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 보글 가치투자의 원칙 / 존 보글 / 해의시간
경제학자들이 ‘가치 창출(value-creating)’이라 부르는 활동과 ‘지대 추구(rent-seeking)’라 부르는 활동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전자가 사회에 가치를 더한다면 후자는 사회의 가치를 빼앗는 행위다. 가치 창출은 새롭고 개선된 제품과 서비스를 어느 때보다도 효율적인 경로를 통해 경쟁력 있는 가격에 유통하는 활동이다. 하지만 지대 추구는 경제적 청구권을 한 참여자에서 다른 참여자 쪽으로 옮기는 행위에 불과하다. 소송을 생각해보라. 한쪽이 이기면 다른 쪽이 지지만, 어쨌든 변호사와 법조계는 이득을 보며 실제 소송 당사자의 돈은 주인이 바뀌기도 전에 줄어든다. 정부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세입은 세출로 처리되기도 전에 관료 사회 특유의 중개비용 때문에 줄어든다. 가장 고전적인 사례인 금융계에서는 투자자들이 서로 거래하다 한쪽은 승자가 되고 다른 쪽은 패자가 된다. 그러나 거래비용 때문에 투자자 전반이 거래 행위로 순손실을 본다는 점에서 비용은 경제 성장을 저해한다.
물론 오늘날의 금융계 역시 혁신, 실시간 정보, 막대한 유동성, 일정 규모의 자본형성 같은 가치를 창출한다. 그러나 기술로도 금융계의 마찰비용을 제거할 수 없다. 거래 단가는 급감하는 반면 거래량이 급증하면서 금융계의 총비용은 계속 상승하고 있다. 월가만 배불리고 월가의 고객/투자자에게 타격을 가한 혁신이 너무 많다. 이 책을 집필하고 있는 2012년, 연준 의장을 역임하고 오바마 대통령의 경제회복자문위원회를 이끄는 폴 볼커는 지난 25년 동안 개발된 금융 혁신 중에서 유용한 것을 알려달라는 압박에 ‘ATM기’라는 대답만 내놓았다(볼커는 최근 내게 평가 기간이 지난 40년이었다면 1975년에 고안된 인덱스펀드도 포함했을 것이라고 하면서, 인덱스펀드가 투자자들에게 유익한 결과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중요하고 긍정적인 혁신이라고 말했다). (p.16-17)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유명한 연설에서 남긴 ‘경기장의 투사(Man in the Arena)’를 떠올렸다.관중석에서 비판이나 늘어놓는 사람은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해야 강한 상대를 넘어뜨릴지, 어떻게 해야 더 잘 싸울 수 있었을지 훈수나 두려는 사람도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사람은 실제로 경기장에 선 투사다. 그는 얼굴이 먼지와 피땀으로 범벅되도록 용감하게 싸우다 실수도 하고 단점도 드러낸다. 그러나 투사는 온 힘을 다해 싸우며, 열의와 헌신을 아끼지 않는다. 그는 가치 있는 대의명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승리하면 달콤한 결실을 거둘 것이고 설령 패배하더라도 대담하게 싸우다 쓰러진 것이기에, 투사의 영혼은 승리도 패배도 모르는 냉담하고 소심한 영혼과 전혀 같지 않다.
(p.25-26)
투기가 어떻게 투자자 집단의 자원을 고갈시키는지 알기 위해서는 시장의 특성만 이해하면 된다. 이를테면 투자자 집단은 주식시장에서 큰 수익을 얻기는 하지만, 금융중개비용을 공제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시장보다 높은 수익을 내는 것은 비용을 공제하기 전에도 제로섬 게임이지만 비용을 공제하고 나면 손실이 나는 패자의 게임이 된다. 우리가 주식시장에서 매일매일(결과적으로 아무런 보람 없이) 베팅할 때, 100년 전에 루이스 브랜다이스 대법관이 다른 맥락으로 쓴 문구를 빌리자면 “변변찮은 산술식의 가혹한 규칙(relentless rules of humble arithmetic)”이 발휘하는 힘을 얼마나 자주 망각하는지 모른다.
시간이 흐를수록 금융중개비용으로 유출되는 금액은 놀랄 만큼 커지고 있다. 그러나 그 간단한 산술식의 영향을 이해하는 투자자는 극히 드문 듯하다. 그래서 투자자들은 사실상 주식시장이 제공하는 장기 수익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린다. 거래비용, 자문 수수료, 판매 수수료, 행정비용 등을 포함한 총거래비용은 연간 2퍼센트에 불과하지만 그 장기적인 영향은 어마어마하다. 예를 들어 지금 막 투자에 입문한 청년들의 투자 기간은 약 60년 정도일 텐데, 이들이 최초 투자로 수익률 7퍼센트를 달성하고 그 후로도 그 수준을 유지한다면 생애를 통틀어 총 5,600퍼센트의 수익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용을 공제하면 수익률은 7퍼센트에서 5퍼센트로 떨어지고, 생애수익률은 5,600퍼센트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1,700퍼센트에 그친다.
투자자 집단이 금융회사에 치르는 비용만큼의 큰 수익을 얻지 못하는 것이 투자 산업의 현실이다. 금융회사 입장에서는 이들의 비용이 곧 수익이다. 사실 투자자들은 비용을 치르지 않을 때 수익을 얻을 수 있다. 터무니없이 들릴지는 몰라도 투자자 집단이 치르는 비용이 줄어들수록 이들에게 돌아가는 수익은 커진다. 더욱이 투자자 집단이 아무런 비용도 치르지 않는다면(또는 인덱스펀드처럼 아주 적은 비용만 치른다면) 시장 수익을 온전히 손에 넣을 수 있다. 이 같은 시장의 계산법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으며, 이는 도박 산업이 활용하는 카지노의 계산법과 매우 흡사하다. 돈을 따는 고객의 행운은 돈을 잃는 고객의 불운으로 상쇄된다. 그러나 고객이 돈을 따든 돈을 잃든, 카지노는 모든 도박판에 걸린 판돈 중 일정 부분을 챙긴다. 라스베이거스, 폭스우즈, 애틀랜틱시티의 카지노뿐만 아니라 메가밀리언이나 파워볼과 같이 전국적으로 팽배한 복권 산업이 판돈에서 챙기는 몫은 월가나 미국의 경마 산업과 그 외 도박 산업보다 훨씬 더 크다. (p.41-42)
이를 변호하자면, 현재의 투기 열풍은 미국 문화의 광범위한 변화를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다. 미국 전역에서 전통적으로 공동체에 대한 봉사에 초점을 맞춰온 신뢰받는 직종이 갈수록 기업의 특성을 띠게 되었다. 즉 이들은 자본제공자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고 그 과정에서 이전 시대의 도덕적 가치가 희생되는 일이 많아졌다. 더욱이 처음부터 굳건히 뿌리를 내리는가 했던 도박 문화가 오래 지나지 않아 성행하게 되었다. 도박 문화는 항상 우리 사회에 존재했지만, 이 같은 현상은 고난의 시대를 겪고 있는 수많은 미국 가정이 현실 도피를 위해 도박으로 눈을 돌리면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주식 도박에서든 (승률이 훨씬 더 낮은) 카지노 도박에서든 상대적으로 부유한 이들이 부를 빠르게 축적할 수단을 얻었다. 저소득층 가정도 마침내 유복한 삶을 살 기회를 얻게 되었지만, 이들이 도박으로 성공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설상가상으로 우리는 물건을 외상으로 잔뜩 사들이는 것을 좋아하고, 미래의 궁핍보다 현재의 결핍을 해소하고 싶어 한다. 매우 부유한 사람들조차도 결핍을 느끼는 듯하다. 우리는 자신과 이웃을 비교하길 좋아한다. 현실의 벽을 극복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니 판에 박힌 일상에서 빠져나오려고 (승률이 낮더라도) 투기로 눈을 돌린다. (p.48-49)
오늘날 장기 투자보다 단기 투기에 기반하는 문화가 성행함에 따라 그 파장이 금융부문의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 곳곳에 미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시장을 왜곡할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기업의 경영 방식까지 왜곡한다. 예측을 불허하는 세상에서 시장 참여자가 단기 성과와 예상 수익을 요구하면 기업은 그 요구에 부응하려 한다. 이러한 경우 기업은 ‘수지타산을 맞추기’ 위해(종종 회계 장부를 조작하기 위해) 직원을 감원하고 경비를 삭감하며 R&D 투자를 재고하고 인수합병을 감행하라는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기업이 단기 투기꾼의 강요에 못 이겨 실질시장의 주주들이 제공한 자본의 내재가치가 아닌 기대시장이 정해놓은 주가에 의해 가치 평가된 자본수익을 얻으려고 시도하면, 두 가지 역할(단기 수익과 예상 수익)을 완수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실제로 이러한 시도는 기업의 직원, 지역사회, 그들이 제공하는 제품과 서비스의 품질뿐만 아니라 기업의 장기적인 생존 능력에도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 기업이 월가의 기대와 요구를 맞춰주는 일에 치중하다 보면, 갈수록 까다로워지는 고객의 요구에 부합하는 제품과 서비스의 제공에 소홀해지고, 결과적으로 사회에 대한 봉사라는 기업 본연의 의무를 다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고객과 사회 전반에 대한 기업의 봉사야말로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궁극적인 목표다. (p.53-54)
미국의 금융시스템이 방조한 왜곡 사례를 하나 더 살펴보자. 미국 땅에서 가장 우수하고 똑똑한 젊은이 가운데 상당수가 과학자, 의사, 교육자, 공무원이 되기보다 엄청난 금융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투자 산업에 이끌리고 있다. 이처럼 막대한 보상 때문에 더 생산적이고 사회적으로 유익한 직업을 택해야 할 중요한 인적 자원이 금융계로 쏠리고 있다. 공학 분야에서조차 본질적으로 지대 추구(rent-seeking) 성격이 강한 ‘금융’ 공학이 토목, 전기, 기계, 항공 등의 ‘실물’ 공학보다 우세한 추세다. 이 같은 추세가 지속된다면 결과적으로 미국의 부, 성장률, 생산성, 국제 경쟁력에 타격이 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투기가 국가의 재정을 장악하면 기업 본연의 임무이자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존속이 달린 기업의 가치 창출에 맞춰져야 할 초점이 주가라는 신기루로 쏠리게 된다. 미국 투자부문의 연간 지출액인 6,000억 달러 중 도박이나 다름없는 투기에 너무 많은 돈이 투입된다. 당사자들은 지식과 정보에 근거한 도박이라 주장할지는 몰라도 특정 기업이 기지와 지혜와 알고리즘을 이용하여 다른 기업보다 지속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개념에 돈을 거는 것은 여러 차례 입증된 바와 같이 악성 도박에 불과하다(지속적인 우위를 규칙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전 세계 금융 중심지에서 벌어지는 일 대부분이 “사회적으로 쓸모없는 행위”라는 영국 금융감독청장 데어 터너의 말에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나 역시 “주식시장은 투자 산업에 가장 큰 혼란을 유발하는 요인”이라는 말로 비슷한 지적을 하곤 했다. (p.56-57)
2010년에 시행된 도드-프랭크 금융개혁법은 그 가운데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중점을 둔 법이다. 파생상품의 투명성 강화나 은행 자본 요건 개편은 당연히 바람직한 조치일 것이다. 그러나 은행의 자기자본거래(proprietary trading)를 제한하기 위해 민주당과 공화당, 개혁주의자, 은행가, 로비스트 등이 치열한 협상을 벌인 끝에 제정한 규정은 복잡하고 두루뭉술하기 짝이 없다(170개 세부 규칙이 아직도 제정되지 않은 상태다). 나는 예전처럼 상업은행(deposit taking bank)과 투자은행(investment bank)을 분리하는 간단한 조치만 취하면 많은 문제가 해결되리라 생각한다. 1933년에 제정된 글래스-스티걸법(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업무를 분리하도록 한 법)은 서서히 영향력을 잃다가 1999년에 폐지되었지만, 그 이전까지만 해도 실효성이 있었다.
금융부문에서는 너무나 많은 범죄가 자행되지만 이에 대한 처벌은 충분하지 않다. 나는 고객의 신뢰를 악용한 화이트칼라 범죄자(white-collar criminal)에게 지금보다 더 강력한 처벌이 내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도청까지 활용하면서 내부자 거래를 기소하고 법을 어겨도 빠져나갈 수 있다고 믿는 고위급 임원을 상대로 어려운 승리를 거둔 연방정부 당국에 경의를 표한다. 현재와 같은 징역형 선고는 그 어떠한 형태의 처벌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범죄자를 저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제대로 된 규제를 위해서는 이번 장에서 제기한 문제에 관해 좀 더 정확한 데이터가 필요하다. 건전한 규제는 투명성을 증진할 수 있다. 도드-프랭크 금융개혁법의 일환으로 신설된 금융조사청(OFR)은 큰 도약의 발판이 될 것이다. 같은 시기에 신설된 금융소비자보호국(BCP) 역시 도입 초기에는 추악한 정치적 공방이 있었지만, 이제 최소한 제구실은 하고 있다. (p.62-63)
애덤 스미스 시대에서 150년 정도가 흐른 1932년, 컬럼비아대학의 아돌프 벌 교수와 가디너 민스 교수는 위대한 애덤 스미스의 고찰과 일맥상통하는 저서를 발표했다. 경제학 고전이 된 《현대 기업과 사유재산(Modern Corporation and Private Property)》에서 두 사람은 미국에서 대규모 주식회사의 역할이 점점 더 커지는 현상을 다루었다. 이들의 주된 결론은 다음과 같다.
- 이전에는 소유자에게 있던 실질적인 소유권이 대리인의 것이 되었다. 이제 소유자는 기업에 대한 권한과 의무가 적힌 종잇조각을 보유하고 있지만 지배권이 거의 없다. 소유자는 실질적인 권한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기초 자산에 영향을 줄 수 없다.
- 이제는 과거 소유권에 따라오던 정신적 가치가 분리되었다. 예전에는 소유자가 자신의 물적 자본을 직접 관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소득을 얻는 것 외에도 직접적인 만족감을 얻을 수 있었다.
- 개인의 자산가치를 결정하는 요소는 한편으로 기업을 감독하는 사람(일반적으로 소유주의 통제를 받지 않는 개인)의 행위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예민하고 대체로 변덕스러운 시장 참여자의 행위다. 따라서 그 가치는 시장의 특성인 예측 불가능성과 조작의 영향을 받는다.
- 개인의 자산은 조직화된 시장을 통해 유동성이 극대화되었다. 이에 따라 전환 직전에 통보만 하면 얼마든 다른 형태의 자산으로 바꿀 수 있다.
- 마지막으로, 기업 체제에서는 산업 자산의 ‘소유자’가 상징적인 소유권만을 지니며, 권력, 책임, 부처럼 과거 소유권에 반드시 따라붙던 요소는 이제 지배권이 있는 별도의 집단으로 이전되었다.
벌과 민스는 현대 자본주의의 병폐가 된 문제를 예리하게 간파했다. 예전에는 기업의 주주 개개인에게 계속 자신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는 법적 권한과 의결권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시스템은 한동안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작동했다. 그러나 소유권이 점차 무수한 소액주주들로 분산됨에 따라 주주의 실질적인 영향력은 감소했다. 의결권이라는 잠재적 권한만 그대로 유지했을 뿐이다. (p.72-74)
돌이켜보면 SEC 의장을 역임한 아서 레빗이 1998년 월가에 던진 경고는 선견지명이었다. 레빗은 이익 조정이 도를 지나쳤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주식시장에 구조조정 비용을 과다 계상하고, 창의적 회계 처리를 통해 주식 취득을 인수합병으로 위장하며, 충당금(reserver)을 “쿠키처럼 통에 쌓아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고, 회계 항목을 고의로 잘못 기재하고 “중요하지 않은” 오류로 처리하는 수법을 남발하는 관행이 만연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금융 공동체의 구성원 대다수가 (기업 경영진과 함께) 그러한 풍토를 조성한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레빗의 연설에는 행복한 공모의 그릇된 특성이 고스란히 까발려져 있다.
주식시장이 장기적인 가치 평가보다 단기적인 사건(일탈 현상)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이처럼 창의적인 재무 회계 관행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나의 근본적인 투자 원칙은 주식을 매수한 후에 오랜 기간 보유하고, 나아가 워런 버핏처럼 “영구히” 보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주식 투자는 그와 정반대로, 매수와 매도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앞서 지적한 대로 주식시장이라는 카지노에서 이러한 매매가 반복될수록 시장 수익에서 물주인 금융회사가 가로채는 몫만 늘어나고 도박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할 수익은 점점 줄어들 뿐이다. 대공황 당시 트레이더였던 프레드 슈웨드의 말처럼, 대체 고객들의 요트와 경비행기는 어디에 있는가? 이러한 환경에서는 주식을 매수하고 다시는 주식시장이라는 카지노에 얼씬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전략으로 보인다. (p.91-92)
자기 손해를 감수하고도 시스템상의 오류를 지적하고 월가의 실수를 조사한 애널리스트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중 하나가 오랫동안 애널리스트로 일한 마이크 메이요다. 메이요는 월가가 진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회피했던 이유를 알리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그는 ‘월가의 망명자’로 불렸고 2011년에 동명의 책을 출간했다. 메이요의 예리하고 솔직한 말을 들어보자.애널리스트는 금융시스템의 견제자가 되어야 한다. 이들은 특정 회사의 재무제표를 면밀히 검토하고 투자자들에게 그 회사의 실제 상황을 말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셀사이드 애널리스트라고 불리며 미국 기업의 감시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5,000명 정도이다. 불행히도 그중 일부는 치어리더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직장에서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자신이 담당하는 기업을 소외시키며 상사의 분노를 자아내는 것을 꺼린다. 경영대학원에 갓 입학한 학생도 주식의 95퍼센트는 상승 종목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월가에서 내놓는 매도 등급(sell rating)의 비율은 여전히 5퍼센트 미만이다.
(p.106-107)
나는 오랫동안 금융부문의 구체적인 문제(지나친 리스크 감수, 과도한 보수, 공격적인 대출 영업 등)를 지적했다. 그 결과 욕을 먹고 노골적으로 무시당하며 소송 위협을 받았고 임원들에게 조롱을 당했다. 내 입장을 누그러뜨리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선된 형태의 자본주의다. 그러한 자본주의는 회계에서 시작된다. 은행이 자유롭게 운영되도록 내버려두되 외부인에게 실제 수치를 공개하도록 하자. 더 나은 형태의 자본주의에는 파산도 포함된다. 리스크 감수로 이득을 얻으려고 하는 대출업체, 대출자, 은행 임원 역시 실수에 책임을 져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문화가 변화해야 한다. 애널리스트들이 미국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상장기업을 비판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지적 호기심과 독립성을 지닌 채로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내 예측도, SEC의 예측도 빗나갔다. 60여 년이 흐른 현재 뮤추얼펀드는 미국 기업의 최대 주주로서 전체 지분의 30퍼센트에 이르는 주식을 보유하고 있으며, 대부분 연기금 등의 기관에 투자 운용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60퍼센트가 넘는 주식을 주무른다고 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뮤추얼펀드는 미국 재계에서 단연코 가장 막강한 세력인데, 이들의 영향력은 몇 곳에 집중되어 있다. 25대 운용사가 보유한 미국 주식의 가치만 6조 달러로서, 기관 투자자들이 보유한 총주식의 75퍼센트 정도를 차지한다. 그러나 내 기대와 달리 그들의 목소리는 강력하기는커녕 속삭임에 가까웠다. “마음은 굴뚝같지만 몸이 안 따라준다”라는 속담과는 반대로 뮤추얼펀드의 경우는 몸은 따라주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뮤추얼펀드의 침묵이 어찌나 강렬한지 귀가 먹먹해질 정도다.
내가 알기로는 대형 펀드사 대다수의 경영진이 기업의 의결 안건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평가하지만, 극소수 예외를 제외하면 기업 경영진의 제안을 대부분 승인한다. 의결권 행사를 할 때도 요청받은 대로 경영진의 제안을 지지한다. 이러한 관행은 행동주의와 권익 옹호뿐만 아니라 기업 지배구조라는 개념과도 거리가 멀다. 뮤추얼펀드 대부분은 기업시민(corporate citizenship)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의회와 SEC 덕분에 주식 소유자들에게 주주총회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제공하자는 움직임이 산발적으로 일고 있다. 2012년에는 주로 봄에 있는 주주총회 시즌에 주주들이 임원 보수와 기업의 정치헌금 등의 다양한 사안에 폭넓은 의견을 제시했다. 점차 주주들의 제안이 수용되는 분위기다. 이제는 미국 기업의 지분 대부분을 소유한 금융회사들이 대신 나서서 주주들을 공개적으로 지지해야 한다. 적어도 기권을 할 생각이 없다면 말이다. (p.114-115)
오늘날의 CEO의 높은 보수를 정당화하는 근거는 CEO들이 주주에게 “가치를 창출해주었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CEO들이 실제로 그 어마어마한 보수 인상에 상응하는 가치를 창출했을까? 평균으로 따지면 당연히 아니다. 지난 24년 동안 기업들이 추정한 성장률은 연평균 11.5퍼센트였다. 그러나 연평균 실질성장률은 추정치의 절반에 불과하며 명목성장률인 6.2퍼센트를 밑도는 6퍼센트에 그쳤다. 실질가치로 환산한 연평균 실적증가율은 2.9퍼센트에 불과했다. GDP로 대변되는 미국 경제의 실질성장률인 3.1퍼센트에도 못 미치는 수치다. 이처럼 실망스러운 실적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CEO의 평균 보수가 2004년에 무려 980만 달러에 이르고 2010년에는 1,140만 달러를 돌파하게 되었는지는 이 시대의 가장 큰 의문 중 하나다.
기업 임원의 보수와 자산 가운데 상당 부분은 “앞면이 나오면 임원이 승리하고 뒷면이 나오면 주주가 패배하는” 스톡옵션으로 창출된다. 스톡옵션에 의한 주식 지분 희석(share dilution)은 겉보기에는 합리적인 선으로 유지된다. 해마다 총 발행 주식 가운데 대략 2~3퍼센트가 희석되며, 임원에게 발행된 숫자만큼의 주식이 환매되어 희석 효과가 상쇄된다. 그러나 몇 년에 걸쳐 희석 효과가 엄청난 수준으로 누적된다는 사실에 주목을 기울이는 이는 많지 않다. 실제로 10년 동안 희석되는 주식은 자그마치 25퍼센트가 넘는다. 그러나 나는 장기간에 걸친 주식 희석의 심각성을 다룬 기업 지배구조 연구나 학술 논문을 단 한 편도 발견하지 못했다.
CEO의 보수 급등 추세는 일류 운동선수나 연예계와 영화계 톱스타가 받는 어마어마한 (그리고 공개적인) 보수를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다. 부적절하고 터무니없는 비교다. 운동선수나 연예인 같은 유명인들은 사실상 팬이나 팀 또는 방송국 소유주가 ‘자기’ 돈으로 지급하는 보수를 받는다. 그러나 CEO는 이사가 자기 돈이 아닌 ‘남’의 돈으로 지급하는 보수를 받는다. 기업 이사는 주주의 대리인이지만 이사가 주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다시 말하지만 대리인 문제는 기업의 지배구조에 뿌리를 내렸으며 CEO의 보수 인상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 (p.143-145)
아이디어는 차고 넘치지만 관건은 그 아이디어를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지 여부다. 나는 이력을 쌓는 내내 이러한 좌우명을 표현해왔다. 세계 최고의 인덱스펀드 개발에도 당연히 그러한 좌우명이 적용되었다.
내가 인덱스펀드라는 아이디어를 막연하게나마 떠올린 때는 한참 전인 1951년이었다. 나는 주식형펀드의 수익률과 다양한 시장 지수를 비교한 통계 자료를 검토한 끝에 학부 시절 논문에서 뮤추얼펀드가 “시장 평균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다른 이들은 시장과 인덱스펀드의 조화에 대한 내 관심이 한참 전에 내린 그 결론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석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정말 그러한지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인덱스펀드의 씨앗을 심었던 때를 생각해보면 바로 그때가 떠오른다. 그 씨앗은 1975년 내가 S&P 500 지수를 추종하는 첫 인덱스 뮤추얼펀드에 대한 제안서를 뱅가드 이사회에 제출하면서 싹을 틔웠다. (p.254-255)
퇴직연금제도에 충분한 돈을 적립하지 않는 현상은 저축보다 소비를 선호하는 미국인의 성향을 엿볼 수 있는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여기에는 “나는 오늘 살 수 있는 소비재를 사서 쓸 거야. (그리고 지금 그 물건을 사기 위해서라면 미래의 돈을 끌어다 쓸 수도 있어.) 먼 미래의 궁핍은 나중에 걱정해도 돼”라는 사고방식이 드러난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자”라는 스칼렛 오하라의 말이 연상된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경제는 소비자의 지출에 의존한다. 미국 GDP의 70퍼센트 정도가 내수 소비의 몫이다. 여기에는 식료품, 주거, 의료 서비스처럼 생활에 꼭 필요한 품목뿐 아니라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에 필요한 사치재 지출도 포함된다. 옳고 그름을 따질 생각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퇴직 후의 생활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하면 퇴직 후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장기간에 걸쳐 저축을 늘리고 대출을 줄여야 한다. 경제의 건강은 가계의 안정성에 달려 있다. 그러나 미국 가계 저축률은 최근 경기 후퇴 때 상승하기는 했지만 과거의 표준에 한참 못 미친다. (p.312-313)
401(k) 투자자들의 적립 잔고가 이처럼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주식과 채권의 자산배분 비율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투자 전문가 대다수가 젊은 참여자에게는 주식에 자산 대부분을 배분하고 퇴직을 앞둔 참여자에게는 채권 배분을 늘리라고 조언하지만 401(k) 참여자 중 상당수가 그 조언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20대 401(k) 투자자의 약 20퍼센트 가까이가 퇴직연금계정에 주식 비중이 ‘0’이며 대신 MMF와 안정형펀드의 보유 비중이 과도하다. 이러한 배분에는 시간이 흐를수록 투자가 인플레이션에 따라가지 못할 가능성이 생긴다. 반면에 60대 401(k) 투자자 중 30퍼센트 이상이 주식형펀드에 자산의 약 80퍼센트를 배분하고 있다. 이러한 공격적인 자산배분을 한 사람들은 이번 하락장에서 401(k) 잔고의 30퍼센트 이상을 날렸을 가능성이 있다. 퇴직연금을 인출해서 써야 할 바로 그 시기에 큰 손실을 본 것이다.
투자자 상당수가 예로부터 내려온 분산화 원칙을 따르지 않는 상황에서, 자사주를 소유하는 것 역시 현명하지 못한 자산배분으로 이어질 수 있다. 자사주를 투자 수단으로 제공하는 퇴직연금제도에서는 참여자들이 평균적으로 잔고의 20퍼센트 이상을 자사주에 투자하며 그 결과 리스크가 매우 높아진다. 지나칠 정도로 보수적인 사람, ‘공격적인’ 사람, 퇴직연금에 일생을 바치다가 돈을 날리는 사람 모두 진정한 투자를 통해 (시장 리스크는 아니더라도) 다양한 리스크를 분산하여 상쇄하기보다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짐작하여 돈을 걸었을 뿐이다. (p.331-332)
앞서 설명한 ‘개방형 구조’로 된 퇴직연금제도와 자산을 거의 자유자재로 인출하는 것이 가능한 DC형 제도 모두 참여자에게 유익하지 못한 결과를 제공했다. 선택지를 제한하면 상대적으로 이해와 실행이 용이해진다. 그러나 현재의 참여자들처럼 거의 자기 마음대로(물론 가산세가 붙을 때도 있지만) 현금을 빼서 쓰는 식의 융통성을 축소하려면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할 것이다. DC형 제도가 퇴직연금 저축수단으로서의 잠재력을 발휘하려면 단기적으로 큰 고통이 따르더라도 현금 인출과 대출에 가산세 확대를 비롯해 상당한 제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참여자에게 인출 권한을 허용한다면 미국의 사회보장제도가 어떻게 되겠는지 상상해보라!). 무엇보다도 401(k) 제도가 원래 퇴직연금제도로 설계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기대하는 역할보다는 퇴직연금저축 제도로서의 역할에 중점을 둘 필요가 있다. (p.346-347)
사람이 싫다 / 손수호 / 브레인스토어
변호사로 신나게 일하려면 경영 능력이 중요하다. 경영에는 조직 관리, 인사 관리도 포함된다. 변호사 채용도 중요한 경영 활동이다. 어떤 변호사가 들어오는지에 따라 회사 분위기가 달라진다. 그래서 채용 면접도 중요하고, 새로 채용한 변호사 교육도 중요하다. 로펌에는 언제나 일 잘하는 변호사가 필요하다.
어떤 변호사가 일 잘하는 변호사일까? 일의 대부분이 재판과 재판 준비이므로 결국 재판 잘하는 변호사를 뽑아야 한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함께 일해 보기 전에는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면접장에서는 괜찮아 보였지만 실제로는 영 아닌 경우도 있고, 반대로 별 기대하지 않았음에도 나중에 큰 역할을 해내는 변호사도 있다. 그걸 잘 가려내는 능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수십 년 동안 쉼 없이 인재를 채용해 온 거대 기업도 자주 실수한다. 왜 그럴까? 면접장은 합법적으로 서로 속고 속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관상가까지 면접관으로 앉혀둘까. (p.48-49)
우선 민사 소송. 민사 소송의 당사자인 원고와 피고 양쪽 모두 거짓말을 한다. 법정에서 완벽하게 진실만 이야기하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아직 보지 못했다. 아무리 존경받는 성직자라도 돈 문제로 송사 걸리면 교묘한 눈속임을 넘어 거리낌 없이 거짓말한다. 교수, 교사, 의사, 변호사, 정치인, 연예인 다 마찬가지. 국적, 성별, 나이, 출신지, 학력, 재산 아무 상관없다. 법정에 서는 사람은 모두 거짓말을 한다. 돈 앞에서 모두의 인간성과 도덕관념은 평등해진다. 법정은 공인된 거짓말 경연장이다.
거짓말해도 괜찮다. 걸리지만 않으면 이긴다. 걸려도 다른 거짓말을 이어가면 된다. 양쪽 주장에는 늘 진실과 거짓이 섞여 있다. 그 배합 비율이 관건일 뿐이다. 그래서 민사 소송은 종종 51:49의 싸움이 된다. 주장에 일리는 있지만 아쉽게 49 수준에 그치면 전부 패소. 하지만 그 한고비를 넘기고 51이 되는 순간 전부 승소로 바뀐다. 위증죄가 무섭지 않느냐고? 전혀. 위증죄는 선서한 증인에게만 적용된다. 소송 당사자는 증인이 아니다. 거짓말하다 걸려도 위증죄 부담은 없다. 잠시 망신당하고 끝난다. (p.94-95)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변호사는 글을 잘 써야 한다. 그 글을 통해 다른 사람을 설득해야 한다. 읽는 사람이 글의 의미를 쉽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으면 그건 잘 쓴 글이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변호사 일 오래 한 사람도 중언부언할 때가 많다. 일단 생각나는 대로 신나게 써 내려가서 분량 채운 후 뺄 거 빼는 방식은 안 된다. 위험하다. 꼭 해야 하는 말, 결론을 먼저 확정하고, 그 주장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도록 증거와 근거를 찾아 넣고, 그것만으로 잘 전달되지 않을 수 있으니 친절하게 설명 붙이고, 이것들을 논리적으로 배치해야 한다.
다른 변호사의 법률 서면을 읽고 충격받을 때가 있다. 너무 잘 써서. 그런데 사실 서면의 질은 그 사건의 유불리에 따라 달라진다. 이길 사건은 글도 잘 써지고, 누가 읽어도 쉽게 수긍된다. 반면 이기기 어려운 사건은 아무리 노력해도 어딘가 만족스럽지 못하다.
변호사는 고민을 거듭해서 조금이라도 더 매끈하게 만들어야 한다. 머릿속에 아무리 많은 법률 지식과 판례 정보가 들어있어도, 그걸 말과 글로 잘 표현해서 판사에게 제시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다. 그래서 우리말, 우리글에 관심 많은 사람이 좋은 변호사가 될 수 있다. 어느 정도는 타고나야 한다. 더 솔직히 말하면,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온 능력이다. 타고나지 못했다면 어릴 때부터 책이라도 많이 읽어야 한다. 준비 없이 성인이 된 다음에는 따라잡기 어렵다. 아무나 김연아, 차범근, 박찬호가 될 수 없다. 엄청난 노력은 기본이고, 애초에 탁월한 재능이 있어야 한다. (p.136-137)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 한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일정 기간이 지나면 갚지 않아도 된다. 채권의 소멸시효 때문이다. 이러면 채권자는 억울해진다. 빌려줬는데 돌려받을 수 없다니. 하지만 오래 내버려 뒀기 때문에 그에 따른 불이익을 입는 거다. 그런데 중요한 게 있다. 법원이 알아서 소멸시효를 챙겨주지 않는다. 채무자가 일단 소멸시효를 주장해야 법원이 인정할 수 있다. 당사자가 주장조차 하지 않으면 판사는 인정할 수 없다. 판단해서도 안 된다. 이게 민사소송의 대원칙인 ‘변론주의’다. 그래서 법을 잘 모르면 갚지 않아도 되는 예전 채무까지 다 갚게 될 수 있다. 일단 그렇게 판결이 확정되면 되돌릴 수 없다. (p.141-142)
채권의 소멸시효 기간은 기본 10년이다. 채권과 소유권 이외의 재산권은 20년으로 길지만, 채권 중에서도 3년, 2년, 1년짜리 채권이 있는 등 다양하다. 변호사 보수는 1년이다. 극장 입장료, 식당 음식비, 노역 대금, 연예인 임금, 학원비도 1년이다. 사실 귀찮고 바빠서 못 받고 넘어간 수임료가 상당하다. 지금이야 그 시간에 그냥 다른 일을 해서 더 벌면 되지만, 나중에는 그 돈이 간절히 생각날 수도 있다. 다른 사람 돈은 칼같이 받아내면서 정작 내 돈은 그렇지 못하다.
대부업체는 소멸시효 상관없이 청구하곤 한다. 돈 빌린 사람이 소멸시효 지났다고 한마디 하면 이길 수 있는데, 그 간단한 걸 안 해서 진다. 이 지점에서 판사가 개입한다. 법을 모르는 채무자에게 슬쩍 도움 주는 경우가 생긴다. (p.143)
다양한 분야와 유형의 사건을 매일매일 새롭게 접하고 있다. 그걸 용하게도 다 처리하면서 하루하루 버텨낸다. 성취와 수명을 맞교환한다. 이렇게 다양한 사건을 다루다 보니 이상한 일을 완전히 피하기는 어렵다. 변호사만 아니었으면 만날 일 없는 이상한 사람을 계속 만날 수밖에 없다. 변호사 생활로 얻는 것도 많지만, 그에 따르는 부작용도 크다.
점점 더 사람이 무서워진다. 시간이 갈수록 세상이 두려워진다. 내 주변 세상이 흑백 화면으로 보인다. 선명하고 화려한 총천연색 아름다움은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이 싫다.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된 건 아니다. 여러 계기가 있었고 결정적인 변곡점이 있었다.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그런 기억을 큰맘 먹고 아주 조금 풀어내려 한다. (p.175)
의료사고 피해자, 사기 피해자, 성범죄 피해자, 산업재해 피해자 등등. 우리 주변에는 피해자가 참 많다. 그리고 피해자들은 변호사에게 의지하고 의존한다. 의뢰인이 지치면 소송도 중단된다. 억지로 끌고 가도 원하던 결과를 얻어내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변호사는 강인해야 한다. 적어도 겉으로는 강건한 모습을 보이면서 의뢰인이 쓰러지지 않도록 받쳐줘야 한다. 그게 임무다. 그 대가로 돈을 받는다. 그 돈으로 먹고산다. 그러니 당연히 잘 해내야 한다. 하지만 무섭다. 변호사도 사람이다. 태어날 때부터 변호사였던 게 아니다. 후천적 법조인이다. 변호사는 그저 자격이고 수많은 직업 중 하나다. 과한 사명감은 좋지 않다. 무엇보다 변호사 자신을 지치게 한다. 내가 지치지 않아야 의뢰인도 지치지 않는다.
사건도 무섭고, 상대방도 무섭고, 의뢰인도 무섭고, 갑자기 울리는 휴대전화 진동음도 무섭지만, 가장 무서운 건 이 일을 앞으로도 한참 더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지치지만 힘내야 한다. 적어도 이 일하면서 돈 버는 동안은. (p.194-195)
법원행정처 사법연감에 따르면, 2019년도 형사재판 1심 사건은 모두 247,365건이다. 최근 10년 동안 매해 24만 건에서 30만 건 사이를 오르내렸다. 고소·고발 건은 훨씬 더 많다. 대검찰청의 2020년 형사사건동향 자료를 보면, 고소·고발 사건은 50만 건이고, 고소·고발당한 사람은 무려 74만 명이나 된다. 엄청나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사건까지 다 포함된 수치이겠지만, 그래도 많긴 많다.
사실 평생 경찰서 한번 안 가본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내가 모른다고 없는 게 아니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세상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범죄가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변호사들이 밥 먹고 산다. 그렇다고 그걸 반기는 건 아니다. 범죄가 확 줄어서 변호사들 빈곤해지면 좋겠다. 물론 그렇게 될 가능성은 없지만.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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