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인류의 공존 플랜 / 미노슈 샤피크 / 까치
사회가 가장 중요하다. 우리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은 자수성가했으며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자부하며 살아간다. 인생에서 누리는 행운(혹은 불운)을 부모 덕(혹은 탓)으로 돌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운명을 결정짓는 더 큰 힘이 있음을 고려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우연히 결정된 출생지, 역사상 특정한 시기를 지배하는 사회 풍조, 경제와 정치를 통제하는 여러 제도 그리고 무작위로 주어진 행운. 실제로는 이처럼 광범위한 요소들이 우리가 사는 사회의 속성과 인간의 경험을 결정짓는다. (p.19)
토머스 홉스에 따르면 이기적이면서도 합리적인 개인이 야만적인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주권자의 권위에 스스로 복종하는 것이었다. 존 로크는 사회계약의 목적이 시민들의 생명과 자유, 행복을 지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주권자가 그 권리를 보호하지 못할 때에는 시민들이 봉기하여 새로운 권력구조를 창조해야 마땅하다고 보았다. 장 자크 루소는 인간이 상호의존적인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좋은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려면 타협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개인의 자유를 지키는 일을 중시했다. 루소에 따르면 사회계약에는 의회와 같은 정치제도가 필요했고, 이것은 시민들이 입법권자가 되어서 자발적으로 복종할 법률을 제정하고 국가의 권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도록 했다. 현대의 기준에서 보면, 개인과 국가 간의 상호기대를 규정할 때에 세 철학자는 모두 최소한의 권리와 의무만을 규정했다. 그들에게 사회계약은 사회에서 착취당하지 않고 살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 조건에 불과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주권자가 점차 시민들에게 더 많은 권력을 이양할 수밖에 없어지자, 사회계약을 둘러싼 논쟁은 국가에 대한 시민의 의무가 무엇이고 또 상호의무가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현대 경제학의 토대를 놓은 사상가 애덤 스미스는 『도덕 감정론』에서 각 차원에서 작동하는 “동감의 원리”가 필요하다고 말했고, 이 원리가 작동할 때에 이기적인 개인도 타인의 복지에 관심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스미스에 따르면 동감의 원리는 사회적 연대가 필요한 도덕적, 정치적, 경제적 근거를 마련한다. 도덕적 근거란, 기본적인 보건의료와 안전보장 서비스 이용, 사회에서 배제되지 않고 생활하기에 충분한 소득, 일자리를 얻고 지식을 갖춘 시민으로 살아가기에 충분한 교육 등 개인의 기본적인 필요를 모든 사회가 충족시켜야 하며, 이를 제공하지 않는 사회는 도덕적으로 부당하다는 것을 말한다. 한편 정치적 근거란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시민들이 공동의 목표를 가졌다고 느낄 만큼 공동의 경험을 충분히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경제적 근거란 질병, 실업, 생활 보조금 등에 대비하여 다수의 시민이 위험을 분담하는 편이 개인이 혼자 자신을 보호하려고 노력하는 일보다 훨씬 효율적이라는 의미이다. (p.26-27)
사람들은 흔히 복지국가의 목적이 부자로부터 빈민에게로 부를 재분배하는 데에 있다고만 오해하는데, 이는 일부 국가들이 보편 복지 국가로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물론 복지국가에는 부를 재분배하는 기능도 있지만, 실제로 이는 전체에서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복지국가의 기능을 따져보면, 돼지 저금통(생애 주기별 위험에 대비하는 공동 보험) 기능이 4분의 3을 차지하고 로빈 후드(부자들의 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기능은 4분의 1에 불과하다. 즉 복지국가 제도의 중요한 역할은 생애 주기에 걸쳐서 돈을 재분배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미래에 일자리를 얻을 전망이 밝더라도 당장 학비를 대출할 능력이 없다. 또한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서 자신이 어떤 질병에 걸릴지, 혹은 얼마나 오래 살지 알지 못한다. (p.35-36)
과거에 사회가 격변할 때면 사람들은 사회계약을 다시 규정하고는 했다. 이를테면 미국은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뉴딜 정책을 도입했고, 영국은 세계대전을 치른 뒤에 사회보장 제도를 확대하는 베버리지 보고서를 발표했다. 탈식민지화로 독립한 국가들은 경제 및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정부의 개입을 강조하는 정책을 펼쳤다. 대처-레이건이 주도한 보수 혁명의 이념적 배경에는 오랜 경기 침체와 인플레이션이 있었고, 당시의 보수주의는 현재 영국과 미국의 정책 기조를 구성하는 뼈대가 되었다. 나는 이 책에서 수많은 과제들이 산적한 오늘날 역시 새로운 사회계약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주장한다. 대중영합주의의 부상, 세계화와 신기술에 대한 반발,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한 여파, 코로나바이러스, 여성의 역할을 둘러싼 문화 전쟁, 인종 차별, 그리고 기후 변화에 따른 대책을 요구하는 청년들의 시위가 바로 그 과제이다. (p.42)
여성이 무급 가사노동에 소비하는 시간이 적은 나라(상수도 시설이 갖춰지고 노동에 대한 부담을 경감하는 가전제품을 이용할 수 있는 곳) 혹은 남성이 가사를 분담하는 나라일수록 여성의 노동 능력은 빠르게 향상되었다. 아울러 어린이집과 육아휴직 같은 가정 지원 정책에 더 많이 지원한 국가일수록 더 많은 여성이 노동시장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도 입증되었다. 반면 이와 같은 지원이 부족한 나라일수록 여성고용률은 낮게 나타나는 편이다.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는 세계적인 흐름으로 앞으로도 가속화될 것이며, 새로운 사회계약의 중요한 토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제조업(남성 고용률이 높은 분야) 일자리가 줄어들고, 의료나 교육 서비스 같은 서비스업 일자리(여성을 위한 일자리가 더 많은 경향을 보인다)가 늘고 있어서 여성고용률은 증가 추세에 있다. 더욱이 고등교육을 받은 남성보다 여성 인구가 더 많아지고 있으므로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는 앞으로도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정책입안자들은 경제적인 압력 때문에 여성의 재능을 최대한 활용할 방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근 IMF 보고서에 따르면, 노동시장에서 성별 격차를 해소하는 일은 경제성장률을 높일 뿐만 아니라 생산성을 향상시키기도 한다. 각자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에 노동자들을 배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잠재적 경제 효과 역시 매우 크다. 여성고용률의 상승은 특히 국민연금 등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데에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일본 등의 국가들은 더 많은 여성이 노동시장에 참여하여 연금 납부자가 되는 일이 고령 인구를 부양하는 데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p.47-48)
내 생각에 새로운 사회계약을 설계하는 지침에는 크게 세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사람은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요인들을 보장받아야 한다. 이 최소한의 요인들에는 기본적인 의료 서비스, 교육, 복리후생 보험금 그리고 노년에 빈곤에서 벗어나게 해줄 연금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때, 최소한의 수준은 해당 사회의 경제적 형편에 따라서 달라진다. 둘째, 모든 사람은 할 수 있는 만큼 사회에 일조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사회계약은 은퇴 후까지 평생에 걸쳐 교육과 훈련의 기회를 최대한 보장해야 하고, 보육 지원 사업을 제공하여 여성들이 일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셋째, 질병과 실직, 노화와 같은 위험 요인과 관련해서 최소한의 것을 제공하는 일은 개인과 가정 혹은 사업주에게 감당하도록 요구하지 말고, 사회가 분담하는 편이 낫다. (p.53)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를 보다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손실은 엄청나게 크다. 1960년을 기준으로 미국의 의사와 변호사 가운데 94퍼센트는 백인 남성이었다. 50년 후에 이 수치는 62퍼센트로 떨어졌는데, 이는 더 많은 여성과 흑인 남성, 소수 민족이 이들 직업군에 진입할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1960년부터 2010년까지 경제 전반에서 가용 인재를 제대로 활용할 때 생산성이 20-40퍼센트 향상된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이 사실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 미국 경제는 백인 남성만의 좁은 인재 풀에서 벗어나 폭넓은 인재 풀을 활용하면서 적절하게 인재를 배치함으로써 생산성을 대폭 상승시켰다. 이와 같은 효과는 여성이 자신의 재능에 맞는 일자리에 진입함과 동시에 재능이 부족한 남성을 대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p.58-59)
최고의 교육이란 언제나 배우는 방법 자체를 배우는 것이었다. 이튼 대학의 학장이었던 윌리엄 코리의 다소 진부한 말을 빌리자면, “학교에서는 지식의 습득보다는 비판 속에서 지적 활동에 매진해야 한다.” 이렇게 지적 훈련을 받은 사람은 남은 생애 동안 스스로 지식을 습득하는 법을 익힌다. “비판 속에서”라는 말이 교사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오늘날 교육계에서 흔히 말하듯이 “가르침을 주는 현자가 아니라 곁에서 길을 안내하는 안내자”로 역할을 바꾸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학습법은 학생들에게 평생에 걸쳐서 배움의 기회가 생길 때마다 자신의 능력을 개발할 능력을 심어준다는 이점이 있다.
자주 간과되는 사실은 이러한 학습 능력이 아주 이른 시기에 확립된다는 점이다. 뇌의 구조는 5세 이전에 완성되며, 이때 인지 기능과 사회성 발달에 가장 중요한 단계를 거친다. 이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른 시기에 이루어지는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만약 이 적기를 놓치면 성인이 되었을 때의 학습 능력에 부정적인 결과가 초래된다. 배움은 누적되는 것이기 때문에 조기에 기초를 탄탄하게 놓을수록 그 위에 더 많은 것을 쌓아서 혜택을 증폭시킬 수 있다. 반면에 조기에 기초를 놓지 않으면 불이익도 크다. 이런 까닭에 취약계층의 아이들이라도 유아기는 사회 이동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최적의 시기에 해당한다. (p.89-90)
직업교육에 관한 연구가 일관되게 입증하고 있듯이 교육 프로그램은 기업에서 실시할 때 효과가 가장 크다. 따라서 되도록 기업을 설득해서 노동자들의 기술을 향상시키는 방안이 이상적이지만, 사업주들은 일정 수준 이상으로 노동자들을 교육하는 데에 흥미가 없다. 사회적 편익을 극대화하는 수준까지 기업이 노동자들을 재교육하도록 장려하려면, 특히 기술직이나 간호 업무처럼 이직이 잦은 노동시장에서는 가능한 한 많은 인센티브를 제시해야 한다. 취약계층의 노동자 그리고 재교육 프로그램을 자체적으로 실시할 여력이 없는 중소기업의 노동자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도 타당하다. (p.105-106)
정부가 노인 세대에게 재정안정성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근로 수명을 늘리고, 기대 수명에 비례해서 정년을 늘리고, 최저생활보장연금으로 사회안전망을 제공하며, 모든 노동자(전통적인 고용계약과 유연 고용계약)들이 사업장에서 퇴직연금제도에 의무적으로 가입하도록 하고, 보다 효과적으로 위험을 분담하는 일을 병행해야 한다. 부가가치세 등 소비세를 이용해 국고에서 제공하는 최저생활연금의 재정을 조달한다면 비용을 공평하게 분산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그렇지 않아도 감소하는 생산가능인구에 추가로 근로소득세를 부과하는 대안은 새 일자리를 창출할 의욕을 저해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p.205)
하지만 선진국에서는 청년 세대의 미래에 대한 전망이 정반대이다. 베이비붐 세대는 수십 년간 지속된 경제성장 아래 여러 복지 혜택을 제공하는 안정된 직장에 다니며 대폭 향상된 수준의 의료 및 복지 혜택을 누렸다. 이에 비해서 X세대(1966-1980년에 태어난 사람들)와 밀레니엄 세대(1981-2000년에 태어난 사람들)가 직면한 세상은 제5장에서 서술했듯이 훨씬 유연한 고용계약과 불안정 노동, 치솟는 집값, 그리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많은 국가에서 실시한 긴축 재정 정책으로 인한 복지 부문의 지출 감소를 특징으로 한다. 많은 청년들이 20대에 이미 학자금 대출과 신용카드로 많은 빚을 진 탓에 가정을 꾸리거나 주택담보 대출을 받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한편 Z세대(2000년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는 기후위기와 관련한 환경 시위에 앞장서고 있다. 앞선 세대가 경험했던 안정된 삶과 소득의 증가는 이제 정체되었고, 일부 국가에서는 소득이 되레 감소했다. 빈곤의 위험이 이제 노년층에서 청년층으로 옮겨가고 있다.
많은 선진국에서 청년층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전망하는 것은 대략적인 경제 동향에 근거한 판단이 아니라 일상에서 체험할 수 있는 사실들에 기초한 판단이다. 거의 모든 선진국에서 밀레니엄 세대와 X세대는 부모 세대가 그들과 같은 나이일 때 벌었던 실질소득보다 많이 벌지 못하며, 그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처럼 유럽 재정위기로 큰 타격을 입은 국가들과 영국의 경우 청년층의 미래는 특히 암울하다. 북유럽 국가들만은 예외인데, 이들 국가의 청년층은 더 높은 실질소득과 더 나은 생활 수준을 물려받을 것으로 보인다. (p.213-214)
자연 환경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자연이 제공하는 모든 서비스를 고려해야 한다. 고래의 역할을 생각해보자. 고래는 매우 인상적인 동물이며 해양 생태계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데, 특히 엄청난 양의 탄소를 흡수한다. IMF에서 이것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한 결과, 살아 있는 고래 한 마리는 200만 달러의 탄소 제거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추정되었다(둥근귀코끼리 한 마리는 176만 달러의 가치가 있다). 전 세계적으로 고래의 수효를 회복하면, 탄소량을 줄이기 위해서 20억 그루의 나무를 심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자연은 세계 최고의 탄소 포집 기술을 지녔으며, 이와 같은 자연의 서비스를 추정치에 포함시킨다면 우리는 미래를 위한 투자를 좀 더 잘하게 될 것이다.
웨일스 지역은 자연 환경의 가치를 고려하기 위해서 흥미로운 접근법을 개발했다. 세계 최초로 “미래 세대 위원회(Minister for Future Generations)”를 신설한 것이다. 이 위원회는 운송, 에너지, 교육 같은 분야의 정부 정책을 감시하고 그 정책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의 이익을 반영하도록 만드는 임무를 맡고 있다. 가령 이들은 장차 생물다양성에 미칠 영향과 미래 세대가 떠안을 공공부채를 고려하여 뉴포트 시의 우회도로 사업안에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비록 정책 결정을 뒤집지는 못하지만, 미래 세대 위원회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를 대변하는 목소리를 내며, 중요한 사안들을 확실히 짚고 넘어가도록 만들 수 있다. (p.230)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청년층보다는 노인층이 정치력을 행사하는 데에 능숙한 탓에 정치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인구에서 노인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공공지출의 패턴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간단히 말해, 노인 인구의 증가는 연금에 대한 지출이 늘고 교육에 대한 지출은 줄어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노인층 유권자들은 (저금리와 양적 완화 등) 경제 수요를 늘리고 완전고용을 유지하되 저축 수익률을 낮추고 인플레이션 증가 위험을 무릅쓰도록 설계한 정책에 강하게 반대한다. 그들은 이미 은퇴했기 때문에 대체로 일반 시민에 비해서 실업 문제에 대한 관심이 덜하다. 독일이나 일본 같은 고령화 사회의 정당들은 점차 이러한 노인층의 기호에 맞출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노인층이 부유할수록 상속을 통해서 다음 세대에 더 많은 부가 전달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상속을 통한 부의 분배는 대단히 불평등하고(이 주제는 다음 장에서 다룰 것이다), 개인적으로 상속할 수 없고 반드시 공유해야만 하는 것들(자연 환경 등)도 존재한다.
한편, 케임브리지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런시먼은 증가하는 민주주의의 연령 차별에 맞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투표 연령을 6세(정말 6세라고 했다. 잘못 읽은 것이 아니다)까지 낮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젊은이들의 이익이 의회나 선거에서 적절히 반영되지 못할 것이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의 이익은 아예 고려되지도 않을 것이다. 이 사실은 다이앤 파인스타인 상원의원과 미국의 어린 학생들이 만난 자리에서 잘 드러났다. 학생들이 “친환경 뉴딜”을 요구하자 파인스타인이 “너희들이 나에게 표를 주지는 못하잖니”라며 거절한 것이다. 그녀의 말은 아이들이 그녀에게 투표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분명 아이들은 투표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파인스타인의 의무는 그녀에게 표를 준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었고, 그 유권자들 속에 아이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학교 수업을 거부하고 기후위기에 대한 대책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는 일이 헤드라인을 장식하기는 하지만, 민주주의체제에서 변화를 성취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는 여전히 투표이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는 젊은이들 및 미래 세대의 목소리와 이익에 더 큰 비중이 실리도록 만들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작 미래에 살아갈 사람들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고, 살아서 그 미래를 보지도 못할 사람들의 의견만 전적으로 반영된 사회계약이 미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p.233-235)
이 책에서 나는 수많은 사회의 사람들이 삶에 좌절하는 이유가 기술 발전과 인구구조 변화에서 발생한 압력에 기존의 사회계약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사회계약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결과 아이들을 돌보는 일, 실직자가 자신의 기술을 개발하고 유지하는 일, 노년기에 자신을 돌보는 일 등 보다 많은 책임과 그에 따른 위험을 개인이 감당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혼자 힘으로 해결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분노의 정치가 자라고, 정신건강 문제가 확산되고, 청년층과 노인층 모두 미래를 두려워하는 일이 벌어진다. 삶의 여러 영역에서 발생하는 위험을 개인이 혼자 감당하는 일은 불공평할 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위험을 분담하는 것보다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이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사회계약이 필요하고, 이 계약은 모든 사람들에게 안정된 삶과 다양한 기회를 보장하는 보다 나은 사회구조를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나”보다 “우리”를 생각하고, 상호의존성을 인정하고, 그 의존성을 상호이득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모두가 직면하는 걱정거리를 줄이기 위해서 더 많은 위험을 함께 공유하고 분담하는 한편, 사회 전반에 걸쳐 인재 활용을 최적화하고, 개개인이 사회에 가능한 한 많이 이바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내용을 담아야 한다. 나의 후손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후손도 함께 번영하는 길을 고려해야 한다. 미래에는 그들이 모두 한 세상에서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p.238-239)
필로소피 유니버스 / 수키 핀 / 알에이치코리아
재닛 밀이 책을 발표한 19세기 후반만 해도 법과 제도는 남자와 여자를 상당히 다르게 대우했어요. 고등교육과 전문직, 사업과 같은 분야는 남자의 전유물로서 여자에게는 제도적으로 허락되지 않았어요.
당시 여자는 결혼하면 남편에게 종속되었는데 밀은 ‘노예’로 표현하기까지 했어요. 밀은 이런 현실이 상당히 잘못되었다며 자신이 ‘완전한 평등원칙’이라 명명한 원칙에 의거해 남자와 여자를 대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데이비드 밀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뭔가요? 여자는 태어나기를 부엌일에 알맞게 즉, 집안일을 하도록 태어났다고 주장하나요?
재닛 네, 그렇게 주장합니다. 이 사람들에게 여자와 남자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 있어요. 일부는 남녀의 차이지 불평등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대부분은 여자가 모든 면에서 태생적으로 남자보다 약하고 열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자를 남자와 똑같이 대우하면 이치에 어긋나고 잔인하기 때문에 남녀를 다르게 대우해야 한다고 말하죠.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여자는 남자의 전유물인 그 일들을 할 능력이 없고, 선천적으로 내조와 집안일에 적합한 사람들이에요. 내조와 집안일이 바로 여자가 할 일이고 여자는 그 일을 하면서 진정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데이비드 밀의 입장은 뭔가요? 밀은 남자와 여자가 본질적으로 같다고 생각합니까?
재닛 밀은 모든 면에서 여자를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로 보는 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어요. 단, 신체적인 힘은 제외하고요.
밀은 남녀가 선천적으로 무엇이 다른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고 했어요. 역사를 통틀어 여자와 남자는 늘 제도적으로 차별 대우를 받아 왔기 때문이에요. 서로 다른 교육을 받았고 사회적 위치와 법 앞에서 지위도 달라요. 그래서 눈에 보이는 남녀 간 차이가 선천적 기질 때문인지 사회제도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 없어요.
그렇더라도 밀은 여자를 두고 하는 말들이 사실이 아님을 누구나 알고 있고, 여자들이 못 하는 일이라 치부되는 일들이 적어도 일부 여자들은 이미 해낸 것들이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훌륭하게요.
여자들이 제대로 된 교육과 기회를 누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어요. 그런 불리한 환경에 놓이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능력을 보여 줄 수 있는 여자들이 더 많았을 겁니다. 여자들이 집안일에 만족해한다는 주장에도 같은 이유로 반박할 수 있겠네요. 알다시피 글을 써서 자신의 처지에 불만을 표한 여자들도 있어요. 당시에 글은 여자들에게 유일한 저항 수단이었어요. 이런 의심도 합리적이에요.
만약 여자들이 집안일만 하도록 교육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 역할을 거부하는 여자들이 더 많지 않았을까요? 더군다나 여자들은 남편에게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하고 반항할 경우 얼마나 위험해질지 알았어요. 전반적으로 밀은 남녀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주장이 엉터리임을 우리가 이미 안다고 말했어요.
데이비드 알고 봤더니 여자와 남자는 실제로 달랐고 이를 밀에게 증명했다면, 밀이 남녀에게 가해지는 법적 차별 대우를 납득했을까요?
재닛 아니요. 생물학적인 성의 차이를 전제로 한다고 해도 그 주장은 밀에게 여전히 통하지 않아요.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여자들이 남자들의 영역에 못 들어갈 이유는 없어요.
수행해야 할 어떤 일이 있다면 그 일에 적합한 사람을 뽑는 기준도 있잖아요. 여자들이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자동 탈락시키면 됩니다. 여자는 안 된다는 규칙이 추가적으로 왜 필요하겠어요. 역으로 그런 규칙이 있으면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이라도 여자라는 이유로 제외당하겠죠.
어느 쪽이든, 이른바 성의 차이로 법의 불평등을 정당화할 수는 없어요. 반대파는 여자가 가정생활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자발적으로 선택했다고 주장했어요. 설사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나머지 역할을 전부 막으면서까지 여자에게 그 역할을 강요할 이유가 없죠. 공정한 법 위에서 스스로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지켜봐야 합니다. (p.37-39)
나이절 흄이 살아 있었더라면 신경과학 발전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을 것 같아요. 그런데 신경과학의 어떤 발전이 도덕을 조명하는지 여전히 궁금해요. 어떻게 신경과학이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지 말이에요. 내가 마땅히 되어야 할 모습과 관련해서요.
퍼트리샤 오래전부터 외로움은 큰 고통이라고 했어요. 신경과학은 사회적 고립이 정신 건강과 육체 건강에 얼마나 큰 비용을 초래하는지 증명해 왔어요. 외로움은 면역체계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외로운 사람은 감염에 취약하다고 해요. 이런 신경과학을 이용한다면, 범죄자에게 어떤 처벌이 적당할지 몇 가지 결론을 내릴 수도 있을 거예요.
일례로, 청소년기에는 전두엽 뉴런이 충분히 수초화되지 않을뿐더러 성년 초반까지 거의 발달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어요. 해당 연구 결과는 아동 범죄자에게 사형을 선고하려고 했던 법원 판결에 영향을 주었고요. 전두엽은 행동 제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해요.
즉, 전두엽은 충동을 제어하고 내가 한 선택의 결과를 미리 짐작하게 함으로써 감정에 휩싸이지 않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요. 18세 이하의 청소년들은 뇌가 아직 충분히 발달하지 못해서 어른들만큼 충동을 조절하지는 못한다고 해요. 미국에서는 판결을 내릴 때 이 점을 참작해요.
하지만 어려운 질문들도 있어요. 가령 상속세는 타당한지, 장기 기증은 의무화해야 하는지, 전쟁은 정당한지와 같은 질문에는 앞으로도 신경과학이 어떤 구체적인 답을 주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신경과학은 육아에 있어서 초기 애착 형성이 아기의 사회성 발달에 얼마나 중요한지 등을 말해 줄 수 있어요. (p.62-63)
나이절 지금까지는 과거와 현재의 괴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지리적으로 살펴보니 문명과 접촉하지 못한 부족이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기술적으로 발달한 사회에 사는 사람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현재의 도덕 개념에서 봤을 때 끔찍한 관행을 가진 부족이 있을 수 있다는 거죠.
가령, 그 관행은 셋째 아이를 잔인하게 죽이는 거예요. 이 부족은 우리와 동시대에 살고 있어요. 역사적 괴리는 없다는 말이에요. 우리가 보여야 할 태도는 그저 도덕적 실망뿐인가요? 아니면 이 부족을 만나면 법적인 처벌을 내려야 할까요?
미란다 음, 도덕적 상대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다양한 문화적 차이에 주목해요.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도덕 가치를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도덕적 상대주의를 비난의 상대성으로 좁힌다면, 유효한 비난은 없어요. 앞서 역사적 괴리가 있다면 비난을 삼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또 비난을 할지 말지는 그 행동을 저지른 행위자에게 분별력이 있었는지 여부에 달렸다고 말했어요. 저는 이 조건이 역사적 괴리에도 적용되지만 문화적 괴리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봐요. 세대와 상관없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의 행동이 도덕적으로 나쁘다면 무턱대고 비난하기 전에 이 사람이 다르게 생각할 줄 아는지, 사물을 다른 관점으로 볼 줄 아는지, 그리고 분별력이 있는지 먼저 살펴야 해요. 도덕 개념이 우리와 같은데도 그런 행동을 했다면 비난을 해도 돼요.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비난을 한다면 아마 우리는 도덕적 융통성이 없거나 어리석은걸 거예요.
나이절 지금 우리가 하는 행동 중에 20년 후 사람들이 보면 실망할 행동이 있을까요?
미란다 분명히 있지 않을까요? 방금 말씀하신 점을 생각하면, 내가 하는 행동에 미리 스스로 실망할 수도 있어요.
저는 반쯤은 양심에 찔린 채로 고기를 먹어요. 미래에 아무도 고기를 안 먹고 오로지 채식만 한다면, 저 같은 사람을 두고 도덕적 실망을 하겠죠. 반려동물을 대하는 제 태도를 보고 의아해하겠죠. 대체 왜 다른 동물은 반려동물처럼 대해 주지 못하느냐고요. 사고방식에 일관성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우리가 과거 체벌을 가한 사람을 보고 왜 일찍 깨우치지 못했을까 안타까움을 느끼듯이요.
미래 세대가 실제 어떤 생각을 할지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는 있다고 봐요. 제 주변 사람들은 이례적인 도덕적 판단으로 모두 고기를 안 먹거든요. 이런 사람들과 어울리니 저도 이례적인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고 그래서 고기를 안 먹을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도 여전히 고기를 먹기 때문에 저는 회색 영역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에요. 이 모습을 보고 미래 사람들이 제게 도덕적 실망이라는 가장 안 좋은 판단을 내릴지도 몰라요. 달리 생각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은 데에 대한 실망이요.
지금은 고기 섭취가 아주 일반적이고 일상적이기 때문에 아무도 저를 비난하지 않아요. 그래서 미래의 관점에서 저는 회색 영역에 속한 사람이에요. 여기서 회색 영역이란 도덕적 실망을 뜻해요. 그렇지만 회색 영역을 ‘개선의 여지가 있는’ 경우로 봐도 되지 않을까 싶어요. (p.95-97)
나이절 어떤 집단의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거나 그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암묵적 편견인가요?
제니퍼 암묵적 편견은 어쩌면 ‘생각’과는 달라요. 암묵적 편견을 정확히 뭐라고 해야 할지는 꽤 까다로워요. 하지만 구조적으로 인종차별을 가하는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흑인에 대해 어떤 암묵적인 편견이 있을 거예요. 굉장히 부정적이죠. 하물며 낙인이 찍힌 사람들도 스스로에 대해 부정적인 암묵적 편견을 가지고 있어요. 일평생 이런 편견에 맞서 온 사람조차도요.
암묵적 편견에 대해 논의할 때면 미국의 흑인 시민운동가인 제시 잭슨(Jesse Jackson)의 사례가 자주 등장해요. 잭슨이 어떤 낯선 도시에서 밤늦게 혼자 걷고 있었는데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래요. 뒤를 돌아보니 백인 남자였고 잭슨은 그 순간 마음이 편해졌대요. 그때 잭슨은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해요. 바로 자신에게조차 흑인, 더구나 흑인 남자는 위험하다는 암묵적 편견이 있었던 거예요. 일평생을 이런 편견과 맞서 싸워 왔으면서 말이에요. 이렇듯 우리는 암묵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해요. 우리가 편견의 대상일지라도, 의식적으로 편견에 저항할지라도, 매일매일 편견과 싸운다고 할지라도 말이에요. (p.141-142)
나이절 인간이 진화하면서 투사적 혐오가 생겨났다고 봐요. 동물인 인간은 생존을 위해 피해야 할 대상이 있었어요. 그런 대상을 향해 본능적으로 혐오라는 반응을 보이고요. 그런데 이성적으로 그런 반응을 전혀 보여서는 안 될 대상에게까지 그런 태도를 보이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마사 맞습니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고요. 진화 과정에서 생겨난 감정이라 해도, 위험을 감지하는 감정은 아니에요.
독버섯은 위험하지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아 그걸 먹고 죽는 사람이 많아요. 어떤 실험에서 바퀴벌레를 살균 처리한 후 사람들에게 먹으라고 권했어요. 전혀 해롭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도 사람들은 모두 먹기를 거부했어요.
이렇듯 전혀 해롭지 않지만 사람들은 혐오를 위험으로 포장할 때가 있어요. 여성의 몸에서 출산과 관련된 체액이 나온다며 여성의 몸을 혐오의 대상으로 취급하고 이런 이유로 여성 차별을 일삼는 사회가 많습니다. 전 세계의 많은 남성들이 여성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혐오를 느껴요.
일부 중세 및 근대 유럽 국가에서 유대인은 혐오의 대상이었어요. 독일 나치 시절, 어린이 책에 등장하는 유대인은 달팽이거나 딱정벌레, 아니면 징그러운 동물이었어요.
혐오는 언제나 마주할 수 있어요. 그리고 현재 미국 사회에서는 게이와 레즈비언이 혐오의 대상이에요. 특히 게이 남자를 혐오해요. 우익 집단이 게이와 레즈비언에 대해 퍼뜨린 선전을 보면 항상 대변과 혈액으로 점철되어 있어요. 사람들에게 겁을 주고 혐오를 불러일으키려고 게이 남자들의 성생활을 일부러 그런 식으로 묘사하는 거죠. (p.154-155)
나이절 기본 교양이라는 개념을 언급하셨어요. 살을 붙여서 구체적으로 이 개념이 뜻하는 바를 말씀해 주시면 어떨까요?
테레사 기본 교양은 관용 사회에서 내 의견을 활발하게 말하는 데 필요한 미덕이에요. 사회규범인 존중하는 태도를 최소한으로 유지하거나, 대화를 이어 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미덕을 말해요.
대화할 때 특별히 요구되는 이 기본 교양이, 주어진 상황과 상대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는 점을 짐작하실 수 있을 거예요. 모자를 어떻게 벗어야 하는지,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는지, 또는 상대를 어떤 방식으로 존중하고 존중을 표해야 하는지 등 단순히 행동만으로 교양을 생각하지 않아요. 대신에, 상황과 상대를 고려해 무엇이 필요한지 신중히 또는 실용적으로 판단하는 태도라고 생각하시면 좋겠어요. 그래야 대화를 이어갈 수 있어요.
기본 교양을 갖춘 사람은 상대에게 언제나 진실만을 이야기할 거예요. 진실을 말한다는 건 상대의 의견이 터무니없을 때 이를 솔직하게 밝힌다는 뜻이기도 해요. 정리하자면, 기본 교양은 상대에게 함부로 굴지 않고, 또한 상대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노력이에요. 의견 차이가 발생해도 대화가 중단되지 않도록 말이에요.
나이절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기본 교양은 우리가 함양해야 할 중요한 미덕이네요. 그런 미덕을 갖춘 사람이 지금은 많지 않아요. 중요한 사안을 논할 때는 그런 기본 교양을 갖추기가 정신적으로 힘들거든요.
테레사 동의해요. 요즘 특히 기본 교양이 많이 부족한 것 같아요. 갈수록 거세게 교양을 비판하고요. 지금의 미국 정치사회에서 사회운동가들이 말하는 교양은 앞서 말한 것과 꽤나 다를 수 있어요. 불평등이 심각한 상황에서 그들에게 교양이란, 권력층에게 불평등을 똑바로 마주하고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될 테니까요.
교양 찬성파로서 저는 사람들이 교양을 단지 ‘오, 그러지 말고 교양 있게 행동해요. 교양 있게 대화합시다’ 하며 신사다운 척하는 행동으로 볼까 봐 걱정이에요. 교양을 그저 까다로운 대화의 미덕으로만 오해한다면 즉, 엘리트주의자들의 예의 바름과 존중, 정중함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일이에요.
나이절 원래는 교양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었다가 찬성파로 돌아섰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계기에 대해 듣고 싶어요.
테레사 찬성파로 입장을 바꾸고 나서 교양 없는 태도와 공격적인 자기 주장이 초래한 결과에 더 주목하게 됐어요. 사람들이 점점 더 자신과 마음이 맞는 사람하고만 어울리려고 하더라고요. 이런 태도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요.
저는 학생들에게 ‘마음에 들지 않음’이 ‘불쾌함’과 동의어인 이유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나와 생각이 똑같은 사람하고만 이야기하는 게 물론 훨씬 편하죠. 하지만 관용 사회에서 그건 재앙이에요. 민주주의의 재앙이죠. 교양은 나와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이에요. 특히 내게 정말 중요한 사안에 대한 상대의 다른 의견을요. (p.210-212)
나이절 철학자들은 주장의 타당성에 대해 이성을 바탕으로 분석하잖아요. 이런 전문성이 철학자들에게 정말 있을까요? 교수님의 생각이 궁금해요. 가령, 도덕 전문가가 있을까요?
메리 도덕 전문가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해요. 다만 남들에 비해 도덕 문제를 다루는 데 익숙한 사람이 있을 거예요. 철학과는 무관하지만요. 의사나 정신과의사, 사회복지사들이 도덕 문제에 익숙한 사람들이고, 그런 점에서 도덕 전문가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예나 지금이나 도덕 문제를 논의할 때는 철학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철학자들은 문제를 명확하게 구분할 줄 아니까요.
공공정책은 나만의 도덕적 결정을 내릴 때와는 달라요. 해당 정책을 통과시켰을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생각해야 하는데 이때 내 반응이 곧 결과라고 생각해서는 안 돼요. 저는 역겨움을 느끼는 감정과 진정한 양심은 서로 다르다고 생각해요. 이런 식의 구분이 정말 중요해요.
나이절 철학자를 상아탑에 비유하기도 해요. 사실상 계란도 삶을 줄 모르고 현실적으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사람으로요. 이런 사람들을 이론 정립이 아닌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공적 영역에 투입시키는 건 위험하지 않나요?
메리 철학이 엄청나게 변했다고 생각해요. 확실히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전후 시대 이후로요. 이 시대에 저는 철학을 읽고 철학을 가르치러 다녔는데 이때만 해도 상아탑과 같은, 구름 속을 걷는 철학자들이 많았어요. 모두 그랬죠. 현실 문제를 생각하는 건 철학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오래전에 많은 것들이 급격하게 달라졌어요. 베트남전쟁이 변화를 촉발했다고 봐요. 이때 강제징병에 반발하는 대규모 학생시위가 있었거든요. 학생들은 징병을 피하고 싶어 했고 철학과를 포함한 다른 과 교수들에게 병역기피를 정당화해 달라고 도움을 요청했어요. 철학사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중요한 전환점이었어요.
이후로 철학자들은 정치문제에도 의견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어요. 커다란 변화였죠. (p.370-3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