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에 대한 의무 2 / 올리버 발치 외 / 스리체어스
리튬 공급이 시급한 과제가 되면서 채굴 붐이 촉발했고 하얀 석유에 대한 경쟁은 점점 더 치열해졌다. 동시에 리튬이 발견되는 곳이라면 어디든 환경 파괴의 위험에 처하게 됐다. 하지만 리튬이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는 EU의 환경 정책은 리튬 비즈니스 확산에 아주 좋은 조건이 되어 주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의 이면에는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리튬에 기반을 둔 현재의 소비와 생산 모델이 실제로는 전혀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리오프 랑코스의 말이다. “모든 사람이 전기차를 소유하려면 어마어마한 양의 자원을 채굴하고 정제해야 합니다. 게다가 그로 인해 또 다른 온갖 오염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p.11)
채굴 면허 승인에 대비해 이나시우를 비롯한 소수 강경파는 법정 싸움을 준비를 하고 있다. 카르무의 입장은 명확하지 않다. 카스텔루 브랑쿠에서 그녀가 참여했던 캠페인 그룹은 이미 분열되었고, 회원들의 절반은 그녀가 사는 마을 위쪽에서 노천 리튬 광산이 허가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한다. 어쨌든 채굴될 것이기 때문에 차라리 다른 형태의 약속을 받아내기 위해 협상하는 것이 낫다는 의견도 나온다. 바르쿠 지역에도 예전에 주석 광산이 하나 있었는데, 채굴이 꼭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고 말하는 주민들도 있다.
하지만 카르무는 주석 광산 채굴과 리튬 채굴을 비교하는 것은 실수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1960년대 초 폐광 전까지 마을 외곽에 있는 아르제멜라 주석 광산에서 일했다. 반면 새로운 리튬 광산은 산 언덕의 절반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정상에 있는 청동기 시대의 거주지 유적이 피해를 볼 수도 있다. 특히 주민들은 화학 물질이 누출돼 인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제지리(Zêzere)강까지 오염될까 봐 걱정하고 있다.
3년간 고군분투하는 사이 카르무는 이제 지쳐서 거의 항복을 외칠 지경이 되었다. 그녀는 정부가 귀를 틀어막고 있으며, 시민들은 이 문제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한다. “엄청난 파괴가 일어날 겁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서죠? 파괴의 대가는 파리와 베를린에 사는 환경 의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돌아갈 겁니다.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차량을 몰고 돌아다니면서 만족감을 느끼겠죠.” (p.16-17)
45억 년 동안, 남극의 바람과 파도는 단 하나의 속삭임도 실어 나르지 않았다. 인간이 처음 남극을 발견한 건 증기기관과 전구가 발명된 지 몇 년 지나지 않은 시점, 불과 200년 전이었다. 이 대륙의 지도를 처음으로 그린 탐험가들은 영웅으로 칭송받았지만, 그 뒤엔 대학살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영국의 해군 장교 제임스 클라크 로스는 항해하면서 발견한 바다표범과 펭귄에게 일어날 일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1841년 그는 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지금까지 이들은 박해자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평온하고 안전한 삶을 누려왔지만, 이제는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나라의 부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이후 50년 동안 영국과 미국은 100만 마리 이상의 물개를 죽였다. 기름 램프, 화장품, 비누를 만들기 위한 지방 2만 톤을 얻기 위해 수많은 코끼리 바다물범을 살상했다. 모든 만, 모든 섬의 동물 개체 수가 거의 사라졌다. 펭귄들은 기름을 얻기 위해 거대한 찜통에서 삶아졌다. 찜통은 하루에 펭귄 2000마리의 지방을 짜낼 수 있는 크기였다. 20세기 초에 마침내 펭귄에 대한 법적인 보호 조치가 시행되었지만, 동물성 기름과 지방 생산의 부족분을 보충하기 위해 이번에는 고래에 대한 수요가 촉발됐다. 대왕고래, 참고래, 보리고래 등 여러 종의 고래가 사냥당하면서 멸종 위기에 처했다. 혹등고래와 같은 고래는 거의 90퍼센트가 줄어드는 고통을 겪었다. (p.50-51)
이 작업의 실무자들 상당수가 억만장자이고 그들이 자연에 되돌려준 풍경은 (서류상으로 누구의 소유건 간에) 우리의 귀한 자산이며, 식량을 토지에 의존하는 것은 깊이 뿌리내린 전통이기 때문에 생태 복원은 논쟁을 야기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생태 복원은 지구 건강에 대한 장기적인 관점에 기반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가 토지를 환경 측면에서 더욱 지속 가능한 방식을 동원해 먹거리를 생산하는 데 이용할 뿐 아니라 온실가스를 포획하고 멸종 위기종을 구하며 교통 체증과 손 세정제로부터 잠깐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휴식을 얻는데, 다시 말해 도시를 떠나 자연의 조화를 즐기는 데에도 이용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글렌페쉬의 재생이 바로 그러한 작업이다. 맥도넬과 그의 팀은 지난 10년간 페쉬강 유역과 이웃 강 트로미 유역을 분할하고 있는 언덕을 따라 수만 그루의 소나무, 자작나무, 버드나무와 기타 토종 수목을 심었다. 이제 몇 년 뒤면 이 줄기들은 침식을 방어하는 방벽이자 탄소 흡수대, 또 큰들꿩과 뇌조 같은 고지대 새들의 서식 장소로 발전할 것이다. 새와 바람이 씨를 뿌려대고 있지만 밀집도가 1평방킬로미터당 40마리에서 한 마리로 줄어든 사유지의 사슴들은 더는 어린 새싹을 모두 먹어 치울 만큼 개체 수가 많지 않다. 그렇게 식물의 수가 늘어나면 소나무담비, 붉은 다람쥐와 산토끼들에게 먹이가 공급된다. 맥도넬은 이런 산짐승들의 개체 수가 늘어나는 모습을 주시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솔잣새와 뿔박새 같은 멸종 위기 조류의 개체 수도 증가했다. (p.61-62)
집약적 농업은 생산량을 끌어올리고 병충해를 퇴치하도록 설계된 방식이다. 비료, 살충제, 제초제, 살균제를 많이 사용할수록 수확도 늘어난다. 화학 물질을 사용하지 않았고 잡초가 들끓던 시절인 1940년대에, 버렐의 증조할아버지는 헥타르당 2톤의 밀만 수확해도 운이 좋은 편이었다. 오늘날 고수확 종자를 사용하는 농부들은 헥타르당 10톤의 밀 수확을 기대하곤 하는데, 보통은 살충제와 질산암모늄 비료를 사용하고, 농부들 사이에서 비호지킨 림프종을 일으키는 제품으로 알려진 제초제 ‘라운드업’도 드문드문 사용한다. 제품들의 발암성을 모른 척할 경우, 제대로 화학 물질을 쓰고 날씨까지 맞아떨어지면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2015년 노섬벌랜드의 한 농부는 헥타르당 16.52톤을 수확했다고 발표했는데, 이 기록은 기네스북에 올랐다.
화학 물질은 수확량을 증대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면서 1만 7000여 명에 달하는 영국 농부의 상당수를 충성 고객으로 확보했지만, 이것이 야기하는 장기적 환경 피해에 대한 인식도 점점 커지고 있다. 화학 물질을 다년간 반복적으로 사용할 경우, 뿌리에 물과 영양을 공급하는 작은 균근뿐만 아니라 흙에 공기를 통하게 하고 배수 능력을 높이는 지렁이까지 죽게 된다.
이러한 화학 물질의 남용은 많은 동물에게 먹이와 거처를 제공해 주는 산울타리와 관목을 제거하는 광기와 맞물려 야생 생태에 치명적인 손실을 입혔다. 1970년 이후 영국에서는 40퍼센트 이상의 생물 종이 감소했고, 야생 동물의 7분의 1이 멸종 위기에 직면했다. 이는 전 세계 평균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다. (p.70-71)
UN이 예견하는 식량 부족을 완화할 확실한 방법은 덜 버리는 것이다. 수십 년 동안 풍족함을 누려 온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는 매년 생산되는 식량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3억 톤 가량을 폐기 처리한다. 1960년대까지 일반적인 영국 가정 예산에서 음식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30퍼센트를 상회했는데, 현재는 10퍼센트 아래까지 떨어졌다. 영국은 싱가포르와 미국 다음으로 세계 어느 나라보다 장바구니 물가가 싸다. 사람들이 상품을 무척 가벼운 마음으로 사고 있으니, 상품을 생산하느라 투입된 자연 자원과 인간의 독창성에 대한 고려 없이 다량으로 버려지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슈퍼마켓을 돌아다니는 쇼핑객 사이에서 눈에 띄는 동요가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면, 이는 식량 부족에 대한 전망이 현재의 풍요와 너무도 동떨어져 보이기 때문이다. 이사벨라 트리는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해야 한다는 “소매업자, 농업 관련 사업가, 농민 조합”의 요구와 “보조금과 과잉 생산으로 인해 상품 가격이 하락하면서 …… 폐업한 우리 같은 농부들의 경험”을 대조한다. 좌우 어느 쪽 정부도 식품 절약을 독려할 수 있는 부가 가치세 부과 같은 조치를 선뜻 고려하지 않고 있다. (p.82)
피셔가 마다가스카르 원정을 개시한 뒤로 수십 년간 삼림 벌채가 가속화되어 왔다. 오늘날 온전히 남아 있는 원시림은 겨우 10퍼센트에 불과하다. 피셔는 “50년 뒤에 마다가스카르에 숲이 남아 있을 거란 생각이 안 듭니다.”라고 말한다. 애리조나대학교 곤충학 교수이자 개미집 딱정벌레 전문 연구자인 웬디 무어는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이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는 우리 분야 연구자들 모두 그렇게 느끼죠.”라고 강조한다. 많은 곤충이 단일한 식물 종에 서식하며 생존하고 있기 때문에 삼림 벌채로 인해 벌어지는 참혹한 손실은 상상할 수 없이 크다. “특정 형태의 숲이 사라지면 수천, 수만, 어쩌면 수십만 종이 사라지게 돼요.” 어윈이 말했다. “삼림 벌채는 알려지지 않은 수백만 종의 생물을 제거하고 있습니다.”
종 차원에서 곤충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는 여전히 정확히 모르고 있다. 하지만 개체 수의 측면만 봐도 현재 우리는 위기 한복판에 있다. 많은 종류의 곤충이 여전히 버티고 있긴 하지만, 전반적인 개체 수는 무자비하게 줄어들고 있다. 독일에서 지난 35년간 다수의 장소에서 포획한 날아다니는 곤충의 수를 추적해 새로이 얻어 낸 데이터는 수많은 경고의 징후 중에서도 특히 우려스럽다. 파리의 프랑스 자연사 박물관 소속 학자인 클레어 레니에의 추산에 따르면 우리에게 알려진 13만 종의 무척추동물이 지난 4세기를 거치는 동안 이미 사라졌을지 모른다고 한다. (p.98-99)
그들이 연구하는 많은 생물 종과 마찬가지로, 분류학자들 또한 현재 소멸의 위기에 처해 있다. 관련 교직원 채용, 박물관 취업, 정부 지원금 모두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소수의 학생만이 이 분야로 들어온다. 분류학은 한물갔고 지적으로도 힘들지 않은, 과학계의 우표 수집과 다를 바 없는 학문으로 치부된다. 대신에 DNA, 단백질, 개별 세포 내의 화학적 과정을 다루는 분자생물학이 교과 과정을 장악하며 연구 지원금을 쓸어 담는다. “대학 수업이 죄다 그쪽으로 쏠리고 있어요. 자금 지원도 그렇고.” 테리 어윈의 말이다. (p.105)
20년 동안 한 가지 아과의 딱정벌레를 연구해 온 캘리포니아대학교의 키플링 윌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날아온 샘플 상자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그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겁니다. 설명되지 않은 자료들이 너무 많아요. 지금 이 수준까지 도달하는 데만도 수십 년이 걸린 일입니다.” 어떤 종을 연구하건 간에 제대로 해부하고, DNA를 검사하고, 근친종과 비교하면서 새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해야 한다. 그러나 이때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정리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매년 새로운 무척추동물이 너무 많이 발견되다 보니 분류학자들이 연구 출간 기념 파티를 몇 년, 심지어 수십 년 동안 줄 서서 기다리는 게 흔한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일을 계속해야 할까? 무척추동물에게 닥친 불길한 운명을 걱정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무척추동물은 생태계의 중추로서 우리 행성의 심장, 폐, 소화 기관처럼 기능한다. 독특한 생화학적 특성을 지닌 무척추동물을 이용해 상당수의 질병을 치료할 수도 있다. 최근 나새류에서 채취한 화학 물질이 항암제 용도로 미국에서 임상 시험을 거친 바 있다. 어떤 무척추동물은 살충제의 자연적 대체물로 활용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무척추동물이 다른 용도에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충분한 존재 의미를 갖게 될지는 분명치 않다. 그에 대한 대답은 에드워드 윌슨이 ‘생물에 대한 사랑(biophilia)’이라 일컬은 자질, 다시 말해 생명 세계에 갖는 심미적 태도 또는 열렬한 애정과 더 깊은 관계가 있지 않을까. (p.106-107)
무척추동물 분류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왜 자기 인생을 달팽이나 조개 같은 특정 형태의 곤충에 바치는지 물을 때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은 ‘아름다워서’이다. 그들의 눈은 자기들이 고른 속과 아강 앞에서 반짝거린다. 외골격에 무지갯빛이 은은히 도는 검정 딱정벌레로 가득 찬 상자 속 거주자들은 “다소 크지만 믿을 수 없이 아름답다.”고 기술될 것이다. 물론 이 딱정벌레들은 새끼손가락 끝마디 정도의 덩치다. ‘크다’는 표현은 상대적이다. 분류학자들은 작은 갯민숭달팽이가 꽉 차 있는 유리병에 둘러싸이면 달팽이들의 아름다움, 그러니까 다양하면서도 화려한 색깔, 형태, 행동 양식 등에 대해 쉴 새 없이 칭찬을 늘어놓을 것이다. 뉴욕시립대학교의 열대환경학 교수로 재직하며 나무를 파먹는 우드보어링 딱정벌레를 연구하는 에이미 베르코프는 미술을 공부하다가 곤충학으로 전공을 바꾼 사례다. 그는 그러한 선택의 이유를 묻는 질문에 “곤충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은 없거든요.”라고 답한다. 심지어 콧대 높기로 유명한 개미 전문가조차도 오랜 친구를 위해 아껴 둔 애정을 희귀 개미의 라틴어 학명과 바꿀 것이다.
껴안고 싶은 귀여운 동물에 관심을 기울이기는 쉽다. 조만간 우리는 최후의 마운틴고릴라가 사라지고 마지막 장수거북이 소멸한 세상에서 살아갈 것이다. 호랑이나 북극곰이 없는 지구는 참으로 슬픈 장소일 것이다. 하지만 도래하고 있는 무척추동물의 멸종에 대해 생각한다는 건 차원이 다른 손실을 직면하는 것과 같다. 수많은 종이 우리가 미처 그런 동물이 있다는 걸 알기도 전에, 심지어 그런 사실이 있다는 점에 대한 이해가 시작되기도 전에 소멸한다. 종은 그저 이름도 아니고, 진화 계보의 한 점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추상적인 DNA 배열도 아니다. 종은 식물과 동물, 토양과 공기 사이에 수천 년간 셀 수 없이 벌어진 복잡한 상호 작용을 암호화한다. 각각의 종은 그 안에 우리가 이제야 목도하기 시작한 행동 양식을, 실로 긴 세대에 걸쳐 연마된 화학적 비법을, 모방과 폭력, 모성과 폭발적 육욕으로 이루어진 세계 전체를 품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소멸하리라는 사실을 안다는 건 마치 불타는 도서관을 바라보며 거기서 책 한 권도 건지지 못하는 상황과 같다. 이러한 파괴 속에서 우리가 맡은 역할은 일종의 반달리즘(vandalism)이다. 종의 역사에 대해서도, 또한 우리의 역사에 대해서도. (p.107-109)
진정한 최초의 운동가, 활동적이고 명시적인 기후 변화 운동가는 오히려 회의론자들이었다. 기후 변화 회의론은 기후 과학만큼이나 오래된 것으로, 초기에는 정말로 합리적인 태도를 취했다. 뭔가 새로운 것이 제시될 때 과학자들이 미심쩍게 눈썹을 치켜올리는 건 정상적인 일이다. 석유 산업은 이 자연 과학적 회의론을 받아들이고 유리하게 써먹었다.
하지만 1980년대에 접어들어 온실 효과에 대한 의견 일치가 확고해지면서 회의론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에 대한 의문을 부풀리고 확장하면서 기후 변화에 관한 경고를 묵살하고, 사람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끄도록 회의론을 조장하는 조직적이고 치밀한 책동이 등장했다.
그건 과학이 아니었다. 설사 과학자를 이용한다 해도 과학은 아니었다. 그것은 ‘홍보’였다. 그게 꼭 가짜 과학을 창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통할 수는 있었겠지만, 어느 정도까지만 가능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진짜 과학자에게 자금을 대겠지만 바로 그런 방법으로 메시지를 혼란스럽고 흐릿하게 얼버무릴 수 있었다. 그들은 1940년대에도 대기 오염을 가지고 이런 방법을 써먹은 바 있고, 그들이 고용한 홍보 회사들은 담배와 암의 연관 관계에 대한 문제로 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몇 가지 교묘한 수법을 발견해 냈다.
주요 석유 회사의 최고 경영자들은 회합을 열고 기후 정책에 대응할 수 있는 기금을 모으기로 합의했다. 우선은 10만 달러였지만, 이후 더 늘어날 것이었다. 상당히 합법적으로 들리는 ‘세계 기후 연합’이라는 이름의 단체도 설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종류의 단체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환경 정보 위원회’, ‘냉정한 이성 협회’, ‘세계 기후 정보 프로젝트’, 그리고 점차 과학 냄새를 풍기며 회의론을 설파하는 목소리들이 불어났다. 빌 니렌버그는 거기서 특히 많이 모셔 가는 사람이었다. 기후 변화 논의를 미루려는 사람들은 과학적 논쟁과 정치적 논쟁에 참여하는 것이 최고의 전략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불확실성을 밀어붙이고, 규제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바로 그런 논쟁의 장이었다. 석유 연료 회사와 그들을 옹호하는 자들은 가끔 ‘반(反)과학’의 탈을 쓰기도 했다. 사실 그들은 늘 과학에 대해 이야기한다. 언제나 그래 왔다. 다만 어떤 부분을 취하여 써먹을 것이냐에 대해 전략상 다를 뿐이다. (p.131-132)
기후 위기의 역사에 대해 쓰는 동안 가장 힘든 부분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사이에 이미 나왔던 경고들과 마주하는 것이었다. 그 경고들은 만약 아무도 화석 연료에 대해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2000년 이후에는 상황이 정말로 나빠질지 모른다고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었다. 당시 그 경고를 보낸 이들은 희망을 품고 있었지만, 이제 와 그 희망을 다시 읽다 보면 마음이 아프다.
우리는 지금 조상들이 꿈꾸던 악몽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만약 우리가 이에 대한 비난의 몫을 나누려 한다면, 교묘하게 의심을 심은 자들이 맨 앞줄에 서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몇 세기에 걸쳐 형성된 과학 연구 문화도 충분히 들여다볼 가치가 있으며, 그중 일부는 업데이트가 되면 좋을 것이다. 의심을 퍼뜨리는 자들은 나름의 목적으로 과학에 긍정적인 힘을 보태기도 하나, 세대 갈등을 악화시키고 극적인 것을 회피하는 과학 공동체의 성향을 악용했으며, 누가 합법적인 정치적 파트너이고(이를테면 정부) 누가 그렇지 않은지(이를테면 활동가들)에 대한 관념을 조종하는 등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기후 변화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지금껏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왔다. 과학계에서 논쟁의 여지가 많은 학문 분야를 공공의 영역에 옮겨 놓았을 때 일어나게 될 여러 난관과 변화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충분한 예산이 전문가 즉, 과학자들에게 주어졌어야 했다. 정부로부터의 지원도 있었어야 했지만,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과학 공동체 내부의 게이트 키퍼도 필요했다. 하지만 외려 이 과학자 중 상당수는 동료들에게 비웃음을 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미디어에 출연하거나 감정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말이다.
21세기의 시민으로서 우리는 엄청난 규모의 혼란을 상속받았다. 하지만 또한 우리를 도울 수 있고 다른 이들을 살아남게 해줄 많은 도구도 물려받았다. 이 도구 중 가장 빛나는 별은 현대 기후 과학이다. 그 별을 따라 태양 전지, 열펌프, 정책 시스템과 활동가 단체가 반짝거린다. 우리 조상들이 공기를 보면서 그게 서로 다른 화학 물질들, 다시 말해 들이쉬거나 내쉬는, 불을 붙이거나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수 세기 동안 화학 연료를 태운 끝에 지구에 온난화 효과를 야기할 수 있는 화학 물질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그저 엷은 공기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게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기후 변화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우리에게는 행동에 나설 기회를 주는 지식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자리에 앉은 채 태평하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테니 말이다. “오늘도 또 날씨가 좀 이상하네.” (p.133-134)
존버씨의 죽음 / 김영선 / 오월의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신체에 상해를 입혔는데 그 상해가 죽음을 초래한다면, 우리는 그 행위를 과실치사라고 부른다. 만일 가해자가 자신이 입힐 상해가 치명적일 것을 사전에 알았다면, 우리는 그 행위를 살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회가 프롤레타리아 수백 명을 제 수명보다 훨씬 일찍 부자연스럽게 죽을 수밖에 없는 위치로 내몰 때, 즉 칼이나 총알 못지않은 폭력을 휘둘러 죽음으로 내몰 때, 수천 명에게 생활필수품을 빼앗고 그들을 도저히 살 수 없는 위치로 몰아넣을 때, 법의 완력을 이용해 그들을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묶어둘 때, 이 희생자 수천 명이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그런 상황이 지속되도록 허용할 때, 그럴 때 사회의 행위는 앞에서 말한 한 사람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틀림없이 살인이다. 그 살인은 실상을 감춘 악의적인 살인, 아무도 막아낼 수 없는 살인, 아무도 살인자를 볼 수 없는 데다가 작위보다 부작위에 가까운 범행이라서 희생자가 자연스럽게 죽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살인이다. 그렇지만 살인은 엄연히 살인이다.
위 글은 현재의 이야기도 한국을 염두에 둔 이야기도 아니다. 170여 년 전 영국의 이야기다. 하지만 과로죽음의 실태를 보면 주어를 21세기 대한민국으로 바꿔 읽어도 크게 어색하지 않다. 엥겔스가 “영국 사회가 사회적 살인(social murder)을 매일 매시간마다 저지르고 있고 노동자들을 건강을 유지할 수도 오래 살 수도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고 이 노동자들의 생명력을 조금씩 갉아먹으면서 그들이 무덤에 묻힐 시간을 앞당기고 있다는 것을 입증할 것이다”라고 밝혔던 것처럼, 과로+성과체제가 야기하는 사회적 살인을 규명하고 과로죽음에 이름을 붙이는 작업이야말로 우리에게 더욱 요구되는 바다. (p.14-15)
길지만 기사 몇 개를 나열해본다. “지난해 설 연휴 서울아산병원 故 박선욱 간호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약 1년 뒤, 이번에는 서울의료원 故 서지윤 간호사가 자살했다.” “2013년 초입부터 성남, 용인, 울산의 사회복지 공무원들의 자살 소식이 들려왔다.” “A씨 사망 4일 뒤인 2015년 12월 28일. 서울시청 공무원 B씨가 또다시 투신자살했다.” “최근 10년(2008~2017년) 동안 집배 노동자 166명이 숨졌는데, 사망 원인은 암(55명), 뇌심혈관계질환(29명), 교통사고(25명), 자살(23명) 순이었다. 특히 2017년 자살한 집배 노동자는 6명으로 사고사(6명), 질병사(7명)와 엇비슷했다.” “지난해부터 올해 현재까지 21명의 택배 노동자가 사망했고, 그 원인이 모두 과로로 추정된다는 얘기다.” “택배 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는 롯데택배 운중대리점 소속 택배기사 임모씨가 전날 뇌출혈로 쓰러져 의식 불명 상태에 빠졌다고 밝혔다.”
벼락 맞는 일은 매우 예외적이고 우연적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연(coincidence)에 가까운 일이라 하더라도 벼락이 특정한 장소와 조건에서 반복 발생한다면(구체적인 상황), 그 특정 장소에서의 노출 위험으로 발생한 사고는 더 이상 우연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그 구체적인 상황에 노출되지 않았더라면, 벼락 맞을 우연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벼락 맞는 일이 우연적 사건이라 하더라도 ‘특정 장소에서’ 반복되어 일어난다면 그것은 필연(inevitability)일 가능성이 크다. (p.28-29)
2015년 12월 25일 일본을 떠들썩하게 했던 덴츠 신입사원(24세)의 자살 사건에서, 그가 생애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를 보자. “이제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하다. 자고 싶다는 생각 말고는 감정이 다 사라졌다. 매일 다음 날이 오는 게 무서워 잘 수 없다. 살기 위해 일하는지, 일하기 위해 사는지 모르겠다. 모든 게 다 무너져버린다.” 한 달 초과근무만 100시간이 넘는 과로와 실적 쥐어짜기가 그의 마음과 몸을 어떻게 사막화했는지를 실감케 한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정도의 고통을 호소하는 통증 환자의 상태도 존버씨의 질식 상태를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건 아닌가 싶다. ‘칼에 베인 듯한’ ‘둔기로 맞은 듯한’ ‘끓는 물에 데는 듯한’ ‘(손을 써도) 도통 진정되지 않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이런 걸 계속 겪어야 해서 두려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더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심한’ ‘죽고 싶다. 너무 힘들다’는 고통 말이다. ‘왜 하필 나에게’라는 반문을 수도 없이 홀로 되뇌면서!
그런데 과로의 고통과 자살 간의 연관성을 밝히는 일은 만만치 않다. “여러 다양한 원인이 있을 텐데 어떻게 과로로 특정할 수 있겠느냐” “증거 있으세요”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놀랍지만 ‘개인 자유의지의 행위(act of free will) 아니냐’는 반문도 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경우 개인적인 것, 우연적이고 예외적인 것, 갑작스런 일로 처리되기 부지기수다. 특히 기업들이 ‘영업비밀 보호’란 이유로 출퇴근 기록 같은 정보를 비공개하는 경우, 죽음을 관통하는 구조적이고 누적된 과로위험과의 연관고리를 찾는 건 더 어려워진다. 영업비밀은 죽음을 은폐하는 또 다른 마법의 언어다. 정보의 불평등한 조건이 죽음의 원인을 개인적인 것으로 환원하고 켜켜이 쌓여온 폭력성의 산물임을 은폐해버린다. 영업비밀 보호 논리는 업무상 질병의 연결고리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자본의 대표적인 화법이다. 이는 또한 강력한 자본의 무기이기도 하다. ‘(개인의) 자유의지’ 설과 ‘영업비밀’ 논리는 이렇게 서로를 강화한다. 자살 사건 자체도 문제지만, 사건을 사건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주변화하는 기제가 만연한 현실 그 자체가 비극이다. (p.39-40)
2021년 5월 말 부산의 한 보건소에서 코로나19 대응 업무를 맡던 7년 차 간호직 공무원(33세)이 자신의 아파트에서 투신했다. 망자는 자신의 담당이 아닌 집단감염 요양병원의 코호트 격리 업무를 맡는가 하면 본인의 순서가 아닌데도 업무에 투입되는 등 과도한 업무에 시달려왔다. 초과근무만 한 달 80시간이 넘었고 거의 주 7일 일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며 한 달에 두세 번밖에 쉬지 못했다고 한다. 결혼 1년 차였던 망자는 자살 며칠 전에도 업무 부담이 크고 끝이 안 보인다고 호소한 상태였다. 과로자살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담양군 보건소 공무원(57세)은 코로나19 이후 감염병관리담당으로 보직을 변경하면서 급증한 업무로 주말에도 쉬지 않고 출근하다 돌연사했다. 과로사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코로나19 초기에도 공무원 과로사는 연이어 발생했다. 코로나19에 따른 비상 상황으로 주말에도 출근해야 했던 전주시 공무원(43세)과 성주군 공무원(47세)이 2020년 2월 말 3월 초에 연이어 과로사했다. 비상근무로 20여 일간 하루도 쉬지 못하면서 쓰러졌다 현장으로 복귀하기도 한 포항시 북구보건소 감염관리팀장(53세)의 사례 또한 과로사 위험에 노출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코로나19 관련 업무를 총괄관리하던 합천군 공무원(56세)도 과로로 사망했다(2020년 4월 말). K-방역모델이 국제표준으로 추진될 만큼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사실상 공무원 과로사는 가려졌다. 공무원 과로사는 재난 때마다 반복됐던 문제로 예견되는 바였다.
재난 시기의 공무원 과로사는 금번 코로나19 때만의 문제는 아니다. 되짚어보면, 기후위기로 인한 폭염 속에서 병충해방제 지도 업무를 담당하던 공무원(49세)이 열사병 증세를 보이다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제는 매년 발생하다시피 하는 동물 전염병 시기에도 방역 공무원의 과로사가 반복됐다. 2017년 6월 포천시에서 가축방역관으로 일하던 수의사(51세)가 AI 방역 업무를 담당하던 중 급성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또한 2020년 3월 말 파주시에서 수의사로 일하던 주무관(52세)은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어떤 때는 하루 20시간씩 일하기도 하고 거의 매일 사무실에서 숙식하며 방역 업무를 담당하던 중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쓰러졌다. (p.187-188)
2020년 고용노동부를 대상으로 한 국정감사에서는 노예처럼 혹사당한 이주노동자의 노동인권 침해가 주목됐다. 국감 증인으로 참석한 한 이주노동자는 “하루 평균 15시간 일했다. 쉬는 날이 딱히 없었고 설날 하루 정도 쉬었다”고 한다. 이에 회사 관계자는 인권유린은 없었으며 저임금 장시간 노동은 사실과 다르다며 반박했다. 그렇지만 매해 발생하는 7000여 건 이상의 재해와 100~130여 건 가량의 사망 사고(〈외국인 노동자 산업재해 현황〉)는 만연한 노예노동을 현시한다.
이주노동자의 노예노동에 대한 문제제기는 1990년대 중반부터 이주단체나 이주노조의 실태조사는 물론 국제앰네스티나 국가인권위원회의 몇 차례에 걸친 조사 보고서 그리고 최근의 인권 실태조사나 국정감사 현장에서도 반복되는 바다. 코로나19나 기록적인 폭우·한파·폭염 때문에 갑작스레 도드라진 문제가 아니란 얘기다. 예외·우발 관점은 이주노동을 가로지르는 누적된 비참의 역사성을 간과한다.
노예노동을 방조하는 고용허가제를 폐지하고 이주노동자의 기본적인 노동권과 인간 존엄성을 보장하는 노동허가제(사용자에게 고용을 허가하는 방식이 아닌 이주노동자에게 노동을 허가하는 방식으로!)를 실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오랫동안 계속되어왔다는 걸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무권리 상태의 노예 같은 삶’에 대한 문제제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비가시화되(고 있)는 고통을 이주노동자 스스로의 목소리와 언어로 발화할 수 있도록 노동권과 시민권을 부여하는 권리 조치가 더욱 요망되는 시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노예노동의 상태가 코로나19, 기후위기라고 일컫는 폭염, 폭우, 한파 등의 예외적인 그렇지만 더 이상 예외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 조건 속에서 한층 심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p.202-203)
“오늘은 몸이 세 개, 머리가 두 개였어야 했다. 내일은 몇 개가 필요할까?” 2019년 2월 설 연휴 근무 중에 돌연사한 윤한덕(51세) 국립중앙의료원 응급의료센터 센터장이 생전에 올린 페이스북 글은 2~3인 몫의 업무를 한 명이 감당해야 하는 노동 현실을 직설한다. 과도한 업무량을 ‘헌신’, ‘사명감’, ‘책임감’의 지표로 삼는 모습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 같은 업무 부하는 만성화되어 있던 것이라 말할 수 있을 만큼 보건의료 현장의 일상 풍경이다. 상시적인 인력 부족의 단면이다. 그의 죽음은 아프리카 같은 ‘그간의’ 노동 현실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다.
비슷한 시기 발생한 전문의, 간호사, 간호조무사의 자살, 돌연사도 마찬가지다. 관행화된 폭력인 ‘태움’으로 빚어진 박선욱 간호사의 자살(2018.2.16.), 직장 괴롭힘으로 인한 서지윤 간호사의 자살(2019.1.5.), 당직근무 중이던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의 돌연사(2019.2.1.), “동료들의 괴롭힘 때문에 힘들다. 따돌림도 당해 정신과 치료까지 받고 있다”는 유서를 남기고 투신한 간호조무사 실습생의 자살(2019.1.13.), 대형병원 중환자실 남자 간호사의 한강 투신(2018.10.)까지 이어지는 죽음의 행렬.
일련의 죽음은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일 수 있다. 사건별로 원인이 다양할 것이다. 그런데 서로 연관된 공통의 원인이 관통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죽음이 반복된다. 개별 사건의 특수성으로만 해석되지 않는 사건 간의 공통성은 없는지 질문해본다면? 죽음의 반복성은 죽음 뒤에 똬리를 틀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가리키고 있다. 개별 죽음을 가로지르는 그 공통분모는 인력 부족 문제와 맞닿는다는 점. 인력 부족을 상수로 하는 자본의 저비용 전략이 우발적으로 보이는 일련의 죽음을 관통하는 구조적이면서 동시에 누적된 원인임을 가늠케 한다. (p.206-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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