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중국 / 스콧 로젤, 내털리 헬 / 롤러코스터
양극화는 여러 이유로 위험하다. 첫째, 양극화는 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 저소득 국가나 중진국보다 고소득 국가가 성장하는 것이 언제나 더 어렵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 하지만 만약 중국의 노동력이 양극화된 채 끝난다면, 많은 노동자가 뒤에 남겨지고, 중국은 경제성장에 필요한 동력 가운데 2억~3억 명을 잃게 될 것이다. 만약 너무 많은 사람이 실업 상태이거나, 제대로 고용되지 않은 채 남겨지거나, 자신을 부양할 수 없게 된다면, 이 위기는 경제성장을 위한 투자에 쓰일 수 있는 공공 자원을 고갈시킬 것이다.
둘째,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국에 투자할 유인을 감소시킬 수 있다. 세계화된 세상에서 일자리는 일을 가장 잘 해낼 사람들이 있는 나라로 흘러들어간다. 중국은 저임금 일자리는 임금이 너무 높고 대규모 고임금 일자리를 위한 기술은 너무 부족한 ‘무인지대(no-man’s-land)’ 상태에 갇혀버릴지도 모른다. 이는 중국에 대한 투자가 감소하거나 이 나라에서 새로운 기업을 세울 의지를 감소시킨다는 의미일 수 있다. 투자자들은 다른 곳으로 가버릴 것이다. 이런 요인들이 합쳐지면 앞으로 몇십 년간 경제성장이 제약을 받을 수 있다. (p.92-93)
2015년에 내가 전자기기 공장에서 조사했을 때, 대부분 노동자는 10~20년 뒤 자신의 사업(또는 초소기업)을 운영하고 싶다고 답했다. 그들 가운데 계속 공장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경우는 사실상 거의 없었고, 아주 소수만이 화이트칼라 일자리로 이동할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이 골목에서 볶음면을 팔거나 환경미화원, 고물상, 창문닦이, 정원사 같은 비공식 경제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이 노동자들은 다시 정체된 임금률과 줄어드는 수입에 갇힐 것이다. 도로변에서 하는 일은 안정성도 복지제도도 없을 것이다. 거의 백 퍼센트 확률로, 더 나은 일자리로 상향 이동할 가망이 없을 것이다.
비공식 분야가 늘어나는 것은 중국 경제 전반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만약 비공식 분야의 성장이 너무 커진다면, 공식 분야(그리고 경제 안의 모든 일반적인 일자리)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비공식 분야는 브랜드 가치를 손상시키거나 지적 재산권을 침해할 수 있고, (가장 중요한 점은) 비공식 분야라는 정의상 세금도 내지 않기 때문에, 모두를 위한 사회안전망을 약화시키고 공식 분야로 진출하려는 사람들(과 회사들)에게 사실상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비공식 분야는 그 자체로 생산성이 낮기 때문에, 경제 전반의 생산성도 끌어내릴 것이다. 그리고 세금을 내지 않기 때문에 사회문제를 경감시키거나 미래 투자를 위해 사용될 수 있는 정부 세수를 줄어들게 할 것이다.
양극화의 비용은 여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이런 선택에 대한 사회적 대가 역시 고려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선택지는 대부분의 중국 노동자에게 매우 불만족스러울 가능성이 높다. 몇십 년간 이 노동자들은 미래가 더 밝으리라 믿고 살아왔다. 하지만 이 일자리 중 그 어떤 것도 그들의 경제적·사회적 지위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더 나은 사회적 지위로 올려주지도 않고 기본적 존엄성도 유지해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왕 씨와 같은 노동자들은 그들의 모든 기대가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되었음을 깨달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일해 오면서 일자리를 바꿔야 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몇 년간 좋고 안정된 일을 하면서 자신이 유용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살아와, 이제는 중국의 미래에 더 이상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말을 듣게 될 줄 몰랐을 것이다. 수십 년간 희망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런 변화는 거대한 절망과 슬픔을 안겨줄 것이다.
만약 많은 사람이 갑자기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고 기대할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달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인간의 심리는 기묘하다. 기대했던 무언가를 잃게 되면 단순하게 그것을 가지지 못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상처를 받는다. 실망과 무력감에 직면하면 자주 분노한다. 이웃에게 공격적으로 변하고, 모두를 위한 파이를 키우는 데 투자하기보다 아주 작은 부스러기라도 얻어내려 싸우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는 어쩌면 중진국 함정의 배경이 되는 가장 강력한 단일 요소일 수도 있다. 바로 희망의 상실이다. (p.98-99)
2003년 〈마더 존스(Mother Jones)〉의 기사는 공장들이 갑자기 문을 닫자 사람들이 선택한 길을 보여주었다. 펠라 콘트레라스(50세)가 1998년 소니 공장에서 해고되었을 때(소니가 공장을 중국으로 옮겼을 때),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는 그 지역의 벼룩시장에서 타코와 공예품을 팔기 시작하는 것뿐이었다. 이전에 공장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던 국경마을 누에보 라레도에서 공장들이 대량으로 빠져나가면서 중심가에는 노점상들과 몇 페소라도 받아내기 위해 걸레를 들고 자동차 창문을 닦는 사람들이 급속하게 늘어났다. 이것이 멕시코에서 급증한 비공식 분야 노동자들의 삶이다.
비공식 분야가 확대된 것은 멕시코의 경제를 끌어내린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혹은 가장 가파르고 미끄러운 미끄럼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인 미주개발은행의 산티아고 레비와 하버드 대학교 교수인 대니얼 로드릭은 비공식 분야가 커진 것이 멕시코 경제가 활력을 잃게 만든 주요한 요인이라고 주장했다.
비공식 분야는 공식 분야보다 훨씬 비효율적이고, 공식 분야를 심각하게 망가뜨리며, 사회안전망도 약화시킨다. 1998년부터 2013년까지 누적으로 115%나 급증한 멕시코의 비공식 분야 고용은 같은 시기 공식 경제의 성장률 6%보다 훨씬 높았다. 비공식 분야에 세금을 부과하기는 훨씬 어렵기 때문에, 비공식 분야는 멕시코 정부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거나 장기 투자에 쓸 정부 세수가 급격히 감소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치아파스주에서 현지 주민의 80%가 비공식 분야에서 일한다는 사실은 주 정부가 예산 가운데 고작 1.5%만을 세금에서 걷을 수 있다는 의미다. 그 결과, 수많은 비숙련 인력 사이에서 작동하는 힘에 의해 경제가 중대한 하향 압박을 받게 되는 것이다.
멕시코의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예상대로, 멕시코 경제에서 배제된 많은 사람이 범죄로 눈을 돌렸다. 2000년부터 2010년까지 가게 절도와 상납 강요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2007년부터 2014년까지, 이 나라 곳곳에 퍼진 폭력으로 희생된 사람의 숫자가 15만 명을 넘었다. 이는 같은 기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사망한 민간인 숫자보다 많다. 멕시코의 살인사건 비율은 미국보다 3~4배 더 높다(미국의 살인사건 비율도 세계에서 높기로 유명하다). 오늘날 멕시코는 혁신과 기술의 질이 아닌, 범죄조직이 저지르는 폭력의 공포로 더 유명하다. (p.106-108)
분명 2000년대 말에는 중국 연해 지역에서 젊고 건강한 농촌 사람 누구나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연구를 통해 알 수 있다. 특히 최근 저숙련 일자리의 임금이 오르면서, 많은 학생이 학교를 중퇴하고 안정적인 임금의 유혹을 참아내기가 어렵다. 가난한 농촌 출신 젊은이에게는 작은 유혹이 아니다. 같은 연구를 통해, 2008년에서 2009년에 저숙련 노동자의 ‘한 달’ 임금이 가난한 농촌 지역에서 ‘1년 동안’ 벌 수 있는 1인당 수입과 맞먹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떠나 노동시장에 진입함으로써, 농촌 젊은이들은 고등학교를 그만두지 않는 사람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가난한 가족에게 이런 상황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것을 비용이 대단히 많이 드는 일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고등학교에 다니지 않는다면 아들이나 딸이 벌 수 있을 돈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경제학 언어로, 수업료가 사라지더라도 학교에 계속 남아 공부하면 기회비용이 높아진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장기와 단기 인센티브가 부조화된 문제라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이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중진국 함정에 빠지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어떤 나라가 후진국이거나 중진국이고 저임금 일자리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상태라면, 가난한 아이들과 그들의 가족은 교육을 포기하고 당장 돈 버는 길을 선택할 분명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지금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발전이 계속되고 저임금 일자리가 사라지기 시작하면, 그제야 후회할 만한 선택을 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p.142-143)
일자리를 찾는 노동자들에게는 두 가지 기술이 쓸모 있다. 첫째, 순수하게 직업적이거나 전문적인 기술이다. 바로 특정 업무를 잘 해낼 수 있는 능력이다. 예를 들면 용접 기술, (컴퓨터가 등장하기 이전의) 타이핑 기술, 혹은 자동차 수리 능력 등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기술들은 특정 일자리에는 곧바로 적용되지만, 그 특정한 일자리에만 쓰일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 보편적이거나 학문적인 기술이다. 이런 기술은 전통적인 중학교 혹은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배울 수 있다. 여기에는 수학, 독해, 작문, 과학, 논리, 정보기술, 그리고 (세계 많은 곳에서) 영어 등이 포함된다. 이 기술들은 학생들에게 다음 단계 학습을 위한 기초를 갖추게 해주고, 미래에 직업 관련 혹은 다른 분야에서 새로운 기술을 배울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준다.
문제는 이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직업 고등학교 시스템은 직업 기술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며 다른 것은 거의 모두 배제된다. 하지만 나는 중국의 모든 아이가 보편적 기술을 배우는 능력에 중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믿는다.
보편적 기술이 더 중요하다고 믿을 이유는 많다. 확실히 직업 기술은 바로 일자리를 찾는 데 쓰일 수 있으며, 이는 분명 소중하다. 하지만 직업 기술은 그 산업이 잘나갈 때만, 돈을 많이 줄 때만, 그리고 충분히 많은 사람을 고용할 때만 의미가 있다. 만약 산업이 바뀌면 그 직업 기술은 쓸모없어질 것이다. 지난 몇십 년간 산업 전반에서 수많은 기술적 발전이 몇 번씩 거듭해서 일어났다. 보편적인 기술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 능력을 주고, 필요하면 직종을 바꾸고 그들의 인생에서 다양한 직업 기술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 (p.167-168)
독일도 직업 고등학교 프로그램이 있다. 하지만 중국과 다르게 독일의 직업 고등학교들은 좁은 의미의 직업 기술만 가르치지 않는다. 그 학교들은 먼저 강력한 학업 교육을 통해 학생들에게 보편적 기술 습득을 우선순위에 두고, 보조적으로 직업 기술을 지원한다. 그들은 고등학교 역할을 우선적으로 하며 직업 훈련소 기능은 두 번째다. 독일의 직업 고등학교 학생들은 (중국에서처럼) 30%의 시간만 학업 교육에 쓰는 것이 아니라, 70~80%의 시간을 보편적 학업 교육을 받는 데 쓴다. 독일인들은 직업 고등학교 졸업생들이 학습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안다. 중국도 이 시스템이 완벽한 잠재력을 발휘하려면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
혼란스러운 직업학교 시스템에 이토록 많은 돈을 투자한다면 수백만 명의 학생이 미래에 실망하고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지 못하거나, 그보다 더 좋지 못한 상황을 맞이할 것이다. 미래의 중국은 가장 희망적인 경우라 해도, 성인 재교육 프로그램에 비용을 지불하는 형식으로 이런 실수에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고, 그것이 어느 정도 효과를 낸다 하더라도 어린 학생들에게 제대로 교육받게 해서 얻는 효과보다 효율성이 훨씬 덜할 것이다.
사람들이 어리고 최고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을 때 일반적인 교육을 받도록 투자해야 중국은 투자 대비 더 나은 수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실업, 둔화된 경제성장, 범죄, 폭력 조직 활동, 심지어 사회적·정치적 안정성 상실이라는 비용을 치를지도 모른다. (p.172-173)
이 프로젝트들의 결과, 중국의 고질적인 농촌과 도시 간 교육 격차의 원인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오늘날 중국 농촌의 아이들은 아프다. 그들은 빈혈이 있고, 제대로 칠판을 볼 수 없으며, 장내에는 기생충이 살고 있다. 이런 건강 문제는 그들을 지치게 만들어 학교에서 집중하기 힘들게 한다. 선생님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고, 칠판 글씨도 점점 더 읽기 힘들어진다. ‘보이지 않는 중국’을 찾아온 방문객들은 학교 시설에 감탄하지만, 농촌 학생들을 안에서부터 괴롭히고 있는 학습과 성장의 장애물들은 보지 못한다. (p.188-189)
이 공중 보건 위기의 규모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보인다. 문제는 이 보건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 가지 모두 저렴하고 빠른 해결책이 있다.
빈혈은 (대개) 음식 섭취에서 철분이 모자랄 때 발생하기 때문에 식습관을 바꾸거나 더 간단하고 저렴하게는 권장량의 철분을 함유한 종합 비타민제를 매일 섭취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 효과적인 종합 비타민제는 아이 한 명당 하루에 10센트 정도면 구입할 수 있다.
시력 문제에 대한 해법은 이미 언급했다. 90%의 시력 문제는 제대로 된 안경만 있으면 교정할 수 있다. 근시로 고생하는 학생 한 명당 30달러 정도 들기 때문에 이 해결책은 비용이 약간 더 들지만, 평균적인 농촌 가정의 수입으로 감당할 수 있는 정도다. 사실, 오늘날의 임금률(시간당 2~3달러)을 생각하면, 안경 하나 사려면 농촌 지역 가족의 2~3일 치 임금 정도 든다. 게다가 안경은 보통 2년이나 그 이상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연간 들어가는 돈은 그렇게 많지 않다(매년 부모 중 한 명의 하루 임금이 든다). 결론적으로, 하루당 비용은 빈혈 치료 비용보다 더 저렴하다.
장내 기생충을 위한 저렴하고 잘 만들어진 해결책도 있다. 좋은 위생과 건강한 식습관은 아이들의 기생충 감염을 막아준다. 하지만 (중국 농촌의 많은 지역처럼) 위생이 그렇게 좋지 못한 곳에서는 1년에 두 번 구충제를 먹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 약은 안전하며(감염되었든 아니든 모든 아이가 먹어도 될 만큼 안전하다) 효과도 좋고(하루에서 이틀이면 기생충이 완전히 제거된다) 저렴하다. 기생충 감염을 방지하는 데 한 아이당 1년에 2달러도 들지 않는다. 1년에 부모 중 한 명의 1시간 임금에 해당하는 비용이 필요하다.
진짜 어려운 문제는 이런 것들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도 이런 것들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존재한다. 빈혈, 시력 문제, 기생충은 모두 맨눈으로 보면 알 수가 없다. 빈혈은 그 영향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아 ‘감춰진 기아’로 알려져 있다. 기생충 역시 질병의 증상이 뚜렷하지 않다.
이 문제를 논의할 때 많은 사람이 아이들을 돌보고 건강한 식사를 제공하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라고 말한다. 그들은 보통 종종 철학적인 근거를 대면서, 아이들의 건강과 영양은 부모와 가족이 스스로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고 결론 내린다. 하지만 내가 관찰해온 현실에 근거하면, 중국 농촌 지역 부모와 조부모는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역량이 부족하다. 적어도 현세대에서는 그렇다. 전문적인 지식이나 경험 없이는 부모가 이를 진단해낼 수 없다. 특히 빈혈이나 기생충이 만연한 집단에서 어떤 부모가 아이들이 낮잠을 많이 잔다고 깊이 고민하겠는가? 농촌 지역 대부분의 부모는 아주 기초적인 교육만 받았고, 농촌 마을에서 많은 아이에게 가장 가까운 보호자인 조부모들은 보통 아예 문맹인 경우가 많다. 물론 그들도 자기 아이들을 돕고 싶어 한다. 단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를 뿐이다. 따라서 아이들이 학교에 모여 있을 때, 이를 공중 보건 문제로 다뤄 한꺼번에 치료하는 것이 훨씬 쉽고 비용이 적게 들며 가장 효과적이다. (p.190-192)
한 시간 정도 지난 뒤 교실로 돌아와 그 아이가 줄 앞쪽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의사는 처방전에 따라 맞춘 안경을 그에게 건네 주고는 그것을 쓰고 창문 밖을 보라고 했다. 여전히 얼굴을 찡그린 채, 그는 그렇게 했다. 그런데 곧바로 그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눈이 커지더니 비틀거리다 거의 넘어질 뻔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왜 빛이 이렇게 밝지?” 그러고는 해맑게 미소를 지었다. 처음으로 세상이 흐릿하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으로, 그는 나뭇잎과 나무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이는 정말 멋진 순간이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순간이다. 확실히, 안경 프로젝트는 직접 볼 때 가장 신난다. 하지만 그날의 진정한 영향은 우리가 몇 달 뒤 프로그램의 진전을 보려고 학교로 돌아갔을 때 분명해졌다. 우리는 몇 집을 가정방문했는데, 그중 한 곳이 그 아이의 집이었다.
그가 안경을 쓴 지 6개월째였다. 나는 그와 함께 초등학교에서 내려가는 길에 있는 그의 집으로 걸어갔다. 거기서 그의 할머니를 만났다. 그녀는 그가 함께 사는 유일한 어른이었고, 프로그램 초반 안경에 대해 아주 회의적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경험을 말해주면서 눈물을 흘렸다. “저 애는 이제 반에서 최상위권이에요. 선생님은 저 애의 성적과 진보에 대해 정말 기뻐하고 있어요. 이렇게 많은 차이가 생기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그녀는 학업 말고도 다른 변화가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 아이는 고립되어 있었어요. 하교할 때 한 번도 친구를 데려온 적이 없어요. 지금은 매일 방과 후에 남아 친구들과 탁구를 하거나 농구를 해요. 집에 오면 종종 저에게 산책하자고 해요. 안경을 쓰기 전에는 전혀 하지 않던 일들이죠. 아이는 안경을 쓸 때마다 미소를 지어요. 이런 변화들이 정말 너무 놀라워요.” 그녀는 고개를 흔들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저 때문에 아이가 안경을 못 쓸 뻔했다는 게 믿을 수 없어요. 아이에게 이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전혀 몰랐어요.”
이 이야기는 아주 작은 단계에서 변화가 일어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잘 보여준다.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중국을 다르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이런 작은 변화다. 어린아이와 개개의 가족에서 시작하는 것은 큰 변화에서 핵심적인 부분이다. (p.210-211)
연구에 따르면, 아이의 건강한 뇌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헌신적인 정신적·감정적 상호작용이 있어야 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얼굴에서 그런 감정 표현을 보고 흉내 내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한다. 어른들이 시간을 내어 개념을 소개해주지 않으면 아기는 색깔 이름도 배우지 못하고, ‘하늘’과 ‘구름’의 개념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들은 자신을 사랑해주는 어른이 일대일로 시간을 내어 꾸준히, 정신적으로 자극해주어야만 평생에 걸쳐 필요한 뇌 구조와 개인 자아 발달을 이루어낼 수 있다.
정신적·감정적 자극이 중요하다는 첫 증거는 아이 방임의 가장 비극적인 사례들로 인해 알려졌다. 1950년대에 연구자들은 레바논의 매우 암울한 고아원에서 자란 아이들을 연구했다. 인생 초기 몇 년간 이 고아들은 거의 유아용 침대에 갇혀 지냈다. 아이들은 음식을 먹고 옷을 입었지만, 개인적 보살핌이나 주의를 거의 받지 못하거나 전혀 받지 못했다. 연구자들은 이 일대일 상호작용의 부재가 아이들의 정신 발달에 파괴적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고아들은 이후 평생 극심한 발달 지체를 보였다. 이 발견은 한국과 루마니아의 고아원에 대한 연구에서도 똑같이 나타났다.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초기 방임은 평생 고치지 못하는 증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 연구는 (시설에서 자란 고아들의 경우처럼) 가장 극단적인 경우의 방임은 아이들이 심각한 감정과 인지 능력 저하(최악의 경우 뇌의 극심한 수축)를 겪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평범하고 사랑하는 가족에서도, 예를 들면 진진의 가족처럼 아이가 아주 어릴 때 받는 자극의 종류에 따라 발달 정도가 현저히 다를 수 있다.
예를 들면 아이에게 나타나는 심각한 차이는 아주 간단한 근원에서 비롯된다. 바로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얼마나 말을 거느냐 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일하는 연구자들은 인생의 첫 3년간 부유한 집의 아이들은 가난한 집의 아이들보다 3000만 개의 단어를 더 듣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세 살이 되었을 때 이 두 그룹의 단어 사용 차이는 그들이 집에서 듣는 단어 빈도에 거의 직접적으로 비례했다. 게다가 이 초기의 차이점은 장기적 성과의 차이로 이어졌고, 초기에 언어 능력이 지연되면 10년 후 더 낮은 인지 능력 점수와 더 좋지 못한 학업 성적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육아법의 아주 작은 차이에서 비롯된다.
중국 농촌의 아이들은 그들에게 필요한 정신적 자극을 받지 못하는데, 이것은 구조적 문제다. 우리가 농촌 사람들에게 어린 자녀들에게 종종 말을 걸어주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멍한 표정 또는 어안이 벙벙한 웃음으로 대응한다. “제가 왜 아기에게 말을 걸어야 하죠?” 한 젊은 어머니가 웃으며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대답했다. “아기는 대답을 할 수도 없잖아요!” (p.236-237)
사실, 세계는 개발도상국에서 유아 발달 문제가 보편적이란 것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유명한 의학 저널 〈랜싯(Lancet)〉의 최근 특별호는 이 문제의 규모를 보여주었는데, 저소득 국가와 중진국 전반에 걸쳐 약 2억 5000만 명의 5세 이하 아이가 장기적 발달 저하 위험에 처해 있다고 추산했다. 〈랜싯〉이 같은 시리즈 이전호에서 다룬 연구는 (불충분한 육아 방식으로 인한) 부족한 인지 자극은 세계적으로 유아기 초기 발달 지체 문제의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라고 결론 내렸다. 그 연구는 개발도상국 부모 가운데 11~33%만이 자녀들에게 인지적 자극을 주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렇기에 이는 개발도상국 전반에 걸친 문제이며, 주요한 원인은 어린아이들의 필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육아법이라고 볼 수 있다. (p.244)
여성노동자, 반짝이다 / 전국금속노동조합 / 나름북스
그녀들은 자동차를 조립하고, 배를 용접하고, 식당에서 밥을 하고, 전기 코드를 만들고, 핸드폰을 생산하고, 자동차 램프를 검사하고, 범퍼를 운반한다. 이 중 어떤 노동이 남성의 노동이기에 금속노조의 여성 조합원은 단지 6%일까? 여성노동자들은 모든 일을 할 수 있고, 이미 하고 있다. 이 중 어떤 노동이 부차적인 노동이고, 어떤 노동이 덜 중요하여 여성노동자의 임금은 남성노동자의 55% 수준일까?
어떤 노동이 가치가 없기에 그녀들은 관리자에게 당연하다는 듯 반말을 들어야 할까? 그녀들은 화장실 문짝이 떨어져 덜렁거리고, 식당에는 늘 반찬이 부족하고, 연차를 쓰려면 사유서를 써서 허락받아야 하는 환경에서 일했다. 또 12시간 맞교대 노동을 하며 물량이 쌓이면 밥 먹을 시간도, 화장실 갈 시간도 없었다.
2021년 여성노동자들의 일터는 많이 다른가? 여러분이 일하는 현장은 월차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는가? 식사시간은 보장되는가? 화장실은 불편 없이 사용할 수 있는가? 관리자들이 존댓말을 쓰는가? 폭언하진 않는가? 어떤 일을 하기에 여성노동자는 천대받는가? (p.23-24)
한국 노동조합 운동은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됐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하에서 근대화하며 시작된 노조운동은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자유당 정권의 탄압으로 단절된다. 폭압적인 박정희 정권에서 노조운동이 부활한 1970년대에는 여성노동자들이 운동의 중심이었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가난한 집에 태어난 여성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공장 노동자가 되었다. 그녀들이 집에 보낸 돈으로 형제들을 대학까지 보내던 시절, 큰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말이 자연스럽던 시절이다. 교복 입고 학교 가는 여학생들이 가장 부러웠다고 그녀들은 말한다. 경공업의 여러 사업장에서 빨갱이 소리를 들어가며 노동조합을 만들어 치열하게 싸웠던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1980년대 구로동맹파업까지 이어진다. 그다음 장면이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다. 이때 대공장 남성노동자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해 ‘3명만 모이면 노조를 만든다’고 했던 7월, 8월, 9월의 뜨거운 여름을 거치며 노동자계급이 세력으로 등장했다. 1980년대 입사해 공장에서 일하던 금속노조의 1세대 여성노동자들이 처음 노동조합을 만나는 순간이다. (p.43-44)
한국전쟁 이후 단절된 노동조합 운동의 부활 시점은 보통 1970년 노동자 전태일이 분신한 때로 본다. 1960년대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봉제공장 재단사로 일했던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자기 몸에 불을 질러 죽음에 이른 사건은, 이후 그의 일기가 공개되면서 이른바 지식인의 양심에 송곳이 되었다. 전태일은 허리조차 펼 수 없는 밀폐된 공간에서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그리고 폐렴에 시달리는 여성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한자투성이의 근로기준법을 독학하다가 “내게 대학생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하고 한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전태일의 부름에 응답하여 전태일의 친구가 되기로 한 대학생들이 노동현장으로 들어가는 흐름이 이때부터 생겼다. (p.73)
지금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노동자들은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당하는 폭력에 노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직도 ‘구속’은 이들에게 국가가 행하는 노조 탄압이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고 배운 노동자들이 노조 활동을 시작하면 대부분 깜짝 놀란다. 불법은 회사가 저질렀는데, 왜 정당한 주장을 하는 억울한 나를 경찰이 위협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동자들에게 가장 많이 적용하는 법은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이 아닌 ‘도로교통법’이다. 집회하는 건 합법인데, 다수가 모여 도로에서 집회하며 교통을 방해한 것이 죄라는 말이다. 또 도로교통법 위반의 근거를 확보한다면서 경찰이 집회 참석자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밀며 집회를 방해하여 다툼이 생기면, 이것은 ‘공무집행방해’에 해당한다. (p.183)
제조업 생산현장이 전통적으로 남성의 일이라는 인식은 여전하다. 이는 남성은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리고, 여성은 남성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가족을 돌본다는 이분화된 설계에 기초한다. 이에 남성이 일터에서 하는 노동은 공적인 일이고, 여성이 집에서 하는 노동은 사적인 일이 된다. 이는 여성의 돌봄노동을 가치가 없는 무임금 노동으로 치부하며 완성된다. 경제적 권한이 여성에게 없는 것 또한 집이라는 공간에서 성별에 따른 차별을 강제하는 조건이 된다. 따라서 가족을 부양할 무거운 의무와 책임을 지는 남편의 명령을 아내가 순종해야 한다는 폭력적인 공식이 성립한다. 전통적인 이 공식이 깨진 것은 IMF 외환위기 이후다. 가족 중 한 사람이 버는 돈으로는 아이들 교육시키고 먹고살 수 없어서 여성들이 돈을 벌러 일터로 나왔다. 그러나 집 밖으로 나온 여성들에게 주어진 일 역시 청소, 식당보조, 요양보호사, 간호조무사 등의 돌봄노동이고, 대부분 최저임금이나 받으면 다행일 정도로 저임금이다. 여성이 하는 일은 남성이 하는 일보다 가치가 낮다는 평가가 관철된 결과다. 차별은 한 사업장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일로 간주되는 업종과 여성의 일로 간주되는 업종 사이에 발생하며 한국 산업구조의 차별로 확장했다. 차별을 넘어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면, 노동현장의 차별을 빼고는 논할 수 없다.
회사는 노동자를 채용할 때 동일한 경력의 사람도 성별에 따라 직무를 나눠 채용한다. 즉 남성은 관리자 혹은 관리자가 될 수 있는 직무에, 여성은 평생을 일해도 승진할 수 없는 직무에 채용한다. 여성이 많은 사업장에서도 소수의 남성이 관리자를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기서 남성이 명령하고, 여성은 순종하는 공식이 다시 관철된다. 이러한 채용은 남녀의 임금 차별을 전제한다. 처음부터 임금이 다른 것은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남성의 임금은 높아지지만, 평생을 일해도 여성의 임금은 최저임금 근처를 맴돌 뿐이다. (p.193-194)
요즘 반려견 키우는 가정이 엄청 많아요. 고객 집에 방문하다 보면, 소형견부터 대형견까지 세 가구당 한 가구는 반려견이 있어요. 그런데 열에 아홉은 반려견이 무방비 상태로 풀려 있어요. 고객들은 정말 하나같이 똑같이 말하죠.
- 우리 애는 안 물어요.
- 우리 애는 순해서 괜찮아요.
그런데 매니저들이 개에게 물리는 사고가 엄청나게 잦아요. 사고가 나면 고객이 그럽니다.
- 우리 애가 원래 안 이런데, 오늘따라 왜 이러지? 괜찮으세요?
물론 치료비는 나 몰라라 하고요. 전혀 괜찮지 않지만, 매니저들은 무방비 상태로 당한 놀람과 불안함을 제대로 표현도 못 하고 그냥 “괜찮습니다”라고 말해요. 고객 감동 매뉴얼 때문에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괜찮습니다’가 입에 붙어 있거든요.
개 물림 트라우마가 생긴 분들도 많아요. 그나마 노동조합이 생기고 방문 시 반려견을 분리해 달라는 고객 문자 메시지가 생겼지만, 매니저가 직접 고객에게 보내야 해요. 고객 입장에서는 문자를 받아도 의무가 아니다 보니 사고가 반복적으로 일어나고요.
고객뿐 아니라 회사의 관리자, 소장, 팀장에게 겪는 갑질이나 폭언도 많아요. 본사 관리자가 매니저들을 모아놓고 그러죠.
- 이 일도 못 하면 밖에 나가서 폐지나 주워라.
소장 말을 안 들으면 이런 얘기를 듣기도 해요.
- 인생을 왜 그렇게 살아? 그러니 이런 일이나 하는 거야!
노동조합이 생기고 나서는 그래도 회사 관리자들이 조심하는 분위기가 있어요.
대부분 사회생활을 하다가 결혼, 출산, 육아 등으로 경력이 단절되고, 생계를 위해 이 일을 하는 매니저들이 많아요. 건당 수수료를 받기 때문에 몇 건을 배정받는지가 중요하고 예민할 수밖에 없어요. 소장이나 팀장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일감을 빼앗기는 일이 비일비재하죠. 물론 이를 제재하는 어떤 규정도 매뉴얼도 없고요. 회사는 소장과 팀장의 재량이라며 떠넘기기만 해요.
2020년에 노조 만들고 교섭을 요구했지만, LG전자는 지금까지 교섭에 나오지 않고 있어요. 우리가 노동자가 아닌 자영업자이므로 교섭에 나올 의무가 없다고요. 중앙노동위원회에선 노조법상 우리는 노동자가 맞다고 인정받았어요. 그래도 회사가 교섭에 안 나와서 행정소송 중이에요. 회사는 여기서도 우리가 노동자라는 게 인정되면 교섭에 나온다네요. 2021년 말쯤에 결과가 나와요. 특수고용노동자라는 게 특별하게 이용하다가 소모품처럼 버려도 되는 노동자가 아니라는 걸 회사에 알려주고 싶어요. (p.207-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