가까운 46.12%가 경험하는 등 상시적인 ‘방’ 퇴출의 위기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청년에 대한 관심이 시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폭력의 치명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단순히 정신건강만이 아니라 뇌의 성장과 발달에도 악영향을 끼쳐서 생애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신체적인 학대나 방임은 뇌의 중요 성장을 막아 장기적으로 인지, 언어, 학습장애와 정신건강 문제의 원인이 된다거나(Tarullo, 2012), 아동·청소년기의 비만이 성인기 심장병, 폐·간 질환, 고혈압, 당뇨, 천식, 비만과 관련성이 있다거나(Widom, Czaja, Bentley, Johnson, 2012) 전 생애에 걸쳐 술과 약물 남용의 원인이 된다(Felitti, Anda, 2009)는 연구들이 그 결과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신경 발달의 문제는 부정적인 스트레스 상황이 아닌 경우에도 과다 경계, 불안과 충동성을 일으키고(Perry, 2012), 학대 경험을 통해 아동이 느꼈던 두려움이나 외로움, 불신의 감정이 성인기의 우울과 자살 시도로 이어지며(Felitti, Anda, 2009), 청소년기와 성인기에 걸쳐 감정 조절의 어려움을 야기한다고(Messman-Morrem, Walsh, DiLillo, 2010) 보고되고 있습니다. 즉 학대나 방임으로 발생한 신체적 손상은 일시적이고 치료가 가능하지만, 그로 인한 정신적 고통과 외상은 아동의 전 생애에 걸쳐 신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의 연구에서는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까요? 류정희 외(2017)의 연구에 따르면, 청년들이 살아오면서 어떠한 유형이든 부정적 경험을 한 경우는 66.4%나 됩니다. 이중 신체, 정신적 학대 경험은 약 30%, 가정 폭력을 목격한 경험은 52.5%나 되었습니다. 가족 내부에서만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폭력을 목격한 경험은 38.5%, 또래 폭력은 14.2%가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생애과정 전체의 폭력 경험, 즉 아동기와 성인기 모두 폭력을 경험한 경우는 41.6%나 됩니다. 아동기와 성인기에서 폭력 피해 경험이 전혀 없는 경우는 18.8%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80%는 아동기 또는 성인기에, 혹은 아동기와 성인기에 모두 폭력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주목해야 할 결과가 있습니다. 아동기에는 겪지 않았지만 성인기에만 폭력을 경험한 비율은 3.3%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동기와 성인기 모두 폭력을 경험한 비율은 41.6%나 되는데도 말이죠. 이는 폭력의 반복성에 대해 좀 더 많은 관심을 촉구하는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호소하는 많은 청년들이 문제의 원인을 사회 구조에서 찾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찾았습니다. 가정사에서 비롯한 고통, 성장 과정, 자신의 무능력과 부족함 등 개인의 문제를 많이 얘기했습니다. 가정과 사회에서 상처받고, 아프고, 힘들고, 실패했던 것이 자기 탓이라며, 자신들의 맨살을 내보이는 노출 같은 고백을 이어갔습니다.
 위기전화 상담에 전화한 청년들은 대부분 오랫동안 아팠지만 어디에도 아프다고 이야기하지 못한 채, 자기 나름의 방법들을 한동안 찾아 헤맸던 분들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청년 / 쓰는 사람들 / 호밀밭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전공하고 엮어라.’ 학교현장에서는 이른바 학생부종합전형에서 말하는 ‘전공 적합성’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학교에서 진행하는 모든 것들이 전공과 연관성을 지녀야 대입에 더 유리할 거라는 생각에, 과도하게 전공과 학교생활을 엮도록 유도하는 경우가 있다. 당장에 나부터가 전기공학자가 되고 싶어 하는 우리 반 아이와 상담하면서, 전기를 활용해 타인을 돕는 경험을 만들어보자고 말했었다. 학교가 파란색의 농도까지 맞추라고 한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떠오르는 부분이었다.
 학교를 떠난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이냐고 묻자, 라라님은 선생님의 말과 학교의 목표에만 맞추어 나아가고 있는 자신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학교에서 하는 공부를 다른 방향으로 해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공부하는 방향이었냐고 묻자, 학생들이 스스로 주도하에 궁금한 점을 찾고 질문을 하고 원하는 걸 공부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원하는 책을 읽는 것, 원하는 방향을 찾는 것, 공부라 불리는 것 외에 이른바, 딴짓으로 정의될 듯한 것들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앞선 대화 중, 오후에는 ‘하고 싶은 걸 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라라님에게 ‘하고 싶은 걸 하는 시간’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물었다. 라라님은 파티쉐를 꿈꾸며 빵집 아르바이트를 한다기보다는 경제생활을 미리 경험해 보며 사회를 공부하는 쪽에 가까웠다. 특별히 학교에서 배우기 어려운 진로를 꿈꾸는 학생들이 자퇴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라라님이 진짜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라라님은 ‘하고 싶은 걸 하는 시간’에 앞으로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더 안정된 상태에서 찾는 중이었다. 진로를 특정해 무언가를 공부한다기보다는, 어머니와의 상의를 통해 중국어와 한국사, 검정고시 공부를 진행한다고 했다. 그밖에 자유로운 독서나 검색을 통해 진로를 고민하고 있었다. 검정고시 준비를 하고 있긴 하지만 입시 때문에 학교를 떠난 것은 아니며, 대학에 꼭 가야 할지 여전히 고민 중이라고 했다. (p.28-29)

 

 라라님이 자퇴 전에 학생기자단 신문에 보낸 글의 내용 중 ‘더 후회없이, 즐거운 삶을 살 자신이 있다’고 적은 문장이 특히 멋져 보였다. 라라님 덕분에 즐거운 삶이라는 건 바로 자신에 대해 충분히 아는 것, 이를 바탕으로 무언가를 스스로 결정하는 데에서 온다는 걸 배울 수 있었다. 아이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도록 돕는 학교, 그런 학교라면 아이들 본연의 색깔, 교사 본연의 색깔을 다양하게 드러내고, 칠해보고, 섞어볼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란색만으로 그린 바다는 바다 본연의 색을 낼 수 없을 것이다. (p.35)

 

 ‘노력해서 합격하면 그만’이라는 말 아래, ‘누구나 치르는 것들’이라는 전제 아래 압사되는 삶이 있다. ‘죽도록’ 노력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친구는 기숙학원 사람들 중, 고등학교 1학년 때 생각만큼의 성적을 받지 못하자 곧장 자퇴를 하고 학원에 들어와 몇 년씩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그들에게 고등학교란 학생으로서 생활하고 타인과 교류하는 공간이 아니라, 온전히 시험의 예비과정으로서의 도구적 공간이었을 것이다. 성년이 되지도 못한 구성원들에게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드는 사회는, 과연 안전한 사회인가?
 현재 근로기준법상 평일 근무는 1일 8시간, 주당 총 40시간이며, 연장 근무를 포함하여 52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고등학생이 일주일 동안 책상 앞에 앉아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학교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대다수의 고등학생은 8시부터 22시까지 기본적으로 14시간 동안 학교에 머무른다. 그중 밥 먹는 시간, 쉬는 시간을 제하면 약 11시간을 수업과 자습으로 보내게 된다. 이미 일일 근로시간인 8시간을 훌쩍 넘긴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는가? 한국의 고등학생은 밤 10시에 학교를 나와 휴식을 위해 발걸음을 옮기지 않는다. 학원과 독서실은 ‘야간근무’이고, 주말은 밀린 공부를 처리하는 ‘잔업처리’의 날과 다름없다. 더욱 불안하고 더욱 절박한 n수생들에게 이 현실은 훨씬 가혹하게 작동한다.
 ‘당연함’ 앞에 안전장치는 필요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서 발표한 「아동·청소년인권실태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고교생의 약 70%가 수면시간의 부족을 호소했고, 약 35%가 일주일에 운동을 한 횟수가 1회도 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더불어 전체 청소년의 약 66%가 자살을 생각해본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인간으로서 누려 마땅한 자율이 한치도 허용되지 않는 것이 이렇게나 비정상적인데, 그 사실은 참 쉽게도 잊힌다. 수험생에게는 아주 작은 일, 이를테면 따사로운 햇볕을 즐기는 일, 밥을 먹느라 한 시간을 쓰는 일,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일들이 모두 죄책감을 느껴야 할 일이 된다. 그런 자기감시적 억압은 ‘당연한’ 것이 되고, 견뎌내지 못한 이는 나약하다고 매도된다.
 ‘당연하지 않은 당연함’을 마주할 때마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누구나 한 번쯤은 시험을 준비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리고 그때의 긴장과 고통은 시간 속에 잊힌다. 대부분이 겪어보았을 고통은 ‘대부분이 겪기 때문에’ 평가절하당하고,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변화는 요원해진다. (p.53-54)

 

 너는 네 존재가 ‘쓸모를 잃어버렸다’고 이야기했다. 네가 학원 생활을 할 때 자주 연락을 했었는데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건 처음이었다. 네가 그런 말을 꺼내는 게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엄마에게도, 친한 친구에게도,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던 이야기에 덩달아 목이 막혔다.
 이렇게 콕 집어 질문받지 않았다면, 아무도 너에게 물어봐주지 않았다면, 너의 이야기는 한 번도 말해지지 못한 채 너만이 아는 이야기로 남았겠구나. 네 속에 갇혀서, 오래도록 응어리로 남았겠구나. 불면증이 생겨서 수면유도제를 처방받고, 허구한 날 위경련에 시달림에도 앉아서 공부하고, 우울증으로 깊이 침잠했을 너의 시간들은 마치 없었던 것처럼 잊혔을 것이다. 세월이 지난 후 고난의 트로피처럼 옛이야기로 등장할 수 있다면 다행일까.
 존재할 자리를 부여받지 못한 이들은 ‘완성태가 되기 위한’ 잠재태로서만 존재한다. 우리나라에서 n수생을 위한 자리는 없다.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에서는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를 위해서 장소를 마련하고, 그를 환대할 때 비로소 인간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수험생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는 고작해야 좁은 독서실이다. 그나마도 환대의 자리로서가 아니라, 사용료를 지불해야 하는 상업적 공간에 불과하다. 존재하되 보이지 않는 이들의 자리는 이곳에 없으며, ‘언젠가 사람이 될 존재’로서 기약 없이 유예된다. (p.56-57)

 

 그는 자신의 동기 중 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5% 정도이며, 90% 이상의 보호종료아동들은 대부분 숙식이 제공되는 생산직 공장에 취직한다고 했다. 그들은 홀로 이 세상에 던져지지만,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받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은 그들 중 누군가 큰일을 당했을 때다.
 A의 동기 한 명이 보호종료 후 2년 만에 공장 프레스기에 끼어 사망했는데, 사고가 난 기업은 나 몰라라 했다. 한 청년이 죽었지만, 연고가 없는 그를 위해 나서 주는 사람은 없었다. 연고가 없기 때문에 기업이 배상해야 할 대상도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떠나간 친구가 갖고 있던 얼마 안 되는 재산은 나라의 소유가 된다. A는 이때 세상이 참 부당하다 생각했다고 한다.
 가장 심한 것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다. 그들이 자라난 시설은 천주교 소속이고, 천주교는 자살을 대죄로 여기기 때문에 자살자의 장례식은 시설이 관여하지 않는다. 그들을 키워준 수녀님들도 오지 않는다. 자살한 보호종료아동의 장례식은 그를 기억하는 같은 처지의 친구들이 돈을 모아 치루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A는 아직 젊지만 동기 중의 10% 정도는 이미 소리 없이 이 세상을 떠났다. 그들 중 상당수의 사인은 자살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들을 양육한 기관에서 보호종료 이후의 청년을 위한 자조 조직을 만들려는 노력도 있다. 후견인 없이 세상에 홀로 나서야 하는,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날 때도 홀로여야 하는 청년들을 위한 최소한의 안정장치를 마련하기 위한 노력이지만, 자살자들은 여기에서마저도 외면받는다. (p.112-113)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장애인 인구수는 2020년 기준 263만 명으로 20명 중 한 명이다. 전체 장애 유형 중 후천적 장애가 88.9%로 90%에 달하는 수준이다. 나도, 우리 가족도, 가까운 친구도 모두 언제든지 장애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장애에 대한 이해도, 혹은 장애 감수성이 현저히 낮다. 나만 해도 그랬다. 인구 20명 중 한 명이라는 장애인이 왜 나의 생활권에선 도통 보이지 않는 건지 의문을 갖지 않았다. 그저 세상에 장애인의 수가 적은 줄로만 알았다.
 비장애인의 세상은 장애인들에게 여전히 불친절하다. 시각 장애인의 경우 버스를 타려고 해도, 몇 번 버스가 곧 도착한다는 안내에 이어 도착한 이 버스가 내가 타는 그 버스가 맞는지 도통 알 수 없다. 지하철역 안 유도 블록을 따라 장애인 화장실을 가려고 해도, 장애인 화장실이 비장애인 화장실의 내부에 있는지 외부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어린 시절부터 장애를 겪었다면, 오랜 세월 점자 사용으로 지워진 지문 때문에 지하철 내 관공서 무인발급기 이용도 어렵기만 하다.
 예영이가 대중교통을 타고 좋아하는 피아노를 편하게 치러 다닐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버스 정류장에 서 있으면 ‘기척을 내고’ 다가와 몇 번 버스를 타냐고, 버스가 왔다고 말해주는 따뜻한 이웃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지하철역 안 화장실 앞에서 망설이고 있으면 화장실 밖 세 시 방향에 장애인 화장실이 있다고 알려주는 다정한 행인이 있어도 좋겠다.
 흔쾌히 팔꿈치를 내어주고 언성을 높이지 않는 콜택시 운전사나, 시시콜콜 수다가 자유로운 또래의 활동 지원사 선생님들도 많아지면 좋겠다. 그리고 세상에 꼭꼭 숨어있는 장애인들이 맘 놓고 밖에 나올 수 있도록, 비장애인들의 장애에 대한 이해나 장애 감수성도 더 깊어지면 좋겠다. ‘나’는 오늘도, 내일도, 혹은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서도 언제든지 장애가 생길 수 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라도 이런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대비해야 한다. (p.185-186)

 

 미국에 있는 갈로뎃 대학(Gallaudet University)은 농인 대학교이다. 수업은 당연히 수어로 이루어지며 캠퍼스 공간 내 모든 곳에서는 수어로 의사소통을 한다. 행정 시설, 편의 시설에 근무하는 사람도 청인이든 농인이든 모두 수어를 사용하는, 수어가 당연한 사회인 것이다. 이곳에서는 수어를 모르는 청인이 소위 ‘장애인’의 범주에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수어를 모르는 청인이 갈로뎃 대학교를 방문한다면 음성언어를 수어로 통역하는 통역사를 대동하고 가야 할 것이다.
 청각장애를 듣지 못하는 ‘결핍’의 관점이 아니라 의사소통 수단이 청인과 다른 ‘다양성’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함을 매번 깨닫는다. 여전히 사회는 ‘듣는 사람’이 주류이지만 농인들의 끈질긴 권리 싸움으로 결국 2016년 수어를 공식 언어로 인정받아 낸 것처럼 작은 움직임들이 사회를, 환경을, 우리의 인식을 결국 바꿔나가리라 생각한다. (p.199)

 

 우리는 간담회가 끝난 후에도 긴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에는 서로가 공유하는 여러 사회문제에 대한 의견이었지만, 점차 개인적인 고민과 정체성의 문제로 대화가 이어졌다. 학선 씨는 자신이 한 번도 대한민국에서 ‘청년’이었던 적이 없다고 했다. 한국 사회에서 청년은 ‘대학생’이거나, 하다못해 ‘취업준비생’이라고, 이미 직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던 자신은 그사이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질적인 존재라고 했다.
 나는 곧바로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학선 씨가 느끼는 감정은 단순히 일상에서 느끼는 소외감만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몇 년간 ‘청년’이란 집단을 호명하고, 정책을 개발하는 이론적 근거는 ‘이행기 청년’ 관점이었다. 노동시장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의 정체기를 ‘청년’으로 호명하는 것이다. 그 시기에 이미 노동을 하고 있던 나와 학선 씨가 자신을 ‘청년’으로 정체화하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p.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